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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K-POP 콘서트는 4일과 5일 이틀 연속 열린다. 어스래빗은 5일 공연 라인업에 이름을 올려 8월 3일, 인천국제공항을 찾았다.
길우성이 그라 영상 촬영 카메라를 향해 설레는 얼굴로 웃었다.
“난생처음, 미국에 콘서트를 하러 갑니다. 어우, 떨려.”
“이거 너무 많이 쌓은 거 아니에요, 형?”
그들 곁에는 캐리어를 잔뜩 쌓은 카트 부대가 있었다. 어스래빗 멤버들의 무대의상과 액세서리, 신발, 맞춤형 마이크와 인이어 등 최소 필요한 물품만 든 캐리어만 10개가 넘었다.
여기에 멤버들의 개인 캐리어와 매니저와 경호원, 스타일리스트, 그라 영상 프로덕션 소속 VJ들의 짐까지 더하면 어마어마한 양.
“꼭 이민 가는 것 같다. 하하.”
차카차카차칵. 공항에는 오늘 뉴욕으로 출국하는 아이돌을 찍기 위해 기자와 팬들이 몰려와 있었다. 그들은 출국장으로 들어가는 순간까지 어스래빗을 향해 셔터를 눌렀다. 극성인 팬들과 홈마들은 항공권까지 끊었는지 출국장까지 따라 들어와 사진을 찍었다.
“우리가 10시 비행기잖아. 직항이라서 14시간 정도 걸리는데, 도착하면 거기 시간으론 아침 11시 조금 넘는다? 신기하지 않아?”
“나한테 시차에 관해 묻지 마라.”
“그러니까 오늘이 8월 3일이잖아? 14시간 날아서 도착해도 8월 3일 아침이라니까?”
“그만해, 머리 아프니까.”
박가람이 일행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외쳤다.
“이건우는 바보다!”
조유찬이 즉각 반응했다.
“공공장소에선 조용히!”
“유찬이 형 목소리가 더 큼.”
“…흠흠.”
한율은 비행기에 탑승하자마자 가방에서 문제집을 꺼냈다. 옆자리에 앉은 유호가 놀란 눈으로 한율을 쳐다보았다.
“한율이 너 벌써 면허 따려고?”
“네, 다음 달 아시아 팬콘 투어 끝나면 바로 학원 등록하려고요.”
“…한율이 너도 내 차로 연습할 건 아니지? 가람이 연습시킬 때 생각만 하면 진짜….”
몇 달 전, 박가람이 운전면허를 땄다. 그때 유호의 차로 연습하다가 흠집을 여러 개 냈다고.
유호가 질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난 우리 숙소 주차장에 외제 차가 그렇게 많은 줄 몰랐다…. 심장이 몇 번이나 철렁 내려앉았는지 몰라….”
“전 안전 운전할게요.”
“…하긴 하겠다는 소리구나.”
운전면허 필기 문제는 그리 어려운 편이 아니었다. 그래도 한율은 꼼꼼하게 읽으면서 문제를 풀고 답과 맞춰보다가, 비행기가 이륙하고 3시간이 지났을 무렵 문제집을 덮었다.
시차를 맞추려고 일부러 밤을 새웠던 멤버들은 이미 수면안대를 쓰고 잠든 상태. 한율도 미리 꺼내놓았던 수면안대를 쓰고 잠을 청했다.
“킁킁. 음, 이게 바로 미국 공기 냄새로군.”
“아냐, 활주로 먼지 냄새야.”
“각자 룸메이트 잃어버리지 않게 잘 따라오세요.”
“써한은 독방 쓰는 데영.”
멤버들은 장거리 비행에 지친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라 영상 촬영 VJ가 카메라를 들자, 반사적으로 활짝 웃으면서 신나게 떠들었다.
박가람이 덥석 한율의 어깨를 잡았다.
“그럼 내가 한율이를 챙길게!”
“한율아, 가람이 잘 부탁한다.”
“네.”
“아니, 내가 챙길 거라니까?”
뒤에서는 막 앞으로 튀어 나가려는 길우성을 라이언이 붙잡아 기습 질문을 던졌다.
“What's the purpose of your visit?”
“어… 왓? 천천히 좀….”
“영어로.”
“Slow….”
길우성이 덜컥 굳어서 버벅거렸다. 차남석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우성이 너 지금까지 영어 공부한 거 다 어디로 갔냐.”
“기억 저편?”
“팀장님, 우성이 입국 심사에서 거부당하면 어떻게 돼요?”
“우성인 한국으로 돌려보내고 너희 일곱 명만 무대에 올라가야지.”
“헉, 안 돼…!”
길우성은 부랴부랴 가방에서 미국 여행회화책을 꺼내, 손바닥에다 커닝 답변을 끼적거리기 시작했다. 가만히 그 모습을 보던 강보배도 함께 옆에 쭈그려 앉아 끼적끼적.
“아, 창피해.”
“모르는 척하자. 일행 아닌 척해.”
그들은 일부러 둘을 버리고 걸음을 재촉했다. 길우성과 강보배 곁엔 그라 영상 촬영 VJ만 남았다.
잠시 후. 어스래빗 일행은 다행히 한 명의 낙오자도 없이 무사히 JFK를 나섰다.
입국 과정에서 지레 겁먹고 진땀을 잔뜩 뺐던 길우성과 강보배는, 리무진에 탑승하자마자 몸을 축 늘어뜨렸다. 리무진 안에도 그라 영상을 위한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었다.
“심사하시는 분 눈빛이 너무 무서웠어….”
“그래도 난 막상 닥치니까, 두뇌가 풀가동되면서 잊고 있던 영어 단어가 툭툭 튀어나오더라. 이게 바로 그 유명한 생존본능인가 봐.”
“생존본능…. 크큭.”
이건우가 슬며시 웃었다.
“너희 다음 주에도 입국 심사 또 받아야 하는 거 알지?”
12일 LA K-POP 콘서트. 10일에 있는 소리구름어워즈 스케줄을 마치자마자 다시 미국으로 올 예정이었다.
길우성이 늘어지던 자세를 바로 하며 웃었다.
“후…. 괜찮아, 형. 다음 주의 내가 알아서 해줄 거야.”
“그런데 아까 나올 때 봤어? 나 진짜 깜짝 놀랐잖아.”
대화를 나누며 그들은 안전벨트를 맸다. 한율도 무릎에 앉힌 토끼 인형을 만지작거리며 적당히 끼어들었다.
“저도요.”
토끼 인형은 조금 전 공항을 나올 때, [율톢♡사랑해♡] 슬로건을 든 미국인 팬에게 받은 선물이었다.
“미국에도 우리 팬분들이 계실 줄은 몰랐어요.”
“우리가 하는 <깡충깡충 영어극장> 보고, 그라 팔로우하신 해외 팬분들이 많다고 하더라. 자막이나 누가 번역해주는 걸 기다릴 필요 없이 바로 알아들을 수 있고, 소소하게 재밌다고.”
“그러니 다들 빨리 다다음 주 영어극장에 내보낼 이야기 좀 생각해봐. 재밌는 원고를 내놓으라고.”
“지난번 일본에서 호 형이 남석이 보고 귀신인 줄 착각해서, 볼썽사납게 비명 지른 얘기?”
넌 솔직한 게 매력이야
어스래빗과 5일 라인업에 오른 팀은 어스래빗을 포함해 9팀. 그중엔 스카이러너, 히아신스, 스타믹스처럼 미국에서도 어느 정도 인지도가 높은 그룹도, 데뷔하자마자 큰 기대와 주목을 받는 신인 그룹도 포함되었다. 아림의 퍼플아워나 프로젝트 그룹 ‘원제로’처럼.
호텔에 도착해 객실로 이동 중. 박가람이 말했다.
“우리 바로 아래층이 스타믹스 선배님 객실이래.”
“밤중에 뛰어다니면 선배님들이 조용히 하라고 올라오는 거야?”
“설마, 그렇게 방음이 허술할까.”
“그런데 호텔은 누가 예약한 거예요? 우리 회사?”
“대기업이요. 참고로 우리 항공권값이랑 공연비자 발급 신청도 FJ가 나서서 해준 것임.”
“역시 대기업 클라쓰.”
“그러니 즉석밥은 앞으로 ‘햇밥’만 먹도록.”
“나 오똑이 거 챙겨왔는데….”
“이런! VJ형, 이 장면은 편집해주세요.”
객실은 트윈룸으로 두 명씩 투숙하게 되었다. 4개의 키 중 하나를 한율이 집어 객실로 들어가자, 길우성이 뒤따라 들어오다가 박가람을 휙 돌아보았다.
“내가 먼저 들어왔는데?”
“그게 뭐.”
“방 하나당 두 명씩이잖아.”
“나 한율이랑 같은 방 쓸 건데?”
“그러니까 내가 먼저 들어왔잖아.”
“그게 뭐.”
“……?”
“……?”
한율은 서로를 향해 어이없는 시선과 뻔뻔한 시선을 교환하는 두 사람을 힐끗하곤, 창가로 다가갔다. 촤악. 커튼을 열자 뉴욕 정경이 내려다보였다.
유호가 객실로 들어왔다.
“가람아, 나랑 영어 공부하기로 했잖아. 이리 와.”
“싫다, 이거 놓아라! 리더면 다냐?! …서한율, 이따 형 방으로 놀러 와…!”
“안녀엉.”
길우성은 유호에게 잡혀 끌려가는 박가람에게 손을 흔들곤 문을 닫았다. 띠릭.
“후. 저 형 은근히 뻔뻔하단 말이지.”
“…….”
“뭐. 왜. 왜 그렇게 쳐다보는데.”
이곳까지 오는 20시간 가까이 제대로 씻지 못했다. 어스래빗 멤버들은 말끔하게 샤워하고, 가볍게 꽃단장까지 받아 호텔을 나섰다.
“벌써 4시네요. 저희는 늦은 점심 겸 저녁을 먹으러, 이곳의 유명한 스테이크 하우스로 향할 예정입니다.”
“써한, 너 미국 스테이크 먹어봤어?”
“재작년에 왔을 때 호텔에서.”
“크으.”
셀캠을 들고 이동하는 멤버들 곁엔, 매니저들과 경호원들, 현지 코디네이터, 스타일리스트, 그라 영상 촬영 VJ들까지 많은 인원이 함께 움직였다.
“그래도 스테이크 전문 레스토랑은 처음 가보는 거라 살짝 기대 돼.”
“고기는 무조건 옳다.”
촬영 허가를 받은 예약한 스테이크 하우스에서 이른 저녁을 먹고, 근처를 둘러보면서 감탄을 하거나 가게에 들어가 쇼핑하는 모습을 촬영했다. 영어가 미숙한 멤버들만 카페에 들여보내 음료를 제대로 주문하는지 지켜보기도 하고.
“그런데 정말 신기하다.”
석양이 질 무렵. 어스래빗 멤버들은 바로 앞에 강이 흐르는 공원에서 잠시 쉬었다. 강 너머로 맨해튼의 빌딩 숲이 보였다.
“우리가 미국, 그것도 뉴욕에 와 있다는 게.”
“단순히 놀러 온 것도 아니고 콘서트를 하러.”
누가 일일이 지시를 내리지도 않았는데, 영상 콘텐츠에 들어갈 법한 말과 분위기를 알아서 만든다.
라이언이 노을빛으로 물든 빌딩숲을 바라보며 말했다.
“다음엔 단독 콘서트 하러 오자.”
“꼭 열 수 있도록 노력해야지.”
그렇게 너도나도 포부를 한 마디씩 나눈 뒤에야 호텔로 돌아왔다. 밤이 되어서야 찾아온 온전한 휴식 시간.
한율은 메이크업을 말끔하게 지우고 다시 씻고 나왔다. 길우성은 침대에 엎드려 누워서 영어회화책을 들여다보다가 잠든 모양새. 한율은 길우성을 발로 툭툭 찼다.
“야, 씻고 자. 피부 트러블 생긴다.”
“어엉….”
가볍게 기초화장품을 바른 뒤엔 침대에 편히 누웠다. 몸이 노곤하여 금세 눈이 감겼다.
그렇게 얼마나 잤을까.
노크 소리와 낯선 기척, 말소리가 한율을 깨웠다.
“깨울까여?”
“아냐, 자고 있으면….”
“……?”
끔뻑.
“어? 일어났다. 써한, 손님 왔어.”
문가에 서 있던 길우성이 슬쩍 옆으로 비켰다. 스타믹스의 JE가 어색하면서도 겸연쩍은 얼굴로 손을 들었다.
“미안. 자고 있을 줄 몰랐다.”
한율은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괜찮아요. 무슨 일 있으세요?”
JE가 머뭇거리며 시선을 피했다.
“그게….”
잠시 후. 한율은 바로 아래층에 있는 JE의 객실로 들어갔다. 그와 같은 객실을 사용 중인 에이플은 다른 멤버의 객실로 놀러 간 터라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한율은 객실 안 여기저기를 살폈다. 커튼 뒤, 욕실, 화장실, 발코니, 옷장 안까지. 면목이 없다는 얼굴로 문 앞에 멀거니 서 있던 JE가 조심히 다가왔다.
“번거롭게 해서 미안하다. 그…, 나도 웬만하면 너 안 찾으려고 했는데, 가만히 두기엔 너무 시끄럽고 추워서.”
“어제부터 시달린 거예요?”
스타믹스는 이곳 날짜로 어제 입국했다고 들었다.
“시달렸다기엔 좀 그렇고, 어젯밤엔 발코니 쪽에서 조금 시끄럽게 떠드는 정도였는데 오늘은 아침부터 계속 한기가 느껴지더라고. 이대로 두면 콘서트 당일에 컨디션이 엉망이 될 것 같아서…. 어쨌든 고맙다. 오늘은 편히 잘 수 있겠어.”
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에겐 아무것도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지만.
“내일 또 나타나면 부르세요.”
“그래.”
그러면서 JE는 테이블에 놓인 쇼핑백을 집어 한율에게 내밀었다.
“가져가서 먹어. 오늘 첼시마켓에 있는 수제 쿠키점에서 산 거야.”
“다른 분한테 주려고 산 선물 아니에요?”
JE는 묻지 말라는 뚱한 얼굴로 쇼핑백을 든 손을 까딱거렸다. 그제야 한율은 순순히 받았다.
‘내 덕에 귀신이 사라지면 보답으로 주려고 일부러 산 건가.’
“잘 먹을게요.”
“그래, 잘 자. …아.”
“……?”
“너 혹시 감소 제유랑 친하냐?”
한율은 의아한 표정을 짓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제유와는 2년 전, 그녀의 솔로곡 <이면(the back)> M/V에 출연한 뒤로 따로 만난 적이 없었다. 음악방송이나 아시아 뮤직 페스티벌, RMMA 등에서 가끔 마주쳐 인사만 건넸을 뿐. 그리고 모레인 5일, 오래간만에 마주칠 예정.
“그건 왜요?”
“어제 인국공 비즈니스 라운지에서 걔네랑 마주쳤었거든. 그런데 느낌이 좀….”
JE가 미간을 찡그리며 말을 흐렸다.
“……?”
“…아니다, 신경 쓰지 마.”
“네, 쉬세요.”
한율로 객실로 돌아오고 나서야 쇼핑백 안의 내용물을 꺼냈다. 아기자기하고 귀여운 모양의 수제 쿠키 상자가 세 개나 들어있었다.
길우성이 쿠키 상자 하나를 집어 들며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이거 주려고 일부러 널 불렀던 거야? 선배님이?”
“내가 선배님한테 도움을 드렸거든. 이건 그 대가.”
“도움? 무슨 도움?”
“그것까진 알 거 없고.”
“수상하구먼, 수상해.”
길우성이 중얼거리며 상체를 반대로 뒤틀었다. 그러곤 뻔뻔하게 이불 속으로 상자를 슥 집어넣는다.
한율은 가만히 길우성의 행태를 바라보다가 툭 내뱉듯 말했다.
“내놔.”
“네.”
다음 날, 어스래빗은 어제처럼 뉴욕의 유명한 명소나 공원, 가게를 탐험하며 그라에 올릴 영상 콘텐츠를 촬영했다. 저녁엔 호텔로 돌아와, 너튜브와 뮤닷 채널에서 생방송으로 보여주는 뉴욕 K-POP 콘서트 1일 차 공연을 보았다.
그리고 미국 현지 시각으로 8월 5일 일요일 새벽. 어스래빗은 간밤에 TV로 보았던 공연장 안으로 들어왔다. 공연장은 만 명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상당히 규모가 컸다.
“안녕하십니까! 어스!”
“래빗!”
“인사드립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어스래빗이 부르기로 한 곡은 데뷔 앨범인 [Breaching]의 인트로와 두 번째 EP앨범 수록곡인 과, <파라솔>.
드라이리허설은 본무대처럼 2.5곡을 연달아 불렀다.
체력적으로 굉장히 힘들었으나, 콘티가 아닌 실제 무대의 동선과 카메라 위치를 확인하며 세 번이나 반복했다. 관객들에게 건넬 인사 연습도.
FJ그룹이 주관한 콘서트라 그런지 돌아가는 시스템은 RMMA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공연장 보조 스태프와 경호원이 현지인이 많다는 것 외엔.
“다들 수고했어. 이제 밥 먹고, 조금 쉬다가 팬 미팅 장소로 이동하자.”
“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모니터링까지 마친 뒤 이동하려는데, 무대 아래에서 대기하고 있던 10명의 소년이 ‘이때다!’하고 그들에게 인사했다. 프로젝트 그룹인 원제로였다.
“완전한 하나!”
“원 없는 무대!”
“원! 제로입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오! 반가…, 컥.”
원제로 멤버 중 임승준과 변지욱을 발견하고 튀어 나가려는 길우성의 목덜미를, 이건우가 덥석 잡아당겼다.
유호가 환하게 웃으며 큰 목소리를 선창했다. 원제로와 어스래빗의 곁엔 각각의 VJ가 카메라를 들고 촬영 중이었다. 여기에 K-POP 콘서트 측에서 나온 비하인드 영상 촬영 카메라까지.
“안녕하십니까, 어스!”
“래빗!”
손구호를 하곤, 원제로를 향해 꾸벅.
“인사드립니다!”
“원제로 여러분들, 데뷔 축하합니다!”
단체인사를 나눈 후에야 한 명씩 악수. 어스래빗 멤버들은 땀이 난 손을 옷에다 벅벅 문질러 닦았다.
“손에 땀이 차서.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야말로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선배님.”
“저희 픽미돌 꼭꼭 챙겨봤어요. 실제로 뵈니 더 반갑네요.”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오래간만입니다, 유지 선배님.”
“야, 임승. 데뷔 축하한다.”
동갑내기 친구인 차남석과 임승준은 가볍게 포옹하곤 등을 토닥거렸다.
“고맙다, 선배님.”
“혀엉…!”
“지욱아아…!”
길우성과 변지욱은 두 손을 잡고 빙글빙글 돌았다.
“미국에서 널 만나다니! 이게 꿈이냐, 생시냐…!”
“아하하핫!”
“오랜만이에요, 형. 데뷔 축하드려요.”
다른 원제로 멤버들과 인사를 나누던 한율은 정민솔과 마주했다. 정민솔은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키가 조금 크고, 젖살이 빠져 아주 조금 어른스러워졌다. 이건우처럼 라미네이트를 했는지 이도 가지런해지고.
“응, 고마워. 잘 지냈어?”
“네.”
어스래빗 멤버들에게 자신의 인상이 썩 좋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을 텐데도, 정민솔은 다른 어스래빗 멤버들에게도 살갑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그래도 데뷔 2년 차라고, 멤버들 역시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정민솔에게 데뷔 축하 인사를 건네고 안부를 물었다.
“민솔.”
라이언이 정민솔을 향해 환하게 미소 지었다.
“넌 솔직한 게 매력이야. 그러니 참지 마, 병나.”
입을 솔직히 놀리는 바람에 데뷔조에서 탈락한 정민솔을 고도로 후려치는 악담이었다.
정민솔은 잠시 멈칫했다가 더욱 입가를 올리며 웃었다.
“응. 조언 고마워, 라이언.”
“아,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그때 현강희가 잔뜩 긴장한 낯으로 한율에게 고개를 숙였다. 동시에 지금껏 조금 거리를 두고 그들을 찍던 원제로 측 VJ가 슬그머니 다가왔다. 원제로 멤버들도 흥미진진하거나 따뜻한 시선으로 현강희를 바라보았다.
현강희가 방송에서 롤모델이라고 언급한 사람과 드디어, 그것도 첫 대외 스케줄에서 만나는 장면이라 그런 듯했다.
한율도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었다.
“오래간만이에요, 후배님. 원제로 데뷔, 정말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화요일에 방송된 <바다의 백조> 선배님 편 정말 재밌게 봤어요! 정말 뉴욕에 온 김에 등산하러 가시는 거예요?”
“그땐 그러고 싶었는데, 그사이 새로운 일정이 생겨서 이번엔 힘들 것 같아요.”
“어…, 진짜요?”
현강희의 안타까운 표정. 이쪽을 바라보던 원제로 멤버들이 흐뭇하게 웃으며 대화했다.
“우리 막내 정말 좋아한다.”
“한율 선배님 너무 멋지다고, 같은 무대에 서고 싶다고 그렇게 노래를 불러대더니, 오늘 소원 성취하네.”
슬슬 공연 스태프들이 눈으로 그들을 재촉했다. 그러나 후배인 원제로가 먼저 작별을 고하긴 어려우므로, 유호가 눈치껏 크게 인사했다.
“그럼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리허설 홧팅하세요!”
“네, 감사합니다!”
“이따가 또 봐요!”
“원제로 홧팅!”
“그럼 수고하세요.”
한율도 현강희에게 작별을 고했다. 현강희는 ‘벌써?’란 당황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다가 급히 물었다.
“나, 나중에 대기실에 놀러 가도 될까요, 선배님?!”
한율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현강희의 얼굴이 환해졌다.
“네! 나중에 뵙겠습니다!”
희망을 놓지 마, 지구토끼
“현강희가 너 보는 게, 꼭 강아지 같더라. 완전 네 팬이던데.”
어스래빗 대기실. 멤버들을 위해 준비된 한식 도시락 뚜껑을 열며 차남석이 말했다. 한율은 젓가락 포장지를 벗기며 대답했다.
“사람더러 개 같다니, 너무하시네요.”
“…….”
길우성이 키득거렸다.
“남석 씨 눈으로 욕하는 거 오래간만에 본다.”
차남석이 짧게 한숨을 쉬었고, 한율은 어깨를 으쓱였다.
“장난 좀 쳐봤어요.”
“넌 그런 장난치지 마. 안 어울려, 재미도 없고.”
“네.”
“아는 애들한테 들어보니까 성격 괜찮은 것 같더라. 단순히 남들보다 빠르고 쉽게, 좋은 배역 따내려고 일부러 아이돌 코스 밟는 것도 아닌 것 같아.”
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환경에 쉽게 물들 수 있는 어린아이라, 섣부른 판단은 금물이지만.
강보배가 길우성에게 물었다.
“우성아, 제이슨한테서 그 후로 댓글 달린 거 없어? 뉴욕 닉스 모자 쓰고 오겠다던 제이슨 말이야.”
“새 댓글은 달리지 않았지만, 기대 중입니당.”
“그런데 VVIP 티켓으로 미니 팬 미팅에 참석할 순 있어도, 가까이에서 짧게나마 인사할 수 있는 건 하이터치 타임뿐인데….”
하이터치는 팬 미팅 입장 관객 중 추첨으로 뽑힌 70명에 한해서만 이뤄진다.
이건우가 말했다.
“그건 걱정하지 마. 내가 매의 눈으로 뉴욕 닉스 모자를 찾아내면.”
길우성이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나한테 마이크가 왔을 때 직접 언급하기로 했어. 오 팀장님한테도 허락받았구.”
“남자분은 몇 분 안 오실 테니, 오신다면 바로 알아볼 수 있지 않을까?”
“과연 감동적인 만남은 이뤄질 것인가?! 두구두구.”
11시. 어스래빗은 예정된 시간에 맞춰 팬 미팅이 열릴 홀 안으로 들어갔다. 꺄아악! 와아아! 그 안에 모인 많은 사람이 환호성으로 그들을 반겨주었다. 비싼 VVIP 티켓을 구매하고, 또 어스래빗의 팬 미팅 입장권을 예매해 들어온 사람들.
그러나 느낌상 알 수 있었다. 진심으로 어스래빗을 좋아해 찾아온 사람보단, 어스래빗이란 그룹에 대해 알고 싶어 찾아온 사람이 더 많다는 걸.
“안녕하십니까!”
“어스!”
“래빗!”
“인사드립니다!”
단상에 나란히 서서 손구호와 함께 인사. 누군가 귀엽다고 크게 외쳤다. 들리는 언어는 모두 영어.
단상 아래에서 마이크를 든 MC가 어스래빗을 소개하고, 멤버들을 향해 각자 자기소개를 부탁했다.
가장 먼저 유호가 유창한 영어로 자기소개했다.
[안녕하십니까. 어스래빗의 리더를 맡은 팀의 맏형, 유호라고 합니다!]
그때 누군가 큰소리로 외쳤다.
[호! 나도 워터를 워터라고 말해!]
유호가 놀라 그쪽을 쳐다봤다가 빵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라 콘텐츠인 <깡충깡충 영어극장>에서, 유호가 r을 고집하지 말고 t를 챙겨달라고 영국식 발음을 가르친 걸 본 사람인 듯했다.
[깡충깡충 영어극장을 봐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무슨 이야긴지 몰라도 덩달아 웃어준 관객 대부분을 향해, 유호가 차근차근 설명했다.
[지금 듣고 계셔서 잘 아시겠지만, 제가 영어를 어릴 적에 잠깐 살았던 영국에서 배웠습니다. 그래서 우리 멤버들에게도 영국식 영어를 가르쳤는데, 미국 영어 역시 존중합니다. 부드럽잖아요.]
관객들은 마음에 든다는 리액션을 활기차게 보이며 박수쳤다.
유호에 이어 다른 멤버들도 영어로 자기소개했다. 조금은 어설프지만 그래도 열심히 외우고 공부한 티가 나는 멤버들의 영어에, 관객들은 흐뭇하거나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라이언이 자기소개했을 땐 반가워했다.
[어스래빗에서 영어 랩을 담당하고 있는 라이언이라고 합니다. 미국 워싱턴에서 태어나고 자란, 미국 사람입니다. 반가워요, 뉴욕 시민 여러분!]
이윽고 한율의 차례가 되었다.
[안녕하세요. 어스래빗에서 보컬을 맡은 서한율이라고 합니다. 뉴욕은 두 번째지만, 가수로서 방문한 건 이번이 처음이라 무척 감개무량하네요.]
……?
한율의 인사를 듣던 관객들의 얼굴에 살며시 의아함이 깃들었다.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누군가 큰소리로 물었다.
[한율! 텍사스 출신인가요?!]
바로 한율의 텍사스 영어 때문이었다.
사실 한율은 <바다의 백조>에서 외국인 여성이 ‘텍사스 토박이인 우리 할아버지와 발음과 억양이 똑같아요!’라고 말하는 걸 듣고 ‘그렇게 심한가? 교정해야 하나?’ 고민했었다.
드라마 <하울링> 때야 대본에 영어 대사가 적혀 있고 분량도 적어 사투리가 두드러지지 않았지만, 미국인은 말 몇 마디만 듣고도 바로 알아차릴 테니 말이다.
그래서 억양만이라도 교정해보려 했으나, 도중에 귀찮아져서 관뒀다. 아이돌 일을 하는 데에 딱히 해가 될 것 같지 않고.
한율은 살며시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저는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랐고, 미국은 뉴욕만 두 번째입니다. 텍사스 사투리가 심하긴 하지만,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
관객들의 표정이 혼란스러워졌으나, 한율은 눈까지 부드럽게 휜 채 웃으며 마이크를 다음 멤버에게 넘겼다.
인사가 모두 끝난 후 MC는 사전에 어스래빗 측과 조율한 대본대로 팬 미팅을 진행했다. 길우성과 이건우는 MC의 질문과 멤버들의 대답을 집중하면서 듣다가도 관객들을 자주 훑었다.
[그런데… 건우, 우성.]
MC가 한국어로 물었다.
“아까부터 누구 찾아요? 여자친구?”
길우성이 당황해하며 두 손을 흔들었다.
“아아니요? 여자친구는 아니고….”
MC가 관객들을 향해 웃으면서 설명했다.
[아까부터 누굴 찾는 것 같아 여자친구를 찾냐고 물었더니 바로 부정하네요.]
길우성은 어떻게 대답해야 하나 망설이다가, 저 멀리에서 오 팀장이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곤 한국어로 대답했다.
9년 전 너튜브에 올린 자신의 동영상을 기억하는 친구가 여기에 오겠다고 했는데, 그가 알려준 단서가 보이지 않아 찾고 있었다고.
MC는 길우성의 말을 고스란히 영어로 통역해준 뒤, 길우성에게 물었다.
“단서가 뭐죠?”
길우성이 관객들을 보며 대답했다.
“Blue and Black. 어… New York Knicks Hat.”
[검은색과 파란색 뉴욕 닉스 모자 쓰신 분 계신가요? 우성이 찾고 있어요!]
웅성거리며 주변을 살피는 관객들. 그때 조명이 닿지 않는 어둑한 구석 자리에서 제보가 들렸다.
[여기예요!]
곧 파란색과 검은색 뉴욕 닉스 모자를 쓴 흑인 소년이 앞으로 나왔다. MC가 재차 설명했다.
[이건 정말 놀라운 일이에요, 여러분. 이 소년은 우성이 9년 전 올렸던 영상을 기억하고, 최근에 우성이 다시 올린 영상을 찾아서 봤으며, 이 자리로 우성을 만나기 위해 왔어요. 그리고 우성은 그의 댓글을 보고 그가 왔기를 기대하며 열심히 찾았죠.]
지켜보던 경호원들과 진행요원들은 제이슨을 제지하기는커녕 단상 위로 그를 올려보냈다.
길우성과 제이슨이 만났다.
[반가워, 우성.]
[와줘서 정말 고마워, 제이슨.]
길우성은 어설픈 영어로 인사하며 그와 가볍게 포옹했다.
그때,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느닷없이 장내에 웬 팝이 흘러나온 것.
길우성이 당황한 얼굴로 두리번거렸다.
“이 노래가 여기에서 왜 나와…?!”
9년 전 길우성이 너튜브에 올렸던, 그리고 몇 달 전 새롭게 다시 안무를 커버했던 노래였다. 그 순간 제이슨이 안면을 싹 바꾸더니, 길우성이 영상에서 췄던 춤을 추기 시작했다.
“……?!”
그의 놀라운 춤 실력에 눈을 동그랗게 떴던 길우성도 이내 옆에서 함께 몸을 움직였다.
꺄아아! 오늘 처음 만났음에도 쌍둥이처럼 박자와 섬세한 각도까지 딱딱 맞는 두 사람의 춤솜씨에, 사람들은 소리 높여 환호성을 질렀다. 한율도 신기한 눈으로 둘을 바라보았다.
‘똑같네.’
음악은 1분 남짓 흘러나오다 잦아들었다. 그러나 이게 끝이 아니었다. 이번엔 어스래빗의 <파라솔>이 흘러나왔다.
한율의 옆에서 박가람이 당황한 목소리를 흘렸다.
“으엉?”
그리고 이번에도 거침없이 어스래빗의 <파라솔> 안무를 선보이는 제이슨. 어스래빗 멤버들은 그제야 이 상황이, 그들에게만 비밀이었던 계획이자 깜짝 이벤트란 걸 깨달았다. 저 멀리에서 오 팀장이 웃고 있었다.
…꺄아아아!
어스래빗 멤버들까지 제이슨 곁에서 안무를 시작하자, 팬 미팅 장내는 더 높은 환호성으로 채워졌다.
“흐흐헤헷.”
팬 미팅을 끝내고 돌아온 대기실. 길우성이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바보 같은 웃음을 흘렸다. 제이슨의 SNS에다 댓글을 달며.
이건우가 어깨를 으쓱이며 유호에게 말했다.
“팬 미팅장이 카메라 반입 금지여서 다행이었는지 아닌지 잘 모르겠다.”
“나는 좀 아쉬운데? 혼자 보기 아까운 광경이었잖아. 9년 전 우성이 영상을 보고 댄서의 꿈을 품은 친구가, 시간이 지나 한 명은 아이돌, 한 명은 댄스팀 소속이 되어 만나서 9년 전 영상의 춤을 함께 췄다는 게.”
박가람이 고개를 흔들었다.
“난 유찬이 형한테 더 소름. 어떻게 그렇게 감쪽같이 속일 수 있지? 응? 사적으로 따로 만나는 건 위험하다고 애 기죽일 땐 언제고, 뒤에서 따로 연락을 주고받았었다니!”
“결과만 좋으면 좋은 거지, 뭘. 우리 막내도 저렇게 좋아하잖아.”
팬 미팅이 끝났으니 이제 5시에 진행될 레드 카펫과 본 공연만 남았다. 멤버들은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각자 할 일을 하거나 쉬었다.
한율은 소파에 편히 앉아 사과패드를 만지작거렸다. 현강희가 놀러 오겠다곤 했지만, 원제로의 팬 미팅이 1시에 잡혀있으니 최소 2시는 지나야 올 터다.
털썩. 박가람이 한율의 옆자리에 앉았다.
“뭐 봐?”
“연예 기사요.”
한율은 길게 설명하는 대신 사과패드를 보여주었다.
소리구름어워즈 관계자가 다음 주 LA K-POP 콘서트 토요일 출연팀에게, ‘너희들 소리구름어워즈에 참가 안 하면 수상이고 뭐고, 앞으로 초대도 못 받을 줄 알아라’ 이런 식으로 협박했다는 내용의 기사였다.
“에휴.”
박가람이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몇 달 전부터 FJ그룹이 이 날짜부터 저 날짜까지 미국에서 K-POP 콘서트를 열겠다! 이렇게 알려줬으면 그 시기를 살짜~쿵 피해서 행사 일정을 잡는 게 서로에게 좋은 배려일 텐데, 괜히 영향력 과시 좀 해보겠다고 하루 차이로 잡아놓고선. 으으, 속 좁은 것들. 이것도 갑질이야, 갑질. 그래서, 이 말 들은 팀이 어디래?”
“댓글 보니까 히아신스 같아요.”
“와우. 아림하고 소리 측하고 사이가 틀어졌나?”
“그것까진 모르겠네요.”
이 외에 별다른 이슈는 없었다. 그렇게 하릴없이 사과패드만 만지작거리는데, 이건우가 노트북을 들고 왔다.
“얘들아, 한가하면 새벽에 했던 드라이리허설 무대 모니터링이나 하지 않으련?”
“네.”
“아니다, 난 한가하지 않…. 네가 선뜻 하겠다고 대답하면 나도 해야 하잖아.”
현강희가 어스래빗 대기실로 찾아온 건 3시가 될 무렵이었다. 변지욱, 임승준도 함께 왔다.
“선배님드을.”
변지욱이 넉살 좋게 웃으며 먼저 들어왔다. 그다음엔 임승준, 마지막으론 현강희가 눈치를 보면서 어색하게 웃었다.
“안녕하십니까….”
유호가 웃으며 환영했다.
“어서 와, 후배님들.”
“앉아, 앉아.”
“팬 미팅은 잘했어?”
“심장 떨려 죽을 뻔함요. 기껏 공부한 영어도 전혀 생각 안 나고.”
현강희는 눈이 마주치는 어스래빗 멤버들과 스태프들, 매니저들에게 꾸벅꾸벅 인사하다가 한율에게도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어서 와요. 뭐 좀 마실래요?”
“아, 주시면 감사히….”
세 사람은 적당히 빈 자리에 앉았다. 현강희는 한율에게 두 손으로 공손하게 음료를 받은 후 조용히 뚜껑을 땄다.
변지욱이 떠들었다.
“형들 그 얘기 들었어? 우리 회사 이번에 새로운 연습생들 뽑기로 했잖아. 그런데 지원한 사람이 어엄청 많대.”
“그래서 이참에 사옥 더 넓은 곳으로 이사할 거란 이야기가 있던데. 사실이에요?”
임승준이 오 팀장을 향해 물었다. 커피를 마시던 오 팀장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낭설입니다. 어스래빗이 밖에서 수백억을 벌어온다면 모를까.”
“…와, 이렇게 훅을 훅 날리신다고?”
“이건우 아저씨 같아.”
“미안하다. 이사는 평생 못 할 것 같다.”
“아니, 왜 그래! 희망을 놓지 마, 지구토끼! 안 그러냐, 강희야?!”
“어… 어? 아!”
갑작스러운 변지욱의 지목에 당황해하던 현강희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스래빗 선배님들이라면 가능하실 것 같습니다!”
“고마워, 후배님.”
“우리 후배님, 이름이 현강희라고 했나? 활동명은 뭐야?”
“네, 현강희입니다!”
“그런데 한율이랑 우성이 후배면 남석이 후배이기도 하지 않아? 남석이도 대한예고 나왔는데.”
그제야 아차 하는 얼굴로 현강희가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멀리 앉아있던 차남석에게 대뜸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
차남석은 의아한 얼굴로 귀에 꽂고 있던 이어폰을 뺐다. 그러곤 ‘새벽에 인사하지 않았었나?’라는 얼굴로 손을 들었다.
“그래, 안녕.”
“하하….”
“그런데 우리 오는 길에… 엄청 살벌한 광경 봤다?”
“살벌한 광경?”
“지욱. 그런 얘긴 함부로 하는 거 아냐.”
임승준의 말에 변지욱은 입을 꾹 다물었다가 문을 휙 돌아보았다. 닫혀 있었다.
“이미 보고 들은 사람이 한둘이 아닌데….”
“뭔데 그래. 심각한 일이야?”
임승준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변지욱이 임승준의 눈치를 살피다가 입을 열었다.
“감성소녀 선배님들이 싸우고 있었어.”
“싸워?”
이건우가 손을 저었다.
“단순히 멤버들 간의 쌍시옷 비속어 대화를 들은 거면 오해하지 않아도 돼. 싸우는 거 아냐.”
“아니, 단순히 말싸움이 아니라….”
변지욱이 다시 문 쪽을 보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제유 선배님이… 순형 선배님을 때린 것 같아. 순형 선배님이 제유 선배님한테, 더 쳐봐라, 이 XXX야! 하면서 달려들고, 사람들이 그걸 뜯어말리는데… 진짜 살벌했어.”
그땐 내가 가만 안 둬
“그렇구나….”
유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감성소녀는 방송이나 라방에서 멤버들끼리 머리채 잡고 싸운 적이 있다고 이야기할 정도로 굉장히 솔직하고 털털한 이미지다.
이미 지나간 일이고, 화해했다는 그들의 뉘앙스에, 팬들도 ‘지금은 풀렸으니, 뭐.’, ‘솔직히 몇 년을 붙어있는데 한 번도 안 싸웠을 리가’라며 이해할 정도.
그리고 이 바닥은 드러나는 모습보다 실상이 더 엉망인 경우가 많다.
“어…. 혹시, 흔한 일이야…?”
어스래빗 멤버들이 딱히 놀랍지도 않단 반응을 보이자, 변지욱이 되레 당혹스러운 얼굴로 눈을 끔뻑거렸다.
“미국까지 와서, 그것도 사람들이 다 있는 앞에서 그랬다는 건 조금 놀랍지만…. 음, 이만 말을 아낄래.”
“그나저나 누가 촬영이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랬던 걸까? 그것도 하필 외국에서 여는 큰 합동 콘서트 당일에.”
“자칫하면 누구 한 명 매장당할 수도 있는 각인데, 이거. 앞으로 FJ그룹이 주최하는 다른 행사에 초대 못 받을지도 모르고.”
“그러고 보니 감소 선배님들, 계약기간 얼마 안 남지 않았나?”
“그만큼 화를 돋웠나 보지. 다른 누구도 아니고 제유 선배님이 이유 없이 순형 선배님을 때리진…. 아, 이건 못 들은 걸로 해라.”
한율은 JE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인국공 비즈니스 라운지에서 걔네랑 마주쳤었거든. 그런데 느낌이 좀….』
그때 감성소녀 멤버들 간의 불화를 느낀 걸까.
‘그러고 보니.’
JE를 떠올리자 호텔에서 나오기 전, 개인 가방에 챙겨서 가지고 온 쿠키가 생각났다. 한율은 가방에서 쿠키 상자를 꺼내 현강희 앞 테이블에 놓았다.
“이것도 먹어요.”
“와, 감사합니다…!”
길우성이 배신감을 느낀 얼굴로 벌떡 일어났다.
“내가 먹고 싶다고 할 땐 들은 척도 않더니?!”
“웬 쿠키? 언제 샀어?”
한율은 길우성의 반응을 무시하며 박가람에게 대답했다.
“JE 선배님이 주셨어요.”
“오호?”
라이언이 슬그머니 다가와 한율의 옆에 앉았다. 변지욱도 일인용 소파를 끌고 왔다.
“JE 선배님이라니. 형들 진짜 인맥 넓다.”
“지욱이 너도 활동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넓어질 거야.”
“형들은 언제 컴백해?”
한 사람씩 쿠키를 집으니 금세 동이 났다. 그들은 한참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다가 30여 분이 지나서야 일어났다.
“조금 전에 오다가 본 건 일단 다른 사람들한텐 말하지 말고.”
“응.”
“나중에 또 봐요.”
“네! …쉬세요, 선배님!”
현강희는 무언가 할 말이 있는지 잠시 머뭇거리다, 인사를 하며 나갔다.
“이제 슬슬 강희한테 말 편히 놓아도 괜찮지 않을까, 써한? 내가 보기엔, 네가 지난번에 딱 잘라 그었던 것 때문에 다시 말 꺼내는 게 어려운 것 같은데.”
“다음에.”
한율은 빈 쿠키 상자와 떨어진 부스러기를 정리해 쓰레기통에 버렸다.
“왔어?”
원제로 대기실은 어스래빗 대기실보다 산만했다. 방송 이후 공식적인 첫 스케줄, 그것도 규모가 상당히 큰 K-POP 콘서트라 긴장한 멤버가 많은 까닭이었다.
다른 멤버들과 안무를 맞춰보던 리더, 유지가 임승준과 변지욱, 현강희를 향해 물었다.
“좋은 팁은? 얻어왔어?”
“헉. 수다 떠느라 까먹었다…!”
“…막내야.”
변지욱이 하하 소리 내어 웃었다.
“아니, 형들 분위기가 굉장히 뭐라고 해야 하나…. 긴장 이런 거 전혀 없이 차분하면서 편한? 그래서 우리도 소파에 앉아서 차도 마시고 쿠키도 얻어먹다 보니.”
“같은 호텔이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선배님들 어디에 묵는데?”
“무슨 호텔인지는 못 들었는데, 스타믹스 선배님들이랑 같은 호텔인 것 같아. 한율이 형이 JE 선배님한테 쿠키 받았다고 하는 거 보면.”
“JE? 스타믹스?”
조용히 이야기를 듣던 정민솔이 물었다. 변지욱은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비밀로 할만한 이야기도 아니어서.
“응. 그걸 한율이 형이 우리 왔다고, 먹으라고 꺼내준 거지. 완전 맛있었어. 모양도 귀엽고.”
임승준이 변지욱에게 말했다.
“쿠키 상자에 적힌 거 보니까, 우리가 어제 들렀던 첼시마켓 쿠키 가게 거더라.”
“아, 비싼 것 같아서 밖에서 눈으로만 구경했던 곳? JE 선배님이랑 한율이 형 진짜 친한가 보다. 그런 것까지 일부러 사다 줄 정도면. 으으, 나도 얼른 선배님들이랑 친해지고 싶당.”
정민솔이 살갑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려면 한율이처럼 다른 분야에서도 뛰어난 활약을 보여야 하지 않을까? 한율이랑 친한 선배님들 보면 대부분 연기 일로 만난 인연이잖아. 거기에서 또 홍보차 예능에 나갔다가 새롭게 인맥도 쌓고. 스카이러너의 용맹 선배님처럼.”
“민솔이 넌 지욱이의 교과서 읽는 톤 연기를 봤으면서도 그러냐.”
“우으음.”
유지가 키득거리며 놀리듯 말하자, 변지욱은 입을 일자로 꾹 다물고 뚱한 표정을 지었다.
“강희 넌 어땠어? 어스래빗 선배님들 대기실 놀러 가보니까?”
현강희는 말 대신 미소를 슥 지었다. 변지욱이 이내 까불거리며 현강희의 팔을 툭 쳤다.
“얘 또 한율이 형 앞에서 삐걱거림.”
“놀리지 마. 지욱에 네가 한율 선배님 연기가 얼마나 대단한지 잘 몰라서 그래. <하울링>의 은호, <객귀>의 진해, <별☆일없는 집>의 태바다. 단기간에 이렇게 많은 역을 했는데 전혀 캐릭터가 헷갈리지 않는다는 게 얼마나…!”
“으아아…! 알았어, 그만해! 그 얘기 벌써 다섯 번째거든?!”
“후후.”
“…이 짜식, 일부러였구나!”
팀의 막내들끼리 장난치는 걸 웃으며 바라보던 유지가 임승준에게 물었다.
“다른 별일은 없었고?”
감성소녀 일이 떠올랐지만, 임승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뭐. 딱히 없었어요.”
“형.”
정민솔이 유지에게 말했다.
“애들 다 왔으니 이제 슬슬 포토 타임 때 할 포즈 연습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아, 그래야지. 얘들아!”
유지가 다른 멤버들을 부르며 움직였다. 그리고 정민솔도 몸을 돌리려 할 때, 임승준은 그의 팔을 잡았다.
“민솔.”
“……?”
정민솔이 의아한 얼굴로 임승준을 바라보았다. 임승준은 정민솔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말했다.
“아까 조금 그렇더라?”
“뭐가?”
“내가 모를 줄 아냐? 네가 말할 때 은근히 한율이 평가절하하는 거? 아까도 다른 분야 활약 어쩌고 하면서 가수로서는 별로인 식으로….”
하. 정민솔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웃었다.
“피해망상이세요? 그것도 당사자도 아니고, 그 당사자랑 친하지도 않은 네가? 신기하네. 승준, 아무리 내가 싫어도 그렇게까지 사람을 꼬아보냐? 나도 상처받아, 인마.”
임승준은 가만히 정민솔을 쳐다보다가 조용히 말했다.
“나 알아.”
“뭘.”
“네가 애들한테 무슨 말을 하고, 무슨 짓을 저질러서 데뷔조에서 빠졌는지 다 안다고.”
“그렇겠지. 차남석이 다 말했을 테니까. 왜, 그걸로 나 협박이라도 하게? 그런데 난 이미 애들한테 다 사과했거든? 오늘 새벽에 아무렇지 않게 인사하는 거 못 봤냐?”
“넌 생각하는 게 진짜…. 뭐 눈엔 뭐만 보인다더니.”
“뭐?”
정민솔이 미간을 왈칵 구겼다.
“차남석 스피커랑 호 형 반지 훔친 진짜 범인에 대해 대표님한테 말하러 갔을 때, 호 형이 너랑 도저히 같이 팀 못 하겠다고 대표실로 올라왔었거든. 그때 들었다. 됐냐?”
“너…!”
누가 듣진 않았을까, 황급히 주변을 살피는 정민솔을 향해 임승준은 계속 말을 이었다.
“어쨌든 앞으로 말조심해. 잠깐 연습생 생활 함께했다고 다 안다는 식으로 이 말 저 말 흘리지 말라고. 그리고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건 서한율도 아니고 날 위해서야. …나, 어스래빗 데뷔조에 언급조차 안 됐을 때 진짜 그만둘까 고민 많이 했었거든?”
임승준은 짧게 한숨을 쉬곤, 정민솔의 팔을 잡아당기며 강제로 시선을 맞췄다.
“네가 속으로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는데, 호 형이나 애들한테 했듯이 이 팀 분위기 개차반 만들면, 그땐 내가 가만 안 둬. 알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