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2월 16일, 설날.
‘어스래빗’이란 보이그룹으로 정식 데뷔하고, 드라마나 예능 프로그램 등 여러 매체에 얼굴을 비추는 아이돌이 되어 맞이한 설. 그러나 한율을 대하는 조부모나 친척들의 태도는 여상했다.
사촌인 서한림은 진지한 얼굴로 엉뚱한 걸 물었다.
“나 네가 쓰는 화장품 쓰는데, 왜 피부가 너만도 못한 걸까? 역시 나이는 못 속이나?”
서한림은 올해 고작 23살이었다.
“술이랑 튀김류 끊고 매일 꾸준히 운동하면 돼요.”
“그걸 누가 몰라서 물어?”
“관리의 지름길은 부작용을 동반한 의학 기술밖에 없어요, 누나.”
“…지금 네 대답 듣고, 우리가 왜 안 친했는지 그 이유를 새삼 떠올렸다.”
외가 쪽도 마찬가지로 한율을 아무렇지 않게 대했다.
“오빠, 토끼 깎아줘!”
사촌 동생인 쌍둥이 자매도.
식탁에 앉아서 사과와 과도를 집어 드는데, 맞은편에 나란히 앉은 쌍둥이가 식탁에 팔꿈치를 세우고 턱을 괸 채 한율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런데 오빠는 왜 TV에 나와?”
“TV에 나오는 직업이라서 그래.”
“오늘은 왜 화장 안 했어?”
“TV에 안 나가는 날이라서 그래.”
“추석 땐 왜 안 왔어?”
“바빴어.”
“오빠 결혼은 언제 해?”
“안 해.”
“왜에?”
어린아이들은 뭐가 이렇게 궁금한 게 많은 걸까. 질문에 끝이 없다.
“할 사람이 없어.”
“생길 수도 있잖아.”
사각사각.
한율은 천천히 사과를 깎으면서 대답했다.
“생겨도, 못 만날 거야.”
숙소로 돌아왔을 땐 밤 9시가 조금 지났을 무렵이었다.
“후후후….”
“왔냐?”
“하하하…!”
소파에 편히 앉아 귤을 까먹으며 TV를 보던 길우성이 고개만 돌려 인사했다. 소파 구석에 앉힌 대형 곰 인형을 베고 누워있던 라이언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한율의 손에 들린 종이가방을 보며.
“그거 먹을 거야?”
종이가방 안에는 외조모가 손수 챙겨준 먹거리가 가득 담겨 있었다. 한율은 종이가방을 라이언에게 넘겼다.
“네. 살찌니까 적당히 드세요.”
“응!”
“으흐흐…!”
“가람이 형은 아까부터 왜 저래?”
박가람은 거실 구석에 놓인 실내 자전거에서 제자리 질주를 하고 있었다. 미친 사람처럼 이상한 웃음을 흘리며. 참고로 실내 자전거는 유호가 다 같이 쓰자며 산 물건이었다.
“작년에 만났을 때 네가 무슨 아이돌이냐 군대나 가라, 이러면서 무시했던 사촌 형한테 복수했다고 하더라.”
“어떻게?”
“우리 신인상 트로피 사진을 수십 장 인화해서 사촌 형 방에다 도배해놨대. 그리고 사촌 형이 히아신스 좋아하니까, 사촌 형 이름으로 히아신스 굿즈랑 앨범에다 사인 잔뜩 받아놓은 걸 사진만 찍어서 가져가 약 올리기도 하고.”
박가람이 페달을 굉장히 빠르게, 신나게 밟으며 말했다.
“여태껏 말 한마디 안 나눠본 고등학교 동창에게 염치 불고하고 부탁을 했지! 오늘을 위해, 그것도 무려 두 달 전에!”
참 소소하기 그지없는 복수였으나, 효과는 있었던 모양이다.
저렇게 기분이 좋은 걸 보니.
“으하하…!”
액막이 부적 아닙니다
“그나저나 시청자들이 써한 너 찾더라.”
“……?”
한율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길우성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본인은 참가 안 했다고 완전히 잊어버린 거? 아스대 말이야, 아스대.”
“아아.”
작년 추석처럼 올해 설 명절 연휴에도 MBS <2018 설특집 아이돌스포츠대회>가 방영되고 있었다. 그러나 녹화가 한율이 한창 드라마 촬영으로 바빴던 지난달에 진행되어, 어스래빗 멤버 중 한율만 부득이하게 불참했다.
“오늘 양궁 경기할 때 MC들이 작년 추석에 네가 저질렀던 짓을 한참 얘기하면서, 네가 안 나와서 다행인데 그래도 아쉽다고 언급 많이 했었어. 인터넷에서도 사람들이 작년 렌즈 킬러 어디 갔냐고 물으니까 우리 이프림이, 바쁘게 드라마 촬영할 때라 못 나왔어요, 라고 대신 친절하게 대답해주고. …오? 이거 맛있겠다.”
종이 가방 속 도시락 상자 안에는 온갖 종류의 떡과 전이 들어있었다. 한율은 손으로 집어 먹으려 하는 두 사람을 말렸다.
“손 씻고, 젓가락으로 먹어요.”
“응.”
“그런데 이 집에 젓가락이 있었나?”
“싱크대 서랍에 일회용 젓가락 쌓였더라. 누가 배달시켜 먹었었던 건지는 몰라도.”
웃으면서 신나게 페달을 밟던 박가람이 그들을 돌아보았다.
“우리 이사 왔던 날에 짜장 시켜 먹었었어. 호 형이랑 이건우랑.”
“셋이서만 치사하게!”
“그런데 별로 맛은 없었어. 분명히 배달 앱 별점은 높았는데. 한율이 네가 이제설 선배님한테 여기 맛집 좀 물어봐 줘. 그런 건 원래 살던 주민이 잘 알잖아.”
“배달시킬 때 되면요. 다른 형들은 방에 있어요?”
싱크대에서 가볍게 손을 씻고 젓가락을 챙기던 라이언이 대답했다.
“리더는 회사, 보배는 아직 안 왔어.”
“남석 씨랑 건우 형만 각자 방에 있음. 왜?”
“작년에 우리가 만든 인형 때문에.”
“아, 맞다. 원래 플리마켓 때 추첨해서 선물로 나눠주기로 했다가 반지 굿즈 선물이랑 겹쳐서 설로 미뤘었지.”
“이따가 호 형이랑 보배 오면 같이 의논하자. 시간이 너무 오래 지나면 받는 사람한테 미안하니까.”
“이참에 새로 만드는 거 어때?”
“그것도 다 모였을 때 의논하는 게 좋을 듯.”
그러나 회의는 그날 밤 유호가 숙소에 들어오지 않아, 자연스레 다음 날로 미뤄졌다.
“팬들이 지금 형의 모습을 보면 아주 경악할 거야. 그러니 여기 보고.”
찰칵. 박가람이 핸드폰으로 유호의 사진을 찍었다. 음력 새해부터 작업실에 틀어박혀 밤을 새운 유호는 꼴이 말이 아니었다.
피곤한 눈을 끔뻑거리면서 물을 마시던 유호가 뒤늦게 반응했다.
“…좋은 말로 지워라?”
“걱정하지 마. 눈은 검은색 작대기로 가려줄게.”
“아무리 팬들에게 민낯을 공개하는 게 일상이라지만, 최소한의 인간적인 비주얼은 지켜주는 게 같은 팀 멤버로서의 의리 아닐까?”
심심하니까 함께 유호의 생사를 확인하러 가자고 박가람에게 끌려온 한율은 작업실 여기저기를 살폈다. 이전에도 가끔 들어와 본 적이 있었으나, 오늘따라 무척 지저분했다. 더럽다기보다는 정리가 안 되어서 산만한 느낌.
‘왜 이렇게 고소한 냄새가 나나 했더니.’
한율은 작업실 구석에 놓인 빈 페트병 무더기를 보았다. 죄다 쌀 음료인 ‘아침햇빛’이었다.
“형 이 음료 엄청 좋아하시나 봐요.”
“평소엔 잘 안 마시는데, 오래 작업할 때만. 예전엔 커피 많이 마셨었는데 점점 속도 쓰리고 머리도 아파서, 커피보단 그 음료 비중을 높이고 있어.”
“그래도 자주 치우는 게 좋겠어요. 몇 개에선 막걸리 냄새나요.”
유호가 싱겁게 웃었다.
“그러잖아도 은영이가 그 말 하더라. 나보고 막걸리 마셨냐고.”
“진짜 꼬질꼬질한 냄새도 나니까 가서 씻고 오시죠, 아저씨. 영상으로 찍기 전에…에엑!”
박가람의 뒷말이 올라간 건 유호가 그의 두 뺨을 꼬집으며 흔든 까닭.
“아, 한율아. 너도 뮤지컬 입시금지곡 알지?”
“지킬 앤드 하이드의 같은 거요?”
“응, 그런 입시금지곡 중에.”
유호가 모니터에서 프로 툴스 프로그램을 닫고, 대신 너튜브에서 어떤 영상을 재생시켰다.
“이 노래 들어본 적 있어?”
감옥 같은 곳에 갇힌 배우가 애절한 노래를 부르는 영상이었다. 2분 30초 남짓의 뮤지컬 넘버.
한율은 가만히 노래를 듣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들은 적 있어요.”
학교에서 실용음악과 학생들이 부르는 걸 몇 번 들은 적이 있었다. 굉장히 잘 부를 자신이 없으면 시험이나 오디션에서 이 노랜 절대 불러선 안 된다는 그들끼리의 이야기도.
“나중에 이런 애절함이 울리는 듯한 노래를 한번 해보고 싶거든. 당연히 감성도 우리 나이대로 맞추고. 네 생각은 어때?”
“괜찮을 것 같네요.”
꼬까옷을 입고 귀여운 척 상큼한 척 생글생글 웃는 것보단.
유호가 씩 웃었다.
“다행이다. 이런 분위기의 노래는 중심이 되는 보컬들의 연기실력이 받쳐주질 않으면 안 부르느니만 못하거든. 이제 남석이만 꼬드기면 되겠다.”
“그 형도 바로 OK할 것 같은데.”
“실은 내 생각도 그래.”
“이보세요.”
박가람이 꼬집혔던 두 뺨을 살살 어루만지면서 툴툴거렸다.
“내 의사는?”
“과반수야. 너한테 거부권은 없어. 아, 혼자 무대 연기 제대로 못 하면 퍼포 내내 너 뒤로 빼버리라고 건우한테 말할 테니까 알아서 연습….”
“싸우자, 유호! 덤벼!”
팀 내의 최장신과 최단신의 싸움은, 최장신이 최단신을 번쩍 들어 작업실 밖으로 내쫓으며 싱겁게 끝났다.
* * *
“하나, 둘…. 안녕하세요! 어스!”
“래빗!”
“새해 인사드립니다!”
작년처럼 한복을 갖춰 입은 어스래빗 멤버들이 카메라에 대고 인사했다. 장소는 2층 회의실.
“즐거운 명절 보내고 있나요, 여러분?”
-감개가 무량무럭무럭.. 작년 설 라방할 땐 팀명도 없고 구호도 없었는데ㅜㅜ
-ㅇㅇ
-한 살 더 먹어부럿써 슬프지만 같이 나이먹는 거니 덜 외롭다
-너무 잘 보내서 굴러다니고 있어ㅎㅎ
-새해 복 많이 받아!!
-어제 졸업 에피 잘 봤다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평소 라방하던 곳 맞지?
-어???? 그때 그 인형이다!!!
-맛있는 거 많이 먹었어? ^^
예고 없이 진행된 라방이었지만, 들어오는 사람의 수는 가볍게 만 단위를 돌파했다.
아이패드로 실시간 톡을 확인하던 차남석이 웃으면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테이블에 놓인 물건 위로 가볍게 손을 얹었다.
“눈썰미 좋은 분들이 계시네요. 연습실에서 라방했을 때 아주 잠깐 비쳤을 텐데. 이게 작년… 언제였지?”
“7월 말.”
“음, 그때 저희가 직접 처음으로 만들었던 인형입니다.”
-얼마나 꽁꽁 싸맸으면 투명 포장진데 형체가 흐릿햌ㅋㅋㅋㅋ
-저게 그 유명한 내구도1짜리 인형
-내구도 1이라서 완전히 싸매서 보관했구나
“사실은 이 인형은 좋은 취지의 이벤트를 할 때, 참여해준 분들 가운데서 추첨이 된 분께 강제로 떠넘길 계획이었는데.”
-나 줘!!! 우리 집 가보로 모실게8ㅂ8!!!!
-지구 토끼가 만든 지구를 지키는 액막이 부적입니다.
-떠넘곀ㅋㅋㅋㅋ
“적당한 시기를 놓치는 바람에 더 늦기 전에…. 액막이 부적이라뇨.”
톡을 본 차남석이 웃음을 터뜨리자 톡창에도 웃음 의성어가 줄줄이 올라왔다. 이건우가 그다음 설명을 이어서 했다.
“이 라방 끝나고 우리 멤버들이 SNS로 퀴즈를 올릴 거예요. 그 퀴즈의 정답을, 우리 어스래빗 팬클럽 멤버십카드 인증샷과 함께 가장 빨리 맞히시는 분께, 해당 멤버가 만든 인형을 선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퀴즈 난이도는 어떤가요?”
“어떤 질문을 올릴지는 멤버들 마음이라. 그래도 객관적인 답을 가진 질문이 올라올 예정이니…, 그럴 거지? 막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맞혀봐라, 이딴 질문 올리면 팬 분들 대신해서 제가 혼냅니다.”
“어떻게?”
“헬스장으로 끌고 갈 거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헬스장 소리에 라이언이랑 가람이 정색하는 거 봨ㅋㅋㅋㅋ
-헬스장ㅋㅋㅋㅋㅋㅋ
-애두라 그렇다고 막 어려운 수학 문제 내면 안 돼ㅜㅜ
팬들이 쓴 톡을 보며 잡담을 떠들던 라방은 40여 분간 진행되다가 단체 큰절로 마무리되었다.
“그럼 이프림 여러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라방을 종료한 후엔 각자 어떤 퀴즈를 낼지 고민하거나, 미리 생각해둔 퀴즈를 SNS에다 올렸다. 한율은 후자였다.
찰칵. 셀카를 가볍게 한 장 찍은 뒤, 사진에다가 직접 메시지를 새겼다. 문장을 복사해서 쉽게 정답을 알아내지 못하도록.
[Q. 셀카 하단에 적은 인용 구절의 마지막 단어를 채워주세요! 힌트는 하인리히 하이네, 독일어입니다. :D]
[“Wenn Worte aufhören, beginnt die ○○○○○.”]
곧바로 팬들의 댓글이 달렸다.
-.......
-세상에
-문제 난이도 무엇ㄷㄷㄷ
-라방 끝나자마자 퀴즈가 올라오기만을 기다렸다 날벼락 맞은 기분..ㅇㅂㅇ
-!!!!!!Musik!!!!!!!!!!!
ㄴ신이시여 독일어 전공을 선택한 이래 가장 보람찬 날이 될 것 같군요ㅜㅜ!!!
ㄴ와... 더듬더듬 사진 속 텍스트 인식 누르는 사이에 정답이
ㄴ8ㅂ8
ㄴ역시 숨어있는 능력자들이 많아ㄷㄷㄷ
한율은 10초 만에 멤버십카드 인증샷과 함께 올라온 정답을 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리 유명하지 않은 구절이라 시간이 조금 오래 걸릴 것 같았건만.
‘팬 중엔 정말 다양한 사람이 많구나.’
한율은 정답을 맞힌 사람에게 축하 댓글을 달았다.
며칠 후, 8명의 멤버들이 낸 퀴즈의 정답을 맞히고 선물을 받은 팬들의 인증 후기글이 어스래빗 팬카페나 SNS, 커뮤니티사이트의 어스래빗 게시판을 통해 올라왔다. 한 명도 빠짐없이.
[율톢이 피를 보며 완성한 내구도1 인형(๑˃́ꇴ˂̀๑)]
[작년 여름에 율톢이 몇 번이고 바늘에 찔리는 걸 맘 아프게 봤던 내가 그 원흉인 이 인형을 손에 넣게 될 줄이야 어머나 세상에 독일어 전공을 선택한 과거의 나를 마구 칭찬하고 하이네를 좋아하는 나를 기특하게 여기면서 이 글을 쉼 없이 읽는 당신에게도 리스펙트하는 마음으로 이렇게 공개하는데 세상 사람들 우리 애들이 내구도1 인형만 달랑 보내면 허전할까 봐 쪼큼 그랬는지 음방과 아스대 방청 팬들에게만 나눠주었던 토끼 핑크 담요(새것)에 인형을 둘둘 말아서 보냈어요 짠☆]
함께 올라온 사진 속엔, 검은색 마법사 모자와 망토를 두른 새하얀 토끼 인형이 핑크 담요에 누워있었다.
* * *
2월 23일. 어스래빗은 다음날인 24일에 잡힌 동계올림픽 기념 K-POP 콘서트 스케줄을 위해 리무진에 탔다. 목적지는 강원도.
“후우….”
리무진이 강원도 안으로 들어가자 박가람이 차창을 열고 살며시 한숨을 내뱉었다. 그러곤 감상에 젖은 얼굴로 미소 지었다.
“일주일 만에 다시 찾은 고향땅. 그러나 지금의 나는 그냥 박가람이 아닌 어스래빗이란 보이그룹의 보컬, 가람….”
갑자기 왜 저래. 의아하게 박가람을 쳐다보는 멤버들의 얼굴이 카메라에 고스란히 잡혔다.
“그리고 저 아이는.”
박가람은 그러거나 말거나, 팔과 손목을 우아하게 움직이더니 강보배를 가리켰다.
“보배. 아아, 보배롭도다.”
유호가 활짝 웃으면서 말했다.
“가람이 넌 앞으로도 쭉 작사는 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
“서 막내야.”
박가람이 유호의 말을 무시하며 한율을 바라보았다. 팬들 앞에서 자주 짓는 ‘귀여운 척’하는 얼굴로 눈을 깜빡거리며.
“널 꼭 우리 집에 초대하고 싶구나.”
“지금 가는 중이잖아요.”
콘서트가 열리는 곳이 마침 박가람의 본가가 있는 강릉이라, 어스래빗은 하루 일찍 도착해 박가람의 집에 들르기로 했다. 호텔도 강릉시에 잡아놓았고.
박가람이 친절한 어조로 대답했다.
“내 방이 넓어서 날 포함해 셋까지 수용할 수 있거든. 꼭 그 두 명 중의 한 명이 너였으면 좋겠구나.”
“…….”
굉장히 수상쩍은 낌새가 느껴진다. 일본에서 다른 객실에 묵을 때마다 괜히 사람을 부를 때와 비슷한 낌새가.
“싫은데요.”
“그래, 싫다면 어쩔 수 없지….”
박가람이 아쉽기 그지없다는 표정으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시선을 낮게 깔며 중얼.
“어차피 잠깐만 와도 뭐….”
“네?”
“응?”
“형 방금 뭐라고….”
“응?”
“…됐어요.”
“나 전부터 느낀 건데….”
그때 강보배가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카메라가 돌고 있는데 이런 말을 해도 괜찮나 살며시 눈치를 보며.
“가람이 형 설마… 한율이 정말 인간 부적 같은 걸로 생각하는 거 아니지?”
뭐가 보이는 걸까
한율은 미간을 찡그렸다.
“인간 부적이요?”
길우성이 놀란 얼굴로 박가람을 보았다.
“형 그거 장난 아니었어?”
“장난? 무슨 장난?”
이전 숙소에서 다른 방을 썼던 멤버들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당황해서 한율의 눈치를 보는 박가람을 두고 길우성이 대신 대답했다.
“예전에 써한이 무서운 드라마 촬영하러 지방에 내려갔을 때, 가람이 형이 써한 포토 카드랑 염주를 머리맡에 두고 잤었거든. 왜 그랬냐 물어보니까 부적이라고, 하지만 플라스틱 효과인 것 같다고….”
“플라스틱? 플라세보 효과 말하는 거야?”
한율은 <객귀, 해>를 촬영하러 섬으로 내려갔을 때 길우성이 보냈던 사진을 떠올렸다. 그 일이 있기 며칠 전 새벽엔, 박가람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가 졸졸 쫓아다니기도 했고.
‘단순히 장난은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혹시 일본 귀신의 집에서 내 이름을 애타게 부르면서 달려온 것도.’
딱히 이유를 알고 싶지 않았던 수상한 낌새가 모두, 자신을 인간 부적으로 여겨서 그런 것이었다면.
“형.”
“어?”
박가람이 눈을 크게 끔뻑거리며 대답했다. 그러나 찔리는 구석이 있는 사람처럼 슬그머니 마주친 시선을 피한다.
한율은 살며시 미소 지었다.
“나중에 단둘이 얘기 좀 해요.”
“……!”
길우성이 키득거렸다.
“가람이 형 큰일 났다.”
이건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한율이 같은 애들이 진심으로 화나면 무서운 타입이지.”
박가람이 창 쪽으로 몸을 바짝 붙였다. 두 주먹을 불끈 쥐면서.
“O, OK! 오늘 우리 집에서 자면!”
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박가람의 집은 시내와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마당 딸린 단독주택이었다. 어스래빗 멤버들과 매니저는 박가람의 부모에게 인사를 한 후, 집을 구경했다. 셀캠이나 카메라는 들지 않았다.
“쌀떡, 안녕.”
라이언이 거실 소파 앞에 가만히 앉아있는 삽살개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이건우가 그 옆에 나란히 쭈그리고 앉았다.
“이름이 쌀떡이야?”
“응, 찹쌀떡이래.”
“안녕, 쌀떡.”
찹쌀떡은 두 사람을 멀뚱히 쳐다보기만 할 뿐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건우가 박가람에게 물었다.
“얘 원래 이렇게 얌전해?”
“낯선 사람은 일단 빤히 관찰하는 게 버릇이야.”
길우성이 거실에 걸려있는 박가람의 돌사진을 보며 말했다.
“가람이 형 어릴 때 사진 진짜 귀엽다.”
“중간에 대체 무슨 일을 겪었던 거예요, 형.”
“왜 그래, 지금도 귀엽잖아.”
“어? 쌀떡 일어났다.”
한율도 집안 내부를 천천히 살폈다. 현관문 위에 붙은 노란색 부적이 시선을 끌었다. 거실 벽에 걸린 달마도와 최근에 찍은 박가람의 대형사진액자도. TV 대에는 박가람의 가족사진과 더불어 어스래빗의 단체 사진 액자가 세워져 있었다.
단란한 가정의 공기가 곳곳에 스며든 따뜻한 집이었다.
그리고 집을 보면 사람이 보인다고, 박가람의 낙천적이고 밝은 성격이 어디에서 기인했는지도 잘 느껴졌다.
터업.
“……?”
“가람아, 찹쌀떡이 한율이 물었다.”
한율은 의아한 눈으로 찹쌀떡을 바라보았다. 한율의 손을 가볍게 문 찹쌀떡도 빤히 한율을 쳐다봤다. 이를 세우지 않아 전혀 아프진 않았다.
“관찰하고 싶은데 자기 안 쳐다보면 종종 그래. 아프진 않지?”
“네.”
한율이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찹쌀떡이 그제야 물었던 손을 놓아주었다. 물렸던 손을 씻고 난 후엔 박가람의 방을 구경. 한쪽 벽면을 채운 진열장이 온통 CD와 LP로 빼곡한 걸 제외하곤 평범했다.
유호와 차남석이 감탄했다.
“와…. 앨범 장난 아니다.”
“형이 다 모은 건 아닐 테고, 가족들 취향이에요?”
“할머니랑 엄마 취향. 고부간에 덕이 일치한 드문 케이스로, 할머니 돌아가시고 난 후에 할머니가 수집했던 앨범을 다 여기로 가져와서 많아.”
“보관도 정말 잘 됐어. 꼭 오래된 음반 가게에 온 것 같아.”
“어쩐지 옛날 노래를 잘 알더라니. 어머니랑 할머니 영향이 컸네.”
박가람이 뿌듯하고 자랑스러운 얼굴로 웃었다.
“그런 셈이지. 어찌 보면 내가 가수의 길을 걷게 된 것도….”
“형 졸업앨범 봐도 돼?”
“책상 서랍 한번 뒤져보자. 뭐가 나오나.”
“형 다이어리는 어디에 있어?”
“…사람이 말을 하면 끝까지 좀 들어주면 안 되겠니, 이것들아? 그리고 다이어리는 왜 찾아!”
“가람, 쌀떡이랑 산책하고 와도 돼?”
박가람의 집에서 놀던 그들은 인근 식당으로 가서 저녁을 먹은 후, 다시 박가람의 집과 호텔로 나뉘었다. 박가람의 집에서 하룻밤 신세를 지기로 한 건 앞서 약속한 한율과, 가위바위보로 이겨서 뽑힌 차남석이었다.
차남석은 박가람의 방에 캐리어를 세워놓자마자 앨범 진열장 앞에 섰다.
“형, LP 들어도 돼요?”
“어. 듣고 싶은 거 고르면 나한테 말해. 내가 틀어줄게.”
박가람과 차남석이 LP를 고르고 감상하는 동안 한율은 먼저 씻고 나왔다. 거실에 있던 찹쌀떡이 한율을 졸졸 쫓아 방까지 따라 들어왔다. 박가람의 방에선 굉장히 오래된 것 같은 기타연주곡이 흐르고 있었다.
“어? 이 음악….”
“서한율 너도 들어본 적 있어? ‘Santo&Johnny’의 ”
들어보다마다.
LP 플레이어 옆에 놓인 오래되고 바랜 LP 커버를 보는 한율의 입가에 쓴웃음이 번졌다.
로건 워커의 형제가 운영하던 바의 턴테이블에서 도통 내려올 줄 몰랐던 산토와 자니 형제의 베스트 앨범 LP. 는 첫 번째 수록곡으로, 1959년 하반기 빌보드 싱글차트 1위에도 올랐을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네, 영화 OST로도 몇 번 삽입됐었잖아요. 그나저나 이렇게 오래된 팝송 LP까지 있다니. 할머니께서 정말 음악을 좋아하셨나 보네요.”
“응. 우리나라 옛날 팝송 LP는 빽판이 많았었잖아? 그런데 빽판 말고 원판 구하려고, 몰래 새끼돼지 한 마리 시장에 팔았다가 집에서 쫓겨날 뻔한 적도 있으셨대.”
“와.”
“형이 할머니의 음악에 대한 열정을 반의반이라도 물려받았어야 했는데.”
“차남석 베개 압수.”
한율과 박가람의 단독면담은 차남석이 씻으러 간 사이에 이뤄졌다.
의자에 앉은 한율은 박가람의 방문 위에도 붙은 노란색 부적을 바라보다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형, 귀신 봐요?”
연예계엔 유독 귀신 관련 일화가 많이 떠돌았다. 실제로 보거나 귀신의 소행으로 추정되는 일을 경험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많고. <객귀, 해>를 함께 촬영했던 이윤영도, KBC <목톡톡>에서 <객귀, 해>를 촬영할 당시 바로 귓가에 누군가가 속삭이는 걸 들은 적이 있다고 밝힌 바 있었다.
박가람의 경우엔 2년 전 크리스마스 봉사활동을 갔을 때, 아무것도 없는 엘리베이터에서 무언가를 보고 놀라는 듯한 모습이 카메라에 잡히기도 했다. 일본 귀신의 집에서도 아무도 없어야 할 곳을 보곤 놀라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고.
“언젠가.”
침대에 편히 앉아있던 박가람이 가슴에 손을 얹으며 슬픈 표정을 과장되게 지었다. 찹쌀떡이 그런 박가람의 무릎에다 머리를 올린 채 편히 누웠다.
“내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솔직히 털어놓는 날이 오리라 짐작하고 또 마음의 준비도 했지만….”
구구절절 이야기를 늘어놓을 것처럼 서두를 꺼낸 박가람이 한율을 보았다. 그러곤 툭 내뱉듯이 말했다.
“어. 가끔 봐.”
“…….”
“아니,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박가람이 가식적인 표정을 거두고 하소연하듯이 말을 이었다.
“어릴 때부터 자주 봐서 그렇게 무섭진 않아. 않은데, 가끔 정~말 비주얼이 소름 끼치거나 징그러운 것들이 있거든? 그런데 전에 우리가 살던 숙소에, 있었어.”
한율은 놀라거나 불신의 표정을 짓는 대신, 계속해보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엔 몰랐다? 그런데 지내다 보니까….”
한율이 진지하게 경청하는 듯하자 박가람이 이야기를 계속했다.
박가람의 이야기 요지는 간단했다.
“네가 오면 귀신들이 기겁하면서 사라져. 그리고 한동안 얼씬도 안 해.”
한율은 그렇구나,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에.”
싱거운 한율의 반응에, 박가람이 눈을 빠르게 깜빡거리다 미간을 찡그렸다.
“끝이야?”
“무슨 반응을 더 보여야 해요?”
“아니… 어… 알고 있었던 거야? 네 기가 엄청 세다는 거?”
“아니요.”
영혼인 상태로 지구로 넘어와 지구인의 육체를 차지했으나, 그는 자신의 영혼이 죽은 자의 영혼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는 신경 쓴 적이 없었다.
어차피 죽은 자니까.
죽은 자가 산 자에게, 현실에 직접적으로 큰 영향을 끼치는 건 본래 세상, 저주받아 죽은 육신에서 빠져나온 사령 외엔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곳은 그런 저주마법은커녕 마나도 영 시원찮은 지구.
‘이곳엔 그런 저주마법을 걸 만한 사람도… 나 외엔 없고.’
그래서 오늘 박가람의 이야기를 듣고 새삼 생각하게 되었다. 왜 귀신들이 자신을 보면 기겁하며 도망치는지도.
‘내게서 무언가가 보이거나 느껴진 거겠지.’
보인다면 뭐가 보이는지, 느껴진다면 뭐가 느껴지는 건지 문득 궁금해진다.
보인다면 아주 커다란 하나의 형체? 아니면 무수히 많은 무언가가 뭉쳐져 꿈틀거리는 형상?
한율은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형 덕분에 새롭게 알게 됐네요.”
“그럼….”
박가람이 한율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물었다.
“화 안 내는 거지?”
“설명 제대로 안 하고 인간 부적으로 이용한 것에 대해서요?”
“사실대로 말하면 좀 기분 나쁠 것 같아서….”
박가람이 목 뒤를 긁적거렸다.
“네가 이렇게 진지하고 스무스하게 받아들일 줄 알았으면 진작 사실대로 말했지….”
“됐어요. 비주얼이 소름 끼치거나 징그러웠다면서요. 안 보이면 된 거죠.”
“어? 그럼 정말 괜찮은 거야?”
어차피 눈에 보이지도 않고 딱히 안 좋은 영향을 끼치는 것도 아닌데, 화까지 낼 필요가 있을까. 박가람이 사실대로 말하지 않은 이유도 충분히 이해되는데.
“네.”
한율이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자 박가람의 얼굴에 환한 웃음꽃이 피었다. 그러더니 곧 본래대로 까불거렸다.
“서한율 너 한번 용하다는 무당집 찾아가 보자. 무슨 반응 나올지 엄청 궁금하다.”
“무당집을 왜 찾아가요?”
마침 방으로 돌아온 차남석이 물었다. 박가람이 후후 웃음을 흘리며 그럴싸하게 둘러댔다.
“신년운세 보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