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고동 엔테테인먼트의 블루액션 연습실. 연습실에는 7명의 멤버가 모두 나와 몸을 풀고 있었다. 하나같이 어두운 표정으로.
캐비닛에서 미리 수건을 꺼내며 리더가 중얼거렸다.
“이거 매일 분위기 살벌해서 어디 살겠나.”
바로 조금 전, A&R팀과 작업실이 있는 층에서 소란이 일었었다.
회사에 입사한 지 얼마 안 된 A&R팀 직원이, 블블 멤버가 작업한 탑 라인 멜로디 파일을 자신의 팀원이 작업한 것인 줄 알았다며 멋대로 들어버린 것. 그런데 사과는커녕, 되레 그렇게 중요한 개인 작업 파일을 왜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곳에 아무렇게나 열어뒀냐, 너무 흔한 멜로디라서 기성곡인 줄 알았다고 비아냥거리는 바람에 큰 싸움으로 번질뻔했다.
“조금 전에 딱 봐도 고의였지? 일부러 선배님들 화나게 하기 위한 수작질.”
“뻔하지, 뭐. 조금이라도 뭐 하나 트집 잡아 후려치려고 각 잡는 것 같더라. 이제 한 달밖에 안 남았으니까.”
“연습하자, 연습!”
은강이 손뼉을 짝짝 치면서 PC로 향했다.
“뭐부터 할까?”
나름대로 분위기 전환을 위한 시도였으나, 정작 리더가 깊은 한숨을 쉬며 멤버들에게 말했다.
“6년 뒤에 우리도 겪을 수 있는 일일지도 몰라. 다들 미리미리 조심하자.”
“…어.”
“네.”
벌컥. 그때 블루액션의 매니저가 노크도 없이 연습실로 들어왔다. 평소에도 늘 그랬던 터라 멤버들은 말없이 매니저를 쳐다보았다.
매니저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안세현, 나와.”
“저요?”
“그래. 3층 회의실로 와.”
무슨 일이지? 내가 뭐 잘못한 거 있었나?
안세현은 긴장한 얼굴로 멤버들을 돌아봤다가 매니저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일요일이었지만 회사에는 많은 직원이 나와 근무 중이었다. 그러나 스쳐 지나가는 직원들의 표정은 썩 좋지 않았다.
‘선배님이랑 A&R팀 직원 간의 트러블 때문만은 아닌 것 같은데…. ‘밖’에서 무슨 일이 생겼나?’
핸드폰이 압수된 상태라 외부 소식을 알 수 있는 수단은 멤버 7명이 함께 사용하는 사과패드 하나와 연습실의 PC, 그리고 숙소의 TV뿐이었다.
‘설마하니 그 마약 사건… 문제는 아니겠지? 난 클럽은커녕 아직 술 한 잔도 마셔본 적 없는데….’
회의실에는 매니지먼트 부서의 김지영 실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2년 전 뮤닷 <보컬리스트 시즌3>에서 PD와 ‘사적인 만남’을 가졌다고 접대 의혹을 무마했던 주인공.
영업 수완이 좋아, 고동 대표도 웬만하면 건드리지 않는 인물이었다.
“안녕하세요, 실장님.”
고개를 꾸벅 숙이고 인사. 김 실장이 핸드폰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어. 앉아.”
매니저가 문을 닫고 나가자 회의실엔 김 실장과 안세현만 남았다. 안세현은 긴장한 티를 내지 않으려 속으로 천천히 심호흡하며 회의실 안을 둘러보았다. 회의실 한쪽 벽면 진열대엔 고동 소속 아티스트가 탄 트로피나 상패가 보기 좋게 진열되어 있었다. 작년 RMMA에서 블루액션이 받은 신인상 트로피 역시.
“바쁘니까 용건만 간단히 말할게.”
안세현은 다시 시선을 김 실장에게로 옮겼다. 그러나 김 실장은 여전히 핸드폰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세현이 너 2주 전에 산우랑 같이 저녁 먹은 적 있지?”
매니저에게도 허락을 받고 나갔던 터라, 안세현은 순순히 대답했다.
“네, 토요일 밤에.”
“그 후엔?”
“베스트 아이스크림 가게에 잠깐 들렀다가 숙소로 들어갔어요.”
“중간에 누구 만난 사람은 없고?”
만난 사람? 안세현은 잠시 당시의 기억을 더듬었다.
탁. 김 실장이 소리 내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안세현은 구겨지는 김 실장의 미간을 보곤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직감했다.
김 실장이 눈을 부라리며 언성을 높였다.
“밥 먹을 때 여자도 만났잖아!”
“…네?!”
남의 일
김 실장이 놀란 안세현을 몰아붙였다.
“핑크팝 래은이랑 만난 거 다 아니까 솔직히 말해. 회사 나갈 사람 감싸주다 구정물 뒤집어쓰지 말고!”
정말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안다더니. 안세현은 ‘연애’를 목적으로 이성과 만났다는 오해를 산 것일까, 억울함에 덜컥 뛰었던 심장이 벌렁거리는 걸 느꼈다. 한편으론 다른 사고가 팽팽 돌았다.
‘구정물?’
2주 전 주말, 산우와 함께 저녁을 먹었을 때 김 실장의 말처럼 걸그룹 핑크팝의 래은을 만나기는 했었다. 일방적으로.
당시 산우와 저녁을 먹은 식당은 회사와도 가까운, 테이블마다 파티션 혹은 개별실로 되어있어 이 바닥 사람들이 즐겨 찾는 곳이었다. 그래서 마음 놓고 밥을 먹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핑크팝의 래은이 불쑥 들어와 아는 척했다.
『뭐야, 남자랑 왔네?』
그러곤 산우가 금방이라도 욕을 뱉을 것처럼 불쾌한 표정을 짓자, 래은은 어깨를 으쓱이며 도망치듯 퇴장했다.
『맛있게 먹어~.』
그게 끝이었다.
“잠깐 뵙기는 했는데, 만났다기보다는….”
“만난 게 만난 거지. 아무튼 세현이 너도 봤단 소리잖아.”
“그게 아니라요, 실장님. 래은 선배님이 일방적으로 찾아와서 아는 척하고 간 것뿐이에요. 산우 형은….”
김 실장이 안세현의 말을 중간에 잘랐다.
“걔야, 래은.”
“네?”
“라트랑 같이 클럽에 있다가 조사받았던 여돌이 래은이라고.”
“……!”
“너 래은이 예전에 산우랑 같은 연기학원 다녔었던 거 알지?”
“하지만 실장님, 산우 형은 그때…!”
“확인 끝났으니까 나가.”
안세현은 겁이 덜컥 났다. 자신이 무심코 한 대답 때문에 산우가 지저분한 범죄와 연관되었다는 식으로 정황이 흘러갈 것 같은 두려움이 밀려들었다.
“제 말 좀 들어주세요, 실장님! 산우 형은 래은 선배님이 멋대로 찾아와서 아는 척한 거 굉장히 불쾌하게 생각하셨어요! 어떤 사람이랑 한번 스쳐 지나갔다고, 같이 뭘 배웠다고 그 사람도 똑같은 사람인 건 아니잖아요!”
“…….”
그러나 김 실장은 안세현을 빤히 쳐다보다가 안쓰럽다는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순진해서야. 우리가 단순히 한번 스쳐 지나간 것 가지고 이러는 것 같니? 변호사랑 상담할 걸 너한테 다 말해줘야겠어?”
“그, 그런 건 아니지만… 산우 형은 절대…!”
김 실장이 일어나 안세현에게 다가갔다. 그러곤 어깨를 두드리면서 미소 지었다.
“래은이랑 만난 건 이미 산우한테서도 들은 거야. 그리고 우리는 세현이 너도 엮였으면 어떡하나 걱정돼서 그런 거고. 하지만 지금 네 반응 보니까 전혀 몰랐던 것 같네. 미안하다, 세현아.”
자신을 걱정하는 듯하면서도, 산우가 이번 마약 사건과 관련되었다는 뉘앙스를 담은 말들.
‘설마… 산우 형이? 아냐, 그럴 리가 없어. 지금 회사 전체가 블블 선배님들을 못 잡아먹어 안달인데 무슨 말인들….’
흔들리는 믿음 사이로 김 실장의 목소리가 비집고 들어왔다.
“이 얘기가 외부로 새면 블루액션 활동에도 큰 타격이 갈 거야. 그러니 멤버들한테도 여기에서 한 이야기들 절대 비밀로 하고. 알았지?”
* * *
월요일. 학교를 마치고 회사로 온 한율은 2층 사무실 내 회의실로 들어갔다. <별☆일없는 집> 마지막 회 방영을 앞두고 예능 프로그램에서 섭외가 2건이 들어왔다. 하나는 KBC의 토크 프로그램 <목톡톡>. 다른 하나는 tv Mu의 아이돌 관찰 예능 <바다의 백조>.
“이번에 한율이 너한테 들어온 <목톡톡> 주제는.”
오 팀장이 바인더를 펜 끝으로 톡톡 가리키며 무미건조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렇게 다 가져야만 속이 시원했냐.”
“……?”
“이게 주제야.”
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언젠가 자신의 기사에서 본 댓글이 떠올랐다.
-재수 없는 금수저 재능충ㅡㅡ
“나가서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길 원하는지 감이 잡히네요. 그럼 같이 섭외된 사람들은요? 누군지 들으셨어요?”
“아직 게스트 섭외가 다 끝난 게 아니라서, 이번 주 금요일 사전 미팅 때 알려주겠대. 녹화는 12일이고.”
“섭외가 안 끝났다고요? 바로 다음 주 녹환데?”
사실 이번 섭외도 급하게 온 감이 없잖아 있었다. 본래는 녹화 2, 3주 전에 미리 연락이 오는 게 보통인데.
“이건 다른 사람에게 들은 이야긴데, 전에 미리 찍었던 1회분 하나를 통째로 날리게 돼서 <목톡톡> 측 스케줄이 꼬였다고 하더라.”
보기엔 별거 아닌 프로그램이라도 한 회차를 찍는 데에 적잖은 인력과 비용이 소모된다. 그래서 녹화를 마친 출연자의 불미스러운 일이 드러나도 될 수 있는 한 편집으로 잘라서 살리지, 한 회를 통째로 날리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정말 큰일이 아니고서야.
그리고 최근에 터진 불미스럽고 큰일이라면.
“라트 선배님이 나왔던 거예요?”
오 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필 또 주제가 ‘화려한 인맥왕 특집’이었던 터라, 편집을 아무리 잘해도 안 되겠다 싶었겠지. 라트 친구로 나온 배우 소속사 측에서도 자기네 아티스트도 같이 편집해달라 요청까지 했다고 하고.”
인터넷 기사로 봤을 땐 마냥 남의 일이라 여긴 사건이었건만, 이런 식으로 파장이 미치는구나.
한편으론 한숨이 나왔다. 라트가 마약사범으로 조사를 받은 건 몇 달 전. 그런데도 아무렇지 않게 방송 스케줄을 잡고 녹화까지 했다. 본인의 범죄 이력이 드러나면 이렇게 여러 사람에게 큰 피해가 갈 걸, 전혀 예상하지 못할 리 없을 텐데.
“그럼 <바다의 백조는>….”
한율은 다른 프로그램에 대한 설명까지 들은 후 회의실을 나왔다. 회의실 근처에 있는 신인개발팀 쪽에서 나누는 대화가 자연스레 들렸다.
“이번 달에 데뷔조 애들 첫 평가 있잖아요. 성적표 기재 항목을 조금 더 다양하게 세분화하는 게 어떨까요? 보컬이랑 댄스 점수만 기재하니까 랩 포지션 친구들이 주눅이 든다고 하더라고요.”
“글쎄요…. 한번 생각해봅시다. 애들 숙소는 괜찮대요?”
지난달에 뽑힌 여자 연습생 데뷔조에 관한 이야기였다.
이번에 걸그룹 데뷔조로 뽑힌 인원은 크래처럼 7명. 한율과 가끔 톡으로 대화를 나누는 박세은도 그 안에 포함되었다. 데뷔 예정 시기는 올해 가을로, 숙소는 어스래빗이 이전에 사용했던 곳.
한율은 문득 박가람이 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가끔 정~말 비주얼이 소름 끼치거나 징그러운 것들이 있거든? 그런데 전에 우리가 살던 숙소에, 있었어.』
정말 그런 귀신이 있다손 쳐도, 어스래빗은 박가람을 제외하고 귀신의 존재를 느낀 멤버가 한 명도 없었다. 그러니 데뷔조 애들도 별 탈 없지 않을까.
‘아직 박세은도 귀신의 귀 자도 안 꺼내고 있고.’
“한율아.”
소소하고 심심한 생각을 하면서 사무실을 나가려는데, 크래와 박현우를 담당하는 매니지 A팀 팀장 유재용이 한율을 불렀다.
“네, 팀장님.”
“너도 이번 주 일요일에 있는 왕 선생님 아드님 결혼식 가지?”
왕연수는 한율이 데뷔조에 들어갔을 때부터 한율의 노래를 봐주는 트레이너이자 전직 가수였다. 그에게 개인레슨을 받은 뒤로 노래 실력이 기초부터 탄탄하게 다듬어지고 성장하는 느낌을 받아, 한율은 레슨이 선택사항이 된 후에도 그에게 트레이닝을 받고 싶다 청했다. 그리고 스케줄이 없을 땐 일주일에 세 번, 그에게 가르침을 받는 중.
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가요.”
아무리 그가 회사로부터 미리 적잖은 레슨비를 받고 있다 하더라도 좋은 스승이다. 그런 사람의 경조사를 챙기는 것도 사회생활의 일부.
“혹시 모르니까 토요일에 어떤 디자인 옷 입고 갈 건지 미리 알려주면 안 될까?”
“왜요, 유 팀장님?”
자리에 앉은 오 팀장이 의아한 얼굴로 끼어들었다.
“크래 멤버도 왕 선생님 아드님 결혼식에 참석해요?”
“네, 몇 달 전부터 라나도 봐주고 계시거든요. 그런데 같은 회사 소속에, 같은 장소에 가면서 옷차림이나 소품이 조금이라도 겹치면 이상한 소리가 나올 게 뻔하잖아요.”
“아아. 조심해서 나쁠 건 없죠.”
오 팀장이 고개를 끄덕이곤 말을 이었다.
“마침 그날 한율이가 더순한화장품 브랜드 팬미팅이 있거든요? 제가 스타일리스트에게 말해둘게요.”
“그래요? 그럼 부탁드릴게요.”
싱겁게 매듭지어진 용건.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래, 수고해.”
우웅.
“……?”
인사를 하고 다시 걸음을 옮기려는데 이번엔 핸드폰이 울렸다. 지난번 번호를 교환한 후 1, 2주에 한 번씩 심심한 안부 인사를 주고받던 이해원이 톡을 보냈다.
-[한율아, 너희 팀엔 클럽 다니는 멤버 없지?]
한율은 망설임 없이 답변을 적어 보냈다.
[네.]
-[다행이다ㅎ]
[무슨 일 있어요?]
이해원의 대답은 한율이 지하로 내려갈 때 즈음 왔다.
-[ㄹㅌ가 잡힌 곳 외에 ㅅㅇㄷㅅ이란 곳을 언급 했나 봐. 그래서 전담팀 경찰이 그곳에 한 번이라도 출입한 아이돌 리스트를 뽑아 은밀히 조사를 진행할 거라고 해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혹시 모르니 톡방 나갔다가 들어올게.]
VEL엔터와 커넥션이 있는 곳에서 흘러들어온 정보일까.
마약팀이면 이런 간단해 보이는 정보도 외부로 유출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일 테지만, 이 세계든 저 세계든 사욕을 위해 국가기밀까지 팔아넘기는 사람들이 있으니 그리 놀랍지도 않다.
한율은 작게 한숨을 쉬며 톡방을 나갔다. 3분 후, 이해원이 톡을 보내며 새로운 톡방이 만들어졌다.
-[고구마랑 닭가슴살 지겨워ㅜㅜ]
[영양불균형 조심하세요. 모자란 영양소는 영양제로 보충하시고. :)]
-[ㅇㅇ 한율이 너도 잘 챙겨 먹어^^]
레슨과 연습을 끝내고 자정이 넘어 숙소로 돌아갈 때 즈음, 인터넷 실검 1위엔 [라트 공식입장]이 올라와 있었다.
호기심으로 시작했던 범죄의 늪에 빠져, 어쩌고저쩌고.
공인으로서 사회적 물의를 빚은 죄를 반성하는 의미로 팀 탈퇴를 하고 자숙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저지르지 않은 범죄를 비롯한 허위사실을 유포하는 사람에겐 법적 대응을 하겠다는 덧붙임까지.
여론은 좋지 않았다. 그가 경찰조사를 받은 뒤에도 아무렇지 않게 활발히 활동한 까닭이었다. 또한 팀 탈퇴와 자숙만 적고, 연예계 은퇴란 말은 어디에도 없다며.
-더 심한 약을 해도 다시 돌아와서 드라마 주연 맡고, MC맡는 사람들이 천진데 왜 얘만 못 잡아먹어 안달임?
-음주운전을 하고도 뻔뻔하게 TV에 나오는 애들도 많은데
-이때다 싶어서 몰려들어서 욕하는 애들은 한 번도 실수한 적 없나봄ㅋㅋㅋㅋ 라트가 은퇴하면 니네한테 10원 한 장 떨어지냐?
-라트 탈퇴 절대 반대
-잘나갈 땐 쟤가 뭔 공인이냐 비아냥거리고, 욕하고 싶을 땐 공인 취급하고ㅋㅋㅋ 이중성 역겹네ㅋㅋㅋ
이런 류의 옹호 댓글도 종종 보였다.
“붕어빵 먹고 싶다.”
그러나 어스래빗에겐 모두 다른 세상의 일, 남의 일이었다.
“운전면허 필기는 공부 안 하고 가도 대부분 합격이라며? 정말이야?”
“그래도 한번은 훑어봐라….”
“난 호두과자.”
“밤에 무슨 먹는 얘길 하고 있어. 바로 옷 갈아입고 자.”
삑삑삑삑, 띠릭.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현관문을 여는 멤버들 사이엔 평화로운 잡담만 떠돌았다.
한율은 마지막으로 현관문을 닫고 들어오는 유호에게 물었다.
“형도 클럽에 가본 적 있어요?”
“클럽? 스무 살 때 딱 한 번 갔었어. 왜?”
이해원에겐 클럽에 다니는 멤버가 없다고 딱 잘라 대답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었더니 역시나.
4년 전에 딱 한 번 가본 사람까지 소환하진 않겠지. 한율은 그리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이곤 의아한 얼굴로 이쪽을 쳐다보는 이건우와 시선을 마주쳤다. 이건우가 눈치껏 대답했다.
“난 한 번도 안 가봄. 그런데 그건 왜 물어?”
“요즘 클럽에서 일어난 범죄로 시끄럽잖아요. 그래서 클럽이 정말 그렇게 위험한 곳인가 해서요.”
“그렇게 말하니까 꼭 범죄의 온상지 같다. 나도 한 번도 가본 적 없지만.”
박가람이 키득거리며 말하자 강보배가 미간을 찡그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지 않아? 여러 매체에서도 늘 그런 이미지로 나오잖아.”
“술 먹고 시비가 벌어지거나 폭력 사건이 발생하고, 성범죄에 마약에, 조폭들 이권 다툼 등등.”
길우성이 예시를 늘어놓자 유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래서 나도 처음 가기 전엔 그런 일 벌어지는 거 아닐까 완전히 겁먹었다니까. 그런데 막상 가보니까 시끄럽고 산만하기만 하더라. 모르는 사람이 와서 말 거는 것도 부담스럽고, 재미도 없고.”
“맞는 사람은 정말 재밌다고 하는데…. 왠지 나도 별로일 것 같다.”
라이언이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가면 이상한 사진 찍혀서 협박받는다고 그랬어. 그래서 위험하대.”
“누가?”
“찬형이가.”
“어… 있을 수 있는 일이긴 한데 조금 극단적인 것 같기도.”
올해 스무 살이 된 멤버들도 클럽엔 근처도 안 가본 티가 났다. 별말 없이 멀뚱멀뚱 듣고만 있는 차남석이야, 술 한 잔만 마셔도 잠드는 인물이니 두말할 것도 없고.
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앞으로도 가지 말아요, 우리.”
같은 드라마 말하는 거 맞아?
포털사이트 연예뉴스란이나 실검은 라트가 저지른 범죄나 공식 입장으로 떠들썩했으나, 전부 그와 관련된 기사로 도배된 건 아니었다.
화제성이 있는 예능이나 드라마, 그라의 클립 영상이 모인 추천 영상란. 몇 시간 전에 방영된 <별☆일없는 집> 15화의 클립 영상도 그곳에 올라왔다.
[꽃돌이 삼 형제 이대로 못 잃어]
리뷰 기사도 메인에 떴다.
[<별☆일> 마지막 화까지 하루, 꽉 닫힌 해피엔딩일까?!]
한율은 침대에 누워 TV로 <별☆일없는 집> 15화 VOD를 재생했다. 이전 내용과 더불어 촬영했을 당시의 기억이 함께 떠올랐다.
영어 토론대회 예선을 통과한 ‘태바다’는, ‘태산’ 덕분에 학교에서도 마음 편히 피아노 콩쿠르 준비를 하게 된다.
폭풍전야를 방불케 하는 평화로운 나날.
주조연 격인 피아노 레슨 스승인 ‘김그림’의 과거가 드러나는 사건과 엮이기도 하며 시간이 흐른다. 그리고 며칠 후 본선 대회로 가던 중, 태바다는 ‘김그림’에게 사고가 생겼다는 연락을 받고 급히 병원으로 향한다.
병원은 아버지가 사고로 입원한 뒤 장례까지 치렀던 곳. 그곳에서 태바다는 아버지의 임종을 지켰던 의사를 우연히 만난다. 그리고 이야기를 나누던 중 충격적인 사실을 접한다.
『장기… 기증을 했다고요? 아버지가요?』
『몰랐니? 너희 아버지가 생전에 장기기증 희망 등록자셔서 너희 큰형이 서면 동의를 하고…. 정말 몰랐구나?』
태바다는 아버지의 사고 소식을 접했던 당시의 기억을 떠올린다.
잿빛으로 물든 병원 응급실.
도착했을 땐 이미 아버지가 사망 판정을 받은 뒤였다. 그 옆엔 몇 년 만에 보는 큰형 ‘태하늘’이 있었으나, 아버지가 사망했다는 충격 탓에 눈에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사고 경위니, 병원비니, 장례식이니 복잡하고 어려운 이야기를 하는 어른들의 이야기 역시.
태바다가 정신을 차렸을 때, 서서히 색이 돌아온 시야는 눈물로 일그러진 아버지의 영정사진을 담고 있었다.
‘그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충격이 너무 커서, 큰형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내가 제대로 기억 못 하는 건지도 몰라.’
경계심을 세우고 까칠하게 대들어도, 연극배우의 꿈을 접으며 동생들을 챙겨주려던 태하늘이, 일부러 그 사실을 숨겼을 리 없다는 생각.
터덜터덜 김그림의 입원실로 향하는 태바다. 그러다 평소엔 무심코 지나쳤던 한 장의 포스터를 보곤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춘다.
[생명과 사랑을 나누는 장기기증]
포스터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태바다의 시선이 차츰 내려가다 크게 흔들린다.
[장기기증자 예우: …장례비 및 병원비 지원]
태산으로부터 아버지가 보험을 들지 않았고, 병원비나 장례비로 오히려 금전적인 여유가 없어졌다는 걸 알게 되어 오해를 푼 지 며칠 안 된 시점이었다. 그래서 아무것도 모르고 태하늘에게 대들었던 행동을 뉘우치고, 경계심을 지우려 노력하며 서서히 사이가 좋아지고 있었건만.
어쨌든 이런 전개 덕분에 13화, 14화는 시청자들의 항의가 제일 많은 구간이었다.
-힐링 드라마 지향한다면서!!!
-아무리 갈등 요소가 더욱 극적인 감동을 줄 수 있다곤 하지만.. 딱 5화 정도까지가 훈훈하고 좋았다.
-전개 왜 이럼ㅡㅡ 애들 연기력 제대로 낭비시키네
그러나 시청률은 오히려 올랐다.
태하늘을 향한 태바다의 의심과는 별개로, 태하늘이 다시 연극무대에 올라 뛰어난 연기실력으로 이전 극단 사람들에게 소소히 복수하는 등의 사이다 요소가 곳곳에 배치된 까닭이었다. 여기에 태하늘의 연기연습을 도와주다가 뜻밖의 재능을 발견한 태산, 눈에 띄게 향상된 피아노 실력으로 콩쿠르 결과가 기대되는 태하늘까지.
이렇게 대리만족을 충족시키는 요건을 두루 갖춘 상황에 드리워지는 먹구름이 썩 달가울 리가 없었다.
그래서 욕하면서 본다.
어떻게 풀리나 보자.
[너 여기에서 뭐 해?]
지난주 14화 말미. 태바다는 태하늘이 집을 비운 사이 그의 방을 뒤진다. 집 한 채만 달랑 있을 뿐 생활비가 빠듯하여, 동생들의 뒷바라지를 위해 꿈을 포기하고 알바를 하던 큰형의 모습이 전부 거짓이 아니었기를 바라며.
[설마… 지금 큰형 방 뒤지는 거야?]
그리고 은밀한 곳에 감춰진 연극 대본 하나를 손에 쥔 순간, 태산에게 들키면서 끝.
15화는 이후의 전개였다.
“…….”
침대에 누운 채 눈만 끔뻑이면서 보기를 30분. 한율은 리모컨을 들어서 VOD 재생 종료 버튼에 이어 TV 전원 버튼을 눌렀다. 따뜻하고 푹신한 이불 속에 있자니 너무 졸렸다.
‘아침에 차에서 마저 보자.’
스륵 눈을 감기 무섭게 한율은 깊은 잠에 빠졌다.
* * *
“아, 찝찝해.”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길우성이 인상을 쓰며 중얼거렸다. 1교시부터 수업이 있어서 함께 나온 박가람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왜? 변비야?”
“그게 아니라 이상한 꿈을….”
타악. 꿈이란 단어를 내뱉기 무섭게 박가람이 길우성의 팔을 때렸다.
“왜 때렷!”
“아침부터 꿈 얘기하는 거 아니다. 적어도 점심시간 지나서 해.”
“왜죠.”
“불길해 보여도 좋은 해몽을 지닌 꿈이면 본인이 아닌 듣는 사람에게 그 복을 넘기는 거고, 나쁜 해몽을 지닌 꿈이면 본인의 현실이 된다더라.”
“뭐 그런 미신을 믿어.”
“못 믿겠으면 지금 털어놔 보시던가.”
“…….”
막상 미신이라고 무시하기엔 꺼림칙한지, 길우성은 입을 꾹 다물고 조금씩 올라오는 엘리베이터 숫자를 바라보았다. 한율은 차에서 드라마를 보기 위해 미리 귀에다 이어폰을 꽂았다.
“그런데 형은 면허 언제 따?”
“이번 주 주말에 필기부터 따고 학원 다니려고.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당장 끌고 다닐 차도 없는데 따봤자 장롱면허로 감만 썩히는 거 아닌가란 생각도 들고.”
“호 형 차를 끌면 되지?”
“오호. 그럼 호 형 차의 다섯 번째 스크래치는 내 몫이군!”
한율은 지하 주차장에 도착할 때까지 끊이질 않는 그들의 잡담을 들으며 생각했다. 학교 다닐 때를 제외하곤 거의 온종일 붙어 다니는데, 무슨 할 말이 이렇게 많은 건지.
“야, 서한율.”
한율처럼 내내 조용히 있던 차남석이 차를 타자마자 말을 걸었다.
“너 혹시 안세현한테서 연락받은 거 있냐?”
“그 형 폰 돌려받았대요?”
“그건 아닌 것 같아. 나한테 이런 DM만 보내고 따로 연락이 없는 걸 보면.”
차남석이 보여준 핸드폰엔 [대나무숲이 필요해... 나 진짜 답답해 미칠 것 같다... 아니, 대나무숲도 위험하겠다ㅋ]란 DM이 떠 있었다.
“회사에서 무슨 일 있는 것 같긴 한데…. 민준 선배님한테 따로 들은 말 없지?”
“있어도 얘기하겠어요?”
“하긴.”
“블루액션 아직도 폰 금지야?”
뒷좌석에 탄 길우성이 놀란 목소리를 냈다.
“작년에 신인상까지 받았는데?”
“음방에서 1위 해야 돌려주겠다고 했단다.”
“너무행.”
“데뷔하고 3년 지나도 폰 못 받는 애들 많잖아. 괜히 한눈팔거나 몰래 연애하거나 악플 찾아볼까 봐 금지라곤 하는데… 통제 쉽게 하려는 목적이 더 크겠지.”
지하 주차장을 빠져나오자 숙소에선 흐릿하기만 했던 하늘이 비를 뿌리고 있었다. 조수석에 앉은 박가람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는 열심히 핸드폰으로 퍼즐게임 중이었다.
“멀리 갈 게 뭐 있어. 크래도 데뷔하고 1년 동안은 폰 금지였는데.”
“허얼….”
길우성이 길게 탄식하며 운전 중인 조유찬을 쳐다보자, 조유찬이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스케줄 있을 때만이었어, 스케줄 있을 때만! 비활동기엔 다 돌려줬다고!”
“그러고 보니 크래 선배님들 데뷔 초에 여자 매니저분도 숙소에 같이 살았었지….”
“으으…. 상상만 해도 숨 막힌다.”
“…….”
조유찬은 더는 아무 말 않고 입을 꾹 다물었다.
몇 시간 후. 점심시간 종이 울리자 길우성이 기다렸다는 듯이 간밤에 꾼 꿈에 대해 나불거렸다. 사자와 호랑이를 비롯한 고양잇과 동물들이 죄다 길우성을 외면하고 히말라야를 등반하는 꿈이었다고.
“너무 슬프잖아! 내가 사랑하는 냥냥이들이 날 외면하고 산이라니! 산이라니!”
“…….”
“야야야.”
괴로워하는 길우성을 한심하게 쳐다볼 때, 올해도 같은 반이 된 황성연이 다급하게 그들을 부르며 다가왔다. 마치 알려져선 안 될 큰일을 알려줄 것처럼 주변을 크게 둘러보더니, 길우성과 한율에게 핸드폰을 내밀었다.
“이거 봤냐?”
커뮤니티 사이트의 연예 게시판.
[제목: 이번 ㄹㅌ사건 연생들도 같이 걸린 것 같음ㅋ]
[나 아는 사람이 경찰서에서 일하는데, 하나같이 몸매 잘 빠진 애들이 우르르 얼굴 가리고 ㅁㅇ팀으로 가는 거 봄
뭔 일인가 유심히 살폈는데 그 중에 BJ ㄷㅇㄷㅇ이 있었다 함ㅇㅇ ㅅㅌㅁㅅ 기획사 연습생이었다고, ㅅㅌㅁㅅ 멤버랑 사진 찍은 거 SNS에 올리고 평소에 허세퀸 컨셉질하면서 벌거벗고 관종짓해서 ㅅㅌㅁㅅ 팬들한테 죽일 ㄴ으로 찍힌 애ㅋ
근데 SNS에 연습생 친구라고 같이 찍힌 애들이랑 같이 경찰서에, 그것도 ㅁㅇ팀 경찰이랑 동행한 시기가 이상해서 너 혹시 몇월몇일에 경찰서 갔다왔냐 물어보니까 바로 SNS 비공 돌리고 채널엔 당분간 아파서 쉰다고 공지 띄움ㅋㅋㅋㅋ
(증거 스샷)
ㄷㅇㄷㅇ이 친분 자랑한 연습생 애들 대부분 ㅅㅌㅁㅅ소속사거나 과거형인 애들인 거 알지?]
“이게 정말이면 FJ그룹 계열사 회사 연생들이 적잖이 연루됐단 소린데….”
한율과 길우성이 게시글을 다 읽은 듯 보이자 황성연이 조심스레 물었다.
“너희 드라마 쪽에선 별말 없었냐?”
이번 사건에 스타믹스의 지헌도 얽힌 거 아니냐 에두른 의혹.
한율은 금시초문이란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전혀.”
“전에 가람이 형이 한 얘기 기억나냐?”
급식소로 향할 때 길우성이 한율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굉장히 심각한 얼굴로.
“무슨 말?”
“가람이 형이 손절한 친구도 그 계열사 연습생이라고 했었잖아.”
“별일이네. 확실치 않은 소문에 반응을 다 하고.”
길우성이 당연하지 않냐는 표정을 지었다.
“단순히 편견이나 차별, 인성 파탄 모략질 등등이 아닌 범죄 사건이잖아, 범죄. 경계하고 조심해야지. 그러니 써한 너도 당분간, 어? 그 선배랑 만나지 마. 연락도 하지 말고. 괜히 오해받으면, 어? 너뿐만이 아니라, 어? 우리 팀까지, 어?”
“가람이 형 닮아가냐?”
“어?”
“선배님!”
그때 1학년 후배들이 우르르 몰려오더니 꾸벅 고개를 숙였다.
“어제 드라마 정말 잘 봤습니다!”
“우성 선배님 댄스 커버 너튜브 잘 봤어욥!”
“혹시 떠비, 배우 오디션은 안 보나요?!”
“응, 안 봐.”
“네! 그럼 점심 맛있게 드세요!”
“오늘 막방 본방 사수할게요!”
왔을 때처럼 활발하고 쿨하게 물러가는 그들을 보며 길우성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음, 우리 삐약이들이 며칠 사이에 학교에 잘 적응했군!”
황성연이 보여주었던 커뮤니티 사이트의 게시판은 조만간 더 큰 일이 벌어질 것처럼 소란스러웠으나, 한율이 학교 수업을 마치고 회사로 가서 레슨과 연습을 받는 동안은 잠잠했다.
저녁 8시, 단체안무 연습 시간.
“드라마는 어디에서 볼까? 연습실? 아니면 일찍 숙소로 들어가서 편히?”
지난번 차남석이 출연한 드라마의 마지막 화를 다 함께 봤듯이, 오늘도 그럴 모양이었다.
“숙소에서 편히, 한 표.”
“갈 때 붕어빵이랑 호두과자도 사 가자.”
“미래의 네가 지금의 널 굉장히 원망하게 될 일은 만들지 않는 게 좋지 않을까?”
“인간이란 자고로 후회의 종족이지.”
“뭔 소리냐, 비만 프레리독.”
“싸우자, 이건우!”
유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큰 소리로 말했다.
“연습실에서 보자. 왜냐하면 내가 오늘 작업실에서 자야 할 것 같거든.”
“리더의 월권이다! 우우!”
“호 형 은근히 뻔뻔해진 것 같지 않아? 처음 여기에서 만났을 때만 해도 다정한 호구 형이었는데.”
“다 들린다, 우성아.”
“그런데 형들, 내가 찍은 드라마 줄거리는 알아요?”
늘 방송 시간이 연습 시간과 겹쳐 한율도 제시간에 드라마를 본 적이 없었다. 숙소로 돌아가면 다들 피곤해 금방 뻗었고.
유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따로 떨어져서 살았던 꽃돌이 삼 형제의 가족 화합 힐링 드라마잖아.”
“그건 드라마 소개에 나온 문구고. 본방 챙겨보는 친구가 말하기를 가족 스릴러라던데? 부모님이 모종의 음모로 연달아 사고사로 위장된 타살사건이 중점이라고.”
“무슨 소리야. 리뷰 기사만 봐도 예체능 성장드라마던데. 한율이가 피아니스트 지망생으로 나오잖아. 큰형도 연극배우고.”
“현우 말론 같은 핏줄이라도 인간은 제각기 다른 개체란 교훈을 주는 드라마라고 하던데?”
“강보배. 박현우가 하는 말 진지하게 듣지 마. 해로워.”
“아니야, 한율이가 일진 한 대 후려갈기는 씬이 기사로 떴었잖아. 그래서 지헌 선배님이 호출되고. 사춘기 동생 둘을 키우면서 고생하는 젊은 가장의 힘든 여정을 그려낸….”
“…….”
한율은 괜히 물어봤다고 생각하며 입을 다물었다. 라이언이 미간을 찡그리며 고개를 기울였다.
“다 같은 드라마 말하는 거 맞아?”
저지른 잘못이 없으면
<별☆일없는 집> 마지막 회가 끝났다.
메인 OST가 흐르고 엔딩 크레딧과 함께 드라마 촬영 현장 사진이 한 장씩 떴다. 대본을 든 채 동작의 합을 맞추는 모습, 스태프와 웃으면서 이야기를 하는 배우들의 모습, 지헌이 피아노를 치고 한율과 박현우가 열창하는 듯한 모습, 극 중에서는 서로 으르렁거리던 일진 역의 아이들과 사이좋게 벤치에 나란히 앉아 사과팩 주스를 마시는 모습 등등.
마지막으로 배우들과 전 스태프가 모여서 찍은 사진이 떴다.
[지금까지 <별☆일없는 집>을 사랑해주신 시청자분들 감사합니다!]
“와.”
다음 주부터 <별☆일없는 집> 후속으로 방영되는 새 드라마의 예고가 이어졌다.
길우성이 한율을 보며 감상을 읊었다.
“뭐가 뭔지 잘 모르는 부분이 있었지만, 쫄쫄 굶어가며 카메오로 출연한 보람이 있었다.”
“장남이 연기 몰입을 위해 가족까지 이용하는 소시오패스가 아니라서 정말 다행이다. 까딱했다간 진짜 소름 끼치는 스릴러 반전으로 끝날 뻔했던 거잖아.”
“지난달에도 말했지만, 촬영하느라 수고했다.”
“종방연은 언제야? 내일?”
연습실 바닥에 드러눕거나 앉아서 TV를 본 멤버들이 하나둘 일어났다. 한율도 자리에서 일어나 깔고 앉았던 방석을 집었다.
“네.”
“내 몫까지 맛있는 거 많이 먹고 와. 올 때 붕어빵이랑 호두과자 사 오는 거 잊지 말….”
“아 쫌.”
드라마가 끝난 건 밤 11시. 늦은 시간이었으나, 한율의 핸드폰은 드라마 잘 봤다는 부모나 지인들의 메시지로 한참을 울었다. 포털사이트에는 [별일없는집 결말]이 실검에, 연예뉴스란 메인에도 리뷰 기사가 실시간 조회수 순위권에 올라왔다.
[<별☆일없는 집>의 별일 없는 해피엔딩!]
[tv Mu 월화드라마 <별☆일없는 집>이 16회를 마지막으로 종영했다. <별☆일없는 집>은 어릴 적 부모님의 이혼으로 헤어졌던 삼 형제가, 부모의 연이은 사고로 15년 만에 다시 한 집에 모여…(중략).
마지막 회에서 태하늘(유지헌 분)은, 전 극단에서 마지막으로 연기했던 가족 간의 보험금을 노린 스릴러 연극 대본이 자신을 향한 오해에 기름을 들이부었다는 걸 깨닫고…(중략)]
-진짜 작은 의혹이 하나씩 모여서 큰일 있는 집으로 보였지만, 사소한 오해만 있었을 뿐 별일 없는 집이었다..
-결말이 조금 허탈하기는 했는데 장남이 소패였다는 반전 있었으면 당장 방송국 쳐들어갔을 정도로 빡쳤을 것 같긴 함ㅋㅋㅋㅋ
-그러게 왜 그런 대본을 뭔가 의미심장한 보물처럼 숨겨서 오해를 사ㅠㅠㅋㅋㅋㅋㅋ
ㄴ실상은 팽당한 마지막 연극이라 꼴도 보기 싫어서 걍 옷장 깊숙한 곳에 쑤셔 넣었던 건뎈ㅋㅋㅋㅋ
-아버지가 낸 사고로 다른 사람도 크게 다치고, 그 사람의 가족도 어려워졌다는 걸 동생들한테 안 알리려고 입꾹..ㅠㅠ.. 처음부터 사실대로 말했으면 좋았잖아8ㅂ8
ㄴ그럼 삼 형제 모두 죄책감으로 어깨 늘어뜨리고 꿈이고 뭐고 다 포기한 채 우중충하게 살앗겟죠
ㄴ바다는 확실히 일찌감치 피아노 진로 포기했을 것 같긴 함ㅇㅇ..
-카메오로 출연해주신 블랙블러드 민준, 어스래빗 멤버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흐뭇]
ㄴ스타믹스 멤버들은 다 어디 감?
ㄴ드라마 중간중간 카메오로 몇 명 나왔었어요ㅎ
-지헌 초반엔 동생들하고 비교돼서 좀 불쌍했는데.. 보다 보니 극 중에서 외모와 주변 사람들의 시샘 때문에 연기실력 폄하되고, 좋은 역 못 따는 태하늘 그 자체였다. 사랑해.
ㄴㅇ1ㅈㅅ이었다면 더...
ㄴ아 쫌ㅡㅡ
-드라마 촬영 초반에 일어난 사고는 어떻게 해결됬냐? 사고친 스태프 동생이 빡센 근무때문에 일어난 사고라고 일인시위하지아낫나?
여기에 또 다른 기사도 올라왔다.
[서한율, 미국 드라마제작사로부터 러브콜 받아]
[6일 종영된 <별☆일없는 집>에서 피아니스트가 목표인 ‘태바다’ 역을 섬세한 감정연기로 소화한 서한율이 작년, 미국의 드라마제작사 ‘B. DA 스튜디오’의 캐스팅디렉터로부터 러브콜을 받았던 사실이 알려졌다.
캐스팅디렉터는 <하울링> 1화와 <객귀, 해>에서 서한율의 연기를 감명 깊게 보았으며, 그의 유창한 영어 실력에 감탄하며 서한율의 소속사인 WB래빗 엔터테인먼트 측에 서한율의 프로필과 PR영상을 요청했다고 한다.
한편 WB래빗은 연기보다는 가수의 일, 해외 활동보다는 국내 활동에 더 전념하고 싶다는 아티스트 본인의 의사를 존중하여 정중히 거절의 뜻을….]
-깃펜??? 엠마 애커먼이 나오는 그 깃펜에서 러브콜을 받았었다고????
-미쳤네;
-정말 내면연기 갓갓인 애는 월드에서도 통하는 구나ㅇㅇ
-ㅅ1ㅂ유난은ㅋㅋㅋ 프로필이랑 PR 요청받은 애가 수백 명일 텐뎈ㅋㅋㅋㅋㅋ
ㄴ넌 그 수백 명에도 못 드는 방구석 열폭러9ㅇㅂㅇ)/yo♡
-중요한 건 서한율이 먼저 미드 찍겠다고 나선 게 아니라 저쪽이 먼저 알아보고 보냈다는 거잖음 괜히 뿌듯ㅎㅎ
-왜!!!! 안 가!!! 왜!!! 세계가 널 부르는데!!!!
-율톢 재능의 끝은 어디까지인가..☆
-널 품기에 한국은 너무 좁다.. 가라.. 아니.. 가지 마라.. 아니.. 그래도 울 톢이 재능이 빛을 발하려면 가야.. 아니.. 아직은 안 돼..
“…….”
다음 날 아침이 되고 나서야 미국의 드라마제작사 러브콜 운운 기사를 본 한율은 한숨을 내쉬었다. 누가 봐도 자신을 띄워주기 위해 회사 홍보팀에서 흘린 기사였다.
[어스래빗 한율, KBC <목톡톡> 두 번째 출연 예정! 녹화는]
이 기사도.
‘쟤가 그 정도는 아니지 않나?’라고 생각해도, 잘 모르는 사람에겐 ‘그 정도’로 보이게끔 포장해서 내보내 기정사실로 만드는 흔한 홍보 방식.
덥석.
“이 기사 진짜야? 너 진짜 미국에서 온 연락 걷어찬 거냐고!”
한율은 자신의 어깨를 붙잡고 호들갑을 떠는 길우성을 바라보았다.
“어.”
“친구 덕에 미국 좀 가보려고 했더니!”
“안 그래도 후회 중이다.”
“뭐?! 우릴 버리고 미국엘 가려고 했다고?! 이런 배신자!”
“…….”
학교로 가는 차 안. 조수석에서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던 이건우가 웃으며 돌아보았다.
“오늘 좀 과하다, 우성아. 한율이가 ‘이 처도른 새끼는 뭐지’라고 눈으로 욕하는 거 안 보이냐.”
“그렇지?”
길우성이 어깨를 으쓱였다.
“나도 내뱉으면서 이건 많이 미친놈 같다 생각하긴 했어.”
“건우 형.”
“어?”
“전에 그 동기분은 잘 지내요?”
<별☆일없는 집> 초반에 스태프의 실수로 세트가 무너진 사고. 당시 사고로 배우 이제설을 비롯해 스태프 몇 명이 크고 작은 부상을 당했다. 그때, 해당 사고는 단순히 개인의 실수가 아니라 장시간 노동으로 몬 GT픽처스 측의 잘못이라고 시위하던 스태프의 동생.
이건우가 운전 중인 조유찬의 눈치를 힐끗 살피더니 대답했다.
“어. 다행히 사정을 봐주고 기다려주겠다는 분들이 있어서 숨통이 좀 트였다고 하더라. 어젠 막방 잘 봤다고 연락도 왔었어.”
“다행이네요.”
“그런데 이분 꼭 게임에 나오는 요정처럼 생겼다.”
“누구?”
그 사이 핸드폰으로 인터넷 기사를 보던 길우성이 고개를 들었다.
“써한한테 프로필 요청했던 드라마 여주인공. 엠마 애커먼이란 사람.”
“누가 들으면 그 배우가 직접 프로필 요청한 줄 알…. 와.”
이건우가 말을 하다 말고 감탄을 흘렸다. 한율도 길우성이 보여주는 핸드폰 속 사진을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
해외드라마나 영화는 유명한 작품만 가끔 보는 까닭에 요즘 핫한 배우에 대해선 한율도 잘 몰랐다. 그러나 엠마 애커먼이란 배우는 정말 그림으로 그린 요정처럼 앳되면서도 신비스러운 미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한율이 놀란 건 단순히 소녀의 빛나는 외모 때문만이 아니었다.
‘크리스티나랑… 닮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