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4월 5일 목요일 밤. 길우성과 이건우가 나갔던 뮤닷의 <러브티>가 방송되었다. 1020이 주로 보는 케이블 채널인데다 출연자들이 모두 아이돌이라 그런지 시청률은 높지 않았다. 하지만 포털사이트 연예뉴스란엔 <러브티> 관련 기사가 많이 나왔다.
[MOHE 안인섭, 궂은일도 마다치 않는 천사의 미소 <러브티>]
[<러브티> MOHE 이해원, 방송 분량 외면한 성실함이 더 빛나]
주로 MOHE를 띄우는 기사로, 어스래빗 멤버 관련 기사는 소소했다. 메인에 떴어도 금세 사라졌다.
커뮤니티 사이트의 어스래빗 게시판에선 불만스러운 목소리가 나왔다.
-럽티 우리 애들 분량에 빡친 자들 모여라
-무거운 거 번쩍번쩍 들어서 옮기는 건우 팔뚝 아니었으면 나온 줄도 몰랐을 수듄;
-보는 내내 존나 편파적으로 편집됐다고 나만 느낀 거 아니지?
-뮤닷 톢들한테 뭔 억하심정 있나 봄? 작년 신인상은 접대받은 소속사 애들한테 주더니 이번엔 락뮤 팬미팅에서 난리친 애들한테 분량 몰아주고ㅋㅋ 진짜 뭐냐 뮤닷?
ㄴ말은 바로 해주세요. ㅁㅎ가 난리 친 거 아니고 ㅁㅎ 안티가 난리 친 겁니다.
ㄴ응^^알았ㅗ오
ㄴ아 오타났다 미안ㅋㅋ
-이건 암만 외주 제작이라고 해도 뮤닷 입김이 작용 안 됐을 리가 없음
-실종된 우성이 분량 찾습니다ㅜㅜ...
-울 퍼포톢2 위해서 졸린 거 참고 봤는데.. 개bbak 딥bbak
<고양이 난로> 촬영 중 대기 시간. 한율은 방송 반응을 살피곤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녹화 당시 왜 이렇게 집중을 못 하느냐고 PD에게 한 소리 들었다더니, 예상대로 편집이 많이 된 모양이었다.
“한율아.”
한율은 핸드폰 전원 버튼을 가볍게 누르며 고개를 들었다.
“네.”
조유찬이 옆자리에 앉았다.
“tv Mu에서 하기로 한 <바다의 백조> 있잖아. 방송국 내부 사정으로 편성이 한참 밀려서 여름에나 찍게 될 것 같아.”
“그래요?”
어쩐지 프로그램 미팅 약속은커녕 연락도 없더라니.
“응, 섭외된 다른 회사에도 다 연락이 갔다더라고.”
“어떻게 보면 다행이네요. 지금 찍으면 이게 아이돌 관찰 예능이 맞나, 라는 의구심이 들 테니.”
거의 매일 영화 촬영장에서 살고 있으니 말이다. 쉬는 날엔 노래와 안무도 연습하지만, 이번 앨범에 담길 것들이라 그 모습을 방송에 내보내 수도 없는 노릇이고.
조유찬이 무슨 소리냐는 얼굴로 반박했다.
“난 한율이 너의, 배우와 가수를 넘나드는 프로페셔널한 모습을 보여주기 딱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는데…?”
먀아. 한율의 무릎에 편히 엎드리고 있던 제유가 시끄럽다는 듯 울었다.
“아, 미안.”
조유찬이 제유를 쓰다듬으려 손을 뻗었다. 그러자 제유가 앞발로 조유찬의 손을 빠르게 쳐냈다. 타닥.
조유찬이 상처받은 표정을 지었다.
“…촬영에 잘 임해주는 건 고마운데, 제유가 한율이 너만 너무 좋아하는 거 아냐? 이러다 나중에 영화 촬영 끝나면 헤어질 때 아쉬워서 어떡해?”
“희우 선배님도 잘 따르니 괜찮을 거예요.”
“으음…. 그나저나 오늘따라 희우 씨가 늦는 것 같네.”
“그러게요.”
한율은 시간을 확인했다. 지금이라도 도착해서 준비해야 빠듯한 큐시트 일정에 맞출 수 있을 텐데, 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다른 곳에선 몰라도 <고양이 난로>를 찍으면서 지각한 적은 한 번도 없던 터라, 한율은 조금 의아해졌다.
“한율 씨.”
그때 누군가와 통화를 마친 부윤방이 다가왔다.
“희우 씨가 사정이 생겨서, 도착하려면 30분은 더 걸릴 것 같다네요.”
“무슨 일 있으시대요?”
부윤방이 머리를 긁적이며 아리송한 얼굴로 말했다.
“매니저가 갑자기 연락이 안 되는 모양이에요.”
“경진 씨가요?”
조유찬이 의아한 표정을 되물었다.
“그저께 봤을 때만 해도 별일 없어 보였는데….”
“아무튼 그래서 지금 직접 운전하면서 내려오는 중이라니까, 30분만 더 기다려봅시다.”
“네.”
30여 분 후, 이희우가 도착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응, 안녕. 늦어서 죄송합니다!”
이희우는 평소처럼 한율의 인사를 웃으면서 받아주었다. 촬영제작팀과 배우들을 향해 크게 사과까지. 여기저기에서 괜찮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억지로 웃으면서 하는 대답이 아닌, 정말 괜찮다는 투로.
영화 촬영 첫날, 이희우가 아직 날이 쌀쌀하다면서 전 스태프와 배우들에게 고가의 패딩을 선물한 이유가 큰 듯했다. 여기에 성격이 제멋대로라는 소문과는 달리 딱히 갑질을 하거나 까탈스럽게 군 적도 없고, 지각도 이번이 처음이니.
“직접 운전해서 오셨다고 들었는데, 피곤하지 않으세요?”
“괜찮아, 괜찮아. 그럼 나 빨리 준비하고 올게. 미안해.”
“네.”
이희우가 잰걸음으로 분장팀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촬영 준비를 끝내고 왔을 때, 이희우는 <고양이 난로>의 ‘천희’가 되어있었다. 연기에도 막힘이 없었다.
한율은 그런 이희우를 보며 매니저가 단순히 연락이 안 된 것뿐, 별일이 있는 건 아닌 것 같다고 가볍게 여겼다.
그러나,
“소주 한 병 까고 싶다.”
“…….”
촬영이 끝나자마자 ‘천희’의 가면을 벗어던진 이희우가 우울한 얼굴로 한숨 쉬었다.
“오늘은 윤영이도 없고, 서울로 올라가면 2시쯤 되려나…. 한율이 넌 오늘 여기 호텔에서 잘 거지?”
“네.”
“그래. 뭐, 네가 성인이었어도 마음 편히 같이 술 마실 처지는 아니니까. 그럼 다음 촬영 때 보자.”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선배님.”
이희우는 자신의 차 조수석에 탔다. 그녀 대신 운전대를 잡은 건, 촬영하는 동안 도착한 이희우의 소속사 직원이었다.
“희우 씨 매니저 말이야.”
배우와 촬영제작진이 묵는 호텔로 가는 차 안. 조유찬이 조용히 말했다.
“아무래도 돈 문제로 이래저래 복잡했나 봐. 아까 온 희우 씨 기획사 직원한테 들어보니까, 연락 끊기기 전에 주변 사람들한테 돈 좀 빌려줄 수 없겠냐고 그랬다더라. 나한테도 혹시 돈 빌려달란 소리 한 적 없냐고 물어보고.”
“그럼 돈 빌리고 사라진 거예요?”
“글쎄. 그것까진 자세히 못 들었는데, 피해자가 있다면 희우 씨가 아닐까? 보니까 희우 씨가 은근 자기 사람 잘 챙기던데, 경진 씨랑은 몇 년을 같이 일했으니 오죽 도와줬겠어.”
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함께 오래 일한 사람이라 믿어서 돈을 빌려줬는데, 하루아침에 잠적하면 충분히 술이 고플 만도 하다.
“별일 없었으면 좋겠네요.”
“아무튼 한율이 너도 사람 너무 믿지 마. 나한테 핸드폰 맡길 때도 꼭 핸드폰 잠가놓고, 비번 유출 안 되게 조심하고.”
“형도 의심하라고요?”
“그럼! 사람 마음이 얼마나 간사한데. ‘내 주변 사람은 안 그러겠지’ 이게 제일 안일한 생각이야.”
한율은 캄캄한 밤거리와 차창에 비치는 조유찬을 보면서 대답했다.
“네, 형도요.”
“응?”
“형도 저 너무 믿지 마시라고요.”
“그래. 폭탄만 예고 없이 터뜨리지 말아주라.”
조유찬이 생각하는 한율의 배신은 기껏해야 SNS나 방송에서 사고 치는 정도겠으나, 한율은 입가를 올리며 대답했다.
“네, 예고는 해드릴게요.”
다음 날 아침.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스캔들이 포털사이트 연예뉴스란을 도배했다.
[<앗싸포착>블블 민준, 배우 이희우와 핑크빛 열애?!]
[이른 새벽 편의점에서 숙취해소제를 구입해, 이희우의 집으로 들어가는 블블 민준의 모습이 포착되었다.
(사진=앗싸일보)
민준은 7일 새벽, 이희우와 친구들이 있는 술자리에 뒤늦게 참석했다가 이희우를 집까지 바래다주었다. 2시간 후인 이른 6시 무렵엔 이희우의 집에서 나와 근처 편의점에서 숙취해소제와 인스턴트 죽을 사고 다시…(중략)]
-네? 누구랑 누구요???
-이게 뭔
-ㅇㅂㅇ...............(대충 아침부터 터진 뜬금포 열애설에 두뇌가 멈췄다는 댓글)
-?????? 내가 지금 무슨 기사를 보는 거지
-뭐임 존나 뜬금없네
-2시간 동안 둘이 뭐했을까~~?♡
ㄴ더love? ㅋㅋㅋㅋㅋ
ㄴㅅㅂ닥쳐라ㅡㅡ
-이거 대체 뭔 조합이냐; 둘이 접점이 있었음?
-예전에 이희우가 블블 민준 연기 못한다고 돌려까지 않았었나??
ㄴ그 후에 이희우가 블블 뮤비 찍은 거 보면 그때 화해해서 친해진 거 아닐까요 이희우가 아이돌 뮤비 나갈 급은 아닌데 일부러 나갔잖음
-이제설과 영아 이후로 아이돌과 배우 커플이 또 하나ㅋㅋ 누가 더 아까운지는 사람들이 판단하겠지
ㄴ당연히 배우가 여러모로 손해지ㅋ 배우보다 아이돌이 더 더럽게 노는 동물의왕국 출신인데 당연한 걸 물어
ㄴ민준 ㄹㅌ랑 친함. 끝.
ㄴ여기에 민준 곧 군대감
ㄴ존나나쁜새ㄲ네-_-
-한때 민준 여자 있다는 소문이 돌긴 했었지ㅋㅋㅋ 그때 아니라고 확실히 부정도 안 하더라니 그럼 그렇지ㅋㅋ
-악플 실시간 pdf 수집 중입니다.
“……?”
예고없이 뜬 열애설과 사진을 본 한율도 고개를 기울였다.
‘두 사람이 사귀었었나?’
친한 줄도 몰랐다.
예전에 이희우가 블블 M/V에 출연했을 때 민준이 이희우를 언급한 적이 있긴 하지만 그때 한 번뿐이었고, 이희우에게선 민준과 관련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전혀 없었다.
조유찬이 자신의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블블 팬들은 앞서 티스트 일을 겪어서 그런가, 반응이 좀 차분해.”
“곧 군대 갈 사람이라 그런 거 아닐까요. 그리고 선배님 활동 경력만큼, 오랫동안 좋아한 팬들도 어느 정도 성숙해졌을 테니.”
“하긴. 스물일곱 살이 될 동안 그 흔한 스캔들 한번 없었으니, 아량이 넓어질 만도 하지.”
고개를 주억거리던 조유찬이 한 마디 덧붙였다.
“열성 팬이나 사생들은 속이 뒤집히겠지만.”
“뭐, 그래도 별일이야 있겠어요. 불미스러운 사건을 저지른 것도 아니고, 단순히 연애사인데.”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한율과 달리, 조유찬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괜히 시비 거는 민준 팬이나 악플러하고 SNS나 댓글로 싸울 것 같아서 그렇지. 희우 씨 성격 잊었어?”
그러나 조유찬이 우려하는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다.
[이희우 소속사, 블블 민준과의 열애설 침묵]
[고동 엔터, 블블 민준 열애 ‘아는 바 없어’]
[배우 이희우 매니저, 1억 상당 사기 및 절도 후 잠적]
[블블 민준, 1년 전 작성한 SNS 뒤늦게 화제 “닿을 수 있을까…. 멀다.”]
...[이희우 前매니저, 빌린 돈 유흥으로 탕진 뒤 자수]
[계약종료 D-10, 티스트 외 재계약 멤버無 블랙블러드 사실상 해체]
[이희우, 블블 민준과의 썸 인정?! SNS “아직 선 앞이다”]
[블블 민준과 열애설이 터진 배우 이희우가 SNS에 의미심장한 글을 올려 화제다.
11일 새벽 이희우는 자신의 SNS에 고양이와 함께 찍은 셀카를 올리며 “어차피 내가 뭐라고 하든 믿고 싶은 대로 믿겠지만, 아직 선 앞이다ㅇㅇ”라고 기재했다.
이에 네티즌들은…(중략).]
실검을 보아라
이희우와 블블 민준의 열애설이 터진 지 닷새.
<고양이 난로> 촬영장에 온 이희우는 평소처럼 밝았다. 그녀를 취재하기 위해 수많은 기자가 찾아왔으나, 이런 상황을 충분히 예상한 이희우 소속사 측이 경호원을 잔뜩 보낸 터라 큰 소등은 빚어지지 않았다.
이희우 본인도 공과 사가 뚜렷하여, 개인사로 인해 흐트러진 연기를 보이진 않았다. 오히려 그동안 연구를 많이 했는지, ‘천희’의 감정이 더 깊어져 있었다.
그러나 부슬비가 내려 잠깐 촬영이 중단되자, 이희우는 한율에게 티 타임을 청했다.
“나도 나이에 비해 별의 별꼴을 다 봤다고 생각했는데.”
지붕이 있는 정자에 나란히 앉아 차를 마시는 중. 길가에 어지러이 떨어진 꽃잎이 비에 젖는 광경을 보며 이희우가 한숨을 내쉬었다.
“요 며칠만큼 버라이어티한 적은 없었던 것 같아.”
굳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당사자에게 물을 필욘 없었다. 인터넷 기사와 실검이 그녀에게 벌어진 일들을 모조리 알려주었으므로.
오랫동안 함께 그녀와 일했던 매니저가, 집안이 힘들다, 부모님이 편찮으시다, 집주인이 전세를 올려달라는데 돈이 부족하다 등등 온갖 핑계로 이희우에게 야금야금 돈을 빌렸다. 그것도 모자라 이희우의 집에서 명품 가방, 옷, 귀금속 등을 몰래 빼돌리고 팔아 유흥비로 탕진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예전에 이희우랑 같은 작품에 나갔던 남자 단역이 의도적으로 접근해 부추겼다고 경찰 조사에서 밝혀짐ㅇㅇ
ㄴ남자가 이희우가 아니라 본인한테 접근하면 빼박 의도가 있다는 걸 알았어야지;; 그거에 넘어가서 몇 년 같이 일한 사람 통수를 치냐
-배우 때문에 잘해준 걸, 지도 그 배우급인 줄 착각해서 종종 주제 파악 못하고 선 넘는 매니저들 있지ㅋㅋㅋ 나 얘 렌탈샵에서 나 누구 매니전 줄 아냐고 존나 까칠하게 굴 때부터 알아봤다ㅋㅋㅋ
-저 매니저 평소에 이희우 성격 지랄맞아서 비위 맞춰주기 힘들다고 친구들한테 ㅈㄴ 씹고 다녔다던데ㅋㅋ
ㄴ그러면서 뒤론 이희우한테 돈 빌리고 물건 빼돌린 거? 극혐
-이희우 센 척은 혼자 다 하더니 정작 매니저한테 통수맞았네ㅋㅋㅋ
ㄴ재밌냐?
-이제야 스토리가 그려지네ㅇㅇ 이희우 매니저한테 통수 맞은 충격으로 술 퍼먹었고, ㅁㅈ이 그런 이희우 챙기러 나타나서 달래주다 그날(읍읍)
ㄴ어허. 머리에 마구니가 가득 찼구나
-다 모르겠고, 민준 너무 부럽다. 하...
여기에 블블 민준과의 열애설까지.
한율도 두 사람의 열애설로 ‘이희우와 민준을 이어준 게 너냐?!’라며 일부 블블 팬들로부터 항의 및 악플을 받곤 있지만, 딱히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소소한 수준이었다.
“한율아.”
“네.”
이희우가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보여주었다.
“나 생전 처음으로 아랍어로 적힌 협박 편지 받아봤다?”
“…고생이 많으시네요.”
“고생은.”
장난스럽게 말했던 이희우의 미소에서 힘이 빠졌다.
“민준이가 울면서 사과하더라. 본인 행동 하나하나에 상처받고 날카롭게 반응하는 팬들이 있다는 걸, 본인 감정에 휘둘려 망각해서 날 곤란하게 만들었다고. 그 모습 보니까… 마음이 복잡해지더라. 안쓰럽기도 하고. 한율이 너도 나중에 연애하려면 각오 단단히 해.”
너도?
한율이 의아한 얼굴로 이희우를 바라보자, 이희우는 한율의 시선을 모른 척하며 차를 마셨다.
한참 후, 이희우가 빈 컵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시험 삼아, 민준이랑 썸이란 걸 타보기로 했어.”
한율은 미소 지었다.
“축하해요, 선배님”
“곧 군대 가는 남자를 만나는데 축하는 무슨. 아무튼 한율이 네가 나랑 민준이가 공동으로 아끼는 후배라서 특별히 먼저 알려주는 거야.”
“네.”
이희우가 빈 컵을 챙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낯간지럽다는 듯 바삐 걸음을 옮기며 중얼거리는 말.
“술이 웬수지, 진짜.”
한율은 입가를 부드럽게 올린 채 차를 마저 마셨다.
‘좋을 때네.’
둘 사이에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고, 얼마나 가까운지는 모른다. 연인이 되어도 오랫동안 잘 유지되리란 법도 없고. 그러나 한율은 이희우에게서 잠깐 느껴진 특유의 설렘, 그리고 부슬비에 젖는 봄꽃을 보며 잠시 추억에 잠겼다.
본래 세상.
지키기 위해, 죽기 전 한 번이라도 더 보기 위해.
한때 그의 전부였던 삶의 원동력.
그러나 이젠 영원히 볼 수 없는 사람.
“…….”
한율은 바닥이 드러난 찻잔으로 시선을 내렸다.
‘잘 지내고 있겠지.’
* * *
4월 14일. 데뷔 1주년을 기념해, 어스래빗 멤버들은 연습실을 알록달록한 풍선과 장식으로 꾸며놓고 라이브 방송을 진행했다.
8명의 멤버가 모여 라방을 진행하는 건 트레리안 두 번째 믹테 발매 겸 화이트데이 라방 이후 정확히 한 달만이었다.
1주년이라 그런지 라방엔 여느 때보다 더 많은 팬이 접속했다.
“어스!”
“래빗! 인사드립니다!”
“안녕, 이프림!”
데뷔 1주년을 축하한다는 톡이 굉장히 빠른 속도로 올라왔다.
-SNS 실검ㄱㄱ
-실검을 보아라 톢이야
SNS 실검을 확인해보라는 의아한 말도.
핸드폰으로 SNS과 포털사이트에 접속해보니 각각 실시간 검색어 3위, 13위에 [어스래빗 지구정복]이 올라와 있었다. 라방 시간에 맞춰 팬들이 실검 총공에 들어갔던 모양이었다.
“우와…!”
“감사합니다!”
“이프림 최고!”
“다 같이 큰 하트 그리자!”
멤버들은 부랴부랴 자리를 이동해 대형 하트를 만들었다.
“으흐.”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한 뒤 제자리 복귀. 바로 핸드폰을 든 길우성이 톡창을 보더니 소리 내어 웃었다.
“푸핫. 어떤 분이, 남석 씨 머리 꼬락서니 왜 저러냐고 물으신다. 형, 머리에다 무슨 짓을 하는 거야.”
차남석은 앞머리가 눈 아래까지 치렁거리며 내려온 상태였다. 뒷머리도 많이 길어서 머리끈으로 묶었을 정도.
-아 답답해 누가 남석이 앞머리 좀 위로 올려봐요ㅜ
-이참에 사과머리 함 해보자
-제발 그 머리 길이에서 펌만 하지 말아주라
-보배 피어싱 하나 더 했네?
-잘생겼으니 뭔들 안 어울리겠냐만
“한번 길러보는 거야.”
차남석이 앞머리를 쓸어 넘기면서 카메라에 얼굴을 가까이 댔다.
“여러분, 저는 지금 제 인생 최고로 긴 머리카락을 매일, 경신하는 중입니다.”
-♡
-하긴ㅋㅋㅋㅋ 우리나라 남자애들이 언제 머리를 길러봤겠어
-잦은 탈색과 염색으로 머릿결 상하기 전에 길러보는 것도 나쁘진 않지ㅇㅇ
-존잘톢에게 보낼 다음 선물은 토끼 머리끈이다
-카메라에 훅 들어오지 마라 내 심장 전원 훅 꺼진다
-아냐, 그래도 이건 아냐..8ㅅ8
-팬들 우쭈쭈 태세 전환ㅎㅎㅎ
“워, 남석 씨 클로즈업 부담스러워.”
한율은 가만히 차남석을 보다가 그에게 손짓했다.
“형, 머리 잠깐만.”
“……?”
차남석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면서 한율에게 살짝 고개를 숙였다. 한율은 거침없이 차남석의 앞머리를 손으로 슥슥 빗질해서 모은 뒤, 끼고 있던 팔찌를 벗어 그걸로 묶었다.
“야잇, 무슨 짓이야…!”
뒤늦게 차남석이 한율의 손에서 벗어났지만, 이미 그의 앞머리는 하나로 높이 묶인 상태였다.
“이제 좀 낫네요.”
사실은 며칠 전부터 차남석을 볼 때마다 슬슬 거슬리던 차였다. 머리카락이 눈을 가리고 있어서.
-한율앜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
-한율이도 남석이 머리 답답했나 보닼ㅋㅋㅋㅋ
-동생이 묶어준 머리, 풀면 섭섭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남서기 당장 풀까 말까 고민한닼ㅋㅋㅋㅋ
-율톢 표정 후련 ‘ㅅ’)=3
“어울린다, 남석아.”
“다음엔 왕방울 토끼가 달린 머리끈을 준비해볼까?”
묶인 앞머리를 풀까 말까 고민하던 차남석이 한숨을 푹 내쉬면서 카메라를 보았다. 동생한테 형이 져줘야지, 어쩌겠냐는 표정으로.
-ㅋㅋㅋㅋㅋㅋㅋㅋ
-말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남서기 감정
-만약 율톢이 아니라 길톢이 묶었다면 어땠을까
-역시 존잘 is 뭔들
-나 얘네 사이 너무 좋은 거 느껴져서 나도 너무 좋아
어스래빗 멤버들은 최근 각자의 근황이나, SNS에 올라간 감사 영상을 찍을 때의 비하인드를 떠들었다. 그 후엔 데뷔하고 1년 동안 제일 인상 깊게 남았던 기억도 하나씩.
“데뷔 쇼케 같은 당연한 건 빼고.”
길우성이 손을 들었다.
“난 전에 소리구름어워즈 나갔을 때 비 오던 날 무대.”
“어, 생각난다. 그때 비 내려서 무대 엄청 미끄러웠었지.”
“우성이 넘어질 뻔한 거 한율이가 아슬아슬하게 잡아줬었잖아. 그때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하다.”
“지금 이 자리에 우성이가 없었을지도 몰라.”
“히익…!”
-우성아 네가 얘기해놓고 네가 경악하면 어떡해ㅎㅎ
-그때 진짜 나도 심장 철렁 내려앉았었다ㅜㅜ
“그때 이프림 분들이 한율이가 화내는 모습을 봤어야 했는데.”
-????
-율톢이 화냈었다고???? (놀람)
-ㅇㅂㅇ???
“우성이가 무대 뒤에서 웃으면서 고맙다고 하니까, 한율이가 인상 팍 쓰면서.”
박가람이 미간을 구기며 당시 한율의 흉내를 냈다.
“웃지 말고 다음부턴 조심해. 그땐 머리 다쳐도 책임 못 져.”
“카리스마 쩔었지.”
“그러니까 그제야 우성이도 쭈그러들면서 ‘네에…’ 이러고.”
-심.쿵.박.력.율.토.끼.
-율아 그때랑 똑같이 해주면 안 돼ㅜㅜ? 보고 싶다
-상상이 안 가니 직접 보고 싶습니다!!!!!!!
-찐친으로서 충분히 화날 만한 상황이었다ㅎㅎ
-츤톢 쿨톢
-율톢도 그때 얼마나 놀랐겠어ㅠㅠ친구가 바로 눈앞에서 크게 다칠 뻔했으니ㅠㅠ
한율은 핸드폰으로 팬들이 올리는 톡을 보았다. 텍스트였으나, 그 안엔 자신과 길우성을 절친한 친구 사이로 보는 시선이 가득했다.
“이번 기회에 생명의 은인에게 다시 감사의 인사를 하시죠, 길우성 씨.”
길우성이 한율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감사함당.”
“어.”
-어. ㅋㅋㅋㅋㅋㅋㅋ
-역시 쿨해ㅎㅎㅎㅎㅎ
“한율이 넌 언제가 제일 기억에 남아?”
“전 일본 귀신의 집 갔을 때요.”
“의외네. 롤러코스터 아니고?”
한율은 담담히 미소 지었다.
“그때 비명 지르면서 달려오는 가람이 형 얼굴이 엄청 웃겼거든요. 못생겨서.”
“…싸우자, 서한율!”
-맨날 싸우재ㅋㅋㅋㅋ
-도대체 박다람이랑 안 싸운 멤이 누구임? ㅎㅎㅎ
-가람이가 질 것 같은뎅☺
-내가 보는 지구톢 서열: 한율,유호>라이언,남석>건우>보배>가람,우성
한 시간 동안 진행한 라방이 끝난 후에도 포털사이트 실검엔 한동안 [어스래빗 지구정복]이 자리를 지켰다. 한번 흐름을 타서 실검에 오르면 팬이 아닌 사람들도, 어스래빗이 뭔지 모르는 사람들도 이게 왜 실검인가 하면서 한 번씩 클릭해보는 까닭에 순위도 더 올랐다.
-[어스래빗 데뷔 1주년 축하해! ㅎㅎ]
실검에 오른 걸 봤는지, 최근 연락이 뜸했던 배우 윤상진에게서 간만에 톡이 왔다. 스타믹스의 지헌이나 풀썸의 효운, MOHE의 이해원도 축하 의미를 담은 톡을 보냈다. 스카이러너의 용맹과 하신은 문자메시지로.
블블 민준은 톡으로 일정을 물었다.
-[22일에도 촬영해?]
한율은 축하 연락이 온 순서대로 모두 답장을 보낸 뒤, 마지막으로 민준의 물음에 대답했다.
[아니요.]
-[밥 먹자!]
[저녁 6시부터 딱 한 시간만 시간 낼 수 있는데 괜찮으세요?]
-[내가 너희 회사 근처로 갈게! ㅎㅎ]
-[그리고 데뷔 1주년 ㅊㅊ! 축하선물은 그날 저녁 쏘는 걸로 대신한당]
-[네, 그날 뵙겠습니다. :)]
여전히 인터넷엔 열애설에 침묵하는 이희우와 그의 기사가 심심찮게 나오고 있지만, 톡에선 마냥 들뜬 마음이 전해졌다. 한동안 기본 이미지였던 프로필 사진도 다시 고양이 사진으로 바뀌었고.
…아. 한율은 문득 깨달았다.
‘22일이면, 고동 엔터와 맺은 전속계약종료 바로 다음 날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