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8화 (98/427)

* * *

띠리릭. 연습실 문을 닫자 전자자물쇠가 저절로 잠겼다. 안무 연습을 하던 박가람이 거울에 비친 한율을 휙 돌아보았다.

“이 냄새는…?!”

“결국엔 사 왔구나.”

다른 멤버들도 하나둘 동작을 멈추곤 한율을 돌아보았다. 거칠어진 호흡을 고르고 땀을 닦는 그들에게 한율은 비닐봉지를 내밀었다.

“오는 동안 조금 식었어요.”

“감사감사!”

“숯불구이는?”

킁킁. 길우성이 한율에게서 나는 냄새를 맡으며 물었다. 회식으로 먹은 게 숯불갈비였다. 팬 미팅 때 입은 협찬 의상 대신 편히 사복으로 갈아입고 참석했다.

“없어.”

“이런 센스 없는 녀석. 그걸 챙겨왔어야지!”

“…….”

“우성이 너 요즘 가만히 보니까.”

부스럭. 이건우가 비닐봉지 안에서 종이 포장지에 담긴 붕어빵을 꺼냈다.

“한율이한테 자주 톡톡거리는 것 같다?”

“그래?”

“어. 전에 한율이 미국에서 무슨 제안 받았었다고 기사 떴을 때도 혼자 난리 치더라고. 우리 버리고 가려고 그랬냐고.”

“난리라니, 그 정돈 아니….”

“안 그런 척해도 본인이 데려온 친구가 자기보다 너무 잘나가니까 초조해진 거지, 뭐.”

“어휴, 친구 시기나 하고. 한심한 놈.”

“…….”

입을 벌리며 뭐라 받아치려던 길우성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고개를 휙 돌렸다.

“우성이 삐쳤다.”

길우성이 구시렁거렸다.

“난 그냥 써한이 혼자 잘나간다고 잘난 척하지 않을까 시험 삼아 건드려본 것뿐인….”

“호두과자나 먹어.”

“응.”

벌써 붕어빵 하나를 해치운 라이언이 한율에게 말했다.

“잘난 척 안 해도 돼. 이미 잘났어.”

한율은 라이언의 한국어 실력이 많이 늘었다는 걸 새삼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런데 시기심도 비슷한 포지션인 애가 느끼는 게 보통 아니야?”

박가람의 시선이 차남석을 향했다. 수건으로 땀과 손을 닦고 호두과자를 집던 차남석이 눈을 끔뻑거렸다.

“별로?”

“오호? 서한율 따윈 네 적수가 안 된다?”

“주로 맡는 음역도 다르고 이미지도 다른데, 쓸데없이 감정 소비해서 뭐 해요. 내 할 일만 잘하면 되는 거지.”

“오올, 남석 씨~. 스무 살 되더니 부쩍 어른스러워졌는데?”

그러게. 그들이 간식을 집어 먹는 동안 캐비닛으로 다가간 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비슷한 시기에 데뷔해 라이벌 구도가 된 블루액션의 동향을 예민하게 살피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잠깐 풀이 죽었던 길우성이 까불거렸다.

“욱! 해서 누군가의 멱살을 잡았던 과거의 차남석은 잊어라!”

“…너 이리 와, 새꺄.”

“어른스러워졌다고 하기 무섭게 동생한테 쌍욕을.”

“남석아, 바른 말 고운 말 쓰자.”

“그런데 한율이 너 내일 녹화 있다고 하지 않았어? 들어가서 일찍 자는 게 좋지 않아?”

한율은 안무 연습용 옷으로 갈아입으며 대답했다.

“녹화가 11시에 잡혀서 괜찮아요. 저녁 먹은 거 소화도 시켜야 하고.”

내일 <목톡톡> 녹화 때 선보일 커버 안무 연습도 할 겸 말이다.

다음 날. 한율은 조금 전 MC 대기실에 인사하러 들렀다가 받은 쿠키 상자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바삭. 쿠키 하나를 집어 먹으면서 핸드폰으로 인터넷 기사를 훑었다.

[스캔들에 부담 느꼈나? 별이날다, 산우 계약설 “사실무근”]

[원로배우 임숙정이 속한 회사이자 임숙정의 조카가 대표로 있는 별이날다 엔터테인먼트가, 소속 직원이 블블 산우와 미팅을 한 건 맞지만 계약 관련 미팅은 아니었으며 계약설 또한 사실이 아니라고 밝혔다.

다음 달인 4월 고동 엔터테인먼트와 전속계약이 끝나는 블랙블러드의 멤버 산우는…(중략).]

블블의 산우가 배우 전문기획사 관계자와 만난 게 포착되었다더니, 그게 이윤영이 속한 별이날다 엔터테인먼트였던 모양.

옆에 나란히 앉아있던 조유찬이 한율이 보는 기사를 살피곤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별이날다면, 파투 난 게 다행일지도 모르겠다.”

한율은 작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SBC <객귀, 해> 촬영 당시, 이윤영에게 부당한 트집을 일삼던 드라마 스태프와 작게 실랑이를 벌였다고, 이윤영이 다쳐서 촬영이 하루 지연된 잘못을 스무 살 매니저에게 뒤집어씌워 해고했다. 그리고 이윤영에게는 건달 같은 새 매니저를 붙였다.

‘그러고 보니.’

한율은 조유찬에게 물었다.

“형, 전에 <고양이 난로> 대본 리딩했을 때 윤영 선배님 매니저 봤어요?”

“아니? 안 왔었어. 그때 윤영 씨, 희우 씨 차타고 같이 왔었잖아. …어쩐지. 매니저들끼리 기다리는데 뭔가 위화감이 없더라니, 그치가 없어서 그런 거였네.”

조유찬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잘린 거면 좋겠다.”

오늘 <목톡톡> 게스트는 한율을 포함해 5명이었다.

래퍼이면서 뛰어난 작곡 실력으로 음원 수익을 적잖이 버는 것도 모자라 의류 쇼핑몰까지 대박이 난 자이씨, 중견기업 회장의 딸이면서 국제 콩쿠르에서 1위를 한 송유나, 미국의 명문대학을 졸업해 현지의 큰 회사에 취업했으나 한국으로 돌아와 싱어송라이터로 활동 중인 안젤라, 수능 만점을 받았음에도 대입 대신 극단에 입단한 배우 김향전.

여기에 스페셜 MC 한 명.

“금요일까지 하루!”

<목톡톡> MC 유기원에 이어 다른 메인 MC인 정태현이 이어받았다.

“주말을 향한 톡톡 튀는 갈망!”

“안녕하십니까, 시청자 여러분! <목톡톡>의 MC 유기원!”

“정태현!”

“오늘의 주제, ‘그렇게 다 가져야만 속이 시원했냐’에 걸맞은 스페셜 일일 MC, 스카이러너의 용맹입니다! 목!”

MC들과 게스트들이 한꺼번에 외쳤다.

“톡톡!”

작년 납량특집으로 왔을 때와 달리 <목톡톡> 스튜디오 세트장은 벽난로가 놓인 따뜻한 거실처럼 꾸며져 있었다. MC들도 그때와 달리 평범한 인사로 시작했으나,

“풋.”

자리에 앉았을 때부터 웃음을 참고 있던 송유나가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유명한 영화 캐릭터로 분장한 유기원과 정태현의 모습이 그녀의 웃음 포인트를 저격한 모양이었다.

“아니, 유나 씨. 시작부터 이렇게 웃으시면.”

웃음으로 시작된 녹화는 게스트 소개로 이어졌다. 한율은 마지막 순서였다.

“자, 그리고… 몇 달 전부터 다시 만나기를 고대했습니다.”

MC들의 시선이 한율을 향했다.

“우리 KBC 시사교양국장님의 아드님!”

“만약 이 친구가 예능국장님 아들이었으면 더 난리 났을 겁니다. 이것 봐봐요. 다른 부서 국장님 아들인데도 카메라 감독님부터 시작해서 작가들까지 머리 제대로 감고 온 거.”

“나 이렇게 스태프분들이 단정하게, 그리고 지시도 우아하게 내리는 모습 처음 봤다니까요. 아까 PD님도 평소였다면.”

유기원이 한 손을 들어 건들거렸다.

“‘감독님!’ 이렇게 편하고 털털하게 불렀을 텐데, 한율이가 스튜디오에 딱 들어오니까 ‘감독님? 이건 이렇게 저렇게’ 나긋나긋하게 말하더라고요. 나 PD님이 그러는 모습 전에 할리우드 배우 분 나왔을 때 이후로 처음 봤잖아요.”

한율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스태프들의 모습이나 태도는 지난번에 왔을 때와 크게 달라진 게 없는데.

그러나 ‘우리가 언제 그랬냐 억울하다’ 표정을 짓는 스태프들과 그들을 찍는 카메라를 보니 일부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소위 ‘방송국 놈들’이 면박당하는 걸 재밌어하는 시청자들이 많기도 하고.

“오늘 우리 재미없다고 구박하기만 해봐, 다 이를 거야!”

“아니, 태현 씨. 우리가 국장님 아들은 아니잖아요. 그리고 잘못하면 국장님이 더 곤란해지실 텐데. 자, 소개를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작년 추석, M 본부 <아이돌 스포츠 대회>에서 놀라운 양궁 실력으로 카메라 렌즈를 여러 차례 깨, 여기 있는 태현 씨의 지갑을 탈탈 털어버리고.”

“으흑….”

유기원이 잠깐 호흡을 멈춘 타이밍에 맞춰 정태현이 우는 시늉을 했다.

“최근 10대, 20대분들 사이에서 큰 화제가 된 드라마죠? <별☆일없는 집>에서 피아니스트를 꿈꾸는 까칠한 중학생 역을 맡아 섬세한 감정연기와 눈부신 피부로 시청자들을 사로잡은, 아이돌그룹 어스래빗의 서한율 씨를 모십니다.”

내내 조용히 웃고 있던 한율은 더 환한 미소를 지었다.

“안녕하십니까. 어스, 래빗!의 한율입니다. 반갑습니다.”

손구호와 함께 전담 카메라를 향해 꾸벅 인사를 하자, 요란스럽지 않은 짧은 박수가 이어졌다.

아침 11시부터 시작된 녹화는 6시간 만에 끝났다. 방송은 다음 주 목요일인 22일.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한율은 MC 및 게스트, 스태프들에게 예의 바르게 인사를 하고 스튜디오를 나왔다.

“안녕.”

“안녕하세요.”

스튜디오 출입구 앞에는 조금 전 서로 수고했다고 인사를 나눴던 용맹이 서 있었다. 꼭 한율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용맹이 한율과 나란히 복도를 걸으며 물었다.

“오늘 또 스케줄 있어?”

조유찬과 용맹의 매니저는 자연스럽게 두 사람의 뒤로 빠졌다.

“아니요.”

“그럼 나랑 저녁 먹을래?”

“선배님이랑요?”

“응. 안 돼?”

한율은 조유찬을 돌아보았다. 사람 사귈 때 조심하라고 잔소리를 퍼부었던 조유찬은, 상대가 지금보다 더 잘될 게 분명한 인기 아이돌이라 망설이는 눈치였다.

3대 기획사 중 하나인 스엔 엔터 소속으로, 국내는 물론 해외 차트에도 앨범이 올라갈 정도로 인지도가 높은 스카이러너의 멤버.

용맹에 관해 부정적인 소문을 듣거나, 방송국에서 잠깐 마주쳤을 때도 나쁜 인상을 받은 적은 없지만,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닌 바닥이었다.

화려한 인맥왕이라고 불릴 정도로 사교성도 좋고, 실력과 개념까지 갖춘 아이돌이란 평판을 받던 라트의 마약 사건이 말해주듯이.

무엇보다 용맹의 눈이 ‘나 너랑 친해지고 싶음’이란 의사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귀찮은데.’

하지만 한율은 속마음과 달리 미소 지었다.

“네, 같이 먹어요.”

그거 좋은 생각이다

저녁 메뉴와 식당 선택을 용맹에게 맡겼더니, 용맹은 기다렸다는 듯이 가방에서 종이 두 장을 꺼냈다. 한 장은 퓨전 멕시코음식점 사진과 메뉴, 지도가 첨부되어 있었다. 다른 한 장은 이탈리아 음식점. 한율은 평소 먹어보지 않았던 멕시코 음식을 가리켰다.

식당까진 용맹의 매니저 차를 타고 이동했다.

“여기가 맛집이래.”

처음 들어왔을 땐 파티션도 없고 테이블 간격도 좁아 괜찮을까 싶었으나, 손님들은 함께 온 일행에게나 신경 쓰지, 모자를 깊게 눌러쓴 두 사람을 유심히 쳐다보지 않았다. 조명도 어두웠고.

음식을 주문하고 기다리는 동안, 용맹이 물었다.

“한율이 넌 언제부터 아이돌 되고 싶다 생각했어?”

“중학교 졸업할 때 즈음 호기심이 생겼어요.”

사실은 고등학생이 되고 난 후 길우성에게 접근하기 위해 기획사에 발을 들였으나, 한율은 태연히 대외용 거짓을 내뱉었다.

“그래서 이것저것 알아보고, 어쩌다 보니. 선배님은요?”

“얼마 안 됐구나. 나는 어릴 때부터 TV에 나오는 가수들 노래 따라 부르고, 춤추는 게 재밌었거든. 그러다가 초등학생 때, 내 또랜데도 정말 춤을 멋있게 잘 추는 애 영상을 보게 된 거야. 그거 보고 충격받아서 그날로 제일 유명하다는 기획사로 오디션을 보러 갔지? 학원은 학원비가 너무 비싸고, 기획사는 일단 공짜로 가르쳐준다는 말에 혹해서.”

용맹이 키득거리면서 웃었다.

“지금 생각하면 완전 멍청했지.”

“그래도 그렇게 지금 회사에 합격한 거면 굉장히 대단한 거 아니에요?”

“아…. 그래서 처음엔 나도 내 실력이 아주 쩌는 건 아니어도 괜찮나보다 생각했는데, 그 뒤가 엄청나게 힘들었어….”

벽에 걸린 화려한 그림으로 시선을 던지는 용맹의 웃음이 흐릿해졌다.

“첫 월평에서 받은 등수가 밑에서 세 번째였거든. 그것도 백몇 명 중에서. 사실 첫 월평은 들어온 지 얼마 안 돼서 꼴등이 되어도 괜찮은데, 시간이 지나도 발전의 기미가 안 보이면 바로 퇴출이었거든. 그때부터가 진짜 시작이었지….”

대형 기획사의 월평과 합격점 기준이 까다롭다고 듣긴 했다. 그러나 수준 높은 레슨과 좋은 계약 조건, 데뷔만 하면 회사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꽃길을 걸을 수 있어서 경쟁이 아주 치열하다고.

“내가 그때 또 집이 대전이라, 학교 끝나고 올라와서 막차 끊기기 전에 연습을 마치고 나왔었거든? 그러다 보니까 초조해지는 거야. 회사랑 가까운 곳에 사는 애들은 나보다 두세 시간씩 더 연습해서 실력이 쑥쑥 늘고, 난 뒤처지는 것 같아서. 그래서 학교 그만두고 검정고시 보겠다고 했다가 부모님이랑 대판 싸우고….”

저녁 식사 권유를 거절했다가 뒷말이 나오면 더 귀찮아질까 봐 승낙했더니.

‘참 말이 많은 아이네.’

2년 전 <보컬리스트 시즌3>를 촬영할 당시, 자신을 대나무 숲처럼 여기고 이 얘기 저 얘기를 털어놓았던 안세현의 모습이 떠오른다. 대나무 숲이 필요하다고 외치던 DM도.

주문한 음식이 나오고 그게 반으로 줄었을 무렵, 용맹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WB래빗이 다시 우리 회사 레이블로 들어오면 좋을 텐데. 그럼 같은 식구가 되는 거잖아.”

“대표님이 독립해서 차린 회사라 원래부터 스엔 레이블이 아니었는데요.”

“팩트를 냉정히 짚어내는구나.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그게 아닌데….”

그렇다고 기죽을 것까지야.

우웅. 그때 용맹의 가방에서 진동소리가 울렸다.

“잠깐만.”

한율은 고개를 끄덕이며 타코를 집다가 멈칫했다. 용맹이 가방에서 꺼낸 핸드폰은 몇 년 전에나 보았던 폴더폰이었다.

“응, 찬형. …나? 나 지금 누구랑 있게?”

찬형이면 함께 <락뮤닷> MC를 맡는 원카운트의 찬형인가. 라이언이 아림 엔터 연습생 시절에 저지른 스팸 사건의 스팸 주인.

통화는 짧았다. 용맹은 폴더를 접어서 가방에 넣으려다 한율에게 내밀었다.

“번호 교환, 콜?”

“네.”

한율이 그의 핸드폰에 번호를 찍는 동안, 용맹은 묻지도 않은 걸 술술 말했다.

“인터넷이 안 돼서 초코톡은 못 하지만, 그래도 전화랑 문자는 잘 돼.”

식당 정보를 왜 굳이 프린트해서 갖고 다니나 했더니.

“다행이네요.”

회사로 돌아온 후, 스카이러너의 용맹과 저녁을 먹고 번호 교환까지 했다고 말하자 차남석은 아리송한 반응을 보였다.

“네 SNS에 올라온 사진 보고 별일이라고 생각하긴 했다. 보기와는 다르게 낯가리는 성격이라, 다른 사람이 먼저 친해지자고 손 내밀면 오히려 물러나서 경계하는 타입이라고 들었는데.”

고양인가?

“그래요?”

“스카이러너잖아. 3대 기획사인 스엔 소속에다가, 음원만 내면 바로 1위 후보에 오를 정도로 인기도 많으니 얼마나 친해지고 싶은 사람이 많겠어. 그런데 같이 밥 먹으려고 일부러 기다리고 번호까지 교환하자고 한 거 보니까, 너랑 정말 친해지고 싶었나 보다. SNS에 올릴 사진까지 찍은 거 보면.”

왜지.

단순히 자신이 KBC 국장의 아들이라선 아닐 터다. 사람들이 직업 특성상 많은 특혜를 받지 않을까 추측하는 것과 달리, 이 바닥 사람들의 태도가 조금 상냥해진 것 외엔 크게 달라진 것도 없으므로.

그리고 이 바닥은 인기가 더 큰 특혜를 받을 수 있는 지표다. 간단한 섭외도 스카이러너가 훨씬 더 많이, 좋은 조건으로 받을 터.

한율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차남석이 정말 모르겠냐는 투로 말했다.

“너라면 금방 소리소문없이 사라질 사람이랑 친해지겠냐, 큰 잡음 없이 이 바닥에 오래 있을 사람이랑 친해지겠냐? 그리고….”

차남석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미간을 찡그렸다. 이런 말을 내뱉는 게 퍽 낯간지럽다는 표정으로.

“네 연기하는 모습이 멋있게 보였나 보지.”

* * *

풀썩. 수재가 지친 얼굴로 민준의 옆에 앉으며 물었다.

“뭘 그렇게 봐?”

민준은 누군가의 SNS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한율이 SNS. 스카이러너 친구랑 친해졌나 봐. 같이 저녁 먹은 사진이 올라왔어.”

“부럽냐? 아니면 섭섭?”

“한참 동생들인데 섭섭까지야.”

“그럼 부럽다는 거네?”

민준은 핸드폰 전원을 가볍게 눌러 껐다. TV에선 출연자들이 자지러지게 웃을 정도로 재밌는 장면이 나오고 있었지만, 민준의 눈엔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이 바닥에선 서로 편히 고민을 나눌 수 있는 좋은 친구 만나기가 힘들잖아. 그래서 조금 부럽네. …걱정도 되고.”

민준이 한창 연습생이었던 시절, 함께 연습생 생활을 하거나 학원에서 만났던 인연은 치열한 경쟁과 거침없는 평가와 비난을 이기지 못하고 떠나거나, 잠깐 들어왔어도 소리소문없이 멀어졌다.

‘기껏 마음이 맞는 친구를 찾았다고 생각해도.’

기뻐하는 순간은 오래 가지 않았다. 가까워지면서 보이는 이면이 실망스러운 경우가 많았다. 최근 마약 사건으로 큰 파장을 일으킨 라트도 그중 한 명.

『한 번도 안 해봤다고? 뭐야, 진짜 회사에서 시키는 대로 일만 했던 거야? 난 또 회사에 뭐 책잡혀서 군말 없이 시키는 대로 다 하는 줄 알았더니…. 그래, 계속 그렇게 순진하게 살아주라, 친구야. 아, 간만에 마음이 맑아지네.』

친구라고 부르면서 범죄를 아무렇지 않게 권유했다. 그에 거부감과 실망을 드러냈음에도, 여전히 저를 친구처럼 여기며 아무렇지 않게 종종 연락했다. 그런 모습에 더 기가 찼다.

“걱정하지 마. 입대하면 똑같이 머리 빡빡 깎은 전우를 잔뜩 사귈 수 있을 테니까.”

민준은 회상을 밀어내며 영혼 없이 웃었다.

“하하하. 그거 전혀 위로 안 되는 거 알지, 형?”

“뭐야, 가을에 같이 입대하자고 신나게 말할 땐 언제고. 막상 약속 시기가 가까워지니까 가기 싫어지냐?”

“아직 반년이나 남았는데 무슨. 그나저나 산우는 어때? 아직도 그 상태야?”

“의자에서 잠든 거 침대에 던져놨다. 그래도 안 깨고 자더라.”

“형도 오늘 여기에서 잘 거야?”

“그러려고.”

이곳은 블블의 숙소가 아닌, 산우가 독립해서 마련한 새집이었다.

어쩌다 한번 들른 가게가 하필 라트 사건과 관련된 마약 브로커가 드나드는 곳이어서 조사와 검사를 받았는데, 친하지도 않은 여자 아이돌 A와 친하다는 루머가 기사를 통해 퍼져 온갖 악플이 날아들었다.

좋은 조건으로 계약논의가 오가던 별이날다 엔터테인먼트에선 기사를 통해 계약설은 사실무근이라고 선을 긋기까지.

고동 엔터가 뒤늦게, 라트와 함께 조사를 받은 여자 아이돌 A양이 산우와 친분이 있다는 기사는 과장되었다, 같은 학원에 잠깐 다녔을 뿐 연락처도 모르는 사이라고 공식 입장을 내놨지만, 해당 공식 입장을 실은 기사는 포털사이트 메인엔 뜨지도 않았다.

회사 홍보팀도 소극적으로 건성건성 방치하고.

그래서 블블 멤버들은 혹 산우가 마음의 상처를 깊게 입어 허튼 생각을 하지 않을까, 이렇게 돌아가면서 산우의 집에 머물고 있었다. 집에 틀어박혀서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않고, 폐인처럼 게임만 하는 산우를 케어해주며.

“어차피 숙소에 가봤자 할 것도 없고, 산우네 집 TV로 유료 VOD나 실컷 보려고. 그런데 너 곧 약속 시간 아니야?”

“아.”

민준은 시간을 확인하곤 소파에서 일어났다. 수재가 씩 웃으면서 손을 들었다.

“미팅 잘하고 와.”

“응.”

3시간 후, 커뮤니티 사이트의 블블 게시판.

[제목: 민주니 팔색 엔터 대표랑 미팅함!!!!!!!!!!!!]

[미리 말해두는데 나 사생아님.]

-이게 끝?

-팔색 엔터? 그런 회사도 있음?

-팔색이면 김우재 있는데네? 발라드 가수들이랑 밴드, 싱어송라이터 소소하게 있는 곳ㅇㅇ

-여기 아이돌은 안 키운다고 알고 있는데

-아ㅜㅜ... 애들 진짜 뿔뿔이 흩어지는구나...

-울 민호구 이번 기회에 보컬로서 꽃 좀 제대로 피워보자!!

-팔색 넘 작아서 불안한데ㅋ 차라리 회사를 하나 차리지

-입대 전에 앨범 하나 내주려나ㅜㅜ

-어디든 ㅈ같은 ㄱㄷ만 벗어나면 됨ㅇㅇ

-ㅃ 탈ㄱㄷ 응원한다(*´∇`)ノ [지나가던 타갤러]

위 게시글 내용은 다음 날이 되자, 앗싸일보가 조금 더 살을 붙여 기사로 내놨다.

[블블 민준, 고동 떠나 팔색 엔터로 이적?!]

[4월 전속계약이 만료되는 블랙블러드의 민준이 12일, 팔색 엔터테인먼트 대표와 만났다.

팔색 엔터테인먼트는 작년 대중음악 시상식에서 베스트 발라드 부문을 수상한 김우재가 있는 곳으로…(중략).]

‘팔색이면….’

한율은 핸드폰으로 팔색 엔터테인먼트를 검색했다. 소속 아티스트 중 낯익은 얼굴이 셋 있었다.

유명한 발라드 가수로, <2017 아시아뮤직페스티벌>에서 인사를 한 번 나눈 적이 있는 김우재, <보컬리스트 시즌3>에서 한율과 오프닝 무대에 함께 섰던 강병준, 마지막은 어제 <목톡톡>에 함께 출연한 안젤라.

“써한, 선물은 언제 사러 갈까? 오늘? 내일?”

한율은 댓글을 대충 훑으며 대답했다.

“오늘.”

“어디 가서 사지? 너 사람 많은 곳은 불편할 거 아냐.”

“괜찮을걸? 사람들은 생각보다 타인한테 별로 관심이 없잖아. 그리고 만나는 사람이 다 이프림도 아닐 테고.”

책상에 엎드린 채 늘어져 있던 길우성이 눈을 끔뻑거렸다.

“하긴.”

방과 후. 한율은 길우성과 함께 현장전의 차를 타고 유명한 디자인문구점으로 향했다. 내일 두 번째 믹스테이프를 발매하는 어스래빗의 유닛, ‘트레리안’의 강보배와 라이언에게 줄 축하선물을 사기 위해서였다.

매장 안엔 학생 손님이 많았다. 한율과 길우성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일행의 팔을 퍽퍽 두드리는 반응이 시야를 스쳤다.

“서한율, 서한율! 별일 막내!”

“…미친, 실물 봐.”

“같이 온 친구도 걔 아냐? 같은 팀 멤버.”

예상했던 대로 사람들은 팬들처럼 우르르 몰려들어 사람을 곤란하게 만들지 않았다. 멀리에서 숙덕거리거나, 슬그머니 거리를 좁혔다가도 얼굴을 살피곤 휙 도망치는 게 고작.

“맞아, 진짜 걔들 맞아…!”

두 사람 곁에 곰 같은 덩치에 산적 같은 외모를 지닌 현장전이 떡하니 버티고 있어서 그런 건지도 모르지만, 한율과 길우성은 들리는 말은 못 들은 척 무시, 시선이 마주치는 사람에겐 살며시 미소를 지어주며 선물을 골랐다.

“형들 선물 고르니까 지난번 생각난다. 우리가 직접 만든 팀 반지를 공개한 게 보배 형이랑 라욘 형이 처음 믹테 발표한 날이었잖아.”

그게 벌써 작년 8월의 일.

한율은 길우성의 손에 끼워진 팀 반지를 힐끗했다. 길우성의 반지에만 특별히 새긴 보호 마법은 처음 그대로였다.

길우성이 반지 낀 손을 가볍게 말아쥐며 턱에 댔다. 심각한 얼굴로 중얼.

“이번에도 그런 특별한 선물을 기대하면 어떡하지? 지금이라도 목걸이를 만들러 갈까?!”

한율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예 패물 세트를 완성하게?”

딱. 길우성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거 좋은 생각이다! 형들이 뭔가를 발매할 때마다 팀 목걸이, 귀걸이, 팔찌를 차례차례 만드는 거…. 써한, 사람이 말하는데 어디 가! …저기요?”

나 고민이 있다

“빠이, 빠이~. 잘 자요!”

[라이브 방송이 종료되었습니다.]

새카매진 액정에 방송 종료 메시지가 뜨자, 카메라를 향해 생글생글 웃던 얼굴이 삽시간에 굳었다.

“…하.”

데뷔 3년 차. 보이그룹 MOHE의 리더인 최민이 짜증스레 한숨을 내뱉었다.

“왜 자꾸 캐물어, 씨발. 사람 짜증 나게.”

“맞는다고도 못해, 아니라고도 못 해. 그러게 왜 하필 요즘 같은 때에 클럽엘 가냐?”

“그쪽이 오라고 부르는데, 가지 그럼 안 가냐 새꺄?”

조금 전까지 세상 부드럽고 다정했던 이들이 거친 욕을 뱉어낸다. 그러나 이런 이중적인 모습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지 오래라, 이해원은 덤덤한 얼굴로 회의실을 나왔다. 저들끼리 신나게 떠드는 5명의 멤버들을 두고.

이해원은 홀로 회사 복도를 걸으며 생각했다.

‘조용하네.’

작년, 어스래빗의 미니 팬 미팅 자리에서 MOHE의 팬이 난동을 부렸다. 그 일로 어스래빗의 대기실에 찾아가 사과를 한 이후부터 같은 팀 멤버들의 따돌림이 시작되었다.

매니저를 제외한 타인의 시선이 미치는 곳에선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걸고 스킨십도 하지만, 멤버들끼리 있을 땐 노골적으로 투명 인간 취급을 했다.

하지만 이해원은 그들의 무시가 고마웠다.

그들과 자신 사이에 쌓인 담은 자신을 고립시키는 게 아닌, 보호해주는 담처럼 느껴졌으므로. 그래서 외롭지도 서럽지도 않았다.

‘핸드폰도 있고.’

핸드폰을 돌려받았을 땐 얼마 안 가 다시 압수당할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도 매니저는 별말을 하지 않았다. 스케줄 때문에 잠깐 맡겨놔도 다시 돌려주었다.

한번은 정말 핸드폰을 마음껏 써도 되냐 물었더니 귀찮다는 투의 대답이 돌아왔다.

『담배한테서 전화 오면 고맙다고 해라. 그 사람 때문에 대표님이 허락한 거니까.』

담배는 이해원의 스폰서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스폰서는 이해원에게 이렇게 말했다.

-『서한율이 SNS에다 112 어쩌고란 말 안 적었으면 나도 너한테 폰 허락하라고 안 했지. 하지만 여기까지야. 네가 걔한테 뭐라고 떠들었는진 모르겠는데, 쓸데없는 얘기를 흘린다 싶으면 그땐 아예 한국에서 못 살게 해줄 테니까 알아서 처신 잘해.』

조금 더 무거운 족쇄가 채워진 것 같은 기분도 들지만, 상관없었다. 지저분할 걸 충분히 예상하고 선택한 길이다.

뒤로 감춘 구정물의 흔적을 드러내봤자 겨우 다시 잡은 친구와의 인연, 좋은 사람들과의 인연이 사라질 게 뻔한데… 떠들 수 있을 리가.

‘이 상태로도 만족해. 여전히 사적인 외출은 금지지만….’

우웅. 이해원은 고은훤에게서 온 톡을 보곤 입가를 올렸다.

-[야 너 아까 라방할 때 뒤에 그림자 있더라.]

[거짓말하지 마]

-[너님 그림자요ㅇㅇ]

-[그림자 없으면 그게 귀신이지 사람이냐]

[한가한가 봐?]

-[단역은 대기가 일이자나ㅋ]

친구와 이런 심심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그렇게 복도 한가운데에 우두커니 서서 답변을 적을 때였다.

“이해원.”

“…네?”

사무실에서 나온 매니저가 이해원을 불렀다.

“가서 안인섭 불러와. 너희 둘한테 섭외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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