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3화 (113/427)

* * *

“와…….”

테디는 인터넷과 SNS에서 ‘어스래빗’을 검색해보곤 깜짝 놀랐다. K-POP 팬들이, 새롭게 눈여겨볼 만한 보이밴드가 등장했다며 어스래빗을 언급하고 있는 까닭이었다.

여기엔 누군가 너튜브에 올린 어스래빗 미니 팬 미팅 영상도 한몫하는 것 같았다.

본래 촬영이 금지된 장소였는지 영상은 몰래 찍은 듯 초점이 엉망이었지만, 그래도 대략적인 상황 유추는 가능했다. 직접 다녀온 사람들이 댓글로 친절하게 설명까지 곁들여주고.

“하하….”

테디는 헤드셋을 끼고 초점이 엉망인 영상을 보며 조용히 웃었다. 특히 라이언이 자기소개했을 땐 볼륨도 높이고 모니터에 눈을 가까이 대며 집중했다.

…끼익.

“……!”

그러다 밖에서 들린 차 소리를 듣곤 화들짝 놀라 헤드셋을 벗었다. 재생 목록에서 조금 전까지 보던 영상 리스트를 삭제, PC 전원을 끄고 헤드셋을 뽑아 돌돌 감아 정리했다.

그동안 집 안으로 들어온 누군가의 기척이 점점 테디가 있는 방으로 다가왔다.

벌컥.

“밤에 잘 때 외엔 문 닫지 말라고 했니, 안 했니.”

날이 선 어머니, 수잔의 추궁. 교재와 노트를 펼치고 공부하는 척하던 테디는 태연히 대답했다.

“올리비아의 노랫소리 때문에 집중이 안 돼서 잠깐 닫았어요.”

올리비아는 테디가 집에 혼자 있지 않도록 고용된 베이비시터로, 취미가 노래 부르기였다. 실제로 조금 전에도 핸드폰으로 음악을 들으며 신나게 노래를 불러댔다.

수잔은 한숨을 푹 내쉬곤 팔짱을 꼈다.

“올리비아는 방금 돌려보냈으니 이젠 문 열고 공부해. 내일 라이언이랑 몇 시에 어디에서 보기로 했어?”

“라이언이 학교 앞으로 데리러 오기로 했어요. 어디로 갈지는 잘 모르겠지만, 맛있는 걸 사준다고 했어요. 마엘에게 듣지 않았어요?”

“듣긴 했지.”

테디는 수잔을 향해 입가를 살며시 올린 뒤 상체를 바로 했다. 쥐고 있던 펜을 움직이며 공부를 하는 척했다.

제 뒤통수를 빤히 쳐다보는 어머니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테디는 노트에다가 중요하지 않은 포인트를 끼적거리며 그녀가 얼른 나가주기를 바랐다.

“테디.”

“네.”

“비싼 거 얻어먹고 와.”

“네.”

“용돈도 좀 받고.”

“…….”

테디는 대답하지 않았다. 수잔은 잠시 테디를 노려보다가 말없이 방을 나갔다. 테디는 숨을 죽이고 속으로 열을 셌다. 그러곤 그녀의 기척이 완전히 멀어지고 나서야 천천히 숨을 내쉬며 교재 아래에다 끼적거렸다.

[숨 막혀. 도와줘, 라이언. 엄마 담배 냄새가 더 지독해졌어.]

한편 그 시각, 워싱턴 덜레스 국제공항. 라이언은 3년 만에 돌아온 고향의 공기를 깊게 들이마신 후 천천히 내뱉었다.

“하…. 먼지 냄새.”

“이곳이 바로 미국의 수도! 백악관은 어디냐!”

“알아서 뭐 하게요.”

“소원 빌게.”

라이언은 신나게 떠들며 걸음을 옮기는 멤버들을 보았다. 빙긋 올라가는 라이언의 입가를 보며 유호가 물었다.

“왜 그렇게 웃어, 라이언?”

“그냥, 좋아서.”

“그런데 그거, 계속 그렇게 안고 다니면 불편하지 않아?”

유호는 라이언이 뉴욕의 호텔에서 나올 때부터 줄곧 품에 안고 있던 노트북 가방을 가리켰다. 라이언이 사촌 동생의 미들 스쿨 입학선물로 산 사과노트북이었다.

라이언은 빙긋 웃었다.

“전혀.”

상상만 해도 무섭다

8월 7일 아침.

바람이 불었다. 스스스. 작전을 수행하는 형상인 미군 조각상 아래, 풍성하게 자란 풀잎이 일제히 흔들렸다. 어스래빗 멤버들은 준비한 꽃다발과 화환, 편지를 비 앞에 내려놓고 묵념했다.

“…….”

한율 역시 철모와 판초 우의를 걸치고 소총을 든 채 전진하는 모양새인 조각상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들고 있던 꽃을 비 앞에 내려놓고 묵념했다.

지금도 생생히 떠오르는 당시의 기억.

사지가 찢겨 날아온 시신의 철모가 그의 어깨를 강타했다. 그 시신은 ‘로건 워커’와 가까이 지내던 전우이자 친구인 ‘로버트’였다. 그래서 말을 제대로 못 하는 그의 모습에, 사람들은 그가 로버트의 죽음에 큰 정신적 충격을 받았다고 판단, 그를 미국행 배에 태웠다.

몇 달간의 긴 항해. 미국에 도착한 그를 반긴 건 로건 워커의 가족과 로건 워커의 약혼녀인 크리스티나, 그리고… 로버트의 부모인 톰슨 부부였다.

배 안에서 조금씩 익힌 영어로 이해한 그들의 말.

[로버트의 마지막을 들려다오.]

전우의 죽음을 보고 충격받은 기억을 헤집어 괴롭히고자 함은 아니었다. 그들은 아들의 시신이 머나먼 이국땅에 사지가 찢긴 채 묻혔다는 잔혹한 사실만 알고 있었을 뿐, 로건이 PTSD 진단을 받고 돌아온 거란 자세한 사정은 몰랐다.

톰슨 부부는 먼 나라의 전쟁터에서 맞이한 아들의 최후가 정녕 명예로운 죽음이었는지 알고 싶어 했다. 그래서 로버트가 보냈던 편지 속 친한 전우인 로건을 만나기 위해 먼 길을 달려왔고, 눈물을 흘렸다.

[우리의 슬픔이 로건, 너희 가족에게 가지 않아 다행이구나.]

지금도 톰슨 부부의 얼굴이 선명하다. 너라도 살아 돌아와 다행이라며 그를 안아주던 온기, 힘없는 손길도.

“나라면 굉장히 무서웠을 것 같아.”

링컨 기념관으로 향하며 길우성이 조용히 말했다.

“우리나라로 파병 왔던 군인들은 막 입대한 스무 살 정도가 태반이었다고 하잖아. 우리랑 고작 한두 살 차이, 호 형보다 어린 사람들이 총을 들고 남의 나라에서 싸웠다는 게….”

멤버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무거운 한숨을 쉬었다.

“한편으론 정말 대단한 것 같아. 난 누구 한 대 때리는 것도 무서운데.”

“전쟁 싫어. 상상만 해도 무섭고… 평생, 내가 죽은 그다음, 또 그다음 세대에서도 영원히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어.”

“하지만 지금도 지구 어딘가에선 벌어지는 중이지…. 아까 그곳에 새겨져 있던 문구 봤지?”

한율은 조용히 대답했다.

“Freedom is not free.”

“다들 지금 우리가 누리는 평화에 감사하도록 하자. 우리가 노래를 할 수 있는 것도, 지금의 평화가 있어서 가능한 일이니까.”

무거운 분위기를 바꾸려는 유호의 밝은 목소리에, 멤버들도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사아아. 바람과 함께 먹구름이 움직였다. 한율은 휘날리는 머리카락을 손으로 대충 정돈하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

그러곤 잿빛 조각상을 일별하곤 고개를 돌렸다.

어스래빗 멤버들은 그라 영상 촬영 겸 관광을 하며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2시 즈음, 라이언과 헤어졌다. 아침부터 내내 그들 곁에 붙었던 카메라 전원도 꺼졌다.

“그런데 라욘 형 사촌 동생 만나러 가는 데에 왜 오 팀장님이랑 가드 형까지 같이 간 거야?”

“3년 만에 고향에 왔는데 라이언이 정말 사촌 동생만 만나겠어?”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들른 피자 가게. 멤버들은 카메라나 사람들 눈치 볼 필요 없이 편히 식사했다. 그라 영상 콘텐츠 촬영팀이나 조유찬, 윤승우, 경호원 두 명도 테이블에 음식을 한가득 차려놓고 먹었다.

“부모님도 봬야지. 오 팀장님도 WB래빗 관계자로서 직접 인사를 드리기 위해 간 걸 테고.”

“그럼 가드 형은?”

으음. 유호와 이건우, 강보배가 동시에 미간을 찡그렸다. 차남석이 한숨을 내쉬며 커피를 들었다.

“다들 은근히 느끼고 있지 않았어? 라이언 집안도 좀 정상이 아니란 거.”

“어허. 다른 사람의 사적인 이야기는 함부로 하는 거 아냐.”

“…‘도’?”

강보배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차남석을 쳐다보았다.

“아무것도 아냐.”

차남석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곤 화제를 돌렸다.

“우리 이거 먹고 어디 가? 시간상 한 군데 밖에 못 갈 것 같은데.”

“난 항공 우주 박물관 가고 싶음.”

“난 자연사박물관.”

“스파이 박물관도 재밌을 것 같고….”

“두 팀으로 찢어져서 둘러보고, 호텔에서 만나는 게 나을 것 같아요.”

“한율이 넌 어디 가고 싶은데?”

“전 아무 데나 상관없어요.”

짧은 논의 끝에 항공 우주 박물관에 넷, 자연사박물관엔 셋이 가기로 했다. 한율은 항공 우주 박물관 팀이 되었다.

그렇게 흩어졌던 어스래빗은 저녁 6시 정각, 호텔 로비에서 재회했다.

“테디는 잘 만나고 왔어?”

라이언이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응.”

“선물은? 좋아해?”

“당연히 좋아하지.”

어스래빗은 아직 정산을 받기엔 한참 멀었다. 그리고 사과노트북은 고가의 물건. 라이언은 회사에서 달마다 조금씩 받아 모아두던 용돈을 테디의 선물을 사는 데에 모두 썼다.

“내가 1년 넘게 모은 용돈으로 산 건데.”

“사촌 동생 많이 아끼는구나.”

라이언은 눈을 끔뻑거리다 고개를 저었다.

“아닌데.”

“안 아끼는데 1년 넘게 모은 용돈을 입학선물 사는 데에 썼다고?”

“난 멀리 있잖아. 테디도 가족과 집이 세상 전부가 아니란 걸 깨달을 나이야. 노트북은 그걸 위한 도구야.”

“그러니까 그게 동생을 위한 마음에 해준 선물….”

“안 아낀다니까? 안 친해.”

“…그래. 어쨌든 이거 받아.”

이건우는 항공 우주 박물관 기념품점에서 산 작은 장난감 비행기를 꺼내 라이언에게 건넸다.

“멤버들끼리 하나씩 기념으로 갖자고 샀어.”

“와. 나 어릴 때 이거 엄청 갖고 싶었는데.”

라이언이 웃으며 장난감 비행기를 받았다. 길우성도 가방에서 선물을 꺼냈다. 펭귄 자수가 새겨진 슬리퍼였다.

“이건 자연사박물관에서 산 기념품입니다. 지금 신기엔 덥지만, 두 달 정도 지나면 요긴하게 사용될 거 같음요.”

“자연사박물관? 나 어릴 때 정말 자주 갔었는데.”

“가족들이랑?”

라이언이 두 기념품 선물을 양손에 쥔 채 고개를 흔들었다.

“앨리가 휴일만 되면 날 거기로 데려가줬어.”

“앨리?”

“베이비시터. 지금은 고고학자 조수가 돼서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는 것 같아.”

“와우…. 지금도 연락하는 거야?”

“가끔.”

“호옥시….”

그들은 함께 엘리베이터로 이동했다. 박가람이 주변을 살피더니 흥미진진한 얼굴로 물었다.

“첫사랑? 첫사랑? 첫사랑?”

“아닌데요.”

“라이언이 딱 잘라서, 그것도 존댓말로 부정하는 거 보니 진짜 아닌가 보다.”

“쳇….”

“그런데 우리 저녁은 어떡하지? 점심을 너무 늦게 먹어서 생각이 없는데.”

“밤에 룸서비스 시키자.”

“돈 많으세요?”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한율은 오 팀장에게 말했다.

“저희 먼저 올라갈게요.”

“그래.”

그라 영상 콘텐츠팀과 이야기를 나누던 오 팀장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스륵, 덜컹. 어스래빗 멤버들을 태운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후.”

오 팀장은 엘리베이터 숫자가 올라가는 걸 확인하곤 조유찬과 윤승우에게 손짓했다. 진지한 얼굴로.

“두 분은 잠깐 이리로. 라이언에 관해 알려드릴 사항이 있습니다.”

* * *

“아, 배부르다….”

풀썩. 침대 위로 쓰러진 박가람이 뒹굴거렸다. 유호와 라이언이 사용하는 객실에서 룸서비스로 시킨 음식을 잔뜩 먹고 온 참이었다.

한율은 캐리어에서 세면도구를 꺼냈다. 샤워는 호텔로 돌아오자마자 한 터라, 양치와 세수만 하고선 기초화장품을 발랐다.

“서한율.”

“네.”

침대에 널브러진 자세로 박가람이 물었다.

“라이언 상태 조금 이상해 보이지 않았어? 묘하게 들떠서 평소보다 말을 많이 하는 게, 심란함을 감추려고 오버하는 느낌 들던데.”

한율은 거울에 비치는 박가람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느꼈어요.”

그린 라이브 영상 콘텐츠를 촬영할 땐 찾아간 장소 특성 탓에 밝게 웃을 일이 별로 없었지만, 그래도 눈빛이나 표정엔 생기가 반짝거렸다. 그러나 테디를 만나고 돌아온 후엔 자주 웃되, 힘이 없었다.

“분명 안 좋은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이 녀석이 은근히 입이 무겁단 말이지….”

“호 형이랑 건우 형, 보배 형은 뭔가 아는 눈치던데요.”

“아직 나는 믿음직한 형이 아니란 말인가…?! 조금 상처받는구먼….”

“평소 형의 행동을 생각해보면 뭐.”

“…….”

박가람이 눈을 가늘게 뜬 채 한율을 노려보았다. 한율은 거울을 통해 가만히 박가람과 시선을 맞추다가 로션을 마저 발랐다.

“무게감이 전혀 없어서 그런 게 아닐까요.”

“흐윽….”

박가람이 반대쪽으로 뒹굴거렸다.

“그리고 형도 멤버들에게 숨기는 거 있잖아요.”

“내 사정은… 알면 기분 나쁠 수 있는 그런 종류잖아. 특히 호 형은 도망갈 거야. 날 멀리할 거야. 아, 상상만으로도 벌써 상처받는다….”

“진지하게 말하면 괜찮을 것 같긴 한데… 아. 예전에 형이 로크뮤 조명 귀신 얘기로 놀린 적이 있어서, 사실을 말하면 사이가 아예 멀어질 수도 있겠네요.”

박가람이 등을 구부리며 이불을 뒤집어썼다.

“흐엉엉…. 과거의 멍청한 나야, 왜 그랬니….”

다음 날. 어스래빗 멤버들은 뉴욕 라과디아 공항으로 돌아온 뒤 JFK로 이동해 인천행 비행기를 탔다. 그들의 미국 왕복 항공권을 뉴욕 K-POP 콘서트 주관사인 FJ그룹이 직항, 그것도 비즈니스석으로 끊어준 까닭이었다.

“미국 날짜로 8일 낮 비행기를 탔는데, 15시간 가까이 날아왔더니 한국 날짜론 9일 오후 5시가 되었어요.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건우 씨? 바로 내일이 소리구름어워즈예요.”

캐리어 하나만 끌고 다니면서 셀카를 몇 번 찍은 것 외엔 딱히 한 일도 없는데, 비행기에서 내려 지상에 발을 내딛자 피로가 중력에 끌려 바닥과 찰싹 달라붙는 느낌이었다.

“나의 하루는 어디로 갔는가…. 그리고 나한테 시차에 관해서 묻지 말라 그랬지.”

“미국에 갔을 때 앞서 당겨 쓴 걸 반납한 거죠.”

“이틀 후엔 또 돌려받을 테니 걱정하지 마.”

“그리고 LA에서 돌아올 때 또 반납.”

입은 열심히 떠들고 있지만, 멤버들의 눈은 핸드폰과 주위를 살피느라 바빴다. 보다 못한 조유찬이 잔소리했다.

“위험하니까 핸드폰 말고 앞 똑바로 보고 걷자, 얘들아.”

“하지만 형. 우리 거의 하루 내내 세상이랑 단절됐었잖아. 그러니 그동안 한국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얼른 인터넷으로 정보를 파악해야지.”

“와이파이 유료 서비스 신청하겠냐 물어봤을 때 하겠다고 하지 그랬어.”

“비싸잖아여.”

“그래도 위험하니까 다들 핸드폰 집어넣어.”

“네엥.”

입국장에는 어스래빗 슬로건을 든 팬들 수십 명과 기자들, 전문 대리 찍사들이 마중을 나왔다.

“우성아아! 길우성!”

“얘들아, 수고했어!”

“멋있다, 어스래빗! 잘했다, 어스래빗!”

그러나 잠깐이라도 웃어주거나 이쪽 좀 봐 달라는 요구로 주춤했다간, 위험한 돌발상황이 벌어질 가능성이 크다는 걸 그간 몸소 겪었다. 다른 공항 이용객들에게도 민폐고.

멤버들은 눈길도 주지 않고 빠르게 걸었다. 그리고 회사에서 보내준 리무진에 타고 나서야 안도하는 얼굴로 검은색 마스크를 벗었다.

“배고프당.”

조유찬이 그들을 돌아보았다.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 장전 씨한테 포장 주문해서, 숙소에 가져다 놓으라고 할게.”

“그럼 너무 번거롭고 죄송하잖아요. 저희가 알아서 먹을게요.”

“괜찮아. 법카로 결제할 거고, 장전 씨도 추가 근무 수당 받는 거니까.”

좌석에 축 늘어졌던 멤버들이 하나둘 눈을 빛내며 핸드폰을 꺼냈다.

“그럼 얘기가 다르죠. 아, 뭐 먹지?”

한율은 손을 들어 말했다.

“저는 등갈비찜이요.”

“오, 등갈비찜 들으니까 나도 먹고 싶다.”

“난 치즈계란말이.”

메뉴를 다 정한 뒤엔 각자 핸드폰을 들여다보거나 잠을 청했다. 한율은 핸드폰으로 인터넷 기사를 훑었다.

며칠 전 인터넷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감성소녀의 불화 기사와 제유의 실신 사건은 잔재만 살짝 남은 정도였다.

[감성소녀, 라방 진행 중 눈물 화해]

기사 본문엔, 라이브방송을 본 팬들이 정말 진심이 느껴진 화해 현장이었다며 감동을 표했다고 적혀 있었다. 그러나 기사 댓글 온도는 싸늘했다.

-애쓴다...

-얘넨 이미 끝났지 끝물ㅂㅂ

-회사에서 얼마나 잡았으면ㅋㅋㅋㅋ

-참 힘들게 산다

-소속사는 그만 유보살 좀 놔줘라.. 사리나오긋다..

-제유 언니 가뜩이나 말랐는데 더 말랐어ㅜㅜ

ㄴ그래도 슴가는 흠흠

ㄴ신고로 비공개된 댓글입니다.

다른 연예계 이슈는 프랑스로 여행을 간 블블 민준과 산우의 동선과, 이희우의 해외 화보 촬영 동선이 이틀 겹쳤다는 호들갑이었다.

그리고 한율에게 의아함을 던지는 기사 제목 하나.

[배우 강진아, “어스래빗 한율과 학교 코믹 로맨스물 찍고파”]

음원 사재기나 잡아

강진아는 <하울링>에서 윤상진의 사촌 동생 역으로 나왔던 아역 배우다. 당시 그녀의 어머니가 매니저 역할을 했던 기억이 났다.

한율은 기사를 클릭했다. 2년 전보다 부쩍 성숙해진 얼굴로 미소 짓는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나왔다.

최근 주연으로 출연한 웹드라마가 학생들 사이에서 대박이, 조연으로 출연한 지상파 드라마도 반응이 좋아, 그 기세에 힘입어 대담 형식의 인터뷰를 진행한 모양이었다.

[(중략) Q. 앞으로 함께 연기하고 싶은 배우가 있다면?

A. 많은 존경하는 배우 선배님들은 물론이고, 어스래빗의 한율 선배님과도 다시 연기하고 싶어요. 작년 1월에 방영된 SBC <하울링>에서 함께 연기한 적이 있는데 씬이 너무 짧아 무척 아쉬웠거든요. 찍게 된다면 학교 코믹 로맨스물을 찍고 싶습니다. 하지만 사심은 없으니, 이프림(어스래빗 팬덤) 분들은 오해하지 말아 주세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누구나 탐내는 연기천재돌 서.한.율.

-얘 좀 나대는 스타일인 것 같아 별로

-서한율 최근에 이희우랑 영화 찍었다.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진아 씨, 등산 좋아하세요^^?

-ㅅㅎㅇ 원래 성격 싸가지없다던데ㅋ 역시 돈이랑 얼굴이 되면

ㄴ넌 다 없어서 어떡하니..(애잔)

-로맨스??? 찍으면 가만 안 둔다 진짜

‘별일은 아니구나.’

한율은 다른 인터넷 기사를 훑었다.

[소리구름어워즈 라인업 공개, 아림 소속 아티스트 無]

[히아신스, 11일 미국 LA K-POP 콘서트 위해 출국]

[12일 미국 LA K-POP 콘서트 출연 원카운트, 멤버들 컨디션 위해 소리구름어워즈 불참]

“사이가 안 좋아졌나 봐.”

옆자리에 앉은 라이언이 한율이 보는 기사를 보곤 말했다.

“아림이랑 소리구름이요?”

“응. 원래 찬형이네도 우리처럼 소리구름 나갔다가 바로 미국 가기로 했거든. 그런데 오늘 갑자기 소리구름 스케줄 취소 통보받고, 출국이 오늘 저녁으로 앞당겨졌대. 방금 연락 왔어.”

한율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원카운트, 작년에 소리구름에서 신인상 받지 않았어요?”

“응. 그래서 사이가 나빠진 게 더 잘 보여.”

과연. 한율은 기사 댓글을 훑었다.

기사 댓글엔 소리구름 측을 비난하는 원카운트 팬이 태반이었다. 소리구름 측이 히아신스 일로 트집을 잡아, 원래 출연하려 했던 원카운트에게도 오지 말라고 한 게 분명하다고.

-솔직히 국내에서만 열리는 음악 시상식 따위가 대기업이 주최하는 자본 빵빵 해외 콘서트보다 좋은 점이 뭐 있냐? 국내 팬들 외면하고 해외로 간다고 여론몰이할 수 있는 점?

-상으로 갑질하면서 애들 잡지 말고 음원 사재기나 잡아 이 양아치들아

-원카운트 애들이 소리구름에서 만나요! 웃으면서 라방한 게 엊그젠데

-좋은 상 줄 테니 성의 좀 보이라고 했다가 거절 싸다귀라도 맞은 듯?

우웅.

스카이러너의 용맹으로부터 문자메시지.

-[한율아, 이번 아스대엔 나올 거지? 양궁 나가?]

<추석 특집 아이돌 스포츠 대회>. 올해 추석은 9월 24일로 아직 한참 멀었으나, 아스대는 최소 한 달의 여유를 두고 녹화를 진행한다. 이번 예선 녹화는 다음 주 목요일인 16일에 진행될 예정.

[네. 그런데 전 작년에 금메달 따서 예선 패스래요.]

-[멋지다ㅎ]

-[LA 비 엄청 온다ㅜㅜ]

스카이러너는 5일 뉴욕 K-POP 콘서트를 마친 뒤로도 계속 미국에 머무르고 있었다. 화보나 자체 영상 콘텐츠를 촬영할 겸.

[몸조심하세요.]

-[ㅇㅇ 그럼 다음 주에 보자!]

[네. :)]

‘스카이러너도 소리구름에서 신인상을 받았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이쪽은 온더로즈가 소리구름어워즈에 참석해서 괜찮은 걸까.

한율은 소리구름어워즈 라인업을 재차 확인했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핫한 아이돌 팀들이 대거 빠져있었다. 대부분 LA K-POP 콘서트 일정을 선택한 까닭이었다.

콘서트 일정이 소리구름어워즈 일정보다 한참 먼저 나오기도 했고.

어쨌든 11일 LA 공연엔 WB래빗의 크리스탈 래빗이나, FJ그룹 계열사인 스케일 엔터의 스타믹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두 그룹의 후배인 어스래빗과 V12는 원카운트처럼 스케줄이 취소되지 않았다.

사실 소리구름 측도 자신들이 얼마나 일정을 융통성 없이 잡았는지 잘 알고 있을 터다. 인지도가 높은 아이돌을 섭외하는 게, 브랜드 홍보나 수익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도.

‘하지만 이런 식으로 일정을 잡아놓은 걸 보면….’

아림을 포함해서 이쪽 바닥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영향력이 얼마나 되는지 시험하는 느낌이 든다.

소리구름어워즈에 들렀다가 12일 LA 공연에 출연해야 하는 팀은 무척 부담스러운 상황이었다. 아무리 올해 소리구름어워즈가 작년보다 더 빠른 5시부터 시작한다지만, 끝나면 8시. 공항으로 달려가야 하는 시간까지 생각하면 굉장히 빽빽했다.

자칫 항공기가 지연되거나 연착이라도 되어 일정에 조금이라도 차질이 생기면 그 팀은 12일 공연 자체가 무산되거나 공연 퀼리티가 굉장히 떨어지게 된다. 그렇게 되면 결국 FJ그룹의 화를 사게 될 터.

아무리 소리구름 측이 국내 3대 음원사이트라고 해도, 국내 재계 서열 15위 안에 드는 대기업엔 전혀 못 당한다.

‘생각할수록 멍청한 건지 생각이 없는 건지. 아니면….’

거기까지 생각하던 한율은 생각을 관뒀다.

‘알 게 뭐야.’

소리구름어워즈가 일정을 융통성 없이 잡아놓은 게 조금 성가시게 느껴지기는 하지만, 딱히 이쪽을 향한 악의는 느껴지지 않으니, 상관없다.

한율은 속으로 짧게 한숨을 쉬며 인터넷 스크롤을 슥슥 내렸다. 환하게 웃는 6명의 남자 아이돌, MOHE의 이미지가 한율의 눈에 비쳤다.

다음 날 아침. 어스래빗 멤버들은 소리구름어워즈가 열릴 잠실체육관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따뜻한 공기가 훅 그들을 감쌌다.

“으으, 벌써 이리 뜨뜻하면 나중엔 어쩌냐.”

“오늘 예상 최고기온 37도래.”

“우리 이프림, 더위에 쓰러지면 안 되는데.”

“안녕하십니까!”

경기장에 설치된 야외무대 앞. 먼저 도착해 리허설 차례를 기다리는 팀들이 간이 의자에 앉아있었다. 다가가며 큰소리로 인사하자 선배 팀은 느릿하게, 후배 팀은 빠릿빠릿하게 일어났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십니까, 어스래빗입니다.”

인사를 나눈 후엔 빈 의자에 앉아 휴대용 선풍기로 바람을 쐬었다. 무대에선 보이그룹 V12의 리허설이 한창이었다.

“너흰 선풍기도 전부 토끼 모양이냐?!”

커다란 음악 소리를 뚫고 누군가 유호에게 큰소리로 물었다. 음방에서 몇 번 마주쳤던 선배 보이그룹 멤버로, 유호와는 처음부터 안면이 있어 보였다.

“팬분들이 준 선물이야!”

[감사합니다!]

V12의 리허설이 끝났다. 몇몇 아이돌은 예의상 박수를 짝짝 쳐주었다. 한율도 가볍게 치다가 핸드폰으로 시선을 내렸다. 그리고 V12 멤버들이 새로 도착한 팀에게 인사하기 위해 다가왔을 때 고개를 들었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안녕하세요.”

“선배님들도 오늘 밤 비행기 타고 가시죠?”

“네.”

“혹시….”

V12 멤버이자 배우 김주원의 동생인 김찬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터키 경유하는 비행기인가요?”

“네.”

“오! 저희돈데!”

한율은 살며시 미소 지었다. 그때 다음 팀 리허설이 시작되어 더는 잡담을 나누는 게 힘들어졌다. V12 멤버들이 빈자리를 찾아가 앉았다.

“…….”

한율은 한가롭게 미니 선풍기 바람을 쐬며 리허설을 구경하다가, 무심코 선풍기 바람을 앞으로 돌렸다. 아직 그렇게 기온이 높지 않은데도, 땀으로 목과 티셔츠 등 라인이 흠뻑 젖은 뒷모습이 너무 안쓰럽게 보여.

휘잉.

“……?!”

느닷없는 바람에 놀랐는지, 앞자리에 앉아 손으로 부채질을 하던 가수가 한율을 돌아보았다. 그러곤 고맙다는 얼굴로 웃으며 꾸벅. 음악 소리 탓에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입 모양은 ‘감사합니다’를 말하고 있었다.

잠시 후, 리허설을 마치고 대기실로 가는 길.

“써한.”

길우성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김우재 선배님이랑은 언제 친해진 거야? 아까 보니까 선풍기 바람도 쐬어주고 음료수도 건네던데.”

“그냥, 더워 보이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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