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1화 (121/427)

* * *

5일엔 대만, 7일은 인도네시아, 9일은 싱가폴. 팬콘이 끝나면 하룻밤 자고 다음 목적지로 이동하던 어스래빗은, 싱가폴 팬콘이 끝난 뒤엔 바로 떠나지 않고 며칠 머물며 그린라이브 콘텐츠를 촬영했다.

그리고 12일, 홍콩에 도착했다.

“이곳이 물가가 살인적이라는 홍콩인가.”

“홍콩 물가 검색해봤는데, 여기 한식당에서 짜장을 만 오천 원 정도에 팔더래.”

“이런 미친?!”

“걱정하지 마. 우리에겐 짜장라면이 있다.”

“그 짜장라면, 박가람 씨가 다 드셨는데요.”

“…야, 박가람이.”

박가람은 이건우를 무시했다.

“아니야. 다 비싼 건 아니고, 우리나라랑 비교하면 조금 비싸거나 비슷한 정도래. 집값 빼고.”

“그래. 조금 비싸거나 비슷한 정도니까 가람이가 한인마트에 가서 짜장라면 사 오자.”

“응. 같이 가자, 이건우.”

차남석이 끼어들었다.

“가는 김에 김도 부탁해요.”

“응. 들었지, 이건우?”

“…….”

“호 형, 이건우가 나 무시해.”

듣다 못한 이건우가 발끈했다.

“야. 내가 97년생이라고 해도 2월생이라서 96년생 취급받거든? 그런데 넌 98년 12월생이…!”

어스래빗 멤버들은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을 내버려 두고 걸음을 재촉했다. 한율은 말없이 주변 광경을 눈에 담으며 걸었다.

게이트가 열렸던 초기, 가장 큰 피해를 본 나라는 중국이었다. 그러나 홍콩은 부유한 사업가이자 각성자인 한 여성이 재빨리 사람들을 홍콩섬으로 대피시키고 육지와 연결된 통로들을 차단, 이후 쓸만한 각성 능력자들을 모아 이 공항이 있는 츠례자오섬과 란터우섬까지 확보하여 일대를 하나의 거대한 요새로 구축했다.

하지만 결국엔 방사능에 피폭되어, 모두 죽었다고.

길우성이 게이트를 건너기 전 일이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냐?”

한율은 길우성을 힐끗하곤 담담히 대답했다.

“여기 테마파크에도 한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

길우성이 질린 표정을 지었다.

“차라리 등산을 가…. 너 따라다니다간 심장마비로 죽겠다.”

“안 따라오면 되잖아.”

“아니, 그게… 음. 그래, 안전한 놀이기구를 탈 생각은 없나, 친구?”

다음 날은 그들의 팬콘 준비가 한창인 공연장을 살피고, 특수효과나 조명, VCR 없이 음향만 가지고 가볍게 무대 리허설을 한 후 호텔로 돌아갔다.

9월 14일. 필리핀부터 시작한 아시아 팬콘 5개국 투어 마지막 순서.

“드디어…!”

박가람이 감개무량한 얼굴로 뭐라 외치려던 찰나였다. 치이익. 대기실에 에어 파스 냄새가 퍼졌다.

강보배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많이 아플 것 같은데….”

“괜찮아.”

라이언의 왼쪽 발목은 발갛게 부어 있었다. 리허설 때나 팬미팅 땐 생글생글 웃으며 잘 참는 듯했으나, 시간이 갈수록 상태가 악화되는 게 눈에 보였다.

직접 에어 파스를 뿌려준 오 팀장이 고개를 흔들었다.

“안 되겠다. 라이언 넌 오늘 앉아서 해. 팬들도 다 이해해주실 거야.”

“괜찮아요. 이번만 참으면 돼요.”

“고집부리지 말고. 이번 투어는 오늘이 마지막이지만, 네 활동은 끝나려면 한참 남았다.”

오 팀장이 쭈그려 앉았던 몸을 일으켰다.

“승우 씨, 공연팀에게 사정 설명하고 의자 하나 준비해달라고 부탁해주세요.”

“네!”

“…….”

라이언은 시무룩한 얼굴로 발갛게 부은 제 발목을 내려다보았다. 유호와 이건우가 한 번씩 라이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괜찮아, 괜찮아.”

안무 디렉터가 대신 자리를 채워줄 수 있는 곡을 제외한 다른 무대는, 최대한 동선이 헷갈리지 않는 선으로 즉석에서 수정했다.

“다들 미안….”

“괜찮아요.”

“원래 투어 도중 누구 한 명 다치거나 아픈 일이 전혀 없으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라더라.”

이중 에어 파스를 뿌리지 않은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한율도 오늘 아침 일어났을 때부터 오른쪽 발목이 조금 시큰거려, 조금 전 가볍게 뿌렸다.

“라이언은 내일 한국에 들러서 병원 가보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팀장님. 어차피 시즌그리팅 화보 촬영도 월요일부터잖아요.”

유호의 제안에 오 팀장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곤 노트북을 펼쳤다. 이건우가 손을 들었다.

“라이언 혼자는 쓸쓸하니까 저도 갈게요, 팀장님.”

“그래.”

“저도요.”

“나도!”

오 팀장이 고개를 들어 강보배와 길우성을 바라보았다.

“선착순 한 명, 이건우. 끝.”

홍콩 팬콘의 세트리스트는 지난 다른 팬콘과 구성이 같았다. 관객들은 라이언이 의자에 앉아 등장하자 실망보단 걱정하는 표정을 지으며, 양해를 구하는 목소리에 괜찮다고 크게 답했다.

마지막 앵콜 무대를 할 때 이건우가 라이언을 업고 앞으로 나오거나, 차남석이 그를 부축해주자 감동한 얼굴로 환호성을 지르기도.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100분 넘게 진행된 공연이 끝났다.

어스래빗 멤버들은 회사 소속 스태프들과 계약으로 맺어진 외주 공연제작팀, 현지 스태프들과 기술자들에게 일일이 감사 인사를 전했다.

멤버들끼리도 새삼 어깨나 등을 토닥이며 낯간지러운 인사를 나눴다.

“다들 수고했어.”

“수고하셨습니다.”

“그런데 많이 신기하다. 2년 전만 해도 내가 아이돌이 돼서 이런 큰 공연장에서 랩도 하고 춤도 출 거라곤 생각도 못 했는데.”

“그만큼 고생도, 노력도 많이 했지. 수고했다, 보배야.”

“대견한 녀석.”

“히.”

“그렇게 웃진 말고. 깬다.”

“…….”

“이번 스케줄 끝나면 나랑 같이 헬스 다니면서 체력도 키우자? 복근도 만들고.”

“나 전에도 그 말 들은 것 같은데….”

멤버들은 저마다 입가에 웃음기를 머금고 짐을 챙겼다.

감회가 서린 눈으로 대기실을 둘러보다 나가는 그들 뒤를, 카메라를 든 스태프들이 조용히 따랐다.

“원제로 데뷔 쇼케이스 이제 막 끝났나 봐.”

호텔로 돌아가는 리무진 안.

길우성이 속닥거리며 한율에게 핸드폰을 보여주었다. 다른 멤버들은 차에 타자마자 곯아떨어진 지 오래라 조용했다.

“반응 장난 아님.”

포털사이트 실검 1위가 [원제로 데뷔축하해], 3위가 원제로와 이번 타이틀곡이었다. 누가 봐도 원제로 팬들의 실검 총공이었으나, 이 또한 그들의 인기를 나타내는 반증이었다. 연예뉴스란 상위권 기사도 온통 원제로의 데뷔 쇼케이스 리뷰 기사.

“나 슬슬 걱정되는 게 있는데.”

길우성이 잠든 멤버들을 돌아보더니 메모 앱을 실행했다. 무수히 많은 메모 리스트는 얼핏 봐도 온통 안무에 관한 내용이었다.

길우성이 새 메모를 열어서 빠르게 메시지를 쳤다.

[전에 민솔 씨 인성 논란 터졌을 때.]

[그때 민솔 씨하고 불화 같은 거 없었다고 한마디만 해달라는 부탁 거절했잖아.]

[그것 때문에 우리한테 불이익 같은 거 돌아오면 어떡하냐?]

[상대는 무려 FJ그룹, 뮤닷인데.]

[민솔 씨를 특별히 아껴서가 아니라, 감히 우리 부탁을 거절해??? 괴씸하다! 이러고.]

참 빨리도 걱정한다. 3주가 다 되어 가는데.

한율은 말없이 길우성의 손에서 핸드폰을 빼내, ‘괴씸’을 ‘괘씸’으로 정정해준 뒤 돌려주었다.

“그건 일 닥치면 그때 생각하고, 잠이나 자.”

“엉.”

* * *

원제로가 매일 연예뉴스란 메인에 오르는 동안, 어스래빗은 [어스래빗, 亞 5개국 팬콘 투어 성료!] 기사를 하나 내놓고 일본 삿포로에서 시즌그리팅 로케 촬영을 진행했다.

9월 19일. 한율은 거의 한 달 만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제 캐리어는 방에다 둬주세요.”

“응.”

“형도 같이 갈까?”

“유찬이 형이랑 같이 가니까 괜찮아요. 쉬세요.”

공항에서 숙소로 가는 도중, 한율은 중요한 소지품이 든 가방만 챙기고 조유찬과 차에서 내렸다. 내린 곳은 운전면허시험장. 다른 평일엔 학교나 스케줄을 가야 해서 오늘밖에 시간이 없었다.

“신분증이랑 사진 잘 챙겼지?”

“네.”

운전면허시험장은 한산했다. 자신을 알아볼 법한 사람도 없어 보여, 한율은 답답한 모자를 벗고 응시원서를 작성했다.

그로부터 몇 시간 후.

한율은 무난하게 필기시험 합격을 받고 나왔다. 내내 기다려주었던 조유찬이 물었다.

“내친김에 학원도 접수하러 갈까?”

“학원 접수는 다음 달에 느긋하게 해도 될 것 같아요.”

“생각해둔 곳은 있어?”

“가람이 형 다닌 곳에 가보려고요. 어쨌든 고마워요, 형. 사적인 용무인데 같이 와줘서.”

조유찬이 씨익 웃었다.

“별말씀을.”

숙소로 돌아와 보니 방엔 캐리어는 물론이고 일본 쇼케이스부터 아시아 팬콘 투어를 하는 동안 팬들에게 받은 선물과 팬레터가 잔뜩 쌓여 있었다.

“…후우.”

절로 한숨이 나오는 양. 거실에서 뒹굴뒹굴하며 늘어져 있다가 문 앞까지 따라온 길우성이 물었다.

“도와줄까?”

“됐어.”

한율은 가장 먼저 발코니의 화분부터 살폈다. 숙소를 청소해주는 가사도우미가 잘 봐주었는지 여전히 싱싱했다.

창과 발코니 문을 활짝 열고 나선 캐리어에서 핸드폰 충전기를 꺼냈다. 충전을 시키면서 세 번째 EP 앨범에 담길 곡을 재생, 가이드보컬 버전의 노래를 입속으로 흥얼흥얼 따라 부르며 정리를 시작했다.

우웅.

“……?”

얼추 정리되어갈 무렵, 돌연 노래가 끊기고 진동이 울렸다. 웬일로 배우 윤상진에게서 전화가 왔다.

“네, 선배님.”

-[안녕, 한율아. 어… 기사로 오늘 귀국한 거 봤어. 잘 다녀왔어?]

“네. 선배님은 잘 지내셨어요?”

-[나야 늘 잘 지내지. 혹시 지금 바빠?]

한율은 관세를 적잖이 물었을 것 같은 명품 팔찌를 살피며 대답했다.

“아니요, 쉬고 있었어요. 무슨 일 있으세요?”

-[그냥 잘 지내나 궁금하기도 하고, 직접 얼굴 본 지도 오래된 것 같아서. 그리고… 괜찮으면 부탁하고 싶은 것도 있고?]

“부탁이요?”

잠시 뜸을 들이던 윤상진이 웃으며 말했다.

-[드라마 특별출연.]

한율은 윤상진이 현재 KBC에서 방영 예정인 사극에 캐스팅되었단 사실을 떠올렸다.

“무슨 역할인데요?”

-[양반집 도련님. 1화에 잠깐 나와서 나 한심하게 쳐다보고 패물 하나 던져주는 역이야. 비중 있는 조연의 아역 시절이기도 한데, 감독님이 나보고 대신 물어봐달라고 해서. 촬영은 10월 첫째 주가 될 것 같아.]

다음 앨범 준비를 하는 기간이지만, 비교적 한가하기도 한 기간.

“네. 회사에 물어본 후에 답변드릴게요.”

윤상진과 통화를 끝낸 후엔 정리를 마무리하고 핸드폰으로 스케줄을 살폈다. 내일은 시즌그리팅 스튜디오 촬영, 모레엔 히아신스 라움, MOHE의 안인섭과 함께 <감성 푸드트럭> 녹화가 있었다.

한율은 <감성 푸드트럭>이란 글자를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흐음….”

뭐가 들었을까?

21일 새벽. 한율은 유호와 숙소를 나섰다. 한율은 뮤닷으로, 유호는 MBS로 출근하기 위해.

유호는 투어 도중 MBS <뮤직센터> MC로 발탁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함께 새 MC가 된 사람은 퍼플아워의 진은수, 그리고 MOHE의 이해원.

원래 새 MC가 되면 신고식으로 스페셜 커버 무대를 하게 되는데, 유호는 투어 중이었던 터라 비교적 쉬운 곡을 선정해주었다고 했다. 그리고 귀국한 그제, 시즌그리팅 촬영이 있던 어제도 새벽 늦게까지 연습하다 들어왔다.

하지만 이번이 첫 고정 예능에 생방송까지 해야 하는 자리라 부쩍 긴장한 모습이었다.

“잠은 좀 잤어요?”

“응. 한… 시간 정도?”

“형 연습도 많이 했고, 우리가 하는 깡충 극장이랑 얼추 비슷하니까 잘하실 거예요.”

운전하던 조유찬도 한마디 거들었다.

“<뮤직센터> 제작진들도 다른 MC 스타일 따라 할 필요 없다고, 부담 갖지 말라고 했잖아. 너무 긴장하지 마.”

유호가 슬쩍 웃으며 대답했다.

“네, 형. …고마워, 한율아.”

한율은 어깨를 으쓱이곤 <감성 푸드트럭> 측에서 보낸 대본을 훑었다. 오동식 팀장이 직접 MOHE 안인섭의 스케줄을 알아내 따 온 일이었다. 제작진과의 미팅은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 있을 때 오 팀장의 노트북을 사용해 화상으로 진행했다.

<감성 푸드트럭>은 매주 푸드트럭 선물을 의뢰받고, 의뢰인이 원하는 음식 요리에 특화된 셰프와 함께 푸드트럭을 타고 찾아가는 프로그램이었다. 뮤닷답게 의뢰인은 가수. 선물을 받는 대상도 비연예인은 아닐 거라고.

메인 MC는 스엔 엔터 소속의 2세대 아이돌이자, 요리를 잘한다고 소문난 ‘옥정훈’이었다. 게스트는 음식 준비를 도우며 토크도 하고, 푸드트럭에서 식사가 진행되는 동안 라이브로 노래를 부르는 역할이었다.

의뢰인과 선물 받을 사람의 정체는 녹화 전까진 비밀. 그러나 불러야 할 노래는 미리 전달받았다.

“그런데 한율이 너 정말 괜찮겠어? 함께 출연하는 게스트가….”

유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뒷말을 흐렸다. 조유찬도 룸미러를 통해 한율을 살폈다.

두 사람은 한율이 오 팀장에게 일부러 부탁했다는 걸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 사건 이후로 지금껏 별일 없었잖아요. 건우 형이랑 길우성이 나간 <러브티>에서도.”

당시 길우성이 안인섭을 경계하느라 PD로부터 산만하다는 주의를 받고, 방송 편집이 많이 되기는 했지만 말이다.

한율은 여유롭게 미소 지었다.

“이번에도 괜찮을 거예요.”

뮤닷 <감성 푸드트럭> 오프닝 녹화장. 녹화장엔 음식의 기본준비를 할 수 있도록 다양한 주방가구와 도구가 마련되어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어스래빗 한율입니다! 오늘 녹화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한율은 가장 먼저 제작진들에게 예의 바르게 인사한 뒤, 옥정훈이 있는 대기실을 찾았다. 그의 대기실에는 안인섭이 먼저 와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어스래빗의 한율입니다. 오늘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아.”

소파에 편히 앉아 안인섭과 이야기를 나누던 옥정훈은, 눈만 동그랗게 뜨곤 손을 들었다.

“그래, 잘 부탁해.”

다소 건성인 태도. 그러나 과거에 잘나갔던, 지금도 심심하면 예능에 나올 정도로 잘나가는 연예인 대부분은 후배들을 이렇게 대했다. 어느 순간부터 ‘위’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태도가 버릇처럼 굳어져 버린 사람들.

한율은 안인섭에게 시선을 옮겼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아스대 이후로 오래간만에 뵙네요.”

“그래, 안녕.”

안인섭이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손을 들었다.

“투어 잘 됐다면서. 축하해.”

“감사합니다.”

“그런데 한율이 너 그제야 귀국했잖아. 세션맨이랑 노래는 맞춰봤어?”

“아니요, 아직.”

“워낙 실력이 좋으신 분들이라 알아서 잘 맞춰주실 것 같기는 한데, 중간에 연습할 수 있는 시간 전부 양보해줄게. 난 충분히 맞춰봐서 괜찮아.”

살가운 말과 태도. 이 녀석은 아이돌이 아니라 배우의 길을 선택하는 게 낫지 않았을까.

옥정훈이 안인섭에게 물었다.

“라움은? 라움한테는 양보 안 해?”

“라움 선배님은 목소리 자체가 악기니 괜찮지 않을까요?”

“으으, 너 그 말 라움 앞에서도 해라. 꼭 해라.”

“그러다 오해 살 일 있어요?”

“사. 사서 티스트랑 싸워.”

“선배님이 후배들 싸움 붙이려고 하면 어떡합니까.”

서로 농담을 건네며 웃는 모습이 참 사이가 좋아 보인다. 안인섭이 뻔뻔하게 친한 척을 잘해, 뒤에서도 정말 친한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럼 전 라움 선배님께 인사드리러 가볼게요.”

“응, 나중에 봐.”

옥정훈과 안인섭이 한율에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한율은 고개를 꾸벅인 후 옥정훈의 대기실을 나왔다.

문을 닫는데 옥정훈의 목소리가 들렸다.

“쟤 가까이에서 보니까 피부 진짜 좋다. 하, 역시 10대는 못 이겨.”

라움은 한율이 찾아가자 누구와 달리 자리에서 일어나 반겨주었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어스래빗 한율입니다. 오늘 녹화 잘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히아신스 라움입니다. 저야말로 오늘 잘 부탁드립니다!”

두 손을 앞으로 모아 고개까지 꾸벅 숙이며.

“…하하.”

그러나 고개를 들고 시선이 마주치자 다소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음악방송 대기실에서 멤버들과 복작거리며 인사했던 평소와 달리, 이번엔 너무 조용한 까닭.

“잠깐만요.”

멋쩍게 웃은 라움이 소파에 둔 가방을 집어 뒤적거렸다.

“……?”

의아한 얼굴로 보는데, 라움이 가방에서 얇은 책자 하나를 꺼냈다. <별☆일없는 집> OST 앨범 구성품인 드라마 포토북이었다.

“제가 별일 OST 참여한 건 아시죠…?”

“물론이죠. 좋은 노래를 불러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저도 그때 드라마 진짜 재밌게 봤거든요.”

라움이 한율에게 앨범과 펜을 내밀었다.

“그래서 여기에 사인 좀 부탁드리고 싶은데….”

“저야 영광이죠. 어디에 하면 될까요?”

“첫 장이요.”

“네.”

“아, 여기 앉아서 하세요.”

“감사합니다.”

한율은 라움과 소파 하나를 사이에 두고 앉아, 포토북 첫 장을 펼쳤다. 내지에는 이미 스타믹스 지헌과 박현우의 메시지와 사인이 있었다.

한율은 적당히 빈 곳에다가 메시지와 사인을 남겼다.

[멋진 OST로 드라마를 더욱 빛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서한율.]

“여기.”

라움은 고개를 꾸벅이며 포토북과 펜을 받곤, 한율이 적은 메시지를 확인했다. 그녀가 환하게 웃었다.

“감사합니다! 사실은 몇 달 전부터 한율 씨한테 사인받으려고 가지고 다녔는데, 좀처럼 타이밍이 안 맞았었거든요. 괜히 사람들 많은 곳에서 꺼내면 오해를 살 수도 있고. 희우 선배님이랑 촬영한 영화는 언제 개봉해요?”

“12월 중순으로 잡혔어요.”

“와…! 개봉하면 꼭 보러 갈게요.”

“감사합니다. 그럼 전 대기실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선배님.”

“네, 메시지 고마워요. 나중에 봐요~.”

라움은 문 앞까지 한율을 배웅했다. 한율이 대기실로 들어갈 때까지 손을 흔들어서, 한율도 문을 닫기 전까지 고개를 꾸벅여야 했다. 그리고 눈치껏 비슷하게 문을 닫았다.

내내 옆에서 지켜보던 조유찬이 고개를 끄덕였다.

“왜 시간이 갈수록 티스트 팬들이 라움 씨를 응원해주는지 잘 알겠다. 앞뒤가 똑같네.”

잠시 후, 메인 MC인 옥정훈의 어색한 연기로 <감성 푸드트럭> 오프닝 녹화가 시작되었다.

차례대로 나온 게스트들은, ‘네가 나올 줄 몰랐다’라는 표정으로 반갑게 인사를 나누다가 웃음을 터뜨리면서 ‘아까 대기실에서 인사했잖아요.’라고 이실직고했다. 이 또한 대본에 있던 내용이었다.

“그런데 우리가 트럭을 타고 가야 할 시간이 정해져 있어서, 근황 토크는 의뢰인 영상을 보고 난 다음, 재료를 준비하면서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감성 푸드트럭> 첫 번째 의뢰인은 불혹을 넘긴 1세대 아이돌이었다.

[제가 푸드트럭을 선물로 보내고 싶은 분은, 배우 강덕심 선배님입니다.]

한율은 VCR을 보며 놀란 목소리를 냈다.

“강덕심 선생님…?”

실제로 그렇게 놀라진 않았다. 그러나 ‘강덕심’이란 이름을 듣는 순간 제작진이 왜 자신을 기꺼이 섭외했는지 이유를 잘 알 것 같아, 적절한 반응을 보였다.

강덕심은 SBC <객귀, 해>에서 한율이 연기한 ‘윤진해’의 모친 역을 맡은 배우였다. 덤으로, 이사문 감독처럼 명절 때마다 안부 인사를 주고받는 사이.

‘운이 좋았네.’

옆에서 라움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

“객귀에서 한율 씨 엄마 역 맡으셨잖아요…!”

“아아…!”

안인섭도 그제야 깨달았다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한율과 VCR을 번갈아 보았다.

[제가 데뷔했을 초창기엔 예능 프로그램에 콩트 비슷한 게 많았어요. 거기에서 선배님을 처음 뵀었는데, 그때 정말 긴장해서 바짝 얼어있던 저한테 조언도 많이 주시고, 저 때문에 NG가 나도 몇 번이고 친절하게….]

한율은 VCR을 집중해서 보다가 은은하게 미소 지었다. 의뢰인이 당시 강덕심에게 느꼈던 감사한 마음을, 자신도 잘 알 것 같다는 얼굴로.

VCR 영상이 끝나자 옥정훈이 매끄러운 입담으로 사연을 정리하고, 한율에게 물었다.

“한율 씨는 강덕심 선생님 잘 알죠?”

“네. 작년에 찍은 <객귀, 해>라는 드라마에서 제 어머니셨어요.”

“그 드라마 진짜 무서웠는데.”

안인섭이 지금 생각해도 정말 무섭다는 듯 진저리를 쳤다. 옥정훈이 안인섭을 살피며 물었다.

“인섭 씨도 그 드라마 봤어요? 라움 씨는요?”

“전 공포물 엄청 좋아해서 꼭꼭 다 챙겨봤어요. 특히 한율 씨 나오는 <객귀, 해>는 세 번 넘게 본 것 같아요.”

옥정훈이 감탄했다.

“와…. 난 무서운 건 정말 못 보는데…. 아, 토크는 재료 준비하면서 계속할까요? 일단 요리에 필요한 복장부터 갖추고.”

그들은 한쪽에 마련된 앞치마부터 둘렀다. 알아서 척척 매듭을 짓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안인섭은 잠시 어디가 앞인지 헤매다가 목끈을 걸었다. 그리고 허리끈에서도 버벅.

[한율씨 대신 묶어주세요]

한율은 작가가 든 스케치북의 지시를 확인, 자연스럽게 안인섭에게 다가갔다.

“제가 해드릴게요.”

“고마워.”

“요즘 후배 가수들이 서로 사이가 참 좋아요. 보기 좋아.”

카메라를 비롯한 수십 명의 스태프가 이쪽을 보고 있었다. 한율은 안인섭의 앞치마 허리끈을 적당히 잡아당겨 빠르게 매듭지었다.

“……?”

그러다 의아한 구석을 발견했다.

상의로 가려졌던 바지 뒷주머니 아랫부분. 납작한 네모 형태의 뭔가가 튀어나와 있었다. 평평하게 고른 걸로 보아 지갑보단 핸드폰 같았다.

야외 촬영도 아닌 실내 스튜디오에서 핸드폰을 지닌 채 녹화를?

“다 됐어요, 선배님.”

“고마워.”

“한율 씬 매듭도 예쁘게 묶네.”

위생 모자와 투명한 위생 마스크까지 쓰고 나서야 그들은 오늘의 푸드트럭 책임자인 셰프의 지시대로 재료를 손질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준비된 재료를 카트에 실어 푸드트럭으로 옮겼다.

이걸로 오프닝 녹화는 끝.

“수고하셨습니다. 앞치마랑 모자, 마스크는 여기 두시고, 한 시간 후에 이동할게요. 옷 갈아입으셔도 괜찮습니다.”

“한율 씨는 대체 못 하는 게 뭐에요?”

조연출의 말을 듣고 바로 몸을 돌리려는데, PD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오디오도 센스 있게 잘 맞춰주고. 칼질 솜씨도 보통이 아니던데요?”

조유찬이 냉큼 다가왔다.

“칼질은 원백두 선생님께서도 인정해주셨습니다.”

“하하. 나중에 드라마에서 젊은 천재 셰프 역 같은 거 맡아도 되겠어요.”

“감사합니다.”

입에 발린 칭찬을 하는 걸 보면, 원제로 정민솔 건에 대한 부탁을 거절했다며 무언가 오더가 내려온 것 같진 않았다. 애초에 그 일로 괘씸죄를 물으려 했다면 이 프로그램 섭외부터 안 됐을 테지만.

‘아니면 서석진 국장 때문일지도.’

그때 한율의 눈에 이쪽을 힐끗하고 들어가는 안인섭이 보였다. 한율은 PD에게 웃으며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그럼 옷 갈아입고 뵙겠습니다.”

“네, 그래요.”

한율은 안인섭의 뒤를 따라갔다.

조금 전 무거운 요리재료를 카트에 실을 때, 안인섭은 순간 뒷주머니의 핸드폰이 빠지지 않을까 빠르게 잡았다. 매니저에게 핸드폰을 맡기는 걸 깜빡한 게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 정도로 몸에 꼭 지닌다는 건.’

굉장히 중요한 무언가가 핸드폰에 들어있다는 반증. 하물며 3대 음원사이트인 소리구름의 시상식 수상 내정자도 말 한마디로 갈아치운 사람의 핸드폰이다.

한율은 호기심이 생겼다.

‘뭐가 들었을까?’

10여 분 후.

한율은 안인섭의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미간을 구겼다.

‘뭐야, 이게?’

일부만 봐도 이 정도

MBS <뮤직센터> MC 유호, 이해원의 대기실. 사녹을 마친 보이그룹 원제로가 찾아왔다.

“완전한 하나!”

“원 없는 무대!”

“원! 제로입니다!”

“MC 데뷔 축하드립니다, 선배님!”

힘찬 구호와 축하 인사. 유호와 이해원은 환하게 웃으며 화답했다.

“감사합니다. 원제로 분들도 데뷔 축하드립니다.”

“데뷔 축하해요.”

“여기 저희 앨범입니다.”

“혀엉…!”

인사가 끝나자마자 변지욱이 호들갑을 피우며 다가왔다. 유호는 변지욱이 뻗은 팔이 무색하게 어깨를 잡아 툭툭 두드렸다.

“너 이제 징그럽다니까?”

“와, 너무해. 승준이 형, 호 형 점점 쌀쌀맞아지는 거 같지 않아?”

임승준이 덤덤히 대답했다.

“너한테만 그럴걸?”

“와, 충격.”

“잠은 잘 자? 정신없지?”

변지욱이 충격받은 표정을 싹 날리며 유호의 팔을 덥석 잡았다.

“선배님, 단시간에 꿀잠 자는 비법 좀 알려주십쇼.”

“하하.”

원제로가 인사 순회 도중 온 터라, 이야기는 길게 나누지 못했다. 임승준은 머쓱하게 서서 웃기만 하는 다른 멤버들의 눈치를 살피곤 대표로 말했다.

“그럼 나중에 다시 뵙겠습니다, 선배님.”

“네, 홧팅하세요.”

“쉬세요.”

원제로 멤버 중 가장 뒤에 서 있던 정민솔부터 대기실을 나갔다. 유호는 문 앞까지 그들을 배웅하다가, 임승준을 잡아 조용히 물었다.

“너희 혹시 폰 압수당했어? 연락 안 되던데.”

임승준은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호도 고개를 끄덕이곤 잡았던 옷자락을 놓았다.

“슬슬 깨달았나 봐요.”

문이 닫힌 뒤, 이해원이 조용히 말했다.

“응?”

이해원이 먼저 말을 꺼내는 경우는 거의 없던 터라, 유호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뭘?”

“정민솔이요.”

이해원은 조금 떨어진 곳에 앉은 스태프를 살피곤 말을 이었다.

“대중의 시선과 관심을 받는 직업이 아니라면 조용히 묻혔을 일이, 여기에선 얼마나 크게 돌아오는지.”

“아….”

“그래서 많이 불안할 것 같기도 해요. 당장 인기는 본인이 많을지언정, 업계 인맥이나 평판은 상대방이 더 좋으니까요. 그건 따라잡고 싶다고 해서 바로 따라잡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이해원은 수려하게 생긴 외모에다 대본대로 잘 웃고 떠들어서, 잘 모르는 사람에겐 긍정적이고 밝은 성격으로 오해받는다. 하지만 그는 카메라가 돌아가지 않는 자리에선 아주 조용했다.

처음 신고식 무대를 연습할 때도, 음악이 끊긴 쉬는 시간엔 정적만 흘렀다. 그나마 ‘한율이랑 친하지?’라고 물어본 뒤에야 부드럽게 스르륵 풀리는 미소를 볼 수 있었다. 진은수도 조금씩 말문을 열었다.

“혹시 한율이한테 무슨 얘기 들었어?”

이해원은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사과받았다고 들었어요.”

“그렇구나….”

유호는 어설픈 웃음을 지었다. 이해원의 말에 은연히 담겨 있던 정민솔을 향한 적대감. 그제야 정민솔이 참 큰일 났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당사자가 사과받은 건 크게 중요하지 않다.

‘쟤가 걔한테 그런 말을 한 건 사실이란 소리잖아.’, ‘사람 잘 안 변하지.’ 이렇게 자연스럽게 드는 경계심. 이해원처럼 서한율과 친한 이들은 더욱, 부정적인 필터를 끼우고 정민솔을 보게 되지 않을까.

‘여기에 한율이 아버지는 KBC 국장.’

만약 이 바닥에서 영향력이 있는 누군가가 별 뜻 없이 ‘너 서한율이랑 사이 안 좋아?’라고 가볍게 물어도, 정민솔은 무슨 의도로 물어본 걸까 바짝 긴장하게 되지 않을까.

유호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경솔하게 입을 놀린 본인 잘못이지, 어쩌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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