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한율은 다정한 목소리로 인사했다.
“안녕, 미미야. 안녕, 제유.”
“…….”
그 모습을 본 조유찬의 표정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대놓고 거북한 티를 내지 못해 간신히 입가만 올린 모양새였다.
“고양이들 이름이….”
부윤방이 쑥스러운 얼굴로 웃었다.
“제가 감성소녀 팬이라 그만…. 하하.”
미미와 제유는 영화 <고양이 난로>에서 ‘못난이’ 역으로 번갈아 나올 고양이로, 목걸이에 적힌 이름이 아니면 분간이 안 될 정도로 똑같이 생겼다. 무늬도, 털 색도.
“정말 두 마리가 친자매가 아니에요?”
“네. 둘 다 멀리 떨어진 보호소에서 한 마리씩 데려왔어요. 진짜 제유랑 같은 어미한테서 태어난 오빠 고양이는 희우 씨가 키우고 있고.”
고양이들 이름이 예전에 함께 M/V를 찍었던 걸그룹 멤버들 이름이라 그런지, 부르거나 들을 때마다 기분이 묘해진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익숙해지겠지만.
“그런데 동물한테 좋아하는 연예인 이름 붙이는 거….”
조유찬이 조심스레 물었다.
“당사자가 알면 기분이 조금 그렇지 않을까요?”
“헉, 그럴까요…? 하지만 실제로 만날 일이 없을 것 같은데….”
“예를 들어서 미미가 부 감독님이 아끼는 물건을 와장창 깨뜨리거나, 뛰어다니다가 노트북에다가 커피를 엎지르거나 하면.”
“아.”
미미 너 이 XX! 란 욕이 절로 나오겠지.
한율은 조유찬과 부윤방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고양이들과 친해지기 위해 가방에서 고양이 전용 간식을 꺼냈다.
누구냐 넌? 모르겠지만 나랑 놀자! 이런 태도로 한율을 대하던 고양이들이 두 눈이 반짝거리며 달라붙었다. 먀아, 왜옹.
“천천히 먹어.”
한율은 간식을 맛있게 먹는 고양이들을 바라보다가 거실을 살폈다. 부윤방 감독의 집. 침실과 거실이 따로 나뉜 분리형 원룸 여기저기엔 오래된 비디오테이프나 책, 촬영 장비로 보이는 도구가 잔뜩 쌓여 있었다.
낡은 소파는 고양이 발톱으로 긁혀 한쪽이 완전히 헤져있고, 침실은 침대와 고양이 캣타워, 책상으로 사람 한 명이 겨우 지나다닐 정도로 꽉 찬 상태였다.
나름대로 정돈은 잘 되어있으나, 고양이 두 마리를 키우기엔 좁은 집. 하루만 청소를 게을리해도 고양이 털과 모래에서 일어나는 먼지로 건강을 해치기 쉬운 환경이었다.
고양이는 끊임없이 털을 뿜어대는 동물이므로. 여기에 아직 나이가 어리니 밤마다 ‘우다다’ 전쟁일 터.
“하핫. 집이 참 좁죠? 안 보고 안 쓰는 물건을 정리해야 하는데 도통 시간이 안 나네요.”
“그런데 감독님, 원래 키우던 고양이 있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잠깐 부모님 댁에 맡겼어요. 세 마리를 한꺼번에 키울 자신이 없어서…. 고양이들도 스트레스받을 거고요.”
“그럼 촬영이 다 끝난 후에는요?”
“제유를 희우 씨가 데려가기로 했어요. 미미는 계속 내가 연어랑 키우고.”
연어? 원래 키우던 고양이 이름인가?
한율은 고개를 끄덕이곤, 벌써 간식을 다 먹어 치우고 저를 빤히 쳐다보는 고양이들을 쓰다듬었다.
“그래도 애들이 낯을 잘 안 가려서 다행….”
퍽.
“……?”
말이 끝나기도 전 미미가 한율의 손등을 때렸다. 발톱을 전혀 세우지 않아, 푹신한 발바닥 감촉만 느껴진 솜방망이 펀치였다.
왜옹.
부윤방이 하하 웃었다.
“만지기 전에 하나 더 내놓으래요.”
고양이들과 인사를 마친 한율은 부윤방, 조유찬과 함께 나왔다. 그리고 따로 차를 나눠 탔다. 부윤방은 부윤방의 차에. 한율은 조유찬이 운전하는 회사 차에.
“도착하려면 몇 시간 걸리니까 편히 앉아. 시트 뒤로 젖혀서 자도 괜찮고.”
“네.”
크랭크인은 다음 주 월요일이지만 오늘은 그 전에 미리 촬영지와 세트장을 둘러보기로 했다. 콘티 대본만으론 머릿속으로 구체적인 장면을 상상하고 동작이나 동선을 계산하는 데에 한계가 있으므로.
촬영 당일 현장에서 맞춰도 되겠지만, 딱히 스케줄도 없는 토요일이라 겸사겸사.
“한율 씨, 안녕하세요.”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고양이 난로>의 주 촬영지가 될 충북 충주시의 한 주택가.
먼저 와서 마무리 작업이 한창인 세트장을 살피던 이윤영이 한율을 반겼다.
“희우 언니는 잠깐 차에서 통화하고 온대요.”
“같이 내려오셨어요?”
“네, 언니 차 타고.”
성격이 정반대 같은데, 잘 붙어 다니네.
“한율 씨는 미미랑 제유 보고 온다고 들었는데, 어땠어요?”
“두 마리가 정말 똑같이 생겼어요. 미미는 간식 더 내놓으라고 앞발로 때리던데요.”
“귀여웠겠다. 저도 빨리 만나고 싶네요.”
동물을 데리고 하는 촬영은 굉장히 변수가 많다.
특히 고양이는 원체 겁이 많고 잽싼 동물인지라, 고양이가 등장하는 씬 촬영은 실내 세트장과 크로마키 스튜디오에서 진행될 예정이었다. 그것도 힘든 경우엔 고양이 퍼펫 혹은 CG를 사용하고.
“곧 선배님도 만날 수 있을 거예요.”
잠시 후엔 이희우가 와서 인사를 나누고, 함께 배경이 되는 곳을 카메라를 들고 둘러보면서 간단하게 모션이나 대사, 의견을 주고받았다. 고양이가 있어야 하는 씬엔 이윤영이 가져온 고양이 인형을 사용했다.
사실 현재 둘러보는 장소엔 이윤영이 등장하지 않는 곳이 많았으나, 그녀는 이희우와 한율이 나누는 얘기를 집중해서 들으며 메모하기 바빴다.
“여기구나. 나중에 내가 달려야 할 골목이.”
“전 이쯤에 있다가 이렇게 발견하게 되는 거겠네요. 그런데 밤에 달리기엔 위험해 보이는데….”
“자빠져도 그림이 역동적으로 잘 나오면 뭐.”
세트장과 촬영지를 대충 둘러본 후엔, 다 함께 인근 식당에서 점심 겸 저녁을 먹고 헤어졌다.
그렇게 서울로 돌아온 건 밤 8시가 되었을 무렵.
한율은 오늘 대본과 핸드폰에 끄적거린 메모를 정리하기 위해 회사가 아닌 숙소로 왔다.
‘일단 씻고 나서….’
삑삑삑삑, 덜컹.
“……?”
현관문을 연 한율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거실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시끄러운 TV 소리까지.
이런 이른 시간에 웬일로?
“써하안….”
그때 활짝 열린 중문 사이로 길우성의 머리통이 슬슬슬 나왔다. 거실 바닥에 드러누운 채 꿈틀꿈틀 이동하는 모양새였다.
“왔냐…?”
상태가 왜 저래.
길우성은 이틀은 못 잔 사람처럼 피곤함에 찌든 얼굴이었다.
“왜 바퀴벌레처럼 바닥을 기어 다니고 있어? 징그럽게.”
“넌 온종일 밖에서 고생하다 온 친구한테 그게 할 소리냐아.”
“나도 일하다 왔거든?”
길우성이 뒹굴 구르며 물었다.
“밥은?”
“먹고 왔어.”
“난 굶었는데. 지금도 굶고 있는데….”
한율은 바닥에서 뒹굴뒹굴하는 길우성의 옆을 지나쳤다. 숙소엔 길우성 빼고 아무도 없는 모양이었다.
“어쩌라고.”
“지금이 바로 이제설 선배님께 동네 맛집이 어딘지 물어볼 시간이란 뜻이다아.”
“…하아.”
한율은 길우성을 한심한 눈으로 쳐다보다가 대놓고 한숨을 쉬며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20여 분 뒤, 방에 있는 욕실에서 씻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어 다시 거실로 나왔다.
길우성은 여전히 그 자리에 드러누워 있었다. 시끄럽게 떠드는 TV가 아닌 거실 천장을 멍하니 보며.
한율은 길우성에게 다가가 다리를 툭 찼다.
“어디 아프냐?”
“아니요.”
“촬영 가서 뭔 일 있었냐?”
“네에.”
별로 궁금하진 않지만 물어보았다.
“뭔데.”
“갈비 먹고 싶다…. 맛있는 갈비….”
“…….”
길우성은 배달시킨 갈비에다가 밥 한 공기를 모조리 해치우고 나서야 오늘 <러브티> 촬영 도중 있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오늘 같이 촬영한 사람 중에 MOHE 멤버들이 있었어.”
“누구?”
“안인섭이랑 해원 형님. 특히 안인섭에게 경계하는 티를 안 내려고 신경을 내내 곤두세웠더니….”
길우성이 우울한 얼굴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PD님한테 왜 그렇게 산만하냐고 혼났다. 방송이 우습냐고.”
“네가 잘못했네.”
“아니, 그런데 이상하지 않아? 왜 아무 잘못도 저지른 적 없는 청량하고 떳떳한 내가.”
“청렴이겠지.”
“이상한 스폰을 받으면서 다른 사람의 기회를 박탈하는 비겁한 사람의 눈치를 살피면서 조심해야 해?!”
안인섭의 스폰서 관련 소문은, 작년 MOHE와 컴백이 겹쳤을 때 이해원이 넌지시 알려준 경고를 계기 삼아 멤버들에게도 들려준 바 있었다.
당시 오 팀장은 어스래빗 멤버들에게 이렇게 조언했다.
『여러분은 MOHE 멤버들에게 경계심이나 적대감을 드러내지 않도록 주의하세요.』
『붙임성 있게 대하되, 선도 웃으면서 그으세요.』
“웃으면서 선을 그었어야지. 신경 곤두세우고 조심할 것까지야.”
“그렇게 해야지 생각은 했는데, 막상 눈앞에 있으니 그게 잘 안 되더라.”
젓가락으로 애꿎은 채소를 툭툭 굴리며 길우성이 구시렁거렸다.
“또 곰곰이,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현실에 화도 좀 나고. 데뷔하려고 뭣 빠지게 고생하고, 조금이라도 사람들 앞에 얼굴 보일 기회 잡으려고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들을 바보로 만드는 사람이잖아. 그리고 우리 미니 팬 미팅 자리에 와서 난리 쳤던 사람이 정말 그쪽 안티팬인지도 여전히 미심쩍고. 그런데….”
까득. 젓가락을 내팽개치고 서비스로 함께 온 사이다 뚜껑을 힘차게 연다.
“더 열받는 건 뭔 줄 알아?”
컵에다 콸콸 부어 한 모금 마시곤, 크으.
“PD님부터 시작해서 스태프들, 다른 출연자들까지 전부 안인섭 열심히 한다고, 성격 정말 좋은 것 같다고 칭찬을 하는 거야…! 궂은일도 솔선해서 도맡아 한다고!”
탁. 길우성이 컵을 소리 내어 내려놓았다.
“솔직히 오늘 무거운 건 건우 형이 다 들었거든?! 소처럼 열심히 일한 우리 형을 두고!”
다시 사이다 한 모금.
“…크으. 나 진짜 기가 차서.”
“…….”
“그래도 이렇게 털어놓으니 속은 시원하네. 후….”
고개를 돌리며 한숨을 쉰 길우성이 사이다를 들었다.
“써한, 너도 한잔해.”
“…됐어.”
한편으론 다른 생각이 들었다.
<러브티> PD가 어떤 사람인지는 모르겠으나, PD에게 한 소리 들었을 정도면 악마의 편집을 당하거나 혹은 분량이 아주 적게 나오지 않을까.
‘프로그램 기획 의도상, 후자일 가능성이 크겠지.’
한율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만하면 푸념은 다 들어준 것 같으니.
“내일은 몇 시 비행기야?”
“내려가는 건 9시 30분, 올라오는 건 5시 45분. 건우 형이랑 가람이 형이랑 같이 가기로 함. 제주 공항 면세점에서 뭐 필요한 거 있어?”
“인터넷에 올라갈 만한 사고나 치지 마.”
“하하하. 이 친구, 큰형이랑 같은 소릴 하네.”
“나?”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마침 숙소로 돌아온 유호가 두 사람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길우성이 사이다를 높이 들었다.
“큰형 왔어? 큰형도 와서 한잔해.”
그 순간 유호가 눈을 부릅떴다.
“너 누가 촬영 전날 밤에 탄산 마시래!”
그냥 잘 달랬어요
영화 <고양이 난로>가 크랭크 인에 들어갔다.
실내 세트장 한쪽에 설치된 고양이 대기실 안. 한율은 고양이 미미와 제유와 함께 있었다.
사방이 가벽으로 막혔어도 바깥의 어수선한 소음과 기척에 신경이 곤두서는지, 두 마리는 제일 좋아하는 간식을 바로 앞에 두고도 가만히 웅크린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뻔뻔하게 날 쳐다보고 먹이를 잘 먹어야 하는데.’
고양이가 나오는 씬 촬영은 세트장에서 고양이와 배우만 남겨두고 스태프들은 퇴장, 리모트 컨트롤로 촬영을 진행할 예정이었다.
『그래도 너무 부담 갖진 마세요. 고양이들이 뜻대로 안 움직여도 그건 한율 씨 잘못이 아니니까요. 이번 시나리오를 생각할 때부터 각오하던 일이기도 하고….』
부윤방은 고양이들의 적응 기간과 협력을 구하는 시간을 염두에 두고, 영화 촬영 기간을 최소 3개월로 잡았다.
그러나 한율은 그 최소 예상 기간을 꽉 채울 생각이 없었다.
어스래빗 두 번째 EP 앨범이 발매되는 6월 중순. 그 전에 <고양이 난로>를 끝낼 계획이었다.
“제유야, 미미야.”
한율은 두 고양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제유는 살며시 눈을 감고 한율의 손길을 느꼈으나, 만지고 싶거든 간식이나 더 달라고 손등을 때렸던 미미는 잔뜩 굳은 채 눈도 깜빡거리지 않았다. 부윤방의 집에서 만났을 땐 영락없이 ‘못난이’처럼 뻔뻔하고 활발했으나, 낯선 곳으로 와서 잔뜩 겁을 집어먹은 상태였다.
‘이 녀석부터 달래야겠네.’
한율은 뻣뻣하게 굳어있는 미미를 품에 안았다.
동물 조련 마법은 특기가 아니지만, 이렇게 작은 동물의 마음을 살짝 달래주는 건 애써 모은 마력을 사용할 필요도 없는 아주 간단한 일.
살랑.
사방이 막힌 고양이 대기실에 부드러운 바람이 불었다.
“전혀 무서워할 필요 없어.”
쫑긋. 웅크리고 있던 제유가 귀를 움직이며 한율을 쳐다보았다. 호박색을 띤 홍채와 새카만 고양이의 동공. 그 안에 은은한 푸른빛을 발하는 한율의 눈이 잡혔다.
한율은 공기 중에 떠도는 마나를 손끝으로 휘감아 모았다. 그 손으로 품에 안긴 미미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나와 부윤방이 있는 곳에선 아무도 널 해치지 못해. 그러니 안심해도 괜찮아.”
실제론 인간의 말을 정확히 이해하진 못한다. 그러나 한율의 손가락 틈새로 정제되고 조율된 마법의 빛이 스르륵 스며들자, 잔뜩 굳어있던 미미의 몸이 노곤하게 풀렸다.
…고롱고롱. 금세 기분 좋게 목으로 울며 한율의 손에 머리를 비비적거리기까지.
한율은 이번엔 저를 말똥말똥 신기하게 쳐다보는 제유를 달랬다.
“제유도 너무 겁먹지 말고. 알았지?”
먀아.
똑똑. 마침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한율 씨, 잠깐 들어가도 될까요?”
아침에 잠깐 인사를 나눴던 수의사의 목소리였다. 한율은 두 고양이를 쿠션에다 내려놓고 직접 문을 열어주었다.
“네, 선생님.”
문을 열자 소음과 기척이 더 크게 밀려 들어왔다. 그러나 미미와 제유는 쿠션에 편히 자리를 잡거나 꾹꾹이를 하며 고롱고롱 울었다.
“어머. 미미랑 제유 이제 괜찮나 보네요?”
걱정 가득한 얼굴로 서 있던 수의사가 두 고양이의 상태를 보더니 환하게 웃었다.
“어떻게 달래신 거예요? 캣닢? 아니면… 간식은 아직 안 먹은 것 같은데.”
한율은 시치미를 뚝 떼고 미소 지었다.
“그냥, 잘 달랬어요.”
* * *
3월 마지막 주 금요일. 너튜브에 길우성의 개인 채널이 개설되었다. 채널명은 ‘지구길톢 Dancing Gil Rabbit’.
해당 채널은 WB래빗과 어스래빗 너튜브 채널의 추천 채널로도 등록되고, 어스래빗 공식 SNS와 각 멤버들 개인 SNS, 공개 팬카페를 통해 홍보되어 어스래빗 팬들의 클릭을 유도했다.
길우성의 개인 채널에 업로드된 건 4분 남짓의 동영상 딱 하나.
[이 아이는 커서 아이돌이 됩니다.]
영상은 새카만 배경에 큼지막한 흰색 텍스트로 시작되었다. 하단엔 영어로 된 자체 자막도 작게 삽입되었다.
[2009년 봄, 제주.]
세로로 된 동영상. 현무암으로 쌓인 담을 등지고 선 꼬마의 모습이 나왔다. 카메라 기능이 떨어지는 핸드폰으로 촬영한 것인지 화질은 썩 좋지 않다. 그러나 어스래빗 팬들은 영상 속 꼬마가 누군지 한눈에 알아보았다. 채널 이름부터가 ‘지구길톢’이었으므로.
[켠다.]
앳된 여자아이의 목소리와 함께 댄스 팝이 흘러나오고, 10살의 길우성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리고 20여 초가 지났을 무렵, 영상이 좌측으로 움직이며 아래에 숨겨져 있던 또 다른 영상이 우측으로 나왔다.
똑같은 장소, 비슷한 옷과 모자를 눌러쓴 현재의 길우성이 좌측 영상 속 9년 전 자신과 똑같은 춤을 춘다. 더욱 탄탄하게 성장한 실력으로.
영상을 본 팬들의 반응은 좋았다.
-꼬꼬마 길톢 춤 넋 놓고 보다가 열아홉 살 길톢 등장에 레알 소름ㄷㄷㄷㄷㄷㄷ
-예고 실용무용과 부수석 입학의 위엄
-둘 다 납치하고 싶다.
-감동이다...ㅠㅠ... 9년 전이랑 똑같은 곳에서 똑같은 춤을 다시 추다니ㅜㅜ...
-아니 어떻게 저 나이에 저런 춤선을 가진 꼬마가 대한민국에 있었는데 전혀 안 알려질 수가 있었던 거지?!
-미쳤다.. 미쳤단 말 밖에 안 나온다
-팬인 내가 다 괜히 뿌듯하네ㅎㅅㅎ
-다른 톢이들도 춤 잘 추지만, 길톢 춤선에 유독 더 시선이 갔던 이유가 이거였구나... 어릴 때부터 갈고닦은 실력이 어디 안 가지
-춤신춤왕의_뻔하지만_놀라운_과거
-길톢 사랑한다 진짜!!!!!!!!!!
-다 끝나서 안경과 모자를 벗고 땀에 젖은 머리 쓸어 넘기면서 눈물점 박힌 눈을 살며시 휘면서 웃어주면 더 퍼펙트했겠지만, 내가 그 모습 보고 승천할까 봐 배려해준 거라고 생각할게
ㄴㅋㅋㅋㅋㅋㅋㅋ
-♡♡♡♡♡♡♡♡♡♡♡♡x5조5억
이 와중에 한 외국인이 댓글에 다른 너튜브 링크 주소를 달아 질문을 던졌다.
-[이 영상 주인공이 K-POP 아이돌이 된 겁니까? 동일 인물입니까?]
원본 동영상이 있는 링크 주소였다. 팬들은 너도나도 그렇다고 답변을 달았다. 그리고 이 댓글은 곧 다른 댓글에 밀려 슬슬 아래로 내려갔다.
다음 날, 영상 댓글란엔 어스래빗과 해외 K-POP 팬이 아닌 다른 사람들이 나타났다.
오래전 길우성의 춤 동영상을 인상 깊게 보았던 사람들이, 알고리즘 추천과 원본 동영상에 달린 최신 댓글을 보고 찾아온 것이었다.
-[감동적이네요. 9년 전 놀라운 실력을 보여준 꼬마가 어느덧 저렇게 성장해서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춤을 추다니 :)]
-[어릴 적 작은 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춤에 대한 열정이 오랜 시간이 지나도 바래기는커녕 더욱 또렷한 색채를 발하네요. 꿈을 잃지 않고 달린 그의 시간에 찬사를 보내고 싶습니다.]
-[오래 전 날 반하게 했던 꼬마의 성장이 다시 날 반하게 만든다. 응원한다.]
-[현재 한국 나이로 19살이라고요? 미쳤군요. 무대에서 함께 춤을 추고 싶습니다.]
-[한국에선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지? 그리고 대체 무슨 짓을 하기에 이런 아이가 아직도 유명하지 않은 건지 이해할 수가 없다. 한국에선 흔한 실력인가?]
ㄴ[그럴 리가]
“헤헷, 헤헷.”
너튜브에 달린 댓글을 보면서 길우성이 실실 웃었다. 마찬가지로 영어로 달린 댓글을 ‘번역하기’로 본 이건우가 혀를 찼다.
“너무 띄워주시네. 우리 애 버릇 나빠지게.”
“헤헷, 히힛.”
WB래빗 어스래빗 전용 연습실에는 길우성과 이건우, 강보배 셋만 있었다. 유호는 작업실, 서한율은 영화 촬영, 차남석은 케이블 예능 프로그램 미팅, 라이언은 상담, 박가람은 웹드라마 촬영으로 자리를 비운 까닭이었다.
“히히힛….”
이건우는 계속해서 실실 웃는 길우성을 내버려 두고 강보배에게 물었다.
“보배 넌 오늘 녹음이라고 그랬지? 몇 시에 가기로 했어?”
“저녁 7시에 오라던데?”
“그럼 5시까지 빡세게 연습해볼까?”
“흐.”
강보배도 안무를 배운지 2년째에 접어들었지만, 이렇게 주말마다 시간이 날 땐 이건우와 길우성에게 안무를 또 따로 배우고 있었다. 안무는 아무리 연습해도 다른 멤버들보다 늘 뒤처지는 것 같다며.
“막내, 너도 댓글 그만 보고 일어나서 스트레칭 해.”
“스트레칭 앉아서 할 건데? 히힛.”
“…자꾸 실없이 웃는 걸 보니 슬슬 괴롭히고 싶어지네.”
삑삑, 띠릭. 그때 누군가 연습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쪽으로 시선을 던진 세 사람의 눈이 동그래졌다.
“뭐야? 촬영은?”
경기도의 실내 세트장과 스튜디오, 충북의 촬영지를 오가며 어떨 때는 촬영지 숙소에 머물던 한율이 예고 없이 나타난 까닭이었다.
“로케 촬영하기로 한 날인데, 비가 너무 와서 캔슬이요.”
“헐. 밖에 비 와?”
“어. 서울 오니까 천둥 번개까지 치던데.”
“한율이 너 우성이 너튜브 봤어? 반응 엄청 좋아. 원래 우리 팬 아닌 외국인들도 댓글 많이 달았더라.”
“네, 봤어요.”
길우성이 후후 웃음을 흘리며 거들먹거리는 표정을 지었다. 한율은 금방이라도 잘난 척 떠들려는 길우성에게 종이가방을 내밀었다.
“자.”
“이게 뭐야? 혹시… 너튜브 개설 축하선물?!”
“어. 희우 선배님이 너한테 갖다주라고 하더라.”
“희우 선배님이?!”
길우성이 감격한 얼굴로 종이가방을 덥석 받았다.
“와! 비타민! 얼른 전화를 걸어 고맙다는 인사를 대신 전해주시게, 친구!”
“선배님 번호 몰라.”
“…그럴 수가!”
“촬영장에서 만나면 너한테 전화 걸어서 바꿔줄 테니까, 그때 직접 말해.”
“넹….”
김빠진 얼굴로 대답한 길우성은 이내 다시 비타민 상자를 끌어안은 채 히죽히죽 웃었다.
찰칵. 그 모습을 이건우가 핸드폰으로 찍었다.
“우성이 못생겼다.”
“으흐.”
우웅. 그때 한율의 핸드폰이 울렸다.
-[통화 가능할 때 연락해줘!]
스카이러너의 용맹이 보낸 문자.
[지금 괜찮아요.]
우웅, 우웅.
한율이 답장을 보내자 곧바로 용맹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네, 선배님.”
-[통화 괜찮아? 어디야?]
“회사 연습실이요. 무슨 일 있으세요?”
-[그게….]
용맹이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너희 팀 친구가 어제 새로 만든 너튜브 채널에 올린 영상, 진짜 그 친구 맞지? 돌담 앞에서 9년 전에 찍은 춤 똑같이 춰서 올린 영상…!]
“네, 맞아요.”
-[…….]
말하면서 점점 들뜨던 용맹이 돌연 조용해졌다. 길어지는 침묵에 한율이 왜 그러냐고 물으려던 찰나, 용맹이 소리 냈다.
-[그….]
“……?”
-[그 친구, 나 만나게 해줄 수 없을까?]
몇 시간 후.
쏴아아. 시원하게 쏟아지는 빗줄기 사이로 번개가 번쩍이는 광경이 잘 보이는 식당 창가 자리. 6명이 함께 앉을 수 있는 넓은 테이블에 야구모자나 비니를 눌러쓴 이들이 하나둘 착석했다.
“방송국이 아닌 사석에서 만나니까 되게 신기하다.”
“그러게.”
6명이 자리에 앉자 직원이 메뉴판 두 개를 들고 다가왔다.
“어서 오세요. 주문하실 메뉴 고르시고, 호출…. 헉.”
기계적으로 응대 멘트를 읊던 직원이 그들의 얼굴을 확인하곤 놀라 한 걸음 물러났다. 그러나 용맹은 그녀의 반응을 못 본 척, 태연히 메뉴판 하나를 한율에게 넘겼다.
“막내들이 먼저 하나 골라.”
막내라니, 한 살 차이밖에 안 나는데.
한율은 눈으로 1초 훑곤 바로 메뉴판을 원카운트의 찬형에게 넘겼다.
“저흰 맵지 않은 오리지널 오븐 구이요.”
옆에 나란히 앉은 길우성이 황당한 얼굴로 한율을 쳐다보았다.
“야, 내 의사는?”
찬형은 라이언과 함께 메뉴를 골랐다.
“네가 좋아하는 갈비맛 있다.”
“조금 매운 거?”
“OK, 콜.”
용맹과 함께 온 스카이러너의 멤버 하신이 직원에게 물었다.
“여기 사이다는 세븐스타에요, 킹이에요? 아니면 다른 브랜드?”
멍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던 직원이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이 어느 그룹의 누구인지 다 알아보는 눈치였다.
“세, 세븐스타랑 스프….”
“저 사이다는 세븐스타요.”
“난 스프.”
“전 그냥 생수 한 병 주세요. 오늘 선물 받은 발포 비타민 넣어 봐야지.”
“어… 그거 치킨이랑 같이 먹는 거 비춘데.”
“맹이 너넨 치킨 뭐 먹을 거야?”
어스래빗 멤버 셋, 스카이러너 멤버 둘, 원카운트 멤버 한 명. 이렇게 6명이 저녁을 함께 먹게 된 건 조금 전 용맹과의 통화 때문이었다.
『시간 언제 괜찮아? 같이 밥 먹으면서 편히 만나고 싶은데. 나 정말 그 친구한테 이것저것 하고 싶은 말도, 묻고 싶은 말도 많거든.』
그러나 한율이 오늘을 제외하고 언제 시간이 날지 모른다고 대답하자, 바로 오늘 저녁으로 약속이 잡혔다.
여기에 용맹이 같은 팀 멤버를 한 명 데려가도 되냐고 물었고, 어쩌다 보니 마침 밖에서 따로 만나던 찬형과 라이언 일행에게도 연락이 닿아 순식간에 6명이 되었다.
주문을 받은 직원이 삐걱대는 몸짓으로 멀어졌을 때, 찬형이 두 손을 모으며 감격스러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 석 달 만에 먹는 치킨이다.”
나도 봤어
“넌 석 달 만이야? 난 한 달 만인데.”
“오븐구이?”
“아니, 튀긴 거. 한 달 전에 호텔에서 스타일리스트 팀이 먹고 있는 거 한 조각 슬쩍해서 먹었지.”
데뷔 3년 차에 벌써 적잖은 돈을 벌고 인기도 매우 많아, 팬들이 그의 이름으로 나무 수천 그루를 심고 천만 단위로 기부도 하지만, 정작 본인은 치킨 한 조각 훔쳐 먹었다고 자랑스레 말하다니.
“…한율아, 그렇게 불쌍하단 눈으로 쳐다보지 말아 줄래?”
“아, 그때. 맹이 형한테서 갑자기 치킨 냄새 나서 형한테 화낼 뻔했는데.”
길우성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 우리 일은 그 먹는 걸 마음껏 했다간 직업이 날아갈 수 있으니 어쩌겠어요.”
“먹은 것 이상으로 운동하면 돼.”
“대체 왜, 하루에 몇 시간씩 안무 연습을 하는데 살이 안 빠질까?”
“그만큼 더 먹으니까?”
“어려운 문제야….”
용맹이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젓자 찬형도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스래빗은 식단 감시하는 사람 있어?”
“딱히 없어요. 야식이나 간식, 고칼로리 음식을 먹으면 리더가 주의하라고 경고하긴 하지만.”
길우성이 한율의 말을 받아서이었다.
“멤버들끼리 살쪘다는 느낌을 받으면 바로 사진 찍어서 적나라하게 보여주죠. 그러면 건우 형 손에 잡혀서 헬스장으로 끌려갑니다.”
“아, 너희 팀 건우 형. 그 형 몸 진짜 좋더라. 막 부담스럽게 우락부락하지 않고 예쁘게 깎아 다져진 느낌? 키랑 비율이 좋으니까 더 그래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그건 또 언제 봤대.”
용맹이 눈을 깜빡였다.
“전에 아스대에서.”
하신이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왜 남의 몸을 유심히 보고 그래. 형, 변태야?”
“아니, 그냥 보이니까 본 거지…!”
“그러고 보니 어스래빗이 전부 비율이 좋더라.”
길우성이 엣헴 하며 거들먹거렸다.
“처음부터 대표님이 비율 좋고 얼굴이 되는 아이들만 뽑아서 그렇습니다.”
“지금 말하는 사람은 제외하고요.”
“써한, 잠깐 나 좀 따로 볼까?”
그들은 주차장과 입구에서 만나 함께 식당으로 올라왔지만, 새삼 낯간지러운 자기소개는 건너뛰었다. 방송국에서 오며 가며 여러 번 인사를 나눴던 까닭이었다. 용맹과 찬형은 뮤닷의 <락뮤닷> MC이기도 해서 더 자주 만났고.
그래서 더 용건을 꺼내기 힘든 것일까.
용맹은 주문한 음식이 모두 나오고 나서야 길우성에게 슬그머니 말을 건넸다.
“나 우성이 네가 올린 너튜브 영상 봤어.”
“정말이요? 감사합니다, 선배님.”
“최근 말고 9년 전에.”
“……?!”
툭. 길우성이 들고 있던 닭 다리를 그릇에다 떨어뜨리며 입을 쩍 벌렸다.
“한율이가 말 안 했어?”
“아뇨…, 그냥 치킨 사준다고 해서 따라온 건데영….”
용맹은 확실히 말하지 않았지만, 한율은 그가 난데없이 길우성의 너튜브에 관해 묻는 걸 듣곤 어렴풋이 짐작 했다.
용맹이 기획사 오디션을 보러 간 계기를 준 ‘또랜데도 정말 춤을 멋있게 잘 추는 애 영상’ 속 주인공이 길우성이 아닐까. 그리고 이 짐작은 맞았다.
“나 어릴 때 네 영상 보고 충격받았었거든. 어떻게 내 또랜데도 저렇게 잘 추지?! 하고. 그러고 거울 속 내 춤을 봤는데, 내 춤은 춤이 아니라 율동 수준이란 게 확 와 닿는 거야. 그 길로 당장 스엔으로 달려갔다? 레슨 받고 싶어서.”
“…….”
길우성은 그릇에 떨어진 닭 다리를 다시 집을 생각도 못 한 채 눈만 끔뻑거렸다. 어릴 적 자신이 올린 영상 하나가, 누군가에게 큰 영향을 줬으리라곤 생각도 못 한 표정이었다.
“왜 영상 하나만 올리고 말았어? 모자로 얼굴 가리지만 않았어도 더 빨리 알아볼 수 있었을 텐데.”
“아니, 어….”
진심으로 아쉬워하는 용맹의 표정에, 길우성이 퍽 쑥스러우면서도 당황한 얼굴로 손을 허우적거렸다.
“알아보지 말라고 모자 썼던 거였는데영.”
“그래도 이렇게 같은 일을 하고, 만나게 돼서 정말 반갑다. 나 네 팬이야.”
“어이쿠, 저도 팬입니다, 선배님.”
라이언이 진지한 얼굴로 끼어들었다.
“우성, 거짓말은 나쁜 거야.”
“오늘부터 팬이 되겠습니다, 선배님.”
“편하게 형이라고 불러도 괜찮아.”
“네, 맹 형.”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걸까. 혼자 의아해하는 찬형에겐 라이언이 직접 길우성의 너튜브를 보여주며 설명했다. 굉장히 빠른 영어로. 찬형은 놀란 눈으로 영상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나도 이 영상 본 적 있어. 우리 또래 중에 춤 일찍 배우기 시작한 애들 사이에선 되게 유명했을걸?”
“네?! 에이….”
“진짠데? 그땐 내가 이쪽 일을 생각하기 전이었지만, 댄스학원 다니던 친구가 신나게 떠들었었거든. 같이 학원 다니는 애들 사이에서 이 영상 속 애 춤을 따라 추는 게 유행이라고. 비슷한 나이로 보이고 또 같은 한국인이니까 다들 승부욕으로 불탔던 거지. 그래서 커버 영상 올린 애들도 몇 명 있다고 들었는데… 몰랐어? 분명히 애들이 댓글도 달았을 텐데.”
용맹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나도 달았었어. SNS 친구 하고 싶다고.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답장은커녕 다음 영상도 안 올라와서, 무슨 일 생긴 건가 걱정했었다니까.”
“아…. 헤헷.”
길우성이 빨개진 귀를 만지작거리면서 웃었다.
“혹시….”
용맹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때 달렸던 악플 때문이야?”
“악플?”
“어. 웬 정병 같은 애들이 초반에 이상한 댓글을 잔뜩 써놨더라고. 그래서 댓글로 싸웠었는데, 나중에 보니까 다 삭제하고 튀었더라.”
찬형이 얇은 닭 껍데기를 젓가락으로 분리하며 고개를 저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참 별 이상한 놈들 많아.”
하신이 주변을 둘러보더니 작은 목소리로 동조했다.
“잘한다 싶으면 어떻게든 깎아내리지 못해 안달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은 나이 불문하고 일정한 비율로 늘 있는 것 같아요.”
“그래도 이렇게 만나서 정말 반갑다.”
두 번째 반갑다는 말. 과거의 씁쓸함을 어설픈 웃음으로 감추던 길우성이 다시 바보 같이 웃었다.
“헤헷. 이것 참 쑥스럽구먼요.”
그 뒤 그들은 20여 분 동안 이 얘기 저 얘기를 나누며 치킨을 먹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에서 소문이 퍼졌는지, 식당 안으로 들어와 기웃거리고 당당히 핸드폰을 들어 사진 찍는 사람, 테이블까지 와서 사인과 사진을 요청하는 사람들이 생긴 탓이었다.
주차장에서 기다리고 있던 스카이러너 매니저가 하신의 연락을 받고 올라와, 그들은 별 탈 없이 계산을 마치고 식당을 나왔다. 식당 측과 다른 손님들에게 본의 아니게 불편함을 끼쳐 죄송하다는 사과도 잊지 않았다.
“나중에 시간 되면 또 보자.”
“전화할게.”
“해외 공연 잘하고 와요.”
스카이러너 매니저가 모두 차로 태워다주겠다고 했지만, 어스래빗 멤버 셋은 택시를 타겠다며 거절하곤 그들과 작별 인사를 나눴다.
택시에 탑승하자마자 길우성이 눈을 게슴츠레하게 뜬 이상한 얼굴로 말했다.
“나의 연예계 인맥이 넓어졌다.”
“기뻐?”
“응.”
“찬형이 그러는데, 용맹 착하대. 같이 온 하신도 그렇고.”
“그런데 인터넷이 안 되는 폰을 꺼내서 조금 놀람요. 아예 폰이 없는 것보단 낫지만….”
조수석에 앉은 한율은 길우성과 라이언의 대화를 들으면서 차창 밖을 보았다. 천둥과 번개는 잦아들었지만, 여전히 비는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내일도 날씨가 이러면 로케 촬영이 힘들 텐데.’
한율은 들어온 연락이 없나 확인하기 위해 핸드폰을 꺼냈다. 영화 제작진 측 대신, 조유찬으로부터 톡이 들어와 있었다.
-[내일 아침 10시 충주로 출발!]
[네.]
“가람이 형은 촬영 잘하고 있을까? 오늘이 첫 촬영인데.”
“진지한 역할은 아니라고 했어.”
“그럼 괜찮을 것 같기도 하고…. 써한, 너 가람이 형 연기하는 거 본 적 있어?”
“아니, 항상 레슨 시간이 엇갈려서 한 번도 본 적 없는데. 남석이 형이 자주 봤을걸?”
“우음.”
‘그나저나.’
택시가 신호에 걸려 멈췄다. 한율은 우산을 쓰고 건널목을 건너는 사람들을 보며 생각했다.
오늘은 전국적으로 오전에 잠깐 비가 내리고 말 거란 기상청의 예보가 단단히 틀린 날이었다. 그래서 <고양이 난로>도 기상청 예보를 믿고 비가 그치길 멍하니 기다리다가 오후가 되어서야 철수했는데, 박가람 쪽은 괜찮았을까.
‘실내 세트장 촬영이면 별 상관없겠지만.’
회사에 도착한 후 한율은 한 시간 정도 안무 연습을 한 뒤 샤워를 하고, 피아노가 있는 보컬 연습실로 들어갔다.
2주 후 4월 14일이 바로 어스래빗 데뷔 1주년이었다. 그날에 맞춰 멤버 별로 이프림을 향한 짤막한 감사 영상을 찍기로 했다.
한율이 선택한 건, 피아노 치면서 노래를 부르는 것.
‘10시까지만 하고 들어가자.’
한율은 사과패드 타이머를 설정해놓고, 차 안에서 미리 고른 노래의 악보를 띄워서 피아노 위에 세웠다. 그리고 헤드셋을 끼고 노래 없이 반주 연습부터 시작.
그렇게 얼마나 연습했을까.
가사 대신 허밍으로 노래를 맞추던 한율은 움직이던 손가락을 뚝 멈추곤 고개를 돌렸다.
“……?”
“…….”
살금살금 조용히 보컬 연습실로 들어오던 박가람도 동작을 뚝 멈췄다. 그의 두 손엔 꿀 유자차 2병이 들려 있었다.
한율은 헤드셋을 벗었다.
“왜요, 형?”
“어….”
시선을 피하려던 박가람이 활짝 웃으며 음료를 내밀었다.
“마음의 안정을 찾으러?”
음료는 편의점 온장고에 있는 걸 집어왔는지 따뜻했다. 한율은 다른 의자를 끌고 와 앉는 박가람을 보며 물었다.
“촬영장에 끔찍한 뭔가라도 있었어요?”
“그것도 있고, 겸사겸사.”
“네.”
자세히 묻는 대신 뚜껑을 열고 한 모금 마시는 한율을 가만히 보던 박가람이 말했다.
“나 오늘 나랑 비슷한 사람 만났다? 스타믹스의 JE.”
“…JE요?”
한율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스타믹스의 JE는 KBC <뮤직뮤직> MC로, 카메라 앞에선 단정하고 예의 바르지만, 실상은 조금 까칠하고 예민한 사람이었다. 어스래빗이 데뷔하고 처음 <뮤직뮤직>에 나갔을 때도 제대로 인사를 하지도 않고 무시했던.
“형이랑은 정반대 타입 아니에요?”
외모도 키가 크고 멀끔한데다 무표정일 땐 날카로운 눈매 탓에 차갑게 보이지만, 미소를 지으면 사르륵 녹는 것처럼 순하게 보이는 게 매력 포인트라던가.
“이미지만 놓고 보면 보배 형이랑 더 비슷한 것 같은데.”
“겉모습 말고.”
“그 사람도 이상한 거 본대요?”
“본인한테 직접 듣진 않았는데, 나랑 같은 걸 보고 놀라서 뒷걸음질 쳤다가 눈이 마주쳤었거든. 그때 눈빛이 이랬어. ‘야, 너도 봤냐?’ ‘선배님도?’”
이쪽 바닥에 유독 그런 걸 잘 느끼고, 잘 보는 사람이 많다더니. 한율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분이 드라마 주연이에요?”
“아니, 주연은 스타믹스의 에이플. JE는 에이플의 첫 주연, 첫 드라마 데뷔라고 다른 멤버들이랑 같이 축하 겸 응원 차 왔었어. 그런데 그 사람이 나중에 나한테 와서 이상한 말 하더라. 서한율 너한테서 뭐 느껴지는 거 없냐고.”
“……?”
지금 생각해도 불쾌하다는 듯이, 박가람이 미간을 구기며 JE에게 들은 말을 그대로 읊었다.
“난 서한율 보면 소름 돋고 섬뜩한 기분 들던데, 넌 괜찮냐?”
“…….”
“그 말 듣고 ‘선배님 촉이 똥촉인가 봐요’ 라고 받아치긴 했는데, 그래도 기분 나쁘잖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진짜. 나한텐 얼마나 고마운 인간 부적인데!”
“…….”
지금 이 말엔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까.
한율이 잠깐 고민하는 동안에도 박가람의 푸념은 계속 되었다.
“여기에 사람들은 에이플이랑 놀러 온 스타믹스만 챙기고, 신인이나 나처럼 중소 기획사 소속 애들은 무시하고! 비바람 천둥 번개 쳐서 큐시트가 꼬이면 바로 조정을 해야 하는데, 대책도 설명도 없이 그냥 기다리라고만 하고! 밥도 맛없는 김밥 두 줄이 전부고! 웹드라마 제작 환경이 열악하다는 건 알았지만, 원래 이래?”
“웹드는 잘 모르겠지만, 대접이 인기순인 건 이 바닥 어딜 가나 비슷하지 않을까요.”
“하….”
박가람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너희 드라마에 카메오로 나갔을 땐 잘 몰랐는데, 배우로 촬영장에 서니까 뭐 하나 잘못되거나 지연돼도 다 내 탓인 것 같아서 눈치 보게 되고, 주눅 들더라….”
“팀장님은 별말 없으셨어요?”
“응.”
오늘은 박가람의 첫 개인 스케줄이자 드라마 촬영이라, 특별히 오동식 팀장이 동행했다.
“팀장님이 별말 없었다면 괜찮은 거예요. 그리고 현장에 점점 익숙해지다 보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한 사람 때문에 잘못되거나 지연되는 게 아니란 것도 파악될 거고.”
담담히 내뱉는 조언에, 박가람은 눈을 깜빡거리며 한율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서 배우.”
잠시 후, 박가람이 나간 뒤 한율은 사과패드로 인터넷에 들어갔다.
[스타믹스 JE]
검색.
예고는 해드릴게요
[JE (본명:손지은) 만22세
소속그룹: 스타믹스
소속사: 스케일 엔터테인먼트
데뷔: 2015 스타믹스 1st EP 앨범…]
기본 프로필을 포함, 실물보다 더 예쁘장하거나 잘생긴 이미지가 잔뜩 나왔다. 조금 부담스러울 정도로 진한 무대 메이크업을 한 모습도.
‘박가람은 그에게 촉이 안 좋다고 받아쳤지만.’
한율은 검색 결과물을 살피며 생각했다.
실은 그 반대가 아닐까.
[스타믹스 JE, 교회 귀신 목격담에 팬들 ‘종교 비하 아냐’ 갑론을박]
[…무서운 이야기를 들려달라는 팬의 요청에, JE는 자신이 어릴 적 교회에서 본 귀신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중략).
팬들은 이야기 도중 JE가 ‘교회에도 무서운 귀신이 있다는 걸 알고 그 뒤론 절대 가지 않는다’라는 말을 두고 일부 누리꾼이 주장하는 종교 비하가 아니라고 반박…(중략).
한편 한 네티즌이 JE가 귀신을 목격한 교회를 안다고 말해 화제다. JE와 어릴 적 같은 동네에 살았다는 그의 말에 따르면 당시 동네엔 교회가 세 곳 있었으며, 한 교회에서 오래전 사업에 실패한 남자가…(중략).]
-얘 그것도 있지 않나? 초딩 때 자주 다니던 길이 왠지 꺼림칙한 기분이 들어서 평소랑 다른 길로 갔는데, 원래 다녔던 길에서 간판 떨어졌다는 얘기
-스케일 엔터 붙박이 귀신 얘기도 유명하죠ㅎ
ㄴ붙박이 귀신???
ㄴ스케일 엔터 연습실 중에 귀신이 자주 나타나는 캐비닛이 있대요 그런데 거기에서 나와서 돌아다니는 거 유독 JE가 자주 봤다고 함ㅇㅇ
ㄴㅋ
-JE 중학생 때 수련회 썰은 아직도 그 학교 레전드라고 하던데
ㄴ뭔데요
ㄴ수련회 장소 주변엔 꼭 수풀 우거진데 있잖아요. 밤에 애들이 거기 가보자 했는데 절대 안 된다고, 절대 가지 말라고 JE가 애들 말렸다고 해요. 이상하게 기분 나쁘다고. 나중에 밝혀졌는데, 그때 그 근처에 강도살인 저지르고 도망친 지명수배자가 숨어있었대요;
ㄴㅁㅊ;;
ㄴㄷㄷㄷㄷ신내림 받아야 하는 수준 아닌가
본래 세상에서도, 별다른 능력은 없지만 가끔 유난히 촉이 좋은 사람이 있었다.
JE도 그런 것 아닐까. 덤으로 귀신도 좀 보고.
‘혹시 처음 만났을 때 우리를 탐탁지 않게 봤던 것도, 인사를 무시했던 것도 나 때문이었나?’
한율은 다른 정보도 훑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느덧 연습을 마무리하기로 한 10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