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화요일 <락뮤닷>에 이어 수요일엔 MBS K <로얄K뮤직>, 목요일엔 SBC 라디오로 나가서 신곡 홍보 활동을 했다. 다음 날인 29일 금요일은 MBS <뮤직센터>.
“이번엔 KBC <뮤직뮤직>…!”
“MBS에서 퇴근하고 4시간 만에 KBC로 출근합니다. 30분이라도 침대에 누워 잘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흐아아암….”
셀캠을 찍는 강보배 옆에서 박가람이 손으로 입을 가리고 하품했다.
“그리고 이렇게 바쁘다는 건 그만큼 저희에게 좋은 기회가, 감사하게도 많이 주어지고 있다는 뜻이니 열심히….”
<뮤직뮤직>도 <락뮤닷>처럼 상반기 결산특집방송이라 출연 팀이 평소보다 많았다. 스페셜 무대도 많고.
하지만 몇몇 팀의 사녹을 본방 하루 전 미리 진행한 <락뮤닷>과 달리, <뮤직뮤직>은 오늘 안에 한꺼번에 해치우겠다는 듯 드라이리허설 시간을 굉장히 일찍 잡았다.
하물며 ‘출근길’까지 있어, 어스래빗은 숙소에서 메이크업을 지우고 씻자마자 30분 수면. 다시 일어나 샵으로 가서 새로 단장을 받았다.
“지구토끼 파이팅!”
KBC 공개홀 ‘출근길’ 코스 시작점. 차에서 내리자마자 시끄러운 셔터 소리를 뚫고 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팬들이 사과패드로 이은 전광판 메시지도 번쩍거렸다.
[컴백축하][♡어스래빗♡][][대박나자!!]
이건우가 그쪽을 향해 두 손을 흔들며 외쳤다.
“감사합니다!”
어스래빗 멤버들은 경호원, 매니저들과 함께 팬들에게 얌전히 손만 흔들며 출근길을 걸었다. 자정이 가까운 컴컴한 시간이라, 섣불리 팬과 거리를 좁혔다가 돌발상황이 발생하면 대처가 늦을 수 있는 까닭이었다.
“이쪽 봐주세요!”
“이쪽이요!”
차카차카차칵.
공개홀 포토존에 도착해 크게 인사하고, 기자들의 요청에 따라 사진 포즈를 취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매니저의 신호에 따라 건물 안으로 입장.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던 멤버들은 금세 멍해진 얼굴로 복도를 걷다가, 마주치는 스태프들에게 다시 반사적으로 미소 지었다.
“안녕하십니까, 어스래빗입니다!”
그들에게 배정된 대기실은 이번에도 단독이었다. 멤버들은 편히 자리를 잡으려다, 퍼뜩 놀란 얼굴로 한율을 돌아보았다.
“뭐지?! 왜 우리 또 단독이야?!”
“너희 아버지가 여기 높은 분이란 거 밝혀졌는데 이렇게 또 단독 대기실 받으면…. 이번엔 정말 특혜받는다고 말 나올 텐데… 괜찮겠어?”
조유찬이 그들을 안심시켰다.
“너희 오늘 <뮤직뮤직>에선 첫 컴백 무대잖아. 그래서 대기실 인터뷰 때문에 단독이 주어진 거니, 안심해도 괜찮아.”
“아, 대기실 인터뷰 있었지.”
“휴….”
멤버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소파에 풀썩 앉았다.
그 시각, 스타믹스 대기실.
“얘네 M/V, 벌써 너튜브 조회수 장난 아닌데?”
“누구?”
“어스래빗.”
에이플이 지헌에게 핸드폰을 보여주었다. ‘출근길’을 위해 일부러 샵에 들렀다 온 다른 팀들과 달리, 그들은 모자에 마스크를 눌러쓴 민낯이었다.
지헌은 렌즈를 닦기 위해 벗었던 커다란 뿔테 안경을 도로 썼다.
“오.”
너튜브 조회수를 본 지헌의 입가가 올라갔다.
‘컴백 일주일 만에 이 성적이면… 괜찮은데?’
영상엔 ‘처음 보는 K-POP 보이그룹인데 미래가 기대된다’라는 해외 네티즌들의 댓글이 적잖이 달려있었다. 추천 영상 리스트엔 [어스래빗 ‘Slow down’ M/V를 본 외국인 리액션]이나, [2017 소리구름 어스래빗 한율 레전드 짤 외국인 반응] 영상도 있었다.
이렇게 해외 네티즌들이 반응한다는 건 그 자체로 좋은 신호.
지헌은 자신의 핸드폰을 꺼냈다. 너튜브의 어스래빗 이번 신곡 M/V 조회수를 캡처해, 서한율에게 보냈다.
[너희 이번 앨범, 대박 조짐이 보인다ㅎㅎ]
“이것 봐요, 유지헌 씨.”
“응?”
에이플이 지헌을 못마땅하게 쳐다보았다.
“팀 동생들보다 드라마 동생을 더 챙기는 거 아냐? 이러면 섭섭해.”
“다 큰 놈들이 뭐가 예쁘다고 챙겨. 징그럽기나 하지.”
“걔도 내년이면 스무 살이던데?”
“그리고 넌 스물여섯 살이 되겠지. 아, 징그러워.”
“형도 내년이면 스물일곱이거든?”
스트레칭을 하던 JE는 유치하게 말씨름하는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벽에 붙은 큐시트를 보며 미간을 찡그렸다.
오늘 어스래빗 대기실 인터뷰가 잡혀있었다.
‘역시, 그 다람쥐 같은 놈이 말한 거겠지?’
JE는 몇 달 전, 에이플 주연의 웹드라마 촬영장에서 만난 어스래빗의 박가람을 떠올렸다.
당시, 촬영장에 있는 ‘무언가’를 박가람도 함께 본 것 같아 이렇게 물었었다.
『난 서한율 보면 소름 돋고 섬뜩한 기분 들던데, 넌 괜찮냐?』
박가람은 불쾌하기 그지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선배님 촉이 똥촉인가 봐요.』
그리고 며칠 전 <락뮤닷>에서 어스래빗이 컴백했다며 앨범을 들고 인사하러 찾아왔을 때, 박가람은 당시의 대화를 깡그리 잊은 듯 태연하게 인사를 건넸다. 그러나 자신을 바라보는 서한율의 시선. 그 안엔 영문 모를 호기심이 깃들어 있었다.
‘박가람에게 그런 말을 들었다면 호기심보단 불쾌감이 들어야 정상 아닌가? 나라면 그럴 것 같은데.’
몇 시간 후. JE는 함께 <뮤직뮤직> MC를 맡는 아이허니의 유린, 방송 장비를 든 스태프들과 어스래빗 대기실을 찾았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십니까!”
30분 전 사녹을 마친 어스래빗은 여전히 무대의상을 착용한 상태였다. JE는 서한율과 시선이 마주친 순간 먼저 눈을 피했다.
‘진짜 싸하네.’
그러면서 박가람을 힐끗했다.
저 녀석이랑 나랑 비슷한 체질인 것 같은데, 이렇게 받는 느낌이 다를 수 있나?
조연출이 지시를 내렸다.
“MC들이 들어온 상태에서 진행될 거예요. 리허설부터 갈게요.”
“네.”
JE는 큐카드를 빠르게 훑곤, 카메라에 다 들어오도록 모인 어스래빗 앞에 유린과 나란히 섰다. 활짝 웃으며 큰 목소리로 인사.
“안녕하세요, JE!”
“유린입니다!”
“오늘 저희가 찾아온 대기실 주인공은!”
“7개월 만에 으로 컴백한!”
“어스!”
JE는 옆으로 성큼 비켜섰다. 유린은 반대로.
“래빗!”
“와아아…!”
짝짝짝. 두 사람의 박수를 받으며 어스래빗이 등장. 메인에 서 있던 차남석이 손구호와 함께 선창했다.
“어스!”
“래빗!”
“인사드립니다!”
JE는 사적인 감상이나 곤두서는 신경을 잠시 억누르고, 서글서글 웃으며 멘트를 쳤다.
“작년 이곳, KBC에서 신인상을 받은 우리 어스래빗 여러분들, 7개월 만에 한층 더 성숙한 모습으로 컴백하셨잖아요. 이번 타이틀곡 에 관한 소개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그 사이 마이크를 건네받은 서한율이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네, 이번 신곡 은….”
멤버들끼리도 미리 대기실 인터뷰를 연습했는지, 리허설에 이어 본 촬영도 무난히 진행되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어스래빗 멤버들과 유린이 밝은 목소리로 인사를 나눴다. JE도 그들에게 고개를 까딱거렸다.
“…수고하셨습니다.”
어스래빗이 갓 데뷔했던 작년엔 서한율의 싸한 느낌이 싫어 건성으로 대했었지만, 이젠 그렇게 무시해선 안 된다. 어스래빗은 ‘뜨는 그룹’의 전철을 순조롭게 밟고 있으므로.
“선배님.”
막 몸을 돌려 다른 스태프들과 어스래빗 대기실 나가려는데, 서한율이 그를 불렀다.
“……?”
대답 없이 멀뚱히 쳐다보자 서한율이 예의 바른 태도로 말을 건넸다.
“1위 후보 오르신 거 축하드립니다.”
“축하드립니다.”
다른 어스래빗 멤버들도 JE에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
그 순간, JE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찡그렸다. 그러나 이내 짧게 숨을 들이마시며 입가를 올렸다. 그들 눈에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곤 어쩔 수 없이 웃어주는 것으로 보일 터다.
“…네, 감사합니다.”
JE는 빠른 걸음으로 어스래빗 대기실을 나왔다.
대기실 복도에 부착된 거울. 얼굴이 파랗게 질린 JE의 모습이 빠르게 스쳤다.
‘와, 씨발…. 방금 서한율한테 보였던 거 대체 뭐였지?’
대기실 인터뷰가 끝나고, 대기실엔 어스래빗과 어스래빗 관계자들만 남았다. 라이언이 닫힌 문을 보며 꿍얼거렸다.
“JE 이상해.”
이건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감을 표했다.
“JE 선배님은 왜 뮤뮤에서만 만나면 우리에게 마음의 상처를 주는 걸까. 그것이 알고 싶다.”
“V12 멤버한테 들었는데, 같은 소속사 후배들한테도 까칠하다더라. 너무 마음 쓰지 마.”
한율은 조금 전 JE가 자신, 정확히는 자신의 뒤쪽을 보고 미간을 찡그렸던 순간을 떠올렸다.
‘정말 나한테서 뭔가 느껴지거나 보이는 건가?’
본인에게 직접 묻고 싶지만, 조금 전 반응을 보아하니 한 공간에 오래 있기도 싫은 눈치.
킁킁. 박가람이 한율에게 다가와 냄새를 맡았다.
“……?”
“으음…. 화장품이랑 향수 냄새밖에 안 느껴지는데.”
박가람도 조금 전 JE의 태도를 보고, 그가 유독 어스래빗을 차갑게 대하는 이유가 한율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 모양이었다.
“후각이랑 ‘그런 느낌’은 다르지 않아요?”
“가끔 냄새로도 조금 쎄~한 그런 게 나는 경우도 있거든. 안 되겠다, 서한율. 너 나랑 어디 좀 같이 가자.”
“어디요?”
박가람이 한율과 어깨동무를 하며 사람들이 없는 구석으로 이끌었다.
“우리 엄마가 아는 용한 보살님이 계시는데, 네 존재보단 약발은 한참 떨어져도 가끔 괜찮은 부적을 써주시거든? 그분한테 너 좀 봐달라고….”
“둘이 구석에서 뭐 해? 무슨 얘기해?”
불쑥. 길우성이 둘 사이에 끼어들며 물었다. 박가람은 길우성을 한참 떨어진 소파로 데려가 앉힌 후, 다시 한율에게 돌아왔다.
“이번 활동 끝나고 일본 가기 전에 한번 들….”
불쑥.
“무슨 얘기하냐고오.”
벌떡 일어나 뒤따라온 길우성이 물었다. 박가람은 이번엔 길우성을 대기실 밖으로 밀어내 문을 닫았다. 그러곤 문에 몸을 기댄 채 말을 이었다.
“그분이 오로지 예약 손님만 받거든? 네가 가겠다고 하면 엄마한테 대신 연락해달라고 할게.”
그들 근처에 조용히 앉아있던 차남석이 미간을 찡그렸다.
“전에 간다고 했던 신년운세 얘기하는 거야? 바로 내일부터 7월인데?”
“뭐여, 차남석. 너 언제부터 거기에 있었어.”
“아까부터 쭉.”
쿵쿵. 밖에서 길우성이 문을 두드렸다.
“문 열어라, 박다람. 싸우자.”
빨리 고맙다고 하란 말이다
<뮤직뮤직> 스케줄을 끝내고 곧장 SBC 방송국으로 이동 중.
멍하니 차창 밖을 보던 강보배가 문득 이야기를 꺼냈다.
“난 딱히 우리 휴식기 동안 변한 게 없는 것 같은데, 컴백하니까 뭔가 많이 변한 것 같아.”
“먼저 인사하러 오는 후배들이 늘었다?”
길우성의 말에 강보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도 있고, 스태프들 태도도 조금 살가워졌다고 해야 하나? KBC만이 아니라 다른 방송국도. 그리고 작년엔 무대 순서도 거의 앞이었고 엔딩 무대 땐 맨 뒤에 섰었는데, 이젠 중간에 가깝잖아.”
“단순히 데뷔 2년 차라고 더 나은 취급을 해주는 건 아니야.”
“응?”
차남석이 귀에 꽂고 있던 이어폰을 뺐다.
“우리야 그냥 하던 대로 연습하고, 너도 하던 대로 자작곡 만들고 그러면서 시간이 지난 것 같지만, 그 시간에도 우리가 내놓은 결과물을 보고 관심을 두는 사람이 늘어난 거지. 너튜브 반응이나 우리 그라 팬클럽 회원 수처럼. 방송국에선 그걸 가능성이라 보고 그만큼 대우해주는 거고.”
박가람이 흐뭇하고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한 마디로 거저 얻은 대우가 아니니까 이상하게 여기지 말고, 보배 넌 네게 멋진 외모와 재능을 물려주신 부모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렴.”
“형의 진가를 일찍 알아보고 연락한 대표님과.”
“같은 팀 멤버인 우리에게도.”
박가람과 길우성의 장단에 강보배는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 응.”
“빨리 고맙다고 하란 말이다.”
“어?”
“넌 아까부터 뭘 그렇게 그리냐?”
그들에게 뭐라 말하려다가 한숨과 내쉰 차남석이 한율을 보았다. 한율은 실내등을 켜고 사과패드에다 끼적거리고 있었다.
“건축 평면도요.”
“평면도? 설마… 비밀기지?”
“네.”
“…너도 참 대단하다.”
그러면서 차남석은 한율이 사과펜으로 슥슥 그리는 평면도를 물끄러미 구경했다.
“평범한 집 구조 같진 않은데?”
“지층 도면이에요. 지하 주차장이랑 1층 사이.”
“숨겨진 지하실 느낌?”
“주차장과 1층을 연결할 거라 그 정돈 아니고… 멀티룸을 만들려고요. 정말 이대로 가능한지는 전문가의 의견을 들어봐야겠지만.”
사실 지하 공간 정돈 자신의 힘으로 만들 수도 있지만, 웬만하면 건축 기술의 힘을 빌리고 싶다. 완성된 건물에 보호 마법만 깔끔하게 새기면 될 테니.
한율은 대충 구상한 평면도를 저장한 뒤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SBC 앞. 차량 차단기 앞엔 자신들처럼 <뮤직뮤직>에서 퇴근하고 곧장 이곳으로 온 아이돌그룹의 밴이 줄줄이 서 있었다.
SBC 는 다름 음방보다 방송 시간이 이른 까닭에 드라이리허설도, 사녹 시간도 일렀다. 그래서 자다 깨는 걸 반복하며 드라이리허설을 하고, 사녹을 진행한 후에야 숙소로 돌아갔다. 그리고 생방송 시작 두 시간 전에 다시 출근.
방송이 끝난 뒤엔 PD와 스태프들에게 인사를 하는 데에 한 시간 넘게 소요. 퇴근하고선 두 번째 EP 앨범 발매기념 1차 팬 사인회 장소로 이동했다.
유호가 멤버들을 다독거렸다.
“조금만 더 버티자, 얘들아. 휴일이 코 앞이다.”
“나랑 써한은 내일 학교 가야 하는 데영.”
“한참 활동 기간이니 수업 시간에 졸아도 용서하실 거야.”
“여론은 용서하지 않겠지만.”
“이건우 밉다.”
그렇게 1차 팬 사인회를 마친 다음 날. 쉴 틈 없이 이어지던 일정 사이의 공란인 7월 2일 월요일.
한율은 두 달 만에 등교했다.
“너 나 기억하냐?”
반갑게 인사하는 아이들 사이에서 한 남학생이 물었다. 한율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황성연이잖아.”
“한두 달에 어쩌다 한번 등교하니 우리 얼굴 까먹었을까 봐. 고맙다, 기억해줘서.”
싱겁게 왜 이러냐 받아치기엔 황성연은 상태가 조금 이상해 보였다. 농담을 던진 입은 웃고 있지만 전체적으로 주눅이 든 느낌.
점심시간. 정자에 앉아 식후 커피를 마실 때 길우성이 조용히 말했다.
“성연이네 소속사, 폐업 절차 밟고 있다더라.”
“폐업?”
“응. 회사 자금 사정이 많이 안 좋은가 봐. 새 앨범은 고사하고, 직원들 월급이나 샵에 내야 하는 대금도 잔뜩 밀렸대. 최소한 성연이네 팀만이라도 거둬줄 다른 기획사 알아보려고 대표가 여기저기 발로 뛰었는데… 그것도 힘들 것 같다고.”
대중의 관심을 받지 못한 다수의 아이돌이 절절하게 겪게 되는 냉혹한 현실은 다름 아닌 돈 문제. 정산은 고사하고, 소속사 폐업도 아주 드문 일이 아니었다.
“자존심 세우지 말고 이라도 나가야 했다고 후회하더라. 연습생들 사이에 껴서 재데뷔를 노린다며 초반에 욕먹었던 선배님들도, 지금은 새롭게 보인다고 인기 엄청 많아졌잖아. 그걸 보니 더 속이 쓰린가 봐.”
길우성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얘기 들으니까 성연이 앞에선 행동 조심하게 되더라. 피곤하다고 조는 것도 눈치 보게 되고.”
“눈 뜨고 잤으면서 무슨 소리야.”
“어이, 친구. 그건 내 몸이 피로를 견디지 못하고 잠깐 의식을 날려 보낸 거야. 결코 내 의지가 아니었다고.”
“애초에 황성연네 회사가 그렇게 된 게 네 잘못도 아닌데 왜 눈치를 봐.”
“그렇긴 한데…. 약 올리는 것 같잖아.”
길우성은 목 뒤를 긁적이다가 딸기우유 빨대를 덥석 물었다. 한율은 커피를 마시다 높디높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학교가 아니라 높은 산에 올라 정상에서 선선한 바람을 맞았으면 어땠을까, 하는 바람이 들 정도로 좋은 날씨였다.
한율은 핸드폰을 꺼냈다.
“뭘 검색하는….”
한율이 핸드폰으로 검색하는 걸 훔쳐본 길우성이 질린 표정을 지었다.
“뉴욕 인근 등산….”
“8월 스케줄이 띄엄띄엄 있잖아. 그쪽 가는 김에 근처 둘러보고 오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어서.”
길우성이 정색했다.
“난 안 가.”
“데려갈 생각도 없었어.”
* * *
7월 3일. 어스래빗 숙소 거실과 한율의 방에 카메라가 설치되었다. tv Mu의 아이돌 관찰 예능 <바다의 백조> 촬영이었다.
새벽 4시. 핸드폰 알람 소리를 듣고 일어난 한율은 멍하니 눈을 끔뻑거리다, 간밤에 방에 카메라가 설치된 걸 떠올렸다. 그리고 렌즈가 없는 방향으로 몸을 굴린 채 기지개를 켜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괜히 수락했나.’
후속으로 방영될 새 프로그램이라 예습은 못 했다. 1, 2화에 누가 나오는 지도 듣지 못해 조언을 구하지도 못했고.
‘모르겠다. 재미없으면 알아서 편집하겠지.’
한율은 평소처럼 발코니로 나가 창을 열고, 허브 화분 앞에 쭈그리고 앉아 허브를 살폈다. 물이 필요한 허브엔 분무기로 칙칙.
방에 딸린 화장실 겸 욕실엔 다행히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지 않아, 드레스룸에서 미리 갈아입을 옷을 챙기고 욕실로 들어가 샤워. 말끔해진 한율은 핸드폰을 챙겨 거실로 나왔다.
“와, 이거 사람 움직이면 같이 움직여.”
거실에선 멤버들이 곳곳에 설치된 <바다의 백조> 카메라에다 얼굴을 들이대고 있었다.
“안뇽, 안뇽?”
“안녕하세요. 어스래빗의 리더이자 맏형, 유호라고 합니다. 한율이 집에 얹혀살고 있습니다.”
“우리 숙소, 이사하고 나서 <바다의 백조>에서 최초 공개하는 거네?”
“그런가? 오오.”
“하뉼, 굿모닝.”
“네, 굿모닝요.”
한율은 라이언과 아침 인사를 나누고 주방으로 향했다. 냉장고에서 모친이 보낸 레몬 생강청을 꺼내, 텀블러에다 적당량을 덜었다. 그러고 정수기 온수를 담는 동안엔 짧게 스트레칭.
“다음 주에 나갈 영어 극장 누가 하기로 했지?”
“보배랑 서한율.”
“간만에 한율이 텍사스 사투리 듣는 건가.”
“난 쟤 미국 콘서트 가서 멘트하는 거 엄청 기대 돼. 텍사스 근처도 안 가본 토종 한국인의 텍사스 사투리. 과연 미국분들은 어떤 반응을 보이실까.”
“크크큭.”
방송에 나갈 분량을 뽑아주기 위해 대신 애써주는 멤버들의 대화를 들으며, 한율은 어느새 온수가 채워진 텀블러를 챙겼다.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는 카메라가 붙었지만, 한율은 평소와 다름없는 하루를 보냈다. 되레 주변이 부산스러웠다.
tv Mu가 뮤닷과 같은 FJ그룹 계열사라 촬영 승낙을 쉽게 받았는지, <바다의 백조> PD와 VJ는 <락뮤닷> 대기실 안까지 무난히 따라 들어왔다. 카메라가 들어오자, 미리 연락을 받은 같은 대기실 사용 팀들이 괜히 어스래빗 근처를 알짱거렸다.
인사와 말을 몇 마디 더 건네고, 용건을 만들어서 찾아오고.
“방송국 예능 찍는다고 그래서 와봤어.”
스타믹스의 지헌은 아예 솔직히 말했다.
“안녕하세요. 예전에 tv Mu 드라마 <별☆일없는 집>에서 잠깐 한율이 형이었던, 스타믹스의 지헌입니다. 한율이는 무뚝뚝하지만 다정한 동생이었어요. 제가 특별히, 한율이랑 나눈 초코톡 대화를 공개해드리겠습니다.”
명색이 관찰 예능인데 이렇게 대놓고 아는 척해도 괜찮은 건가. 잠깐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PD의 입가가 빙긋 올라가는 걸 보니 괜찮은 모양이었다.
“한율아아.”
<락뮤닷>의 MC를 맡는 스카이러너의 용맹도 놀러 왔다.
“와, 바다의 백조! 안녕하세요.”
<바다의 백조> 카메라는 드라이리허설과 모니터링, 팬들이 방청하는 사전녹화 현장까지 찍었다. 대기실에서 밥을 먹거나 학교 숙제하는 모습, 선잠을 자는 모습도.
아이돌이란 게 무대에서만 화려하지, 실상은 이렇게 심심한데 과연 방송에 나가도 괜찮은 걸까.
이쯤 되면 한율에게 방송에 나갈 특별한 모습이라도 보이라고 요구할 법도 하건만, PD는 묵묵했다.
“수고하셨습니다.”
그래도 <바다의 백조> 카메라가 있어서 좋은 점 하나. 방송이 끝나 PD와 스태프들에게 인사하기 위해 조정실 앞 복도에 길게 대기하지 않고, 바로 퇴근해도 된다는 것이었다.
“배고프다.”
“저녁 뭐 먹을까?”
“막내들은 뭐 먹고 싶어?”
한율은 핸드폰을 들여보면서 대답했다. WB래빗 직원, 계약 트레이너, 아티스트, 연습생 등등. 관계자라면 초코톡 친구 추가를 해놓은 사람. 바로 WB래빗 구내식당 영양사의 상태 메시지를 보며.
“오늘 구내식당 저녁 메뉴 불고기래요.”
“유찬 형님! 회사로 갑시다!”
“우리 회사 불고기는 꼭 먹어줘야지.”
“뒤 차에도 연락하자.”
그제야 온종일 묵묵히 따라다니던 <바다의 백조> PD가 다른 행동을 취했다.
부스럭. 짬이 날 때 미리 적어둔 것일까. 그가 주머니에서 꺼내 펼친 종이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미국 K-POP 콘서트 자연스럽게 언급 부탁]
다음 날 수요일. 포털사이트 실검은 온통 로 도배되었다. 바로 어젯밤에 마지막 순위 발표식이 있었던 까닭이었다. 그동안 미공개되었던 비하인드 에피소드도 잔뜩.
“승준이랑 지욱이 둘 다 22위 안에 들어서 다행이다.”
“벌써 다음 주가 마지막 화라니. 시간 참 빠르다.”
“프로젝트 그룹 인원으로 몇 명 뽑는다고 했지?”
“열 명.”
“이제 한 명씩밖에 투표 못 하는데. 누구 뽑아?”
MBS K <로얄K뮤직> 대기실. 멤버들은 핸드폰을 들고 고민에 빠졌다.
“승준이가 17위…. 지욱이가 5위….”
“난 승준이. 지욱이는 안정권인 것 같아서.”
“아냐, 그래도 신중해야 해. 내 최애는 순위가 높으니까 무조건 될 거야, 그러니 아슬아슬한 차애를 고른다! 사람들이 죄다 이렇게 생각하고 차애를 고르면 어떡해?”
“에이, 설마 그런 일이 일어나겠어?”
“설마가 사람 잡는다잖아.”
한율은 임승준과 변지욱의 3차 경연 영상을 한 번씩 본 후, 조금 더 잘한 사람에게 투표했다.
“얘들아, 리허설 가자.”
“네에.”
<로얄K뮤직> 무대가 있는 스튜디오. 어스래빗 멤버들은 그 앞에서 스타믹스와 만났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하이.”
“안녕~.”
박가람은 같은 웹드라마에 출연했던 에이플과 말없이 손만 슥 들어 인사했다. 지헌이 한율에게 물었다.
“어제 찍은 <바다의 백조>는 언제 방송되는 거야?”
“31일이요.”
“꼭 본방 사수할게.”
“슬슬 들어가자.”
스타믹스 다음이 어스래빗 순서라, 어스래빗 멤버들도 따라 스튜디오 안으로 들어갔다.
그 순간이었다.
“……?!”
흠칫. 내내 말이 없던 JE가 갑자기 어깨를 떨며 무대 위 천장 조명을 올려다보았다. 그러곤 가슴팍을 꾹 누르며 나지막하게 중얼.
“씨발, 갑자기 뭐야….”
그 모습을 본 박가람이 낮은 웃음을 흘렸다.
“흐.”
대체 뭘 본 거야?
“아침에 대체 뭘 본 거예요?”
드라이리허설과 사녹 사이, 붕 뜬 대기 시간. 한율은 자판기 음료수를 뽑으러 간다는 핑계로 박가람과 함께 나왔다.
“너 여기 무대 천장 조명에 귀신 하나 매달려있다는 소문 알지? 너랑 같은 반 친구가 말해줬다면서.”
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작년, 황성연이 말해주었다.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이 이곳 스튜디오에서 무대를 하다가 고개를 든 순간, 천장 조명에 매달린 귀신과 눈이 마주쳤다고.
“형이랑 길우성이 그거 가지고 호 형 놀렸다가 혼났었잖아요.”
“그런데 난 한 번도 그걸 본 적이 없거든? 일부러 보려고도 안 했고.”
자판기 근처엔 아무도 없었다. 박가람이 자판기에다 천 원짜리 지폐 두 장을 연달아 넣었다.
“그런데 조금 전에 스타믹스랑 같이 스튜디오에 들어갔을 때, JE 선배님이 천장 보면서 놀랐을 때 처음으로 봤다?”
“그 조명 귀신이요?”
“어. 많이 흐릿하기는 했는데, 매달려있다가 너 보곤 비명 지르는 것처럼 입 쩍 벌리면서 사라지더라. 그걸 JE 선배님도 본 거지. 그러니 이제 깨닫지 않았을까?”
털컹. 박가람이 버튼을 누르자 캔 음료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본인 촉이 정말 똥촉이었다는 걸. 잡것들이 무서워서 도망가는 인간 부적을 두고, 어? 소름 돋는다느니 섬뜩하다느니 말했으니 얼마나 쪽팔리겠냐?”
“아. 그래서 못생긴 얼굴로 웃었던 거예요?”
“…….”
박가람은 말없이 생글생글 웃다가 지폐 반환 버튼을 눌렀다.
“네 거 안 사줘.”
“괜찮아요. 저도 돈 가지고 왔어요.”
“얄밉다! 너무 얄밉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