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9화 (109/427)

* * *

‘대체 그 녀석 정체가 뭐지? 왠지 귀신이 그 녀석 보고 비명 지르며 도망친 것 같았는데.’

스타믹스 숙소. JE는 <로얄K뮤직> 스케줄을 마치고 들어오자마자 개인 노트북을 펼쳤다. 인터넷에서 [서한율]을 검색하니 기본 프로필과 어스래빗 활동 인터넷 기사가 주르륵 떴다.

JE는 검색어를 달리했다. [서한율 귀신].

서한율이 작년, SBC <객귀, 해>와 <목톡톡> 납량특집 편으로 출연했던 당시의 기사가 떴다. 너무나 많은 양에 한숨을 푹 내쉬며 페이지를 넘기는데, 문득 한 블로그 게시글이 눈에 들어왔다.

[박가람은 정말 귀신을 목격하고 서한율에게?]

그린라이브 어스래빗 채널의 자체 영상 콘텐츠 리뷰였다.

작년, 일본 귀신의 집에서 촬영했던 모양. 어스래빗 팬의 호들갑스러운 리뷰를 훑던 JE는 그린라이브에 접속해 직접 해당 영상을 찾았다.

어스래빗 멤버들이 귀신의 집에 차례로 입장하는 장면부터 재생.

‘겁이 전혀 없네.’

앞서 무서워서 비명을 지르고 달렸던 이건우나 길우성과 달리, 서한율은 들어가자마자 차분하게 주변을 살피고, 귀신 역을 맡은 직원들에게 태연히 인사를 건네기까지 했다.

그다음은 박가람.

[으아아아! …한율아, 한율아, 한율아!]

귀신 분장을 한 직원이 유일하게 없다는 계단. 그곳에서 무언가를 보고 놀라 도망치며, 박가람은 서한율을 애타게 찾았다.

[서한유울!!]

탁. JE는 박가람이 서한율을 붙잡고 안도하듯 주저앉는 장면에서 일시 정지 버튼을 눌렀다.

“…하아.”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제야 왜 박가람이 자신에게 ‘똥촉’이라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귀신이 서한율을 보고 놀라 도망친 것 같단 느낌은 진짜였다. 서한율은 인간 부적이었다. 그리고 근처에만 있으면 꼴 보기 싫은 것들이 알아서 도망쳐주니, 박가람 입장에선 참 고마운 존재였을 터.

‘그래도 찝찝하단 말이지.’

박가람에게 한 번 더 서한율에게서 섬뜩하거나 소름 돋는 느낌을 받은 적 없냐고 물어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너도 서한율 배후에 붙어있는 ‘그걸’ 본 적 있냐고.

‘하지만 은근히 속이 좁아서 제대로 대답해 줄 것 같진 않고…. 아니면 서한율한테 직접…은 내가 싫다.’

JE는 노트북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지헌의 방으로 찾아갔다.

“형. …자?”

지헌의 방은 컴컴했다. 에어컨을 미약하게 틀어놓은 채 얇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자던 지헌이 꿈틀거렸다.

“어….”

“핸드폰 좀 봐도 돼?”

“안 돼….”

잔다면서 대답은 잘하네.

“그럼 서한율 폰 번호 좀 알려줘.”

“왜….”

“물어볼 게 있어서.”

스윽. 그제야 지헌이 뒤집어썼던 이불을 내리며 JE를 보았다. 의심이 짙게 깔린 눈초리. 평소 JE가 서한율을 그리 좋게 보지 않았던 까닭이었다.

“뭔데.”

“걔한테 내가 오해하고 있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아서, 직접 대화를 나눠보고 풀려고.”

“…….”

“진짜야.”

직접 만나 묻기는 싫다. 하지만 어스래빗의 인지도가 쌓이는 추세를 보면 앞으로 방송에서 오며 가며 더 자주 마주칠 텐데, 그때마다 꺼림칙하다고 피했다간 나중에 뒷말이 돌지도 모른다. 이 찝찝함을 계속 안고 싶지도 않고.

“혼자 눈빛이 싸하다느니 어쩌니 하면서 멀쩡한 애를 이상하게 볼 땐 언제고.”

지헌이 한숨을 푹 내쉬며 부스스 일어났다.

“번호 알려줄 테니까, 한율이한테 사과해.”

“알았어.”

“…….”

“거참. 나 못 믿어?”

지헌은 한 번 더 JE를 의심스럽게 쳐다보다가 베개 옆에 둔 핸드폰을 집었다.

어스래빗 숙소. 말끔하게 씻고 나온 한율은 핸드폰에 들어온 부재중 통화 1건과 초코톡 메시지를 보았다.

-[나 스타믹스 JE이다. 한가할 때 연락plz]

한율은 편한 옷을 입고, 따뜻한 차를 한 잔 타오고 나서야 JE에게 답장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무슨 일이세요?]

-[내일 라디오 스케줄 밖에 안 잡혔지? 시간 되면 나 좀 보자.]

공홈에 올라간 스케줄을 확인한 모양. 한율도 그가 자신에게서 무얼 봤는지, 그의 시선이 궁금하던 차였기에 긍정적인 답변을 보냈다.

[내일 오후 4시에서 6시 사이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장소 정하고 연락할게.]

[네.]

다음 날. 어스래빗은 샵에 들러 가볍게 헤어메이크업을 받고 MBS 라디오 방송국으로 향했다. 미리 연습한 대로 멘트를 하고, 곡을 소개하고 시청자들의 사연을 읽었다.

-얘네 진짜 딕션 좋다ㅜㅜ

-오늘도 존잘톢이 목소리에 치이고

-남석! 꽁지머리 언제까지 할 거양

-박가람 아줌마 연기 찰떡 무엇

보이는 라디오에다 생방송이라 중간중간 사소한 실수는 있었지만, 문제가 될 정돈 아니었다. 마지막으론 라이브로 노래를 한 곡 부르고 퇴장.

“수고하셨습니다.”

라디오 스튜디오를 나서며 한율은 핸드폰을 확인했다. JE로부터 톡이 들어왔다.

-[4시 30분, 여기.]

톡에는 지도가 첨부되어 있었다. MBS 라디오 방송국과 그리 멀지 않은 곳. 지금이 4시이니 딱 적당했다.

“형, 저 약속 있어서 따로 갈게요.”

“누구랑? 어디에서? 무슨 약속?”

스케줄이 끝나 사적인 시간까지 일일이 보고해야 할 의무는 없으나, 한율은 솔직히 대답했다.

“이 근처에서 JE 선배님이랑 잠깐 만나기로 했어요.”

“JE? 스타믹스?”

딱히 친한 것 같지 않던 사람의 이름이 나오자 조유찬을 비롯해 어스래빗 멤버들도 의아한 반응을 보였다.

“내일 <뮤직센터>에서 만날 텐데 왜 굳이 오늘 따로?”

한율은 어깨를 으쓱였다. 박가람이 슬쩍 다가와 속닥거렸다.

“네 효험을 확인해보려나 보다.”

“효험이라뇨. 내가 진짜 부적도 아니고.”

“7시 단체 안무연습 전까진 들어와.”

한율은 유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

JE가 만나자고 한 곳은 여러 가게가 들어선 골목길의 아담한 건물 2층이었다. 간판 대신, 모자를 쓰고 회중시계를 든 토끼 그림이 그려진 [시계토끼] 상호 스티커만 문에 작게 붙어있었다. 아는 사람만 찾아올 수 있는 가게인 걸까.

“안녕하세요.”

“네, 어서오세요.”

멋들어진 턱수염과 눈썹과 귀의 피어싱. 문신이 살며시 드러나는 반소매 티셔츠를 걸친 남자가 한율을 맞이했다.

“지은인 아직 안 왔어요.”

사장인지 직원인지는 모르겠지만, 사전에 JE에게 연락을 받은 모양.

“차라도 한 잔 드릴까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가게 좀 둘러봐도 될까요?”

“네, 그럼요.”

한율은 가게 안에 진열된 상품을 훑었다.

‘상호는 [시계토끼]인데, 모자 전문 편집숍이네.’

가게 안은 다양한 브랜드의 모자가 디자인 별로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특이하게 생긴 모자도 많았다.

한율은 마음에 드는 디자인의 모자를 집었다. 거울엔 이런 안내 문구가 붙어있었다.

[시착 시, 메이크업을 하신 분은 캡가드를 사용해주세요!]

한율은 남자에게 캡가드를 받아 마음에 드는 모자를 착용해보며 JE를 기다렸다. 10여 분 후, JE가 약속한 4시 30분에 딱 맞춰 가게로 들어왔다.

“사장님, 3층에서 잠깐 얘기 좀 나눌게요.”

“그래.”

사장이었구나. 한율은 그에게 고개를 꾸벅이곤 JE를 따라 내부 계단을 올랐다. 사장은 기꺼이 웃으며 작게 손을 흔들었다. 카운터에는 한율이 산 모자가 겹겹이 쌓여 포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3층은 높이가 낮고, 지붕의 경사면을 따라 한쪽이 기울여진 모양새였다. 그래도 180cm에 가까운 남자 둘이 서 있기엔 적당했다. 유호가 온다면 천장에 머리가 닿지 않을까, 조금 구부정하게 걸어야 할지도.

발코니 옆 창가에 놓인 테이블. JE가 테이크아웃용 커피 캐리어를 내려놓았다.

“내가 왜 보자고 했는지, 짐작 가는 이유 있어?”

“대충은요. 가람이 형에게 들었거든요.”

“미안하다.”

JE가 자리에 앉아 캐리어에서 음료를 꺼냈다.

“너랑 따로 말 한마디 나눠본 적도 없는데 소름 끼친다느니 섬뜩하다느니 지껄여서. 지헌이 형한테 들어보니까 너 커피 진하게 마신다면서? 이거 마셔.”

“감사합니다.”

한율은 그가 내민 커피를 받아 뚜껑을 열었다. 시커먼 아메리카노에서 따뜻한 김이 솔솔 올라왔다. 바깥 날씨는 한여름이라 후덥지근했지만, 내부는 에어컨 바람으로 시원했기에 딱 좋았다.

“빙빙 돌려 말하는 건 성미에 맞지도 않고, 피차 바쁘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물을게.”

JE도 음료 뚜껑을 열었다. 초콜릿 시럽과 새하얀 크림이 잔뜩 뿌려진 커피였다.

“너 혹시 귀신 보냐?”

“아니요. 한 번도 본 적 없는데요.”

“전혀?”

“네.”

“그럼 혹시 이상한 얘기는 들은 적 없어? 네 뒤에 뭐가 보인다든가, 기가 세다든가.”

한율은 JE에게, 자신도 최근에서야 박가람을 통해 귀신들이 저를 보고 도망치듯 사라진다는 걸 알게 되었다고 솔직히 얘기했다.

“그럼… 박가람도 너한테서 뭐가 보인다든가 하는 그런 얘긴 없었단 거네?”

“네.”

“혹시 무속인이나 영험한 스님을 만난 적은 없냐?”

“있겠어요?”

“하긴.”

JE는 빨대로 커피를 마시며 생각에 잠겼다. 한율은 천천히 커피를 한 모금 마신 후 JE에게 물었다.

“선배님도 뭐 자주 보시나 봐요. 저한테 일부러 연락해서 확인까지 할 정도면.”

“유명한 만화의 캐릭터처럼 사람 보듯 잘 보는 건 아냐. 좀… 한이 강하게 서린 그런 것만, 아주 피곤할 때 가끔 보이는 정도?”

“그런 게 저한테서 보인다는 거죠?”

“보인다곤 한 적 없는데.”

“빙빙 돌려 말하는 건 성미에 안 맞는다면서요.”

JE는 한율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기분 나쁘진 않냐? 너한테 이상한 게 달라붙었다고 말하는데.”

“그 이상한 게 뭔지 궁금해서요. 섬뜩하고, 소름이 끼치는 게 나한테 붙어있는데, 정작 나는 모른다는 게 의아하기도… 하고?”

한율은 저도 모르게 미소 지으며 뒷말을 올렸다. 반면 JE는 더욱 질색하는 표정으로 한율을 쳐다봤지만.

“선배님이 말하는 그것 때문에 귀신들이 절 보고 도망치는 것일지도 모르잖아요. 저야 사는 데에 별 지장이 없으니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인 것 같기는 하지만.”

“나도 지금은 안 보여. 여전히 너한테서 소름 끼치고 섬뜩한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

JE가 가방에서 사과패드와 사과펜을 꺼냈다. 그러곤 그림 앱에다 거침없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동그라미 머리와 선으로 죽죽 표현하는 팔다리.

‘엄청 못 그리네.’

심지어 ‘너’란 짧은 단어 하나를 쓴 것도 악필이었다.

곧 JE가 사과패드를 내밀었다.

“이게 지난 주 <뮤직뮤직> 대기실 인터뷰 마치고 너한테서 잠깐 보였던 거야.”

‘너’라고 화살표로 표시한 막대기 인간. 그 뒤엔 활활 타오르는 듯한 거대하고 시커먼 불덩이가 그려져 있었다. 비뚜름하게 나란히 있는 한 쌍의 눈동자 비슷한 것도.

“이 도마뱀 눈 같은 것에서 일렁거리던 파란색 안광이 굉장히 소름 끼쳤어.”

도마뱀.

“…….”

사과패드 속 그림을 들여다보던 한율의 입가가 살며시 올라갔다.

뭔가 이상한 느낌이

“오해는 잘 풀었어?”

“…….”

막 숙소로 돌아온 JE를 향해 지헌이 물었다. 대답하려고 입을 열었던 JE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도로 닫았다. 그리고 거실을 가로질러 방으로 들어가기 직전에야 지헌을 돌아보았다.

“걔 진짜 느낌 이상해. 같이 놀지 마.”

“뭐?”

“그렇다고.”

탁. JE는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같이 놀지 말라니…. 초등학생이냐.”

황당한 표정으로 중얼거린 지헌은 서한율에게 톡을 보냈다.

[혹시 오늘 지은이가 너한테 실수한 거 없어?]

곧 답변이 왔다.

-[전혀요. 선배님 덕분에 오늘 좋은 가게를 알게 됐습니다. :)]

[어디에서 만났는데?]

-[‘시계토끼’라는 모자가게요.]

[거기 사장님이 인상이 좀 험상궂긴 해도 좋은 분임ㅇㅇ 손지은한테 사과는 받았어?]

-[^^]

뭘까. 서한율의 반응을 보면 별문제 없었던 것 같은데.

의아해하던 지헌은 ‘또 손지은 나름의 촉 문제겠지’라고 생각하며 답장을 보냈다.

[ㅇㅇ내일 음방에서 보자.]

-[네.]

다음 날 MBS <뮤직센터>. 1위는 다른 음방에서처럼 스타믹스가 차지했다.

“1위 축하드려요.”

“1위 축하합니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엔딩 무대에서도 짤막하게 인사를 건넸지만, 가수들은 조정실 앞 복도에 모였을 때 다시 스타믹스 멤버들에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 어스래빗 멤버들 역시.

“1위 축하드립니다, 선배님.”

JE와 한율의 시선이 마주쳤다. 지헌과 박가람이 약속이나 한 듯이 눈동자만 굴려 두 사람을 살폈다.

JE가 입가를 올리며 화답했다.

“고마워. 너희도 20위권 진입 축하해.”

“감사합니다.”

잠시 후, 어스래빗 대기실. 퇴근 준비를 하는데 길우성이 이상한 얼굴로 다가왔다.

“뭐냐, 서한율?”

“뭐가.”

“조금 전 JE 선배님한테 축하한다고 말했을 때, 왠지 선배님을 보는 네 눈에서 친근감이 슬쩍 보였거든? 언제 그렇게 친해진 거야? 어제?”

“사람들이 많은 자리니까 살갑게 굴었던 거지. 네 착각이야.”

그러나 길우성은 한율을 바라보는 눈에서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아닌 것 같은데. 평소, 네 가식적인 연기를 다 아는….”

“…….”

“또, 또 눈으로 욕하지!”

“저기 굴러다니는 네 노트나 챙겨.”

“앗! 내 숙제!”

한율도 불편한 무대의상을 갈아입고 소지품을 챙겼다. 어제 JE와 헤어지기 전에 있었던 일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혹시 곤란한 게 붙어서 떨어질 생각을 안 하면 절 부르셔도 괜찮습니다. 제 눈엔 안 보이지만, 도움이 된다면야.』

『괜찮아. 이제 와 뭘 새삼.』

『그럼 조심히 들어가세요, 선배님. 그리고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한율은 JE에게 악수를 청했다. JE는 꺼림칙한 느낌을 감추지 않고 머뭇거리다가 한율의 손을 잡았다. 그러곤 이내 화들짝 놀라며 손을 뗐다.

『뭐야?』

『네?』

『방금, 뭔가 이상한 느낌이….』

한율은 시치미를 뚝 떼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JE는 뭐라 말하려다가 ‘이놈한테 붙은 그것 때문인가’라는 미심쩍은 얼굴로 한숨 쉬었다.

『…아니다. 그럼 내일 보자.』

한율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네.』

JE가 자신에게서 보고 느낀 건 수많은 영혼이 뒤엉킨 마력의 구심점. 그래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시험 삼아 마력을 흘려보냈더니, JE의 체내에 깃든 마나가 꿈틀거리며 활기차게 반응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아주 미약하기는 했지만.’

그건 마법사가 갖춰야 할 아주 기본적인 소질이었다.

마나에 불순물이 잔뜩 섞인 지구지만, 그래도 마법사의 소질을 갖춘 이가 전혀 없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이 소질은 가지고만 있다고 아무 일도 생기지 않는다. 누군가 마나를 인식하도록 이끌어주고 가르쳐주지 않는 이상, 평범한 인간이라면 절대.

그렇기에 지구엔 마법이 없다.

이런 소질을 지닌 지구인 자체도 드물겠지만, 한율처럼 의도적으로 마력을 흘려보내 소질의 유무를 확인하고, 마나를 깨우치게 돕고 마력을 정제해 사용할 수 있도록 가르쳐줄 스승이 없었으므로.

‘JE는 내게 붙은 ‘그걸’ 알아보며 가능성을 내비쳤지만, 이 같은 경우는 상당히 이례적이겠지. 영적인 존재에 민감하면서 마법사로서의 소질까지 갖추고 있어서 보게 된 걸 테니.’

물론 한율과 같은 마법사가 이끌어주지 않는 한 지금 상태론 있으나 마나 한 소질이지만, 그래도 아주 조금은 반갑고,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자신에게 깃든 본래 세상의 흔적.

그걸 알아봐 주었다는 것에.

* * *

7월 10일. 어스래빗은 후속곡 <파라솔>을 들고 뮤닷의 <락뮤닷>을 찾았다. 새벽부터 모인 어스래빗 팬덤은 팬 매니저가 나눠준 응원법을 열심히 외우다, WB래빗에서 나눠준 포토 부채와 미스트에 환하게 웃었다.

“어스!”

“래빗! 인사드립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아침 사녹 시간. 여름과 잘 어울리는 하얗거나 밝은 톤의 남친룩 의상을 입은 어스래빗 멤버들이 무대 위로 올라왔다.

꺄아아악! 예쁘다! 잘생겼다! 파라솔 대박 나자아!

팬들의 반가운 환호성에 맞춰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흔들.

최근 음방 무대는 손이 많이 가고 제작비도 적잖이 드는 세트보단, 전광판과 조명을 심플하게 활용하는 추세였다. <파라솔> 무대도 푸른 해변을 연상케 하는 영상을 전광판에 띄우고, 그 앞에 진짜 파라솔과 알록달록한 튜브, 선글라스를 낀 토끼 인형이 앉아있는 작은 선베드만 가져다 놓았다.

조정실에 앉은 강정진 PD가 마이크에다 대고 지시를 내렸다.

“가겠습니다. 3, 2, …1.”

음악이 시작되었다. 랩 라인 멤버들이 긍정적이고 밝은 에너지를 뿌리며 신나게 포문을 열고, 좌우에서 대기하고 있던 보컬 포지션 멤버들이 뛰어 들어와 어울렸다. 그 와중에도 하나씩 맞아떨어지는 박자와 칼군무. 파트 순서에 따라 카메라 앞으로 튀어나오는데도 흐름은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도 그렇고, 이 노래도 무대 구성이 좋은데?’

무엇보다 노래가 신났다. 질러줘야 하는 데서 시원하게 잘 질러주어 맥이 끊기지도 않았다. 멤버들의 표정 연기도 시선을 끌어당겼다. 그런 까닭인지 <파라솔>의 <락뮤닷> 차트 최초 진입 순위는 작년, 비슷한 청량 컨셉이었던 보다 더 높았다.

그사이 쌓인 인기도 한몫했겠지만.

강정진PD는 2주 전, 어스래빗의 컴백 스페셜 무대를 봤을 때도 똑같은 감상을 떠올렸다는 걸 잊고 마이크에다 말했다.

“10분 후에 한 번 더 갈게요.”

그날 저녁. 어스래빗은 예상치 못한 선물을 받았다.

“어? 우리 왜 실검에 올라가 있지?”

포털사이트 실검에 [어스래빗 민준희우]가 올라와 있었다. 바로 아래엔 [민준희우 안무커버영상].

“대박….”

블블 민준과 이희우가 SNS에 어스래빗 <파라솔>의 커버 안무 동영상을 올렸다.

평소 인간적인 모습이라곤 SNS의 거침없는 입담밖에 없던 이희우가, 아이돌인 남자친구와 함께 아이돌 커버 안무 영상을 찍다니. 이는 그 자체만으로도 사람들의 관심을 끌 만했다.

[…누나, 이 부분에선 발 각도랑 팔꿈치는 이렇게.]

커버 안무 뒤엔, 민준이 이희우에게 춤을 가르쳐주던 모습을 촬영한 비하인드 영상까지.

-커..커플...아.. 커플... 아.. 달달.. 어.. 당분과다 섭취..사망...

-조심스럽게 만지는 손길이랑 쳐다보는 눈길에서 느껴지는 스윗함에 부러워 디짐 ㅇ<-<

-누구 노래 커버에요?

ㄴ어스래빗 <파라솔>이란 곡입니다. :)

ㄴ두 사람과 친한 서한율이 있는 어스래빗 신곡입니당ㅎ

-춤 언뜻 쉬워 보이는데, 막상 따라 추려면 뭔가 발이랑 이런저런 각도 세밀하게 맞추느라 졸라 바쁨ㅋㅋㅋㅋ

-이희우가 SNS에서 밝히기를, 이거 찍으려고 저번 달부터 두 시간씩 연습했다고 함요ㅋㅋㅋㅋ

-희우 언니 너무 예뻐ㅜㅜ

-커플끼리 이러기 있냐

-부러워 미치겠다

-예쁘게 잘 사귀네요ㅎㅎ

민준이 SNS에다 커버 안무 영상을 올린 덕분인지, 오늘 최초 공개한 <파라솔> M/V 조회수가 올라가는 속도도 심상치 않았다. 댓글에서도 민준의 팬이라며, 원곡이 궁금해 찾아왔다는 해외 네티즌들이 종종 보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선배님. 희우 선배님에게도 대신 고맙다고 전해주세요.”

한율은 곧바로 민준에게 전화를 걸어 감사를 표했다. 민준이 소리 내어 웃었다.

-[하하. 팬 미팅 때 잘 봐달라는 뇌물인데.]

“네…?”

그러나 몇 시간 후 11일 새벽. 해당 실검은 10위 권 밖으로 자연스레 밀려났다. 바로 첫 방송부터 폭발적인 반응과 인기를 끌었던 뮤닷의 이 종영된 까닭이었다.

생방송으로 마지막 무대를 선보이고 투표를 받아 최종 10위안에 든 참가자들의 이름이 실검 11위까지 차지했다. 실검 1위는 이들의 프로젝트 그룹명인 [One-Zero].

“네가 롤모델이라고 했던 후배도 원제로 멤버 됐던데. 따로 축하 인사라도 보내는 게 좋지 않아?”

MBS K <로얄K뮤직> 스케줄을 위해 이동하는 차 안. 원제로에 관한 인터넷 기사를 보던 길우성이 물었다. 기사엔 원제로 멤버 10명의 사진이 모두 실려있었는데, 낯익은 얼굴이 절반이었다. 조금 전 길우성이 말한 현강희, WB래빗 연습생인 변지욱과 임승준, 워크라이의 유지, 그리고 정민솔.

“번거롭게 뭘. 어차피 다음 달에 미국에서 만날 텐데.”

“하긴. 그나저나….”

길우성이 핸드폰을 든 채 쭈욱 기지개 켰다.

“고양이이 보고오 싶다아아.”

늘어지는 목소리로 내뱉는 고양이 타령.

“갑자기?”

“갑자기라니! 단순히 겉으로 표현하지 않았을 뿐, 여건만 된다면 항상 모시고 다니고 싶을 정도로 고양이는 지구 최강의 귀여운 생명체라고! 그런 의미에서 내일 너희 집 놀러 가도 되냐?”

“나도.”

자는 줄 알았던 강보배가 웃으며 끼어들었다.

“똑순이네 보고 싶어. 우리 내일은 스케줄도 없잖아.”

똑순이와 새끼의 근황은 모친으로부터 받은 사진이나 동영상을 SNS에 올리며 종종 전하고 있었다. 그러나 간혹 길우성이나 강보배는 이제 똑순이네를 살피지 않는 거냐는 가시 섞인 댓글이 올라왔다. 구조한 고양이를 홍보용 도구로 사용한 거 아니냐는 의심, 혹은 그러길 바라는 악의가 엿보이는 댓글이었다.

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한테 여쭤보고요.”

다음 날.

“안녕하세요, 어머님!”

“안녕하십니까!”

“다녀왔습니다.”

“어서 와, 얘들아.”

집에 도착하자 모친이 반갑게 그들을 맞이했다. 모친은 몇 달 만에 직접 얼굴을 보는 한율을 가볍게 안았다.

“우리 아들, 어째 키가 조금 더 큰 것 같은데?”

“안타깝게도 그대로예요.”

“어머, 그래? 너무 바빠서 그런가 보다. 엄마가 보내준 홍삼은 잘 챙겨 먹고 있지? 너희들도?”

“네!”

“감사히 잘 먹고 있습니다!”

깨끗하게 손을 씻고 나선 고양이들과 놀았다. 매일 게슴츠레하게 눈을 뜨고 방석에서 졸고 있던 똑순이도, 이번엔 쭈욱 기지개를 켜면서 나와 그들을 알은체했다.

와오옹.

“한율아.”

이른 저녁을 준비하던 모친이 조용히 한율을 손짓하며 불렀다. 한율은 쥐 인형이 매달린 낚싯대를 내려놓고 주방으로 갔다.

“네.”

“건축사분이 한율이 널 만나 구체적으로 어떤 집을 짓고 싶은지 듣고 싶다고 하시던데, 언제가 괜찮아? 그리고 짓기 전에 한율이 너도 직접 땅을 둘러봐야 하잖아.”

한율은 핸드폰으로 스케줄을 확인했다. 이번 앨범 활동은 22일 종료될 예정. 그러나 26일이 방학식이고 28일엔 일본 잡지에 실릴 화보 촬영, 29일은 민준의 일본 팬 미팅 게스트로 나가기로 했다.

“30일 오후나… 31일이 괜찮을 것 같아요.”

“그럼 그렇게 전달할게. 그리고 미팅엔 너희 외삼촌도 참석할 거야. 그런 자리엔 어른도 함께 나가서 얘기를 들어봐야 하니까.”

그 말을 하는 모친의 얼굴엔 당신이 나가지 못해 미안하다는 감정이 드러났으나, 한율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네.”

“참, 갖고 싶은 차는 있어?”

“아직 고르는 중이에요.”

“그래, 결정하면 엄마한테 알려줘. 올해 생일선물은 그걸로 할게.”

“감사합니다.”

꼭 가봐야겠다

[간만에 고양이들과 뒹굴뒹굴했더니 교복 바지가 온통 고양이 털로 뒤덮였습니다ㅎㅎ #써한네집 #지구최강귀여운생물체고양이 #똑순이무릎꾹꾹이]

-이 사진이 지구 최강 귀여운 생물체들이 만났다는 그 유명한 회담 사진인가요

-우성이 교복 바지 어쩔ㅋㅋㅋㅋㅋ

-바쁜 와중에 학교도 가고 고양이도 보러 가고ㅎㅎ 참 부지런한 톢이들♡

-고먐미 꾹꾹이..ㅜㅜ... 나만없어 고먐미..

-고양이 보는 보배 눈에서 꿀 떨어진다♡

-호랑잌ㅋㅋㅋㅋ 앞발로 우성이 얼굴 밀어내는 거 왤케 웃기짘ㅋㅋㅋ

-<뮤직센터> 8위 축하해!!!!! ♡♡♡♡파라솔♡♡♡♡

MBS <뮤직센터> 스케줄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는 차 안. 본인 SNS에 달린 댓글을 확인하던 길우성이 바보 같은 웃음을 흘렸다.

“헤헷…. 8위… 헤헷. 한 자리…. 흐.”

블블 민준과 이희우의 지원 사격 덕분인지, <파라솔>은 지금까지 활동한 곡 중 가장 좋은 반응을 얻고 있었다. 팬들도 <파라솔> 활동을 최소 일주일 더 연장해야 한다고 성화를 부릴 정도.

“막내야, 그렇게 좋냐?”

“당연한 말씀을!”

“그나저나 우성아, 너 그 댓글 봤어? 네 개인 너튜브에 달린 거.”

“무슨 댓글이영?”

유호가 길우성의 너튜브로 들어가 영어로 적힌 한 댓글을 보여주었다. 한율은 고개만 슥 기울이며 훔쳐봤다.

-[안녕, 우성. 9년 전의 널 보고 춤을 배우기 시작한 제이슨이야. 이번에 네가 뉴욕 K-POP 콘서트에서 공연한다는 소식을 듣고, 널 직접 만나고 싶은 마음에 2년 치 용돈을 당겨서 VVIP 티켓을 구했어. 굉장히 비싸더라, 하하. 하지만 나에게 충격과 용기를 준, 머나먼 나라의 널 만날 기회라고 생각하니 값진 경험이 될 것 같아. 음, 난 검정과 파랑이 섞인 뉴욕 닉스(내가 응원하는 농구팀이야!) 모자를 쓰고 갈 거야. 부디 이 메시지가 네게 닿기를 바란다. :)]

길우성은 멍하니 긴 영어 댓글을 보다가 번역하기를 톡 눌렀다. 그러나 이해하기 힘든 문장으로 번역되어, 유호가 대신 길우성에게 번역해서 알려주었다.

“오, 오오…! 검정과 파랑이 섞인 뉴욕 닉스 모자….”

탄성을 지른 길우성은 자신의 핸드폰에다 제이슨의 단서를 기록했다.

“그런데 티켓 한 장이 2년 치 용돈이라니…. 그렇게 비싸?”

“VVIP면 한화로 2백만 원 정도 될걸?”

“히익!”

“제이슨이라는 이 친구, 미니 팬미팅에서라도 너랑 꼭 만나고 싶었나 보다. K-POP 콘서트 미니 팬미팅이 VVIP 티켓을 끊어야 입장할 수 있잖아.”

“지, 지금이라도 메시지를 보내서 비싼 티켓 취소하고 따로 만나자고 하면….”

“안 돼. 절대 안 돼.”

운전석의 조유찬이 단호히 말했다.

“미국이 얼마나 위험한 나란데 호의적인 댓글 하나만 보고 따로 연락해서 만나려고 그래? 순진한 널 꾀려는 수작이면 어쩌려고.”

“에이, 설…마요….”

“보이스피싱 피해자들도 ‘설마’ 하면서 몇천만 원 뜯기고 그래. 죽마고우한테 보증 서준 사람들도 뒤통수 맞고 길바닥에 나앉는 세상이라고.”

“…….”

길우성이 시무룩한 얼굴로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뒷좌석에서 박가람이 야유를 보냈다.

“우우. 감동 파괴자. 우우.”

조유찬은 입을 꾹 다물고 더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마음 약해져서 따로 만나주기 시작하면, 사심을 품은 다른 사람들도 그런 식으로 접근해서 결국엔 한도 끝도 없어져. 그리고 본래 아는 사이였다면 몰라도, 다른 누구도 아닌 공연 출연자가 따로 만나줄 테니 취소하라고 한 게 알려지면 나중에 문제 안 될 것 같냐?”

한율의 말을 멍하니 듣던 길우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될 것 같네영….”

“그럼 아는 사람은 만나도 돼?”

라이언이 손을 들어 질문했다.

“티켓도 없을 거야.”

“아는 사람 누구? 친구?”

“고모 아들.”

조유찬이 대답했다.

“가족이면 당연히 만나도 되지. 그런데 가족들 워싱턴에 있다고 하지 않았어? 직접 워싱턴까지 가려고?”

“뉴욕 라과디아에서 직…항? 타면 1시간 20분 정도밖에 안 걸린대.”

“그럼 오 팀장님께 말씀드릴게. 하지만 10일에 소리구름어워즈 스케줄 있는 거 알지? 최소 9일 전엔 귀국해야 해.”

“괜찮아. 잠깐 얼굴만 볼 거야.”

유호와 박가람, 길우성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라이언을 쳐다보았다.

“워싱턴까지 혼자 갈 수 있겠어? 형이 같이 가줄까?”

“나 미국 사람이야. 괜찮아.”

“아냐, 그래도 불안하니까 형도 같이 갈게. 네 사촌 동생 만날 땐 자리를 피할 테니 걱정하지 말고.”

“그럼 나도.”

“이참에 다 같이 워싱턴 관광하는 건 어때?”

“오오, 그거 좋다. 워싱턴 가면 백악관이랑 링컨 기념관이랑….”

급기야 세 사람은 라이언의 의사도 묻지 않고 워싱턴 투어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그러나 라이언은 불쾌하기는커녕 어리둥절한 얼굴로 눈을 끔뻑거리다, 살며시 웃으며 끼어들었다.

“링컨 기념관 근처에 한국전 참…정? 참전? 미군 기념비도 있어.”

“…….”

“정말? 거기도 꼭 가봐야겠다.”

“써한, 너도 갈 거지?”

“…어?”

‘한국전 참전 미군’이란 말에 ‘로건 워커’였을 적의 기억을 떠올리던 한율은 뒤늦게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끄덕.

“가지, 뭐. 그런데 길우성 너 여행경비로 쓸 돈은 있어?”

워싱턴은 스케줄 때문에 가는 게 아니므로, 사비를 써야 할 터.

“헉.”

길우성이 그제야 깨달았단 표정으로 입을 쩍 벌렸다. 유호가 웃으며 말했다.

“대표님에게 잘 말씀드리면 어느 정도 지원은 해주실 거야. 정 부족하면 내가 빌려줄게.”

“감사합니다, 큰형!”

잠시 후. 그들은 다른 차를 타고 온 이건우와 강보배, 차남석에게도 뉴욕 K-POP 콘서트가 끝난 뒤 워싱턴에 가지 않겠냐 물었다. 세 사람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회사에서 이야기를 들은 좌기훈 대표도.

“애들에게 여행경비는 걱정하지 말라고 전해주세요.”

그렇게 시간은 흘러 22일.

어스래빗은 SBC 에서 <파라솔>로 5위를 찍으며 두 번째 EP 앨범 활동을 마무리했다. 그러나 국내 활동만 끝난 것일 뿐, 23일과 24일은 이틀에 걸쳐 일본어 버전 M/V를 촬영했다.

“너희 이번 노래 반응 엄청 좋던데, 활동 너무 빨리 끝낸 거 아냐?”

25일. 오래간만에 등교하자 같은 반 아이들이 물었다. 길우성이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우리도 물 들어올 때 실컷 노를 젓고 싶었지만, 어디 그게 마음대로 되는 일인가. 몇 달 전부터 예정된 스케줄을 변경하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말일세.”

엉망진창 사극 톤의 대답이었지만, 1학년 때부터 종종 이랬던 터라 반 아이들은 그러려니 받아들였다.

“하긴.”

“대형 기획사는 스케줄을 1년 단위로 쫙 잡아놓는다더라. 해외 콘서트랑 컴백, 국내 활동으로 빽빽하게. 너희도 그래?”

“글쎄. 스케줄표에 내년 1월 일정도 기재되어 있긴 한데. 날이 멀수록 공란이 많아.”

“그래도 6개월 후 일정도 잡혀있다니….”

황성연이 부러움 가득한 얼굴로 웃었다.

“대단하다, 야.”

“그런데 한율이 너, 미국 가는 김에 오디션도 볼 거야?”

“오디션?”

“그 왜, 예전에 너 캐스팅하고 싶다고 미드 제작사에서 연락 온 적 있었다면서.”

한율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해외 개인 활동은 안 할 거야.”

“아깝.”

금요일엔 짐을 싸고 일본으로 출국했다. 다음 날인 28일, 일본 패션잡지에 실릴 화보 촬영을 위해서.

내일 스케줄을 마치고 곧장 한국으로 돌아가는 멤버들과 달리, 한율만 블블 민준의 팬미팅 게스트로 나갔다가 30일에 귀국한다고 하자, 멤버들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너무 매정한 거 아냐? 가뜩이나 혼자 이것저것 열심히 활동하는 애를, 여기에 또 버려두고 간다고?”

“어스래빗, 제일 잘나가는 멤버 S군 따돌림 시켜… 쩜쩜쩜.”

“유찬이 형도 같이 남을 거라 혼자는 아닌데요.”

박가람이 손을 번쩍 들었다.

“그럼 나도.”

지나가던 스튜어디스가 박가람에게 다가갔다.

“네, 고객님. 필요한 거 있으신가요?”

“어, 아니, 그게…. 즐거운 주말 되세요, 선생님!”

“네, 고객님께서도 즐거운 주말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네….”

이건우가 소리를 죽이며 웃었다.

“박가람 얼굴 빨개지는 거 봐. 크큭.”

“…이건우, 비행기에서 내리면 싸우자.”

일본 도쿄에 도착.

호텔에다 짐을 푼 멤버들은 그라에 올릴 영상 콘텐츠를 짤막하게 촬영하곤 각자 객실로 들어갔다.

한율은 샤워 후 편한 옷을 입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이어폰을 귀에 꽂고 블블의 노래를 들으며 따라 흥얼거렸다.

우웅. 노래가 잠시 끊기더니 초코톡이 떴다.

-[한율ㅎㅇ]

블블의 수재였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일요일에 민준 팬 미팅 가지?]

[네.]

-[ㅎㅎㅎㅎ]

-[우성이한테 들어보니까 오늘 일본 갔다던데. 그럼 일욜까지 쭉 도쿄에 있는 거?]

[네.]

-[그럼 내일 일 끝나고 잠깐 볼래?]

한율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민준으로부터 다른 블블 멤버들이 바빠, 게스트로 못 나온다고 들은 까닭이었다. 당시 민준은 섭섭한 마음도 들지만 이해한다고 웃었다. 특히 수재의 경우엔 솔로 앨범 준비로 한창 바쁠 때라 전혀 기대를 안 한다고.

[서프라이즈에요?]

-[ㅎㅎ]

[그럼 28일 스케줄 끝나고 연락드릴게요.]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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