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작년, 소리구름어워즈에 참석했을 땐 이렇게 큰 공연장에 서는 것도 처음, 레드 카펫을 한 것도 처음, 여기에 비까지 내려서 당혹스러운 순간이 있었으나 올해는 무난했다.
[발표하겠습니다. 2018년 글로벌 라이징스타상 보이그룹.]
[축하합니다! 블루, 액션!]
어스래빗이 유일하게 후보에 올랐던 ‘글로벌 라이징스타상’에 블루액션이 호명되었다.
짝짝짝짝. 바로 10분 전에 공연 무대를 마치고, 옷을 갈아입고 자리로 돌아와 호흡을 가다듬던 어스래빗 멤버들은 축하의 박수를 쳣다. 블루액션이 무대로 올라가 꽃다발과 트로피를 받고, 스탠딩 마이크 앞에 설 때까지.
[감사합니다.]
블루액션 리더가 얼떨떨한 얼굴로 수상 소감을 시작했다. 한율은 집중하며 듣는 척 연기하면서 딴생각을 했다.
처음 글로벌 라이징스타상 후보에 올랐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한율은 함께 후보에 오른 다른 팀들의 성적을 확인했다. 음원, 음반, 너튜브 동영상 조회수 등, 바로 확인할 수 있는 객관적 성적은 어스래빗이 가장 높았다. 블루액션은 미세한 차이로 뒤처진 상태.
‘RMMA 때처럼 또 해외투표랑 심사위원 점수에서 밀린 건가?’
[…그리고 대표님!]
블루액션 멤버 7명의 우렁찬 목소리가 한율의 주의를 끌었다.
[저희 핸드폰 좀 쓰게 해주세요!]
[안 그러면 이 트로피는 회사 진열대가 아닌, 저희 숙소로 가져가 꿀꺽하겠습니다!]
스탠딩 마이크를 붙잡은 안세현의 얼굴이 대형 전광판에 큼지막하게 나왔다. 뒤에서 다른 블루액션 멤버들도 거들었다.
[회사에 반납 안 할 거예요!]
[사탕… 아니, 사랑합니다!]
[핸드폰! 핸드폰!]
생중계로 나가는 공식적인 자리에서 외치는 당돌한 요구. 출연자들과 관객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블루액션은 서로 잘했다는 얼굴, 뿌듯하고 후련한 얼굴로 무대에서 내려왔다.
오후 5시에 시작된 소리구름어워즈는 8시 정각에 끝났다. 어스래빗 멤버들은 백스테이지로 퇴장하자마자 관계자 전용 복도를 다급히 걸었다.
조유찬이 멤버들에게 말했다.
“짐은 다 챙겼으니까 곧장 차에 타면 돼!”
다급하게 움직이는 건 V12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이번 비행기 놓치면 공연 당일 아침에 도착한다!”
“안 돼! 그건 절대 안 돼!”
우르르. 화려하게 단장한 아이돌 20명과 매니저들, 경호원들이 한꺼번에 이동하자 사람들이 놀라 길을 비켜주었다.
“죄송합니다, 지나갈게요!”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이 와중에도 그들은 사람들에게 사과하며 고개를 숙였다.
“왜 하필 오늘 불금인 거야?! 차 안 막히겠지? 늦으면 어떡해?”
“기도합시다.”
다급하게 움직이다 보니 차에 탄 것도 도착한 순서대로. 운전석에 올라탄 조유찬이 화려하게 핸들을 돌리며 주차장을 급히 빠져나갔다.
2시간 30분 후, 인천국제공항.
“후우….”
“아이고야….”
스무 명의 아이돌이 탑승구 앞 의자에 널브러졌다. 몇 명은 서로를 향해 고생했다는 따뜻한 시선을 보냈다.
“꽉 막힌 올림픽 대로랑 만났을 땐 난, 내 인생이 여기에서 끝나는구나… 라는 생각까지 들었다니까? 진짜 짜릿한 경험이었다….”
“시원한 고속도로로 빠져나왔을 땐 눈물 날 뻔.”
태반이 10대들인지라 엄살도 과장도 심하다. 그리고 모습도 부담스럽기 그지없었다. 화려한 색의 머리와 여러 가지 액세서리, 여기에 진한 무대 메이크업.
그나마 다행인 건, 어스래빗은 스타일리스트가 갈아입을 옷을 차에 두어서 V12처럼 번쩍거리는 슈트 차림이 아니란 사실이었다.
“메이크업이라도 지우고 싶다.”
“아, 머리. 이대로 타면 최소 10시간은 못 감잖아….”
조유찬이 어스래빗 멤버들에게 말했다.
“씻고 싶은 사람은 샤워실 가서 씻고 와. 20분 줄게.”
“여기 샤워실이 있어요?!”
바로 옆에 앉아있던 V12 멤버들이 ‘샤워실’이란 단어에 반응하며 물었다. 조유찬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어쪽 끝 하나, 반대편인 저어쪽에도 하나. 수건이랑 샴푸, 바디로션, 수건만 있으니까 클렌징폼이나 기초화장품은 따로 챙겨가야 합니다.”
“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흰 오른쪽으로 갈게요.”
“넵, 선배님!”
“나 편의점! 칫솔이랑 치약사야 돼!”
두 보이그룹은 부산스럽게 필요한 물품을 챙기고 씻기 위해 움직였다.
30여 분 후. 멀끔해진 모습으로 비행기에 탑승하는데, 길우성이 돌연 큭, 웃음을 터뜨렸다.
“……?”
한율은 왜 그러냐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길우성이 키득거렸다.
“아니, 가만히 생각하니까 너무 웃기잖아. 무대 메이크업 진하게 한 남자 아이돌이 우르르 공항으로 몰려와서, 편의점으로 우르르 몰려가서 칫솔 치약 잔뜩 사고, 또 우르르 샤워실로 향했다가, 젖은 머리로 비행기에 우르르 탑승했다는 게.”
“참 별 게 다 웃기다.”
흐. 길우성이 바보 같이 웃었다.
원래 너희가 받기로 한 상이야
“그런데 온더로즈 선배님들 진짜 대박이더라. 설마하니 전세기로 날아가실 줄이야.”
어스래빗, V12와 비슷하게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한 온더로즈. 그들은 여유롭게 출국 절차를 밟은 뒤 직원의 안내를 받으며 다른 루트로 사라졌다. 그리고 전세기를 타고 먼저 공항을 떠났다.
“가는 김에 우리도 태워주시지….”
“왜 그래야 하는데?”
“그렇게 물어보면 딱히 댈 만한 이유가 없네.”
어스래빗과 V12 멤버들은 승무원의 안내에 따라 자리에 앉았다.
“그 전세기, FJ그룹이 비용 내줬다더라.”
“역시 정상의 자리에 오르면 그만한 대접을 받는구나.”
“건우 형아, 나도 전세기 타보고 싶어.”
“월클부터 되렴.”
자리에 앉자마자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강보배가 물었다.
“그런데 우리 꼭 지금 비행기 탔어야 했어? 내일 아침 직항 비행기 타도, 미국 날짜로 11일에 도착하니까 괜찮았을 것 같은데.”
“우리 보배가.”
이건우가 상처받은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랑 매니저 형들, 경호원 형들, 스타일리스트 누나들 전부 버리고 여유롭게 혼자 여행을 즐기고 싶었구나.”
“잉? 아니야…!”
한창 여름 휴가 성수기인지라 좋은 시간대, 소요 시간이 짧은 항공권은 몇 달 전부터 매진되었을 터다. 그런데 이쪽은 스태프들까지 수십 명이 함께 이동해야 하는 상황.
유호가 주위를 살피곤 말했다.
“우리 출연이 결정됐을 때 괜찮은 시간대 티켓이 모두 동이 난 상태라 어쩔 수 없었어. 그리고 아침엔 공항 이용객들이 많아서 여러모로 번잡스럽잖아. 오래 걸리기도 하고.”
“아….”
“라고 오 팀장님이 말씀해주셨을 때 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니, 보배야.”
“윽.”
그들의 대화를 듣던 V12 멤버가 끼어들었다.
“그래서 저희도 엄청 뛴 거예요. 저희 참석이 결정됐을 때도 소리구름 끝나고, 12일 전에 도착할 수 있는 비행기 자리가 이것밖에 안 남았다고 그래서.”
“그렇구나….”
“그래도 도착 시간 생각하면 신기하지 않아? 한국 날짜로 10일 밤에 출발하는데, 다른 곳 한번 들러서 경유해도 미국 날짜로 11일 아침에 도착하는 거잖아.”
“지구의 신비.”
“시차의 신비.”
“그만해, 머리 아파.”
한율은 핸드폰으로 카메라 앱을 실행하곤, SNS에 올릴 셀카를 찍었다.
찰칵.
“SNS에 올릴 건데, 같이 찍혔네요.”
사진을 확인한 한율은 같이 찍힌 V12 멤버에게 보여주었다. V12 멤버가 활짝 웃었다.
“괜찮습니다! 선배님 SNS에 올라가는 거면 환영입니다!”
“감사합니다.”
“예고 좀 하고 찍지.”
마찬가지로 함께 찍힌 길우성의 불평을 무시하며, 한율은 사진을 SNS에 올렸다.
[오늘 소리구름어워즈를 찾아준 이프림 감사해요! 저희는 미국 LA를 향해 출발합니다! #톢톢V]
실시간으로 댓글이 달렸다. 사랑한다느니 귀엽다느니 하는 말과 하트가 대부분이었으나, 내용이 있는 댓글도 많았다.
-오늘 크게 실망했을 텐데 그래두 밝게 웃어줘서 고마워 사랑해♡♡♡♡♡
-공연 끝나자마자 미국행 비행기라니! 우리 톢이 월클 다 됐다잉
-티모야...? 네가 왜 여기서 나와...? (지나가던 V12팬)
-V12 분들이랑 같은 비행기 타고 가는 거? ㅎㅎㅎ
-율톢에게 언제나 밝은 토끼상 빛톢상을 수여
-바쁜 와중에 참석해서 공연까지 했는데ㅜㅜ
-너는 내 마상. 마음속최상.
-너는 내 화상. 내 심장에 불을 질렀지
-왜 톢톢V인가 했더닠ㅋㅋㅋ 토끼토끼 옆에 V12 멤버가 있어섴ㅋㅋㅋㅋ
대부분 어스래빗이 수상을 놓친 걸 아쉬워하는 반응이었다. 작년 RMMA 때처럼 드러나지 않은 평가로 블루액션에게 밀렸으나, 이번 소리구름어워즈 상은 참가상이나 다름없어서 그런지 격한 분노를 드러내는 이는 없었다. 최소한 아티스트의 SNS에다가는.
“그런데 써한.”
길우성이 사진에 함께 찍힌 V12 멤버인 티모를 가리키며 물었다.
“너 이 분이 우리랑 동갑인 건 아니?”
“아, 그래요?”
“넵.”
“반가워요.”
“넵.”
“이쯤 되면 친구 하자거나 말 놓자는 말이 나올 법도 하지만, 선 긋는 써한의 태도에 상처받지 말아요, 그대. 이놈은 원래 이런 놈이에요.”
“넵.”
“…어? 선긋기 당하는 게 나인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 왜죠.”
“장난입니다, 선배님. 흐.”
“넵.”
한율은 가방에서 수면 안대를 꺼내 잘 준비를 했다.
* * *
“네. 그럼 수고해주세요, 오 팀장님.”
…후우. 오동식 팀장과 통화를 끝낸 좌기훈 대표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미간을 잔뜩 구기며 모니터를 노려보았다.
오늘 열린 소리구름어워즈 시상내용이 떠 있었다.
[글로벌 라이징스타상 보이그룹: 블루액션]
‘소리구름, 이것들이….’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 왜냐하면 오늘 이 상을 받기로 한 건 블루액션이 아니라 어스래빗이었으므로.
음악방송 1위를 비롯해 소리구름어워즈, RMMA와 같은 시상식의 수상 여부는 생방송 발표 전 소속사로 미리 정보가 들어온다. 정확히는 시상식 측에서 사전에 알려주는 경우가 많았다. 그에 걸맞은 수상 소감이나 준비를 하라는 뜻에서.
그러나 WB래빗은 정보가 들어와도 당사자에게 알리지 않고, 스타일리스트 팀장에게 특별히 신경 써달라고만 하는 편이었다. 당사자에겐 미리 알려줘서 좋을 게 없기 때문이었다. 행동으로 티가 날 수도 있고, 이런 식으로 막상 본 무대에서 수상자가 달라지는 일도 있어서.
“하…….”
그래도 왜 상을 주겠다 해놓고 안 주냐 따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스래빗이 정글 같은 아이돌 판에서 롱런할 가능성이 크다는 건 인정됐으나, 아직 대중에겐 ‘연기 잘하는 방송국장 아들’이나 ‘병원 드라마에 나왔던 잘생긴 애’가 속한 아이돌그룹일 뿐이므로.
‘그쪽에서도 막판에 투표와 내부 심사에서 엇갈려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하면 그만이고.’
그러니 올라오는 화를 속으로 삭이는 수밖에.
좌기훈 대표는 재차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똑똑.
“대표님, 진장현입니다.”
“네, 들어오세요.”
문 사이로 A&R팀의 진장현 팀장이 얼굴부터 들이밀었다.
“퇴근 안 하세요, 대표님?”
“조금 이따가 하려고요. 팀장님은 어쩐 일이세요, 이 시간에?”
진장현은 슥 웃곤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대표님께서 속상해하고 계실 것 같아서요.”
그의 두 손엔 캔맥주 두 개와 감자칩 하나가 들려 있었다. 좌 대표는 씩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 오셨습니다.”
두 사람은 티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푹신한 소파에 앉았다. 크으. 건배 없이 말없이 맥주를 마신 그들은 나지막하게 숨을 토해냈다.
진장현은 좌 대표의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고동이 뭐 좀 먹인 걸까요?”
“소리구름 쪽에게요?”
“네.”
좌 대표는 캔맥주를 흔들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저었다.
“고동 대표가 욕심이 많기는 해도, 참가상이나 다름없는 상 하나 받자고 일부러 뭘 찔러줬을 것 같진 않네요. RMMA 신인상 정도면 모를까.”
“크으.”
진장현은 소리 내어 웃었다.
작년 RMMA에서 어스래빗이 신인상을 놓쳤을 때, WB래빗 직원들 사이에선 강한 의혹이 돌았다.
블루액션이 해외 인지도가 조금 높기는 해도 말 그대로 정말 ‘조금’이고, 아무리 봐도 우리 애들이 더 괜찮은데 왜 저기에다 상을 주냐고. <보컬리스트 시즌3> 때처럼 접대를 한 건 아니냐고.
당시 좌 대표는 아쉽다는 반응 외엔 딱히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지만, 실은 그도 속으로 살짝 의심하고 있었단 뜻이었다.
“그나저나 대표님. 이번에 소리구름이랑 아림 사이의 알력이요.”
진장현이 닫힌 문 쪽을 한번 보곤 목소리를 낮췄다.
“인터넷에선 소리구름이 아림 측에 갑질을 해서 아림이 보이콧했다는 식으로 이야기가 나오고 있잖아요. 그런데 실상은 반대인 것 같아요.”
“그게 무슨 소리예요?”
“예전에 아림이랑 고동 사이 완전히 틀어진 거 기억하시죠? 블블이랑 히아신스 멤버 연애를 비밀로 하는 대신에 아림이 애들 스케줄을 고동 쪽에 넘겨줬는데.”
좌 대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고동이 약속을 어기고 멋대로 기사를 퍼뜨린 바람에 사이가 아주 나빠졌죠.”
“그런데 이번 소리구름 라인업에 원카운트랑 블루액션이 같이 들어가 있었잖아요. 아림이 그걸 보곤 블루액션을 빼라고 그랬대요. 걔네 있으면 원카운트 안 내보내겠다고.”
좌 대표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럼 소리구름 측이 그 요구를 안 들어줘서 아림이?”
“네. 소리구름을 비난하는 논조의 기사도 전부 아림이랑 우호적인 매체에서 나온 거더라구요. 여기에 마침 소리구름이 해외 콘서트 일정이랑 어워즈 일정을 붙여서 잡아놓은 것까지 맞물려서.”
“옹졸 구름이 된 거군요.”
“그런 셈이죠.”
하. 어이없는 웃음을 터뜨린 좌 대표는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진 팀장도 고개를 흔들곤 한 모금.
“그런데….”
캔을 입에서 뗀 좌 대표는 미간을 찡그리며 고개를 기울였다.
“듣고 보니 이상하네요. 소리구름 측이 언제부터 이렇게 고동을 편애했을까….”
“네?”
“오늘 블루액션이 받은 상, 원래 우리 애들한테 준다고 연락 왔었거든요.”
“정말요?”
“네. 그런데 팀장님 얘기 들어보니….”
도중에 수상자가 블루액션으로 바뀐 게 영 미심쩍게 느껴진다.
‘아림의 요구가 불쾌하고 괘씸하게 느껴져, 블루액션을 일부러 더 끌어안고 보란 듯이 상을 준 건가? 아니면… 블루액션에게 상을 줘야 해서, 아림의 요구를 거절했다?’
설마. 거기까지 생각하던 좌 대표는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후자는 스스로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억측이었다.
‘소리구름 대표가 고동 대표에게 큰 약점이라도 잡혔다면 모를까.’
* * *
미국 날짜로 8월 11일 오후, LA국제공항.
“와았다아아…!”
길우성이 기지개를 쭉 켜며 늘어지는 목소리를 냈다. 한율도 안전벨트를 풀자마자 가볍게 기지개를 켜곤 목을 스트레칭했다. 몇 시간 내내 앉거나 누워있었더니 온몸이 뻐근했다.
오 팀장과 유호가 멤버들에게 말했다.
“다들 핸드폰이랑 여권, 지갑 잘 챙기고.”
기내로 반입했던 소지품과 가방을 챙겨 차례대로 비행기에서 내렸다. 날씨는 굉장히 좋았으나 한국만큼 덥진 않은 것 같았다.
“와, 사람 정말 많네요.”
“한글 안내판 되게 잘 돼 있다.”
입국장으로 이동하는 중. 같은 비행기를 탔던 어스래빗과 V12 멤버들은 자연스레 뒤섞여서 걸었다. 24시간 넘게 강제로 붙어있다 보니, 데면데면하게 인사만 나누던 전보다 친해진 이들도 있었다. 박가람은 V12 멤버와 영화 의 OST를 흥얼거렸다.
“City of stars~.”
티모가 길우성을 돌아보았다.
“우성, 너 혹시 라라랜드 안무 알아?”
“당연히!”
길우성이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말했다.
“LA 스케줄이 잡혔단 소리를 듣자마자 연습했지!”
“오.”
유호와 V12 리더가 재빨리 끼어들었다.
“하지 마.”
“공공장소다. 추기만 해봐.”
“여기에선 좀 그러니까, 내일 같이 출래? SNS에 올리게.”
“콜!”
티모와 길우성이 의기투합하는 가운데, 박가람이 추임새로 노래를 넣었다.
“City of stars~.”
“가람, 솔직히 말해. 뒷부분 가사 모르지?”
“어.”
입국장 앞에는 뉴욕에 갔을 때보다 더 많은 K-POP 팬들이 몰려와 있었다. 어스래빗과 V12 멤버들이 줄줄이 나오자 그들이 일제히 달려드는 걸, 대기하고 있던 공항 경찰들까지 나서서 막았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무사히 리무진에 탑승.
“후…. 정신없어서 V12 애들하고 제대로 인사도 못 하고 헤어졌네.”
“어차피 내일 또 만날 텐데.”
“그나저나 길우성 씨와 강보배 씨가 이번에도 무사히 입국 심사를 통과했습니다. 다들 축하의 박수.”
짝짝짝.
리무진은 그들이 묵을 호텔로 향했다.
“그런데 너무 아쉽다. 내일 공연하고 모레 바로 비행기에 타야 한다는 게.”
“어쩔 수 없지. 목요일 새벽부터 온종일 아스대 녹화하려면, 적어도 화요일에 귀국해서 푹 쉬어야 끝까지 잘 버틸 수 있을 테니까.”
우웅.
한율은 가방에서 진동한 핸드폰을 꺼냈다.
-[미국엔 잘 도착했어?]
MOHE의 이해원이었다.
-[나중에 조용히 통화할 수 있을 때 연락 부탁해.]
-[꼭 알려주고 싶은 일이 있어.]
무슨 일일까.
MOHE와는 이번 소리구름어워즈에서 마주쳤었다. 그러나 별일은 생기지 않았고, 뉴욕이나 이번 LA K-POP 콘서트에도 MOHE는 섭외되지 않아 부딪칠 일도 없었다.
한율은 일단 답장을 보냈다.
[네.]
잠시 후, 호텔에다 짐을 풀고 잠깐 쉬는 시간. 한율은 같은 객실을 사용하게 된 길우성이 씻는 동안 이해원과 통화를 나눴다. 이해원은 거두절미하고 용건부터 꺼냈다. 속닥거리는 작은 목소리로.
-[그저께 소리구름에서 블루액션이 받은 상, 원래 너희가 받기로 한 상이었어.]
“네?”
-[오늘 새벽에 술자리에 끌려갔다가 들은… 아니, 미안. 술이 아직 덜 깨서… 조금 횡설수설해도 이해해줘.]
후우. 핸드폰을 떨어뜨린 채 심호흡하는 소리. 이해원이 다시 속닥거리듯 말했다.
-[라이징상, 원래 너희가 받기로 해서 너희 회사로 연락까지 갔던 건데…. 인섭이 형이 자기 뒤를 봐주는 사람한테 바람을 넣었나 봐. 그 사람이 소리구름 대표한테 말했고… 그렇게 된 것 같아.]
한율의 미간이 구겨졌다.
그건 남이 못 고치지 않아?
미국 날짜로 12일 새벽. 어스래빗은 공연장 무대에서 드라이리허설을 진행했다.
뉴욕 공연 때는 [Breaching]의 인트로와 , <파라솔>을 했으나, 이번엔 두 번째 EP 앨범 [Invitation card]의 인트로, 첫 번째 싱글 앨범 타이틀곡인 <있어>, 그다음은 가장 최근 곡이자 반응이 좋은 <파라솔>을 부르기로 했다.
“감사합니다!”
“나중에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2.5곡의 리허설을 연달아 두 번 하고, 스태프들에게 감사를 표하며 무대에서 내려왔다. 다음 리허설 순서인 V12와 신인 걸그룹 ‘뉴온’이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뉴온은 데뷔한 지 5개월 정도 되었으나, 그동안 활동 시기가 엇갈려 오늘이 첫 만남이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안녕하십니까.”
“수고하셨습니다.”
“우성.”
길우성과 티모는 얼굴을 보자마자 대화를 나눴다.
“나중에 팬 미팅 끝나고 내가 너희 대기실로 갈까?”
“엉. NG 내도 되돌리기 없음. 한 번에 찍고 끝.”
“OK, 콜.”
“선배님, 저기….”
뉴온의 리더가 유호를 향해 목소리를 살짝 높였다.
“나중에 대기실로 앨범 드리러 가도 될까요…?!”
목 상태가 좋지 않은 건지, 마지막 ‘요’자가 삐끗하며 갈라졌다. 그에 스스로 놀라 창피하단 얼굴로 고개를 푹 숙인다. 그러면서 살피는 건 차남석이 있는 쪽.
유호가 상냥하게 미소 지었다.
“네, 물론이죠. 그럼 리허설 수고하세요.”
“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어스래빗 멤버들은 V12 멤버들에게도 수고하란 인사를 건네곤 백스테이지를 통해 대기실로 향했다.
툭. 이건우가 말없이 차남석을 팔꿈치로 쳤다.
“…….”
“…….”
차남석은 이건우를 한번 보더니, 덤덤히 고개를 돌렸다. ‘조금 전 뉴온 리더의 시선에 감춰진 호감을 읽었다.’, ‘나도 느끼긴 했지만 그게 왜요.’ 이런 눈치 대화였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길우성이 한율에게 속닥거렸다.
“한 명 이상은 꼭 잘생긴 남석 씨에게 눈길을 주는구먼.”
한율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최근엔 건전하게만 사귀면 괜찮다고, 연애에 터치하지 않는 소속사나 팬들이 조금씩 느는 추세이기는 하나, 그래도 여전히 아이돌의 연애는 인기나 수익에 적잖은 영향을 끼친다.
온더로즈나 블블처럼 멤버들의 나이와 인지도가 어느 정도 찬 상태여도.
그러나 아이돌은 한창 이성과 연애에 관심이 많은, 감정과 마음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는 어린아이가 대부분. 조금 전 뉴온의 리더처럼 마음을 제대로 감추지 못하고 드러내는 이가 종종 있었다.
한율도 예전, 음악방송 복도에서 누군가 주머니에 뭔가를 쏙 넣고 도망쳐서 돌아봤더니, 아이허니 막내 멤버가 100m를 10초 안에 주파할 기세로 멀어지고 있었다.
받은 건 귀여운 토끼와 하트 스티커가 붙은 초코바였다.
“그런데 넌 무슨 일 있냐? 어제부터 기분 별로 안 좋아 보이던데.”
“그냥 생각할 게 조금 있어서.”
“무슨 생각?”
“열등감으로 삐뚤어진 아이는 어떻게 혼내줘야 정신을 차릴까 하는 생각.”
길우성이 미간을 찡그리며 반문했다.
“그건 남이 못 고치지 않아?”
“그렇지?”
“그렇지. 우리한테 악플달았다가 고소당한 애들도 그렇잖아. 정말 잘못했습니다, 순간 행복하게 웃는 쟤가 얄미워서 욕했습니다, 반성합니다. 이렇게 소설을 써대다가 풀려나면 바로 ‘아이씨, 재수 없게 걸렸네’ 이러고.”
길우성이 키보드를 두드리는 흉내를 냈다.
“형이 악플 달고 경찰서 갔다 온 썰 푼다, 크크크. 악플로 안 잡히게 악플 다는 법 알려줌, 크크크.”
“넌 시트콤 연기도 못하겠다.”
“서한율은 상습 팩트 폭행범이다, 크크크.”
대기실에선 조금 전 매니저들이 촬영한 리허설 영상을 보면서 보완할 점을 체크했다. 아침을 먹은 후엔 잠시 쉬다가 팬 미팅을 위해 꽃단장.
“서한율, 너 실검에 떴다?”
“……?”
머리카락 여기저기에 핀을 꽂은 박가람이 다가와 핸드폰을 보여주었다.
[<별의별 라디오> 김우재, 어스래빗 한율 언급 “내 생명의 은인”]
[SBC <별의별 라디오>에 게스트로 출연한 김우재가 보이그룹 어스래빗의 멤버이자 배우인 서한율을 언급해 화제다.
라디오에서 자신이 더위를 많이 타는 체질이라고 밝힌 김우재는, 소리구름어워즈 리허설 도중 매니저가 양산과 휴대용 선풍기를 가지러 간 사이 너무 더워서 기절할 지경이었다고 말했다. 그때 누군가 그에게 선풍기 바람을 쐬어주었는데 그게 어스래빗의 한율이었다며…(중략).]
-리허설 할 땐 잠깐 맡아달라고 빌려주고, 끝낸 후엔 자기넨 이제 시원한 곳으로 가니 편하게 쓰다가 돌려주시라고, 여기에 음료까지 나눠주고ㅜㅜ 이 서윗톢이를 어쩌지
-난 이해감ㅋㅋㅋㅋ 작년 여름에 김우재 콘서트 갔었는데 그때 레알 김우재 흘러 녹아 없어지는 줄ㅋㅋㅋㅋ
ㄴㅋㅋㅋㅋㅋㅋㅋㅋㅋ
ㄴ그럼 거기도 보셨겠군...
ㄴ전 부산 오셨을 때 봤는데, 두 팔을 못 벌리시더라구욬ㅋㅋㅋ
-우리 토끼가 이렇게 다정합니다.
-김우재는 기회가 된다면 한율에게 감정연기를 배우고 싶다고 말했다//크으.. 대한민국 20대 대표 발라더도 인정하는 연기천재돌 서한율♡♡♡
-율톢이 민준님이랑 친하니까 그 인연으로 사석에서 만나게 되지 않을까 기대 중ㅎ
“아, 그리고.”
박가람이 핸드폰을 회수하더니 주변을 살폈다. 그러곤 작게 속닥속닥.
“이번 주말에 강릉 가자.”
“거긴 왜요?”
“전에 내가 말한 용한 보살님 만나러. 엄마가 예약 잡았대.”
한율은 잠시 고민했다. 박가람으로부터 귀신들이 자신을 보면 줄행랑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땐, 대체 자신에게서 뭘 보고 도망가는 건지 궁금했었다. 그러나 최근 JE를 만나며 어느 정도 호기심이 해소된 상황.
“운세 보러 가는 거면 나도요.”
“…?!”
박가람이 놀란 얼굴로 차남석을 돌아보았다.
“뭐여, 너. 언제부터 여기에 있었어.”
“나 전에도 그 소리 들은 것 같은데.”
“그런데 너님 성당 다니잖아. 괜찮냐?”
차남석은 문제없다는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박가람이 쯧쯧 혀를 찼다.
“불량 신자로구만.”
“뭐야? 셋이 어디 놀러 가?”
메이크업으로 한쪽 눈매만 또렷해진 길우성이 끼어들었다.
“그럼 나도!”
박가람의 입가가 아래로 꾹 내려갔다. 한율은 고민을 마치고 대답했다.
“두 사람 데리고 가요. 전 안 가도 괜찮을 것 같네요.”
“아니, 너 때문에 예약한 건데 네가 안 가면 어쩌라는…? 안 돼. 엄마가 예약 힘들게 잡았다고 했단 말이야. 너 오면 맛있는 것도 잔뜩 만들어주겠다고 벼르고 계시는데.”
“그럼 갈게요.”
박가람의 입가가 빙긋 올라갔다. 눈치껏 목적지가 박가람의 본가라는 사실을 알아챈 길우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난 이번에 가면 찐빵 사야지.”
“너 데려간단 소리는 안 했다, 막내야. 그리고 강릉은 요즘 커피빵이 핫하단다.”
“형 따라가는 거 아닌데? 써한 따라가는 건데?”
“그럼 난 우성이 따라가야겠네.”
“이것들이?”
“가람아.”
“네에.”
메이크업 아티스트의 부름에 박가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차남석과 길우성에게 뭐라 말하려다가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에휴.”
LA K-POP 콘서트는 한 팀의 마이크 이상으로 잠깐 문제가 발생했던 걸 빼곤, 무난히 성료되었다. 백스테이지에서 다른 팀들과 인사를 나눈 뒤, 어스래빗은 대기실에 잠깐 들러 짐만 챙기곤 호텔로 향했다. <깡충깡충 영어 극장> 라이브방송을 위해서.
<깡충깡충 영어극장>은 촬영과 편집을 거쳐 월요일 9시마다 내보내는 콘텐츠였으나, 미국에서도 라방을 진행할 겸 함께 하는 게 어떠냐는 의견이 나와서 그러기로 했다.
어스래빗 공식 SNS를 통해 ‘오늘 영어극장은 한국 시각으로 오후 6시에 라이브로 진행됩니다!’ 공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지금이 밤 12시 55분. 한국은 오후 5시 55분.”
어스래빗 멤버들은 말끔해진 모습으로 유호의 객실로 모였다.
“다들 영어 뇌를 예열시키도록.”
“단체 라방, 그것도 영어로 진행하는 라방이라니….”
그들 중 가장 영어가 취약한 길우성과 강보배는 서로를 응원했다.
“할 수 있어, 막내야. 우리, 그 어렵다는 입국 심사도 두 번이나 통과했잖아. 자신감을 갖자.”
“응, 형도.”
5분 후. 멤버들은 카메라 앞에 모여 라이브방송을 켰다.
[어스!]
[래빗!]
[LA에서 인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