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5시. 뉴욕 K-POP 콘서트 레드 카펫이 시작되었다. 입장 순서는 무대 순서와 같아, 어스래빗은 퍼플아워 다음인 네 번째였다.
무전이 울리고 대기하고 있던 차가 슬슬 레드 카펫 앞으로 이동해 멈췄다. 경호원이 문을 열어주자 셔터 소리가 고막을 때렸다.
차카차카차칵. 어스래빗 멤버들은 소음과 눈을 아프게 하는 환한 조명, 셔터 불빛을 견디며 환하게 웃었다. 현장엔 어스래빗의 <파라솔>이 크게 흘러나왔다.
몸에 맞는 슈트를 걸친 멤버들이 포토존 단상으로 올라가 일렬로 서자, 레드 카펫 진행 MC가 마이크에 대고 말했다.
[인사 부탁드리겠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어스!”
“래빗!”
“인사드립니다!”
[먼저 왼쪽 봐주세요! …이번엔 정면!]
손구호를 한 기본적인 포즈, 키가 큰 멤버 네 명이 앞에 제각기 다른 포즈로 앉고, 나머지 멤버들이 그 뒤에 서서 거만한 표정을 짓는 등, 미리 연습한 포즈를 차례대로 선보였다.
[어스래빗! 미국 K-POP 콘서트는 오늘이 첫 참가잖아요. 소감 부탁드릴게요!]
진행 보조 스태프가 멤버들에게 마이크 두 개를 건넸다. 멤버들은 유호와 차남석에게로 넘겼다.
차남석이 미리 준비한 대답을 영어로 했다.
[뉴욕 K-POP 콘서트에 참가하게 되어 굉장히 기쁘고, 설렙니다. 오늘 만나는 관객 여러분도 우리와의 첫 만남, 첫 무대를 보고 이런 감정을 느끼게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할 것 같습니다.]
[그럼 미리 행복한 표정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차남석은 마이크를 옆에 있던 한율에게 넘기곤 활짝 웃으면서 우아하게 턴, 정확히 정면을 향해 딱 멈춰서서 윙크와 손하트를 날렸다.
꺄아악! 누가 봐도 잘생긴 그의 애교에 레드 카펫 관람객 사이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멤버들도 그 모습을 생글생글 웃으며 바라보았다. 차남석이 저걸 위해 대기실에서 얼마나 연습했는지 잘 아는 까닭이었다.
행여 발음 실수를 하진 않을까 걱정됐는지, 그리 친하지도 않은 라이언을 붙잡아 귀찮게 굴고, 거울 앞에선 윙크를 비롯해 여러 버전의 미소와 포즈를 연습하곤 멤버들에게 의견을 물었다.
『야, 이게 낫냐…, 방금 게 낫냐?』
『너무 완벽한 윙크보다는 살짝 어설픈 느낌이 나도록, 조금 귀엽게요.』
『…이렇게?』
포토타임과 인터뷰는 5분 남짓으로 끝났다. 다시 <파라솔> 노래를 들으며 퇴장한 어스래빗 멤버들은, 백스테이지 대기실과 연결된 복도 모퉁이를 돌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우성이 포인트 안무 시범 도중에 구두 한 짝 덜렁거리는 거 보고 내 심장도 흔들렸다.”
“그러게, 내가 키 높이 깔창 작작 깔라고 했어, 안 했어.”
“깔창 보이그룹으로 생중계로 망신당할 뻔.”
“…죄송함당.”
뒤쪽에선 다음 레드 카펫 순서인 감성소녀의 발랄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유창한 영어로 인사하는 제유의 밝은 목소리도.
몇 시간 전, 어스래빗은 콘서트 참가팀 중 그들보다 선배인 팀의 대기실로 인사를 하러 갔다. 인사 순서는 인기순이 아닌 데뷔 순서. 그래서 감성소녀를 가장 먼저 찾아갔다.
감성소녀는 제유와 순형이 살벌하게 싸우고 있었단 목격담과 달리,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그들을 반겨주었다.
『첫 미국 공연 축하해요.』
제유는 그들을 향해 웃으며 축하 인사를 건넸다. 미미는 한율에게 친한 척 표정에 애교까지 섞어 말을 건넸다.
『내일 바로 한국 가? 아니면 뉴욕에서 조금 놀다가 가?』
전혀 살벌하지 않은 분위기에, 어스래빗 멤버들은 ‘평소보다 조금 과격하게 싸웠을 뿐, 이제 괜찮나 보다’ 하며 인사를 마치고 나왔다.
지금도 저렇게 꺄르르 웃으며 인터뷰를 잘하고 있고.
“한국은 지금 아침 7시 즈음인가?”
이윽고 백스테이지에 마련된 임시 대기실에 도착했다. 대기실에 설치된 TV에선 현재 레드 카펫 상황이 고스란히 나왔다. 감성소녀가 막 퇴장하고, 걸그룹 아이허니가 올라오고 있었다.
멤버들은 무대의상으로 갈아입으며 떠들었다.
“응. 그래도 너튜브 뮤닷 채널 통해서 보는 사람이 많은 것 같아. …어? 동생한테서 톡 왔다.”
“뭐래? 잘 보고 있대?”
강보배가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오빤 왜 한마디도 안 해? 라고.”
“너희 오빤 입 열면 깬다고 전해라.”
“영어만 하면 버퍼링이 걸려서 안 된다고 전해라.”
“…….”
“왜 우리 카리스마 래퍼 기를 죽이고 그래욧?!”
그때, 문 너머 복도에서 소란이 느껴졌다. 꺄악, 여성의 짧은 비명, 그리고 여러 사람이 놀라 달려가는 기척.
“……?”
마침 문 근처에 있던 한율은 의아한 얼굴로 문을 열고 복도를 내다보았다. 멀지 않은 곳에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몰리고 있었다. 그 사이로 발을 동동 구르며 어쩔 줄 몰라 하는 감성소녀 멤버들.
감성소녀의 매니저가 복도에 쓰러진 누군가를 업었다.
“어, 어떡해…!”
“언니! 제유 언니…! 눈 좀 떠봐!”
곧 제유를 업은 매니저와 다른 감소 멤버들, 스태프들, 경호원들이 앞을 우르르 지나갔다.
매니저의 등에 업힌 제유는 의식을 완전히 잃어 온몸이 축 늘어진 상태였다. 그녀의 손목에서 팔찌가 스르륵 빠져 바닥에 떨어졌다. …챙.
한율의 뒤로 어스래빗 멤버들이 기웃거렸다.
“뭐야? 무슨 일이야?”
“제유 선배님 기절한 거야?”
“아이고, 어떡하냐….”
“…….”
한율은 몸을 굽혀 바닥에 떨어진 제유의 팔찌를 주웠다. 팔찌 안쪽에 새겨진 문장으로 시선이 갔다.
[The busy bee has no time for sorrow.]
바쁜 벌은 슬퍼할 시간이 없다.
허튼 생각 하지 마
어디선가 들어본 적 있는 명언. 그것도 일부러 새긴 것 같았다. 그렇다면 이건 회사 소유나 협찬이 아닌 제유의 개인 물건일 터.
“그 팔찌는 뭐야? 방금 떨어진 거야?”
“네, 제유 선배님한테서.”
“잠깐 길 좀 비켜줄래, 얘들아?”
한율과 멤버들은 옆으로 비켜섰다. 오동식 팀장이 대기실을 나서며 말했다.
“무슨 일이 생긴 건지, 큐시트가 변경되는 건 아닌지 알아보고 오겠습니다. 매니저 세 분은 애들 개인행동 절대 못 하게 하세요. 한율이 넌 그 팔찌 이리 주고. 내가 감소 매니저한테 전달할게.”
“네.”
한율은 오 팀장에게 제유의 팔찌를 넘겼다.
문이 닫혔다. 조유찬이 한숨을 푹 내쉬더니 문가에 선 멤버들에게 손짓했다.
“공연장에 응급 의료진도 있고 가까운 곳에 병원도 많으니 괜찮을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7시. 뉴욕 K-POP 콘서트가 시작되었다. 감성소녀가 제유 없이 무대에 오르기로 하여, 공연은 예정 큐시트대로 진행되었다.
첫 팀의 무대가 끝나고 등장한 MC들은, 감성소녀의 제유가 과로로 쓰러져 오늘 무대엔 오르지 못한다고 관객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너희들도 체력이랑 스트레스 관리 잘해. 어디 아프면 아프다고 솔직히 말하고. 참다가 병나는 게 더 안 좋아.”
“네.”
“그럼 가자.”
두 번째 순서인 원제로의 무대가 막 시작될 무렵, 어스래빗은 백스테이지로 이동했다. 원제로 다음인 퍼플아워의 무대. 어스래빗 멤버들은 생수로 목을 축이고, 인이어와 마이크를 확인했다.
“우성아, 깔창 뺐지?”
“걱정하지 마. 내가 무대에 설 때 깔창 깔고 올라가는 거 본 적 있어?”
한율은 백스테이지에 설치된 거대한 TV를 통해, 현재 생중계로 송출되는 퍼플아워의 무대를 보았다.
신인이지만 괜히 대형 기획사인 아림 엔터가 내놓은 아이돌이 아니었다. 안무 동작이나 무대 매너, 여유를 보면 데뷔 3년 차라고 해도 믿을 정도. 진은수도 열심히 표정 연기를 연습했는지, 부담스러울 정도로 상큼발랄했다.
‘잘하네.’
퍼플아워가 돌출 무대로 이동했다. 어스래빗 멤버들은 스태프들의 안내에 따라 메인 스테이지 뒤쪽으로 움직였다.
퍼플아워가 관객들에게 인사하고 두 번째 곡을 시작할 무렵엔 제유를 제외한 감성소녀 멤버들이 백스테이지로 왔다. 심각한 얼굴로 무어라 대화를 나누면서 동작을 맞추는데, 음악 소리와 관객들의 함성, 악을 쓰며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스태프들 때문에 전혀 들리지 않았다.
“잘하자!”
유호가 멤버들에게 큰 소리로 말하며 주먹을 내밀었다. 멤버들은 눈치껏 둥글게 모여 주먹을 내밀었다.
“어스!”
“래빗!”
“가자!”
이윽고 퍼플아워의 무대가 끝났다.
새카만 메인 스테이지. 어스래빗 멤버들은 작은 발광 테이프 표식을 의지하며, 드라이리허설 때 숙지했던 위치를 찾아 대형을 갖췄다.
신인 퍼플아워에 대한 기대감을 나누던 MC들이 이번엔 어스래빗을 언급했다. 작년에 데뷔하여 대한민국 공영방송국에서 신인상을 받은, 어쩌고저쩌고.
[…어스!]
[래빗!]
긴 소개를 끝낸 MC들이 어스래빗을 호명, 장내가 새카맣게 암전되었다.
촤아아…. 삐이이…. 중앙 무대 위에 설치된 4면 전광판에서 어스래빗의 [Breaching] 인트로 영상이 흘러나왔다. 우웅…. 공연장엔 무대를 둘러싼 만 명의 거대한 기척과 파도 소리, 고래의 울음소리가 섞여 신비로운 울림을 만들어 냈다.
여기에 새로 만들어진 멤버들의 프로필 필름 영상이 지나고, 서서히 메인 스테이지 조명이 밝아졌다.
꺄아아악! 어스래빗 멤버들의 실루엣을 본 관객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리액션이 시원시원하네.’
한율은 새삼 생각하며 음악에 맞춰 몸을 움직였다.
* * *
“너 이거 뭐야.”
툭. 푸른색 담요 위로 작은 약병이 떨어졌다.
“…….”
화려하고 진한 화장에다 인조 속눈썹을 붙인 무거운 눈꺼풀이 내려갔다.
제유는 입을 열었다.
“SSRI. 정신과에서 합법적으로 처방받은 거고, 혹시 몰라 영문처방전도 가지고 왔으니 아무 문제….”
“정신 나갔어, 너?!”
1인 병실에 매니저의 목소리가 쩌렁 울렸다. 그는 누가 듣진 않았을까 황급히 문 쪽을 보곤 목소리를 낮췄다.
“야, 이 미친년아. 돌았니? 정신과? 정신과?! 씨발, 네가 한 게 뭐 있다고 정신과 약을 처방받아, 뭐가 힘들다고! 너도 약쟁이로 실검에 오르내리고 싶어?”
“마약 아니고 항우울제야. 선생님하고 충분히 상담해서….”
“그게 그거지! 항우울제든 신경안정제든, 뭐 하나 트집 잡아 욕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한텐 똑같은 취급인 거 너도 잘 알잖아!”
제유는 입술을 콱 깨물며 시선을 내렸다. 매니저는 화가 섞인 한숨을 푹 내쉬곤 잔뜩 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예쁘고 밝은 모습만 보여줘도 모자랄 판에, 실상은 우울해서 약 처먹고 있다는 거 알려져 봐. 그것도 여자 아이돌이! 지금까지 네가 쌓아온 거? 무너지는 거 한순간이야, 유제희. 너 그러려고 지금까지 참았어? 악플이랑 개소리 루머, 성희롱 이거 다 견뎠던 힘든 시간을 이딴 식으로 버리고 싶냐고.”
“그렇게 걱정하는 척하면서.”
제유는 눈을 들어 매니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내 아픔을 죄로 몰아가지 마.”
“야, 유제희.”
“그리고 내가 전에 말했지? 내 가방 함부로 뒤지지 말라고.”
“하….”
매니저는 대놓고 한숨을 쉬었다.
“정확히 무슨 약인지는 몰라도, 네가 약 먹는 거 애들이 알고 있었어. 너 쓰러지니까 그 약 때문은 아닐까, 네가 복용 중인 약이 뭔지 의료진한테 알려야 한다는 생각에 애들이 찾아낸 거라고. 다 너 잘못되진 않을까 걱정돼서.”
“…….”
“특히 순형이가 얼마나 미안하다고 울었는지….”
“나가. 쉬고 싶어.”
매니저는 가만히 제유를 노려보다가 몸을 돌렸다.
“…아오, 씨발.”
드륵.
“아.”
문을 활짝 열었던 그는 밖으로 나가려다, 다시 제유에게로 돌아왔다.
“자.”
툭. 항우울제 옆으로 팔찌가 떨어졌다.
“내가 너 업고 뛰었을 때 떨어진 거 서한율이 주웠다고, 어스래빗 매니저가 대신 전해달라고 하더라.”
“…….”
“그리고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매니저가 삿대질하며 말을 이었다.
“허튼 생각 같은 거 일절 하지 마. 며칠 있으면 너희 언니 결혼한다며.”
“…알았으니까 그만 좀 나가.”
매니저는 이번엔 군말 없이 병실을 나갔다.
문이 닫히고 병실에 혼자 남겨지고 나서야, 제유는 참았던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흐윽….”
항우울제가 든 약병과 화려한 팔찌가 그녀의 눈물을 맞고 반짝거렸다. 울음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도록 힘겹게 억누르며, 제유는 팔찌를 콱 움켜쥐었다.
그렇게 얼마나 울었을까.
제유는 멍하니 있다가 침대 옆 선반에 놓인 자신의 가방을 집었다. 예전에 팬에게 받은 작은 손거울을 꺼내 얼굴을 확인. 흡사 공포영화에 나올 법한 몰골로 변한 제 모습을 보곤 힘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이번엔 핸드폰을 꺼냈다.
너튜브 뮤닷 채널, 뉴욕 K-POP 콘서트 생중계 영상.
[어스!]
[래빗!]
[인사드립니다!]
방금 막 한 곡을 끝냈는지, 어스래빗 멤버들의 이마와 목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지친 내색 대신 환한 미소를 지으며 유창한 영어로 관객들에게 인사했다.
‘얘네 다음이 우리 팀 차롄데….’
아마 지금쯤 멤버들은, 쓰러져도 하필 콘서트 직전에 쓰러지냐고 속으로 투덜거리고 있지 않을까.
그래도 크게 걱정되진 않았다. 성격은 좀 그래도 아이돌 7년 차다. 지금까지 겪은 아찔한 방송사고에 비하면, 멤버 한 명 빠진 걸 커버하는 것쯤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래, 나 한 사람 빠져도….’
제유는 가방에서 클렌징티슈를 꺼냈다. 거추장스러웠던 인조 속눈썹을 떼어내고, 화려했던 화장을 천천히 지웠다.
서한율의 청량한 음색이 들렸다.
[파도가 앗은 발자국, 사라진 길.]
[내가 펼쳐 찾아갈게, Parasol.]
20여 분 뒤. 빈 병실 쓰레기통엔 항우울제가 든 약병 하나만 덩그러니 처박혔다.
* * *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관객들 반응이 굉장히 좋았어요.”
오동식 팀장이 대기실로 돌아온 어스래빗 멤버들을 반겼다. 멤버들은 저마다 씩 웃곤 빈자리에 털썩 앉았다. 2.5곡을 연달아 부르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자, 이거 하나씩 마시고.”
“감사합니다.”
오 팀장은 직접 뚜껑을 딴 음료를 멤버들에게 하나씩 건넸다. 한율은 받자마자 단숨에 내용물의 반을 비우곤 입을 떼어냈다.
“…후.”
달달하면서도 시원한 음료를 마셨더니, 무대에서 발산한 기력이 아주 조금이나마 회복되는 느낌이었다.
TV에선 감성소녀가 막 두 번째 곡 2절을 부르고 있었다. 메인 보컬인 제유가 빠진 자리는 다른 보컬 파트 멤버들이 돌아가면서, 고음은 더블링을 쳐서 메웠다.
박가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보아라. 저게 7년 차 선배님들의 연륜이란 것이다.”
“아까 백스테이지에서 진지하게 의논하면서 맞춰보던 게 안무 동선이었나 보다.”
“세 시간 안에 저렇게 맞춘 걸 보면 참 대단하기는 해. 정말 경험은 무시할 수 없는 듯.”
“응.”
그 후 어스래빗은 다른 팀들의 무대를 TV로 보다가, 마지막인 히아신스 차례가 될 때 즈음 거울을 확인하곤 다시 백스테이지로 이동했다. 백스테이지에는 히아신스를 제외한 7팀이 모두 모여있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커다란 음악 소리에 묻혀 잘 들리진 않지만, 그들은 서로를 향해 꾸벅꾸벅 인사를 나눴다. 감성소녀 멤버들은 후배들의 인사에 고개만 대충 끄덕이곤 시선을 돌렸다. 그러곤 저들끼리 심각한 얼굴로 속닥속닥.
후배들은 제유가 걱정되어 그런가 보다 하며 불쾌한 내색을 하지 않았다. 제유가 의식을 차리고 병원에서 무사히 퇴원, 현재 호텔에서 쉬고 있다는 소식을 매니저들을 통해 듣긴 했지만.
“……?”
그때 한율의 눈에, JE가 미심쩍다는 표정으로 감성소녀 쪽을 힐끗거리는 모습이 들어왔다.
스태프들이 뛰어다니며 외쳤다.
“이제 슬슬 준비할게요!”
히아신스가 4번째 곡을 마칠 무렵 전 출연진은 메인 스테이지로 올라갔다. MC들의 마무리 인사. 뉴욕 K-POP 콘서트 2일 차 출연 아이돌들은 희망을 담은 노래를 함께 부르며 무대 여기저기로 자유로이 움직이거나 관객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어스래빗 멤버들은 카메라가 자신들을 잡았을 때, 대기실에서 미리 연습한 대형 하트를 만들었다.
“흐아…. 호텔로 돌아오니까 이제야 뉴욕 콘서트가 끝났다는 실감이 들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강보배 옆에서 이건우가 비장한 얼굴로 말했다.
“오늘의 무대 실수는 LA에서 만회한다.”
“내일 우리 몇 시 비행기지?”
우르르 엘리베이터에 탑승하고, 문이 닫힌 뒤에야 대답이 나왔다.
“2시 반 비행기요.”
“라이언, 동생은 모레 보기로 했지?”
“응.”
“호 형, 이따가 아래층에 갈 거야?”
“아래층?”
“지헌 선배님이랑 오늘 공연 끝나고 술 마시자 얘기 나누는 것 같던데. 설마 밖에서 마실 건 아니지?”
“당연히 아니지.”
떠드는 동안 엘리베이터는 그들의 객실이 있는 층에 도착했다. 조유찬이 말했다.
“내일 아침에 체크아웃하는 모습 촬영 있는 거 잊지 않았지? 호빵처럼 퉁퉁 부어서 찍히고 싶지 않으면 너무 늦게까지 놀지 말고 일찍 자. 다들 오늘 하루 수고했어.”
“수고하셨습니다.”
“다들 씻고 내 방으로 모여. 모니터링은 하고 쉬어야지.”
“네.”
한율은 유호에게 대답하며 객실 문을 열었다.
“……?”
두 대의 침대에 못 보던 상자가 두 개씩 놓여 있었다. 하나는 고급스러운 문양이 새겨진 상자, 다른 하나는 리본으로 화려하게 포장된 상자였다.
“뭐지? 첫 미국 공연 축하 기념 선물인가?”
길우성이 후다닥 침대로 달려가더니 풀썩, 앞으로 고꾸라지듯 엎어지곤 상자를 집었다. 다른 객실에서도 ‘이게 뭐야?’ 하며 의아해하는 멤버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율은 리본이 없는 상자를 먼저 열었다. 각양각색의 편지 봉투나 카드가 담겨 있었다.
“공연장에 온 분들의 팬레터네.”
히히. 길우성이 헤벌쭉 웃으며 상자를 품에 안았다.
“선물 맞는구먼?”
공연이 시작되기 전 어스래빗 팬레터 함에 담겼던 편지들. 공연 후기 메시지는 내일 아침에나 올 터다.
팬레터는 자기 전에 읽기로 하고, 한율은 이번엔 리본으로 화려하게 포장된 상자를 개봉했다.
“……?”
상자 안에는 체크카드 한 장만 달랑 들어있었다.
그런가 보다
“체크카드? 우리가 받은 상자엔 지도만 들어있던데?”
오늘 한 공연 모니터링을 하기 위해 유호의 방에 모인 멤버들. 상자를 챙겨온 박가람이 지도를 꺼내 보여주었다.
라이언이 바로 지도를 알아보았다.
“워싱턴 지도다.”
“그런데 이 표시는 뭐야? 혹시… 일본에서처럼 용돈 봉투를 숨긴 곳인가?”
“우리 워싱턴에서도 촬영하는 거야?”
“그런 것 같아. 오다가 VJ 형들 방에 들러서 ‘형들은 워싱턴 맛집 어디까지 알아봤어요?’ 물어보니까 씩 웃더라고.”
“어쩐지 객실에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더라니.”
“어쩐지 대표님이 여행경비는 걱정하지 말라고 하시더라니. 다른 방은? 상자에 뭐 들어있었어?”
유호의 방엔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었다. 처음엔 모니터링을 하는 모습도 뉴욕 K-POP 콘서트 비하인드 영상에 넣으려 설치한 거구나 했으나, 돌아가는 상황을 보아하니 워싱턴 여행 영상 콘텐츠 초입부에도 들어가지 않을까.
“우리 방엔.”
“전부 다 까발리면 재미없지.”
차남석이 씩 웃으며 이건우의 대답을 막았다. 라이언도 어깨를 으쓱였다.
“비밀로 할래.”
“어어? 뭐야, 이거? 팀전으로 가자는 건가?”
길우성이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어차피 돈은 우리한테 있거든요?”
“잠깐만. 설마… 상자 안에 항공권이 있는 건…….”
부스럭. 박가람은 보여주었던 지도를 단숨에 접어 품에 감췄다. 강보배가 고개를 저었다.
“항공권은 아니야. 안심해도 돼.”
“으음….”
실상은 멤버들끼리 경쟁해서 겨룰 만한 게 아니더라도, 나중에 가면 별 게 아니더라도 카메라가 돌아가는 이상, 흥미로울 법한 전개로 이끌긴 해야 한다.
멤버들은 상자 속 내용물을 밝히지 않는 다른 이들을 채근하는 대신, 장난스러움을 반 삼아 경계심 어린 시선을 던졌다.
“자자.”
유호가 가벼운 박수로 주의를 끌었다.
“일단 오늘 무대 모니터링부터 합시다. 나 아래층에 놀러 가야 해.”
“팀 리더들끼리 술 마시면서 무슨 얘기 나눌지 궁금하다.”
“우리 흉이나 보겠지. 후우….”
박가람이 한숨을 푹 내쉬며 술을 잔에 따르는 포즈를 취했다.
“동생 놈들 말 더럽게도 안 들어. 어우, 징글징글해.”
그러곤 원샷 흉내. 이건우가 키득거리며 한마디 거들었다.
“나중에 호 형 술주정하면 촬영하는 거 잊지 마.”
유호가 웃으면서 화냈다.
“모니터링 좀 하자고, 좀. 이 말 안 듣는 동생 놈들아.”
모니터링과 반성 시간을 마치고 객실로 돌아왔을 땐 어느새 자정이 지나 있었다. 한율은 침대에 편히 누워서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포털사이트 연예 뉴스란.
[감성소녀 제유, 뉴욕 K-POP 콘서트 직전 쓰러져 응급실행]
[감성소녀 제유, 현재 호텔에서 휴식 중 “심려 끼쳐 죄송”]
[뉴욕 K-POP 콘서트 출연 걸그룹, 멤버 간 다투는 모습 논란 일파만파]
[7년 차 걸그룹, 해외 스케줄 도중 비속어 욕설 싸움 논란]
[감성소녀 측, “멤버들 간 단순 의견 충돌, 싸운 거 아냐”]
‘난리 났네.’
기사를 보아하니 너튜브에 누군가 감성소녀 제유와 순형이 다투는 동영상을 올렸다가 삭제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이미 해당 동영상 캡처본이 여기저기 퍼지고, 동영상을 핸드폰으로 재촬영한 영상까지 나도는 상황.
[논란 속 제유, 의미심장 SNS “얼마나 더 바빠야 할까.”]
-ㅈㅇ가 ㅅㅎ이 때린 건 안 찍히긴 했는데 ㅅㅎ이가 잘못했다에 내 손모가지 검ㅇㅇ
-한 살 위 언니한테 ㅁㅊㄴ이라고 욕하는 거 보고 ㄷㄷㄷ; 평소에 얼마나 개무시를 했으면 사람들 다 보는 곳에서도 저런 욕을 해
ㄴ처맞아도 쌈ㅇㅇ
-ㅈㅇ가 성형도 많이 하고 무뚝뚝해서 세 보이긴 하지만 속은 완전 여리고 착함. 한가할 땐 유기견 보호센터나 이런저런 봉사 활동 자주 다니고, 바쁠 땐 사료랑 영양제 잔뜩 보내는 아이임.. 아픈 개 수술비도 대주고...
ㄴ그런 애가 얼마나 빡쳤으면 ㅅㅎ이를 때렸을까
ㄴ과로 아니고 스트레스로 인한 실신일 듯
-싸움 영상 안 봤으면 감소 무대하는 거 보고 한 명 빠졌는데도 씩씩하게 잘하네 이 칭찬할뻔했잖아
-제유가 올린 사진 팔찌에 뭐라고 적힌 거예요?
ㄴThe busy bee has no time for sorrow. 바쁜 벌은 슬퍼할 시간이 없다. 윌리엄 블레이크 명언.
ㄴ마음 존나 복잡해진다.... 슬픔에 빠지고 싶지 않으니까 바쁘게 살겠다는 거잖아...
-안 지치냐, 제유야? 조금 쉬면서 마음을 다스리는 게 얼마나 중요한데... 데뷔 7년 차라도 올해 고작 24살이 벌써 뭐가 그렇게 슬픔이 많아서 저런 문구를 새기면서까지 다녀..
-성괴인 것만 봐도 답 나오지 않나? 폭행 가해자 동정하는 것 봨ㅋㅋㅋㅋㅋ아 홀아비 냄새 역겹네
ㄴ댓글모음이나 처닫고 지껄여라 아이허니 처돌아^^
-얘네 지금까지 이런저런 목격담이랑 논란 많았는데, 털털하고 솔직하다는 이미지로 다 뭉개버리고 온 거. 그게 이번에 크게 터진 거지
-눈나 나도 때려줘
-제유 LA에 살 때 따돌림이랑 괴롭힘당했다고 하지 않았었나?
ㄴ인복은 지지리도 없는 듯
ㄴ괴롭힘을 유발하는 타입인가 보짘ㅋㅋㅋ
ㄴ오ㅇ0ㅇ 강약약강 짐승의 논리를 지닌 가해자 ㅅㄲ세요? (신기)
한율은 나지막하게 한숨을 쉬면서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그래도 팔찌 사진을 보니 잘 전달이 되긴 한 모양.
“으으음….”
“……?”
길우성이 앓는 소리를 내며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영어 공부 더 열심히 해야겠어….”
길우성은 미국 팬들에게 받은 팬레터 문장을 하나하나 사과패드에 입력, 번역 기능을 사용해 읽고 있었다.
“너무 오래 걸려…. 답답해…….”
“일일이 치지 말고, 사진 텍스트 인식 기능으로 번역하면 되잖아.”
“아! 그 기능이 있었지?!”
길우성이 벌떡 일어났다. 찰칵, 찰칵. 한율은 이내 들리는 카메라 앱 소리에 미간을 찡그렸다.
‘괜히 알려줬나.’
시끄러웠다.
한율은 TV를 켜곤, 침대 옆에 두었던 편지 상자를 집었다.
다음 날. 어스래빗 멤버들은 라과디아 공항으로 향했다. 무대의상과 인이어와 마이크 등, 공연 스케줄에 사용했던 물건은 모두 한국으로 돌아가는 스태프들이 챙겨 JFK로.
“우리는 분명히 워싱턴으로 여행을 가는 것일 텐데, 일을 하러 가는 이 기분은 무엇일까요.”
“음…. 옆에 카메라가 있어서?”
캐리어 하나와 중요 소지품을 넣은 가방을 하나씩 메고 공항 로비를 걷는 중. 그들 곁에는 그라 영상 콘텐츠 PD 하나, VJ 셋, 경호원 셋, 매니저 셋이 붙었다.
“그나저나 여기 공항 슈슉버거 감튀가 그렇게 맛있다던데.”
“짐 빨리 부치고 먹으러 가자.”
“가자, 먹는 게 남는 거다!”
어스래빗 멤버들은 짐을 부치고 패스트푸드점으로 향했다.
“그런데 점심값은 어떻게 해? 각자 계산?”
“막내들이 받은 체크카드 있잖아.”
“그거 안에 얼마 들어있을 줄 알고. 그리고 워싱턴에서 쓰라고 준 것 같단 말이지.”
유호가 지갑을 꺼냈다.
“내가 살게, 얘들아. 부담없이 골라.”
“유호 최고야!”
“큰형 최고야!”
매니저들은 멤버들이 엄청난 칼로리를 지닌 메뉴를 고르는 걸 보고도 멀리에서 슥 미소만 지을 뿐, 말리지 않았다.
“잘 먹겠습니다.”
곧 멤버들은 4인용 테이블 두 곳에 자리를 잡고 점심을 먹었다. 한율은 휴대용 물티슈로 손을 닦은 뒤 레모네이드부터 한 모금 마셨다. 그라 영상 콘텐츠 PD와 VJ들이 카메라를 들고 그들의 모습을 촬영했다.
“아.”
걸신들린 듯이 버거를 해치우던 박가람이 문득 상체를 숙였다. 그러곤 다른 테이블에 앉은 라이언, 강보배, 차남석, 이건우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속닥거렸다.
“내가 어젯밤에 인터넷으로 지도에 표시된 위치를 찾아봤거든?”
“어디였어요?”
“한 곳은 주미 대한제국 공사관.”
“올해 5월에 재개관했다는 거기요?”
“오오, 서한율. 아네?”
“예전에 기사로 잠깐 본 기억이 있어요.”
공사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던 길우성은 핸드폰으로 인터넷에 들어가 주미 대한제국 공사관을 검색했다.
“우왕, 이런 곳도 있…. 잠깐.”
길우성이 다른 테이블에 앉은 멤버들의 동향을 살폈다. 그러곤 박가람처럼 상체를 나누며 속닥. VJ의 카메라가 더 가까이 붙었다.
“그러고 보니 광복절 얼마 안 남지 않았어?”
유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길우성이 입을 벌리며 제 팔을 슥슥 쓸었다.
“와, 소름. 대표님이 이런 그림을 그리실 줄이야…!”
“그럼 다른 지도에 표시된 장소는 어디였어요?”
“한국전 참전용사 기념비.”
“어? 거긴 원래 가기로 했던 곳 아닌가?”
“대표님한테 어디 어디 가는지는 구체적으로 말씀 안 드렸었어.”
박가람이 낮은 한숨을 흘렸다.
“미국에 있는 한국의 흔적을 찾아 역사 공부를 하고 오라는 대표님의 뜻이 느껴지는구먼.”
“벌써 부담으로 목이 멜 것 같구려.”
한율은 길우성의 쟁반에 있는 콜라를 집어, 바로 앞으로 내밀었다.
“탄산 마셔.”
“고맙네, 친구.”
“그런데 광복절 기념으로 미션이 주어진 거면, 다른 형들하고도 정보 교환을 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경쟁 구도로 갈 만한 주제는 아니잖아요.”
“그런가?”
“그런 것 같아.”
유호가 한율의 말에 동의를 표하자 길우성도 고개를 끄덕였다. 박가람도 솔깃하다는 얼굴로 끄덕끄덕.
“그럼 그런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