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7월 29일 일요일 오후 5시 30분.
한율은 블블의 수재, 조유찬과 함께 카페를 나왔다. 이제 슬슬 팬 미팅 관객 입장이 모두 끝났을 터.
“아, 떨린다. 그 녀석 진짜 눈치 못 챘겠지?”
“오늘 아침에 통화했었는데, 전혀 눈치 못 챈 것 같았어요. 선배님도 통화했다면서요. 가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그 녀석이 은근히 둔한 것 같으면서도, 어쩔 땐 눈치가 굉장히 빨라서 말이야.”
“눈치챘어도 모른 척하지 않을까요?”
수재는 입가를 빙긋 올렸다.
민준의 팬 미팅 장소는 굉장히 규모가 큰 국제포럼 건물로, 그중 5천여 명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는 홀에서 진행될 예정이었다.
건물 앞에 도착해 조유찬이 전화를 걸자 곧 민준의 매니저가 나와 그들을 안내했다.
“민준 씨 울겠네요. 수재 씨까지 와줘서.”
한율과 수재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수재 씨‘까지’?
그들은 민준과 마주치지 않도록 팬 미팅이 시작되고 나서야 대기실로 들어갔다.
“헐. 뭐냐.”
“뭐야? 형 바빠서 못 온다며.”
“그러는 너희는.”
대기실에 민준을 제외한 블블 멤버들이 모두 모였다.
“티스트 넌 회사에서 눈치 준다고, 한국에 찌그러져 있어야 할 것 같다더니?”
“민준이 형 만나는 게 무슨 범죄도 아니고. 몰래 왔지.”
“범죄가 아니라면서 몰래 왔다니. 이 무슨 모순이냐.”
“오, 한율아. 안녕!”
“안녕하세요, 선배님들.”
산우가 다가와서 한율의 어깨를 감싸듯 두드렸다.
“놀라게 했다면 미안해.”
“아니에요. 팬 분들이랑 민준 선배님이 엄청 좋아하시겠는데요?”
“야, 나랑 한율이랑 노래까지 준비했는데 너희들까지 여기에 와 있으면….”
수재가 당혹스러워하는 어색한 연기를 펼치며 문을 활짝 열었다.
“다들 꺼져. 서프라이즈는 나랑 한율이랑 둘이서만 할 거야.”
“리더 인성 보소.”
마침 팬 미팅 진행 요원이 활짝 열린 문 사이로 등장했다. 그리고 어색한 한국어 발음으로 말했다.
“10분 후에 수재 씨, 한율 씨부터 갈게요. 다른 분들은 20분 후입니다.”
산우가 어깨를 으쓱이며 수재를 향해 말했다.
“민준이네 회사는 다 계획이 있더라고.”
10여 분 뒤, 한율과 수재는 스태프의 부름을 받고 홀로 이동했다. 홀에선 한창 민준의 단독 팬 미팅을 축하하는 지인들의 영상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어스래빗의 한율입니다.]
한율이 바로 어제 호텔에서 찍은 축하 영상도. 그리고 영상이 끝났을 때, 민준은 ‘이제 한율이 나올 차례구나’하고 기대하는 눈을 들었다.
“……?”
그러나 예정과 달리 한율이 나오지 않고, 대신 다른 영상이 더 흘러나오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하이, 민준. 큰형이다.]
첫 번째 축하 영상 주인공이던 수재가 재등장한 까닭.
[아까 영상을 찍을 때 깜빡하고 하지 않은 말이 있어서, 이렇게 또 찍는다.]
눈치 빠른 관객들이 술렁거렸다. 설마? 설마?
[내 동생, 바빠서 못 챙겨줘서 미안하다고 말했었는데…. 나 너한테 미안한 짓 하기 싫다. 그러니까, 기다려.]
영상 속 수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텅 빈 자리. 곧 전광판 영상이 꺼지고, 무대 뒤쪽 조명이 환하게 켜졌다.
꺄아아악!
그러나 관객들의 기대가 잔뜩 담긴 비명이 무색하게, 조명 아래엔 아무도 없었다. 그때, 부드러운 기타 선율이 흐르더니 노래가 시작되었다.
[쉬고 있어, 초조해하던 그 시간을 그려.]
…꺄아악! 또 한 번의 환호성에 가까운 비명. 이번엔 더욱 컸다.
조금 전 조명이 켜진 곳과 정반대 쪽. 한율은 서서히 밝아지는 조명 아래에서 수재의 기타 연주에 맞춰 노래를 이었다. 민준이 지난달에 발매한 <시간그림>이었다.
[미소가 사라지고 찾아온 적막은 Ash gray.]
무대에 홀로 앉아있던 민준이 울먹거리며 일어났다.
바다의 백조
민준의 단독 팬 미팅이 끝나고 대기실. 블블 멤버들이 민준을 놀렸다.
“아니, 왜 이렇게 울어. 낼모레면 군대도 갈 녀석이.”
“솔직히 말해. ‘한 명쯤은 오겠지’하고 기대했어, 안 했어.”
“한 명 정돈 기대하긴 했는데….”
처음 수재와 한율이 게스트로 등장했을 때 놀라 눈물을 보였던 민준은, 두 사람이 퇴장하고 나서 작은 코너를 진행하다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타이밍에 나타난 다른 멤버들을 보곤 아예 소리 내서 울고 말았다.
팬 미팅에 찾아온 팬들은 의연하게만 보였던 민준이 눈물을 보이고, 앞으로 보기 힘들 거라고 생각한 블블 완전체의 모습에 감동하여 함께 울먹거렸다.
민준이 클렌징티슈로 눈가를 꾹 누르며 중얼거렸다.
“여섯 명 다 올 줄은 몰랐지….”
“그런데 이렇게 되면, 나중에 다른 멤버 단독 팬 미팅 땐 어떡하냐. 정말 사정이 있어서 못 오는 멤버는?”
“배신자 낙인이 찍히겠지만, 군인은 좀 봐주자.”
“그나저나 한율이한테 미안해서 어떡해? 우리 때문에 괜히….”
블블 멤버들이 한율을 바라보았다. 자신들이 우르르 나오는 바람에, 한율에게 가야 했던 사람들의 관심이 깎인 것은 아닐까 미안해하는 눈으로.
민준이 고개를 들었다.
“맞아. 내가 왜 한율이한테 게스트로 나와달라고 부탁했겠냐? 응? 이 눈치 없는 사람들아.”
“아니, 한율이가 게스트로 나올 줄은 몰랐지….”
“알았으면 안 왔다. 편히 집에서 뒹굴거리면서 게임이나 했지.”
“잠깐만. 너 게스트 아무도 안 불렀다고, 애초에 대답도 제대로 안 해줬잖아. 그러고서 딴소리냐?”
“수재 형은 어떻게 알았어?”
“나는 우성이가 알려줘서.”
한율은 말없이 커피를 마시며 그들이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데뷔 7년 차. 연습생 시절까지 더하면 정말 오래 붙어있어 지긋지긋할 법도 한데, 참 사이가 좋다.
만약 지구에 게이트가 열리지 않는다면, 어스래빗도 이런 모습이 되지 않을까.
“배고프다, 밥이나 먹으러 가자. 한율이 너도 배고프지?”
한율은 커피를 내려놓았다.
“저는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아요. 멤버들이 기다리고 있어서.”
“불러. 같이 먹자.”
“밥값은 민준이가 다 계산할 거야.”
민준도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애들 다 불러. 다 같이 먹자.”
“가람이 형이랑 남석이 형만 있는데요?”
“그럼 더더욱 불러야지. 아, 혹시 약속 잡아놓은 거 있어?”
“그건 아닌데.”
“너희들 다음 달에 미국 K-POP 콘서트 가잖아. 우리가 몇 년간 쌓은 꿀팁 몇 가지도 전수해줄게.”
제각기 다른 회사로 떨어진 멤버들이 한자리에 모인 것도 좋지만, 그래도 그들끼리만 모여있긴 싫다는 모순적인 마음이 느껴진다.
한율은 호텔에서 한가하게 쉬고 있을 차남석에게 전화했다.
* * *
[변치 않는 의리! 민준 日단독 팬 미팅에 블블 멤버 총출동!]
[어스래빗 한율, 민준 팬 미팅서 수재와 깜짝 콜라보]
[대세와 신예의 만남, 블랙블러드와 어스래빗]
[29일 일본 모 국제포럼에서 블랙블러드 민준의 단독 팬 미팅이 열렸다.
(중략)
민준은 자신의 SNS에 블블 멤버들을 비롯해 어스래빗 한율과 가람, 남석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하는 사진을 올렸다.
(사진=블블 민준 개인 SNS)
한편 민준은 지난 10일, 연인인 배우 이희우와 어스래빗 <파라솔>의 커버 안무 영상을…(중략).]
-얘네는 사람 골라 사귀는 게 눈에 보임.
ㄴ??? 뭔가 뉘앙스 이상하다?
ㄴ사람 골라 사귀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약쟁이, 클럽 죽돌이 할 것 없이 아이돌이면 두루두루 친하게 지내야 함?
ㄴㅁㅈ 라트랑 친하지 않았나? ㅅㅇ도 마약검사 받았었고ㅋ 라트랑 마약 같이한 여돌이랑도 친하다던뎈ㅋㅋㅋ
ㄴ산우 그때 당당히 검사받고 음성 나왔습니다. 친하다는 것도 루머란 거 밝혀졌고요.
-어스래빗 애들 괜찮은 것 같은데... 왜 자꾸 ㅃ랑 친하게 지내는지몰것다ㅋ 슬슬 뒷방으로 물러날 사람들 아닌가?
ㄴ뒷방에서 처맞고 싶냐
ㄴ나이 들면 외면하고, 어린 애들만 쫓아다니는 너 같은 것들이야 이해 안 되겠지ㅋㅋ 너도 20대 중반 되자마자 뒷방 취급받길 바란다^^
ㄴ지금껏 ㅃ가 쌓은 경험이랑 성적을 개무시하네 애새ㄲ가
ㄴ본인 부모도 뒷방늙은이취급하는 패륜아면ㅇㅈ
ㄴ워;; ㅂㅂ 팬들 왜 이렇게 날 서있냐; ㅈㄹ무섭네
ㄴ넌 가만히 있다 처맞고도 아닥하냐?
-난 블루액션한테 실망함. 블블이 블루액션 데뷔도 전부터 홍보 열심히 해주고, 해외 콘서트까지 데리고 다니면서 잘 봐달라고, 동생들이라고 엄청 챙겨줬었는데 정작 다른 회사 가니까 바로 손절ㅋ
ㄴ티스트도 회사에 얘기 안 하고 몰래 저기 갔다는 얘기가 있어요. 파랑이들은 아직 어려서 단독 행동이 힘들고 회사 눈치도 봐야 하니, 너그럽게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ㅠㅠ
ㄴ블루액션 애들도 가지 못해 죄송하다고 댓글 달았습니다. 아직 회사에 개길 힘도 없는 어린애들이 뭘 어떻게 해야 합니까..
-고동개객끼
-훈훈♡
-원래 괜찮은 애들은 괜찮은 애들하고만 어울리는 법이지
-검은 피와 지구 토끼의 만남.
ㄴ중2병 스파이 접선 코드 같다
“30분 땡. 내놔라, 사과패드.”
“…여기.”
안세현은 보고 있던 페이지를 닫지 않은 채 은강에게 사과패드를 넘겼다.
사과패드는 압수된 핸드폰 대신 블루액션에게 주어진 물건으로, 7명의 멤버들은 단독으로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을 한 사람당 30분으로 정했다. 그러나 연습실에도 인터넷이 연결된 PC가 있어, 신경질적인 쟁탈전이 벌어진 적은 없었다.
사과패드 화면을 본 은강이 한숨을 쉬었다.
“뭐하러 댓글까지 보냐. 속 쓰리게.”
“우리, 핸드폰 언제 받을 수 있을까?”
“글쎄. 예전에 블블 선배님들도 데뷔한 지 3년째에 1위 하고 나서야 받았다잖아.”
그러나 안세현은 은강의 대답을 듣지 않았다.
“핸드폰이라도 있었으면 선배님들하고 자주 연락도 하고, SNS에 축하 인사도 올리고 그렇게, 오해 같은 거 쌓일 일 없이 바로 대처할 수 있었을 텐데….”
“…….”
“팬들이 우리 보호자냐고. 우리 대신 쉴드쳐주고, 우리 대신 오해라고, 사정이 있어서 그런 거라고 사람들한테 설명하고, 우리 대신 회사에 항의하고….”
은강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안세현을 바라보았다.
티스트를 제외한 블블 멤버들이 고동을 떠나기 전 즈음부터 안세현은 부쩍 말이 없어졌다. 정확히는 블블 산우의 마약 관련 이슈가 터지기 전, 김 실장과 단독 면담한 뒤부터 우울해 보였다.
그나마 팬들과 카메라 앞에서는 활발하게 얘기도 하고 웃기도 하지만, 멤버들끼리 있을 때 웃는 모습을 본 게 언젠지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김 실장과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도 대답도 하지 않고.
‘얘 이대로 두면 위험할 것 같은데.’
최근엔 아이돌도 정신 건강을 위해 상담을 받는다고 스스로 알리는 경우가 많아졌다. 힘들면 힘들다고 라이브방송에서 대놓고 솔직히 얘기하는 사람도 있다.
그래도 ‘내 편’이 적은 아이돌로선 여러모로 눈치를 보게 되는 게 현실. 아픔을 공감하고 이해해주기보다는 정신 건강을 챙겨야 할 상황으로 몰아넣은 대상, 아픈 당사자까지 포함해 비난을 던지는 사람이 훨씬 많으므로.
‘그리고 우리 회사는… 상담을 받도록 도와주기는커녕 허락도 안 할 게 뻔하지.’
그래서 입을 다문다.
참는다.
속이 곪아 병이 될 거라는 걸 잘 알면서도.
‘세현이 말처럼 최소한 폰이라도 있었으면, 우리한텐 못 털어놓는 이야기를 친구들에게라도 털어놓을 수 있을 텐데.’
은강은 조용히 안무 연습을 준비하는 안세현을 바라보다가 리더에게 향했다.
“형. 우리, 회사에다가 핸드폰 사용하게 해달라고 세게 요구하자. 이대론 속 터져 죽을 것 같아.”
“네가?”
“아니, 세현이가.”
리더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도 더는 답답해서 못 살겠다. …블루액션 집합! 회의 좀 하자!”
* * *
7월 31일. tv Mu와 뮤닷 채널에서 아이돌 관찰 예능 <바다의 백조> 3화가 동시 방영되었다.
본래 이 프로그램은 tv Mu에서만 방영될 예정이었지만, 프로그램 기획 의도나 시청자 타깃층이 후속으로 넣어도 잘 맞을 것 같다며 뮤닷과 동시 편성이 결정되었다.
7월 17일 첫 회 <바다의 백조>엔 해외로 화보 촬영을 떠난 걸그룹 온더로즈 멤버의 모습이 담겼다. 2화에선 다음 앨범을 준비하는 V12 멤버의 휴식기 일상이.
3화는 어스래빗의 한율 편이었다.
영상은 자막으로 시작되었다.
[2017. 04. 14.]
작년, 서울 마포구의 S스퀘어 홀에서 열린 보이그룹의 화려한 데뷔 무대 영상이 흘러나왔다.
어스래빗이었다. 그중 환하게 웃으며 노래를 부르는 서한율의 모습이 클로즈업되더니, 지금까지 그가 활약한 무대나 드라마의 짤막한 컷이 빠르게 스쳤다. 어스래빗의 데뷔곡과 함께.
성우의 차분한 내래이션.
[바다의 백조.]
[오늘 관찰할 세 번째 백조는.]
새카매진 영상을 칠판 삼아, 망망대해를 유유히 건너는 백조의 그림이 그려졌다.
[연기 천재 아이돌, 어스래빗의 한율입니다.]
어둑한 방의 정경이 나왔다. 침대에 곤히 잠들어 있는 누군가의 모습. 영상 왼쪽 아래에 자막이 떴다.
[7월 3일 새벽 4시]
[어스래빗 숙소, 한율의 방]
프로그램 톡창에 접속한 시청자들이 반응했다.
-일어나는 장면부터면 쌩리얼민낯을 보여준다는 건데ㄷㄷㄷ
-율톢도 아침엔 부으려나?
-알람소리는 일단 평범
-3일이면 한창 음방 활동할 때네ㅇㅇ
-기지개도 평범
-일어났다
침대에서 내려온 영상 속 한율은 느릿느릿 손으로 대충 머리를 빗질하며 발코니로 향했다.
[일어나자마자 발코니로 향하는 우리 연기 천재 아이돌. 뭘 하려는 걸까요?]
-와 혼자 쓰는 방에 발코니까지 딸려 있어
-여러분은 지금 한강뷰 20억대 아파트 소유주(만17세)의 새벽 일과를 보고 계십니다.
-불 좀 켜줘 어두웡
툭. 한율이 무심하게 발코니 조명을 켰다. 자전거거치대에 세워진 자전거와 옹기종기 모인 화분이 드러났다. 아직 잠이 덜 깬 눈을 끔뻑거리며 창을 여는 한율의 민낯도.
-전혀 안 부었네.. (실망)
-율톢 진짜로 화분 직접 키우는 구나
-허브 예쁘고 풍성하게 잘 키웠네요ㅎㅎ 가지치기나 분갈이도 제때제때 잘한 티가 나욤ㅎㅎ
-슥 살피고 슥 물 주는 무심한 눈길과 손길에서 흘러나오는 프로의 냄새
-율톢 피부 진짜 백옥토기8ㅅ8
칙칙. 분무기로 화분에 물을 준 한율이 쭈그렸던 몸을 일으켰다. 기지개를 켜면서 방으로 들어와, 이번엔 드레스룸으로 들어갔다.
[와. 옷장 하나만 열었는데 정리가 정말 잘 되어있네요.]
-다른 옷장도 열어줘! 보여줘!
-개인 방에 드레스룸; 국장님 아들 클라쓰ㄷㄷㄷ
-얜 연예인을 취미로 해도 될 듯
“진짜 리얼로 다 보여주네….”
어스래빗도 거실에 모여 <바다의 백조> 3화를 보고 있었다. 한율이 욕실에서 젖은 머리칼을 털며 나오는 장면을 보며, 이건우가 중얼거렸다.
“우리가 카메라 앞에서 주접떨었던 모습은… 나오지 않겠지?”
“나올 것 같은데.”
나왔다. 카메라 앞에서 손을 흔들며 인사하고, 까치집이 된 머리에다 후줄근하게 돌아다니는 어스래빗 멤버들의 모습이.
내레이션과 자막이 친절하게 멤버를 소개했다.
[안뇽, 안뇽. 조금 전 인사를 한 아이는 한율과 함께 고음을 담당하고 있는 다람쥐… 아니, 가람입니다. 유연하게 스트레칭을 하는 안경 쓴 아이는 우성. 어스래빗의 메인 댄서입니다.]
-보배 소갴ㅋㅋㅋㅋ 소파에 기절한 앸ㅋㅋㅋㅋ
-완죤 후리하넼ㅋ
-맏이톢잌ㅋㅋ 한율이 집에 얹혀살고 있습니다ㅎㅎㅎㅎ
-길톢 스트레칭하는 거 존웃긴데 진짜 유연하다
-얘네 이거 다 보여줘도 되는 거임?
-새벽부터 거실에서 뭔 난리여
차남석이 카메라를 덥석 잡고 얼굴을 가까이 대며 고개를 갸웃할 땐, 톡창은 잠시 조용해졌다가 폭주했다.
-엄무아 나 심장 잃어버렷쪄...ㅠㅠ
-워 깜짝이야;;;
-뭔데 저렇게 잘생겼냐ㄷㄷㄷ
-민낯 SSS급이 나타났다
-아 차남석 아 차남석!!!!
내레이션은 차분하게 놀랐다.
[아이, 깜짝이야.]
[한율은 어머니가 보내주신 레몬 생강차를 미리 챙기네요. 참고로 한율은 음악방송은 물론이고 드라마 촬영이나 영화 촬영, 심지어 해외 활동을 갈 때도 어머니 표 레몬 생강청을 꼭 챙겨가서 따뜻한 차로 마신다고 합니다.]
-율톢도 스트레칭한다
-으쌰으쌰
-와 유연해
-...토종 한국인의 텍사스 사투리???
어스래빗 멤버들의 대화를 캐치한 내레이션이 끼어들었다.
[여기에서 잠깐. 텍사스 사투리라니 이게 무슨 말일까요?]
[사실 한율은 드라마 <하울링>에서 아주 자연스러운 텍사스 영어를 구사한 바 있습니다.]
참고 영상 자료로 <하울링> 1화의 일부 장면이 나왔다.
[많은 시청자가 열심히 연습했구나, 라고 생각했던 한율의 영어실력. 하지만 한율은 외국으로 나간 게 이 <하울링>을 촬영했던 2016년이 처음이라는데요.]
영상에 느닷없이 외국인 여성이 등장했다.
어스래빗의 그린라이브 콘텐츠인 <깡충깡충 영어극장>을 핸드폰에 띄워, 한율이 영어로 말하는 모습을 보여주자 외국인 여성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오마갓, 텍사스 토박이인 우리 할아버지와 발음과 억양이 똑같아요! 정말 이 소년이 한 번도 텍사스를 방문한 적이 없다고요? 세상에….]
[이상, 어스래빗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한율의 텍사스 사투리에 대해 알려드렸습니다.]
-나만 인간극ㅈ.. 크흠, 그거랑 관찰 예능 짬뽕으로 섞은 것 같냐?
-아니 뜬금없는 TMI 샛길 무엇
-본인한테 물어보면 되자나
-우리도 그것이 알고 싶다... 율톢 텍사스 사투리, 과연 어디에서 배웠는가!
안전 운전할게요
방송은 어스래빗 멤버들이 뮤닷으로 출근하고, 대기실에서 마주친 다른 아이돌과 인사를 나누는 장면으로 이어졌다.
-애들 카메라 의식하는 거 귀엽다ㅎㅎ
-신인 애들 어색하게 인사 건네는 거 풋풋
-대기실 무슨 도떼기시장 같네
[방송국 예능 찍는다고 그래서 와봤어.]
-지헌앜ㅋㅋㅋ 네가 왜 여기서 나왘ㅋㅋㅋㅋㅋ
어스래빗 대기실로 놀러 온 지헌은, 한율과 나눈 초코톡 대화를 보여준다며 카메라에다 핸드폰을 들이댔다. 한창 <별☆일없는 집>이 방영될 때, 드라마를 보고 서로 느낀 점이나 반성해야 할 점 등을 나눈 대화가 주였다.
[선배님, 차 드실래요?]
[응.]
지헌은 한율에게서 레몬 생강차를 받고, 바닥에 나란히 방석을 깔고 앉아 마셨다.
[요즘 현우 본 적 있어? 가끔 게임에 들어가 보면 항상 접속해 있더라?]
[배우 관두고 프로게이머 되려나 봐요.]
[게임 폐인이 아니라?]
내레이션.
[<별☆일없는 집>에서 형제지간이었던 두 사람. 실제로도 형제처럼 사이가 좋네요. 다른 어스래빗 멤버들과도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는 걸 보니, 평소에도 자주 놀러 왔었나 봅니다.]
<락뮤닷> MC인 스카이러너의 용맹도 인사를 하며 들어왔다. 그리고 본인도 어스래빗 멤버인 것처럼 준비된 음료를 꺼내 마시고, 길우성과 너튜브를 보며 놀았다.
원카운트의 찬형은 ‘야, 라이언! 아이템 잘못 보냈다니까? 톡 좀 보지?’라면서 들어왔다가 카메라를 발견하고 아차 하는 표정을 짓기도.
[어스래빗에 은근히 인싸가 많나 봅니다. 아이돌 친구들이 제집 안방처럼 편히 드나드네요.]
-무슨 고등학교 수련회 온 것 같넼ㅋㅋㅋㅋ
-아닠ㅋㅋㅋㅋ 다들 왤케 자연스럽게 드나들엌ㅋㅋㅋㅋ
-맹아 그만 좀 먹어.. 다른 팀 간식을 왜 네가 다 욤뇸하고 있는 거야8ㅂ8ㅋㅋㅋㅋ
[이제 드라이리허설을 하러 갑니다.]
<락뮤닷> 스튜디오. 리허설 조끼를 걸친 어스래빗 멤버들이 무대에 섰다. 인사를 하고, 리허설 시작. 모니터링을 하면서 스태프들에게 피드백을 받는다.
-카메라 들어오는 타이밍이랑 각도 전부 외우는구나
-음방 준비과정은 다른 예능에서도 몇 번 나오긴 했었는데 볼 때마다 신기함
대기실로 돌아온 후엔 돗자리를 깐 바닥에 누워, 담요를 두르고 잠을 청하는 어스래빗 멤버들.
[데뷔 2년 차. 바닥에서 부족한 잠을 보충하는 모습이 익숙해 보이네요.]
-아8ㅂ8
-다 알고 있었는데.. 직접 눈으로 보니까 마음아푸다ㅜㅜ
-돗자리 깔아도 바닥에서 한기 올라오고 딱딱할 텐데ㅠㅠ
-한강뷰 고급아파트 두고 방송국 바닥에 돗자리 깔고 자네
영상이 가속으로 흘렀다.
[아침 10시. 어스래빗 멤버들이 하나둘 눈을 뜹니다. 한율은 담요를 정리하자마자 세수하러 가네요. 돌아와선 기초화장품을 꼼꼼하게 바르고.]
-진짜 피부 깨끗하다... 부럽..
-이제 변신의 시간인가
-이렇게 보니까 메이크업 진짜 진하게 한다;
[한율이는 탈색은커녕 염색도 한번 한 적이 없어서, 머리를 손질하는 데에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는다네요. 그래서 다른 멤버들의 준비가 끝나길 기다리며, 가볍게 발성 연습을 하면서 목을 풉니다.]
-방송에선 기껏 4분 정도 밖에 안 나오는데 새벽부터 나와서 몇 시간을 고생하는 거야ㅠㅠ
-얘네 밥 언제 먹음?
-막 빵빵 터지는 재미는 없는데 묘하게 집중하게 되네
이후에도 방송은 이날 한율의 하루를 고스란히 보여주었다. 음방 스케줄을 끝낸 뒤 회사로 가서 저녁을 먹고, 씻고, 안무 연습, 노래 연습, 외국어 공부를 하는 모습까지.
[내일도 새벽 일찍 일어나 음악방송 스케줄을 가야 해서, 오늘은 이만 퇴근합니다. 차에 타자마자 눈부터 감는 모습이 안쓰럽기도 하고, 대견하네요.]
떠들썩했던 톡창도 어느새 차분해졌다.
-진짜 열심히 산다
-틈틈이 학교 숙제하고, 외국어 공부도 하고
-원래는 음방 끝나자마자 숙소 가서 뻗는데, 방송 때문에 일부러 회사 가서 연습한 거지 무슨ㅋㅋㅋ 지난주 나온 아이돌이 더 현실적이었다 가식 1도 없고
-취준생 주제에 침대에 드러누워서 열심히 잘사는 아이돌 응원하는 내 모습이 레전드
-위에 V12 팬 티난다
-샵에서 머리 손질 분칠 다하고 학교 가는 게 가식 1도 없댘ㅋㅋㅋ
<바다의 백조> 방송이 끝난 뒤, 포털사이트 연예 뉴스란에는 리뷰 기사가 여러 개 올라왔다. 추천 클립 영상 란에도.
실검에는 [바다의 백조]와 [바다의 백조 서한율]가 올라갔다.
[<바다의 백조>, 연기천재돌 한율의 쌩리얼 민낯 공개]
-고작 무대 하나 위해서 새벽부터 일어나 준비하는 게 놀랍기도 하지만, 결국엔 음방 무대로 본인들 홍보하고, 세계적으로 수익을 거둔다고 생각하면 빡세게 하는 게 당연한 것 같기도 함
-오늘부터 내 목표는 서한율 부인이다.
-뜨는 애들은 다 뜨는 이유가 있음ㅇㅇ 바쁜 와중에 화분 잘 돌본 것만 봐도 애가 엄청 부지런한 걸 알 수 있음. 틈틈이 공부도 하고, 피드백도 진지하게 받고, 스케줄 끝나 피곤할 법한데 빡센 안무 연습까지; 중간에 다른 멤버 에어 파스 뿌리고 연습하는 거 보니 진짜 짠해지더라
ㄴ더 빡세게 하루를 보내도 주목 못 받는 애들도 많습니다. 전 처음부터 수십억짜리 아파트 나오는 거 보고 정 뚝 떨어지던데요.
ㄴ그렇겠죠ㅋㅋㅋ 님이 생각하는 ‘가진 사람’은 존나 게으르고 거만하고 일도 대충해야 하는데 전혀 안 그러니까 불편하게 와 닿은 거임. 알고 있음? 그게 열등감임ㅇㅇ
-중간에 율톢 어머니랑 통화하는 모습에 치인 건 나뿐인가... 어머니랑 통화하면서 살짝 미소 짓는데 겁나 스윗
ㄴ진짜 가정 교육 잘 받은 듯요ㅎ
-ㅋㅋㅋㅋ뉴욕가면 뭐하고 싶냐니까 망설임 1도 없이 ‘등산이요’ㅋㅋㅋㅋㅋㅋ
ㄴㅋㅋㅋㅋㅋㅋㅋㅋㅋ
ㄴ등산에 진심인 아이ㅋㅋㅋㅋㅋㅋㅋ
-밥 먹고 멤버들이랑 나란히 앉아서 잠깐 멍때리는 모습도 졸귀였다.
ㄴ저녁 뭐 먹고 싶냐 물으니까 구내 식당 메뉴 불고기라고 대답한 것두요ㅎㅎ
ㄴ그런 거 보면 고딩이 맞긴 한듯ㅎㅎㅎㅎ
‘참 별 게 다 귀엽다.’
<바다의 백조> 방송이 끝나고 한 시간 뒤에야 인터넷 반응을 확인한 한율은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오늘 낮에 만난 건축사가 건네준 인테리어 잡지를 넘겼다.
집이란 지내기에 안전하고 편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지, 내부까지 어떻게 꾸밀지는 딱히 생각해둔 바 없었다. 그러나 잡지로 다양한 분위기의 인테리어를 보니 은근히 재밌었다. 특히 반려동물을 위한 추천 인테리어에 시선이 갔다.
우웅.
“……?”
블블 민준의 톡.
-[바백 촬영하는 거 왜 말 안햇어ㅜㅜ 햇으면 전화라도 하는 건데]
[깜빡했어요.]
-[ㅎ]
-[출국은 예정대로 금요일?]
[네. 필요한 거 있으세요?]
-[아니ㅎ 난 목욜에 산우랑 프랑스 감ㅎㅎ 입대 전 마지막 여행 삼아]
[27살 미필인데 해외여행이 가능해요?]
-[병무청에서 국외여행 허가받아서 괜차나ㅎ]
[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너도 낯선 사람 조심해! 매니저랑 경호원들 잇다고 방심은 금물! 지갑이랑 핸드폰, 여권 잃어버리지 않게 간수 잘하고!]
[선배님도요. :)]
톡으로 대화를 마친 한율은 노트북으로 인터넷에 들어갔다. 그리고 가볍게 키보드를 두드렸다.
[캣타워 맞춤 제작]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