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별☆일없는 집> 종방연은 작년에 참석했던 <객귀> 시리즈 종방연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종방연이 열리는 식당 앞. 기자들과 배우들의 팬이 바리케이트나 벨트 차단봉 안에 빼곡하게 모여 핸드폰이나 카메라를 들고 있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어떤 소녀가 또박또박 크게 외쳤다.
“우주최강 율토끼!”
목이 쉴 것 같은 큰 소리. 한율이 돌아보자, 최근 유행하는 토끼 모자를 쓴 소녀가 핸드폰을 높이 들었다. LED 문구가 반짝거렸다.
[♡연기천재 서한율♡]
한율은 그쪽을 향해 미소 지으며 손을 흔들어주곤 기자들이 모인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꺄아앗!”
즐거운 비명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기자들의 다양한 포즈 요청이 이어졌다.
“태바다 버전 꽃토끼 해주세요!”
한율은 퉁퉁한 표정을 지으며 두 손을 머리 위로 올렸다. 이 포즈가 부끄러운 듯 시선을 비스듬히 내리깐 순간, 셔터 소리가 아주 시끄러워졌다.
차카차카차칵!
“한율아악!”
팬들의 환호성도.
“너 프로 인정.”
몇 번의 포즈 요청에 응해준 후 식당에 들어가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는데, 먼저 와 있던 박현우가 한율에게 엄지를 치켜세웠다. 그의 다른 손에 쥐어진 핸드폰엔 <별일 종방연 현장> 실시간 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다.
“태바다에게서 아이돌을 보았다.”
“기다려봐요. 형 것도 찾아볼게요.”
터억. 한율이 핸드폰을 꺼내려 하자 박현우가 어깨동무하며 걸음을 옮겼다. 안이 투명하게 보이는 음료 냉장고 쪽으로.
“넌 사이다 파냐, 콜라 파냐.”
“레몬맛 탄산수요.”
“이런 까탈스러운 자식. 여기에 없는 걸 찾네?”
그때 바깥이 여러 명이 한꺼번에 지르는 비명으로 소란스러워지더니, 곧 스타믹스의 지헌이 들어왔다. 그는 촬영장에서 그랬듯이 예의 바르고 밝은 모습으로 깍듯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유지헌입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종방연 분위기는 왁자지껄했다. 고기를 구워 먹기보다는 친분을 쌓기 위해 돌아다니며 분위기를 살리는 사람들이 많은 까닭이었다. 특히나 용 감독을 비롯한 파트장 주변엔 사람이 끊이질 않았다.
한율과 박현우는 어느샌가 조용히 다가와 옆에 앉은 <별☆일없는 집> 메인 작가에게 잡혀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었다.
두 사람이 캐릭터를 너무 잘 살려줘서 모니터링 영상을 보고 더 큰 영감을 받아 대사를 고친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이 씬은 내 의도와 살짝 다른 것 같아 이해가 엇갈린 듯했는데 막상 보니 더 좋았다, 만약 5년이 지나면 그땐 어떤 캐릭터를 연기하고 있을 것 같냐 등등.
이 바닥 메이저 작가에게 밉보여봤자 좋을 것이 하나 없기에, 한율과 박현우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거나 소소히 질문을 던졌다.
두 사람을 작가의 수다 지옥에서 구해준 건 용 감독이었다.
“현우 씨는 올해 스무 살이니 한 잔 줘도 괜찮으려나?”
“네, 당연하죠! 감사히 받겠습니다!”
박현우가 벌떡 일어나 술잔을 들었다. 자연스럽게 끊긴 대화의 흐름을 비집고, 이번엔 지헌이 한율에게 레몬맛 탄산수를 내밀었다.
“매니저 형한테 부탁해서 샀어. 다른 분들 숙취해소음료 사는 김에 같이.”
“감사합니다. 그런데 제가 이거 마시는 건 어떻게 아셨어요?”
“아, 전에 산우랑 얘기하다가.”
“블블의 산우 선배님이요?”
원래 블블과 사적인 친분이 있는 것 같지 않았는데. 의아한 얼굴로 묻자 지헌이 씩 웃었다.
“지난달에 친구 생파에 갔다가 우연히 만나서 친해졌어. 마침 동갑이기도 하고, 그 뒤로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으론 바로 어제 황성연이 보여준 커뮤니티 사이트의 게시글이 떠올랐다.
FJ그룹 계열사인 연예기획사 연습생 출신이면서, 스타믹스 멤버들과 친분이 있다고 자랑한 BJ 그리고 연습생이었거나 연습생인 사람들이 라트 사건과 연관된 것 같다고.
그러나 정작 FJ그룹 계열사인 스케일 엔터테인먼트 소속인 지헌은 별다른 근심이 없어 보였다.
“네에…. 그런데 선배님들은 생일 파티를 주로 어디에서 하세요? 밖은 알아보는 사람들이 있어서 불편할 것 같은데.”
“생일 당사자나 초대 손님 대부분이 연예인이면 숙소나 집에서 하지. 밖에서 술 마셨다가 사진이라도 잘못 찍히면 위험하잖아. 이상한 구설에 오르기 쉽고.”
다들 조심하는 이유가 똑같구나.
한율이 고개를 끄덕이는데, 지헌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산우랑 만났을 땐 얼굴이 팔린 사람이 나랑 걔 둘 뿐이라서 간만에 클럽 바에 갔거든? 그런데 바가 따로 갖춰진 개별 파티룸이 있어서 좋더라고. 이태원 근처의 사이드심(side seam)이란 곳인데, 칵테일도 다양… 아, 한율이 너 아직 미성년자였지? 깜빡했다. 하하.”
“…….”
웃는 지헌을 보며 한율은 입가를 슬쩍 올리다 말았다.
사이드심. 이해원이 알려준 가게 초성과 딱 맞아떨어졌다. 그러나 알려주자니 정보를 알게 된 경위를 설명하기가 귀찮다. 알려준들 오히려 불안하게만 만들 테고, 조사를 받아도 저지른 잘못이 없으면 문제없겠지.
“선배님들은 컴백 언제 하세요?”
우리 아이돌이라 괜찮아
3월 10일 토요일.
영화 <고양이 난로>의 대본리딩 자리엔 기자가 얼마 보이지 않았다. 그마저도 입구에서 배우들의 사진만 찍을 뿐 안까진 들어오지 못했다. 대신 안에는 투자와 배급을 맡은 FJ 엔터테인먼트 관계자들이 홍보사진 촬영을 위해 카메라를 들었다.
시나리오 유출을 염려해서일까.
“안녕하세요, 선배님. 잘 지내셨어요?”
“처음 뵙겠습니다, 배우….”
감독과 주요 스태프, 처음 보는 배우들과 인사를 나눈 뒤에 자리에 앉았다. 대본리딩은 3시간가량 진행되었다. 예상 러닝타임이 80분이고 결말 부분까진 읽지 않았지만, 중간중간 의견을 나누느라 오래 걸렸다.
“수고하셨습니다.”
“다 같이 사진 한 장 찍을게요!”
“고냥이 난로 홧팅!”
“고냥이가 뭐야, 괭이지.”
단체 사진을 한 장 찍은 후엔 주조연들만 모여서. 그 후엔 단독 컷을 가볍게 찍었다.
“한율아.”
왔을 때처럼 야구모자를 눌러쓰며 이희우가 물었다.
“나랑 윤영이랑 와플 먹으러 갈 건데. 너도 같이 갈래?”
“마음만 감사히 받을게요.”
이희우와 이윤영은 한 달 사이 퍽 친해진 모양이었다. 올 때도 함께 온 것 같더니.
“그래. 그럼 2주 후에 보자.”
“저…. 저도 와플 좋아하는데….”
강명일이 소심하게 끼어들었다. 이희우가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명일 씨가 끼면 스캔들 터지니까 안 돼요.”
“아니, 그럼 한율 씨는….”
“얜 우리 아이돌이라서 괜찮아요.”
“네? 그럼 더 스캔들에 조심….”
“아이돌이라니까요?”
“……?”
“그럼 나중에 뵐게요.”
인사를 나누고 회의실을 나오자, 복도에서 사람들에게 꾸벅꾸벅 인사를 하던 조유찬이 냉큼 다가왔다.
“회사 갈 거지? 가자.”
조금 초조해 보이는 얼굴. 몇 시간 사이 무슨 안 좋은 소식이라도 들은 걸까.
“네.”
한율은 그의 잰걸음 속도에 맞춰주었다.
주차장에 세워진 차에 오르자마자 조유찬이 한율을 휙 돌아보았다.
“한율이 너 혹시 블블의 산우랑도 친하니?”
“아니요. 번호 아는 건 민준 선배님이랑 수재 선배님뿐인데. 왜요?”
하아. 그제야 조유찬의 얼굴에서 초조한 빛이 사그라들었다. 작게 한숨을 내쉰 그가 핸드폰에 인터넷 기사를 띄워서 내밀었다.
[블블 산우, 마약 검사 결과 “음성”]
[보이그룹 블랙블러드 멤버 산우가 이번 라트 마약 사건과 관련하여 마약 반응 검사를 받았다. 산우는 라트와 함께 조사를 받은 여자 아이돌 A양과 평소 친분이 있다고 알려졌으며, 브로커가 드나든다고 밝혀진 S 클럽 바에 한 달 전 출입한 사실이 있어…(중략).]
한 달 전이면 지헌이 말했던 친구의 생일 파티 때인가. 그렇다면 산우뿐만이 아니라 지헌도 조사를 받았을 테지만, 조유찬의 반응을 보니 지헌에 대한 기사는 뜨지 않은 모양이었다.
“음성이네요.”
“음성이 나와서 그나마 다행이긴 하지만, 여기 A양이랑 친분이 있다는 기사 한 줄 때문에 이미지가 완전히 박살 났어. 그런 곳인 줄 모르고 한 번 잘못 들어갔다가 조사받은 거면 단순히 해프닝으로 지나갔을 테지만….”
한율은 기사 스크롤을 내렸다.
-끼리끼리는 과학이다
-ㄹㅌ 걸렸을 때 여돌도 같이 있었다는 게 사실이었네
-아직도 통수가 얼얼한데ㅋㅋㅋㅋㅋ
-방송에선 완전 세상 착한 척 다하더니... ㅆ극혐..
-약쟁이랑 같이 클럽에서 술처먹는 여돌이랑 친하면.. 아존나더러워
-이게 아이돌들 실상이야 환상을 버려 이것들아 니들이 좋다고 퍼준 돈으로 이ㅈㄹ나는 거 보면 모르냐
-S에 같이 갔던 다른 남돌도 조사받았다는데 산우 기사만 뜬 거 보니까 ㄱㄷ이 진짜 애들 버리긴 버렸구나
-ㄹㅌ랑 친한 건 ㅁㅈ아니었냐? 걔도 검사해봐야 하는 거 아님? 걔 웃는 거 나사 하나 빠진 동네 바보 같아서 좀 이상하던데
ㄴ쿨뷰티계 외모와 달리 호구멍청미가 있어서 그렇지.. 애는 착해요...
ㄴㅋㅋㅋㅋㅋㅋㅋ
휙. 조유찬이 핸드폰을 회수했다.
“댓글은 보지 마, 눈 버려. 어쨌든 한율이 너 앞으로 사람 사귈 때 조심해. 이건 이 바닥을 오래 지켜본 형으로서 하는 충고야. 앞뒤 다른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정말….”
조유찬의 조언을 가장한 잔소리는 회사에 도착할 때까지 이어졌다.
* * *
이사하고 처음으로 어스래빗의 새 숙소를 방문한 스타일리스트가 입을 벌렸다.
“와…. 이게 20억짜리 아파트에서 보는 한강뷰구나.”
일요일이라 평소보다 늦게 일어나 널브러져 있던 박가람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20억이요? 30억 아니고?”
“응? 기사에 20억이라고 나왔던데?”
“인터넷에선 평균 30억에 거래된다고 나오던뎅….”
“그건 앞 동의 고층일걸요. 이 집은 26억이에요.”
“아니, 같은 단지인데도 몇억이 차이 난다고?!”
“조망이 다르잖아요.”
“신비로운 가진 놈들의 세계….”
멍하니 박가람과 한율의 대화를 듣던 스타일리스트가 영혼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기사에 나온 건?”
“글쎄요. 기자 분이 잘못 아셨거나 일부러 몇억 낮춰서 쓴 거 아닐까요?”
“왜?”
“저야 모르죠.”
“중요한 건 한율이가.”
까치집이 된 머리를 한 채 소파에 앉아있던 이건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비싼 아파트의 주인이란 거지.”
어차피 3년 후면 30억짜리든 20억짜리든, 고층 아파트는 대형 마물이나, 마물을 없애기 위한 군의 포격 때문에 박살 날 가능성이 큰데.
‘그러고 보니.’
한율은 평화로운 한강 경치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슬슬 방공시설을 갖춘 저택을 지어야겠네.’
어릴 적부터 외가댁에 갔을 때마다 외조부에게 숲이 울창하고 험한 산에 비밀기지 같은 집을 짓고 싶다고 말했었다. 막연히 군대나 로봇 같은 강한 것에 열광하는 철부지 남자아이처럼. 그리고 중학교에 입학하던 해에, 적당한 위치에 있는 땅을 입학선물로 받았다.
‘일단 올해 생일이 지나자마자 면허부터 따는 게 좋겠지.’
깊은 산에 지하실을 갖춘 저택을 짓는 게 쉬운 일은 아닐 테니, 미리 가서 공사하기 쉽게 주변도 점검하고 땅도 좀 파놓고 말이다.
한참 동안 거실 창 앞에 서서 한강 경치를 감상하던 스타일리스트가 물었다.
“한율이 네 방은 어디야?”
“이쪽이에요.”
스타일리스트는 지금 한율이 입고 나가야 할 옷과 구두, 피어싱부터 바닥에 늘어놓고 사진을 찍었다. 유 팀장에게 메시지로 사진을 보낸 후엔, 더순한화장품 팬 미팅 때 입을 바지와 신발, 팔찌만 골랐다. 그리고 따로 가지고 온 종이가방을 내밀었다.
“티셔츠랑 재킷은 협찬으로 들어온 이거 입자.”
스타일리스트가 방에서 나간 후, 한율은 왕연수의 아들 결혼식장에 입고 갈 옷으로 갈아입었다.
새카만 터틀넥 니트와 팬츠, 회색 울코트를 걸친 단정한 슈트 차림. 여기에 새카만 구두를 들고나오자 어느새 거실에 불어난 멤버들이 ‘오오’ 소리를 냈다.
“써한 착장 보소.”
“한율이 장가가도 되겠는데?”
“저런 게 바로 민폐 하객이란 거야.”
“샵에 가서 머리 조금만 만지면 더 멋있겠다.”
현관 근처에 서서 핸드폰을 들여다보던 조유찬이 대답했다.
“안 그래도 들를 거야. 너희들도 오늘 일요일이라고 너무 퍼져 있지 말고, 이상한 데에 싸돌아다닐 바엔 회사에 가서 놀아. 알았지? 회사 갈 때 장전 씨 부르는 거 잊지 말고.”
“네에.”
“한율아, 올 때 호두과자 잊지 마!”
결혼식이 열리는 곳은 서초구의 한 호텔 웨딩홀로, 앞에는 기자로 보이는 사람들이 없었다.
왕연수가 한때 촉망받는 가수였긴 했지만 은퇴한 지 오래된데다, WB래빗 가수들의 보컬 레슨을 봐주는 걸 제외하곤 이 바닥과 관련된 일을 하지 않는 까닭이었다.
초대된 하객 중에서도 연예인으로 보이는 이는 크리스탈 래빗의 라나뿐이었다. 칙칙한 블랙과 회색으로 꾸민 한율과는 다르게 봄처럼 따뜻한 색감의 원피스. 그 모습이 어찌나 시선을 잡아끄는지, 민폐 하객이 따로 없었다. 실제로 대화를 나누던 사람들이 라나가 옆을 지나치자 멍해진 시선으로 그녀를 쫓았다.
“안녕하십니까, 선생님. 아드님 결혼식 축하드립니다.”
한율은 웨딩홀 앞에 나온 왕연수에게 먼저 인사했다.
“그래. 와줘서 고맙다, 한율아. 이쪽이 우리 와이프, 이쪽이 오늘 결혼하는 우리 아들.”
“안녕하십니까, 선생님의 제자인 서한율이라고 합니다.”
왕연수의 가족과 인사를 나누고 축의금을 전달. 식장 안으로 들어간 후엔 먼저 도착한 좌 대표의 테이블로 향했다. 라나도 그와 같은 테이블에 앉아있었다.
“안녕하세요, 대표님.”
“왔어?”
웃으면서 반긴 좌 대표가 놀란 얼굴로 한율을 위아래로 훑었다.
“우리 아티스트, 너무 훤칠해진 거 아냐? 처음 꽃을단토끼 팀명 바꿔 달라고 항의하러 왔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한율은 같은 테이블 의자에 앉으며 대답했다.
“대표님은 안 뵌 사이에 피부가 많이 좋아지신 것 같아요.”
“그래? 요즘 딸내미가 아빠 너무 판다 같다고 아이패치란 걸 사다 줬거든. 매일 해보면서도 정말 효과가 있나 의심했는데, 라나에 이어서 한율이 너도 그 얘길 하는 걸 보니 효과가 있긴 있나 보다. 하하하.”
한율은 웃는 좌 대표를 따라 살며시 미소 짓다가 라나에게 고개를 꾸벅였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응, 안녕. 드라마 재밌게 잘 봤어.”
“감사합니다.”
“마지막에 바다가 피아노에서 손 딱 떼면서 미소 짓는 거 볼 때 내가 막 뿌듯하고 대견하더라. 나랑 은영이랑 손잡고 막 이러면서 봤다니까?”
“별일을 챙겨봤어? 혹시 전편 다?”
좌 대표가 묻자 라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특히 나랑 은영이랑 별일 팬이어서, 전부 VOD로 구매까지 했는데요? 이번에 감독판 블루레이 가수요 조사에도 참여하고.”
한율은 신기한 눈으로 라나를 쳐다봤다. 찍으면서 다른 드라마에 비해 조금 심심하지 않나 생각했건만, 사람마다 취향이 다양하다더니.’
좌 대표가 엄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라나 너.”
탁.
“물론.”
라나가 테이블을 가볍게 내리치며 생글생글 웃었다.
“극 중 캐릭터랑 실제 배우는 별개죠. 아무렴 내가 그걸 혼동할까. 이 바닥 짬밥이 몇 년인데요.”
“그래, 그래야지.”
꼭 시트콤에 나오는 상사랑 부하 직원 같네. 한율은 두 사람을 멀뚱멀뚱 보다가 준비된 음료수를 집었다.
“저기, 혹시….”
그때 나이가 지긋한 여성이 테이블로 다가와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가수 좌기훈 씨 아니세요?”
좌 대표가 판다처럼 푸근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제가 좌기훈입니다.”
“어머, 저 팬이에요. 반갑습니다.”
“하하, 저도 반갑습니다.”
“같이 온 두 분은 따님하고 아드님이신가 보다. 어쩜 이렇게 둘 다 고와요?”
“하하하. 둘 다 자식처럼 여기지만 자식은 아닙니다.”
결혼식이 끝난 뒤엔 샵에 들러 양치를 하고, 가볍게 헤어메이크업을 재점검받았다. 그리고 옷을 갈아입고 더순한화장품 팬미팅 장소로 이동. 장소는 지난번에도 팬 미팅을 진행한 종합쇼핑몰이었다.
“아안녕하세요, 선배님!”
지난번처럼 관리실의 휴게실 안쪽으로 들어가자 감탄사와 인사가 뒤섞인 것 같은 인사가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은수 씨. 잘 지냈어요?”
“네. 선배님 나오신 드라마 정말 재밌게 잘 봤어요. 특히 지헌 선배님 연극 연습하는 무대에 올라가서 몰입을 도와주기 위해 피아노 쳐주는 장면은 정말…!”
지난번 화보 촬영 땐 VJ의 카메라에 찍힐까 서로 대화를 아꼈으나, 이번엔 카메라가 없어서인지 재잘재잘 잘 떠들었다. 비단 상대가 한율이라서가 아니라, 대화를 나눌 사람이 그리웠던 것처럼.
‘조금 밝아진 건지, 내가 편해진 건지.’
그리고 몇 달 만에 만날 때마다 부쩍부쩍 자라는 느낌이었다. 본래 세상, 거센 태풍에 날아간 작은 마물을 닮은 건 여전하지만.
“감사합니다. 그런데 은수 씨는 살이 좀 빠진 것 같네요?”
“정말요? 실은 두 달 전보다 3kg을 더 뺐거든요. 이제 곧 데….”
“은수야?”
조용히 서 있던 여성이 조용히 진은수를 불렀다. 새로 온 매니저일까. 그녀가 고개를 돌리며 한숨을 푹 내쉬곤 들으라는 듯 중얼거렸다.
“이래서 자리를 따로 마련해달라고 부탁했는데 정말…. 데뷔도 전에 스캔들 나면 지들이 책임질 거야, 어쩔 거야.”
“…….”
진은수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매니저에겐 보이지 않는 각도로 미안함을 담은 커다란 눈망울로 한율을 쳐다보기도.
‘이러니 더 닮았네.’
조유찬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요즘 팬 분들 그렇게 속 좁지 않아요, 은수 씨 매니저님. 그리고 같은 브랜드 모델 사이에 고작 인사 주고받았다고 스캔들이 난다면, 그런 기사를 내는 기자를 거를 기회로 삼으면 되죠?”
“지금 그런 말이….”
“그래도 다른 성별이 휴게공간을 함께 사용하는 게 여러모로 불편한 건 맞죠. 후…. 어떻게, 저희가 차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올라올까요?”
진은수의 매니저는 황당하고 어이없는 얼굴로 조유찬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됐어요. 우리한테 무슨 덤터기를 씌우려고.”
초면의 기 싸움에서 이겼다는 자축의 의미일까. 조유찬이 여전히 입가를 올린 채 어깨를 들썩거렸다. 진은수의 매니저가 벽에 걸린 거울을 노려보며 한마디 했다.
“저기요, 다 보이거든요?”
한율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오래 붙어있으면 서로 닮는다더니, 조유찬도 슬슬 박가람을 닮아가는 건가 하고.
나 너랑 친해지고 싶음
“한율 씨 덕분에 매출이 엄청 늘었어요. 정말 고맙습니다.”
팬 미팅이 시작되기 전, 휴게실로 찾아온 더순한화장품 측 직원이 한율에게 감사를 표했다.
“매장에서도 말하기를, 드라마에 나오는 피아니스트 지망생 학생이 쓰는 화장품이 이거 맞냐고 찾는 손님이 부쩍 늘었대요. 특히 사춘기 자녀를 둔 부모님들이요. 한율 씨 볼 때마다 피부에 감탄하게 된다고.”
“다행이네요.”
“그러니 오늘 회식은 지난번처럼 일찍 가시면 안 됩니다. 회사에서 감사의 의미로 선물을 준비했거든요.”
“아….”
조유찬이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어쩌죠. 내일 한율이가 KBC 예능 녹화가 잡혀서 너무 늦게까진 힘든데….”
“어유, 걱정하지 마세요! 9시 이전엔 보내드릴 테니! 우리 모델분 피부가 생명인데! 아, 그리고 은수 씨에게도 감사드립니다. 은수 씨 덕분에 이번 응모 경쟁률이 엄청나게 높아졌어요!”
참 사회생활 잘하는 사람이네.
한율은 이번엔 진은수에게 공을 돌리는 직원을 바라보다가 핸드폰을 살폈다. 이곳으로 오는 동안 SNS에 올린 사진에 어느덧 많은 댓글이 달렸다. 결혼식장에서 좌 대표, 크래의 라나와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보컬 선생님 아드님의 결혼식장. 대표님의 아들딸로 오해받았습니다ㅎㅎ :)]
-율톢슈트간지에 눈이 녹아버려 앞이 보이질 않아 어디에 있는거니 우리 톢톢톢 미모에 어휘도 녹았고
-와... 와아.. 와... 애긔율톢 슈트입은 거 보니 더 이상 애긔같지 않은데 애긔같은데 멋있고 이거 뭐야
-사랑스럽다
-판다같은 아빠에 예쁜 토끼남매
-애들이 아빠 안 닮아서 천만다행
-누가 남의 결혼식장 가서 미모로 행패부리라 했어 예의없게!
-슈트!!!!!!!!! 율톢!!!!!! 슈트!!!!!!!!!!!!!!!!!!
-바다의 블랙 슈트+보타이에 기절한 게 엊그젠데ㅋ 거 깜빡이 좀 켜고 들어옵시다ㅋ
-곧 만나러 갑니다. 후욱후욱
그린라이브 콘텐츠 영상 중 기묘하게 자막과 짤이 맞아떨어지는 이미지를 올린 팬들도 많았다. 가끔 센스 넘치는 드립을 단 사람이나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주접도.
“이제 슬슬 나갈까요?”
어느새 팬 미팅 시간 5분 전. 한율은 조유찬에게 핸드폰을 맡기며 일어났다.
“네.”
이번 팬 미팅은 지난번과 비슷하게, 3월에 나온 신제품 기초화장품 세트에 담긴 응모권에 당첨된 2백 명을 대상으로 진행되었다. 방식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란히 앉아 차례차례 당첨자를 맞이해 준비된 엽서에다 사인과 원하는 문구를 적어주고 짤막하게 대화를 나눴다.
차칵차칵. 옆에선 더순한 측과 팬미팅 기획행사 대행업체 측, 연예 기자들이 카메라 셔터를 바쁘게 눌렀다.
그렇게 얼마나 진행되었을까.
“누난 여전히 아름다우시네요.”
굵직한 목소리로 진은수에게 말한 남학생의 그림자가 한율에게 드리워졌다.
“안녕하세요.”
한율은 그를 알아보고 미소 지었다.
“아, 개나리 오빠분 맞으시죠?”
“오메…. 이님 그걸 기억하네. 이상하게 내가 이런 당첨 운이 좋아서 또 와버렸어요. 개나리랑 내 거랑 딱 두 세트만 샀는데.”
그때 뒤쪽에 줄을 선 사람이 놀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허얼…. 난 10개 샀는데.”
한율은 못 들은 척 앞의 남학생에게 물었다.
“동생 분은 잘 지내요?”
“님 나온 드라마 자꾸 재방으로 크게 들어서 나까지 대사 외울 지경요. 이번에도 ‘개나리야, 안녕?’하고 적어주세요.”
한율은 미소를 지은 채 엽서에다가 그의 동생을 향한 메시지를 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