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5화 (95/427)

* * *

동계올림픽 기념 K-POP 콘서트는 한 대학교의 야외공연장에서 진행되었다. 다른 아이돌들은 대학 축제 무대에 자주 선다지만, 어스래빗은 방송국이나 큰 단체 혹은 기업이 주관하는 무대에만 올라봤지, 대학 축제는커녕 지방 행사도 한번 뛴 적이 없던 터라 조금은 색다른 경험이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왜.”

콘서트가 끝나고 리무진에 탔을 때 길우성이 의문을 표했다.

“대학 축제 같은 곳을 안 가는 걸까?”

“안 불러줘서?”

“으윽…. 그런 이유라면 슬프다….”

“다 같이 즐기면서 놀 수 있는 히트곡이 없으면 조금 힘들지 않을까? 상상해봐. 우리가 열심히 춤추면서 노래 부르는데, 관객분들이 ‘이게 대체 무슨 노래지?’ 하면서 멀뚱멀뚱 쳐다보는 모습을.”

“으윽…. 더 슬프다….”

한율은 내내 가방에 넣어두었던 핸드폰을 꺼냈다. 모친으로부터 톡이 들어와 있었다. 똑순이 새끼 중 한 마리를, 예정대로 내일 사촌인 서한림이 데려가기로 했다는 내용이었다.

-[다른 두 마리는 너희 아빠 지인분에게 보낼까 해. 벌써 거실에다가 손수 제작한 캣타워를 설치 하셨더라고^^;]

-[이게 그 사진]

“보배 형.”

한율은 아래로 이어진 톡을 마저 본 뒤 강보배를 불렀다.

“응?”

“내일 똑순이 새끼 중 한 마리 보내기로 했어요. 다른 두 마리는 화요일에.”

“아… 분양처 다 결정된 거야?”

길우성이 놀란 얼굴로 끼어들었다.

“벌써?!”

“이제 곧 태어난 지 3개월이잖아. 슬슬 보내야 새로운 집에서 잘 적응하지.”

“내일 몇 시에 가는데?”

“낮에 데리러 오기로 했대요.”

“그 전에 미리 가서 작별 인사해야겠네. 아쉽다….”

“똑순이도 새끼들 떠나보내면 쓸쓸해할 텐데. 아무리 한 마리는 남겨둔다고 해도.”

앞자리에서 조용히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오동식 팀장이 돌아보았다.

“그럼 내일 한율이 집에 가서 셀캠으로 가볍게 찍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괜찮을까, 한율아?”

지난번, 강보배와 길우성이 <선데이 동물>에 나왔을 때 시청자들과 약속한 바 있었다. 똑순이의 새끼들이 건강하게 자라면 책임지고 좋은 집으로 보내겠다고. 그리고 <선데이 동물> 제작진과도 새끼들을 분양 보낼 때 너튜브 채널을 통해 해당 사실을 알리기로 했었다.

“네.”

“그럼 내일 보배랑 우성이, 한율이 사촌 누나 만나는 거네?”

“한율이 사촌 누나 만나면, 한율이 어릴 때 흑역사 썰로 풀만 한 이야기도 좀 캐… 면 안 되지. 음, 음.”

장난스럽게 말하던 박가람이 한율의 시선을 받고 찌그러졌다.

오늘부터 고3

“한율이가 어릴 때 말이지.”

똑순이 가족의 방. 눈을 게슴츠레하게 뜬 채 졸고 있는 똑순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서한림이 입을 열었다.

“정말 재수 없었어. 지금도 좀 그렇지만.”

길우성이 고개를 격하게 끄덕이며 동감을 표했다.

“무슨 느낌인지 알 것 같아요, 누나.”

“…….”

제 방인 것처럼 편하게 드러누워서 자는 퓨마의 뱃살을 쓰다듬던 한율은 미간을 찡그렸다. 서한림은 당사자의 눈치를 보기는커녕 오히려 한율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내가 얘랑 네 살 차이가 나거든? 그래서 나도 완전히 어렸을 땐 어땠는지 잘 기억이 안 나는데, 내가 여덟 살 때. 그때 큰어머니가 한율이랑 같이 놀아달라고 해서 내가 동화책을 읽어준 적이 있다? 그런데 내가 아무리 열심히 열연을 펼치면서 동화책을 읽어줘도, 얘가 뚱~하니 내 얘길 전혀 안 듣는 거야. 그래서 내가 ‘재미없어?’라고 물어보니까.”

서한림이 뚱한 표정을 지으면서 무미건조한 목소리를 냈다.

“학대받는 애들 얘기가 재밌으면 정신에 문제 있는 거 아니에요? ―와, 이게 네 살짜리 애 입에서 나온 말이라는 게 믿어져?”

강보배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의 품엔 새끼고양이 두 마리가 안겨있었다.

“아니요.”

“읽어준 동화책이 뭐였는데요?”

“헨젤과 그레텔. 아무튼, 나도 그때 당황해서 다른 책을 집었다? 그랬더니 이번엔.”

서한림이 한율의 손목을 덥석 잡고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난 신경 쓰지 말고 누나 혼자 놀아요. …이러면서 큰아버지 서재로 아장아장 걸어가는 거야! 이렇게 벙쪄서 멍하니 있는 날 두고!”

푸핫. 길우성이 웃음을 터뜨렸다.

“뭐지, 이거. 상상이 너무 잘 되는데.”

“한율이는 어릴 때부터 한율이었구나.”

“그래서 한번은 내가 얘 좀 동요하는 모습이 보고 싶어서 일부러 짓궂게 군 적도 있었거든? 괜히 볼 잡아당기고 읽고 있던 책 빼앗고 그랬는데, 화내기는커녕 날 이렇게 가만히… 이런 표정으로.”

서한림이 철없고 한심한 어린아이를 보는 것처럼 살며시 시선을 내리깐 채 조용히 눈을 깜빡거렸다. 길우성은 아예 어깨를 들썩거리며 웃었다. 큭큭큭큭.

“난 그때 깨달았지. 아, 이런 녀석을 두고 재수 없다고 하는 거구나!”

큭큭. 강보배도 낮은 웃음소리를 흘렸다. 한율은 방구석에 놓인 이동장을 집어서 서한림의 앞에 내려놓았다.

“누나, 안 가요?”

서한림이 생글생글 웃었다.

“왜에? 네가 어릴 때 얼마나 애늙은이 같았는지 다 불까 봐 무서워?”

“…….”

“봤지? 이 표정이야, 이 표정.”

“네, 저도 자주 보는 표정이네요.”

약속했던 시간보다 일찍 온 서한림은, 길우성과 강보배에게 한율의 어릴 적 이야기를 잔뜩 풀어놓다가 2시간이 지나서야 새끼고양이 한 마리를 데리고 갔다.

한율과 길우성, 강보배도 택시를 타고 회사로 향했다. 조금 전에 찍은 고양이 영상을 다시 살펴보며 길우성이 키득거렸다.

“한림이 누나 덕에 이프림에게 알려줄 게 하나 생겼다.”

“뭔데?”

“써한은 어릴 적부터 동심이 바닥인 애늙은이였다.”

조수석에 탄 한율은 길우성의 말을 한 귀를 흘려보내며 핸드폰으로 연예 뉴스를 훑었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한 배우가 토크 프로그램에서 한 얘기를 자극적으로 부풀려 쓴 기사로 시끌벅적했었으나, 그보다 더 큰 파도가 몇 시간 사이에 연예 뉴스란을 점령하고 있었다.

[유명 아이돌 가수 A씨 상습마약 투약 혐의로 입건]

[상습마약 투약 혐의 유명 아이돌 A씨 누구?]

[마약 혐의로 입건된 아이돌은 유명 보이그룹 멤버]

한숨이 절로 나오는 기사였다. 기사 내용을 보니, 몇 달 전에 불구속으로 조사를 받았던 게 이제야 알려진 모양.

-수사대 출동.

-누군진 몰라도 아침까지 클럽에서 해롱거리다 잡혔다던데ㅋㅋㅋ

-클럽 자주 가는 아이돌은 거르는 게 답이다.

-누군지 아는 사람?

-이런 기사 특. 유명하다 해놓고 막상 까보면 듣보인 경우가 대다수ㅇㅇ

-진짜 티비에 나오는 모습만 보고 믿어선 안 되는 부류들

-연예계 특히 아이돌들 죄다 약물 검사해봐야함

-이거 ㅍㅅㅌㄹㅇ이란 소리 있던데ㅋ 거기 래퍼가 경찰서 들락거리던 거 팬 카메라에 찍힌 시기랑 맞아떨어짐

ㄴ이제 곧 허위사실 유포로 고소당할 댓글입니다.

ㄴ그거 겜에서 ㅍ드립했다가 고소당해서 간 거라는 소문이...

ㄴㅁㅊ ㅋㅋㅋㅋㅋㅋㅋ

-앗싸일보ㄱㄱㄱ 그때 당시 같이 있던 여돌도 조사받았었다고 뜸ㄱㄱㄱㄱ

ㄴ진짜면 ㅈㄴ더럽;

ㄴ원래 보이는 것보다 더 더러운 곳인 거 몰랐음?ㅋㅋㅋㅋ 다 지들끼리 붙어먹어서 동물의왕국이라고 하잖아

회사에 도착한 한율은 여느 때처럼 퀵으로 배달 온 선물을 조용히 분류하는 직원들을 보며 생각했다.

‘적어도 이 회사엔 관련자가 없는 모양이네.’

아무리 많은 직원이 쉬는 일요일이라도 그만한 사건이 공론화되었다면 무겁고 긴박한 기류가 흘러야 하건만, 회사 건물 안은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형은 작업실 가?”

“응. 장 쌤이 튠 조절하는 거 봐주신다 그랬거든.”

“크으, 멋지다.”

강보배는 2층 계단으로, 한율은 길우성과 지하로 내려갔다.

데뷔 초창기까지 회사에서 받았던 레슨도 이젠 필수가 아닌 선택이 되었다. 한동안은 단체 스케줄도 잡힌 게 없어, 어스래빗 멤버들에겐 각자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자유시간 아닌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유호는 곡 작업으로 작업실에 틀어박히고, 강보배, 라이언은 다음 달에 내놓을 믹테를 위해 공부 혹은 연습에 매진 중. 차남석과 박가람도 꾸준히 보컬과 연기 레슨, 연습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이건우도 랩과 퍼포먼스 레슨을 받으며 덤으로 몸도 다듬고 있고.

“넌 안무 연습할 거야?”

길우성도 여전히 유명 래퍼에게 일대일 레슨을 받곤 있으나, 일주일에 세 번만 수업을 받아서 다른 멤버들에 비해 한가한 편이었다.

“응. 이프림이 보고 싶다고 한 커버 댄스 연습하려고. 써한 넌?”

어스래빗 멤버 중 누구보다 바쁘게 스케줄을 소화했던 한율도 이 회사에 들어온 이후 제일 긴 한가한 시간을 맞이하고 있었다. 여전히 보컬과 안무, 중국어 레슨을 받곤 있지만, 오늘은 일요일이라 전부 오프.

“너도 같이하면 이프림이 참 좋아할 텐데.”

‘참’의 억양을 삐끗하게 높이며 길우성이 기대하는 눈으로 쳐다봤다.

“너도 가끔은 이런 깜짝 팬서비스에 얼굴을 내밀어야지.”

“혼자 하기 심심해서 그런 건 아니고?”

길우성은 탄산을 마신 사람처럼 얼굴을 찡그리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크으.”

“하지 뭐.”

“크으!”

두 사람은 휴게실을 지나쳐 곧장 어스래빗 전용 연습실로 들어갔다. 연습할 때 입는 옷이나 신발을 B연습실 캐비닛에 넣어, 휴게실은 이젠 씻으러 갈 때 외엔 잘 들르지 않게 되었다.

“무슨 곡 할 건데?”

“현이 선배님의….”

“안 해.”

“왜에! 한다며!”

‘현이’는 굉장히 섹시하고 도발적인 무대 퍼포먼스 장인으로 손꼽히는, 걸그룹 출신의 솔로 여가수였다.

“현이 선배님 최근 곡이면 일 거 아냐.”

는 처음부터 힙을 유려하게 돌리고, 혀끝으로 손등을 핥는 듯한 자극적인 동작이 안무 포인트.

차라리 예쁜 척 귀여운 척 애교를 10분 동안 떨면 떨었지, 여가수의 섹시한 안무는 웬만해선 커버하고 싶지 않았다.

“처음부터가 아니라 후렴구만 가볍게 할 거니까 부담은 노노. 그리고 이 노래 퍼포 짜임새가 좋단 말이야. 선배님 무대 연기, 표정 연기도 예술이고.”

“우리 아직 고등학생이다. 자극적인 안무 따라 춘다고 말 나오면 책임질 거야?”

“…아니영.”

“다른 곡 골라.”

“췌엣. 그러면 아이허니 선배님들의 귀엽고 상큼하고 청순한….”

“남돌 곡은 하면 안 되는 거냐? 둘이서 춰도 비어 보이지 않는 멋있는 종류로.”

“아 이 짜식 너무 까다로워!”

길우성과 티격태격하면서 커버 안무를 연습한 후엔, 점심을 먹고 혼자 보컬 연습실로 들어갔다. 기본적인 발성과 음정 연습으로 목을 풀고 나선 <고양이 난로>의 대본을 펼쳤다.

대본 리딩은 다음 달 10일, 크랭크인은 26일. 한 달밖에 남지 않았다. 한율은 모니터링을 위해 카메라를 켠 후 대본을 읽었다.

“내가 나쁜 마음만 먹으면 넌 바로 죽어. …왜 이렇게 사람을 쉽게 믿어, 병신같이.”

주인공인 고등학생 ‘윤우’가 고양이 ‘못난이’에게 하는, 지금껏 겪었던 일과 감정이 뒤섞인 말들.

한율은 한참 혼자 대본을 읽다가 카메라를 들어서 확인했다.

‘이 부분은 고등학생이 아니라 산전수전 다 겪은 어른으로 보이네. 나도 모르게 이입이 너무 됐나.’

꼼꼼하게 문제점을 찾아내 대본에다가 메모.

뚜껑을 열어놓은 텀블러 속 레몬 생강차가 차갑게 식고 나서야 한율은 연기 연습을 마치고 보컬 연습실을 나왔다. 문에 걸린 [연습 중] 팻말을 반대로 뒤집는 것도 잊지 않았다. [연습해라]라는 문구 아래엔 누군가 작은 글씨로 이렇게 써놨다. [그 실력에 잠이 오냐]

이거 아무리 봐도 차남석 글씬데.

“너 거기 있었냐?”

그때 다른 보컬 연습실에서 나오던 차남석이 한율을 발견하곤 물었다.

“네. 형은 노래 연습?”

“어. 간만에 피아노도 치면서. 그게 다음 달에 찍을 영화 대본이야?”

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형은 작품 들어온 거 없어요?”

“올해는 연기보단 노래에 더 집중하려고. 그나저나 너 임승준네한테 그 얘기 들었냐?”

“무슨 얘기요?”

“못 들었나 보네.”

복도 모퉁이를 돈 뒤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차남석이 조용히 말했다.

“ 면접 영상 찍으러 뮤닷에 갔다가 정민솔 봤다더라. 사람들이 많아서 소리 내서 부르진 못하고, 제작진한테 혹시 정민솔도 출연하냐 물으니까 아직 같이 찍는 출연자들 정보는 알려줄 수 없다는 대답만 들었다는데…. 느낌상 정민솔도 나오는 것 같대.”

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연습생 생활도 오래 했고 데뷔를 향한 갈망도 컸으니, 다른 회사로 충분히 갈 법했다.

“그 형 이쪽 포기하기엔 노래 실력이 아깝긴 했잖아요. 그만한 고음을 내면서 목소리까지 매력적인 사람이 드물기도 하고.”

곁에 두기엔 인성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아 문제였지만.

차남석이 못 들을 말을 들은 것처럼 인상을 쓰며 한율을 쳐다보았다.

“넌 그 새끼 칭찬이 나오냐?”

“그 형이 뭘 하든 어차피 이 바닥에선 내가 선밴데요, 뭘. 어쨌든 그 형이 데뷔하게 되면 라이언과 마주치지 않도록 조심하는 게 좋겠네요.”

“난 가만히 있을 것 같고?”

“네.”

“…….”

* * *

3월 2일. 한율은 지난달 졸업식이 있던 날 이후로 오래간만에 교복을 걸쳤다. 오늘은 대한예고의 입학식 겸 시업식이 있는 날이었다.

길우성이 교복 위에 코트를 걸치다 말고 머리를 잡으며 몸부림쳤다.

“오늘부터 고3이라니! 고3이라니!”

까치집이 된 머리를 한 채 소파에 앉아 TV를 보던 박가람이 흐뭇한 얼굴로 웃었다.

대학생들은 개강이 다음 주 월요일인 터라, 아침 일찍 나갈 준비를 하는 건 한율과 길우성, 그리고 두 사람을 학교까지 태워다주기로 한 유호뿐이었다.

“우성이랑 한율이도 이제 학교에서 어엿한 큰형이 되었구나.”

그와 조금 떨어져서 편히 앉은 이건우가 말했다.

“후배들 조심해라. 요즘 일부러 데뷔한 애들 속 긁어놓고, 그거 몰래 찍어서 언론사랑 커뮤에 퍼뜨린다고 협박해서 돈 뜯는 애들 많다더라.”

“좀 알려진 연예인이랑 대화한 썰이랑 사진, 녹취 짜깁기해서 그걸로 사람들 관심 끄는 너튜버들도 많고. 요즘은 너튜버로 빵 뜨면 월 몇천은 쉽게 번다잖아.”

“특히 하뉼, 조심해.”

“맞아. 한율이 너 시기 질투하는 또래 애들 은근히 많더라.”

한율은 세수도 안 하고 소파에 모여 잔소리하는 멤버들을 물끄러미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길우성이 몸부림치다 말고 정색하며 말했다.

“동네 백수 형들 같아.”

“아침은 회사에서 먹을까?”

방에서 차 키를 챙겨서 나오던 유호가 물었다.

“아니면 학교 가는 길에 어디 잠깐 들를까?”

“빵집에서 샌드위치랑 커피요.”

“큰형님이 사주시는 건가?!”

“그래, 사줄게.”

느려터지긴 해도 안전한 유호의 차를 타고 도착한 학교. 교문에는 신입생의 입학을 축하한다는 현수막이 높이 걸려있었다.

“수업 잘 받고. 이따가 회사에서 보자.”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형.”

“기사님 감사합니다!”

차에서 내리자 차가운 봄바람이 불어와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성량은 작으나 호들갑스러운 목소리도 실어서.

서한율, 서한율! …태바다!

“병아리 같은 귀여운 신입생들이 당신을 쳐다보고 있어요, 서한율 씨.”

함께 교문 안으로 들어가며, 길우성이 말아쥔 주먹을 마이크처럼 내밀었다.

“기분이 어떠십니까?”

한율은 빵집에서부터 내내 들고 마시던 커피를 천천히 흔들었다.

“커피가 식어서 슬프네요.”

어디까지 번질까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점심시간. 급식소에서 오늘 갓 입학한 1학년들이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벌써 세 번째였다.

“네, 안녕하세요. 점심 맛있게 드세요.”

“네! 선배님도 맛있게 드세요!”

멀리서 힐끗힐끗 쳐다보거나 동물원 우리 속 동물을 관찰하듯 살피는 시선이야 무시하면 그만이지만, 이렇게 직접 찾아와서 인사를 건네는 건 친절한 척 응대해줘야 해서 귀찮다.

신입생들이 멀어지고 나서야 길우성이 멈췄던 대화를 이었다.

“영상은 받은 거 없어?”

“없어. 이번 주 일요일 선동 너튜브 채널에 올라오니까 그때 봐.”

“그때 보배 형이랑….”

“선배님, 안녕하세요!”

네 번째 인사. 이번엔 여학생 3명이었다.

“네, 안녕하세요. 점심 맛있게 드세요.”

한율은 적당히 선을 그으며 다시 길우성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이번 신입생들은 눈치가 없는 건지 아니면 일부러인지, 갈 생각을 안 했다.

“선배님, 다음 주 <별☆일없는 집> 마지막 회잖아요. 결말 미리 알려주시면 안 돼요?”

“네, 안 돼요.”

“에이이.”

“선배님 가까이에서 보니까 피부 진짜 좋으시다. 정말 광고하는 그 화장품만 쓰는 거예요?”

옆의 빈자리가 2개가 아닌 3개였다면 바로 앉았을 것처럼 친한 척이 과하다.

냉정하게 선을 긋지 못하는 입장이란 걸 알고 이러는 건가. 이런 아이들은 어떻게 보내야 좋을까. 한율이 잠깐 고민하는 사이, 옆 테이블에서 굵직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야, 1학년.”

3학년 연극영화과에 재학 중인 고재영이었다.

“연예인 봐서 신기한 건 알겠는데, 선배님들 밥 먹는 거 방해하진 말자. 가.”

연극배우 지망생답게 또렷한 발성이 울렸다. 주변의 다른 3학년이나 2학년 학생들도 ‘왜 친한 척 애교 따위를 부리는 거지’라는 얼굴로 신입생들을 쳐다보았다.

이는 아무리 인기가 많은 아이돌이나 배우라도 어차피 같은 반 친구고 같은 학교 학생인데, 유난을 떨면서 대하는 건 촌스럽지 않냐는 분위기가 은연히 퍼진 까닭이었다. 이미지 때문에 대놓고 싫은 티를 내지 못하는 당사자도 슬쩍 도와줄 겸.

“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선배님….”

신나게 떠들다 기가 눌린 이 신입생들도 며칠이 지나면 이런 학교 분위기에 적응할 터다.

“괜찮아요. 점심 맛있게 먹어요.”

한율은 1학년들이 멀리 가고 난 뒤, 고재영에게 입 모양으로 고맙다고 인사했다. 밥을 다 먹을 때 즈음, 고재영이 빈 식판을 들고 슬그머니 한율의 옆으로 다가왔다.

“혹시.”

“……?”

그러곤 낮은 목소리로 묻는다.

“크래 미랑 선배님 사인 좀 받아줄 수 있냐?”

길우성이 활짝 웃으며 대신 대답했다.

“응, 안 돼. 돌아가.”

“혜승이 누나 사인이라도….”

최혜승은 <별☆일없는 집>에서 ‘태하늘’의 여자 친구 역을 맡은 배우다.

“미안. 안 친해.”

“그래….”

고재영은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터덜터덜 멀어졌다. 길우성이 쯧쯧 혀를 찼다.

“웬일로 나서서 도와주나 했다.”

* * *

3월 4일 일요일 아침. SBC <선데이 동물> 방송이 끝나고 난 뒤 너튜브 <선데이 동물> 채널에 똑순이 가족의 영상이 올라왔다. 섬네일은 옹기종기 모여서 자는 새끼 고양이 네 마리와 눈을 게슴츠레하게 뜬 똑순이의 얼굴이 합성된 컷이었다.

[S사 방송으로 구조되어 K사 아저씨 집에서 지냅니다….]

영상은 짧게 축약된 똑순이 가족의 이야기로 시작되었다. 구조가 된 뒤 새 보금자리에서 지내는 모습과 카메라를 잡고 활짝 웃는 강보배와 길우성의 모습도.

[…이 아깽이들이 건강하게 자라서 입양을 보내게 될 땐.]

[저희가 책임지고, 좋은 집으로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약속!]

새카매진 화면에 뜬 커다란 흰색 자막.

[두 달 후, 2018년 2월 마지막 주….]

널찍하고 깨끗한 거실. 뒷다리에 보조기를 찬 똑순이가 등장했다. 그 뒤로 새끼고양이 네 마리가 졸졸 따라다니다가, 저들끼리 부딪쳐 느닷없이 거실 바닥을 뒹굴며 레슬링 한다.

[※의도한 연출이 아닌, 펫 CCTV에 찍힌 실제 영상입니다.]

[안녕하세요! 저희 왔습니다, 어머니!]

[안녕하세요!]

그때 시끌벅적하게 들어오는 소년들의 목소리. 곧 영상이 셀캠으로 전환되며 서한율의 얼굴이 잡혔다. 강보배와 길우성의 모습도.

[안녕하세요. 이 집 아들, 서한율이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친한 형, 강보배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얘 친구, 길우성입니다. 반갑습니다.]

작년 SBC 음악방송 연말 특집 무대, 꽃단장하고 멋있는 무대의상을 걸친 채 노래를 부르는 그들의 모습이 나왔다. 친절하게 화살표로 가리켜 이름까지 적어주었다.

[한율 친한 형 보배, 똑순이네 집사 한율, 한율 친구 우성]

그러나 이 영상 주인공은 아이돌이 아닌 고양이들이므로, 금세 거실 쿠션에 드러눕는 똑순이와 팔자 좋은 새끼 고양이들의 모습으로 전환되었다.

[오늘은 똑순이의 새끼 중 첫째를 좋은 곳으로 보내는 날입니다. …똑순아.]

[똑순아, 졸려?]

[어우, 똑순이 그 사이 살찐 거 봐.]

사람의 손길을 거부하기는커녕 오히려 더 만지라고 턱을 들고 눈을 감는 똑순이의 모습이 크게 잡혔다. 착착. 영상 양쪽으로 똑순이가 두 달 동안 꾸준히 재활치료를 받으며 나아지는 모습을 담은 사진이 한 장씩 놓였다. 똑순이 새끼들의 성장 과정을 담은 사진도.

4분 30초 남짓 영상은, 각기 새로운 집으로 떠난 새끼 고양이 세 마리의 최근 근황까지 모두 담아 마무리되었다.

-두 마리 데려간 아저씨ㅋㅋ 아깽이들 키울 생각에 손수 캣타워까지 만들어서 설치하고 뿌듯해하시는 모습 왤케 귀엽냐

ㄴ예전에 타 지역 국장했었던 분이래요ㅋㅋ

ㄴ엌ㅋㅋㅋㅋㅋㅋ

ㄴ아니 왜자꾸 K 아저씨들이 S에 나왘ㅋㅋㅋ

-똑순이 사연 최초 제보자는 복 받아야한다.. 그분 아니었으면 새끼들까지 저렇게 좋은 집으로 갈 수 있었겠냐..

ㄴ구조되어도 금세 차가운 우리에 갇혀서 안락사 순서 기다리는 현실의 수많은 고양이에 비하면 정말ㅜㅜ

-고양이 보러왓다가 이 집 아들이랑 아들 친구들한테 치인 건 나뿐인가

-댕댕이도 챙겨줘라!!!

-사촌 누나 모자이크 처리됐는데 왠지 한율이 닮아서 예쁠 것 같음ㅇㅇ

ㄴ피는 못 속이죠ㅇㅇ

ㄴ...가끔 속여요.

ㄴ한율인 엄마 닮았는데영

-이번 주 <별☆일없는 집> 막방입니다! 많은 시청 부탁드립니다!

-아침부터 실검에 뜬 지저분한 마약사범 보다가 여기 오니 힐링ㅋ

포털사이트 실검에도 [똑순이 서한율]이 올라왔다. <선데이 동물> MC가 방송 막바지에 너튜브 채널에 똑순이 근황 영상이 올라왔다고 언급해준 덕분이었다.

“와….”

그러나 구내식당에 밥을 먹으러 모인 어스래빗 멤버들은 실검에 뜬 같은 팀 멤버의 이름이 아닌, 다른 그룹 멤버의 이름을 보며 경악했다.

“라트 선배님 전혀 그렇게 안 보였는데… 좀 충격이다.”

며칠 전부터 시끄러웠던 마약 투약 혐의 아이돌이, 방송국이나 콘서트, RMMA처럼 큰 시상식에서 몇 번 마주쳤던 인기 아이돌인 ‘라트’인 까닭이었다.

“대체 왜 그딴 걸 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네. 아무리 스트레스받아도 건강하고 건전한 방법으로 풀면서 견디는 사람도 많은데… 멤버들이랑 가족, 팬들 생각하면 이러면 안 되지.”

“느낌이 좀 쎄한데….”

“가람이 형, 왜?”

심각한 얼굴로 중얼거린 박가람이 고개를 들었다.

“라트 선배님, 내 고교 동창이랑 엄청 친했거든.”

“형이랑 친한 사이?”

“아니, 나랑은 연락 끊긴 지 좀 된 애 있어.”

“혹시 전에 미랑이 누나가 얘기했던 그 사람? 느낌 안 좋으니까 연락하지 말라던?”

박가람이 놀란 얼굴로 길우성을 보았다.

“그 얘기 나눈 게 몇 달 전인데, 아직도 기억하냐?”

“그때 형이랑 누나가 끝끝내 제대로 대답 안 해줘서 삐쳤었거든.”

“그 좋은 기억력을 왜 공부에 쓰질 않는 거니, 막내야.”

“엣헴.”

“칭찬 아니야, 인마.”

“그럼 설마 형 동창이란 사람도….”

길우성이 목소리를 낮추며 주변을 살폈다. 한율도 밥을 먹으며 핸드폰으로 해당 이슈를 살폈다. 누군가 댓글로 마약사범 아이돌의 친한 연예인 리스트를 띄워놓았다.

-15.블블 민준: 같이 술 마시는 거 몇 번 사진에 찍힘. 가장 최근은 석 달 전.

그러나 해당 아이돌의 인맥이 워낙 화려하고 넓어, 민준만 콕 집어 의심하기보다는 이번 불길이 연예계 어디까지 번져 얼마나 홀라당 태울지 기대하는 사람이 더 많은듯했다.

“그 동창이란 사람도 데뷔했어요? 아니면 지망생?”

“아직 데뷔는 안 했다고 알고 있어. 그런데 걔 기획사가….”

박가람이 머뭇거리다 말을 이었다.

“FJ그룹 계열사라고 알고 있는데…. 아이, 모르겠다. 난 그냥 신경 끊을래.”

“응, 신경 쓰지 마.”

라이언과 이건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사건은 조금이라도 연관이 있다 싶으면 가벼운 의혹도 사실처럼 여겨져서 같이 엮일 위험이 크잖아. 알지? 한번 박살 난 이미지는 다시 되살리기 엄청 어려운 거.”

“자, 이 얘긴 여기에서 그만.”

짝짝. 유호가 박수로 멤버들의 주의를 끌었다.

“다음 주 화이트데이 때 그라에서 할 콘텐츠 회의나 합니다.”

“네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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