소설리스트

93화 (93/427)

* * *

“와….”

이아름은 서한율의 SNS에 올라온 사진을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율이 오빤 진짜 쉬질 않는구나….’

새하얀 눈으로 뒤덮인 아름다운 산. 겨울 등산복장을 모두 갖춘 서한율이 눈밭에 주저앉은 채 굉장히 지친 얼굴로 시선을 멀리 던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모습은 컨셉이었다는 듯, 환하게 웃으며 찍은 사진이 이어졌다.

‘오늘 아침에 찍은 거면… 지금이 밤 9시니까 벌써 서울로 올라왔거나 올라오는 중이겠네?’

서한율에게 잘못을 저지르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지만,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팔로우한 어스래빗과 서한율의 홈마 SNS 계정들. 그리고 공홈에 기재된 스케줄에 따르면, 서한율은 최소 한 달간 제대로 쉰 날이 하루도 없었다.

드라마 스케줄이 일찍 끝나도 회사에 가서 자정이 지나야 나오고. 심지어 이삿날에도 새벽에 이사를 마치고 촬영장으로 향했다. 이번엔 기껏 드라마 촬영이 끝났다 싶더니, 바로 제주도로 여행 가서 한라산 등반.

‘난 쉬는 날엔 그냥 침대에 늘어져서 오빠들 영상이랑 웹드만 보는데…. 이런 거 보면 정말 율이 오빠가 다재다능하고, 꽃길을 곧게 걷는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하고….’

그러면서 이아름은 처음 서한율을 본 2년 전을 떠올렸다. 서한율이 열일곱 살, 자신은 열네 살이었다. 그땐 어떻게 그렇게 뻔뻔하게 웃으면서 다가가 선물을 건네줬는지.

‘지금 생각하면 참 용감했다….’

그때였다.

“응?”

어스래빗의 홈마 중 한 명인 ‘지구뿌수는토끼’가 새 SNS를 올렸다. 라이언의 SNS를 캡처한 이미지와 함께.

[몰카 탐지기 선물해준 팬 분! 고마워요! :D 유용했어요!]

[ㄴ제주 여행 가서 무슨 일을 겪은 거람... 그래도 도움이 됐다니 다행이야..8ㅅ8]

이아름은 미간을 찡그린 채 고개를 기울였다.

“으으으음…?”

오시죠

라이언의 SNS로 인해 어스래빗 팬들 사이에선 때아닌 혼란이 빚어졌다. 몰카 탐지기를 선물해준 게 어스래빗을 따라다니며 사진을 찍는 홈마란 것도 신기하고, 그걸 제주 여행을 가며 챙겨간 라이언도 신기하지만, 대체 어쩌다가 몰카 탐지기가 유용하게 사용되었다는 것인지.

팬들이 라이언의 SNS에다 댓글로 물어보자, 라이언은 작년 크리스마스이브 때 길우성과 함께 찍었던 사진을 올렸다. 라이언은 산타, 길우성은 루돌프였다.

[비밀! :-X]

* * *

“어제저녁에 사서 가지고 올라오자마자 냉동시켰으니 괜찮을 거예요.”

제주도에서 올라온 다음 날인 월요일 저녁. 한율은 일식당의 개별실에서 만난 민준에게 작은 아이스박스를 내밀었다. 민준이 활짝 웃으며 차가운 아이스박스를 끌어안았다.

“고마워, 잘 먹을게.”

개별실에는 지난번에도 함께 만난 이들이 다 있었다. 차남석, 길우성, 수재, 배우 김재신.

“선배님이 떡 좋아하는지는 몰랐네요.”

“체중 관리하느라 자주 못 먹어서 그렇지, 엄청 좋아해. 떡볶이도 그렇고.”

수재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이제 입대하면 살찔 일만 남은 거지.”

길우성이 쓸쓸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선배님들 정말 군대 가시는구나….”

“조금 더 활동하다가 가도 늦지 않잖아요.”

“더 늦으면 훈련을 제대로 못 따라가서 민폐가 될 것 같아서 그래. 그리고 요즘은 군 복무 기간도 예전처럼 길지도 않고.”

수재의 말에 민준이 동감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김재신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면서 나한테도 같이 가자고 막 꼬드기더라. 무슨 물귀신인 줄?”

“너도 요즘 슬럼프 같다면서. 혹시 알아? 군대 경험이 네 배우로서의 마음가짐이나 경험치를 확 늘려줄지? 안 그러냐, 한율아?”

“뭐든 다양하게 경험하고 배우는 게 좋을 것 같긴 해요.”

데뷔하자마자 인기가 아닌 연기실력 하나로 드라마의 주연 자리를 따내고, 곧 독립영화도 찍는 전도유망한 후배의 말에, 김재신은 망연한 얼굴로 시선을 멀리 던졌다.

“그래도 왠지 군대를 다녀오면, 지금 나이에만 발산할 수 있는 젊음의 풋풋함이 왕창 깎여 나갈 것 같은 두려움이 덮쳐온단 말이다….”

“몰랐구나? 너 그런 거 옛적에 풍화돼서 사라진 지 오래야. 없는 걸 왜 미련하게 붙잡고 있어.”

“하… 서럽다….”

“듣고 있냐?”

“전 듣고 싶은 말만 듣습니다….”

“답정너 새끼.”

“아, 그러고 보니.”

그제야 안고 있던 아이스박스를 옆에다 내려놓으며 민준이 한율에게 물었다.

“아깽이들 슬슬 분양 보낼 시기 아니야? 애들 다 건강하지?”

“네.”

한율은 모친이 보내준 똑순이 새끼들 영상을 핸드폰에 띄워 보여주었다. 새끼고양이 4마리가 한 데 뒤엉켜서 서로 머리끄덩이를 잡아 발로 팍팍 걷어차고, 앞발을 휘두르는 등 레슬링 놀이를 하는 영상이었다.

민준이 감동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 세상의 귀여움이 아니야…. 입대만 아니면 한 마리는 내가 데려가는 건데.”

“혼자 사는 바쁜 사람한텐 안 보내요.”

“너무해…. 그럼 보낼 곳은 정해진 거야?”

“한 마리는 똑순이를 위해서 남겨두기로 하고, 세 마리 중 하나는 사촌 누나 집에 가기로 했어요. 나머지 두 마리는 아직 좋은 곳 찾는 중이고.”

길우성이 미련이 철철 남는 눈으로 중얼거렸다.

“숙소….”

“안 돼.”

“고양이가 그렇게 좋냐?”

“귀엽잖아! 그리고 왠지 모르게 신비로운 매력이 있어.”

민준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웃었다.

“도도한 얼굴로 멍청한 짓을 저지를 때 정말 귀엽지. 가령, 숨는답시고 머리만 박스 안에 집어넣는 거 보면.”

“잡아서 들어 올릴 때 길게 쭈욱 늘어나는 것도 웃기지 않아요?”

민준과 길우성이 고양이를 주제로 신나게 떠드는 동안, 한율은 김재신에게 김재신이 최근 조연으로 출연했던 드라마 제작업체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차남석은 수재와 해외 콘서트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그런데 너희 다음 앨범은 언제 나와?”

“일단 여름으로 잡고 있어요.”

“여름이면 청량 컨셉? 너희들 보다 더 청량하게 쭉쭉 뻗어나가는 곡 하면 지금보다 크게 터질 것 같은데.”

“그러잖아도 오늘 앨범 컨셉 회의에서….”

“우성아?”

신나게 떠들려는 길우성을 차남석이 나지막하게 부르며 씩 웃었다. 길우성이 아차 하면서 입을 닫았다.

앨범 발매 예정 시기야 스케줄을 잡기 위해 미리 방송국에다가도 알리는 정보이니 그렇다 쳐도, 구체적인 컨셉은 엄연히 영업 정보였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 할지라도 함부로 발설해선 안 되는.

그러나 민준과 수재는 다른 데에서 놀란 표정이었다.

“너희들 컨셉 회의에도 참여해?”

“멤버 전원 다?”

“네, 지난 싱글앨범부터.”

“와….”

잠시 서로를 쳐다본 민준과 수재가 한율과 차남석, 길우성을 돌아보았다.

“너희 팀에서 작곡 작사하는 멤버가 유호랑 트레리안 두 친구, 해서 셋밖에 없잖아. 그런데도 전원 컨셉 회의에 참여시킨다는 건….”

“떠비 진짜 대박이다. 우리는 3년 차 됐을 때 조르고 졸라서 겨우 참여하게 됐는데.”

3년 차면 블블이 본격적으로 뜨기 시작했을 때다.

“후….”

길우성이 으쓱거렸다.

“오시죠.”

“미안, 군대 크리.”

“계약하고 바로 입대하면 죄송하잖아.”

“그리고 애초에, 이 두 사람이 가고 싶다고 해서 갈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아?”

“김재신, 새우튀김 압수.”

“아, 다 큰 어른이 유치하게. …좋은 말로 할 때 놔라?”

그들과 헤어지고 회사로 돌아온 건 8시가 조금 지났을 무렵이었다. 어스래빗 전용 연습실로 들어가, 스트레칭을 하는 멤버들 사이에 끼었다.

“맛있는 거 먹었어?”

“일식집에서 코스 요리 먹었는데, 써한은 회 한 점 안 먹음요.”

“…왜 간 거야?”

“회 말고 다른 요리도 많이 나오던데요.”

“내일.”

유호가 소리를 높이며 한율과 길우성, 차남석에게 말했다.

“회사에서 촬영 잠깐 할 거야.”

“우리도 찍어요?”

은 뮤닷에서 준비 중인 아이돌 서바이벌 프로그램이었다. 일정 순위권에 든 연습생들을 모아 프로젝트팀을 만든다고 했던가.

“그 프로그램에 나가는 우리 연습생 애들한테 응원하고 조언해주는 모습만 간단히.”

“네.”

단체안무 연습은 10시까지. 드라마 <별☆일없는 집>이 방영되는 시간이었으나, 한율은 드라마 모니터링을 뒤로 미루고 샤워를 했다. 그러고 나서 향한 곳은 회사에서 제일 넓은 보컬 연습실. 같은 보컬 라인인 유호와 차남석, 박가람과 함께였다.

유호가 피아노 앞에 앉아 손가락을 풀었다.

“다들 목 상태 괜찮지?”

“넵.”

“가사 숙지는 다 했고?”

박가람이 영어가 잔뜩 적힌 가사지를 팔랑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옛설.”

“시작한다.”

유호의 손가락이 움직이며 감미로운 피아노 선율이 은은하게 퍼졌다. 이틀 후인 밸런타인데이를 기념해서 그라에 올릴 팝송 커버 연습이었다.

세간에선 기업의 상술에 놀아나는 날이라며 욕해도, 밸런타인데이 시즌이 다가오자 팬들이 보내는 선물이 평소보다 3배로 늘었다. 편지도 마찬가지. 그러니 그들의 사랑을 먹고 사는 아이돌로서도 마땅히 보답해야 하는 날.

“그런데 다른 멤버들, 시간 제때 맞출 수 있을까?”

연습을 끝낸 뒤 박가람이 물었다.

랩과 퍼포먼스 라인인 이건우와 강보배, 라이언, 길우성은 14일에 라이브방송으로 초콜릿을 만들기로 했다. 보컬 라인의 노래 커버 영상이 올라가기 정확히 1시간 전에.

“못하면 잘리는 거지, 뭐.”

“미흡해도 그 미흡한 모습까지 귀엽다고 봐주시니 괜찮지 않을까요.”

어느덧 자정이 지난 시간. 멤버들은 매니저들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숙소로 돌아왔다. 숙소는 공기가 훈훈하여 따뜻했다.

“핸드폰으로 미리 집의 보일러를 켤 수가 있다니. 참 좋은 세상이야.”

“그럼 다들 안녕히 주무시오.”

한율은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침대에 누운 후에야 오늘 방송된 <별☆일없는 집> 9회를 VOD로 보았다. 핸드폰이나 사과패드가 아닌, 침대 맞은편에 걸린 벽걸이 TV를 통해. 이건 한율이 따로 산 물건이었다.

[…나왔네? 아침까진 안 올 것처럼 굴더니.]

[왜 솔직히 말을 안 해서 사람을 멍청이로 만들어.]

드라마는 스토리의 중반을 넘어가고 있었다. 형제들이 그동안 쌓였던 오해를 풀고 조금씩 서로에게 마음을 여는 평화로운 단계.

‘태바다’가 ‘태산’이 대신 신청한 영어 토론대회에 모습을 드러냈다.

지난 화에선 그걸 왜 네가 멋대로 신청하냐고 태바다가 난리를 쳤으나, 태바다가 영어 토론대회 본선에 오를 시 학교에서도 피아노 연습을 할 수 있도록 태산이 학교 측과 거래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잠시 고분고분해진 상태였다.

[날 밑도 끝도 없이 짜증만 내고 반항하는 중2병 환자로 만들어서 좋겠다?]

[그래, 완전 좋아서 웃음이 절로 나온다.]

우여곡절 끝에 새로운 극단에서 새로운 기회를 얻게 된 태하늘은, 무대 사고로 인해 딜레이 된 극을 마치고 아슬아슬하게 영어 토론대회장에 도착한다. 그리고 ‘가족과 인권’에 대해 즉흥 토론을 펼치는 태바다의 모습을 보며 희미하게 미소를 짓던 그 순간,

[……!]

대회장 구석에 있는 누군가를 보고 놀라는 태하늘의 얼굴이 클로즈업. 태바다의 유창한 논설 소리는 줄어들고, 무겁고 긴장감 넘치는 음악이 흘러나오며 9회가 끝났다.

한율은 인터넷으로 9회 반응을 살폈다.

-마지막에 나온 사람 누구?

-형제들 부모님 사고 조사했던 형사요. 엄마랑 아빠가 비슷한 시기에 연달아 사고로 죽은 게 의심스럽지 않냐고 캐려다가, 소설 쓰지 말라고 팀장한테 까인 사람

-흐뭇하게 보다가 갑자기 급불안해짐;;

-아... 씨... 진짜 태하늘이 범인 아니겠지?

ㄴ사고 났을 때 하늘이 연극 연습 도중이었잖아요

ㄴㅈㄴ 소름인 게... 태하늘 초반에 강제 하차한 연극, 보험금 때문에 가족 간에 살인을 계획하는 블랙코미디임. 실제로 있는 작품ㅇㅇ

ㄴ??? 그게 나왔어요?

ㄴ1회 다시 보다가 봤는데 진짜 한 0.3초? 스쳐 지나간 연극 대본 제목이 그거였음

ㄴㅁㅊ;;

ㄴ근데 얘네 정작 탄 보험금 0보다 마이너스인데?

ㄴ그거 하늘이가 혼자 그렇다고 말한 거지, 산이도 실제로 보험금 관련 객관적인 자료를 살핀 적이 없는 것 같아요ㅇㅇ 새아빠도 엄마 장례 뒤로 산이 피해 다닌 것도 수상하고

-서한율 영어 본토 발음 쩔어.. 계속 듣고 싶은데ㅜㅜ

-장남 연기 갈수록 찰떡이넹

-그냥 모든 게 다 연출로 그럴싸해 보이는 해프닝이고, 삼형제 평생 행복했으면 좋겠다ㅠㅠ

-이 드라마는 형제들 티키타카 자체가 좋다.. 연기구멍 없고 비주얼도 좋아서 그냥 흐뭇하게 얼굴 구경만 해도 재밌음ㅎㅎ

ㄴ에라이

초반에 스타믹스의 지헌 캐스팅을 두고 우려와 불만을 표했던 여론은 어느새 잦아든 상황.

‘시청률은 초반보다 아주 조금 올랐을 뿐이지만.’

첫 회 시청률은 4.4%, 지난주 8회 시청률은 5.2%. 그래도 케이블에서 이 정도면 괜찮은 수준이었다. 다른 드라마에 비해 제작비가 그렇게 많이 든 편도 아닌데다 협찬도 곧잘 받았으니.

한율은 어느새 새벽 2시를 가리키는 시계를 보곤 핸드폰 전원을 가볍게 눌러 껐다. TV도 끄자 어둠과 적막이 찾아왔다.

‘내일은 뮤닷 프로 촬영과 노래 커버 영상 촬영하고… 저녁엔 <고양이 난로> 배우들 첫 미팅 겸 식사….’

내일 일정을 하나둘 떠올리던 한율은 어느새 깊은 잠에 빠졌다.

* * *

곱게 화장을 마친 이희우는 거울 속 자신을 보며 진지한 고민에 빠졌다.

‘뭐 입고 가지?’

2시간 후, 다음 달 크랭크인 예정인 영화 <고양이 난로>의 첫 미팅 겸 식사 자리가 있었다. 감독인 부윤방이 주관하는 비공식적인 자리라 모이는 배우는 주인공인 서한율을 비롯해 5명뿐.

‘어차피 저녁을 먹는 장소도 고깃집이겠다, 신경 써서 잘 보이고 싶은 남자도 없으니… 편하게? 아냐, 그래도 내 가수 겸 전도유망한 후배도 나오는 자린데 후줄근하게 입고 갈 순 없지. 오늘 처음 만나는 후배도 있고. …이윤영이라고 했던가?’

고민하며 드레스룸으로 향할 때였다. 핸드폰 벨 소리로 지정해둔 어스래빗의 <있어> 노래 후렴구가 거실에서 흘러나왔다. 그 노래를 듣자 의식의 흐름대로 떠오르는 생각.

‘한율이 만나면 같이 사진 찍고 SNS에 올려서 자랑해야지.’

이프림 보아라. 내가 바로 성덕이다.

이희우는 이프림의 반응을 예상하며 웃다가, 핸드폰에 뜬 이름을 보곤 미간을 찡그렸다.

[오지원]

2년 전, 함께 OSN 드라마 <수의형사>를 촬영한 뒤로 자꾸 이성적인 거리를 좁히려 했던 배우.

최근엔 좀 잠잠하다 싶더니.

“…어.”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오지원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야아! 이희우! 지원이 전화는 받냐?!]

“…….”

이희우는 순간 쌍욕이 튀어나오려던 입을 다물었다.

술에 거나하게 취한 듯한 이 목소리는 배우 윤승권이었다.

-[이러면 오빠가 섭섭해요, 안 섭섭해요?! 응? 왜 내 전화는 차단하고 이놈 전화는 받는 건데에!]

저녁 시간이 되기 한참 전부터 술 처먹고 전화질이라니.

이희우는 천천히 심호흡한 후 친절한 어조로 말했다.

“통화녹음 설정됐으니까 말 가려서 하는 게 좋을 거다, 이 변태 새끼야.”

오빠는 왜 TV에 나와?

<고양이 난로> 감독과 배우들의 비공식 첫 미팅 겸 식사 자리. 약속장소는 예전에 이제설이 한율과 박현우에게 밥을 사주었던 소갈비찜 전문식당이었다.

이 바닥 사람들이 선호하는 맛집인가? 가벼운 의문을 떠올리며 식당에 입장. 한율을 본 직원이 환한 미소를 지었다.

“부윤방 님 일행분이시죠? 자리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안내받은 자리는 파티션으로 나뉜 곳이 아닌, 4인용 테이블 두 개가 길게 붙은 널찍한 개별실이었다.

“왔어요?”

개별실 안에는 부윤방과 배우 이윤영, 강명일, 원성철이 먼저 와 있었다. 한율이 도착했으니 이희우 빼고 다 온 셈.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아직 약속 시간까지 13분 남았는걸요. 이리 와 앉아요.”

한율은 자리에 앉기 전, 가장 나이가 많으면서도 배우로서도 한참 선배인 원성철과 인사를 나눴다.

“안녕하십니까, 서한율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선배님.”

“하하.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그다음은 강명일과.

강명일은 <객귀> 시리즈의 6번째 에피소드 주인공을 맡았던 배우로, 그가 종방연에 불참했던 까닭에 이번이 첫 만남이었다. 그리고 <별☆일없는 집>에서 이제설이 사고로 하차하게 되었을 때 대체 투입될 배우로 거론되기도 했었다. 결국엔 되지 못했지만.

“서한율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선배님.”

“강명일이라고 합니다. <별☆일없는 집> 재밌게 잘 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윤영과도 인사를 나눴다. 종방연 이후 반년만이었다.

“오랜만입니다, 선배님. 잘 지내셨어요?”

“네, 덕분에요. 한율 씨 나오는 드라마 잘 보고 있어요.”

“감사합니다.”

부윤방을 마지막 순서로 둔 이유는 바로 한 시간 전에 통화로 먼저 인사를 나눴기 때문이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그가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전에 TV에 나온 고양이들은 잘 지내요? 똑순이라고 했던가?”

“네. 똑순이는 재활치료 꾸준히 받는 중이고, 새끼들은 슬슬 분양 보낼 곳 알아보고 있어요.”

“그럼 곧 <선데이 동물>에 나오겠네요?”

“방송 말고 선동 너튜브 채널 통해서 간단히 근황을 전하기로 했어요.”

“그것도 좋네요. 요즘은 방송을 챙겨보지 않고 관심 있는 클립 영상만 찾아보는 사람이 많으니.”

아직 한 사람이 오지 않았지만, 부윤방은 식당 직원을 호출해 식사 준비를 부탁했다. 그리고 약속 시간인 6시가 되기 1분 전, 이희우가 도착했다.

“주인공도 아닌데 마지막에 도착해서 죄송해요.”

“전혀 안 죄송한 것 같은데?”

“티 나요, 선배님?”

원성철과 장난스럽게 말을 주고받으며 이희우가 비어있던 한율의 맞은편 자리로 향했다. 그리고 강명일과 이윤영에게 웃으면서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이희우라고 합니다.”

강명일과 이윤영이 벌떡 일어났다. 두 사람은 이희우가 들어온 순간부터 바짝 긴장한 상태였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강명일이라고 합니다.”

“이윤영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선배님.”

“네, 저도 잘 부탁드려요.”

나도 일어나서 인사해야 하나. 그리 생각하며 한율이 막 자리에서 일어나려 할 때였다. 이희우가 맞은편 자리에 털썩 앉으며 한율을 향해 가볍게 손을 들었다. 자주 만나는 친한 사이처럼 친근하게.

“안녕, 한율아.”

안 일어나도 되겠네.

“안녕하세요, 선배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응. 거의 1년 만인가?”

“재작년 9월에 뵀으니….”

“나한텐 1년 만인데? 작년에 너희 데뷔 쇼케에 갔었으니까.”

“아. 그때 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이제야 인사를 드리게 됐네요.”

“고마우면 이따가 같이 사진 찍자.”

안 될 것도 없다. 함께 영화를 찍을 배우이기도 하고.

“네.”

“선배님 정말 어스래빗 팬이시구나.”

강명일이 조심스러우면서도 호감이 가득한 얼굴로 끼어들었다.

“하긴, 요즘 아이돌분들 보면 정말 못 하는 게 없더라고요. 춤도 잘 추고, 노래도 잘하고, 예능도 잘하고.”

부윤방이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고 한율 씨 기준으로 다른 아이돌을 보면 안 돼요, 명일 씨. 그럼 눈이 너무 높아져.”

“나 때는 가수들, 그냥 가볍게 율동하면서 노래 불렀었는데 요즘 애들은 그냥 막 열 명 넘는 인원이 척척, 동작 딱딱 맞추면서 춤까지 추면서 부르더라고. 그 누구였지? 작년에 빌보드에서 1위 했다고 한 남자애들. 딸내미 따라서 한번 TV로 봤는데… 와아, 잘 모르는 내가 봐도 입이 쩍 벌어지더구먼.”

“정말 대단한 선배님들이시죠.”

“우리 서 배우도 나중에 빌보드도 점령하고 할리우드도 진출해야지?”

이희우가 질색하는 얼굴로 원성철을 쳐다봤다.

“어우, 선배님 진짜 아저씨. 요즘 애들한테 그런 부담 주는 말은 하는 거 아니에요.”

“하하핫. 좀 꼰대 같았나?”

한율도 적당히 사교성 좋아 보이도록 미소 지었다.

“아닙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첫 미팅 겸 식사 분위기는 대체로 좋았다. 누구 하나 말이나 태도에 날이 서거나 고압적인 사람이 없었던 까닭이었다. 내성적인 성격인 이윤영이 대화에 잘 끼지 못하고 미소만 짓고 있으면, 원성철이나 부윤방이 의견을 물으면서 잘 어울리도록 유도하기도 하고.

“그거 알아요, 윤영 씨?”

“네?”

널찍한 냄비에 담겼던 소갈비찜이 어느새 바닥을 드러낼 때 즈음, 이희우가 이윤영에게 말했다.

“나 윤영 씨랑 한율이 나온 에피소드 열 번 넘게 봤어요.”

“정말요?”

“사실은 한율이 연기 연구 좀 하려고 돌려본 이유가 컸지만, 계속 보다 보니까 윤영 씨 연기도 점점… 음, 뭐라고 해야 하지? 두껍고 과한 귀신 분장 아래에서도 내면 연기를 참 잘한다는 게 느껴지더라고요. 그래서 솔직히 조금 걱정돼요.”

내 연기를 연구하기 위해서 열 번 넘게 봤다고?

한율은 놀란 눈으로 이희우를 봤지만, 도중에 끼어들진 않았다.

“윤영 씨 그때 귀신 역 정말 잘했다고 주목받았었잖아요. 지상파 토크 프로그램에도 나갔을 정도로. 하지만 이번 영화는 그만한 칭찬도, 주목도 받기 힘들 거예요.”

“아….”

이윤영을 불쾌하게 만들기 위한 비꼬는 말은 아니었다. 이희우가 진지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윤주’ 역이 <객귀>의 ‘소형’처럼 보기만 해도 사람을 놀라게 하고 시선을 끄는 귀신분장을 한 것도 아니고, 사람들이 흔히 ‘연기 정말 잘한다’라고 와 닿기 쉬운 격한 감정 씬도 드물잖아요. 그래서 사람들은 거슬리지 않는 조연, 딱 이 정도로 윤영 씨의 존재를 흘려보낼 거예요.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쉽게 잊히는, 연기 잘하는 수많은 조연처럼.”

“네….”

그제야 이희우가 걱정하는 점을 알아차린 이윤영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객귀>의 ‘소형’ 역으로 받았었던 관심과 호평을 이번에도 받지 않을까, 기대했다가 상처받지 말라는 뜻이었다.

“오해할까 봐 말하는데, 이건 윤영 씨보고 겸손하게 굴라는 거 절대 아니에요. 단순히 대중의 관심과 반응을 척도로, 섣불리 본인 실력을 스스로 후려치지 말라는 소리예요. 연기의 신이 무대에서 아무리 가슴 절절한 희대의 연기를 선보여도, 진짜 귀신이 하늘하늘 내려와서 막춤 추는 건 못 이기거든. 그러니 임팩트 강한 역을 했을 때보다 더 깊은 인상을 남겨야 한다는 부담도 갖지 말고…. 나 지금 너무 꼰대 같나?”

말하던 이희우가 아차 하는 얼굴로 돌아보자, 원성철과 부윤방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

“에이씨.”

“그래도 나, 희우 씨가 처음 만나는 후배한테 이렇게 살갑게 말해주는 거 처음 보는데?”

“왜 이러세요, 선배님. 나 연기 잘하는 후배는 늘 예뻐하거든요?”

“거짓말. 희우 씨 전에 제설이 하이힐 굽으로 찍어버리려고 했다면서. 일본의 무슨 시상식장에서.”

한율은 고개를 기울였다.

이희우와 이제설이 참석한, 일본에서 열린 시상식이라면.

“RMMA요?”

“음, 맞아. 그런 이름이었던 것 같아.”

이희우가 미간을 구기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거야 그놈이 사람 짜증 나게 만드니까 그랬던 거고.”

“들었지? 조심해, 후배님들. 희우 씨 성질 돋우면 하이힐 날아온다.”

“아무튼.”

짓궂게 웃으면서 놀리는 원성철을 무시, 이희우가 자신의 핸드폰을 이윤영에게 내밀었다.

“번호 줘요. 앞으로 친하게 지내자.”

이희우의 조언을 진지하게 곱씹던 이윤영이 뒤늦게 기꺼운 반응을 보였다.

“…네, 선배님.”

“선배님 말고 언니. 이참에 말도 편하게 놔도 되나?”

“물론이죠, 선배님…!”

“언니.”

“…언니.”

그 모습을 보던 한율은 문득 예전에 샵에서 만난 윤승권의 말을 떠올렸다.

『몰랐어? 내 친한 후배가 희우랑 같은 샵에 다니는데, 네가 <객귀>에 나간다는 얘기를 듣곤 자기도 나가고 싶다고, 너랑 같이 연기하고 싶다고 매니저한테 떼썼다던데? 그런데 임 PD님이 싹둑! 너님 너무 고렙이라 안 됨! 이라고 퇴짜 놨다는 이야기.』

『만약에 희우가 그때 걔 역할 뺏었어 봐. 너랑 같이 <고양이 난로> 캐스팅 라인업에 이름 올릴 수 있었겠어?』

혹시 이윤영에게서 좋은 기회를 빼앗을 뻔했다는 미안함 때문에 더 신경을 써주는 건가?

“아.”

그때 이희우가 강명일과 한율을 돌아보며 말했다.

“아무리 연기 잘해도 남자 번호는 안 따니까 너무 섭섭해하진 말아요.”

“네….”

“네.”

그날 밤, 이희우의 SNS에 <고양이 난로>의 부윤방 감독과 주조연 배우 5인이 함께 찍은 사진이 올라왔다. 한율과 단둘이 찍은 셀카와 어스래빗 시즌 그리팅 굿즈에 한율의 사인을 받은 인증샷도.

[이프림 보아라, 내가 바로 성덕이다. #달력에사인받아봤니]

-언니... 그저 부럽다는 말만 나오네요..ㅜㅜ

-아무리 이벤마다 어마무시한 후원금을 내는 언니라도 이건 용서 못해여엉어어어엉8ㅂ8어어어엉부러워미치게썽헝어엉

-이언니진짜...ㅠㅠ너무해

-괜찮아요 언니... 자랑하고 싶은 마음 이해해요...(훌쩍)

-율톢이 직접 생일 날짜에다 생축멘트를 미리 적어주다니!!!

-나 진심 율톢이랑 같이 연기하고 싶어서 진짜 열심히 공부 중인데 부질없는 짓이란 걸 뒤늦게 깨달았고

ㄴㅠㅠㅠㅠㅠㅠㅠ

-언니 그냥 팬심만 있고 그 외의 감정은 전혀 없다고 딱 한 마디만 해줘요(*꒦ິ⌓꒦ີ)네?

-이제 다음 달부터 영화 찍느라 자주 만날 텐데 벌써부터 이러시면... 사진으로 많이 자랑해주세요٩(ˊᗜˋ*)و 대리만족이라도 느끼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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