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그렇게 기분 좋냐?”
웃으며 핸드폰을 내려놓는 민준을 보며 수재가 물었다. 민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넌 진짜 팬들한테 고맙다고 절해라. 전속계약이 얼마 안 남았다고, 당장 섭섭한 마음 접고 조용히 있어 주는 거잖냐. 고동이 끼어들 빌미를 주는 게 더 싫다고.”
“응, 그래서 팬들 위한 깜짝 이벤트도 기획하는 거잖아.”
“…….”
“왜 그렇게 봐, 형?”
가만히 민준을 쳐다보던 수재가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계속 실실 웃으니까 징그러워서.”
“…….”
“완전히 사귀는 것도 아니고 테스트 기간이나 다름없는데, 그렇게 좋냐?”
“좋은 정도가 아니야.”
민준은 오늘 아침 막 이사 온 자신의 새집, 깨끗하게 정돈된 거실을 둘러보면서 환하게 웃었다.
“세상이 달라 보여.”
“…하. 양심도 없는 놈. 너 인마, 곧 군대 가는 놈이 썸타는 건 양심이 출타한 행위야, 인마.”
“요즘은 복무 기간도 짧고 외박이나 휴가도 잘 준다던데? 그리고 아직 반년이나 남았거든?”
“…말을 말자.”
한숨을 푹 내쉰 수재는 핸드폰으로 커뮤니티 사이트의 블블 게시판을 살폈다. 제목만 봐도 악의적인 냄새가 나는 건 못 본 척 건너뛰고, 무난해 보이는 게시글을 클릭했다.
“그런데 민준.”
“응?”
“너 요즘 네 사생 본 적 있냐?”
“아까 올 때?”
“아. 걔네도 사생이었어?”
“응. 왜?”
“흠….”
미간을 찡그리며 게시판을 훑던 수재는 이번엔 SNS에 들어갔다. 공개 SNS 계정이 아닌 부계정으로 접속해, 팔로우한 블블 홈마들의 SNS를 살폈다.
“왠지… 너무 조용하니까 신경 쓰여서.”
네가 롤모델이래
[[단독]이희우와 블블 민준 열애설 사실로 “호감 가진 사이”]
[최초 열애설 보도가 나오고 일주일 넘게 침묵하던 블랙블러드 민준과 이희우의 소속사 양측이 “호감을 갖고 만나는 사이”라고 두 사람의 열애설을 인정했다.
블랙블러드 소속사인 고동 엔터의 공식 입장이 나오기 전, 민준은 개인 SNS에 자필로 적은 편지를 개재했다.
“갑작스러운 소식으로 심려를 끼쳐 죄송합니다”라고 시작한 편지에서 그는, 배우 이희우와는 2년 전 M/V 촬영으로 처음 만났으며 그때부터 이희우를 짝사랑했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러나 이희우에게 마음을 고백한 건 불과 며칠 되지 않았으며, 최초 열애설이 터진 7일엔 이희우를 집까지 바래다주었다가 이희우가 키우는 고양이 ‘호빵’이 밀가루와 화분으로 집을 난장판으로 만든 것을 보고 목욕을 시켜주고 청소도 하느라 머물렀다며, 이희우의 동의 하에 당시 펫 캠에 찍힌 영상을 공개할 수 있다고 밝혔다.
배우 이희우 측도 민준과는 아는 누나 동생 사이였으나, 최근에야 이성적 호감을 느끼고 알아가는 단계라고…(중략).]
-펫캠 공개할 수 있다고 나오는 거 보니 정말 선은 안 넘었나 보네ㅇㅇ
ㄴ그리고 이젠 당당히 넘을 수 있다!
-알았으니, 호빵이 밀가루랑 화분으로 난장판 만드는 영상 공개해주시죠. 무척 궁금합니다. (두근두근)
-아 호빵 이 캣색희..
-상상해보니 ㅈㄴ웃기넼ㅋㅋㅋㅋ 좋아하는 여자 속상한 거 달래주고 술 취한 거 챙겨 집까지 바래다줬는데, 밀가루랑 엎어진 화분으로 난장판 된 집 한가운데에 지저분한 고양이 한 마맄ㅋㅋㅋㅋㅋ
ㄴ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ㄴ얘네 팬들도 아니 왜 그런 구구절절한 것까지 다 써서 빵터지게 만드냐고 웃더랔ㅋㅋㅋㅋ 술 취한 집주인 대신 고양이 목욕시키고 청소하곸ㅋㅋㅋㅋ 그 새벽엨ㅋㅋㅋ
ㄴ나중엔 숙취해소제랑 죽까지 사다 주다가 카메라에 찍히고
ㄴ그래도 이희우 얻었으니 해피엔딩 아님? ㅋㅋ
ㄴ나도 고양이 목욕 잘 시켜줄 자신 있는데! 청소도!
ㄴ얼굴부터 갖추고 오렴
ㄴ젠장!
-생긴 것도 괜찮고. 부려먹기 좋은 머슴 하나 거뒀네
-남자 가을에 입대한다고 하지 않았나?
-얼마나 갈까ㅋ 눈 돌아간 빠순이들 테러에 정나미 뚝 떨어지는 거 시간문제일 텐데
두 사람이 열애설을 사실이라고 인정하자, 포털사이트 연예뉴스란에는 그동안 두 사람의 행적이 겹쳤던 행사나, 함께 있는 걸 봤다는 목격담을 실은 기사가 우르르 쏟아져나왔다. 최근 한 패션잡지에 실린 이희우의 화보 촬영을 다룬 기사도.
한율은 기사 댓글을 잠깐 살폈다가 스크롤을 위로 올렸다. 베댓은 멋있다, 예쁘다, 연기력과 미모가 받쳐주니 화보도 예술이란 칭찬 일색이었으나, 최신 댓글은 온통 민준과의 연애에 초점을 맞춘 성희롱성 발언이 가득했다.
이는 예전에 이제설과 영아의 열애설이 터졌을 때와 비슷한 양상이었다. 주변 사람이었다면 함부로 못 할 이야기를, 상대가 얼굴이 알려진 연예인이라고 쉽게 투척한다.
어떤 기자는 한술 더 떠, 예전에 이희우가 일부 파격적인 노출을 선보였던 영화를 들먹거렸다.
[이희우, 실제 사랑도 영화처럼 화끈하게 할까]
“참 무례한 사람이 많네.”
“…응? 누구?”
오래간만에 학교로 향하는 차 안. 옆에서 꾸벅꾸벅 졸던 길우성이 물었다. 한율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대답하며 다른 기사를 클릭했다.
[아림 엔터 신인 걸그룹 ‘퍼플아워’ 6월 데뷔 확정]
기사에 사진이 공개된 건, 일찍부터 아림 차기 걸그룹 멤버로 내정되었다고 알려진 진은수 뿐이었다.
“퍼플아워….”
스윽. 멋대로 머리를 들이밀며 함께 기사를 본 길우성이 잠이 덜 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여기 막내가 우리 학교 1학년이라더라.”
워낙 현역 아이돌이나 연습생, 배우가 많은 학교다 보니 딱히 놀랍지도 않다.
“그래?”
“어. 우리 회사 애들은 가을 데뷔니, 초반 활동 시기는 엇갈리겠지만…. 앞으로도 서로 부딪칠 일 없었으면 좋겠다. 얘네 벌써 SNS랑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벌써 대박이라고 난리던데.”
한율은 대충 고개를 끄덕이면서 다른 기사를 클릭했다.
“와아, 이게 대체 얼마 만이냐?”
교실에 들어가자 같은 반 아이들이 한율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러고 곧바로 묻는 말.
“네가 민준 선배님이랑 희우 선배님 연결해줬다던데, 사실이야?”
“아니, 나도 기사 보고 나서야 두 사람이 친하다는 거 알았어.”
“그렇구나….”
“진짜 이 바닥에선 썸도 첩보 수준으로 타야 한다니까. 공개 연애하는 순간 깨지는 커플이 허다한 이유가 뭐겠냐?”
“남의 연애사에 왜 그리 관심들이 많은지.”
“말하는 본인은?”
한율은 저들끼리 떠드는 아이들을 두고 교실 뒤에 마련된 캐비닛으로 갔다. 열쇠로 잠가놓았던 캐비닛 안은 지난달 마지막으로 봤을 때 그대로였다.
“써한, 복도 봐봐.”
“……?”
1교시 교과서와 필통을 꺼내던 한율은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꺄앗. 동시에 복도 창을 통해 한율을 훔쳐보던 여학생 몇몇이 아래로 휙 몸을 숨겼다. 기시감이 느껴지는 상황. 작년, 더순한화장품 광고 화보를 처음 찍었던 다음 날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그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엔 숨은 학생들 말고도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한율을 빤히 쳐다보는 남학생이 있다는 점이었다.
1학년 넥타이를 맨 남학생은 한율과 시선이 마주치자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러곤 종종걸음으로 퇴장.
“……?”
뭐지.
그러나 이름도 모르는 후배가 아는 척 인사와 말을 건네는 건 여러 번 겪었던 터라, 한율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캐비닛을 닫았다.
“이거 시험 범위 어디까지야?”
바로 다음 주가 중간고사였다. 스케줄 때문에 학교를 제대로 나오진 못했지만, 그렇다고 아예 손 놓고 망치는 것보단 한 번이라도 훑는 게 나을 터.
길우성이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몰라?”
“…….”
“한심하단 눈으로 보지 마라. 상처받는다.”
“학교 다니면서 시험 범위도 체크 안 하는 놈이 뭐가 이리 당당해.”
“헤헷?”
* * *
드라마로 치면 1.5화 분량. 그러나 촬영 기간은 드라마보다 수십 배. 편집에 걸리는 시간까지 더하면 영화는 개봉까지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린다. 3개월 촬영하고 편집에만 6개월에서 몇 년이 걸리는 예도 있다고 하니.
그만큼 더 나은 컷을 뽑기 위해 영화는 쉴 새 없이 찍고 또 찍는다. 심하면 러닝에선 기껏 2분 나올 씬을 사흘에 걸쳐 찍는 일도 있었다. 리허설, 연기, 모니터링, 논의, 합을 맞추고 다시 연기, 모니터링을 반복해가며.
그래도 <고양이 난로> 스태프들의 피로도는 드라마 <별☆일없는 집>과 비교하면 낮은 편이었다.
“간식 먹고 합시다!”
전 스태프가 표준근로계약서를 작성해 법정 근로시간을 지키며 일하는 까닭이었다. 그리고 오늘은 어스래빗 팬덤인 이프림이 간식차와 커피차를 함께 보내주어, 스태프들의 표정은 여느 때보다 환했다.
조명팀 스태프가 절연장갑을 벗으며 말했다.
“이번엔 얹히지 않고 마음 편히 먹을 수 있을 것 같네요.”
한율을 편히 쉬게 두고 대신 커피차로 온 조유찬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네? 지난번 간식차 메뉴에 무슨 문제라도…?”
“아뇨, 지난번이 아니라…. 제가 예전에 일했던 현장이요. 거기에도 아이돌 출신 배우가 있었거든요.”
“아아, 네.”
조유찬이 대답에 궁금하단 뉘앙스를 담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스태프가 주변을 둘러보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그런데 그 친구 연기실력이 좀 그래서, 그 친구 순서만 되면 현장 분위기가 영 좋지 않았어요. 그런 상황에서 그 친구 팬들이 이런 차를 보내줬는데….”
스태프가 고개를 흔들었다.
“먹기 불편하더라고요. 그 친구 잘 봐달라고 보내준 것 같기는 한데, 우리가 잘 봐준다고 그 친구 연기실력이 갑자기 나아져서 쓸만한 컷이 짠하고 생기는 건 아니니까요. 그렇다고 이런 차 보낼 돈 있으면 그 친구한테 좋은 연기 선생 하나 붙여달란 말도 못 하겠고.”
“하하하….”
“드라마야 연기를 못해도 화제성만 있으면 광고주도 시청자들도 너그럽게 봐주지만, 영화는 그게 아니잖아요. 연기가 구리면 아무리 수백, 수천 컷을 찍어도 쓸만한 게 한 장 나오지 않아 작품 전체가 흐트러지니… 찍을수록 기운도 빠지고요. 하지만 이 작품은 매일 출근할 맛이 납니다.”
결론은 서한율을 향한 특급 칭찬이었다. 조유찬의 광대가 한껏 올라갔다.
“하핫. 저도 매일 운전할 맛이 납니다.”
“그런데 서 배우가 연기학원을 전혀 다니지 않았다는 게 사실이에요?”
“네. 회사와 계약한 트레이너분에게 레슨 받은 게 다예요.”
“대단하네…. 똑같은 대사와 모션을 수십 번씩 해도 몰입이나 기술이 흔들리지도 않고. 연기도 잘하는데 인내심도 강하니, 앞으로 대성하겠어요.”
“하핫.”
잠시 후, 한율은 어깨춤을 추듯 들썩거리며 오는 조유찬을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조유찬이 환하게 웃으며 한율에게 음료를 내밀었다.
“자, 한율이 네가 마시고 싶다고 한 카페라테.”
“감사합니다. 무슨 기분 좋은 일 있어요?”
“일이라기보다는… 기분 좋은 말을 들었지? 아, 조금 전에 팀장님한테서 연락이 왔는데.”
조유찬이 가방에서 사과패드를 꺼내며 옆에 앉았다.
“한율이 너 요즘 뮤닷에서 찍는 아이돌 서바이벌 프로그램 알지? .”
“네.”
“거기에서 주목받는 연습생 중에.”
조유찬이 홈페이지에 접속하더니 출연자인 111명 연습생 소개 페이지로 들어갔다.
“너희 학교 1학년 애가 있는데…. 여기 있다. 혹시 학교에서 본 적 있어?”
한율은 큼지막하게 뜨는 인물 사진을 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어제 학교 복도 창문에 서서 한율에게 묵례하고 간 1학년 후배였다.
“네, 딱 한 번.”
“인사도 나눴어?”
“아니요. 눈 한번 마주친 게 다예요.”
“그렇구나. 얘 소속사에서 연락이 왔는데, 방송에서 한율이 네가 롤모델이라고 언급해도 되겠냐 물어보더래.”
그런 언급 정돈 본인에게 일일이 허락받지 않아도 괜찮을 텐데, 굳이?
한율의 얼굴에 떠오른 의문을 읽은 조유찬이 부언했다.
“방송에 나갈 스토리 작업을 도와달란 소리지.”
“작업이요?”
“이 연습생이 한율이 네가 롤모델이라고 방송에서 언급해. 실상 방송이 나가는 건 여름이지만, 어쨌든. 그리고 이런저런 테스트를 받으면서 한계에도 부딪치고 힘들어하겠지? 지금 거기는 조금이라도 더 카메라에 찍히기 위한 작은 전쟁터니까?”
한율은 잘 듣고 있다는 표시로 고개를 끄덕이곤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때 한율이 네가.”
조유찬이 가슴에 살며시 손을 얹었다.
“‘현강희 연습생이 저를 롤모델로 삼고 있단 이야기를 듣고, 고마운 마음에 응원 메시지를 보냅니다. 파이팅하세요!’ 이런 영상메시지를 보내는 거야. 그렇게 짧은 감동 스토리가 짠. 한율이 너는 기대되는 후배에게 힘을 북돋아 주는 좋은 이미지를 챙기고, 이 연습생은 롤모델을 향해 달려가는 순수한 모습? 그런 걸로 주목받는 거지.”
겉으론 화려하고 단순해 보이지만, 실상은 여러 속내를 품은 기획과 계산으로 어우러진 엔터 산업다웠다. 롤모델이라는 말도 진심이 아닌, 본인 이미지를 구축하기 위한 허울 중 하나일 가능성도 있고.
“물론 이 연습생이 경연에서 오래 살아남을 정도의 실력을 갖추고 있어야 그림이 제대로 완성되겠지만, 그만한 자신감은 있는 것 같아. 그래서 사전에 우리한테 돌려서 부탁하는 거고.”
“하지만 전에 우리 회사 연습생들 응원한다고, 조언하는 영상 찍었었잖아요. 괜찮겠어요?”
“그럼. 소속사 상관없이 기대되는 후배를 응원하는 거니까, 보는 사람들도 훈훈하다면서 좋아할걸?”
한율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당장은 결정 안 해도 되는 거죠? 그걸 찍는다고 꼭 방송에 나간다는 보장도 없을 것 같은데.”
“응. 그래서 팀장님도 일단 눈치 없는 척 ‘네, 우리 애 흉만 안 보시면 됩니다.’라고 대답하셨대. 그래도 미리 알고 있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네. …어?”
“왜?”
한율을 시선을 따라 조유찬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곤 눈을 끔뻑끔뻑.
“어라?”
그곳엔 막 도착한 이윤영이 있었다. 작년 <객귀, 해> 촬영 당시 이윤영의 매니저를 맡았다가, 드라마 스태프와 마찰을 빚었다는 이유로 부당 해고됐던 그녀의 친구도.
두 사람은 커피차 앞에서 커피를 마시며 대화 중이던 이희우와 부윤방에게 인사하는 중이었다. 꾸벅꾸벅 인사를 하던 이윤영의 전 매니저는 특히 이희우에게 고개를 두 번 더 숙였다.
이윽고 두 사람이 한율과 조유찬에게도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오래간만에 뵙습니다.”
“오랜만이에요, 민선 씨. 잘 지냈어요?”
“네. 그때 여러 가지 조언 많이 해주셨는데… 오랫동안 연락 못 드려서 죄송해요.”
“아니에요. 민선 씨도 그때 마음고생 많이 했을 텐데요. 그런데 여긴 어떻게…. 혹시?”
아무리 지금이 휴식 시간이기는 하나, 영화 촬영장은 기본적으로 관계자 외 출입 금지였다. 상대가 아무리 배우의 친구라 해도.
조유찬이 기대하는 얼굴로 뒷말을 흐리자, 김민선이 쑥스럽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오늘부터 배우 이희우 님 매니저를 맡게 된 김민선입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어째 조용하다 했다
“이 미친년들. 어째 조용하다 했더니.”
고동 엔터의 매니지먼트 사무실. 김지영 실장은 다른 팀에 소속된 입사 동기가 보여준 영상을 보며 기가 막힌 표정을 지었다.
“민준이한테 알려주는 게 좋겠지?”
“이런 데에 올라왔을 정도면 우리가 굳이 말해주지 않아도 귀에 들어가는 건 시간문제일걸? 안 그런 척해도 이런 거 찾아서 보는 변태 새끼들이 좀 많아야지.”
“커흠.”
입사 동기가 고개를 돌리며 헛기침했다.
“나도 내가 찾아본 게 아니라 부하 직원이 어쩌다 발견….”
“그냥 둘 거야.”
“어?”
“곧 나가는 사람 연애사까지 신경 써줄 필요가 뭐 있어? 아까도 말했듯이 금세 퍼져서 걔 귀에도 들어갈 텐데.”
“그래도 돌고 돌아 알게 됐을 땐, 본인 사생 짓이라는 걸 모를 수도….”
김 실장은 다시 그의 말을 도중에 잘랐다.
“알 게 뭐야. 그리고 알고 나서 환멸을 느끼든, 이희우가 빡쳐서 걔한테 마음이 식든, 그것도 알아서 감당해야지.”
“어째 우리 김 실장, 민준이한테 단단히 삐친 말툰데?”
“괘씸해서 그렇지. 뒤에서 이 짓 저 짓 해가면서 블블을 키운 게 누군데, 몸값 좀 올랐다고 저들끼리 알아서 이룬 성과라고 착각하는 꼬락서니가…. 하, 됐다. 말을 말자. 가 봐.”
동기는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돌렸다.
“아, 잠깐.”
김 실장이 뭔가 생각났다는 얼굴로 동기를 불러 세웠다.
“……?”
“최소한 21일… 아니, 20일 금요일까진 민준이 귀에 안 들어가게 조심해. 이 사실 아는 사람들 입단속 단단히 시키라고.”
“왜?”
“그때까진 여기 소속이니까, 그 안에 사고라도 치면 수습을 우리가 해야 하잖아.”
“음.”
동기가 엄지를 치켜세웠다.
“김 실장 뒤끝 쩌는 거 인정.”
“알아들었으면 나가.”
* * *
20일 새벽. 한율은 영화 <고양이 난로> 촬영장으로 가기 위해 일찍 일어났다. 그리고 가볍게 샤워하고 옷을 입을 때였다.
우웅. 조유찬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네, 형.”
-[일어났어?]
“네, 10분 후에 내려갈게요.”
-[아냐, 음….]
짧게 앓는 소리를 낸 조유찬이 말했다.
-[감독님한테서 연락이 왔는데, 희우 씨한테 사정이 좀 생겨서 오늘 촬영은 캔슬이래. 다음 주에도 희우 씨랑 같이 찍을 씬 촬영을 뒤로 미뤄야겠다고 하더라. 새로운 큐시트는 내일 보내주고.]
“그럼 오늘은 학교 가요?”
-[응. 느긋하게 있다가, 나중에 시간 되면 애들이랑 같이 장전 씨 차 타면 돼.]
“네.”
통화를 마친 한율은 인터넷에 접속했다.
언론에 드러날 만한 일은 아닌 걸까, 아니면 아직 알려지지 않은 것일까. 실검이나 연예뉴스란엔 딱히 이희우 관련 기사가 보이지 않았다.
‘나중에 알게 되겠지.’
새벽 6시. 다시 자기엔 애매한 시간이라, 방에 딸린 테라스로 나가 화분을 살핀 후 창을 살짝 열었다. 습하고 차가운 새벽공기가 훅 들어왔다. 미세먼지도.
“…하아.”
한율은 작게 한숨을 내쉰 후 창을 도로 닫았다.
우웅.
“……?”
침대에 두었던 핸드폰에 또 전화가 걸려왔다. 조유찬인가 하며 방으로 들어와 집어보니, 이번엔 블블 민준이었다.
이 새벽에 어쩐 일일까.
“네, 선배님.”
-[한율아, 지금 통화 괜찮아?]
착 가라앉은 힘없는 목소리. 술을 마신 것 같진 않았다.
“네. 무슨 일 있으세요?”
-[그게….]
머뭇거리던 민준이 말을 이었다.
-[너희 외삼촌이 검사 출신에 대형 로펌 소속 변호사라고 들었는데, 혹시 연락처 좀 알 수 있을까?]
바로 조금 전, 이희우의 사정으로 오늘 촬영이 캔슬되었다는 연락을 받은 참이었다. 심각한 문제라도 생긴 건가?
“법적인 문제로 상담할 게 있으신 거예요?”
-[응….]
“그럼 지금은 시간이 너무 이르니까, 7시 즈음 전화해서 여쭤본 후에 톡으로 답변드릴게요.”
-[아….]
그제야 아직 6시밖에 안 됐다는 걸 깨달은 듯, 민준이 당황해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미안, 내가 너무 일찍 전화했다.]
“괜찮아요. 그럼 나중에 톡 보낼게요.”
-[응, 고마워.]
그날 점심시간. 한율은 외숙인 최은후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조금 전 민준과 헤어졌다는 그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한율이 넌 정확히 무슨 일인지 듣지 못한 거지?]
“네, 법률적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 외엔.”
-[그래. 당사자가 직접 꺼내기 전까진 묻지 마. 아참, 그런데 한율이 너 그 핸드폰은 쓰고 있어? 최소 요금만 나가는 것 같던데? 데이터 사용량도 0이고.]
핸드폰? …아아.
한율은 작년, 사생팬 때문에 최은후의 명의로 개통했던 핸드폰을 떠올렸다. 기존 핸드폰에서 이것저것 옮기고 새로 설치하는 게 귀찮아져, 결국엔 받았던 상태 그대로 모셔두고 완전히 잊고 있었다.
“일단 갖고 있을게요. 나중에 필요한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그래. 그럼 다음에 보자.]
“네, 수고하세요.”
“법률적 도움? 무슨 말이야?”
한율이 통화를 끊자, 옆에서 조용히 아이스크림을 먹던 길우성이 물었다.
“넌 몰라도 돼.”
“그랭. 오늘이랑 주말은 내내 연습할 거지?”
이번 주말은 원래 영화 촬영이 없는 쉬는 날. 한율은 고개를 끄덕이며 통화하느라 내버려 두었던 캔커피를 들었다.
“해야지.”
6월 컴백 예정인 어스래빗 두 번째 EP 앨범 녹음이 한 달도 안 남았다. 인트로와 아웃트로, inst 버전, 강보배와 라이언, 이건우와 길우성만 부른 한 곡을 제외해도 한율이 참여하는 곡은 5개.
이번 컴백은 지난 싱글 앨범과 달리 컴백 쇼케이스도 할 계획이라, 각각 곡의 안무나 퍼포먼스도 연습해야 하는 까닭에 쉬는 날도 쉬어선 안 된다.
아무리 영화 촬영으로 바빴다고 해도, 혼자 뒤처지는 모습을 보이는 건 자존심이 상하므로.
그때, 조금 전부터 이쪽을 살피며 기웃거리던 남학생이 다가왔다.
“선배님, 안녕하십니까!”
고개를 꾸벅.
“1학년 연극영화과 현강희라고 합니다.”
며칠 전 복도에서도 인사하고, 조유찬이 사진을 보여주었던 출연자 111명 중 한 명.
‘내가 롤모델이라고 했던.’
진심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한율은 일단 모르는 척 대외용 미소를 지었다.
“네, 안녕하세요.”
“혹시… 크레용박스 엔터의 현우 형 기억하세요?”
“네, 물론이죠. 크레용박스 소속이세요?”
2년 전 <보컬리스트 시즌3>에 나왔던 크레용박스 엔터테인먼트 연습생 두 명. 그중 장현우는 한율과 같은 오프닝 무대팀이라, 함께 연습도 하고 밥도 먹은 적이 있었다.
한율이 알은체하자 현강희가 환하게 웃었다.
“네!”
“현우 형이랑 문점이 형은 잘 지내요?”
“어….”
현강희의 미소에서 살며시 힘이 빠졌다.
“문점이 형은 얼마 전에 그만뒀고, 현우 형은 저랑 픽미에 나가고 있어요.”
2년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연습생인 건가? 한율은 의아했으나 묻지 않았다. 작은 기획사에선 아이돌그룹 런칭 프로젝트가 시작도 전에 무산되거나, 데뷔 직전까지 가도 엎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데뷔해도 소리소문없이 사라지는 일 또한.
“그렇구나. 현우 형한테 안부 인사 좀 대신 전해주세요.”
“네. 그리고 말 편하게 하세요. 제가 두 살 더 동생인데.”
“이게 더 편해서요.”
“네…. 그럼 전 연습이 있어서… 다음에 뵙겠습니다!”
현강희는 길우성에게도 꾸벅 인사를 한 후 종종걸음으로 멀어졌다. 말없이 아이스크림을 먹어 치우던 길우성이 가늘게 뜬 눈으로 한율을 쳐다보았다.
“꼭 그렇게 웃으면서 선을 그어야 했냐. 딱 봐도 네 팬이던데.”
“내가 낯을 좀 가리잖아.”
“뭔 개소리세… 헛, 무심코 솔직한 마음의 소리를!”
“…….”
다음 날인 토요일. 회사로 가는 길에 한율은 민준으로부터 내일 만나지 못할 것 같다며 미안하다는 톡을 받았다.
포털사이트 연예뉴스란에는 고동 엔터테인먼트와 블블의 전속계약이 오늘을 기해 종료되었다는 기사로 도배되었다. 티스트를 제외한 멤버들의 향후 거취를 다룬 기사도.
[블블 민준, 김우재 있는 팔색 엔터로 가나?]
민준 신변에 문제가 생겼다는 기사는 없었다. 이희우 관련 기사는 [이희우, 사기절도 前매니저 선처 없어] 이것뿐.
혹시 전 매니저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 다른 문제가 더 밝혀지거나 생긴 걸까.
거기까지 생각하던 한율은 짧게 한숨을 쉬며 차창 밖을 보았다.
‘내가 신경 쓸 문제는 아니지.’
“히익…. 벌써 그렇게 많이?”
옆에서 길우성이 놀란 소리를 냈다. 차 안에선 조유찬과 멤버들이 그린라이브 어스래빗 채널 2기 팬클럽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럼 1기 회원들한테 주어졌던 혜택은 이번 달로 종료되고, 2기로 다시 재가입해야 컴백 쇼케 선예매나 팬 미팅 사전 신청 자격을 갖게 되는 거네요?”
“그렇지. 원래부터 기간제 형식이었으니까. 그리고 너희 컴백에 맞춰서 팬들이랑 같이 끼는 반지도 한정 수량으로 예약 판매할 예정이야. 웰컴 키트 상품 구성은 이번 앨범 컨셉에 맞출 건데….”
가만히 조유찬의 설명을 듣던 한율은 미간을 찡그렸다.
“디자인을 직접이요?”
회사에 도착한 후엔 구내식당에서 아침을 먹은 후 지하 연습실로 향했다. 먼저 연습실에 와서 기다리고 있던 안무가가 말했다.
“다 모이니 보기 좋네요.”
다 함께 스트레칭을 한 후엔, 음악 없이 안무 연습 시작.
“박자 맞추고, 발 각도 주의! 따단, 따다단. 시선 처리 헤매는 분 있어요? 원, 앤, 투, 표정!”
잠깐씩 휴식을 취하며 3시간 동안 한 곡 안무 연습, 20분 후엔 다른 곡 단체 안무 자율 연습. 점심을 먹고 나서 다시 또 연습, 연습. 저녁을 먹은 후엔 보컬 디렉터와 노래 연습 2시간. 다시 연습실로 가서 안무 연습.
“살아있냐?”
자정. 온몸이 땀으로 젖은 채 연습실 바닥에 누워있는 한율을 내려다보며 길우성이 물었다.
“오래간만에 온종일 빡세게 연습하니 힘들지, 친구?”
한율은 상체를 일으킨 후 짧게 숨을 토했다.
방과 후 자정까지 연습할 시간이 있는 다른 멤버들과 달리, 한율은 촬영장에서 밤늦은 시간에 귀가해 곧바로 쓰러져 잤었다. 고작 하루 이틀이면 몰라도 일주일, 보름씩 쌓이면 격차가 벌어지는 것도 당연했다. 그 격차를 한꺼번에 메우는 것도 쉽지 않았다.
비슷하게 웹드라마 촬영으로 부족해진 연습량을 한꺼번에 채워야 하는 박가람도, 연습실 구석에 널브러진 채 가쁜 숨을 고르고 있었다.
“벌써 늙었나봐…. 아이고, 삭신이야…….”
유호가 거울을 통해 박가람을 째려보았다.
“어디서 나이 타령이야.”
“라고 20대 중반이 화냅니다.”
“스물넷이면 초반이지, 만으로 스물둘인데! 어쨌든 다들 일어나서 씻어. 땀 식으면 감기 걸린다.”
“흐엉흐어엉.”
철퍼덕. 정체불명의 소리를 내며 박가람이 반대로 몸을 굴렀다. 유호가 박가람의 손목을 잡아 입구로 질질 끌고 갔다.
“감기 걸린다고.”
“흐어엉….”
“으악! 가람이 형 지나간 자리에 물기!”
유호가 그 말을 듣고 박가람을 도중에 내팽개쳤다.
“아, 더러워.”
정말로 박가람이 끌려간 흔적이 조명에 반질반질 반짝거리고 있었다.
“흐어엉….”
한율도 자리에서 일어나 캐비닛으로 향했다. 안에 진동으로 놓고 처박아둔 핸드폰을 확인. 모친으로부터 고양이 사진과 동영상이 첨부된 톡이 와있었다.
-[회사로 홍삼이랑 옷가지 좀 보냈어. 멤버들이랑 사이좋게 나눠 먹고, 내일도 홧팅! ^^]
조유찬으로부터도.
-[어머니가 보내주신 홍삼이랑 옷, 숙소로 가져다 놨다ㅎ]
-[월요일 촬영은 기존 큐시트대로 진행!]
시간이 늦어 모친에겐 내일 아침에 답변을 보내기로 하고, 조유찬에게 답톡을 보냈다.
[네.]
다음 날도 한율은 어제처럼 연습으로 하루를 보냈다. 인터넷 연예뉴스란이나 커뮤니티 사이트도 별다른 사건 사고 없이 조용했다.
월요일 아침.
영화 <고양이 난로> 촬영장에 도착해보니 이희우가 먼저 와 있었다. ‘천희’ 분장을 마친 모습으로 그녀가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 한율아.”
“안녕하세요, 선배님.”
“지난주엔 갑자기 펑크내서 미안해. 사정이 좀 생겨서.”
“괜찮아요.”
한율은 이희우와 함께 있는 매니저 김민선에게도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누나.”
태연한 이희우와 달리, 불안한 얼굴로 주위를 살피던 김민선이 뒤늦게 고개를 꾸벅였다.
“…아, 네. 안녕하세요.”
“그럼 전 얼른 가서 옷 갈아입고 올게요.”
“그래, 난 커피 마시고 있을 테니까 천천히 해.”
이희우는 커피차가 있는 방향으로, 한율은 분장팀이 있는 곳으로 몸을 돌렸다.
“저기….”
김민선이 조심스레 조유찬을 부르는 목소리가 작게 들렸다.
“혹시 오는 길에….”
잠시 후. <고양이 난로> 주인공 ‘윤우’ 분장을 마치고 나온 한율은 조유찬을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조유찬이 경계심 가득한 얼굴로 로케 촬영장 주변을 눈으로 여기저기 살피고 있었다.
“왜 그래요, 형?”
“응? 아니… 민선 씨가 이상한 소리를 해서.”
“……?”
조유찬이 한 쪽 눈썹을 찡그렸다.
“민준 사생팬들이 희우 씨 테러를 모의하는 것 같다나 어쨌다나.”
이건 완전히 선 넘은 거지
사생팬. 본인의 범죄행위를 팬심 혹은 호의에서 우러나온 행동이라고 합리화하는, 사생활 침해 스토커를 이르는 단어.
공론화한 적은 없으나, 어스래빗도 이런 사생 스토커로 인해 당혹스러운 일을 겪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루는 강보배가 밥을 먹으면서 이런 이야기를 꺼냈다.
『나 사이버대학으로 편입할까 봐.』
이유를 묻자 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떤 여자애가 자꾸… 어디선가 튀어나와서 나 안거나 만지고 도망가. 어떤 날은 ‘오빠, 섬유유연제 바꿨어요?’ 이러고 가는데 소름이….』
한번은 경찰에 신고했으나, 물리적 피해를 본 것도 아니고 상대가 미성년자면 처벌도 제대로 안 된다며 고개부터 저었다고.
『나중엔 내가 아이돌이란 걸 알고는, 아이돌은 이런 일 흔히 겪지 않냐고, 경호원이랑 매니저는 어디 갔냐고 묻더라….』
차남석의 경우엔 학기 초, 옆에 앉아 함께 강의를 듣고, 강의내용에 대해 의견까지 나누었던 사람이 실은 사생 스토커였던 경우도 있었다.
유독 차남석에게만 관심을 두는 그녀를 의심스럽게 보던 조교가 다가가, 몇 학번 무슨 과냐고 이름을 묻자 처음엔 엉터리로 대답했다가 도망쳤다고.
『그 와중에 내가 쓰던 펜 훔쳐 갔어.』
라이언도 예전 숙소 앞에서 어슬렁거리던 사생 스토커에게 성추행을 당할 뻔한 적이 있었고, 이건우는 헬스장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사진에 찍힌 적도 있었다.
데뷔 2년 차에 신인상 겨우 하나 탄 이들도 이럴진대, 인지도가 더 높은 아이돌그룹의 경우엔 더 심하면 심했지, 덜하진 않았다. 특히 블블에겐 유독 정도가 심한 사생이 많기로 유명했다.
‘그래도 바보가 아닌 이상 대놓고 일을 벌이긴 힘들 텐데.’
하물며 이렇게 많은 사람이 있는 장소에선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한율은 조유찬을 따라 주변을 살폈다. 예전에 민준과 수재에게 들었던 사생 스토커들의 일화를 떠올려보면, 상식 밖의 일을 저지를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도 볼 수 없어서.
“오늘 같은 날엔 꽃 나들이를 가줘야 하는데.”
촬영에 들어가기 전, 이희우가 쾌청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민준이 변호사와 상담을 하거나, 김민선의 우려를 보면 이희우도 자신에게 벌어지거나 혹은 닥칠 수 있는 일에 대해 인지하고 있을 텐데,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등산도 괜찮고.”
“선배님도 등산 좋아하세요?”
“몸매 관리엔 이것저것 자잘한 운동보단 등산이 최고거든. 전신 운동도 되고, 스트레스도 풀리고. 그런데… 민준이랑은 같이 못 가겠더라.”
“왜요?”
“무릎 연골이랑 발목 관절이 안 좋아서.”
“아.”
연습생 시절부터 몇 년, 하루에 몇 시간씩 안무 연습으로 몸을 혹사한 아이돌의 직업병이었다.
“한율이 너도 미리미리 관절 근육 운동 잘해. 다치지 않게.”
“네.”
이희우는 슥 웃곤 콘티 대본을 펼쳤다. 그리고 모션을 취할 공간과 거리를 가늠하며 촬영에 관한 이야기로 화제를 전환했다.
“오늘 촬영은 특히 NG 내면 화낼 거다.”
“조심할게요.”
“명일 씨도 마찬가지예요.”
어느새 두 사람 곁으로 다가온 배우 강명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희우에게 호감이 있는 것 같았던 그는, 이희우의 열애설이 터진 이후부터 다른 사람의 오해를 사지 않도록 태도를 조심하는 듯했다.
“네, 선배님. 실수하지 않도록 집중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