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3월 14일. ‘트레리안’의 두 번째 믹스테이프가 글로벌 음악 공유서비스인 SC와 너튜브에 공개되기 한 시간 전. 어스래빗은 오래간만에 8명이 전부 모여 라방을 진행했다.
오늘은 트레리안의 두 번째 믹테가 발매되는 날이기도 하지만, 화이트데이이기도 했다. 그래서 선택한 라방 주제는 [트레리안ㅊㅊ 토끼 솜사탕].
“이, 이거 제대로 작동되는 거 맞아?”
솜사탕을 만들기 위해 가정용 솜사탕 기계를 빌려온 것까진 좋았는데, 막상 작동시켜보니 생각보다 소음이 너무 컸다.
위이이잉!
“이거 설마 폭발하는 거 아니지…?!”
“설탕 너무 조금 넣었어. 더 넣으면 안 돼?”
라이언이 설탕 봉지를 든 채 물었다. 설명서를 유심히 살피던 차남석이 고개를 흔들었다.
“작동 중간에 넣으면 사방에 설탕이 튈 수 있…. 야, 사람 말은 끝까지 들…!”
위이이잉! 라이언이 기계에다 설탕을 조금 더 붓는 그 순간이었다. 우렁찬 모터 소리와 더불어 설탕이 사방으로 튀었다. 파파팟.
“으앗!”
거기에 놀라 들썩거린 설탕 봉지가 푹 꺾이고, 테이블과 바닥으로 설탕이 쏟아졌다. 쏴아아.
“헉! 미안….”
“괜찮아, 괜찮아. 어? 거미줄 나온다!”
“아니, 거미줄이 아니라 이게 솜사탕이 되는 실처럼 그 뭐냐….”
“몰라, 일단 막대로 감아보자.”
위이이잉!
“이거 폭발하는 거 아니냐고…!”
멤버들이 허둥거리는 사이 한율은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챙겨 왔다. 라방 톡창은 팬들이 올린 웃음 의성어로 채워졌다.
-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이곸ㅋㅋㅋㅋ
-저 기계 원래 저렇게 시끄러워요? ㅋㅋㅋㅋ
-톢이들 대환장 파팈ㅋㅋㅋㅋ
-보배 진짜 모터 폭발할까 봐 벽에 달라붙은 거 봨ㅋㅋㅋㅋㅋ
-보배 혼자만 피했엌ㅋㅋㅋㅋ
박가람은 한율의 비질을 피해 이리저리 몸을 움직이면서도 막대로 솜사탕을 휘감았다. 그러다가 더는 솜사탕이 나오지 않자 허탈한 소리를 냈다.
“에게? 이거 너무 작은 거 아니야?”
“놀이공원에서 파는 솜사탕의 10분의 1도 안 되는 것 같다….”
“가정용이잖아. 다시 설탕 넣고 그걸로 두르면서 부풀리면 될 것 같은데?”
“조금 먹어봐도 돼?”
“하뉼, 미안…. 내가 할게.”
“괜찮아요.”
“설탕이니까 물에 녹잖아. 쓸지 않고 물을 뿌리면….”
“그럼 바닥이 끈적해지지, 바보야.”
그러나 대형 솜사탕 8개를 한 시간 안에 다 만들기엔 시간이 촉박하여, 그들은 한입이면 없어질 작은 솜사탕 8개를 겨우 완성하고 라방을 급히 마무리 지었다.
“내년 화이트데이 땐 정말 놀이공원에서 사용하는 솜사탕 기계를 빌려서…!”
“그런 약속은 함부로 하는 거 아니야.”
“앞으로 1분 후 믹테 발표! 많이 들어주세요~!”
카메라를 향해 설탕이 묻어 반짝거리는 손을 흔들흔들.
-애들 급마무맄ㅋㅋㅋㅋㅋ
-설탕은 사방에 다 뿌려놓고
-아이고 저거 어떻게 다 치웤ㅋㅋㅋㅋ
-집에서 저랬으면 바로 엄마의 등짝 스매싱 각
-ㅋㅋㅋㅋㅋ
-다음엔 걍 사 먹자 애들아ㅎㅎㅎ
[라이브 방송이 종료되었습니다.]
“으…. 테이블이 다 끈적끈적해.”
“제대로 안 치우면 단체로 혼난다. 일단 한데 모아서 여기에다 버리고, 물티슈로 여러 번 닦자.”
이건우가 시간에 맞춰 너튜브에 올라온 트레리안의 음악을 핸드폰으로 재생했다. 흥겨운 랩을 들으며 8명이 동시에 움직이자 청소와 정리는 순식간에 끝났다.
[냐냐 거리던 고양이, 밥먹었냐 잘지내냐 캣츠 인사]
“…이게 대체 뭔 가사니.”
“고양이 별로 간 고양이들 생각하면서 쓴 가사?”
“금방 잘 치웠네.”
라방을 지켜보고 있었는지, 오동식 팀장이 회의실로 들어왔다. 그러곤 강보배에게 손짓했다.
“보배야, 잠깐 사무실로.”
“저요?”
강보배가 의아하게 되물었다. 오 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너요. 사무실에 있는 회의실로 와.”
[무지개 위 냐냐, 보고싶다 냐냐. …캣츠 인사.]
30여 분 후. 오 팀장과 미팅을 마친 강보배는 얼떨떨한 얼굴로 연습실로 들어왔다.
유호가 음악을 끄며 물었다.
“뭐야? 섭외 들어온 거야?”
“응…. 피처링 해줄 수 있겠냐고 연락이 왔대.”
“오, 축하한다! 누구 피처링?”
강보배가 목 뒤를 긁적이며 쑥스러운 얼굴로 대답했다.
“아이허니 유린 선배님 솔로곡.”
잘 됐다는 얼굴로 환하게 웃던 이건우가 그 표정 그대로 눈을 깜빡거렸다.
“누구?”
“아이허니 유린 선배님.”
이건우의 입꼬리가 내려갔다.
“왜 너냐.”
이건우는 예전에 아이허니 팬이라고 밝힌 바 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팬인 모양.
“잘은 모르겠지만 그쪽 프로듀서분이 내 목소리가 잘 어울릴 것 같다고 적극 추천….”
“으아, 부럽다아…!”
“보배가 노래하거나 랩할 때 목소리가 좋긴 하지. 딕션이나 리듬 타는 것도 일품이고.”
“헤헷…. 그래도 걱정하지 마. 직접 만날 일은 음방 스케줄 한두 번 빼곤 전혀 없을 거래. 녹음도 따로 할 거고.”
“축하해요, 형.”
작년, 차남석과 SBC 케이블 채널 예능 <동갑끼리>에 나간 뒤 두 번째로 외부에서 들어온 섭외였다. 그것도 가수이자 래퍼로서 들어온 섭외.
한율에 이어 다른 멤버들도 강보배에게 축하 인사를 건네거나 머리를 거칠게 헝클이듯 쓰다듬었다.
“후…. 이렇게 또 한 사람의 두각이 드러나는군.”
“넌 언제 드러낼 거야?”
눈을 반짝거리면서 묻는 박가람을 마주 보며 길우성이 생글생글 웃었다.
“후후…. 때가 되면 저절로 드러나게 되리니, 형님이나 잘하시죠.”
“…하하.”
그 말에 욱해서 뭐라고 받아치려던 박가람이, 아차 하는 표정으로 눈동자를 크게 굴리곤 씨익 웃었다.
“이런 건방진 막내를 보았나.”
“써한.”
모든 레슨과 연습을 끝내고 숙소로 돌아왔을 때였다. 길우성이 한율의 뒤를 졸졸 쫓아 방까지 따라 들어왔다.
“나 고민이 있다.”
“뭔데.”
탁. 길우성이 문을 닫더니 책상 앞에 놓인 의자를 끌고 와 앉았다.
“너도 잘 알다시피 내가 춤을 엄청나게 잘 추잖아.”
“…….”
“왜 대답이 없지, 친구? 나한테 춤을 가르쳐 달라 청했던 기억을 깡그리 잊어버린 건가?”
“듣고 있으니 말하라고.”
“네가 볼 땐, 어떻게 해야 나의 이 천부적인 재능과 후천적 노력이 결합한 춤 실력을 만천하에 알릴 수 있을 것 같냐?”
아무래도 팀 내 유닛이 두 번째 믹테도 발매하고, 피처링 참여 제안까지 받자 슬쩍 자극을 받은 모양이었다.
“네가 그랬잖아. 우리가 빨리 잘 돼야 너도 잘되는 거라고. 의견을 내놔봐.”
“춤을 선보이는 프로그램엔 이미 나간 적 있잖아. 긴장해서 말아먹긴 했지만.”
“오오, 역시 써한. 남의 아픈 흑역사를 아무렇지 않게 후벼파버리는군. 이 냉정한 친구.”
대체 최근 뭘 즐겨 보기에 말투가 저따위일까. 한율은 가벼운 의문을 흘려보내며 말했다.
“팬들이 너 춤 잘 추는 거 어떻게 안다고 생각해?”
“그야 우리 무대나, 내가 SNS에 올리는 커버 안무 영상 보고?”
“잘 아네.”
“으음….”
앓는 소리를 내던 길우성이 핸드폰에 한 앱을 띄웠다. 익숙한 붉은 로고 옆엔 한글로 ‘너튜브’라 적혀 있었다.
“SNS 말고, 이걸 통해서?”
“그것 말고 달리 보여줄 창구가 없잖아. <댄스단수> 같은 프로그램이 런칭될 때까지 목 빼고 기다릴래?”
“으음….”
두 번째 신음. 표정을 보아하니 길우성도 너튜브 생각은 안 해본 건 아닌 듯했다.
“왜. 음원 사용 허락이나 안무 저작권 문제가 마음에 걸리면 회사에다….”
“아니, 실은 내가 초딩 때 아빠 계정으로 개설한 채널이 있거든. 그게 생각나서 그래.”
“…혹시 이상한 영상을.”
“날 뭐로 보고! 그냥 춤추는 영상 딱 하나만 올렸거든?!”
그러니까 이상한 춤을 추는 영상을 올린 게 아니냐란 눈으로 응시하자, 길우성이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핸드폰을 빠르게 만졌다.
“보아라! 이게 나의 초딩 시절이다!”
길우성이 보여주는 영상 속엔, 열 살이나 되었을까 싶을 정도로 키가 작고 왜소한 꼬마가 모자를 푹 눌러쓰고 서 있었다. 장소는 뒤로 현무암 돌담이 쌓인 흙 마당.
[켠다.]
길미현일까. 앳된 소녀의 목소리와 함께 음질이 썩 좋지 않은 댄스 팝이 흘러나왔다. 편집이고 뭐고 전혀 들어가지 않은 생초보의 영상이었다. 화질도 나쁘고.
그러나,
‘잘하네.’
음악과 동시에 움직이는 어린 길우성의 몸놀림은 여간내기가 아니었다. 유연하면서도 역동적으로 움직였다. 딱딱 맞는 박자나 섬세한 몸짓이 그동안 쌓은 연습량을 말해주었다.
3분 45초짜리 영상에서 1분이 지났을 무렵, 한율이 영상에서 내내 눈을 떼지 않자 길우성이 거들먹거렸다.
“잘하지? 쩔지?”
그러다 한율이 일시 정지를 누르고 댓글을 살피려 하자, 핸드폰을 휙 높이 들었다.
“악플 달렸어. 보지 마.”
“악플?”
“…그놈들. 어떻게 알았는지, 영상 올린 지 며칠 안 됐을 때 몰려와서 막 비웃었거든.”
오프라인뿐만이 아니라 온라인까지 따라다니며 괴롭혔던 건가. 왜 지금까지 너튜브에 개설했던 채널 이야기를 한 번도 안 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럼 더 봐야겠는데.”
길우성이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내 고통이 즐겁습니까, 휴먼?!”
“너 마지막으로 댓글 확인한 게 언제야.”
“어….”
길우성이 기억을 더듬다가 멍해진 얼굴로 눈을 끔뻑거렸다. 악플이 달린 걸 본 뒤로 전혀 들여다보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조금 전에도.
“내가 대신 확인해줄게. 줘 봐.”
“…엉.”
의외로 순순히 내놓는다. 한율은 영상 크기를 줄이고 아래에 달린 동영상 조회수와 하트, 댓글을 확인했다.
[동영상 조회수 230,463회 ♥8,432]
몇 년 동안 묵은 댓글란엔 악플이 아닌, 외국인들의 온갖 놀랍다는 감탄사와 칭찬이 잔뜩 달려있었다.
좀 봐주지 그랬냐
길우성이 어릴 때 찍은 댄스 영상을 본 오동식 팀장이 미소 지었다.
“팬들이 이거 보면 무척 좋아하시겠네. 나중에 홍보용으로 사용하기에도 좋고. 이 채널 계정이 아버지 거라고 했지?”
“네.”
“찍은 장소는?”
“제주도 집 뒷마당이요.”
“아직도 그대로?”
“네.”
오 팀장의 미소가 더 짙어졌다.
“그럼 이 채널은 그대로 두고, 9년 전 췄던 이 춤을 다시 춰보자. 이 장소에서, 똑같이. 그리고 두 영상을 잘 편집해서 새로 개설하는 네 채널 첫 번째로 올리는 거지. 어때?”
“히익. 멋진데요?”
“언제가 좋겠어?”
“연습을 좀 해야 하니까….”
한율은 빠르게 세워지는 두 사람의 계획을 듣다가 고개를 돌렸다. 뮤닷 채널로 맞춰진 사무실 TV에선 한 프로그램의 예고가 나오고 있었다.
[좋은 일은 티 나게! 사랑 갚기 프로젝트 <러브티>!]
뮤닷에 저런 프로그램이 있었나? 의아해하며 봤더니 오늘이 겨우 2회였다. 아이돌이 모여 봉사활동이나 좋은 취지의 사회 캠페인을 돕는 내용으로, 방송 시간은 목요일 밤 11시 45분.
“왜?”
한율의 시선을 따라 TV를 본 조유찬이 물었다.
“한율이 너도 저기 나가고 싶어?”
“산 쓰레기 줍는 봉사활동이면요.”
“사욕이 다분히 들어가 있구나.”
“그런데 저런 류의 기획 프로그램은 섭외부터 일찍 시작하지 않아요?”
보아하니 장기간 방영될 만한 프로그램도 아니었다. 여러 기관과 단체에 협조를 구하는 수고 문제도 있고, 올 야외 촬영이니 인건비를 포함한 제작비도 만만치 않게 들 터다. 여기에 제작은 뮤닷이 아닌 외주 프로덕션.
“응, 우리한테도 연락이 왔으니 하는 말이지.”
“정말요?”
오 팀장과 이야기를 나누던 길우성이 끼어들었다.
“누가 나가요? 써한?”
“누구를 보내면 좋을지 아직 논의 중이야. 결정되면 당사자에게 먼저 알려줄 테니 그때까진 조용히.”
“네에….”
늘어지듯 대답하는 길우성의 시선이 TV를 빠르게 살폈다. TV에선 이미 <러브티> 예고가 지나 스카이러너의 피자 광고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한율은 덤덤히 통보했다.
“전 안 할래요.”
곧 영화 크랭크인이라 바쁘다.
오 팀장과 조유찬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며칠 후, 뮤닷 <러브티>에 나갈 멤버 두 명이 결정되었다. 길우성, 이건우. 그리고 한 가지 깜짝 소식이 더.
목이 다 늘어진 티셔츠에 무릎 부분이 튀어나온 트레이닝 바지. 후줄근한 차림의 박가람이 이마에 손가락을 댄 채 낮은 웃음을 흘렸다.
“후후후. 이 몸이 웹드라마에 캐스팅되었다. 그것도 고등학생 싱어송라이터 역할로!”
멋들어지게 손을 휘두르며 외친다.
“주연처럼 비중 있는 조연이다!”
“와아아…!”
짝짝짝. 박가람을 지켜보던 7명의 멤버 중 라이언이 손뼉을 쳤다. 박가람이 어깨를 으쓱이며 거들먹거렸다.
“건방진 차남석과 대인배 서한율에게 가려졌던 나의 뛰어난 가창력을 가감 없이 보여주지! 음하하!”
“동생들한테 밀린 게 뭐 자랑이라고.”
“싸우자, 이건우!”
강보배가 고개를 기울였다.
“대인배?”
“…….”
대인배가 된 한율은 별 말없이 잠깐 멈췄던 스트레칭을 재개했다.
* * *
3월 22일 목요일. 지난주 한율이 녹화한 <목톡톡>이 방영되는 날. 방송이 자정 즈음 끝나는 터라, 멤버들은 숙소에서 편히 보자며 일찍 퇴근했다. 그리고 방으로 들어가 혼자 편히 보려는 한율을 거실 소파 가운데에 앉혔다.
“와, 자이씨 선배님 의상 봐.”
“저것도 최대한 단정하게 입고 나오신 것 같은데.”
“한율아, 저분 실제로 만나보니 어땠어?”
“평범하게 인사 잘 받아주시던데요? 성인이 돼도 술은 꼭 멀리하라는 조언도 해주시고.”
“왜? 뭐 들은 거 있어?”
으음. 강보배가 잠시 말을 고르는 듯하다가 대답했다.
“예전에 부자랑 금수저를 거침없이 디스하는 랩으로 좀 유명하셨었거든. 그런데 본인이 성공하니까 ‘음지 후배들에게 부를 나눠주고 양지로 이끌어주고 키워줘야 진정한 플렉스 아니냐’라고 주장했던 게시글을 모조리 삭제하고, 과거 힙합 씬 친구들 연락을 모두 피한다고… 평이 안 좋게 나셨더라고.”
“보니까 기부 많이 하시던데? 작년에 5억이었나?”
“와우, 기부 플렉스.”
“그런데 그런 건 한쪽 말만 들으면 모르는 법이잖아. 상대가 돈이 많다 싶으면 어떻게든 친분을 들먹거리면서 금전적 도움을 요구하고, 안 들어주면 되레 나쁜 말을 퍼뜨리는 사람들도 많으니까.”
차남석의 말에 강보배는 그럴 수도 있겠다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서 박가람도 맞장구쳤다.
“맞아, 맞아.”
“공사판 일용직이랑 택배 상하차 알바하면서 겨우 모든 돈으로 미국까지 가서 인종차별에, 총에 맞아 죽을 뻔한 일까지 겪으면서 여기저기 전전해 실력 쌓고, 그 노력으로 일군 인지도로 쇼핑몰도 대박 난 건데…. 갑자기 거기에 숟가락 얹으려 하면 나라도 화나겠다.”
“아냐, 이것도 양쪽 말 다 들어봐야 안다니까?”
게스트 소개가 시작되기 무섭게 토론이 벌어졌다. 한율은 그들의 대화를 한 귀로 흘려들으면서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그런 경우도 있었잖아. 과거에 일진이었던 아이돌이 과거 숨기려고 친구들 연락 다 차단했다가 ‘너 일진이었잖아’ 폭로 나오니까 오히려 걔들한테 끌려다닌 피해자라고 주장했는데, ‘네가 나 웃으면서 때렸잖아.’라는 진짜 피해자가 나와서 대폭망한 사건.”
“와, 그 사건. 레전드였지.”
“이젠 과거에 나쁜 짓을 저질렀으면 TV에 나올 생각을 말아야 해. 모든 게 다 기록되고 까발려지는 시대라고.”
“그런 의미에서 자수 받습니다.”
[KBC <목톡톡> 실시간 톡창]
-자이씨랑 서한율 얼굴 크기 봨ㅋㅋㅋㅋㅋ
-왜 하필 나란히 옆에 앉아선ㅋㅋㅋㅋㅋ
-힙찔이는 군대나 가라
-자이씨 단독 샷 잡힐 땐 별 생각 안 들었는데... 자이씨 머리가 크구나ㅋ 번 돈으로 피부 관리도 좀 받아야 할 듯
-남돌은 군대나 가라
-왜 하필 옆에 기생오라비 남돌을 붙여놓은거냐.. 꼭 그래야만 했냐 이 방송국 놈들아?!!!ㅜㅜ
-자이씨 형님 슴살 되자마자 군대갔다왔는데 먼 개소리야ㅡㅡ
-고등학생한테 군대나 가라니 먼 개소리야
-형님한테 마스크팩 선물해드려야겠어요...
-찌찌뽕
-....
소개가 끝난 뒤엔 오늘의 주제, ‘그렇게 다 가져야만 속이 시원했냐’란 말을 듣기까지 게스트들이 겪은 일화로 이어졌다. 녹화 당시 들었던 지루하거나 밋밋한 이야기는 대부분 편집되고, 리액션도 다른 장면의 것을 갖다 붙인 부분도 있었다.
조용히 TV를 보던 라이언이 불만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한율이 분량 적어.”
“제가 말을 심심하게 하잖아요. 그래서 편집이 많이 됐네요.”
녹화할 땐 부친과 관련된 자잘한 질문을 여러 개 던지더니. 정작 나온 건 두어 개뿐이었다.
그때 다시 카메라가 한율을 잡았다.
[한율 씨는 연기면 연기, 노래면 노래, 춤이면 춤. 여기에 현지인들도 깜짝 놀랄 정도의 영어 실력까지 갖췄잖아요.]
MC의 말에 맞춰 <하울링>에서 사고 난 차에서 기어 나오는 씬, <별☆일없는 집>에서 비바람을 맞으며 섬세한 감정을 연기하는 씬, 화려한 무대 위에서 환하게 웃으며 노래를 부르는 모습이 자료 화면으로 나갔다.
그린 라이브 어스래빗 채널 <깡충깡충 영어 극장>에서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모습도.
“어? 나다.”
자료 화면으로 잠깐 함께 나온 라이언이 반응했다.
[여기에 지난번에 선보인 특공무술에다가 양궁, 심지어는 총싸움 게임도 엄청 잘한다고 들었는데, 뭔가 더 잘하고 싶거나 새롭게 배워보고 싶은 거, 도전하고 싶은 거 혹시 있어요?]
[네, 있어요.]
[뭔데요?]
TV 속 한율이 눈을 빛내며 대답했다.
[스카이다이빙이요.]
-국장님 기절하는 소리 여기까지 들린다
-듣기론 10년 만에 힘들게 가진 아이라고 하던데
-곱게 잘 키워놨더니 하는 말이 ‘나 하늘에서 뛰어내릴래!’ :D
-캬아 싸나이의 로망이지
-고3도 저렇게 잘하는 게 많은데... 난 머햇지
-이쯤되면 박탈감도 사라진다
-하.. 상대적박탈감...ㅅ...ㅂ...
-부모가 이것저것 다 챙겨주면서 키워놨더니 스카이다이빙ㅋㅋㅋㅋㅋ
“…….”
멤버들도 벙벙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저건 진심이다. 음, 알 수 있어.”
“일본에서 롤러코스터 신나게 탈 때부터 알아봤다.”
[그리고 비밀기지도 하나 지어보고 싶어요.]
[???]
물음표 자막.
[비밀기지요?]
방송이 중반에 접어들었을 무렵, 토크는 돌고 돌아 수능 만점을 받고도 배우의 길을 선택한 김향전에게로 돌아갔다.
[그런데 향전 씨가 주로 연극무대에서 활동하셔서, 시청자분 중에는 향전 씨를 모르는 분들이 계실 것 같아요. 어떻게, 그분들에게 어필이 될 수 있도록 이 자리에서 즉흥 연기를 한 번 보여주실 수 있을까요?]
[와아…!]
MC의 제안에 출연자들이 기대된다는 얼굴로 손뼉을 쳤다. 그리고 쑥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김향전의 얼굴.
한율은 TV를 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저 부분, 편집이 안 됐나? 그때 김향전의 매니저가 잘라 달라고 PD한테 부탁하는 것 같았는데.’
[그런데 연기를 하려면 상대도 있어야 몰입이 잘 될 텐데….]
[그럼 먼저 우리 MC, 정태현 씨가 향전 씨 여자친구 역을 맡고.]
[흥.]
-정태현 벌써 연기 들어갔엌ㅋㅋㅋ
-으잌
-표정 새침한 거 봐
[향전 씨는 마음이 떠난 여자친구를 달래는 상황이에요.]
[정극이죠?]
[어? 자신 없으세요?]
[아아뇨? 전혀요.]
당시 김향전은 지상파 예능 출연이 처음이라 그런지 초반부터 긴장으로 굳어있었다. 그러나 녹화가 진행되고 3시간이 지나자 어느 정도 풀어져, 송충이 눈썹에 파운데이션 사이로 희미하게 수염 자국이 보이는 정태현을 앞에 두고 곧잘 몰입했다.
그러나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용맹이 잔뜩 기대된다는 얼굴로 눈을 빛내며 제안했다.
[이번엔 배우 분들끼리 호흡 맞춰보는 거 어때요?]
[오, 기대된다!]
[과연, 연극계의 신동과 드라마계의 신동! 두 사람의 호흡은 어떨지…!]
한율은 자리에서 일어나는 TV 속 자신과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는 김향전을 보며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이번엔 향전 씨가 삐딱한 중학생이고, 한율 씨는 향전 씨 엄마.]
[네?]
[정극이죠?]
-설정 왜 저랙ㅋㅋㅋㅋㅋ
-차라리 아까처럼 커플로 해 줰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이런 게 즉흥의 묘미지ㅋㅋㅋㅋ
-과연
-율톢 방금 김향전이 했던 말 고대로 해ㅋㅋㅋ 정극이죠?
-한율이도 하기 싫은가 보닼ㅋㅋ
-남자 고딩에게 난데없이 엄마 역이라니
그러나 재밌겠다는 내용의 톡이 빠르게 올라오던 톡창은 10초도 지나지 않아 느려졌다.
액션 소리가 나오기 무섭게, 김향전을 바라보는 한율의 눈에서 눈물이 툭 떨어진 까닭이었다. 그를 향한 애증이 담긴 눈동자엔 스스로를 향한 동정심도 깔려 있었다.
[…누가 그놈 자식 아니랄까 봐.]
순식간에 역에 몰입하는 한율의 모습에, 조금 전까지 웃고 떠들던 출연자들의 놀란 얼굴이 하나씩 잡혔다. 막 반항심 가득한 중학생이 되려던 김향전의 흠칫하는 모습도.
그에 아랑곳없이 TV 속 한율은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으로 날카롭게 내뱉었다.
[내가 이딴 꼴 보려고 너 데리고 사는 줄 알아?]
[…네, 이딴 자식새끼 데려다 키우느라 고생하시네요! 엄마는 엄마만 힘들지!]
뒤늦게 김향전이 한율이 대사 안에 넣은 설정과 단서를 잡아 받아쳤다.
[나 힘든 건 눈에 보이지도 않아?! 자식이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고민을 하는지, 엄마는…!]
[네가 뭐가 힘들어!]
스튜디오에 쩌렁 울렸던 한율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흘러나왔다.
[애들 돈 뺏고 PC방에 처박혀서 내내 게임만 하는 게 힘들어?! 그게 힘든 거면 엄마는! 네 눈엔 엄마가 매일 노는 걸로 보여?!]
일부러 여성의 목소리를 흉내 내진 않았으나, 지켜보는 출연자들의 표정은 심각하거나 안타까움으로 얼룩졌다.
이 순간은 자신을 힘들게 하는 원망스러운 아들이지만, 그래도 다듬어지지 않은 원초적인 분노까지 뱉어내선 안 된다. 이런 이성을 가까스로 붙잡으며, 크게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참는 한율의 모습에.
[…흐윽.]
그제야 부쩍 느려졌던 <목톡톡> 톡창에 톡들이 하나 둘 올라왔다.
-시선 처리, 발성 대박..
-와... 우리 엄마 보는 줄..ㅋ
방송이 끝나고 포털사이트 실검에는 오늘 <목톡톡>에 출연한 게스트와 스페셜 MC인 용맹의 이름이 떴다. 지난주 한율이 SNS에 올린 사진과 내용을 품은 기사도.
[스카이러너 용맹, <목톡톡> 녹화 후 어스래빗 한율과]
사실 한율이 용맹과 식당에서 찍은 사진은 SNS에 올렸던 12일에 기사로 잔뜩 나왔었다. 그러나 오늘 <목톡톡>이 방영되자, 방송내용만 살짝 첨가해 재탕한 기사가 많이 떴다.
‘용맹이 인기가 많긴 많구나.’
댓글란 추천순 정렬 1페이지가 온통 용맹에게 사랑을 표하는 댓글이었다. 두 사람이 함께 나온 기사임에도 한율을 언급하는 댓글은 1페이지 끄트머리에 간신히 걸쳐져 있을 정도.
한율은 자신의 이름이 나온 다른 기사를 살폈다.
[어스래빗 한율, 수능 만점 배우 김향전과 즉흥 연기]
[22일 방송된 <목톡톡>에서 어스래빗 한율과 배우 김향전이 즉흥 연기로 호흡을 맞췄다. 녹화 당일 스튜디오에서 처음 만난 두 사람은…(중략).]
-두 사람 데뷔 연도, 김향전 2013/서한율 2017
-즉흥 연기는 드라마보다 연극배우가 훨씬 잘 할 거란 선입견이 있었는데 오늘 그게 깨졌다.
-ㅈㄴ 소름인 게, 서한율 무슨 귀신 들린 것처럼 바로 몰입하고, 끝나면 또 바로 몰입에서 빠져나옴ㄷㄷㄷ
-이거 다음부터 김향전 기죽은 거 눈에 보여서 좀 그렇더라ㅋ
-향전 씨 연기 못 하는 거 아니에요! 순간 놀라서 그런 거지! 홧팅입니다~! ^^
-고3과 수능만점자의 대결은 고3의 승리였다.
-♡연기천재 율톢♡
-???: 평소대로 한 것 뿐입니다만?
-선배 좀 봐주지 그랬냐 이 토끼놈아ㅡㅡ
이상하잖아
길우성은 신이 났다.
데뷔 이후 처음으로 개별 스케줄을 뛴다는 생각에. 비록 자신을 콕 집어 섭외가 들어온 것도 아니고 이건우와 함께 출연하는 것이었으나, 그래도 신났다. 혼자가 아니라 오히려 안심도 되고.
“그렇게 신나냐?”
<러브티> 오프닝 장소로 향하는 차 안. 기분 좋게 노래를 흥얼거리는 길우성을 보며 이건우가 물었다. 이건우의 핸드폰에선 <러브티> 1회가 재생되고 있었다.
“스케줄을 나가니까 밥값을 한다는 기분이 들잖아.”
“네가 먹은 밥값, 나중에 다 네 정산에서 다 계산되는 건데?”
“그래도, 매일 바쁘게 일하는 멤버들을 보면 뭔가 마음의 빚? 그런 게 무럭무럭 자라는 것 같지 않소, 형님?”
“잘나가는 멤버한테 얹혀가는 느낌?”
“맞아, 그거.”
길우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멤버들은 팀을 알리기 위해서 열심히 이 일 저 일 하는데, 나는 가만히 뭐 하고 있나 싶기도 하고… 그렇잖아.”
이건우가 씩 웃었다.
“네가 하는 일이 뭐가 없어. 우리 팀 안무 짤 때 같이 의논하기도 하고 팬들이랑도 자주, 잘 소통하는데. 어떤 팬 분이 그러더라. 박가람이랑 우성이 네가 우리 팀의 윤활유 같은 존재라고. 나도 그래. 팀워크가 중요한 아이돌그룹에선 그런 존재도 충분히 제 몫을 한다고 생각하거든?”
점차 멍해지던 길우성이 헤 웃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칭찬이지?”
“…어.”
“흐흐.”
“그렇다고 박가람처럼 웃진 마라. 그런 웃음은 그런 웃음을 지으면서 확실히 못생겨지는 박가람이 해야지, 넌 좀 애매하다.”
“히히?”
“그것도 불합격.”
“…데헷?”
“미묘하게 이상하네.”
“…안 해.”
말은 그렇게 했지만, 길우성은 오프닝 장소에 도착할 때까지 핸드폰 셀카 모드를 거울 삼아 여러 웃는 표정을 연습했다.
잠시 후. 오프닝 장소에 도착한 길우성의 웃는 얼굴은 연습이 무색하게 우스꽝스럽게 변했다.
“아안녕하세… 요호!”
먼저 도착한 출연자들을 향해 활기차게 외치던 인사도 삐끗. 봄바람이 헤집어놓은 머리카락을 손으로 정돈하던 한 아이돌이 그들을 돌아보며 환하게 웃었다.
“와! 어스래빗!”
MOHE의 안인섭이 반갑기 그지없는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안녕하세요! 오늘 잘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