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후우….”
주 형사가 한숨을 푹 내쉬며 들어오자, 같은 팀 동료가 의아한 시선을 던졌다.
“왜? 왜 또 온 거래?”
그는 이틀 전, 배우 이희우에게 화학약품을 뿌렸다고 허위 주장했던 강상지를 조사한 경찰이었다.
강상지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배우 이희우 측이 처벌을 원치 않는다고 해서 집으로 돌려보냈건만, 조금 전 강상지가 제 발로 경찰서를 찾아왔다. 굉장히 죄책감으로 물든 얼굴로.
“길 가던 학생들이 하는 이야기에 화가 나서, 애들을 차도에다 밀쳐 버렸대요. 그래서 애들이 차에 치여 크게 다쳤다고.”
“뭐?!”
“그런데 현장에 확인하러 가보니까, 그런 사실 자체가 없었어요.”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뜻이야?”
“네. 강상지 씨가 주장한 시간, 그 장소가 환히 보이는 가게 CCTV를 확인해봤는데, 학생들을 뒤에서 노려보면서 걷는 모습만 찍혀 있더라고요.”
이야기를 듣던 동료가 미간을 찡그렸다.
“혹시 그 사람, 본인이 하는 상상이랑 현실을 전혀 구분 못 하는 거 아냐?”
“그래도 꼬박꼬박 자백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아요?”
“참 미스터리하네. 어쨌든, 보호자에게 연락해서 알리는 게 좋지 않을까? 한두 번이면 몰라도 또 벌이지도 않은 일을 가지고 허위신고라도 하면, 정말 긴급 상황에 처한 곤란한 사람에게 피해가 갈 수 있잖아.”
주 형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잖아도 연락했더니, 내일 정신과에 데려갈 생각이라고 하더라고요. 끔찍한 악몽이라도 꾸는지, 자다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고 일어나서 구석에서 벌벌 떠는 게 심상치 않다고.”
그거랑 이건 다른 문제
뮤닷 이 방송되었다.
자정에 가까운 늦은 시간에 편성되었음에도 방송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다음 날 아침 연예뉴스란 메인 대부분이 관련 기사일 정도로.
어스래빗 멤버들 또한 오동식 팀장의 당부대로 각자 시간이 맞을 때 방송을 보았다. 한율은 2일 아침, 영화 촬영장으로 이동하는 차 안에서 VOD로 시청했다.
[어? 저분 왠지 낯이 익은데?]
[예전에 보컬 시즌3에 나왔던 그분 아니야?]
[오, 맞네!]
굉장히 넓은 스튜디오에 출연자들이 소속마 단위로 등장했다. 예전에 방송에 나왔었거나 너튜브, SNS에서 화제가 되었던 출연자, 한번 데뷔했었던 출연자들은 짤막한 자료 화면도 함께 나왔다.
어색하게 웃으며 인사한 크레용박스 엔터의 장현우와 현강희가 쭈뼛쭈뼛 빈자리에 앉았다.
‘살이 많이 빠졌네.’
장현우는 2년 전과 비교해 턱선이 날렵해지고 몸도 호리호리해졌다. 화면에서 이 정도면 실제론 더 말랐을 터. 그만큼 화면에 보기 좋게 나오기 위해 관리했다는 뜻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콩콩 엔터 정민솔입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70여 명째. 정민솔이 등장했다. 출연자들이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는 척 설명했다. 작가에게 지시받은 티가 났다.
[콩콩이면 ACCOM 있는 곳?]
[나 저분 알아. 그런데 원래 WB래빗에 있었던 걸로 아는데…. 옮기셨나 보다.]
WB래빗이 언급되자, 먼저 나와 자리에 앉아있던 WB래빗 엔터 연습생 임승준과 김권, 변지욱의 모습이 잡혔다. 세 사람이 정민솔을 향해 반갑다는 얼굴로 손을 흔들고, 정민솔도 그들을 향해 환하게 웃는다.
서로에 대한 솔직한 감정은 넣어두고, 방송에 나가는 이미지를 위해 무언의 합의를 본 모양이었다.
“어때?”
차가 신호에 걸려 멈췄다. 운전 중이던 조유찬이 룸미러로 한율을 살피며 물었다.
“재밌어?”
“아이돌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흥미로울 것 같기는 한데, 출연자가 111명이나 되니 정신이 없네요. 인상이 비슷해서 누가 누군지 헷갈리는 사람들도 있고. 그리고….”
한율은 일시 정지 버튼을 누르고 고개를 들었다.
“우리나라에 기획사가 이렇게 많은 줄은 몰랐어요.”
정말로 처음 듣는 기획사가 많았다. 예전에 데뷔했다고 나오지만, 처음 보는 아이돌도.
“하하. 우리나라에 등록된 연예기획사가 2천 개가 넘는단다. 그 기획사가 전부 아이돌을 기획하진 않지만.”
“정말 많네요.”
신호가 풀렸다. 한율은 고개를 끄덕이곤 영상 재생 버튼을 눌렀다. 조유찬도 조용히 운전했다.
은 러닝타임이 상당히 길었다. 촬영장에 도착할 때까지 첫 방송을 다 못 봤을 정도. 한율은 그날 촬영을 끝내고 서울로 돌아갈 때가 되어서야 뒷부분을 마저 보았다.
그동안 포털사이트 연예뉴스란에는 에 방송에 나오기엔 부적격한 인물이 있다는 폭로 글들이 기사화되었다.
[ A군, 과거 학교폭력 가해자?!]
[ 출연자, 미성년 시절 음주흡연 사진 논란]
-이런 놈들 끼어있을 줄 알았다 내가ㅋ
-캐보면 더 있을 듯ㅇㅇ 아직 카메라에 잘 안 나온 애들
커뮤니티 사이트엔 게시판 및 몇몇 연습생들의 게시판도 개설되었다.
“써한, 너 픽미 1화 봤어? 반응 장난 아니야.”
숙소에 들어가 보니, 새벽 1시가 다 되어가는데도 길우성과 유호가 거실에 나와 있었다.
“어. 봤어.”
“무슨 데뷔 몇 년 차인 사람처럼 엄청 잘하는 연습생들도 있고… 나 좀 충격받음. 하신이가 그러는데, 스카이러너 멤버들도 픽미 보고 좀 많이 놀랐다고 하더라.”
“남석이나 한율이 너 정돈 아닌데, 외모만으로 아이돌 아우라가 느껴지는 애들 몇 명 눈에 띄고. …우성이 넌 누구누구한테 투표할 거야?”
오 팀장의 말마따나 미래의 경쟁상대가 될 수 있다는 경각심이 든 걸까.
“일단 우리 떠비 패밀리 셋한테 한 표씩 주고, 춤 엄청 잘 추던….”
두 사람은 아예 노트북에다 홈페이지의 출연자 리스트, 실력 평가 무대 클립까지 띄워 진지하게 의견을 나누기 시작했다.
“난 얘도 눈에 띄더라. 라이브가 조금 불안정하기는 했는데, 연습만 하면 금세 나아질 게 보여서.”
“그런데 아이돌 하려면 기본적으로 스텝이 몸에 배어있어야 하는데, 보니까 영 엉성한 게…. 뭔가를 더 안 보여주면 금세 밀려날 것 같아.”
한율은 저들끼리 떠드는 두 사람을 두고 방으로 들어갔다.
5월 4일 금요일. 한율은 간만에 영화 촬영장이 아닌 광고 촬영 스튜디오를 찾았다. 더순한화장품의 여름 컨셉 CF 및 화보를 찍기 위해.
스튜디오에 먼저 와 있던 아림 엔터의 진은수가 한율을 반갑게 맞이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잘 지내셨어요?”
“네, 안녕하세요. 오늘도 일찍 오셨네요?”
진은수가 활짝 웃었다.
“네. 빨리 와야 긴장도 빨리 풀릴 것 같아서 빨리 왔어요.”
‘빨리’란 말을 세 번이나 하는 걸 보니 긴장이 풀리려면 한참 먼 것 같다. 그러나 한율은 기특하단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속이 병든 나무를 골라낸 뒤 칭찬을 바라던 작은 마물의 눈망울과 닮아서.
“헤헷….”
배시시 웃는 진은수의 귀가 살며시 빨개졌다.
“6월에 데뷔한다는 기사 봤어요. 미리 축하드려요.”
“감사합니다! 선배님 팀도 6월에 컴백하시죠?”
“네. 다음엔 가수 선후배 사이로 만나겠네요.”
“네. 헤헷….”
긴장으로 창백하게 질려 삐걱삐걱 어색하게 움직였던 작년과 비교하면 훨씬 좋아졌으나, 반대로 바보 같은 웃음이 는 것 같다.
그때 두 사람을 못마땅하게 쳐다보던 진은수의 매니저가 입을 열었다.
“은수야? 선배님한테 인사 끝냈으면 슬슬 준비하자?”
“네…!”
이번 광고 촬영은 여름 컨셉에 걸맞게 하복을 입고, 화사한 해바라기 그림이 잔뜩 놓인 미술실 세트장에서 진행되었다.
첫 CF에서도 비슷하게 미술실이 나오지 않았었나? 이런 생각이 스쳤지만, 클라이언트 측이 결정해서 나온 콘티이니 그러려니 하며.
“은수 씨 연습 많이 했나 봐? 표정이 처음 봤을 때보다 굉장히 좋아졌어! 자, 둘이 예쁘게 꽃받침~!”
작년, 처음 그들을 찍었을 때 진은수의 어색한 연기에 난색을 보이고, 두 번째로 찍었을 땐 별말이 없던 감독은 이번엔 칭찬을 퍼부었다.
한율의 눈엔 여전히 어색한 부분이 많았으나, 찍힌 결과물은 썩 괜찮았다. 아주 좋은 순간을 감독이 잘 담아낸 덕분이었다. 그리고 촬영도 예상보다 일찍 끝났다.
진은수가 씩씩하게 고개를 꾸벅이며 인사했다.
“그럼 선배님, 다음 달에 방송국에서 뵙겠습니다!”
“네, 그때 봐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네!”
한율은 먼저 가겠다며 다른 사람들에게도 인사하고 스튜디오를 나왔다.
“한율아.”
휙. 차에 타자마자 조유찬이 한율을 돌아보았다.
“은수 씨 있잖아.”
“네.”
조유찬이 부들부들 올라가려는 입가를 아래로 꾹 잡아 내리는 괴상한 표정을 지었다. 겉으로 삐져나오려는 흥미진진한 감정을 애써 참는 것처럼.
“한율이 너한테 관심 있는 것 같던데? 촬영장이나 팬 미팅에서 만날 때마다 점점, 널 보는 표정이나 눈빛이….”
“여사친도 사귀지 말라면서도.”
“아아니? 그거랑 이건 다른 문제지! …헉, 설마 한율이 너도…?!”
한율은 미간을 찡그렸다.
한율도 자신을 향한 진은수의 호감을 감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고작 열여덟. 상대방에 대한 단순한 호기심이나 호감을 이성애로 착각하기 쉬운 나이다. 그리고 본인도 제대로 분간하지 못하는 그런 감정은, 섣불리 자극했다간 상당히 엉뚱한 방향으로 튈 가능성이 크다.
이건 경험담이었다.
그래서 진은수의 호감을 모른 척 담담하게 대하고 있었다.
“전혀요.”
한번 닮았다고 생각했더니 볼수록 정말 그 마물을 닮은 것 같아 조금 정감은 가지만, 딱 이 정도.
“그렇구나….”
한율의 단호한 대답에 당장 팝콘을 사러 갈 기세였던 조유찬이 김이 샌다는 표정을 지었다.
“참 모순적이지. 한율이 네가 이성을 사귀면 가장 먼저 뜯어말려야 하는데, 그거랑 별개로 또 한율이 네가 누구를 좋아하고 사귀는 모습이 상상이 잘 안 가서 궁금하다고 해야 하나…. 이게 바로 요즘 아이들을 보며 흐뭇함을 느끼고 싶은 아저씨 감성인가….”
한율은 고개를 끄덕이며 처방을 내렸다.
“형이 지금 외로워서 타인의 연애사에 흥미를 갖는 거예요. 연애하세요.”
“하하하하.”
조유찬이 교과서 읽는 톤으로 웃음을 흘렸다. 그러곤 시동을 켜고, 주차장을 벗어나 도로에 진입한 후에야 힘없이 중얼거렸다.
“나도 하고 싶다…. 연애….”
* * *
12일과 13일 이틀. 한율은 어스래빗의 두 번째 EP 앨범 녹음을 모두 마쳤다. 14일인 월요일엔 영화 촬영장에서 <아이돌 장학퀴즈쇼> 방송이 시작될 무렵 아슬아슬하게 돌아와, 멤버들과 함께 방송을 봤다.
방송을 보는 동안에도 몸이 굳어지지 않도록 스트레칭을 하던 멤버들은, 어느 순간부터 TV에 시선을 고정하다가 입을 벌렸다.
“와…. 와아…!”
MC의 흥분 섞인 목소리가 TV에서 쩌렁 흘러나왔다.
[<아이돌 장학퀴즈쇼>! 다섯 번째 골든 벨이 울렸습니다! 외국인 아이돌 멤버 특집! 골든 벨을 울린 주인공은 바로… 어스래빗의 라이언입니다!]
“형…!”
와락! 길우성이 라이언을 끌어안았다. 라이언이 질색하면서도 쑥스럽다는 얼굴로 웃었다.
“땀 냄새나. 놔.”
“와…. 별일 없이 녹화 잘하고 왔냐고 물었을 땐 그럭저럭이었다고 태연히 말하더니…. 박가람보다 더한 놈이었네, 이거?”
이건우는 라이언의 머리카락을 엉망으로 헤집으며 쓰다듬었다. 조금 전까지 안무 연습을 했던 터라 땀에 젖어 찝찝할 텐데도, 웃으면서.
“학익진 때도 소름 돋았는데, 마지막에 그린피스 맞히는 거 보고 진짜, 와. 나 팔에 닭살 돋았어.”
“라이언 이 자식…. 그동안 어눌한 한국말로 바보 코스프레를 했던 거였어…?!”
“나 바보 아냐.”
“형, 잘했어요.”
“골든 벨 성공 장학금은 네 이름으로 기부되는 거고. 출연료 말고 따로 더 나오는 건?”
차남석의 물음에 라이언은 고개를 흔들었다.
“없는데, 대표님이 방송되면 용돈 준다고 했어.”
“그럼 이제 라이언에게 맛있는 걸 얻어먹을 수 있는 건가?! 참고로 이 형은 전복 김밥이란 걸 한번 먹어보고 싶구나.”
“나는 함박스테이크.”
“치즈돈가스.”
“전 연어 덮밥이요.”
멤버들이 하나씩 먹고 싶은 메뉴를 말하자 라이언이 어깨를 으쓱였다.
“말만 해. 다 사줄게.”
유호가 가볍게 기지개를 켜며 웃었다.
“우리 멤버들이지만, 참 소박하다.”
방송이 끝나자 포털사이트 실검엔 [아이돌장학퀴즈쇼 골든벨], [아이돌장학퀴즈쇼 라이언]이 올라왔다.
방송 리뷰 기사도 여러 개 떴다.
[어스래빗 라이언, <아이돌 장학퀴즈쇼> 5번째 골든 벨 울려]
[<아이돌 장학퀴즈쇼> 어스래빗 라이언 대활약! 천만 원 기부]
-솔직히 방송 보기 전까지 누군지 잘 몰랐는데, 한국어 발음은 좀 어눌해도 애가 똑똑하더라ㅇㅇ
-라이언은 2015년에 한국으로 들어오고 나서야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원래 머리가 좋았다는 소리죠ㅎㅎ
-한국에 온 지 5년이나 넘었는데 아직도 말 잘 못 하고 어버버하는 애들이랑 엄청 비교되던데ㅋㅋ
ㄴ인기가 많아 스케줄로 바빠서 그런 거란 생각은 못 하냐 돌머가리야? ㅋㅋㅋㅋ 니네 오빤 듣보라서 공부할 시간이 많았던 거ㅇㅈ? ㅇㅇㅈ
ㄴ한국어 익힐 생각도 없이 돈만 벌러 왔다는 걸 팬도 인정하는 너희 오빠 정체가 궁금하다 야ㅋㅋㅋㅋ
ㄴ그래, 한가해서 트랙 꽉꽉 채운 믹테 발매도 하고 한국어 공부도 열심히 하고, 팬들이 추천해준 음악에다 랩 메이킹도 하고, 심지어 팬들한테 영어 가르쳐주기도 하고 그런다. 네 검머외 가수는 뭐 하느라 한국어 공부할 시간도 없이 그렇게 바쁜지 설명이나 해봐라
-지구톢이의 사자톢♡
-채널 돌리다가 우연히 봤는데, 말실수하지 않도록 생각하면서 또박또박 대답하는 모습에 오늘부터 팬 됐습니다^^ 앞으로 더 대박 나길 응원할게요ㅎㅎ
-라욘 사랑한다 진짜ㅜㅜ
이번 외국인 아이돌 멤버 특집은 평소보다 문제의 난도가 낮았으나, 중요한 건 라이언이 실검에 오를 정도로 활약을 했단 사실이었다.
다음 날이 되자 WB래빗 대표 좌기훈은, 라이언이 공중파 프로그램에서 대활약을 펼치고 실검에도 올라갔다며, 스승의날까지 겸하여 전체회식을 열었다.
그러나 전체회식이라도 소속사 전 직원과 아티스트, 연습생이 한자리에 모이는 건 불가능했으므로, 어스래빗은 매니지먼트 B팀, 스타일리스트팀과 한 자리에 모였다.
장소는 WB래빗과 가까운 파스타 전문점. 지난번 한율이 민준과 식사를 했던 곳이었다. 그 자리에서 좌기훈 대표는 어스래빗에게 좋은 소식을 전달했다.
“우리 어스래빗이 8월, 미국 뉴욕과 LA에서 열리는 K-POP 콘서트에 초대받았습니다.”
“오오…!”
“그리고.”
좌기훈 대표가 씨익 웃었다.
“8월 중순 일본 컴백 쇼케이스를 시작으로, 9월엔 필리핀, 대만, 인도네시아, 싱가폴, 홍콩까지. 아시아 팬콘 투어를 떠납니다.”
환호성을 지르던 표정 그대로 멍해졌던 박가람이 고개를 기울였다.
“갑자기요?”
알 게 무언가
오동식 팀장이 고개를 저었다.
“갑자기는 아닙니다. 해외에서 열렬한 러브콜이 들어오고 나서야 부름에 응하는 시대는 지나도 한참 지났습니다. 먼저 여러분을 알아봐 주고 관심을 두는 사람들을 포함, K-POP 자체를 사랑하는 해외 팬들에게 직접 찾아가 눈도장을 찍는 찾아가는 투어의 시대.”
한국 아이돌이란 이유 하나만으로, 막 데뷔한 아이돌그룹에도 열광하는 K-POP 팬들이 있다곤 들었다. 그래서 한국에선 이름이 생소해도, 해외에선 선풍적인 인기를 끄는 그룹도 적잖다고.
해외라곤 일본 밖에 가본 적 없는 어스래빗도 그린라이브나 SNS, 너튜브에 종종 해외 팬들의 댓글이 달리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래도… 잘 될까. 걱정하는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는 멤버들을 향해 좌 대표가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어스래빗 여러분은 작년, 신인상을 거머쥐며 앞으로의 가능성을 대중에게 각인시켰습니다. 그러니 자신감을 가집시다.”
“투어 예매는 다음 달부터 시작됩니다. 그때까진 가볍게라도 각국의 간단한 인사말을 틈틈이 익히도록 합시다. 알겠죠?”
다음 달부터 예매가 시작된다면 회사 측에선 훨씬 예전부터 투어를 논의하고 계획을 차근차근 진행하고 있었단 뜻이었다. 여기엔 어스래빗이 이번 활동도 좋은 성과를 낼 거란 기대와 확신도 깔렸을 터.
물론 찾아가는 팬콘 투어이니 규모는 작을 테지만, 데뷔 1년 만의 해외 투어. 그것만으로도 시사하는 바가 컸다.
어스래빗 멤버들은 드러나는 걱정을 숨기고 크게 대답했다.
“네!”
바쁜 나날이 흘렀다.
회사와 부윤방 감독에게 컴백 전 영화 촬영을 마무리하고 싶다는 뜻을 강하게 피력한 한율은, 남은 5월도 등교는커녕 휴일도 없이 빠듯하게 보냈다. 어쩌다 영화 촬영이 없는 평일이 되어도 학교에 가지 않고 연습실에서 살았다.
20일은 종일 굶어가며 새벽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앨범 재킷 촬영. 26일과 27일은 첫 번째 타이틀곡 M/V 촬영.
연예계는 여전히 로 시끌벅적했으나, 딱히 신경 쓰진 않았다. 주변에서 벌써 상위권 순위 연습생들 팬덤이 장난 아니라고 떠들었지만, 알 게 무언가. 별로 관심도 없었다.
그렇게 정신없는 5월이 지나고 6월.
이틀에 걸친 후속곡 M/V 촬영을 마친 후엔 다시 영화 촬영장과 회사 연습실만 반복. 둘째 주 주말엔 8월 일본에서 발매 예정인 두 개의 싱글 앨범 수록곡을 녹음했다.
“슬슬 그 시즌이 다가오는군…. 이곳이 뮤닷인가 MBS인가 KBC인가 SBC인가 에라 모르겠다, 드라이어기 소리가 시끄럽게 울려도 그걸 자장가 삼아 은색 돗자리와 차에서 쪽잠을 자다 깨는 걸 반복하는 그 시즌이…!”
길우성이 화장대를 가볍게 내리치곤 박수 쳤다. 쿵짝.
“얼쑤!”
“다들 각자 담요는 햇볕에 살균 소독하였겠지?!”
박가람이 진지한 얼굴로 좌우를 돌아보며 물었다.
오른쪽에 앉아있던 한율은 거울을 통해 박가람을 보았다. 박가람은 어둑한 붉은색으로 염색한 머리카락이 여기저기 핀으로 집힌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다.
“세탁소에 맡겼는데요.”
현재 그들은 있는 곳은 샵이었다.
어스래빗 두 번째 EP 앨범 [Invitation card] 컴백 쇼케이스는 6월 22일. 오늘은 23일 방영 예정인 MBS K <주말아이돌> 녹화가 있는 날이라, 오래간만에 꽃단장을 하러 왔다.
“혹시 수면안대도 세탁소에서 맡아주나?”
“글쎄요…. 중성세제로 손빨래하라고 적혀 있어서 전 그렇게 했는데.”
“손빨래해주는 세탁소를 찾으면….”
“직접 하세요. 몇 분 안 걸려요.”
그들의 머리를 만져주고 메이크업을 해주며 대화를 듣던 샵 직원들이 낮게 웃었다.
“메이크업한 얼굴에다 자주 썼었을 테니, 깨끗하게 잘 빨고 말려야 나중에 피부 트러블 안 생겨. 눈가 피부가 얼마나 예민한데.”
“네엥.”
“한율이는 머리카락 조금도 다듬으면 안 되지?”
“네, 아직 영화 촬영이 안 끝나서요.”
“응. 그럼 가르마 좀 다르게 타고, 가볍게 드라이만 해야겠다.”
“그런데 너희도 픽미 봐? 뮤닷에서 하는 거.”
어스래빗을 담당하는 샵 직원들은 대부분 작년부터 함께 일을 했던 사이라 친근했다. 그들은 편히 잡담을 나누었다.
“네. 누나들도 봐요?”
“당연히 보지. 투표도 꼬박꼬박 하는데?”
“누나는 누가 픽이에요?”
“나는 유지.”
“아, 유지 선배님 정말 노래 잘하시더라고요. 그저께 방송에서 고음 부르는 거 보고 소름이… 와.”
“피부 상태가 조금 아쉽기는 해도 그건 또 관리하면 되는 거니까.”
한율의 머리를 만지던 직원도 들뜬 목소리를 냈다.
“유지도 좋은데, 나는 민솔이 노래가 더 취향이야. 애들 연습도 많이 도와주고, 잘 웃고, 말도 예쁘게 하고. 원래 떠비에 있었다던데, 너희랑도 친해?”
“어….”
길우성이 눈동자를 굴려 나란히 앉아있는 박가람과 한율, 강보배를 살폈다. 그러나 강보배는 고개를 옆으로 푹 꺾은 채 자는 중.
박가람이 거울을 보며 활짝 웃었다.
“명절에 안부 인사를 주고받습니다.”
사이가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는 뜻이었다.
“그렇구나.”
직원은 깊게 묻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너희 이번 타이틀곡 티저 정말 멋있게 나왔더라.”
“누나들과 팀장님이 신경을 많이 써주신 덕분입니다. 흐.”
잠시 후, MBS K<주말아이돌> 대기실. 네 사람은 다른 샵에서 꽃단장을 받고 온 멤버들과 합류했다.
“…라는 이야기를 샵 누나에게 들었다.”
“시청자들이 민솔이 실력도, 성격도 좋은 것 같다고 호평한 지 오랜데 뭘 새삼스레.”
“민솔이 팬도 많이 생겼잖아. 지난주에 다른 보컬 파트 출연자 살뜰하게 챙기는 모습이 방송에 나간… 뒤로 더.”
유호가 슬쩍 라이언과 차남석의 눈치를 보며 말을 맺었다. 라이언은 박가람이 정민솔의 이름을 꺼냈을 때부터 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라이언이 다른 스태프들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중얼거렸다.
“나 걔 싫어.”
차남석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이미지야 얼마든지 꾸밀 수 있지만, 내면은 절대 안 변하지.”
“그런데 지금 인기로 보면 데뷔까지 갈 것 같던데….”
“놔둬.”
이건우가 핸드폰에다 달력을 띄웠다.
“보여?”
달력 하단은 스케줄을 기재해놓은 빨간색으로 가득했다. 7월은 아예 색이 없는 날을 찾는 게 더 빨랐다.
이건우가 무시무시한 표정을 지었다.
“우린 다음 주 금요일부터 죽었다고 복창해야 해. 다른 사람 신경 쓸 여유도 곧 사라질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