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퍽. 화살이 시원한 소리를 내며 과녁 정중앙에 꽂혔다.
“팔로 스로우.”
활을 쏜 자세로 과녁을 응시하던 한율은 천천히 활을 내렸다.
“와아.”
뒤에서 관전하던 박가람이 조용히 손뼉을 쳤다.
“잘 모르는 내가 봐도, 폼이 진짜 깨끗한 게 느껴진다.”
차남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강릉으로 출발하기 전, 한율과 길우성이 양궁 아카데미에서 가볍게 손을 풀겠다는 이야기를 듣고 구경차 따라왔다.
“잘하네요.”
이번엔 한율의 옆 사로에 선 길우성의 차례. 평소엔 보기 힘든 진지한 얼굴로 길우성이 활시위를 당겼다.
…퍽. 화살이 과녁 정중앙에 꽂혔다. 박가람이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번 양궁 금메달도 우리 거다.”
한율과 길우성의 연습이 끝나고 양궁 아카데미를 나올 때, 조유찬이 그들에게 일렀다.
“조심히 다녀와. 도착하면 톡이든 전화든 하는 거 잊지 말고. 저녁에 가람이 너희 어머니께 전화해서 너희들 잘 도착했는지 여쭤볼 거야.”
“걱정하지 마세요, 형.”
“저만 믿으십쇼! 제가 동생들 잘 챙기겠습니다!”
조유찬은 잠시 박가람을 바라보다가 빙긋 웃었다.
“역시 나도 같이 가는 게….”
“내가 못 미덥다니?!”
“장난이야. 아무튼 너희들… 뭐, 못 믿는 건 아니지만 만약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연락하고, SNS에 올라갈 만한 일 만들지 말고. 돌아올 땐 역으로 마중 나갈 테니까 전화 잘 받아.”
“네엡.”
그래도 걱정되는지, 조유찬은 그들을 서울역까지 태워다 준 것도 모자라서 역 안까지 들어와 열차에 탑승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갔다.
네 사람은 예약한 특실 좌석에 둘씩 앉았다.
“유찬이 형 나중에 장가가서 애 낳으면 팔불출 아빠 될 것 같아.”
“잔소리만 조금 줄이면 좋을 텐데. 그나저나 도시락 언제 먹어?”
“출발하면 먹어야지. 그게 기차 여행의 로망이다.”
부스럭. 뒷자리에 앉은 박가람과 길우성의 대화를 들으며, 한율은 역에서 산 도시락을 접이식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원래는 점심을 먹고 출발하려 했지만, 길우성이 기차 안에서 도시락을 먹어보고 싶다고 해서 바꿨다.
“서한율.”
“……?”
차남석이 쓰고 있던 검은색 마스크를 턱 밑으로 내렸다. 그러곤 셀카 모드를 실행한 핸드폰을 높이 들었다.
“웃어.”
한율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갸웃하며 미소 지었다.
찰칵.
“…SNS에 올리게요?”
“어. 갔다 온 다음에.”
열차가 출발했다. 그들은 도시락을 먹고, 모자를 깊게 눌러쓰거나 수면 안대를 쓴 채 잠이 들었다. 오늘 새벽 아스대 녹화를 끝내고 숙소에서 8시간 내리 잤지만, 그래도 잠이 부족했다.
“아그들아.”
그렇게 얼마나 잠들었을까.
툭툭. 한율은 누군가 머리를 건드려 눈을 떴다. 어스래빗 팀 반지가 끼워진 손이 눈앞에서 휙휙 움직였다.
“다 왔다. 일어나라.”
“…벌써?”
옆에서 차남석이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마침 곧 강릉역에 도착한다는 안내 방송도 흘러나왔다. 한율은 멍하니 창밖을 보다가 소심하게 기지개를 켰다.
“다들 핸드폰이랑 지갑 잘 있지?”
“네.”
“쓰레기도 잘 버리고.”
“네.”
“그리고 너희 자는 모습 찍었다.”
“내놔요.”
강릉역을 나왔을 땐 오후 3시가 조금 지났을 무렵이었다. 그들은 강릉역이 잘 나오도록 셀카를 서너 장 찍었다. 그 후엔 강릉의 커피 거리로 이동.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카페의 창가 자리에 앉았다.
“하….”
커피를 빨대를 쭈욱 마신 박가람이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이제야 좀 휴일 기분 난다.”
“분명히 중간에 쉬는 날이 있었는데, 어떻게 쉬었는지 기억이 안 남요. 미국으로 왔다 갔다 할 때도 비행기에서 내내 아무것도 안 했는데.”
“아무것도 안 해도, 몸은 계속 비행기 소음이랑 압력을 느끼니까 피곤하지.”
“그런데 나 궁금한 거 있는데.”
길우성이 빨대로 아이스 아메리카노에 담긴 얼음을 휘적거리며 물었다.
“왜 운세 보러 여기까지 온 거야?”
“참 빨리도 묻는구나, 막내야. 그 이유는 우리가 내일 만날 분이, 평소엔 쉽게 만나뵙게 힘든 아주 용한 분이시기 때문이란다.”
“오오.”
“겸사겸사 바쁘게 돌아가던 속세에서 한 걸음 물러나 휴식도 취하고 말이지.”
“무속인이면 복채란 거 드려야 하지 않아? TV에서 보면 사람들이 막 만 원짜리 다발로 꺼내서 건네던데.”
“어? 그건 생각 안 했는데. 이따가 엄마한테 물어봐야지.”
차남석이 빨대에서 입을 뗐다.
“형이랑 서한율 보는 거 보고, 너무 비싸면 안 보면 되지.”
“그렇군!”
“이 자식들, 역시 운세 보고 싶다는 건 핑계고 노는 게 목적이었구나.”
“이제 곧 해외 스케줄 있잖아요. 쉴 수 있을 때 미리 쉬어둬야죠.”
“오오, 차남석 씨. 이제 대인기 스타가 되어 엄청 바빠질 거란 선언인가?”
한율은 잔잔하게 일렁거리는 바다에 시선을 고정한 채 그들의 대화를 들었다. 참 평화로웠다.
차남석이 핸드폰을 들었다.
“사진이나 찍죠.”
“콜.”
“서한율, 여기 봐.”
찰칵.
카페를 나온 후 그들은 해변에서 팬 서비스용 사진을 몇 장 찍은 뒤, 여기저기 느긋하게 둘러보다가 박가람의 본가로 향했다. 박가람의 가족은 진수성찬으로 그들을 환영했다.
“씻고 나왔는데도 배가 안 꺼졍.”
어느덧 밤. 한율은 방바닥에 드러누운 길우성을 빙 돌아 LP 진열장 앞에 섰다.
박가람이 큼지막한 쟁반을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이 집에서 키우는 개인 ‘찹쌀떡’도 함께.
“복숭아 알레르기 있는 사람 손.”
쟁반 그릇엔 먹기 좋게 썰린 복숭아가 쌓여있었다.
“없으면 먹어라, 이것들아.”
“배 터지겠어요, 형.”
“이따가 야식으론 강원도 감자만두가 기다리고 있다.”
“왜 형이 살쪘는지 알겠네요.”
“뭐?! 내가 어디가 살쪘는데!”
차남석이 포크를 집으며 대답했다.
“지금 말고, 처음 형이랑 회사에서 만났을 때요. 웬 키 작고 통통한 중학생이 있나….”
“차남석 복숭아 압수.”
“쌀떡아, 앞발 좀 만져도 돼?”
길우성이 옆에 엎드려 눕는 찹쌀떡의 앞발을 조심스럽게 만졌다. 찹쌀떡은 한쪽 눈만 힐끗하며 길우성을 쳐다보곤, 제 발을 만지든 말든 가만히 두었다.
“흐흐. 히히.”
“길우성 변태 같당.”
찰칵.
한율은 LP 하나를 뽑아서 박가람에게 건넸다. 곧 LP 플레이어에서 오래된 팝이 흘러나왔다. 차남석은 길우성의 사진을 조유찬과 어스래빗 단톡방에 전송했다.
[보배][ㅋㅋㅋㅋㅋ]
[건우][외부로 유출하면 절대 안 될 사진]
[유호][SNS에 너희 목격담 올라왔더라ㅎㅎ]
[라이언][나도 갈 걸.. 쌀떡 보고 싶다ㅜ]
한율은 복숭아 한 조각을 포크로 집어 먹으며, 차남석의 핸드폰으로 단톡방에 올라오는 멤버들의 톡을 보았다.
우웅. 그때 임승준이 보낸 톡이 떴다.
-[우리 때문에 괜히 미안하다ㅋ]
“……?”
차남석이 의아한 얼굴로 답장을 보냈다.
[뭐]
-[상황 좀 지켜 보고 말해줌ㅋ]
차남석은 인터넷으로 들어가 [원제로 어스래빗]을 검색했다. 딱히 문제 될 만한 이야기는 뜨지 않았다. 임승준과 변지욱, 그리고 예전에 소속되었던 정민솔과 어스래빗의 인연에 대해 다룬 글 외엔.
박가람이 복숭아 조각을 찍은 포크를 차남석에게 건넸다.
“왜? 뭔 일 있음?”
“아뇨. 임승준이 이상한 소릴 해서.”
차남석은 시선을 핸드폰에 고정한 채 입으로 복숭아를 물어서 받은 후 포크를 잡았다.
“멍멍이여? 왜 입으로 받아가.”
“충격. 차남석 씨, 토끼가 아닌 개로 밝혀져.”
차남석은 한 손으로 핸드폰을 조작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핸드폰을 그들에게 내밀었다.
“원제로 극성팬들이 일을 만드나 봐요.”
[제목: 우리 애들 ㅇㅅㄷ에서 개무시당함?]
커뮤니티 사이트에 올라온 게시글은 제목이 곧 내용이었다.
아스대에 방청을 간 팬들이 말하길, 원제로만 유독 다른 팀과 섞이지 못하고 저들끼리만 모여있고, 주눅도 들어 보였다. 그들의 아스대 출연을 두고 다른 팀들도 무시, 경멸하는 것 같았다, 다른 팬덤도 우리 아니꼽다는 시선으로 쳐다봤다, 아스대 방청 온 모 걸그룹 팬도 우리 애들 주눅 들어 보였다고 말했다, 증거 스샷 첨부 등등.
-그나마 ㄸㅂ 소속인 애들이 있어서 ㅇㅅㄹㅂ과는 잘 놀던데 다른 팀은..
-분란글 자제요.
-아스대 예전에 모 여돌 팬이 모 남돌 팬 어떻게 해서 경찰 출동했다느니 난리 났었던 사건 기억함? 그거 다 그 여돌 음해하려던 새빨간 거짓말에서 시작된 거였음ㅇㅇ 해당 관할 경찰서에도 신고 들어온 거 1도 없었다고. 방송 나오기 전까진 중립기어 박자
ㄴㅇㅋㅇㅌ 멤 중 하나가 ㅁㅅ 인사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거 영상에 찍혔는데요? (링크)
ㄴ그러니까 앞뒤에 다른 뭔가가 있을지도 모르니 중립기어 박자고.
ㄴ어디서 왔는지 티난다ㅋㅋ 그리고 우리랑 아무 상관 없는 옛날얘기는 왜 꺼냄? ㅂㅅ인가?
댓글까지 훑은 박가람이 질색하는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이러지 마…, 싸우지 마…. 서로에게 마이너스야….”
“괜히 우리가 더 조마조마해지는구려….”
원래 아무렇지 않았던 관계도, 팬들 간의 오해와 다툼으로 어색해지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어스래빗도 데뷔 초 블루액션과 이런 식으로 몇 번 엮였던 터라 남 일 같지 않았다.
한율은 자신의 핸드폰으로 커뮤니티 사이트의 어스래빗 게시판에 들어갔다.
[나도 우연히 애들 본 썰]
[[스카이러너]신곡 홍보왔습니다!]
[맏톢 찐외동 티 낼 때 너무 사랑스러운 거 아니냐]
[남석아 드라마 좀 찍어줘]
[파라솔 너튜브 고지가 얼마 안 남았다]
[담달 막내 생일 금액 달성 끝남? 벌써?]
[가람이는 귀엽다. 그냥 귀엽다. 막 귀엽다. 나보다 한참 오빠라 더 귀엽다.]
[[V12]놀러옴. 파라솔 뮤비 이상하게 자꾸 보게 된다]
[이푸림들 양궁 예선 꼭 봐라. 뭔가가 나온다.]
한율이 보낸 오늘 하루처럼 이곳도 평화로웠다.
“그렇게 분위기 안 좋았던 것 같진 않았는데….”
“모르지. 우리랑은 자리가 좀 떨어져 있었잖아. 그리고 관중석에선 한눈에 다 내려다 보이니까, 뭐가 보이긴 했겠지.”
“어제 원제로 옆에 누구네 있었지?”
“퍼스트라인이랑 MOHE요.”
“…….”
박가람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볼을 부풀리는, 소위 다람쥐 같은 표정을 짓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딴 얘기하자.”
“네.”
다음 날 아침. 네 사람은 택시를 타고 박가람의 집을 나섰다.
박가람의 모친이 어렵게 예약을 잡았다는 무속인의 집은, 시내와 가까운 주택가의 복잡한 골목 안에 있었다. 간판은 아주 작은 [선녀보살] 나무 명패 하나가 고작. 아는 사람이 아니면 찾기 힘든 곳이었다.
길우성이 진지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입구에서부터 ‘실력이 있다면 손님은 알아서 찾아온다!’라는 패기가 느껴지는군.”
“…난 그냥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막상 무속인의 집에 와보니 꺼림칙한 느낌이 드는지, 차남석이 박가람에게 말했다. 박가람은 고개를 끄덕이며 초인종을 눌렀다. 딩동.
“그럼 넌 마당에 있어. 여기 우두커니 서 있으면 눈에 띄니까.”
“네.”
철컹. 대문이 열렸다.
흰색 시멘트로 포장된 마당엔 잘 가꿔진 온갖 크고 작은 화분이 잔뜩 있었다. 요즘엔 보기 드문 실외 화장실도 있고.
“여긴 그대로네. 보살님, 저 왔어요!”
박가람이 계단을 올라가며 현관문에다 대고 외쳤다. 덜컹. 현관문이 열리고 중년 여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 사람이 ‘선녀보살’일까. TV에서 흔히 그려지는 무속인처럼 화장이 진하기는커녕 굉장히 수수한 모습이었다.
“누가 가수 아니랄까 봐, 목청도 좋구나.”
“흐힛.”
“그래, 친구들도 같이 데려왔….”
선녀보살이 마당에 서 있는 한율과 길우성, 차남석 쪽을 돌아보았다.
“…….”
“보살님?”
“……?”
반갑게 웃으며 말을 하던 그녀의 입가가 스르륵 내려갔다. 시선이 마주친 한율은 눈을 깜빡거리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혹시 JE처럼 자신에게서 뭔가가 보이거나 느껴지는 건가? 하고.
선녀보살이 한율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입을 벌렸다.
“…….”
그러나 벌어진 입은 잠시 뻐끔거리다 도로 닫혔다.
입을 꾹 다물곤 가만히 한율을 쳐다보는 선녀보살. 박가람이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왜… 그러세요, 보살님?”
그녀가 잔뜩 굳은 얼굴로 박가람에게 말했다.
“다 데리고 들어와. 한 명도 빠짐없이.”
우리 보물 같은 동생
탱화와 제단, 알 수 없는 물품으로 가득 채워진 화려한 방. 한율은 신기한 눈으로 내부를 둘러보다가 박가람이 깔아준 방석에 앉았다.
차남석은 죄를 짓는 것 같은 얼굴로 왼쪽 손목에 찬 팔찌를 만지작거렸다. 자세히 보니 묵주 팔찌였다. 길우성은 한율처럼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두리번거리다가, 선녀보살과 한율을 번갈아 보았다.
“…….”
“……?”
자리에 앉자마자 선녀보살이 한율만 뚫어져라 쳐다보는 까닭이었다. 박가람도 의아한 눈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엄마한테 미리 들으셨겠지만요, 보살님. 제가 이 친구한테 도움을 굉장히 많이 받았어요.”
“그랬겠지.”
한율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선녀보살이 대답했다.
“나도 50 가까이 살면서 이렇게 기가 센 아이는 처음 보는데. 이 정도면 웬만한 잡것들은 정말 얼씬도 못 했겠네. 사실 이런 말은 하면 안 되는데, 골치 꽤나 썩히는 곳에 한 번 데려가 보고 싶을 정도야.”
“오올, 짱쎈 써한율.”
툭. 차남석이 장난치지 말라는 듯 길우성의 팔을 가볍게 쳤다.
“그래, 뭘 보고 싶어서 왔어? 미안하지만 신점은 안 되겠어. 얘 때문에 지금 아무것도 안 보이고 들리지도 않아. 그러니 일단.”
선녀보살이 한율을 향해 메모지를 내밀었다.
“여기에 태어난 생년월일, 시간 좀 적어볼래?”
“네.”
한율은 메모지에 ‘서한율’의 사주를 적어서 내밀었다.
과연 무슨 말을 들려줄까. 본래 이 몸이 맞이했어야 할 운명?
선녀보살은 사주를 물끄러미 들여다보며 손가락으로 뭔가를 계산하다가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이게 맞아? 이게 정말 네 사주야?”
“네.”
“혹시 부모님께, 아주 어렸을 때 죽을 뻔했다든가 하는 이야기 들어본 적 있어?”
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있어요. 제가 아주 어렸을 때 갑자기 고열을 앓아서 응급실에 갔었대요. 그때 조금만 늦었어도 큰일 날 뻔했다고.”
“그래…. 그때 천운을 얻은 건가…. 앞으로 하는 일마다 다 잘되겠어. 사주론 그래. 약간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네가 잘나갈수록 배 아파하는 사람들도 많아져. 그러니 대인관계 좀 신경 써. 안 그러면 네가 아프게 돼.”
“네.”
강릉까지 온 것치곤 싱거운 결과. 그러나 처음부터 그리 기대하지 않았기에 실망도 없었다.
“너희들도 써 봐. 그리고 넌 잠깐 이 집에서 10m… 아니, 골목 밖에 편의점 있지? 거기까지 좀 가. 너 때문에 여기 신들이 입을 꾹 다물어서 나까지 힘들어.”
“네.”
한율은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게이트가 열리는 미래와 관련된 건 전혀 읽지 못하는 게 확실했다.
본래 세상, 신전도 길우성이 건너오고 나서야 재앙의 단초가 찾아왔다는 신탁을 받았다. 지구인들 사이에 잠입해서 정보를 수집했을 때도, 지구의 예언가 비슷한 이들도 게이트가 열리는 것만은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고 했다. 이 무속인도 마찬가지일 터.
“전 편의점 옆 카페에 있을게요.”
“응.”
한율은 선녀보살에게 고개를 꾸벅이곤 그곳을 나갔다.
…끼익, 쿵.
한율이 나가고 얼마 후, 대문이 여닫히는 소리가 났다. 선녀보살은 관자놀이를 손끝으로 꾹꾹 누르다가 박가람과 길우성이 내미는 메모지를 받았다.
“넌 왜 안 적어?”
그녀의 시선이 차남석을 향했다.
“전 그냥 얘네 보호자로 따라온 거라서요.”
“얘네?”
박가람이 눈을 부라리며 쳐다봤지만, 차남석은 그 시선을 무시했다. 선녀보살은 차남석의 묵주 팔찌를 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선녀보살은 박가람과 길우성의 사주를 보며 입으로 중얼거렸다. 그러곤 작은 단지 안에 놓인 쌀을 집어 붉은색 작은 탁자에 뿌렸다. 촥.
“거참 이상하네…. 아직 여파가 안 사라졌나…. 사주와 신점이 이렇게 엇갈릴 리가…. 시끄럽네, 정말….”
오만상을 찌푸리며 끙끙 앓는 소리를 내던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너희들.”
“…네?”
세 사람은 움찔거리며 놀랐다. 선녀보살의 입에서 돌연 걸걸한 남자 목소리가 흘러나온 까닭이었다.
“아까 걔랑 떨어지지 마. 걔가 너희 생명줄이야.”
“네?”
“특히 너희 둘.”
그녀의 검지 끝이 길우성과 차남석을 차례로 가리켰다. 선녀보살이 고개를 기이하게 꺾으며 속삭이듯 말했다.
“절대 그 애 영역 밖으로 벗어나지 마. 객지에서 비명횡사하고 싶지 않으면.”
카페에서 막 주문한 딸기에이드를 받고 나오던 한율은, 골목 안쪽에서 나오는 셋을 발견했다.
“빨리 끝났네요?”
“어….”
“…….”
“넌 왜 그렇게 봐. 이상한 말이라도 들었어?”
한율을 보자마자 상당히 미심쩍다는 눈초리를 보내던 길우성이 고개를 흔들었다.
“보살님이 너한텐 절대 말하지 말랬어. 효과 떨어진다고.”
“……?”
차남석은 복잡한 얼굴로 깊은 한숨을 쉬었다.
“미신 같은 거 믿으면 안 되는데…. 아, 찝찝해.”
“신부님께 고해성사라도 하렴, 동생아.”
“안 좋은 운세라도 나왔어요?”
“이걸 운세라고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안 믿자니 너무 찝찝해요, 형님.”
“좋은 것만 믿어, 좋은 것만. 아, 목말라.”
박가람이 아무렇지 않게 한율의 손에 들린 딸기에이드를 가져갔다. 그러곤 빨대를 덥석 입에 물었다.
“…….”
“생ㅁ… 아니, 써한 걸 뺏으면 어떡해요, 형님.”
딸기에이드를 쭉 들이켠 박가람은 잠시 머리를 부여잡다가 호기롭게 외쳤다.
“괜찮아. 점심은 내가 쏜다!”
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근처에 킹크랩 맛집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박가람이 빨대를 입에 문 채 활짝 웃었다. 그가 하늘 저 멀리 아련한 시선을 던졌다.
“그래, 먹자꾸나. 우리 보물 같은 동생이 먹고 싶다는데, 통장이 텅장이 되면 뭐 어때.”
일부러 비싼 메뉴를 불렀던 한율은 미간을 찡그렸다.
‘대체 무슨 소릴 들었기에?’
* * *
“<뮤직센터> MC요? 정말?”
아림 엔터테인먼트. 매니지먼트 팀장의 부름을 받고 사무실로 들어간 진은수와 퍼플아워 리더 루아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래. <뮤직센터> 측에서 새로운 여자 아이돌 MC로, 너희 둘 중 한 명을 기용하고 싶다더라.”
진은수와 루아는 얼떨떨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음악방송 MC는 정말 아이돌들 누구나 탐내는 자리였다. 음방 시청자, 해외 K-POP 팬들에게는 물론, 잘만 하면 다른 방송 관계자들에게도 눈도장을 찍는 자리. 음악방송 MC를 거쳐 대스타 반열에 오른 선배들도 적잖았다.
팀장이 두 사람에게 대본을 한 장씩 나눠주었다.
“한 시간 줄 테니 연습하고 와. 보고, 잘하겠다 싶은 사람을 미팅 자리로 데려갈 거야.”
“저….”
“어, 은수야. 말해.”
진은수는 루아의 눈치를 빠르게 보곤 팀장에게 물었다.
“여자 MC만 교체되는 건가요?”
“아냐, 남돌 MC도 같이 교체될 거야. 음…. 지금 이야기가 오고 가는 애가, 내가 듣기론….”
잠시 뜸을 들이던 팀장이 진은수와 루아를 번갈아 보며 대답했다.
“MOHE의 이해원. 그리고 어스래빗의….”
꼬옥. 대본을 쥔 진은수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팀장이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유호.”
“아….”
“신선하면서도 평판 좋은 애들만 골랐지? 키도 훤칠하게 크고. 그렇다고 벌써 설레면 안 된다.”
“네, 당연하죠.”
루아가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진은수도 뒤늦게 입가를 올리며 실망한 내색을 숨겼다.
잠시 후, 두 사람은 사무실을 나왔다.
“은수야.”
루아가 진은수의 손목을 잡으며 빙긋 웃었다.
“잠깐 둘이 얘기 좀 할까?”
평소보다 다정한 루아의 표정과 목소리에, 진은수는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두 사람은 빈 회의실로 들어갔다.
“은수야.”
“네, 언니.”
문을 닫고 난 후, 루아가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네가 언니한테 양보 좀 해주면 안 될까?”
“양보…요?”
“응. 이미 은수 넌 따로 화장품이랑 렌즈, 영양제 모델까지 하고 있잖아. 호수 언니 동생이라고 방송에서도 언급 많이 되고.”
“아….”
“너도 알지? 팀에서 한 사람만 잘나가면 그 팀이 나중에 어떻게 분열되는지.”
미소 안에 감춰진 날카로운 칼날이 느껴졌다. 진은수는 여기에서 싫다고 거절하면 지금보다 더, 팀 안에서 외로워질 거라고 직감했다. 가뜩이나 다른 멤버들보다 실수가 잦아 밉보이는 판에.
“…네, 알고 있어요.”
“그래, 다행이다. 그리고 고마워. 호수 언니한테도 꼭, 네가 팀을 위해서 나한테 양보해줬다고 말할게. 언니가 자랑스러워하겠다.”
환하게 웃는 루아를 따라 진은수도 입가를 살짝 올렸다.
사람들은 방송이나 SNS에 뜨는 호수와 진은수의 사진을 보며 정말 사이가 좋다고 말하지만, 사실 진은수는 호수와 그리 친하지 않았다. 호수가 어릴 적 유학을 다녀온 뒤 한국으로 와서 바로 연습생 생활을 시작한 까닭이었다. 자매간의 추억은커녕 사소한 말다툼을 한 적도 거의 없었다.
그렇다고 호수가 무관심하거나 나쁜 언니는 아니었다. 마주치면 잘해주었다. 조언도 해주고, 좋은 선물도 사주고. 그러나 속마음을 털어놓을 정도로 허물없는 사이는 아니었다.
‘언니한테 말해서 괜히 걱정 같은 거 끼치고 싶지도 않고….’
루아가 나간 후, 진은수는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멍하니 대본을 보았다.
‘가뜩이나 언니보다 많이 모자란다고, 언니 욕 먹인다는 소릴 듣는데.’
여기에 다른 멤버들 다 제쳐두고 혼자만 인지도를 독식하려 한다는 이야기까지 나돌면.
진은수는 고개를 흔들었다. 데뷔를 위해 얼마나 연습하고 노력했는데, 혼자만의 욕심으로 날려버리고 싶진 않았다. 앞으로 6년 동안 가족처럼 함께 할 멤버들과 원만하게 지내고 싶었다.
그래도 연습을 전혀 하지 않는다면 팀장의 의심을 살 터. 진은수는 대본을 들어 읽었다.
“안녕하세요, 뮤직! 센터! 오늘부터 새롭게 MC를 맡게 된 진응… 아, 진은, 수! 입니다! …짜, 라라라란! 따단! …어? 이 음이 아니었나요? …와아! 드디어 헤매던 음을 찾았어요! 길을 잃었던 아름다운 선율을 바로 잡은 것처럼, 이분들의 사랑스러운 고민도…. 고민도….”
하아. 진은수는 대본을 읽다 말고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이런 식으로 양보하는 게 맞는 건가, 라는 의심이 들었다.
‘루아 언니도 내가 언니보다 못할 걸 알고 있을 텐… 아.’
그제야 진은수는 깨달았다.
일부러 허술하게 외워서 틀리거나 실수하면 섭외는 차치하고, 팀장에게 자신의 점수만 왕창 깎일지도 모른다는 걸. 그렇게 되면 앞으로 이런 섭외가 들어와도, 팀장 선에서 자신이 아닌 다른 멤버에게 기회를 넘길 가능성도 있다.
“이 바보….”
진은수는 제 머리를 부여잡은 채 테이블에 쿵 박았다.
‘선배님이라면 이럴 때 어떻게 하실까.’
진은수는 서한율을 떠올렸다. 고작 한 살 차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어른스러운데다가, 뭐든 차분하게 척척 다 해낼 것 같은 그를.
휙휙. 진은수는 이마를 박은 채 고개를 움직였다. 긴 머리카락이 치렁거리며 테이블에 흐트러졌다.
‘선배님한테 여쭤보고 싶당. 보고 싶당. 그저께도 봤지만 인사밖에 못 해서 부족하당….’
하지만 핸드폰이 압수된 터라 당장 사진도 볼 수 없는 상태. 진은수는 긴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채 고개를 돌렸다.
“…어?”
테이블 끝. 누군가 놓고 간 사과패드가 눈에 띄었다.
진은수는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닫힌 문 쪽을 한 번 보곤 사과패드로 손을 뻗었다. 홈 버튼을 눌러보니 잠겨있지 않았다.
기본적인 것만 설치된 공기계인 걸로 보아, 연습생 중 누군가 이곳에서 공부하다 깜빡하고 놔두고 간 게 틀림없었다.
진은수는 인터넷에 들어가 [어스래빗 한율]을 검색했다.
“어?”
진은수는 치렁거리며 내려온 긴 머리카락을 황급히 쓸어 넘겼다. 최신 기사를 보는 그녀의 두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어어…?!”
[<뮤직센터> 차기 MC는 어스래빗 한율?! “아직 제안 단계”]
한편 그 시각, 강릉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기차 안.
한율은 어젯밤 그린라이브 어스래빗 채널에 올라온 리얼리티 콘텐츠를 보고 있었다. 미국 워싱턴에서 촬영한 것으로, 한율은 한국전 참전 미군 용사비를 바라보는 영상 속 자신을 보곤 미간을 찡그렸다.
‘내가 이런 표정을 짓고 있었나.’
우웅.
그때 조유찬에게서 톡이 왔다.
-[한율아, 인터넷에 뜬 기사 봤어?]
“……?”
한율은 그가 함께 첨부한 주소링크를 눌렀다.
[이사문 감독 “서한율과 신작 하고파”]
인지도가 높아졌다
[(중략) 앞으로 함께 하고 싶은 배우가 있냐는 질문에 그는 보이그룹 어스래빗의 멤버이자 배우인 서한율을 꼽았다.
“<하울링> 오디션에서 그 친구에게 느꼈던 전율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 전율을 작품으로써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다.”라며 서한율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드러낸 그는, “그래서 늘 좋은 시나리오를 물색 중이다. 이번 눈길 프로덕션 공모전에 부디 기발하고 재밌는 이야기가 많이 들어왔으면 좋겠다.”라고 덧붙였다.
한편 이사문 감독은 현재 임나비作 <안시>의 연출 제안을 받고 검토 중이다.]
우웅.
-[기사엔 연출 제안을 받는 중이라고 나왔지만 사실은 거의 확정 상태고, 감독님이 ‘안시’에 한율이 너 캐스팅하고 싶으신가 봐. 대본이 들어왔어^^]
-[그리고 이것도 기사로 봤는지는 모르겠는데, MBS <뮤직센터>에서 MC 섭외 건으로 연락 왔어. 이건 회사에서 오 팀장님께 자세히 들을 수 있을 거야.]
-[지금 어디까지 왔어?]
한율은 고개를 들어 전광판을 보았다.
[이제 양평 지나고 있어요.]
-[ㅇㅇ 이따 역 앞에서 보자!]
[네.]
한율은 포털사이트에서 [임나비 안시]를 검색했다.
임나비 작가는 SBC 드라마 제작국의 보조작가로 입사, 8년 전 시나리오를 쓴 영화가 중박을 터뜨리면서 프리랜서 작가로 전향한 인물이었다. 5년 전 SBC, 3년 전 OSN 드라마에서도 나쁘지 않은 성적을 냈으나, 대표작이 이 세 건뿐인데다 작품을 내는 속도가 느려, 대중에겐 그리 친숙한 작가가 아니었다.
[이사문 감독이 검토, 임나비 작가의 <안시>는 어떤 작품?]
[임마비 작가의 신작 <안시>는 봉황의 순우리말인 안시에서 따온 것으로, 세종대왕이 태어나던 해에 한양으로 찾아가던 중 실수로 지상으로 떨어진 새끼 봉(鳳)이 현대에서 눈을 떠, 차기 대권 주자의 비리를 파헤치는 검사 강황과 만나…(중략)]
-기자야 작가님 이름 오타 났다.
-임ㅋㅋㅋ마ㅋㅋㅋㅋㅋ빜ㅋㅋㅋㅋㅋㅋ
-봉황과 검사...? 이 무슨 뜬금없는 조합
‘대체 무슨 장르인 거지?’
한율은 다른 검색 결과물을 살폈다.
[<안시> 임나비 작가 <내가 사라졌다> 언급 “아쉬워”]
[신작 <안시>로 돌아와 눈길 프로덕션과 협의 중인 임나비 작가가, 2년 전 제작이 중단된 <내가 사라졌다>를 언급하며 아쉬운 마음을 드러냈다.
<내가 사라졌다>는 주변 환경과 주입식 교육, 촉법소년임을 악용한 울타리 속 범죄에 물들어 ‘나’를 잃는 10대의 이야기로, 2016년 제작에 들어갔으나 당시 과도한 업무에 시달리던 조연출 A씨가 사망한 채 발견되어 제작이 중단된…(중략).]
이거 혹시?
“형.”
한율은 옆자리의 차남석에게 핸드폰을 보여주었다.
“예전에 승준이 형이 촬영했던 게 이 작품이에요?”
창밖을 멍하니 보면서 졸고 있던 차남석이 눈동자를 굴렸다.
“어.”
그렇구나. 가벼운 의문을 해소한 한율은 고개를 끄덕이며, 연예뉴스란 메인으로 가서 다른 기사를 훑었다.
[원제로 데뷔 리얼리티 19일 첫 방송!]
[풀썸, 日유명 음반 차트 1위!]
[감성소녀 제유, 팬들과 봉사 활동 도중 눈물]
한율은 풀썸이 일본 음반 차트에서 1위 했다는 기사를 클릭해 읽은 후, 풀썸의 효운에게 축하 메시지를 보냈다.
[기사 봤습니다. 1위 축하드려요, 선배님! :)]
-[ㅎㅎ 고마워^^]
“…….”
그러다가 가만히 저를 쳐다보는 차남석의 시선을 느끼곤 고개를 돌렸다.
“……?”
“서한율.”
시선이 마주치자 차남석이 물었다.
“넌 객지를 이르는 범위가 어디부터인 것 같냐?”
“주로 생활하는 곳 외의 낯선 지역?”
“그럼 네 기준으론 부산이나 강원도도 객지야?”
“그렇죠? 그런데 그건 왜요?”
차남석은 고개를 끄덕이곤 다른 말을 꺼냈다.
“텍사스 K-POP 팬들이 너 좋아한다더라. 친근감 느껴진다고.”
WB래빗 엔터테인먼트. 오래간만에 찾은 2층 사무실 내 회의실엔 한율에게 들어온 영화, 드라마 대본이 쌓여 있었다.
오동식 팀장이 자리에 앉으며 한율에게 커피를 내밀었다.
“진한 아메리카노 맞지?”
“네, 감사합니다.”
“대본은 하나를 제외하곤 내년 2월 이후 제작 예정인 것들만 받았어. 한율이 너도 잘 알다시피 어스래빗 스케줄이 내년 1월까지 짜인 상태잖아.”
한율은 고개를 끄덕이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맛이 괜찮았다.
“그리고 예외인 이 하나가 <안시>인데…. 이건 아무래도 생각을 해봐야 할 것 같다. 편성 이야기가 오가는 tv Mu 측에서 내년 3월 편성을 원해서, 제작도 늦어도 1월엔 들어가야 한다더라고.”
“그럼 힘들겠네요.”
다음 컴백은 12월 예정. 활동 기간은 한 달 정도. 대본 연구 등을 위한 준비 기간까지 생각하면 너무 빠듯하다.
“주연 자리를 권해주신 것은 아주 감사한 일이지만 말이야. 그래도 대본 한번 봐볼래?”
“네.”
오 팀장이 내민 대본 표지엔 제목과 작가 이름만 적혀 있었다.
[<안시> –임나비作]
“그리고 MBS <뮤직센터> MC 섭외 건.”
오 팀장의 얼굴에 미안함이 담겼다.
“이것도 내 생각엔 조금 힘들 것 같다. 한율이 네가 꼭 하고 싶다면 말릴 순 없지만….”
한율은 오 팀장의 시선을 따라 잔뜩 쌓인 대본을 보곤 수긍했다. 음악방송 MC의 출연 계약기간은 보통 6개월 혹은 1년 단위. 일주일에 하루지만, 가수 활동뿐이면 몰라도 연기 활동과 겹치면 일정을 조율하는 것도 힘들고 체력적으로도 지친다.
무엇보다, 딱히 재밌을 것 같지도 않고.
“팀장님께서 잘 거절해주세요.”
“그럼 그 자리에 다른 멤버를 추천해도 될까?”
“누구 생각하고 계세요?”
“유호. 사실 <뮤직센터> 측에서 연락이 왔을 때, 한율이 너는 연기도 병행하는 터라 조금 힘들지도 모른다는 뉘앙스를 흘렸거든. 그쪽에서도 충분히 예상하는 듯해서 호는 어떠냐 물어봤더니, 긍정적인 반응이 돌아오더라고.”
한율은 화려하게 꾸며진 음악방송 MC석에서 긍정적인 에너지를 뿜으며 서글서글하게 웃는 유호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호 형이면 잘할 것 같네요.”
“한율이 네가 그렇게 말해주니 조금은 마음이 놓인다. 고마워.”
“별말씀을요.”
“그럼 대본 느긋하게 보고, 마음에 드는 작품 있으면 말해줘.”
“네.”
한율은 오 팀장이 회의실을 나간 후 <안시> 대본부터 펼쳤다.
속독으로 팔랑팔랑 넘기며 몇 분.
우웅. 핸드폰에 차남석의 SNS 새 글 알림이 울렸다. 어제 기차 안에서 찍은 사진, 강릉의 카페와 해변에서 찍은 사진, 찹쌀떡과 함께 찍은 사진 등이 올라왔다.
[박가람 씨와 서한율 둘이 놀러 가는 데에 뻔뻔히 끼어듦 #박가람씨네개찹쌀떡 #강릉커피거리 #눈작아진안경버전막내]
-눈 작아진 안경버전 막내ㅋㅋㅋㅋㅋ
-[무대에서 보인 멋지고 귀여운 모습과 또 다른 순수한 모습이 사랑스럽네요. 미국 단독 콘서트 계획은 없나요?]
-사이좋은 톢톢이들♡
-[뉴욕 K-POP 콘서트에서 보고 팬이 되었습니다. 즐거워 보여서 좋네요. :-)]
-[아직도 당신들이 왜 ‘토끼’인지는 모르겠지만, 사랑스럽다는 데엔 동감입니다♡♡♡♡♡]
-네 사람 중 가람이가 젤 맏형인데 왜 젤 동생처럼 보이냐고ㅋㅋㅋㅋ
댓글엔 적절한 자막이 들어간 어스래빗의 영상 짤도 많았다. 그리고 이전보다 외국인들의 댓글이 눈에 띄게 늘었다. 어떤 이는 어제 그린라이브에 올라간 영상의 스샷 두 장을 댓글에 첨부했다.
-[이곳을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비와 한국전 참전 미군 용사비 앞에 묵념하는 어스래빗 멤버들의 모습. 그곳을 찾아가기 전, 차남석이 비 앞에 바칠 편지를 쓰는 장면 스샷을 올린 사람도 있었다.
-[나도 잊고 있던 그들을 기억하며 진지하게 공부하고 마음을 담아 편지를 쓰는 당신의 모습에 눈물이 났습니다. 감사합니다.]
-[직접 공연하는 모습 보고 싶다♡♡♡]
외국인들의 댓글 달리는 속도가 굉장히 빨라 팔로워를 확인했더니, 하루 사이 껑충 뛴 상태였다.
‘시너지 효과가 난 건가?’
뉴욕과 LA의 K-POP 콘서트에 출연하며 미국의 K-POP 팬들에게 눈도장을 찍었다. 그중 어스래빗에게 관심을 두게 된 사람들은 그린라이브 채널까지 찾아왔을 테고, 누구의 도움 없이 바로 알아들을 수 있는 영어 콘텐츠를 보며 멤버들을 더 쉽게 파악했을 터다.
여기에 바로 어제 올라온 워싱턴 여행 콘텐츠.
미국은 참전 군인을 영웅으로 여기는 나라다. 그들이 목숨 걸고 싸웠던 나라의 후손이 와서 감사를 표하는데, 어스래빗에게 관심을 가진 채 영상을 본 미국 팬들 입장에선 관심이 호감으로 변할 가능성이 충분했다. 미국인으로서의 자부심도 느꼈을 테고.
‘이걸 노리고 해당 장소를 찾아가도록 미션을 줬던 건가?’
한율은 자신의 SNS에 들어갔다. 차남석처럼 팔로워가 부쩍 늘어있었다. 다른 멤버들의 SNS 계정도 마찬가지. 어스래빗 공식 SNS나 너튜브 구독자 수도 퍽 늘었다.
-[일방적으로 자신들을 봐 달라고 뽐내는 게 아닌, 소통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모습에서 호감!]
‘인지도가 높아졌네.’
스카이러나와 원카운트에 비하면 아직 멀었지만 말이다.
우웅. 그때 모친으로부터 톡이 왔다.
-[율아, 내일 몇 시에 올 거야?]
[12시 전에 갈게요.]
-[그래^^]
당장 인지도가 높아졌다고 뭔가 특별한 일이 생기는 것도 아니다. 한율은 핸드폰을 내려놓고 다시 대본을 집어 팔랑팔랑 넘겼다.
다음 날. 한율은 오래간만에 부모와 점심을 먹고 외출했다. 목적지는 자동차 전시장.
“네 차는 10월 이후에나 받을 수 있지만, 그래도 그전에 동종모델 차량 시승도 해보고 설명도 들어야지.”
한율이 올해 생일 선물로 받고 싶다고 말한 차는, 부친이 이미 지난달 구매 계약을 진행한 상태였다. 인수 예상 시기는 두 달 후.
“TV로 봤을 때보다 훤칠하시네요. 나중에 사인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방문 예약을 했던 터라, 담당 딜러는 입구 앞까지 나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계약을 진행한 동일 모델 시승용 차량으로 그들을 안내했다.
“잠깐 운전석에 앉아서 살펴도 될까요?”
“물론이죠.”
한율은 운전석에 올라타, 딜러의 청산유수 같은 설명을 들으며 차량 내부 여기저기를 살폈다. 우아한 옷차림에 선글라스를 낀 모친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마음에 들어, 율아?”
“네. 생각했던 것보다 안이 넓어서 좋네요.”
부친이 엄한 얼굴로 말했다.
“혹시 모르니, 명의는 네가 면허 따고 1년 지나면 그때 온전히 네 걸로 돌려줄 거다.”
“네.”
“그럼 조수석으로 이동.”
한율은 운전석에서 내려서 조수석에 탔다. 부친은 운전석에 타려다가 뒷자리에. 모친이 운전대를 잡았다.
그렇게 도로 주행 시승을 한 번 하고 난 후엔 차를 반납. 이번엔 ‘아지트’를 지을 부지로 향했다.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건축가와 만나 함께 부지를 둘러보고, 한적한 카페에서 상세한 논의를 나눴다.
끄응. 잠자코 이야기를 들으며 도면을 살피던 부친이 앓는 소리를 내더니 한율에게 물었다.
“그런데 꼭 집을 이렇게 꼭꼭 숨겨진 산 중턱에다 지어야 하는 거냐? 이거 도로포장 비용만 해도 만만치 않을 것 같은데….”
한율은 생긋 웃으면서 대답했다.
“앞으로 더 열심히 일해서 갚을게요, 아버지. 걱정하지 마세요.”
“아니, 돈이 아깝다는 게 아니라….”
하아. 모친이 나지막하게 한숨을 쉬더니 남편을 바라보았다.
“공사비 내가 댈게요. 됐죠, 여보?”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라….”
서울로 돌아왔을 땐 어느덧 5시. 7시에 멤버들과 단체 연습이 있어, 한율은 집이 아닌 회사 앞에서 부모와 헤어졌다.
“나중에 영상통화 하자, 율아.”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스륵. 회사 입구 앞에 서자, 로비 데스크에 있던 직원이 문을 열어주었다. 덕분에 출입증을 꺼낼 수고를 덜었다.
“감사합니다.”
한율은 직원에게 감사를 표하곤 지하로 내려갔다.
“아, 한율아.”
마침 휴게실에서 나오던 유호가 한율을 보며 웃었다.
“바빠?”
“아니요.”
“그럼 잠깐 나 좀 도와줄래?”
“……?”
유호가 도와달라고 한 건 <뮤직센터> MC에 발탁되기 위한 연습이었다.
“한율이 네 덕분에 기회를 잡기는 했는데, 혼자 촬영하고 돌려봐도 뭐가 문젠지 객관적으로 딱 보이지가 않아서.”
“일단 촬영한 것부터 봐도 돼요?”
“응, 여기.”
한율은 유호와 빈 보컬 연습실에 들어가, 그가 혼자 연습하면서 찍은 영상을 보았다. 영상 속 유호가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활기차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여러분의 호우! 입니다!]
“…….”
“대본에 적힌 거야….”
유호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상체를 수그렸다.
“오 팀장님이 준 대본에 그렇게 적혀 있었다고….”
1년 사이 참 뻔뻔해졌어
그동안에도 영상 속 유호는 능청스럽게 혼자 잘 떠들었다.
[깜짝이야…! 갑자기 왜 그러세요! …아아, 스타믹스의 신곡 안무였어요?]
멤버가 눈을 빛내며 애교부리는 모습은 주로 옆에서만 봤지, 이렇게 정면으로 본 적은 드물어 잠깐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다. 하물며 이렇게 부담스러울 정도로 하이텐션 상태인 유호는 처음이라.
한율은 담담한 얼굴로 돌아와 고개를 끄덕였다.
“잘하시는데 왜요.”
객관적으로 보면 딕션도 좋고 표정도 좋다. 다른 음악방송 MC 영상을 보며 연구와 연습을 많이 했는지, 호들갑스러우면서도 조금은 뻔뻔하게 분위기를 유도하는 것까지 흡사하다.
여기에 MC 파트너와 호흡을 맞추고, <뮤직센터> 제작진에게 피드백을 받으면서 조금씩 자신만의 색을 찾아갈 터다. 평소 동생들에게 양보를 잘해 우유부단해 보이기는 해도, 은근히 주관도 또렷하고 고집도 있는 데다가 성실하기도 하니 잘할 것이다.
“여자 MC는 누군지 정해졌대요?”
그제야 유호가 얼굴에서 손을 떼며 고개를 들었다.
“퍼플아워… 멤버가 될 것 같다고 하더라.”
“데뷔한 지 이제 두 달밖에 안 됐는데요?”
“아이돌 데뷔가 두 달인 거지, 다들 모델이나 아역 배우 같은 이전 경력이 화려해서가 아닐까? 인기도 많잖아.”
한율은 <뮤직센터> PD가 아스대 총연출도 겸한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 아스대에서 유독 인지도가 낮은 아이돌이 푸대접받는 경우가 많다는 것도.
반면, 인기가 많은 원제로는 방송 전에 데뷔하니 문제없다며 특별히 섭외했다. MC들도 지시를 받은 듯이 은근히 원제로에 관한 언급을 많이 하기도 했고.
“형.”
“응?”
“그쪽에서 형 인기 없다고 구박하면 어떡해요?”
“…한율아. 넌 참 가끔 아무렇지 않게 사람을 때리더라?”
그날 밤. 뮤닷 로 만들어진 프로젝트 그룹 원제로의 데뷔 리얼리티 첫 회가 방송되었다. 방송에서는 이 끝난 직후, 열 명의 멤버들이 기쁨과 흥분을 가라앉힐 새도 없이 곧바로 숙소에다 짐을 풀고, 8월 미국 K-POP 콘서트를 위해 연습하는 모습이 그려졌다.
“기가 차네, 진짜.”
20일 아침. 유호의 차를 타고 회사로 가는데, 차남석이 핸드폰을 보며 어이없다는 얼굴로 웃었다.
“뭐가요?”
“지가 우리 데뷔조 멤버였단다.”
“……?”
차남석이 이어폰을 빼며 핸드폰을 넘겼다. 그가 보고 있던 영상은 원제로 데뷔 리얼리티의 다음 화 예고였다. 차남석이 재생 바를 뒤로 돌리고 재생 버튼을 눌렀다.
미국 뉴욕 K-POP 공연장. 리허설을 마치고 내려오는 누군가를 바라보는 원제로의 모습이 잡혔다. 그중 쓴웃음을 짓는 정민솔이 클로즈업.
자막.
[해외에서 선후배로 만난 옛 친구들.]
[잠시 후, 대기실에서 몰래 눈물을 훔치는 민솔.]
호텔 객실에서 촬영한 정민솔의 단독 인터뷰가 이어졌다.
[부족한 실력을 채워야 하는데, 전 그 자리에다 열등감을 채웠어요. 그래서 데뷔조에서 떨어졌고…. 하, 죄송합니다.]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돌리는 정민솔. 뒤이어 원제로의 리더이자, 워크라이의 멤버였던 유지의 모습도 나왔다.
[넓은 공연장을 보는데 마음이, 가슴이 막…. 슬프기도 하고 그런 거예요. 워크라이 멤버들도 생각나고….]
툭. 차남석이 일시 정지 버튼을 누르고 스크롤을 내렸다. 이하, 댓글.
-원제로에 들어오기 위한 과정이었다고 생각해. 앞으로 더 잘 될 거야 우리 천사♡♡♡
-어쩐지 연습생 기간도 적당하고 실력과 외모도 전혀 안 딸리는데 일반 연습생으로만 머물렀을 리가 없지
-민솔이 예전에 WB래빗에 있었다고만 알고 있었는데 ㅇㅅㄹㅂ데뷔조였구나
-스스로 열등감으로 채웠다고 말하는 게 너무..ㅠㅠ
-ㅇㅅㄹㅂ 친구들 신인상도 타고 잘 되는 거 보면서 얼마나 자책하고 속상했을까..
“테스트로 들어와서 일주일 만에 인성질하고 떨어진 새끼가.”
유호가 룸미러를 통해 차남석을 보며 인상 썼다.
“남석아, 욕.”
차남석은 가볍게 손을 들어 유호에게 조심하겠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테스트였어도 같이 레슨 받고 연습도 하고 숙소 생활도 했으니, 겉으로 보기엔 데뷔조였던 건 맞지 않아요?”
“서한율. 우리 데뷔조 발표가 언제였냐?”
“재작년 9월?”
“데뷔는.”
“작년 4월이요.”
“7개월 중 고작 일주일 있어 놓고 데뷔조였다고 지껄이는 게 안 웃기냐?”
“딱히?”
“…….”
길우성이 쯧쯧 혀를 찼다.
“공감 지수 바닥인 써한한테 뭘 바랍니까, 형님.”
“그런데 조금 놀랍긴 하네요.”
“뭐가?”
“민솔이 형이요. 연기실력이 이렇게 좋은 줄은 몰랐어요.”
차남석이 한숨을 쉬며 핸드폰을 가져갔다.
“본인한테 유리한 상황으로 만들고자 할 때만 발휘되는 치졸한 필살기지, 무슨. 하, 솔직히 다 까발려버릴 수도 없고.”
구구절절 사실대로 말하려면 라이언이 받았던 의심과 병적도벽에 관해서도 언급해야 한다. 그리고 무조건 아티스트를 감싸거나 아티스트의 편에 서서 생각하는 팬들 간에 싸움이 벌어질 것도 자명한 일.
WB래빗 측에서는 정민솔이 분란을 일으켜 데뷔조 테스트에서 떨어뜨리기는 했으나, 오랫동안 연습생 생활을 했었고 겉으로나마 멤버들에게 사과하고 몇 달 자숙하는 모습을 보였으니 침묵할 것이다. 일이 크게 번지지 않는 이상.
정민솔도 그걸 잘 알고 ‘이 정도면 괜찮겠지’ 하며 데뷔조를 언급했을 것이다. 스스로 열등감을 운운한 것도, 본인의 잘못이 드러나도 이미 충분히 반성했다는 이미지를 만들기 위한 게 아닐까.
참 소소하게 영악한 아이였다.
차남석이 중얼거렸다.
“그때 한 대 후려갈겼어야 했는데.”
“싸움도 못 하면서 몬 소리야.”
“…….”
차남석의 싸늘한 시선을 받으며 길우성이 헤헤 웃었다.
“라욘 형 흉내! ……아얏! 큰형! 남석 씨가 나 때렸어!”
“위험하니까 차 안에선 얌전히!”
“네.”
한율은 옆에서 벌어지는 소란을 무시하며 자신의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포털사이트 연예뉴스란에 어스래빗 기사가 올라와 있었다.
[어스래빗, 24일 日발매 싱글앨범 예약 판매 자체 최고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