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고양이 난로> 마지막 씬.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고양이가 실내 세트장이 아닌, 한율이 연기하는 ‘윤우’의 집 세트장으로 들어왔다.
본래 이 씬은 윤우의 집 세트를 고스란히 실내 세트장으로 옮겨 촬영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몇 달 동안 ‘못난이’ 역의 제유와 미미가 촬영에 협조를 잘해주어, 세트를 옮기기 전에 촬영해보기로 했다.
“아이, 제유 예쁘다~. 아이, 귀엽다~.”
혹시 몰라 제유와 미미 두 마리를 모두 데려온 부윤방은 제유를 넣은 이동장부터 조심히 들고 왔다. 그리고 제유를 꺼내기 전, 그 앞에 쭈그리고 앉아 제유를 달랬다.
“안심해도 괜찮아. 이 덩치 큰 아저씨들 누군지 다 알지? 딱 한 씬만 찍자. 응?”
앞발로 안쪽으로 넣은, 일명 식빵 굽는 자세로 편히 엎드려 누워있던 제유는 멀뚱멀뚱 부윤방을 쳐다보다가 입을 쩍 벌리며 하품했다. 상당히 편안해 보였으나, 부윤방은 행여 고양이가 촬영 도중 겁먹고 도망치진 않을까, 열린 틈은 없는지 꼼꼼히 살폈다.
“그럼 마지막 씬, 가겠습니다.”
한율은 직접 이동장에서 제유를 꺼냈다. 스태프가 바로 이동장을 들고 방에서 퇴장했다.
먀아.
한율은 짧게 한 마디 하곤 고롱고롱 기분 좋게 우는 제유를 안아 쓰다듬었다. 그러곤 책상 옆에 놓인 방석에다 내려놓았다. 제유가 손길이 아쉬운 듯 금세 다가와 한율의 다리에다 비비적거렸다.
“여기 가만히 있다가 책상 위로 올라와.”
먀아. 대답만 하고선 또 한율에게 애교를 부린다. 스태프들의 입가에 조용히 미소가 걸렸다. 겁먹고 도망치거나 웅크리고 숨는 것과 비교하면 아주 다행스러운 일이었으므로.
“딱 3초만 얌전히.”
한율은 책상 앞 의자에 앉아 부윤방을 한번 보았다. 고개를 끄덕인 후 제유를 방석에다 올려놓고, 아주 빠르게 자세를 잡았다.
“액션.”
순식간에 ‘윤우’로 몰입하는 한율의 모습이 카메라에 기록되었다. 그리고 카메라 밖에서 신호를 기다리던 조연출이, 제유가 책상 위로 올라오도록 천장에 연결한 장난감 낚싯대를 흔들려던 찰나였다. 제유가 폴짝 책상 위로 올라왔다.
먀아.
공부의 방해꾼. 문제집을 풀던 한율은, 귀찮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찡그리며 제유를 들었다. 그리고 품에 안은 채 계속 공부를 이어갔다.
먀아. 제유가 비비적거리다 한율의 무릎 위에 편히 자리를 잡았다. 그러곤 이내 한율의 온기에 취해 스륵 눈을 감는다.
고롱고롱.
“…OK, 컷.”
부윤방이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한 번 더하고, 카메라 위치 바꿀게요.”
한율과 제유는 연이어 같은 씬을 반복 연기했다.
실내 세트장 안에서 배우하고만 남겨져 리모트 컨트롤 촬영을 하는 것도 아니고, 사람들이 잔뜩 모여 이런저런 장비를 들이대는 것에 놀라 겁먹거나 도망치지 않을까 했던 우려가 무색하게.
점점 입이 귀에 걸리던 부윤방은 마지막 컷을 가장 크게 외쳤다.
“컷! 수고하셨습니다!”
“…끝났다!”
“고양이가 놀라니 조용…!”
“수고하셨습니다.”
한율은 평온한 제유를 안은 채 일어났다.
부윤방이 좁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정말 수고 많았어요, 한율 씨. 석 달 안에 끝낼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모두 한율 씨 덕분입니다.”
“아니에요. 제유랑 미미가 잘 도와준 덕분이죠.”
“우리 제유, 이제 한율이 오빠 못 봐서 어떡해? 응?”
부윤방이 한율의 품에 안긴 제유의 머리를 손끝으로 슥슥 쓰다듬었다. 이희우나 이윤영, 강명일 등. 다른 배우들은 며칠 전 일찍이 촬영을 마쳤기에, 오늘 현장에 있는 배우는 한율과 고양이 뿐이었다.
한율은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였다.
“감독님도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3월 26일 크랭크 인하여, 석 달까지 일주일 남기고 크랭크 업.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조유찬은 안에서 스태프들의 활기찬 인사가 들리자 WB래빗에서 준비한 선물을 차에서 꺼냈다.
“정말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약소하지만, 크랭크 업 기념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어이쿠, 뭘 이런 걸 다.”
WB래빗이 준비한 선물은 고양이 미미의 사진을 프린팅한 티셔츠였다. 무언가에 충격을 받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벌린 입 사이로 앙증맞은 송곳니가 살며시 보이는 사진이었다. 아래엔 ‘고양이 난로 대박’이란 캘리그래피와 자그마한 토끼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이거 어디 아까워서 입겠어요?”
“고이 모셔뒀다가, 회식할 때나 시사회 때 입고 가면 되겠네.”
“우리 딸내미가 좋아하겠는데?”
“사이즈도 사람 수에 얼추 맞춰 가져왔으니 편히 고르세요.”
여기에 한율의 첫 영화 크랭크 업을 기념하여 이프림이 준비한 휴대용 선풍기 선물도.
한율도 나와서 선물을 나눠주는 걸 도왔다.
“수고하셨습니다.”
“촬영하는 동안 한율 씨 덕분에 밥도 먹고 간식도 먹고 커피도 마시고 그래서, 이러다 돼지 되는 거 아닌가 호강에 겨운 고민까지 했는데… 끝나는 날까지 이런 선물로 감동을 주고…! 다음에도 같이 일합시다, 서 배우!”
오디오 감독의 입에 발린 유쾌한 칭찬. 한율은 환하게 웃으며 받아주었다.
“감사합니다. 기회가 되면 다음에도 함께 일해요, 감독님.”
촬영은 끝났지만 그렇게 마무리 인사까지 한참.
한율은 마지막으로 부윤방 감독을 위해 특별히 제작된 미미 프린팅 모자를 선물하곤 촬영장을 먼저 떠났다.
“정말 석 달 동안 수고 많았다, 한율아.”
“형도 정말 수고 많으셨어요. 장거리 운전이 보통 피곤한 게 아닌데 매일.”
“하하. 하지만 촬영이 끝났다고 다 끝난 건 아닌 거 알지? 일단 이프림이 선물한 휴대용 선풍기 들고 인증샷 찍어서 SNS에….”
“네에.”
한밤중이라 한율은 실내등을 켰다. 따로 챙긴 휴대용 선풍기를 꺼내 들고, 다른 한 손으론 핸드폰을 들어 셀카를 찰칵. 휴대용 선풍기에 건전지를 넣어 작동시킨 후 바람을 맞는 모습도 찰칵.
[이프림의 응원 덕분에 제 인생 첫 영화 <고양이 난로> 촬영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D #영화고양이난로크랭크업 #본업복귀 #180622]
-이프림이 준 바람맞는 율톢
-아니 차 실내등 조명 맞니 율아ㅜㅜ????? 무슨 화보 사진 올린 줄
-85일 동안 수고했어♡♡♡♡♡
-촬영이 오래 걸리면 활동이랑 겹쳐서 힘들어지지 않을까 걱정 많이 했는데 다행이다♡♡♡
-22일에 만나٩(ˊᗜˋ*)و.¸¸♪
쟤 좀 낯익은데?
영화 촬영은 끝났으나 한율은 학교에 가지 않았다.
샵에 가서 머리 스타일만 다듬고 회사 연습실에서 내내 살았다. 21일이 기자 간담회, 다음 날인 22일이 컴백 쇼케이스였으므로, 다른 멤버들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연습량을 채우기 위해서.
“유찬이 형한테 들어보니까 써한 너, 실내 세트장에 가면 고양이 대기실에서 안무 연습했다면서?”
저녁 시간. 가볍게 씻고 나서 구내식당으로 향할 때 길우성이 물었다. 길우성도 컴백 쇼케이스 준비를 핑계로 학교를 빠졌다.
“시간 아깝잖아.”
“그래서 고양이 앞에서 단독 공연을?! 그나저나 나 좀 궁금한 거 있는데, 비행기 안에서도 안무 연습할 수 있을까?”
“그런 짓 했다간 바로 쫓겨날걸?”
“아니, 영화에서 특수요원들이 타고 다니는 군 전용기? 아무튼 그런 건 중간에 좌석이 없어서 공간이 넉넉하잖아. 이동하는 시간을 활용할 겸, 비행기 안에서 안무 연습을 하는 걸 한번 상상해봤는데, 기체가 흔들리다 추락하지 않을까란 의문이…. 사람이 말하는데 어디 가니, 친구야.”
저녁을 먹는 동안엔 종일 들여다보지 않았던 인터넷을 살폈다. 실검 1위는 어제 데뷔한 아림의 새 걸그룹 [퍼플아워], 2위는 [Pick Me! IDOL]이었다.
팬들이 응원차 실검 총공에 들어갔는지, 3위엔 [민준 시간그림]이 떠 있었다.
한율은 이어폰을 귀에 꽂고, 너튜브에 들어가 민준의 신곡 <시간그림> M/V를 재생했다. 잔잔하면서도 감미로운 발라드였다. M/V 역시 노래와 걸맞게 전체적으로 따뜻한 이미지. 작사가는 민준 본인이었다.
[쉬고 있어, 초조해하던 그 시간을 그려. 미소가 사라지고 찾아온 적막은 Ash gray.]
머리 색도 애쉬 그레이네. 뮤비와 함께 노래를 감상한 한율은 곧바로 SNS에다 해당 M/V 링크를 올렸다.
[민준 선배님의 디지털 싱글 앨범 [시간그림] 발매를 축하하며 :D #시간그림 #노래정말좋아요 #아이스크림케이크그만]
띠링. 한창 3차 평가 무대 연습을 하던 현강희는 짧게 울린 핸드폰을 집었다. 어스래빗의 서한율이 SNS에 새 글을 올렸다는 알림이었다.
‘…정말 친한가 보네.’
8살이란 나이 차에도 불구하고, 블블 민준과 서한율이 친하다는 건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민준이 종종 서한율에게 이런저런 먹거리 기프티콘을 보낸다는 사실도. 그런 까닭인지 민준과 배우 이희우의 열애설이 터졌을 때 두 사람을 연결해준 게 서한율이란 소문도 돌았었다.
‘듣기론 한율 선배님이 잘 알려지지 않았을 때, 캐스팅 소동을 계기로 민준 선배님이 먼저 다가갔다고 하던데….’
혹시 민준은 그때 서한율이 가진 가능성을 알아본 것 아닐까.
‘나도 그렇게 가능성을 인정받고 싶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쉽게 털어놓지 못하는 고충도 나누고, 이렇게 좋은 일이 생기면 공개적으로 응원도 하는 사이가 되면 얼마나 좋을까.
현강희는 한율이 팔로우한 계정을 훑었다. WB래빗이나 어스래빗 공식 SNS, 같은 팀 멤버, 일로 얽힌 드라마 공식 계정이나 광고 모델로 활약 중인 더순한화장품 계정을 제외하면 얼마 되지 않았다.
배우는 이희우, 이제설, 윤상진, 고은훤. 아이돌은 블블 민준, 수재, MOHE의 이해원, 풀썸의 효운, 스타믹스의 지헌, 스카이러너의 용맹이 다였다.
인맥을 자랑하기보다, 정말 자신과 소통하는 이들만 팔로우한 느낌이었다. 오간 메시지나 좋아요를 누른 게시글만 봐도 그랬다.
“뭘 그렇게 멍하니 봐? 연습 안 해?”
이번에 같은 3차 평가팀이 된 정민솔이 옆에 털썩 앉으며 물었다.
“한율 선배님이 새 글을 올리셔서요.”
“아아.”
현강희는 개인 인터뷰에서 롤모델이 어스래빗의 서한율이라고 밝힌 바 있었다. 연기와 가수. 어느 한쪽 일도 소홀히 하지 않고 열심히 노력해 재능을 십분 발휘하는 그처럼 되고 싶다고.
이 인터뷰는 3화 방송에 고스란히 나가, 해당 클립 영상엔 서한율의 팬들이 하트와 응원 댓글을 잔뜩 달기도 했다.
“무슨 글? 어디 봐봐.”
현강희는 별다른 경계심 없이 보여주었다. WB래빗에서 나온진 오래되었지만, WB래빗 연습생들과 무난하게 잘 지내고, 다른 출연자들을 잘 챙기는 정민솔이었기에,
“민준 선배님 신곡 홍보요.”
“…얘도 참 많이 변했다.”
“네?”
서한율의 SNS를 보며 정민솔이 살며시 미소 지었다.
“초반에 떠비 들어왔을 땐 애가 엄청 무뚝뚝해서 좀 걱정했었거든. 방송에 나가면 방긋방긋 예쁘게 잘 웃는데, 뒤에선 조용하니까 괜히 더. 학교에서도 그렇지 않아?”
“아…. 학교엘 자주 안 나오셔서 잘 모르겠어요.”
“나중에 데뷔하고 친해지면 알게 될 거야.”
긍정적인 뉘앙스를 잔뜩 담은 어조와 미소. 현강희도 따라 웃었다.
“그렇게 됐으면 좋겠네요.”
“자, 이제 연습하자. 네 롤모델 만나려면 이번 경연에서도 좋은 성적 내고 위로 올라가야지.”
“네!”
그 모습은 연습실 곳곳에 설치된 관찰 카메라에 고스란히 찍혔다.
* * *
6월 22일. 어스래빗은 컴백 쇼케이스가 열릴 YY 라이브 홀에 입성했다.
강보배가 제 두 팔을 문지르면서 입을 벌렸다.
“여기… 너무 넓은 거 아냐?”
YY 라이브 홀은 작년, 데뷔 쇼케이스를 가졌던 S스퀘어 라이브 홀보다 훨씬 많은 관객을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넓었다. 그리고 오늘 컴백 쇼케이스는 8시 정각, 뮤닷을 통해 실시간으로 방송될 예정.
소리구름어워즈나 RMMA 등 이보다 더 넓은 곳에서 공연한 적도 있었지만, 이 공간이 어스래빗만을 보기 위해 모인 팬들로 가득 채워진다고 생각하니 전율이 흐르는 모양이었다.
강보배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나까짓 게 뭐라고….”
“앗! 그런 생각은 하면 안 돼!”
길우성이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앞뒤로 흔들며 기운을 북돋웠다.
“지구보배 강보배! 보물토끼 강보배!”
“겁은 나중에 먹고, 일단 도와주시는 분들에게 인사부터 하자.”
유호가 강보배와 어깨동무하며 끌고 갔다. 다른 멤버들도 그 뒤를 따라 우르르, 오늘 그들의 컴백 쇼케이스를 위해 모인 공연기획사 관계자와 각종 엔지니어, 보조 스태프, 전문 카메라맨, 뮤닷 측과 YY라이브홀 관계자들이 모인 곳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큰소리로 인사하며 허리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어스래빗입니다!”
“오늘 공연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단독 쇼케이스는 이번이 두 번째. 그러나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쌓인 경험 덕에, 어스래빗 멤버들은 데뷔 쇼케 때처럼 헤매지 않았다.
스태프들이 장비를 점검하는 동안, 멤버들은 대기실과 무대, 퀵 체인지 룸까지의 동선이나 발광 테이프 위치를 확인했다. 무대가 생각보다 넓어, 매니저에게 촬영을 부탁하곤 가볍게 안무를 맞춰본 후 영상을 확인, 안무 대형 거리와 각도를 재점검하기도 했다.
“안녕하십니까, 어스래빗 여러분!”
데뷔 쇼케이스에 이어 오늘 컴백 쇼케이스 MC를 맡기로 한 김태건이 도착했다.
“MC 김태건입니다! 올해도 불러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모일 사람이 다 모이자, 공연기획을 맡은 PD가 외쳤다.
“20분 후 리허설 시작하겠습니다!”
어스래빗이 한창 리허설 중일 때, 건물 밖엔 벌써 어스래빗 컴백 쇼케이스를 보러 온 팬들이 속속 도착하고 있었다.
이아름도 그중 한 명이었다.
스읍, …하. 선선한 공기를 들이마신 이아름은 하늘을 향해 두 팔을 활짝 펼쳤다.
‘왔다아…!’
데뷔 쇼케이스 당시, 9백여 석이 3분 만에 매진되었다.
그로부터 1년하고도 2개월.
어스래빗은 작년 KBC에서 신인상을 받았다. 팬카페 회원 수도 늘어났고, 그린라이브 어스래빗 채널 회원 수도 늘었다. 기사 댓글의 비중도, 커뮤니티 사이트 게시글, SNS 팔로워 역시. 그러니 이번 컴백 쇼케가 아무리 작년보다 더 넓은 곳에서 진행된다 해도, 예매 경쟁률이 치열할 건 불 보듯 뻔한 일.
이아름의 예상은 맞아떨어졌다. 유료 팬클럽 회원을 대상으로 열린 어스래빗 컴백 쇼케이스 선예매는 오픈 1분 만에 전석 매진되었다.
덕질 짬밥 좀 먹었다는 친한 언니의 도움을 받아 미리 피시방에 진을 치고 만반의 준비를 하지 않았다면 어찌 되었을지, 이아름은 상상만 해도 아찔했다.
‘이 추세면 다음 콘서트 예매는 더욱 힘들어지겠지만….’
이아름은 급히 불안해지는 마음을 추슬렀다.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자!’
그리고 집에서 열심히 만든 슬로건을 가방에서 꺼냈다. 펄럭. 슬로건 글자가 여름 햇살에 반짝거렸다.
[지구요정☆율톢☆]
“…어?”
건물에 걸린 대형 포토 현수막이나 팬들이 들고 다니는 포토 배너를 살피던 이희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쟤 좀 낯익은데?”
“누구?”
이희우처럼 커다란 선글라스에 검은색 마스크, 모자를 쓴 민준이 고개를 돌렸다. 이희우가 교복 위에 얇은 반팔 후드티를 걸친 여학생을 가리켰다.
“지구요정 율톢.”
“영화 촬영할 때 가끔 한율이 팬들이 왔었다면서. 그때 본 거 아닐까?”
“아냐. 촬영장에 오지 말란 말 안 듣고 찾아온 애 중에, 저렇게 귀엽게 생긴 애는 없었어.”
이희우는 어디에서 봤더라, 하며 한참 동안 후드 소녀를 살피다가 고개를 돌렸다.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으니.
“일단 MD부스에 가서 네 응원봉부터 사자.”
“응. 그런데 카드 결제도 돼?”
“작년 데뷔 쇼케 땐 됐었어.”
두 사람은 MD부스 앞에 줄을 선 어스래빗 팬들 뒤에 당당히 섰다.
“그런데 좀 신기하다. 영상으론 많이 봤지만, 내가 직접 라이브 홀 앞에 관객들이랑 서 있는 건 처음이야.”
“그나마 우리는 객석이 지정된 2층이라 나은 거야. 1층 스탠딩석은 티켓 발권을 아무리 일찍 받아도 입장 순이나 다름없어서, 좋은 자리 차지하려면 몇 시간 전부터 계속 줄 서 있어야 한대.”
“그런 거 보면 다들 참 대단한 것 같아.”
우리 팬들도 이랬을까. 민준은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동시에, 조심스레 두 사람을 살피던 사람들이 재빠르게 시선을 피했다. 그러곤 낮은 목소리로 일행에게 소곤.
“민준이랑 이희우 맞는 것 같지?”
“어.”
“대박….”
선글라스와 검은색 마스크, 모자로 얼굴을 가린 수상쩍은 커플이 눈에 띄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여기에 무심코 걸친 것 같은 명품 옷이나 신발, 가방. 마지막으로 민준이 쓴 모자 사이로 삐져나온 애쉬 그레이 머리카락이 결정적인 단서였다.
“율토끼가 초대했나 보다.”
“초대는 받았지만 굿즈는 또 따로 사야 하나 봐.”
“기념품 아닐까?”
그러나 그들은 민준과 이희우를 알아보고도 다가가거나 말을 걸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어스래빗 유료 팬클럽에 가입하고, 오픈 1분 만에 매진될 정도로 경쟁률이 치열했던 예매에 성공한 팬들이었다. 그리고 조금 더 좋은 자리에서 어스래빗을 보기 위해 공연 몇 시간 전부터 줄을 설 정도로 열성적인.
새삼 다른 연예인을 보고 흥분할 까닭은 없었다.
‘괜히 아는 척 다가갔다간 배려심 없다고, 율톢 지인에게 민폐 짓을 한 팬이라고 찍힐 테니.’
민준은 어스래빗 팬들이 자신들을 모르는 척 배려해주고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한 채, 들뜬 목소리로 이희우에게 말했다.
“누나, 우리 인증샷 찍을까? 쇼케 끝나고 SNS에 올리고 싶어.”
“굿즈 산 다음에 같이 찍는 게 좋지 않을까?”
“응, 그러자.”
선글라스와 마스크로 가려져 있지만, 행복과 즐거움이 깃든 목소리가 그가 짓고 있는 표정을 상상케 한다. 두 사람 뒤에 서있던 어스래빗 팬은 손에 든 유호의 포토 부채를 보는 척,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팔불출….’
오후 7시, 관객 입장이 시작되었다.
7시 55분, 뮤닷 채널 오른쪽 위에 어스래빗 컴백 쇼케이스 로고와, 방송까지 남은 시간이 실시간으로 떴다.
대기실. 한율은 앨범 재킷을 찍었을 때보다 더 화사하게 꾸며진 거울 속 자신을 살폈다. 푸른색이 감도는 잿빛 눈으로.
“그렇게 안 봐도 예뻐, 한율아.”
“지난번 재킷 촬영 때 꼈던 모델이 맞나 해서요. 너무 부담스럽게 반짝거려서.”
“그래?”
유호가 한율이 낀 컬러렌즈 케이스를 확인했다.
“지난번 거랑 동일 모델인 것 같은데.”
“그래요?”
“5분 전! 이동하겠습니다!”
스태프가 크게 외쳤다. 어스래빗 멤버들은 한율처럼 거울로 제 모습을 점검하곤 둥글게 모였다. 그 곁엔 컴백 쇼케이스 비하인드 영상을 찍는 VJ도 가까이 붙었다.
“드디어 컴백이구나아.”
“크으.”
“여유 갖고 합시다.”
어스래빗 멤버들은 서로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상체를 살며시 굽혔다.
유호가 선창했다.
“어스!”
똑같은 디자인의 반지를 낀 8명의 주먹이 중심으로 모였다.
“래빗!”
“가자!”
어스래빗의 두 번째 EP 앨범 [Invitation card] 컴백 쇼케이스. 오프닝 영상이 흘러나오는 무대 앞엔, 2,500여 개의 응원봉 불빛으로 만들어진 푸른색 물결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Invitation card
오프닝 영상은 달에서 지구로 하강하는 시점으로 시작되었다. 대기권, 아시아. 그리고 지상에 수많은 인공 별을 띄운 대한민국 서울에 도착하는 순간 영상은 암전되고, 잔잔한 파도 소리가 울렸다.
촤아….
어스래빗 팬들이라면 익숙한 [Breaching]의 인트로 트랙. 여기에 새로운 사운드가 이어졌다.
우우웅…, 삐이……. 아주 멀리에서 울리는 뱃고동 같기도 하고, 물속에서 누군가를 부르는 듯이 신비로운 고래의 울음소리.
촤악! …텀벙. 고래가 수면 위로 뛰어 떨어지는 듯한 시원한 물소리. 스스. 잔향이 사라질 때 즈음, 새카만 메인 전광판이 서서히 환해지더니 막 봉투에서 꺼낸 카드 이미지가 떴다.
무대 위. 전광판의 역광을 받는 8명의 실루엣도.
“꺄악…!”
누군가 이른 비명을 질렀다.
사각사각. 부드러우면서도 시원한 필체가 카드에 또렷이 새겨졌다.
[Invitation card]
쿵. 바로 2시간 전인 오후 6시에 공개된 어스래빗 두 번째 EP 앨범 인트로 트랙이 흘러나왔다. 길우성의 실루엣이 자유분방하면서도 결이 아름다운 안무를 시작했다. 제각기 다른 포즈로 조각상처럼 서 있던 멤버들도 차례차례 움직이고, 팬들은 그제야 즐거운 비명과 환호성을 마음껏 질렀다.
이번 어스래빗의 앨범에 수록된 트랙은 10개. 인트로와 아웃트로, 타이틀곡과 후속곡의 inst 버전을 제외해도 6곡이었다.
인트로가 끝난 직후, 어스래빗은 곧바로 후속곡으로 활동할 예정인 <파라솔> 무대를 선보였다.
<파라솔>은 ‘청량의 끝을 보여주겠다!’라고 유호가 작곡가 ‘레몬사이다’와 함께 작심해서 만든 곡으로, 한율과 박가람의 시원하게 뻗는 고음, 중간에 훅 치고 들어오는 차남석의 중저음 목소리와 장난스러운 표정, 그리고 체력을 굉장히 소모하는 빠르고 시원시원한 칼군무가 특징이었다.
‘와….’
2층 객석에서 전광판을 통해 어스래빗의 무대를 보던 민준은 속으로 감탄했다. 시야를 가리는 모자와 선글라스는 쇼케가 시작되자마자 벗었다.
‘이게 타이틀곡이 아니라고? 이렇게 좋은데?’
아이돌 데뷔 7년 차. 이제 웬만한 무대는 도입부만 봐도 ‘뜰’ 노래인지 ‘안 뜰’ 노래인지 딱 감이 왔다. 기획사가 그 곡에 얼마나 정성을 들이고 돈을 쏟아부었는지도.
민준의 눈으로 봤을 때 <파라솔>은 무조건 뜰 노래였다.
보이그룹이 좋은 성적을 내는 노래는 부르는 입장에선 굉장히 빡센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안무도 빡세고 라이브도 빡세고, 그러면서 묘하게 중독성이 있는.
<파라솔>도 이 범주에 속했다. 실력이 받쳐주지 않거나 멤버들 간의 호흡이 안 맞거나 연습이 조금만 부족해도, 바로 무대 자체가 엉망진창이 되는 어려운 곡.
하지만 어스래빗은 여유까지 가지고 아주 날아다니고 있었다. 표정 연기도 굉장히 좋고, 칼군무는 섬세한 각도까지 딱딱 맞았다. 이것만 봐도 그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열심히 연습했는지 알 수 있었다.
‘확신이 들어. 어스래빗이 지금보다 훨씬 더 잘 될 거란 확신이.’
그러나 후배들을 흐뭇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민준의 미소는 이내 쓸쓸하게 변했다.
‘우리도… 저럴 때가 있었는데.’
연습할 땐 아팠던 발목도, 무대에만 오르면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관객들이 있는 무대 자체가 치유의 힘을 가진 거대하고 신비로운 공간이었다. 무대에서 내려오면 바로 다시 통증이 엄습했지만, 그래도 마냥 즐겁고 좋았던 시절.
“…….”
“……?”
공개된 지 2시간밖에 안 된 노래를 따라부르는 팬들을 신기하게 보던 이희우는, 무심코 민준을 보곤 고개를 기울였다. 민준은 무대를 향해 쓸쓸하고 부러움이 가득 담긴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이희우는 이내 민준의 감정을 이해하고 그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블랙블러드는 공식적으로 해체되지 않았다. 그러나 고동 엔터와의 해묵은 감정이나 입대 등의 문제 때문에 최소 몇 년간은 지금의 어스래빗처럼 함께 노래를 부르기 힘들 터.
이희우의 다정한 손길에 민준이 고개를 돌렸다. 마주친 시선. 서로를 향해 빙긋 미소 짓고, 두 사람은 자연스레 손을 잡았다. 그러곤 다시 무대를 바라보며 남은 손으로 토끼 응원봉을 흔들었다.
무대 메인 전광판엔 시원하게 활짝 웃는 한율의 얼굴이 나오고 있었다.
[펼쳐놓고 기다릴게 Paraso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