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라이언은 어스래빗 전용 연습실에 혼자 덩그러니 있었다.
멤버들이 있을 땐 쿵쿵 발을 구르는 소리나 짧은 잡담, 땀에 젖은 옷이 펄럭거리는 소리, 음악 소리로 가득 찼던 공간이지만, 혼자만 있을 땐 아무리 음악을 크게 틀어도 적적했다.
그러나 이렇게 혼자만 시간이 늘어나는 동안, 라이언은 나름 외로움을 떨쳐낼 수 있는 일을 하나씩 찾았다. 그중 하나는 사나흘에 한 번씩 점심시간에 진행하는 짤막한 라방이었다.
“안뇽, 이프림~. 오늘은 연습실에서 인사해요.”
-기다렸어 사자톢ㅜㅜ
-월욜 대낮부터 계탔다
-점심 머것서??
-민낯도 이쁜 먹방요정
-라방 알림 울리자마자 친구들 버리고 이어폰 꼈다ㅎㅎ
“오늘은 지난번에 예고한 대로, 이프림이 추천해준 팝에다가 랩을 넣을 거예요.”
-이렇게나 팬을 생각해준다, 우리 아이가
-아이 기특해♡♡♡
“하지만 다 못 외워서, 노트 보면서 할 거예요.”
음악을 재생하기 위해 다른 모니터를 보면서 마우스를 클릭하는 라이언의 옆얼굴이 영상에 고스란히 나왔다. 딸칵거리는 마우스 소리도.
-사자톢 귀 위에 피어싱 새로 했다!
-와
-와
-이쁘다
-내가 선물해준 거다!!!!!!
곧 감미로운 팝송이 흘러나왔다. 라이언은 고개를 까닥거리며 리듬을 타다가 노래를 흥얼흥얼 따라 불렀다. 그리고 1절이 끝나고 간주. 원곡에 없던 자작 랩을 마이크에다 대고 시작했다.
-♡♡♡♡♡
-♡♡♡♡♡♡♡
-♡♡♡♡♡♡
팬들은 톡창에다 콘서트 응원봉 대신 하트를 여러 개 띄우며 장단을 맞췄다.
“…어때요? 괜찮았어요?”
노래는 랩이 끝나고 2절로 넘어갈 때 즈음 재생 중지.
-너무 좋다ㅜㅜ
-나중에 SNS에다 가사 올려주면 안 될까?
-어스래빗도 좋고 트레리안도 좋지만 라이언이란 사람이 너무 좋다ㅠㅠㅠㅠㅠ
-이 다정한 노래에 애틋함이 가득 담긴 랩.. 크으
칭찬과 찬사로만 채워지는 톡창을 보며 라이언은 생글생글 웃었다. 애초에 그를 좋아하는 팬들만 모인 공간이라 좋은 말만 나오는 게 당연했지만, 그래도.
라이언은 시간을 확인했다. 어느새 12시 40분. 슬슬 자율 연습을 시작해야 할 시간이었다.
“그런데 이프림도 알죠? 우리가 연습으로 바빠요. 그래서 다음엔.”
-컴백날만 손꼽아 기다린다 진짜ㅜㅜㅜㅜㅜ
-다음엔 시간 아낄 겸 점심 먹방ㅇㅇ
-카메라 쳐다보면서 숨만 쉬어도 돼
“무대 메이크업 연습을 할 거예요. 우리 회사 토끼처럼, 얼굴 반만.”
-.....?
-ㅋㅋㅋㅋ
-메이크업?! ㅋㅋㅋㅋ
-나중에 직접 하려고? ㅎㅎ
“그리고 내일은 보배가 <락뮤닷>에 나가요. 이프림도….”
흠칫. 올라오는 톡을 보면서 슬슬 오늘의 라방을 마무리 지으려던 라이언의 눈이 떨렸다.
잠깐 딜레이 되어 멈춘 톡창. 미국 성조기 아이콘이 붙은 영어 톡이 라이언의 시선을 끌었다.
[Teddy]-[안녕, 라이언. 나의 자랑스러운 형제:)]
곧 톡창이 원활해지며 테디의 톡은 금세 위로 올라가 사라졌다.
“…….”
라이언이 말을 하다 말고 모니터를 보며 눈만 깜빡거리자, 팬들이 의아하게 물었다.
-왜 그랭?
-ㅇㅂㅇ??
-라욘?
-사자톢 멍 때린다
그제야 라이언은 카메라를 보며 웃었다.
“집에 두고 온 테디베어가 생각났어요.”
-갑자기?
-ㅋㅋㅋㅋ진짜 엉뚱해>ㅂ<♡♡♡♡♡
“그럼 오늘 라방은 끝! 이따가 SNS에 가사 올릴게요. 이프림, 즐거운 하루~.”
라이언은 카메라를 향해 손을 흔들곤 라이브 방송을 껐다.
[라이브 방송이 종료되었습니다]
“하아…….”
문구가 뜨고 나서야 웃음기를 지우며 한숨. 라이언은 핸드폰을 집어 만지작거렸다. 현재 시각 12시 42분. 워싱턴은 밤 10시 42분으로, 아이가 깨어있기엔 늦은 시간이었다.
‘고모가 이 시간에 인터넷 접속을 허락할 리가 없을 텐데.’
우웅. 그때 오동식 팀장으로부터 톡이 왔다.
-[2층 사무실]
잠시 후. 라이언이 2층 사무실로 들어가자 자리에 앉아있던 오 팀장이 일어났다.
“라방 수고했다. 가사는 언제 쓴 거야?”
혹시 라방 도중 실수한 게 있어 혼나는 건 아닐까. 내심 걱정했던 라이언은 오 팀장의 미소를 보곤 속으로 안도했다.
“어제의 어제요.”
“그저께?”
“네.”
“그렇구나. 안에 들어가자.”
“……?”
회의실을 가리키는 오 팀장을 보며 라이언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주로 개인 면담 혹은 스케줄에 관한 설명을 듣는 장소인 까닭이었다.
‘면담인가 보다.’
상담에 관한 이야기일까, 아니면 외적 이미지에 관한 논의일까. 설마 치과 예약이 잡혔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겠지?
그러나 오 팀장의 용건은 라이언이 전혀 기대하지도 않았던 일이었다.
“예능 섭외가 들어왔어.”
“네?”
“예전에 호랑 가람이가 나갔던 <아이돌 장학퀴즈쇼> 기억나지? 거기에서 이번에 외국인 아이돌 멤버 특집을 한다고, 라이언 널 섭외하고 싶다더라.”
라이언은 고개를 흔들었다.
“나 바보라서 망신당해요.”
“괜찮아, 부담가질 필요 없어. 그때 호도 당당히 오답 외치고 중도 탈락했잖아. 이참에 혼자 스케줄도 한번 뛰어보고.”
“으음….”
그렇다면야. 잠시 고민하던 라이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할게요. 언제예요?”
“녹화는 다음 주 월요일, 방송날짜는 다음 달 14일. 프로그램 특성상 사전미팅은 없고….”
그 외에 다른 유의사항을 들은 라이언은 기분 좋은 얼굴로 회의실을 나왔다. 작년, 여행 컨셉 프로그램에서 섭외가 들어왔을 땐 차남석과 강보배, 자신. 이 세 명 중 두 명만 나가야 해서 싫다고 거절했었다. 나가게 되어도 어색한 관계가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길까 봐.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출연료는 얼마나 나올까?’
출연료가 나와도 헤어메이크업이나 스타일리스트 비용, 인건비 등으로 빠지고 빚도 갚아야 하지만… 당시 <아이돌 장학퀴즈쇼>에 나갔던 박가람이 말했었다.
『이번만 그런 건지는 모르겠는데, 받은 수익 중 50%는 마음대로 하라 그러더라. 빚을 갚든, 용돈으로 쥐고 있든.』
외주가 아닌 직접 제작이라 입금도 빨리 됐다고 들었다. 라이언은 느릿하게 걸으며 핸드폰으로 달력을 살폈다.
‘찬형 생일 전엔 들어오겠지?’
그때였다.
“하… 진짜. 유 팀장님!”
라이언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기획홍보팀의 강순철 팀장이 다급한 목소리로 매니지먼트 A팀의 유 팀장을 불렀다. 그러곤 기획홍보팀 직원의 자리에 모여 심각한 얼굴로 수군거린다.
“한동안 잠잠하다 했더니….”
“일단 로펌 쪽에 연락해서 증거부터 모읍시다.”
“커뮤 쪽은 아직 조용하죠?”
누군가 크리스탈 래빗을 대상으로 악의적인 짓이라도 벌인 걸까. 그때 뒤늦게 회의실에서 나온 오 팀장이 라이언의 어깨를 툭툭 감싸듯 두드렸다.
“뭐해, 라이언? 연습하러 가야지.”
“네.”
라이언은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기획홍보팀 쪽을 일별하곤 사무실을 나갔다.
오 팀장은 라이언이 나가고 나서야 소란이 벌어진 곳으로 향했다.
“무슨 일입니까?”
하아. 유 팀장이 무거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곤 다른 팀 직원들에게 들리지 않도록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미친놈이 또 돌아온 것 같아요. 이번엔 미랑이 뿐만이 아니라, 크래 애들 전부 성인물이랑 합성해서 올려놨어.”
“그런데… 잠깐만요.”
모니터링을 하던 직원이 마우스를 움직이며 중얼거렸다.
“더 심각한 일이….”
“뭔데요?”
“어떤 미친 자가.”
직원이 다급히 노트북을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여기에다 배우 이희우 합성물을 유포하고 커뮤에다 인증 글을 올리는 바람에, 이 채널 주소가 쫙 퍼지고 있는 것 같아요. 어떡하죠? 이러면 채널이 삭제되는 것도 시간문젠데? 빨리 증거부터 확보해야….”
“환장하겠네, 진짜.”
유 팀장이 구겨진 미간을 손으로 짚으며 재차 한숨을 쉬었다.
“빌어먹을 변태 새끼들….”
* * *
“컷! 수고하셨습니다!”
오후 2시. 오늘 촬영이 끝났다.
“수고하셨습니다, 선배님.”
“수고했어. 한율이 넌 내일부터 시험이라고 했지?”
“네.”
“시험 잘 보고, 금요일에 보자.”
“네, 들어가세요.”
이희우와 웃으면서 인사를 나눈 한율은, 감독과 스태프들, 다른 배우들에게도 꾸벅꾸벅 인사했다. 영화 촬영에 방해되지 않도록 조금 떨어져서 모니터링용 영상을 찍던 조유찬이 다가왔다.
“수고했어, 한율아. 서울에 도착하면 학교 수업도 모두 끝났을 텐데, 회사로 곧장 갈까?”
“네. 그런데 형… 무슨 일 있어요?”
조유찬의 입가는 웃고 있었지만, 주변을 살피는 시선엔 미약한 불안이 깃들어 있었다.
“어? 음….”
조유찬은 이희우를 황급히 차로 데려가는 김민선을 힐끗하곤 한율의 등을 두드렸다.
“일단 가자. 가면서 설명해줄게.”
잠시 후, 조유찬에게서 설명을 들은 한율은 기가 막힌 표정을 지었다.
민준의 사생 스토커들이 테러를 저질렀다. 바로 인터넷 여기저기에다 이희우의 성인 합성물을 퍼뜨리고, SNS에다가도 엄청난 양의 악플 댓글을 한꺼번에 달고 있다는 것.
그것도 모자라 커뮤니티 사이트에다 본인의 짓을 자랑스레 인증까지 해, 이희우뿐만이 아니라 연예인들, 수많은 일반인의 성인 합성물이 잔뜩 있는 추잡한 공유경로가 만천하에 까발려지기도 했다고.
조유찬이 질색하는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운영자가 바로 그 페이지를 삭제하고 튀고, 일이 커지니까 커뮤 인증글도 사라지기는 했는데…. 하, 인간이 어떻게 이렇게 악독할 수가 있냐. 이건 완전히 선 넘은 거지. 예전에도 좋아하는 남자 아이돌 열애설 상대한테 살해 협박까지 했던 미친 사람들이 있었지만, 요즘 그런 건 한번 퍼지면….”
한율도 미간을 구긴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그제야 새벽부터 전화를 걸었던 민준의 행동이 이해되었다. 민준은 이미 자신의 사생들이 그런 짓을 저지르고 있다는 걸 인지하고, 법적 대응을 하려던 거 아닐까.
그리고 이 사실을 이희우도 몰랐을 것 같진 않았다.
나중에 얼마나 큰 부탁을 하려고
“아아, 이거?”
사과패드에 담긴 적나라한 이미지 파일을 넘기며 이희우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예전부터 돌아다니고 있던 거야. 한 4, 5년쯤 됐을걸? …어? 이건 최근에 만든 건가 보다. 기술 좋아졌네. 엉덩이 크기만 아니면 진짜 나로 착각할 뻔?”
걱정 가득한 얼굴로 연신 룸미러를 통해 살피던 김민선이 속상한 목소리를 냈다.
“언니, 지금 느긋하게 그런 말을 할 때가 아니잖아요….”
“괜찮아. 이미 이거 퍼뜨린 녀석들에 관한 증거 수집해서 경찰에 넘겼거든. 그런데 그것도 모르고 커뮤에다 자랑질까지 했다니, 면상 확인하는 것도 시간문제겠네.”
제 딴엔 민준에게 과시하기 위해 그런 것이었을 테지만.
이희우는 핸드폰으로 SNS에 들어갔다. SNS엔 만들어진 지 얼마 안 된 계정이 우르르 몰려와 악플을 잔뜩 달아놓았다. 개중엔 합성음란물을 근거로 들어 허위사실을 적어놓고 모욕하는 내용도 많았다.
“그런데 조금 고민된다.”
“네? 무슨 고민이요?”
이희우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악플러 두당 합의금 천만 원씩만 불러도 평생 먹고살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아서.”
“언니….”
회사 측에선 증거를 모두 수집했으니 차단이나 신고라도 눌러서 치워버리라고 했지만, 일부러 놔두었다.
‘쓰레기들이 스스로 쓰레기라는 걸 자랑하는데, 다른 사람들도 와서 실컷 보게 해줘야지.’
이희우는 민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민준, 나 촬영 끝나서 올라가는 길인데… 여보세요? 너 또 우는 거 아니지?”
울적한 민준의 목소리.
-[…안 울어.]
“그래. 울려거든 내 앞에서만 울어.”
-[…….]
“저녁 같이 먹자. 5시 30분까지 꽃단장하고 기다려.”
김민선은 의연한 이희우를 보며 속으로 감탄했다.
별이날다 엔터테인먼트에서 석 달간 밀린 월급도 못 받고 부당해고된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별이날다 대표의 이모인 원로배우 임숙정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사실이냐 물어봤을 때부터 알아봤지만.
‘언니는 정말….’
* * *
한율이 회사 연습실로 내려갔을 무렵, 길우성은 미랑도 모자라 이번엔 크래 멤버 전원의 합성음란물이 나돈다는 사실을 접하고 단단히 화가 난 상태였다.
“이 쌍놈의 변태 새끼. 눈에 띄면 바로 아스팔트에다 머리를 내다 꽂아 그대로 면상을 갈아버릴 거야.”
유호가 길우성을 달랬다.
“경찰이 제작자랑 유포자 추적하는 중이라니까, 흥분하지 말고 차분히 기다리자. 그런데 그놈 면상이 어떻게 생겼다고? 몽타주 그릴 수 있어?”
“기다려 봐.”
길우성이 안무 동선을 짜던 연습장에다 미랑의 사생 스토커를 그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넙데데한 얼굴에….”
가만히 길우성이 그리는 몽타주를 보던 유호가 앓는 소리를 냈다.
“으음…. 사람처럼은 안 생겼다는 거지?”
“어…?”
그러나 이번 합성음란물 건은 아직 기사화되지 않았다. 민준의 사생 스토커들이 저지른 짓도.
후자는 이희우와 민준 측이 알려지지 않도록 막고 있을지도 모른다. 범인이 잡히고, 사실이 명확해진 후 보도하기 위해.
한율은 구시렁거리면서 다시 몽타주를 그리는 길우성과, 침착한 척해도 화가 잔뜩 난 유호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캐비닛 옆에선 박가람과 라이언이 앉아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내가 나갔을 때랑은 진행 방식이 조금 달라졌다니까, 숙소에 가면 무료로 풀린 VOD로 같이 보자.”
“응. 대기실은 어땠어?”
“그땐 네댓 명씩 대기실 하나를 같이 썼었는데… 지금은 잘 모르겠다. 찬형이한테 물어보는 건 어때? 2주 전인가 나온 것 같던데.”
옷을 갈아입기 위해 캐비닛 앞으로 간 한율은 두 사람에게 물었다.
“무슨 얘기에요?”
“라이언이 다음 주에 <아이돌 장학퀴즈쇼>에 나간대.”
“혼자요?”
“응, 외국인 아이돌 특집이라 나 혼자.”
“잘됐네요, 형.”
라이언이 기분 좋게 웃었다.
“출연료 받으면 맛있는 거 살게.”
“내일은 보배가 <락뮤닷>에 피처링 하러 나가고. 왠지, 우리 점점 이대로 잘될 것 같은 예감이 들….”
“그만!”
조용히 스트레칭을 하던 이건우가 기겁했다.
“설레발치지 마. 그런 말을 하면 꼭 반대되는 불행한 사건이 터지는 게 인생의 클리셰라고!”
이건우의 불안이 무색하게, 조용하고 평화로운 나날이 흘렀다.
WB래빗은 소속 아티스트의 명예를 실추하고 모욕하는 외설적인 이미지나 영상을 합성, 유포하는 이들에게 법적으로 강경하게 대응하겠다며 공식 입장을 내놓았다.
연예 뉴스란엔 걸그룹 아이허니의 유린 솔로 무대에 피처링으로 참여한 강보배의 실력을 칭찬하는 기사가 올라왔다. 라이언이 곧 <아이돌 장학퀴즈쇼> 녹화를 한다는 기사도.
한율은 중간고사 성적을 미련 없이 포기했다.
금요일. 영화 <고양이 난로> 촬영장에서 만난 이희우는 여전히 의연했으며, 민준은 촬영장에 이희우의 포토 현수막과 배너가 크게 달린 밥차를 보냈다. 한율에게는 커피차를.
“정말 감사합니다, 선배님. 깜짝 놀랐어요.”
현장에 오고 나서야 민준이 보낸 커피차를 본 한율은 민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민준이 웃으며 말했다.
-[고마워하지 않아도 괜찮아. 지난번에 도움받은 것도 있고…. 미리 주는 뇌물이거든.]
2년 전 알게 된 초반부터 ‘투자’라면서 이것저것 많이 보내더니.
“대체 나중에 얼마나 큰 부탁을 하려고 이러세요.”
-[흐흐. 그럼 오늘도 수고해!]
“네, 들어가세요.”
한율은 민준이 보내준 커피차 앞에 서서 사진을 찍었다. 트럭 위에 달린 포토 현수막 [연기천재☆서한율 영화 대박 나자!]가 보이게 한 컷, 옆에 세워진 포토 배너 [난로처럼 따뜻한 한율 씨의 커피 한 잔]과 한 컷.
두 장의 사진을 SNS에 올렸다.
[블블 민준 선배님이 촬영장으로 커피차를 보내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D #영원한블블 #이래서연예인친구를사귀는구나 #어제중간고사망침]
-어제 중간고사 망침ㅋㅋㅋㅋㅋㅋㅋㅋ
-율톢 시험 망쳤썽? 우쭈쭈
-민준님 감사합니다!!! 이 와중에 율톢은 안 보이고 웬 빛이
-시험 망쳐도 괜찮아! 네 존재가 이미 만점이거든(´>∀<`)♡
-영원한 블블
-이래서 연예인 친구를 사귀는 구나<ㅋㅋㅋㅋ 넘 솔직한 거 아니니 율아? ㅎㅎㅎ
-[Yu Jiheon]헉... 오늘 누구한테 선수를 빼앗겼나 했더니...!
ㄴ? 헐ㅋㅋㅋㅋ
ㄴ태하늘 씨, 아니, 지헌님 여기에서 뭐하세욬ㅋㅋㅋㅋㅋ
ㄴ날짜 겹쳐서 못 보내셨나 보다ㅎㅎ
한율은 실시간으로 달리는 댓글을 보다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커피차 위에 앉아있는 사장에게 주문했다.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 부탁드릴게요.”
그날 오후, 오늘 첫 로케가 끝났을 무렵.
바깥이 돌연 촬영장을 찾아온 연예 기자들로 인해 소란스러워졌다. 그들이 몰려온 이유는 인터넷에 떠 있었다.
[배우 이희우, 블블 민준 사생 스토커 고소!]
[배우 이희우가 자신의 불법 촬영물과 합성음란물을 유포하고, SNS와 관련 기사 등에 성희롱과 악플을 단 이들을 정보통신망법 위반과 허위사실 적시 명예훼손, 모욕죄 혐의로 고소했다.
이들 중엔 이희우의 연인인 블랙블러드 민준의 사생 스토커가 다수 포함되어 있어 큰 충격을 주고 있다.
이희우의 고소 대리를 맡은 솔매 로펌 측은…(중략).
한편 이희우는 오늘 민준이 영화 <고양이 난로> 촬영장으로 보낸 밥차를 SNS에 인증하며 “다들 따뜻한 밥 챙겨 드세요! 나쁜 아이는 굶고 다녀도 합의와 선처 없어요^^” 라고 적었다.]
-처도랏네; 민준이랑 사귄다고 저런 추잡한 짓을 한 거?
ㄴ사생은 ㄹㅇ정신병자들이라 그럼ㅇㅇ
ㄴ예전에 지들이 좋아하는 남돌이랑 합동무대 한번 했다고 여돌한테 존나 더러운 루머 퍼뜨리고 그 여돌 팬덤까지 매장하려한 빠순이들 사건도 있었잖음
ㄴ남돌 열애설 상대 살해 협박한 레전드도 있지
-와... 솔매 로펌 수임료 장난 아닐 텐데;;
-ㅋㅋㅋㅋㅋ ㅁㅈ 사생팬들이 이희우 저런 식으로 건든 것도 놀랍고 역겨운데, 바로 응징해버리넼ㅋㅋㅋㅋ
-얼마나 빡쳤으면 회사 법무팀 건너뛰고 전관이 득시글거리는 대형 로펌에다가 일을 맡기냐ㅋㅋ
ㄴ주제도 모르고 날뛴 사생들에게 참된 ㅇㅅㅈ을
-이거 전부터 말은 돌았는데 역시 대형 로펌ㅋ 엄청 빨리 잡았네
-연기는 잘해도 평소 성격 지랄맞아보여서 별로였는데.. 화끈하네
-솔매 로펌이면 ㅅㅎㅇ 외삼촌 있는 곳 아닌가??
ㄴ헐?
ㄴ헐;
ㄴ왓 더
ㄴㅋㅋㅋㅋㅋㅋㅋㅋ
-누나 첩보 액션물 한 번만 찍어줘요ㅜㅜ
-민준 부럽다... 진짜 부럽다.... 레알 부럽다....
-내가 ㅁㅈ이면 이희우한테 진짜 미안해서 고개 못 들 것 같은데..
ㄴ괜찮으니 사귀는 거겠죠.
ㄴ진짜 인기 많은 남돌이랑 사귀려면 이희우처럼 멘탈 강하지 않고선 못 버틸 듯ㄷㄷ
ㄴ둘이 서로 진짜 좋아하나 보죠ㅇㅇ 그게 아니고서야 누가 저런 정병들을 감당해
이희우의 고소 대리를 진행한 로펌의 공식 입장과, 이희우가 직접 올린 SNS로 현재 그녀의 상태를 잘 알 텐데, 굳이 피해자인 이희우를 직접 찍고 인터뷰하겠다며 몰려온 기자들.
한율은 조유찬에게 물었다.
“전 어떤 표정으로 나가야 할까요?”
이제 다음 로케 장소로 이동해야 하는 상황.
분명히 기자 중엔 이희우뿐만이 아니라, 동료 배우들의 모습도 찍고자 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특히 자신은 이희우와 민준, 두 사람과 친분이 있다고 알려져 있으니.
이희우에게 벌어진 사건에 경악하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아니면 기사를 못 본 척 의아한 표정을 지어야 할지.
고민하는 한율에게 조유찬이 대답했다.
“환하게 웃으면서 손만 흔들지 않으면 괜찮을 것 같아.”
현장 조연출이 다가왔다.
“희우 씨가 먼저 밴 타고 이동한다니까, 조금 기다렸다가 기자들이 따라 빠지면 그때 편히 이동하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어차피 배우들은 서둘러 이동할 필요가 없었다. 촬영 장비를 철수하고, 새로운 장소에다 다시 세팅하는 데엔 적잖은 시간이 걸리므로. 배우는 그사이에 대본을 보든, 잠깐 다른 볼일을 보고 오든, 자유였다.
그래서 기자들도 무작정 와서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배우가 실상 연기하는 시간보다 대기하는 시간, 인터뷰를 할 만큼 여유가 있다는 걸 잘 알기에.
“그럼 커피차 철수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잔 마시면서 기다릴까?”
조유찬이 커피차를 가리키며 물었다. 커피차 사장은 스태프들이 철수 준비를 하자, 자신도 철수해야 하나 망설이는 표정이었다.
“저분도 슬슬 퇴근해야 하지 않을…. …?”
한율은 대답하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 살랑. 불어오는 바람에 미약하게 섞인 마나. 그 안에서 익숙한 기운이 희미하게 감지된 까닭이었다.
‘이건….’
한율은 건물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곳을 응시하며 미간을 찡그렸다.
법원 판결로 벌금을 물고, 현재 민사소송까지 당하고 있으면서도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것일까. 아니면 되레 앙심을 품고 찾아온 것일까.
‘기자들이 모인 곳에 있는 것 같은데.’
“한율아, 왜 그래?”
“형. 우리도 지금 이동해요.”
“응? 왜?”
어쨌든 필시 좋은 목적을 가지고 여기까지 찾아온 것은 아닐 터. 한율은 먼저 걸음을 옮기며 대답했다.
“그냥요.”
기자들은 현장 정리 스태프들의 통제를 받으며 주차장으로 사용하는 곳 옆에 모여 있었다. 이희우가 먼저 매니저, 경호원과 함께 나오자 그들은 소리 높여 이희우의 이름을 불렀다.
“희우 씨, 앗싸일보입니다! 잠깐 인터뷰 가능할까요?!”
“희우 씨, 여기 좀 봐주세요!”
“언니, 멋져요!”
기자들 말고 이희우의 팬들도 온 모양. 이희우는 그쪽을 향해 가볍게 미소 지으며 손을 흔들곤 차에 탔다. 그런 이희우를 찍던 카메라는 이내 덤덤한 얼굴로 나오는 한율을 포착했다.
차칵차칵.
한율을 찍던 기자들은 이희우가 탄 밴이 움직이자 황급히 각자의 차에 올라탔다.
“정말 희우 씨랑 같이 이동하려고?”
운전석에 앉아 안전띠를 매며 조유찬이 물었다.
“희우 씨가 걱정돼서 그래?”
사생 스토커는 이희우가 나오자마자 차에 탔다. 그리고 현재 이희우의 차 뒤를 바짝 따라붙어 가는 중.
다음 로케 장소에 먼저 가서 기다리려고 이희우를 길잡이로 이용하고자 하는 것인지, 이희우가 목적인지 지금으로선 알 수 없다. 사생 스토커는 한율도 행동을 이해하거나 예측하기 힘든 부류였으므로.
조수석에 앉은 한율은 안전벨트를 끌어당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러니 일단 출발이요.”
참 피곤하게 산다
“선배님, 바로 다음 로케 장소로 이동하세요?”
이희우의 번호를 몰라, 조유찬의 핸드폰을 통해 김민선에게 전화를 걸어 바꿔 달라고 했다.
-[아니. 잠깐 드라이브 좀 하면서 기자들 떨어지는 거 보고 가려고. 왜?]
“선배님이 걱정돼서 따라 나오기는 했는데, 어디로 가시나 해서요.”
담담하게 내뱉는 한율의 대답에 이희우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걱정 안 해도 되는데. 지금은 따로 인터뷰할 생각 없으니, 나중에 좋은 기회 놓치고 싶지 않으면 오늘은 이만 돌아가라고 회사가 통보 중이거든. 말 안 듣고 버티는 애들도 있겠지만, 걔들도 멀리에서 사진만 찍고 사라질 거야.]
이런 비슷한 일을 겪은 게 한두 번이 아닌 듯 의연한 반응이었다.
-[아. 10분 거리에 티라미수로 유명한 카페 있다고 하던데. 그쪽으로 올래?]
“네. 가게 이름 아세요?”
잠시 후. 한 베이커리 카페 주차장에 새카만 밴 두 대가 나란히 세워졌다. 하교 시간이라 거리엔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많았다. 몇몇 학생들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밴 앞을 기웃거리다 제 갈 길을 갔다.
사생 스토커는 인근 대로변에 비상등을 켜고 차를 댄 상태. 렌터카 회사 스티커가 붙어있는 소형차는 틴팅이 되어있었지만, 그 안에 탄 사람의 움직임은 잘 보였다. 사생 스토커는 이쪽을 보고 있었다.
말 안 듣고 여기까지 쫓아온 기자들도 근처에 차를 대고 창을 내려, 언제든 사진 찍을 준비를 했다.
조유찬이 안전띠를 끄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저놈들도 참 피곤하게 산다.”
옆 차에서 김민선이 내리더니 한율이 탄 차량 문을 똑똑 두드렸다. 조유찬이 차창을 내렸다.
“네, 민선 씨.”
“두 분은 음료 뭐 드시겠어요?”
“저도 내릴 테니 같이 들어가요. 한율이 넌 뭐 마실래?”
“레몬티나 유자차요.”
“응. 차에서 기다리고 있어.”
조유찬이 차에서 내리자 사생 스토커가 당황해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곤 조수석을 엄폐물 삼아 조심스레 한율이 탄 차를 살핀다.
그러나 밖에선 밴 안이 전혀 보이지 않기에, 한율은 멀뚱멀뚱 사생 스토커의 우스꽝스러운 행동을 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차창을 내리고 카메라 셔터를 누를 기회를 엿보는 기자들, 밴 안에서 기다리고 있는 이희우와 경호원.
섣불리 허튼짓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내가 먼저 알아보는 것도 모양새가 이상하고. 일단 지켜볼까.’
어떤 돌발상황이 발생하든, 총으로 저격하는 수준만 아니면 대처할 수 있을 테니.
잠시 후, 조유찬과 김민선이 양손 가득 종이가방과 테이크아웃용 커피 캐리어를 들고나왔다. 한율은 차에서 내렸다. 이쪽을 주시하던 기자들의 부산스러운 기척이 느껴졌다.
“왜 이렇게 많이 샀어요?”
“다른 배우분들이랑 감독님, 스태프분들한테도 돌리려고. 처음엔 진열대에 있는 거 전부 포장해달라고 했는데, 뒤에 들어온 학생들이 헉 소리를 내서 최소한의 양은 남겨두고 왔어.”
“잘하셨어요.”
드륵. 이희우가 타고 있던 밴이 활짝 열렸다.
“타. 여기에서 먹자.”
이희우는 안쪽 자리에, 한율은 컵에 담긴 티라미수를 중간에 두고 문 옆에 앉았다. 조유찬과 김민선, 경호원은 문 앞에 서서 티라미수를 떠먹었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신 이희우가 짧게 감탄했다.
“음, 여기 커피도 괜찮은데? 진한 게 딱 내 취향이야.”
한율은 여분의 커피 스틱으로 레몬을 쿡쿡 쑤시며 말했다.
“레몬티는 좀 밍밍하네요.”
이희우가 그런 한율을 귀여운 동생처럼 바라보다가 물었다.
“한율이 너도 오늘 뜬 내 기사 봤지?”
“네. 참 나쁜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아요. 아무리 경고하고 벌을 줘도, 반성은커녕 피해자 탓할 것 사람들.”
“벌써 민준이한테, ‘널 생각하는 마음에 더러운 XX를 떼어내 주려고 한 건데 왜 나한테 이러냐, 정신 차려라. 너 이러다 나중에 후회한다.’ 대충 이런 식으로 씨불이는 이상한 애도 있더라. 볼래?”
“아니요.”
사람들의 시선을 끌던 커다란 밴의 문이 활짝 열렸으나, 행인들은 섣불리 다가오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거리를 좁혀도 우락부락한 덩치의 경호원이 험상궂은 인상으로 돌아보는 탓이었다.
기자들도 차에서 내리지 않고 카메라를 줌인해 찍었다.
“그래도 한율이 네가 좋은 로펌을 소개해준 덕분에 정말 빨리 잡은 것 같아. 회사 법무팀에 맡겼으면 세월아 네월아, 증거수집만 한참 걸렸을걸?”
“민준 선배님 연락받고 연결해드린 것밖에 없는데요, 뭘. 그리고….”
한율은 미간을 찡그린 채 웃었다.
“거기 수임료 비싸지 않았어요?”
이희우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 완전. 나 당분간은 백화점 못 갈 것 같아.”
가해자들에게 합의금이라도 받으면 금전적 부담을 줄일 순 있겠으나, 합의와 선처는 없다고 못 박았으니. 그리고 지금도 해당 발언을 철회할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다.
“그래도 미친 아이들을 한꺼번에 청소하는 값이라고 치면 싼 것 같기도 해. 그나저나 어떡해?”
“뭘요?”
“미친 아이 중 하나가 커뮤에다 쓰레기들 주소를 올리는 바람에, 너희 회사 애들 합성물도 사람들 눈에 띈 것 같던데.”
크리스탈 래빗 뿐만이 아니었다. 대한민국의 내로라하는 걸그룹의 합성음란물이 아주 잠깐이나마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지금쯤 그들이 소속된 연예기획사 대부분은 뒤에서 분주히 법적 대응을 준비하고 있을 터다.
“선배님 일을 보고 함께 화내는 사람들이 많았으니, 다른 범죄자들도 금방 잡히지 않을까요?”
“그랬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쓰레기들을 광화문 광장에다가 일렬로 세워놓고…. 아!”
“……?”
“‘저는 합성음란물과 불법촬영물을 유포하고 악플을 단 범죄자입니다.’라는 큼지막한 팻말을 목에 걸고, 경찰서 앞에서 열흘 동안 서서 반성하면 합의해준다 그럴까?”
“그런 요구를 했다간 선배님이 고소당할 것 같은데요.”
이희우는 키득거리며 웃다가 티라미수를 내밀었다.
“이것도 같이 먹어. 레몬티랑도 잘 어울리겠다.”
“네.”
“그런데 너희 이번에 2기 모집하잖아. 키트 구성품이 지난번이랑 같아?”
조유찬이 하하 웃으며 대신 대답했다.
“아직은 발설해선 안 되는 영업 비밀입니다.”
“갖고 싶은 상품이라도 따로 있으세요?”
“작은 탁상시계. 원래 있던 건 호빵이 놈이 떨어뜨려서 망가졌거든. 지나가다가 뭐든 거치적거린다 싶으면 죄다 앞발로 후려쳐서 떨어뜨린다니까? 망할 놈의 고양이.”
10여 분 후. 한율은 이희우의 밴에서 내렸다. 슬슬 촬영장으로 이동해야 할 시간이었다.
‘계속 저 자세로 있었던 건가?’
본래 차로 돌아온 뒤에야 사생 스토커를 살펴보니, 그녀는 여전히 조수석 뒤에 숨어 이쪽을 훔쳐보고 있었다. 또렷하게 보이지는 않지만, 조금 전보다 무척 화가 난 인상으로.
“한율이 너 또 왜 조수석에 앉았어? 불편하지 않아?”
“괜찮아요.”
조유찬은 ‘오늘따라 이상하네’란 얼굴로 한율을 힐끗하고선 시동을 걸었다.
사생 스토커는 그들이 이동하자 조용히 뒤를 따라왔다. 그리고 영화 스태프들이 출입을 통제하는 곳에 다다라서야 멈추곤, 한참 동안 차 안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몇 시간 후.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했어요, 한율 씨. 다음 주에 봐요.”
“먼저 가보겠습니다.”
한율이 촬영을 끝내고 나왔을 땐, 서늘하게 불어오는 밤바람 어디에서도 사생 스토커의 기운은 감지되지 않았다.
‘무슨 일을 벌일 것처럼 따라오더니, 제풀에 지쳐서 돌아갔나.’
한율은 이번엔 차 뒷좌석에 편히 앉아 피곤한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