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7화 (107/427)

* * *

<파라솔> 무대가 끝나자마자 조명은 MC 김태건이 있는 자리를 비췄다. 김태건이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대박이네요.”

스태프들이 무대에 의자 8개를 빠르게 세팅하고 후다닥 사라졌다.

MC가 관객들에게 인사하고 오프닝 영상과 인트로 무대, <파라솔> 무대에 관해 극찬하는 사이, 멤버들은 백스테이지에서 가볍게 땀을 닦고 물을 마시며 잠시 숨을 골랐다. 그리고 스태프의 신호에 따라 발광 테이프를 보며 다시 무대로 나왔다. 꺄아아악! 팬들이 즐거운 비명과 함성으로 그들을 반겼다.

“작년 12월 크리스탈 래빗과 함께 ‘하양 토끼, 까망 토끼’로 곡을 발표하기는 했지만, 어스래빗으로선 7개월 만의 컴백이잖아요. 다들 각자 소감 좀 부탁드릴 수 있을까요?”

각자 인사가 끝난 뒤. 멤버들은 미리 작성해서 리허설에서 했던 대답을 차례대로 하고, 이번 앨범 컨셉과 곡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한 마디로, 앨범 트랙 전부가 같이 놀자는 초대장이네요?”

처음 라이브 홀에 들어왔을 때 바짝 얼어서 긴장했던 강보배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크게 보면 그렇습니다. <파라솔>도 가사를 보면 아시겠지만….”

인터뷰가 끝나고 다음 무대 준비를 위해 퇴장한 사이, 전광판에는 몇 달 전, 멤버들끼리 곡 컨셉을 논의하던 영상이 나왔다.

박가람과 길우성이 카메라에 대고 두 손으로 뺨을 감쌌다.

[역시 여름엔 상큼함이지.]

[우리의 상큼, 크으, 하암.]

라이언은 자신의 노트를 카메라에 들이댔다. 몇 부분은 모자이크 처리되어, 영상 하단에 [※대박 아이디어가 포함되어 있을지 몰라 모자이크했습니다]란 안내 자막도 나왔다.

[힙하면서도 신나면서도 공…간?]

뒤에서 한율이 끼어들었다.

[공감이요.]

[응, 공감할 수 있는 직접적인 가사가 있는 노래 원해요. 딱 듣고, 와, 내 감성! 이런 말 나오는 노래.]

영상 속 어스래빗 멤버들은 기초 메이크업만 한 수수한 모습이었으나, 영상에 집중하는 팬들은 누구도 실망하지 않았다. 평소 멤버들이 라방에서 워낙 자연스러운 모습을 자주 보인 까닭이었다.

이건우가 진지한 얼굴로 의견을 내놓았다.

[우리가 토끼잖아요, 지구 토끼. 그러니 환경을 생각하는 노래도 하나 합시다. 고래도 집어넣어서.]

[갑자기?]

[뭍에 내렸다고 고래 방치하고 우리끼리만 놀고 있잖아.]

[고래가 우리를 육지에다 패대기친 거 아니었어? 좀 내려라, 좀. 이러면서 휙 뒤집어서.]

[아니, 우리 고래가 진짜 그런 고래가 아니잖아….]

[고래 노래 좋다.]

자막.

[그렇게 고래 노래가 탄생하였습니다…☆]

설마 그 곡이 이렇게? 정말? 팬들이 어리둥절하거나 황당한 얼굴로 웃고 있을 때, 정말로 설마 했던 곡명이 떴다. 무대 위 조명도.

하얀색 큐브 모형 의자에 걸터앉은 이건우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랩을 시작했다.

[이걸로 될까 우리의 노력. 시야가 좁아 이만하면 됐어. 자만한 마음 급정거- 뒤집혔던 하늘은 반동이 아닐까, 뒤를 돌아.]

또 다른 조명이 켜졌다. 거대한 회중시계에 손을 얹고 서 있던 라이언이 다음 가사를 이었다.

[가- NO 타임머신. 내 소중한 노력 창고, 그곳으로 널 초대해. 너의 시선을 들려줘.]

이건우와 강보배, 라이언, 길우성. 퍼포먼스&래퍼 담당만 참여한 5번 트랙이었다.

보컬 라인인 한율과 박가람, 유호와 차남석은 그다음 무대를 꾸몄다.

다시 무대 위에 앉은 8명. 컴백 쇼케이스 시작 전, 관객들이 포스트잇에다 적은 질문에 대답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우리 율톢, 한율 군은 영화 촬영으로 바빴잖아요. 대체 연습은 언제 했어요?”

화면에 한율의 얼굴이 크게 잡혔다.

그 시각, 공연장에 직접 오지 못하고 뮤닷을 통해 보고 있던 팬들은 어스래빗 컴백 쇼케이스 전 프로그램 톡창에서 떠들고 있었다. 컴백 쇼케이스는 따로 프로그램 톡창이 개설되지 않은 까닭이었다.

-율톢 렌즈 색 완죤 찰떡♡ 이어커프랑 연결된 피어싱도 너무 예쁘다ㅠㅠㅠㅠ

-곱고 하얀 피부에 흑발, 푸른빛 도는 회색 눈. 율톢 미모 무슨 일이야

-빛 밖에 안 보여 눈부셩ㅜㅜ

-율톢 대체 누구 허락받고 매일 미모 갱신 중인 거야 누구야

-납치하고 싶다

-고양이 대기실에서 연습했댘ㅋㅋㄱㅋㅋ

-스타일리스트 칭찬해

고양이 대기실에서 연습했다는 한율의 대답에, 김태건이 흥미로운 표정으로 추가 질문했다.

“고양이들 반응은 어땠나요?”

“그냥 이런 표정으로 보더라고요.”

한율은 미간을 찡그리며 김태건을 위아래로 슥슥 눈으로 훑었다.

-???: 이 톢이닝겐 혼자 왜 이러는고냥?

-님들 지구톢컴백쇼케 너튜브 뮤닷 채널에서도 실시간 라이브 중이요 TV보다 화질은 좀 구림

-고양이 표정 흉내내는 톢이ㅋㅋㅋ 심지어 리얼해ㅋㅋㅋㅋ

-역시 연기천재ㅋㅋㅋㅋㅋ

-진짜 납치하고 싶다...

-율톢 주머니에 넣어서 가지고 다닐 방법 아시는 분

-너튭은 외국인들이 실챗 점령 중이라 산만해성

다시 비하인드 영상이 시간을 끄는 동안, 멤버들은 백스테이지의 퀵 체인지 룸과 조금 더 떨어진 대기실로 나뉘어 뛰어 들어갔다.

“후아, 정신없다.”

의상을 갈아입는 시간은 길어야 3, 4분 남짓. TV 생방송으로도 나가는 터라 조금이라도 딜레이되면 안 된다는 생각에, 멤버들은 수치도 잊고 옷을 훌렁훌렁 벗었다. 스타일리스트들이 빠른 손길로 옷을 갈아입는 걸 도와주고 헤어메이크업도 점검해주었다.

“이동!”

한율은 마지막으로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재빠르게 훑은 뒤 시치미를 뚝 떼고 퀵 체인지 룸을 나섰다.

10여 분 후엔 똑같은 행위를 반복.

“누나, 인공눈물 어디 있어요?”

“여기. 앉아 봐, 내가 넣어줄게.”

강한 무대 조명 아래에서 오래 낀 탓에, 슬슬 컬러렌즈가 뻑뻑하게 말라 안구를 괴롭히는 느낌이 들었다. 다음 무대의상으로 갈아입은 한율은 의자에 앉아 고개를 젖혔다.

톡, 톡. 스타일리스트가 조심스레 한율의 눈에 인공눈물을 점안해주었다.

“조금 있다가 깜빡여. 지금 바로 질끈 감으면 눈가에 번져.”

“네, 감사합니다.”

한율은 잠시 환한 천장 조명을 보며 생각했다.

‘드디어 타이틀곡.’

비록 타이틀곡이 이번 쇼케 마지막 무대는 아니지만, 정신없이 무대와 백스테이지를 뛰어다녔던 시간이 무사히 지나갔구나 싶었다.

한율은 천천히 젖혔던 고개를 바로 하고 일어났다.

스태프가 외쳤다.

“마지막 곡 갑시다!”

박가람이 어깨를 덩실거리며 깐죽거렸다.

“아닌데용? 스페셜 보너스 무대도 있는데용?”

“어…쨌든 갑시다!”

타이틀곡은 .

제목과 달리 전혀 느리지 않은 곡이었다.

뮤닷에서 방송되던 어스래빗 컴백 쇼케이스는 한 시간 만에 끝났으나, 현장은 TV 시청자들을 향해 작별 인사를 건넨 뒤에도 이어지고 있었다. 뮤닷 너튜브 채널을 통한 생중계도.

예매번호 추첨으로 당첨된 팬들에게 한정판 굿즈 상품을 전달하고, 소원을 들어주는 등의 이벤트가 진행되었다. 숨겨진 하이라이트는, 사전 설문을 통해 강하게 요청받았던 [귀여운 잠옷 입고 노래 부르기].

한율은 옷을 갈아입으면서 생각했다.

‘이건 벌칙 아닌가?’

그러고 무대로 나오다가, 대형 전광판에 크게 잡히는 자신의 모습을 보곤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토끼 귀가 기다랗게 늘어진 새하얀 토끼 후드 잠옷에다, 커다란 당근 베개까지 든 제 모습에.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인지.

한율이 제대로 현타를 맞은 표정으로 웃음을 터뜨리자, 객석의 팬들도 키득거리며 웃었다. 카메라는 아예 그런 한율의 모습을 클로즈업했다.

귀여워! 사랑스럽다 서한율! 놀리는 것 같은 커다란 격려가 객석 여기저기에서 쩌렁 울렸다.

뮤닷 프로그램 톡창에서 너튜브의 뮤닷 채널로 옮긴 팬들도 실챗에다 의성어를 신나게 쳤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율톢 현타 와쎀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우리 애 정말 솔직해서 귀엽구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

-현타율톢 고이 저장

-대한민국의_고3_아이돌_율톢

-우리 상남자 서한율ㅋㅋㅋㅋ 솔직히 싫었을 텐데 그래도 팬들 위해 입어줘서 고맙고 사랑ㅋㅋㅋ햌ㅋㅋㅋㅋㅋㅋㅋㅋ

-율톢 바로 체념하고 방긋 웃어주는 거 봐 졸귘ㅋㅋㅋㅋㅋㅋㅋㅋ

포털사이트 연예뉴스란에는 바로 어제, 어스래빗 두 번째 EP 앨범 기자 간담회에 참석했던 기자들의 기사가 속속 올라왔다.

[어스래빗, 컴백 쇼케이스 성료!]

[‘컴백’ 어스래빗, 신인 가면 벗고 본격적으로 칼날 드러내]

[어스래빗, 미국 K-POP 콘서트 이후 아시아 팬콘 투어 확정]

[어스래빗, 뮤닷에서 신곡 무대 최초 공개]

-님들, 아직 너튜브에서 컴백쇼케 라이브 중임

-애들 미모 다 미쳤다.. 평소 순둥순둥하던 애들이 무대에만 올라가면 돌변해버리는 그 모습에 더 치여..치어..치여..치어냐 치여냐..? 아시는 분?

ㄴ치인다?

-이러면 안 되는데.. 아직 미자 멤버들도 있는데 슬로다운 무대 은근존섹.. 아.. 물러가라 마구니

ㄴ이분은 뭘 본 거지(´-﹏-`;)..?

-한율이랑 퍼플아워 은수랑 사귄다는 소문 사실인가요.

ㄴ아니요.

ㄴ절대ㄴㄴ

ㄴ율톢인 등산 좋아하는 힘쎄고 강한 여성이 이상형입니다. 은수 씨도 예쁘고 사랑스럽지만, 해당 조건엔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ㅇㅇ

ㄴ서한율 홈마 왈, 화장품 스케줄 외에 둘이 따로 만난 적 한 번도 없다네요.

ㄴ네, 답변 감사합니....... 네? ...ㄷㄷㄷ;;;

-파라솔 너무 좋다.. 파라솔 파는 꽹과리를 쳐주세요

ㄴ깨개꽤괘꽤엥과리ㅣ꽤깨개개갱

미국에서 만나겠네

푸른색 토끼 응원봉을 든 수많은 관객을 뒤에 두고, 동물 잠옷을 입은 어스래빗 멤버들도 무대 쪽이 아닌 전광판을 향해 앉았다. 관객들과 함께 사진을 찍기 위함이었다.

중심에 자리한 차남석이 미리 준비된 슬로건을 들었다.

[Invitation card! 어스래빗♡이프림]

“찍습니다! 하나, 둘!”

찰칵! 해당 사진은 어스래빗 공식 SNS 계정에 올라갔다.

“다들 수고했어.”

“수고는 수고고.”

회사로 돌아가는 차 안. 이건우가 굳은 얼굴로 멤버들을 한 명씩 날카롭게 째려보았다.

“오늘 내가 목격한 실수만 여섯 번이다.”

“어흑….”

“역시 매의 눈….”

“이글아이.”

“호크아이지. 매가 영어로 호크니까.”

“그럼 이글은?”

“독수리요.”

“독수리랑 매랑 다른 거야…?”

“바보다! 바보가 나타났다!”

차 안엔 컴백 쇼케이스 비하인드 영상 촬영을 위한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었다. 조수석에 앉아있던 오동식 팀장은 과연 지금 이 바보 같은 장면도 포함해야 할까 심히 고민했다.

‘팬들이 장난삼아 ‘피도 눈물도 없는 카리스마 래퍼’라고 부를 정도로 겉모습은 차가운 이미지인데.’

무대에선 아티스트의 모습을, 아래에선 인간적인 모습을 보이며 친근감을 주는 것도 전략상 좋지만, 너무 멍청하게 보여도 곤란하다.

오 팀장은 조만간 멤버들, 특히 강보배에게 기초적인 상식을 쌓을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입을 열었다.

“2층 영상실에 오늘 찍은 쇼케 영상 준비해놓을 테니, 다들 메이크업 꼼꼼하게 지우고 씻고 나서 보세요.”

“네엡.”

회사에서 씻고, 쇼케이스 모니터링까지 하고 나서 숙소로 돌아왔을 땐 새벽 1시가 다 될 무렵이었다.

“12시간 후에 데리러 올 테니까 다들 푹 자.”

“네, 수고하셨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매니저들은 숙소 안까지 멤버들의 개인 물건을 함께 옮겨준 뒤 떠났다. 멤버들은 각자 물건을 챙겨 방으로 들어갔다.

“다들 안녕히 주무십쇼.”

“잘 자랑.”

“굿나잇.”

한율은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잠옷으로 갈아입고 침대에 누웠다. 어두운 방 안엔 자신이 이불을 잡아당기며 뒤척거리는 소리만 났다. 조용했다.

“…….”

그렇게 가만히 누워있자니 새삼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2,500여 명의 함성 속에 있었는데, 갑자기 홀로 적막 속에 던져진 느낌. 그러나 이 기묘하고도 허전한 느낌은, 이내 몰려오는 수마에 잡혀 천천히 기저로 가라앉았다.

* * *

어스래빗 컴백 쇼케이스 다음 날인 23일. MBS K <주말아이돌> 어스래빗 편이 방송되었다.

[7개월 만에 컴백하면서, 우리 <주말아이돌>에도 7개월 만에 찾아온 대세 중의 대세, 무시무시하게 급성장 중인 지구토끼, 어스래빗!]

이번 어스래빗 신곡 이 흘러나오며 어스래빗이 등장했다.

[안녕하십니까!]

[어스!]

[래빗!]

[인사드립니다!]

최은희는 리모컨으로 TV 볼륨을 높이며 소파에 앉았다. 와옹. 고양이들도 따라 소파 위로 올라와 하나둘 자리를 잡았다. 뒷다리에 보조기를 찬 똑순이는 펫스텝을 밝고 올라와, 최은희의 무릎에 앞발을 얹었다.

“똑순아, 내 아들이지만 참 잘생긴 것 같지 않니?”

대답은 반대편에 앉은 퓨마가 대신했다. 와옹.

[작년엔 공중파에서 신인상도 타고, 대기업 계열사 방송국에서 컴백 쇼케이스도 하고, 우리 프로그램에도 벌써 두 번째 출연이고! 8월부턴 미국, 일본, 대만, 필리핀, 인도네시아, 싱가폴, 홍콩까지 간다면서?]

[지구 토끼답게 글로벌하게 가는 구나, 진짜.]

두 MC의 유난스러운 말에 어스래빗 멤버들은 거들먹거리거나 겸손하게 미소 지었다.

[그런데….]

MC 중 한 명이 미심쩍은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너희가 그렇게 인기가 많아? 난 잘 모르겠던데?]

유호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도 잘 모르겠어요.]

[미국 K-POP 콘서트만 출연 제안을 받은 거고, 다른 곳은 저희가 저희 좀 봐달라고 찾아가는 거라.]

[인지도가 있어서 가는 게 아니라, 인지도를 구하러 가는 거구나?]

[네.]

[그런데 돈은 받을 거 아냐. 내가 확인해보니까 팬콘 티켓값이 장난이 아니던데…?]

장난스럽게 슬슬 건드는 MC들의 질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한율이 태연히 웃으며 대답했다.

[비행기 푯값이랑 인건비, 공연장 대관비, 밥값은 나와야죠.]

[아, 손해 보는 홍보는 안 하겠다? 투자도 아깝다?]

[저희가 제일 싫어하는 말이 열정 페이라서요.]

최은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감을 표했다. 그럼, 아무리 좋아하는 일이라도 정당한 대가는 받아야지.

그때, 티 테이블에 놔둔 핸드폰에서 어스래빗 노래가 흘러나왔다.

“……?”

아들이 나오는 프로그램 본방 사수 중인데 대체 누가. 최은희는 미간을 찡그리며 핸드폰을 집었다.

부친이었다.

“네, 아버지. 어쩐 일이세요? …네, 저야 잘 지내죠. ……네?”

최은희는 부친의 용건을 듣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산에다가 정말로 집을 짓겠다 그랬다고요…?”

-[그래. 그러면서 나보고 괜찮은 회사 알고 있으면 소개해 달라고 하더구나. 너희랑은 얘기된 거냐? 규모를 들어보니 건축비가 꽤 나올 것 같던데.]

최은희는 TV에 나오는 아들을 바라보았다. 여름의 상큼한 표정을 지어달라는 MC의 요청에, 서한율은 두 눈을 다른 강도로 찡그리다 픽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아이돌이 되기 전까진 상상도 못 했던 무뚝뚝한 아들의 변화.

제 배 아파 낳은 자식이지만, 정말 알다가도 모를 아이였다. 어떤 날은 방송에 나와서 스카이다이빙을 하고 싶다고 하질 않나. 물론 그 방송을 보자마자 스카이다이빙만큼은 절대 안 된다고 못 박았지만 말이다.

“으음…. 아는 좋은 곳 있으시죠?”

-[있기야 있지.]

“그럼 율이한테 소개해주세요. 비용은 걱정하지 마시고요.”

-[그래, 영특한 아이니 따로 뭐 생각이 있겠지. 알아보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혼자 있고 싶은 장소가 필요할 수도 있고. 어쨌든, 밥 잘 챙겨 먹어라.]

“네. 들어가세요, 아버지.”

통화를 끊은 뒤 최은희는 다시 TV에 집중했다. 그러나 이내 작게 한숨을 내쉬곤 핸드폰을 들어 아들에게 톡을 보냈다.

[율아, 비밀기지는 얼마나 크게 지을 거야?^^]

회사 구내식당에서 멤버들과 저녁을 먹던 한율은 모친이 보낸 톡에 답장했다. 외조부로부터 연락을 받은 모양이었다.

[지하 1층, 지상 2층 생각하고 있어요. 그리고 올해 생일이 지나면 바로 면허를 따려고 해요.]

한 마디로 몇억이나 드는 건축비와 차 살 돈을 대달라는 뻔뻔한 요구였으나, 모친은 고민할 것도 없다는 듯이 바로 답장을 보냈다.

-[그래^^]

“써한, 어제 민준 선배님이랑 희우 선배님 우리 컴백 쇼케에 오셨다던데, 알고 있었어?”

한율은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당연하지. 내가 초대권 드렸는데.”

“기사로도 떴더라. 커뮤 보니까, 이프림이 두 분 알아보고도 데이트 방해될까 모른 척했다던데.”

“와주셔서 감사하다고 대신 전해드려.”

“네.”

“왜 이때 날 선택했나 했더니….”

핸드폰으로 현재 방송 중인 <주말아이돌>을 보던 강보배가 충격받은 얼굴로 한율을 쳐다보았다.

“제시어가 ‘스릴러영화에서 제일 먼저 희생될 것 같은 멤버’였어…?!”

한율은 태연히 대답했다.

“원래 위험한 상황이 발생하면 높은 확률로, 착하고 용감한 사람이 가장 먼저 희생당한다잖아요. 그래서 처음엔 남석이 형을 선택할까 고민했는데, 아무래도 욱해서 뛰쳐나가는 사람보단 방향치에 길치인 사람이 더 위험할 것 같아서요.”

“아아….”

“왜 바로 납득을 하니, 보배야….”

차남석이 미간을 구겼다. 그의 한손엔 인도네시아어 기초 회화책이 들려 있었다.

“칭찬인지 돌려 까기인지 모르겠다, 서한율?”

“좋은 쪽으로 들으세요.”

박가람이 뚱한 얼굴로 끼어들었다.

“난 착하다는 말이 절대 칭찬이라곤 생각 안 해. 그러니까 돌려 까기다, 차남석아. 물엇!”

“…….”

“이젠 본인도 모자라 동생들끼리 싸움 붙이려고 그러냐?”

“쳇. 이래서 눈치 빠른 이건우는….”

라이언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가람 헛소리하는 거 보니까 컨디션 좋은가 봐.”

“……?!”

“그런데 오늘 3차 경연이라고 하던데. 승준이랑 지욱이 잘하고 있으려나 모르겠다.”

에 나간 연습생은 임승준, 김권, 변지욱. 이 세 명이었으나, 김권은 지난번 중간 순위발표 때 아쉽게 탈락했다.

“지욱인 순위가 높아서 별로 걱정 안 되는데, 승준인 좀 아슬아슬해서.”

“잘하겠죠.”

“출연자가 33명으로 좁혀진데다 이젠 한 사람당 두 명밖에 투표를 못 하니까, 내가 볼 땐 이번 경연으로 순위가 크게 변동될 것 같아. 다들 신중하게 뽑을 테니까.”

한율은 화제로 전환된 멤버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응원 메시지를 달라는 요청이 안 오네.’

몇 달 전, 출연자인 현강희 측에서 한율을 롤모델이라고 언급해도 되겠냐 물었었다. 조유찬은 그게 방송에 나갈 스토리 작업을 도와달란 에두른 부탁이라고 했고.

그리고 실제로 현강희가 한율이 롤모델이라고 말하는 장면이 방송에 나왔다. 현강희의 팬들은 한율의 SNS에 찾아와 그를 응원해주면 안 되겠냐, 같은 학교 후배인데 챙겨주면 안 되겠냐는 댓글을 달았다.

“그런데 픽미돌 프로젝트 그룹, 8월 미국 K-POP 콘서트에 참여한다더라.”

“그 콘서트를 주관하는 게 뮤닷이 있는 FJ그룹이니까. 그리고 해외에서도 픽미돌 보는 사람 엄청 많다더라. 팬도 많고.”

“뽑힌 애들은 진짜 정신없겠다.”

<주말아이돌>이 끝났는지, 강보배가 핸드폰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방송 끝나는 게 다음 달인데, 한 달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준비하고 바로 미국 콘서트라니….”

차남석이 어깨를 으쓱였다.

“어쨌든, 우리랑은 미국에서 만나겠네.”

6월 26일. 어스래빗 멤버들은 오래간만에 <락뮤닷> 대기실 복도를 어슬렁어슬렁 걸었다. 양치와 세수만 하고 나온 수수한 모습으로.

“못 보던 포스터가 많이 늘었네.”

“안녕하십니까.”

마주치는 스태프들에게 인사하며 도착한 공동 대기실. 문 옆에는 익숙한 이름도, 처음 보는 이름도 적혀 있었다.

들어가자마자 처음 보는 보이그룹이 우렁찬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흐아아암…, 넷! 안녕하십니까!”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들어가던 박가람이 화들짝 놀라며 반사적으로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렇게 먼저 도착한 다른 팀과 인사를 나눈 뒤 ‘어스래빗’ 종이가 붙은 칸막이 안으로 들어갔는데,

“오, 왠지 넓다?”

“그러게? 평소보다 화장대가 하나 더 들어왔어.”

작년에 왔을 때보다 더 넓어진 공간이 그들을 반겼다.

이번 컴백 쇼케이스 편성도 뮤닷 측이 먼저 제안했다더니, 대기실 공간까지 넓혀주고. 오늘이 상반기 결산특집이라 큐시트가 빡빡할 텐데도, 컴백 스페셜 무대로 2곡이나 부를 수 있도록 해준 것도 놀라운데 말이다.

멤버들은 어리둥절하면서도 이내 매니저들이 깔아주는 돗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탁탁. 박가람이 길우성을 보며 바닥을 두드렸다.

“아우는 얼른 따뜻한 차를 내오시게, 어서.”

“알겠습니다, 형님. …큰형, 셋째 형이 나 부려 먹어.”

“와, 저거 바로 고자질하는 거 봐.”

“사랑스러운 막내한테 ‘저거’라니! ‘저거’라니!”

새벽부터 기운도 좋다. 한율은 숙소에서 미리 챙긴 따뜻한 레몬 생강차를 꺼내 한 모금 마셨다. 잠겼던 목이 스르륵 풀리는 기분 좋은 느낌이었다.

멤버들에게 따뜻한 차를 한 잔씩 나눠주던 조유찬이 말했다.

“15분 후에 리허설 가자. 한율이랑 남석이는 리허설 끝나면 MC 대기실로 가서 소개 멘트 연습하고.”

“네.”

15분 후. 아아아아. 아푸르르. 멤버들은 가볍게 입과 목을 풀면서 대기실을 나왔다. 그리고 무대로 이동하던 도중, 먼저 드라이리허설을 마치고 나오던 걸그룹과 마주쳤다.

“어….”

멤버들 사이에서 혼자 시무룩해 보이던 진은수의 표정이 한율을 발견하곤 환해졌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복도를 울리는 낭랑한 목소리. 같은 팀 멤버들이 놀라 진은수를 돌아보았다가, 이내 어스래빗을 향해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아름다운 보랏빛으로 물드는 시간, 퍼플아워입니다!”

싸하다

[솔직히 말해.]

“……?”

차남석과 MC 대기실에서 소개 멘트를 연습하고 돌아왔을 때였다. 한율은 의아한 눈으로 길우성을 쳐다보았다. 길우성이 핸드폰 메모 앱에다 쓴 글을 지우고 새롭게 작성했다.

슥.

[광고모델 동료분이랑 썸타냐?]

“전혀.”

길우성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핸드폰을 빠르게 두드렸다.

[그런데 그분 조심해야겠더라. 오해 사기 딱 좋을 삘임ㅇㅇ]

한율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별걱정을 다한다.”

길우성이 느낀 걸 퍼플아워 멤버들이 못 느꼈을 리 없다. 한율과 진은수의 사이를 경계하는 매니저도 있었으니, 지금쯤 태도를 조심하라고 주의받고도 남지 않았을까.

아무리 같은 브랜드 광고모델이라 할지라도 서로 아이돌인데, 불특정 다수의 시선이 미치는 곳에서 너무 반가운 티를 냈다고.

잠시 후, 드라이리허설을 끝내고 인사 순회 시간.

화려하게 단장한 퍼플아워가 어스래빗 대기실 칸막이 앞으로 찾아왔다.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아름다운 보랏빛으로 물드는 시간, 퍼플아워입니다!”

“컴백 축하드립니다, 선배님!”

한율의 예상대로 혼이라도 났는지, 진은수는 시무룩한 얼굴로 가장 맨 뒤로 빠져있었다.

“감사합니다! 퍼플아워, 데뷔 대박 나세요!”

“데뷔 축하드립니다! 여기, 저희 앨범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저희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선배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앨범을 교환하고 작별 인사를 할 때도 진은수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인사하곤 멀어졌다. 조금 전과 달리 한율과 시선을 마주치지도 않았다.

인사와 앨범을 돌리고 대기실로 돌아왔을 때, 길우성이 한율에게 핸드폰을 내밀었다.

[네 동료분, 단단히 주의받으신 듯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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