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툭, 툭.
“…….”
한율은 손끝으로 액정을 천천히 두드리다가 고개를 돌렸다. 옆에는 안인섭이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었다.
10여 분 전. 한율은 안인섭의 대기실에서 그의 매니저와 스타일리스트가 나오는 걸 봤다. 그들은 작게 투덜거리며 한율의 옆을 지나쳤다.
“그럼 출발하기 전까지 계속 차에서 대기해요?”
“혼자 있고 싶다잖아. 한두 번이야?”
한율은 조유찬에게 안인섭과 조용히 대화를 나누고 싶다고 하고, 혼자 안인섭의 대기실을 찾았다. 안인섭은 문까지 잠그고 있다가 떨떠름한 기색으로 한율을 들였다.
“할 말이 뭔데?”
그리고 소파에 앉아 형식적인 말 몇 마디 나누다, 재웠다. 대기실엔 CCTV가 설치되어 있지 않아 거리낌 없이.
안인섭의 핸드폰은 그의 지문으로만 열리게끔 잠겨있었다. 가장 먼저 초코톡을 살펴보니 MOHE 멤버들이나 친구들, 매니저와 나눈 톡 외엔 별거 없었다.
문자메시지나 통화 목록도 마찬가지. 연락처에 등록된 백 단위의 번호를 보면 이상할 정도로 깨끗했다.
‘문제가 될 법한 내용이 담긴 건 모두 확인 후 삭제하는 건가?’
저장된 사진도 크게 특이한 건 없었다. 해외에서 찍은 듯한 셀카나 풍경, 가정집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찍은 고양이 사진, 동물원에서 찍은 호랑이와 뱀 사진이 고작. 동영상은 하나도 없었다.
설치된 앱도 평범했다.
혹시 여기 저장된 무수한 연락처가 가장 중요한 정보인 걸까. 그렇게 생각하며 무심코 클라우드 앱을 실행했더니, 앱 실행 로고 대신 숫자로 정리된 무수한 양의 폴더가 바로 떴다. 조금 전까지 보느라 로그인이 해제되지 않았던 모양.
한율은 아무 폴더로 들어가 파일 하나를 확인했다가 미간을 구겼다.
‘뭐야, 이게?’
몰래 찍은 듯한 영상이었다.
유흥업소 느낌이 물씬 나는 공간에서 술을 마시며 떠드는 남녀들. 음담패설은 기본이고, 어느 기업 회장의 차남이 배우 누구를 임신시켜 해외로 보냈다느니 하는 충격적인 이야기, 마약과 관련된 이야기가 오갔다.
그중엔 대한민국 국민이 다 아는 유명한 40대 배우도 끼어있었다. 술에 취한 채 웃으며 접대부로 추정되는 여성의 뺨을 툭툭 치다가 불쾌한 짓을 저지르는데, 그 모습이 몸에 밴 듯 참 자연스러웠다.
한율은 다른 파일을 열었다.
이 역시 몰래 촬영한 듯한 영상. 앞서 본 영상과 비슷한 공간에서, 이해원이 손에 담배를 끼운 한 젊은 여성과 키스를 나누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입술을 떼고, 담배 한 모금을 빤 여성이 훅 연기를 내뿜자 이해원이 콜록거리며 괴로워한다.
“하….”
다른 폴더엔 통화 파일이 잔뜩 있었다. 하나를 눌러 확인. 10대 후반 내지 20대 초반으로 추정되는 앳된 여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오빠…, 오빠가 그분한테 잘 말해주면 안 돼요? 나, 이번에 데뷔 못 하면 진짜 죽을지도 몰라요…. 회사에 빚도 엄청 쌓였고….]
안인섭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럼 어떡하냐. 그 형님이 너한테 질렸다는데. 정 힘들면 선물 받은 명품이라도 팔아. 그런 거에 대해선 쿨하니까, 알아도 뭐라 안 할 거야. 네 능력껏 데뷔하는 것도 안 말릴 거고.]
맥락상 스폰서에게 거절당한 연습생과의 통화로 추정되었다. 안인섭은 그 스폰서를 소개한 브로커 역할이고.
‘단순히 들었던 것보다 아주 심각하고, 지저분하네.’
무수히 많은 파일 중 일부만 봐도 이 정도.
‘그리고 이렇게 따로 저장해놨다는 건….’
한율은 재차 한숨 쉬었다.
클라우드에 저장된 파일을 모두 날려버릴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관뒀다. 삭제된 시간이 서버에 남겨질 테니. 다른 곳에다 따로 또 저장해놨을지도 모르고.
우웅. 그때 한율의 핸드폰이 울렸다.
조유찬의 톡.
-[슬슬 옷 갈아입자. 대화 마무리하고 와.]
한율은 살폈던 열린 앱 페이지를 슥슥 날리곤 핸드폰을 다시 안인섭의 뒷주머니에다 넣었다. 그 와중에도 안인섭은 깨지 않았다.
한율은 안인섭을 소파에다 잘 앉힌 후, 이마를 손끝으로 툭 만졌다. 그제야 안인섭이 눈썹을 움찔거리다 눈을 떴다.
“많이 피곤하셨나 봐요, 선배님.”
한율은 안인섭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태연히 말했다. 안인섭은 자신이 잠깐 잠들었었다는 걸 깨닫지 못한 채, 미간을 깊게 찡그리며 퉁명스럽게 받아쳤다.
“그럼 안 피곤하겠냐? 내내 실실 웃었는데.”
<감성 푸드트럭> 촬영은 밤 9시, 강덕심이 속한 극단 연습실 앞에서 종료되었다.
“수고하셨습니다!”
한율은 <감성 푸드트럭> 촬영 제작진을 비롯한 출연자들과 셰프, 세션맨에게도 인사를 하며 돌아다녔다. 그 자리에 있는 극단 관계자들과 배우들에게도.
“즐거운 명절 연휴 되세요, 선배님.”
“그래, 한율이 너도 즐거운 명절 보내고. 노래 잘 들었어.”
강덕심이 한율을 다정하게 포옹하곤 등을 토닥거렸다.
“영화 개봉하면 꼭 보러 갈게.”
한율도 살갑게 대답했다.
“티켓 보내드릴게요.”
“그래. 한율이 너도 나중에 시간 되면 꼭 연락하고. 나도 티켓 보내줄게.”
“감사합니다. 그럼 이만 들어가 볼게요.”
그렇게 인사만 한참. 촬영이 끝나고 20여 분이 지나고 나서야 한율은 조유찬의 차에 올라탔다.
“수고했어.”
“형도 수고하셨어요.”
“나야 구경밖에 안 했는데 뭘.”
“기다리는 것도 힘들잖아요.”
조유찬은 씩 웃곤 시동을 걸었다.
“그나저나 안인섭은 참 피곤해 보이더라. 끝에 갈수록 잠 쏟아지는 거 간신히 참는 눈치던데.”
“그러게요.”
“숙소로 갈 거지?”
“네.”
한율은 핸드폰을 꺼내 인터넷에 접속했다. 포털사이트 연예뉴스란에 오늘 MBS <뮤직센터> 새 MC가 된 세 사람의 기사가 떠 있었다. 신고식을 겸한 스페셜 커버 무대 클립 영상도.
[<뮤직센터> 새 MC 유․이․진의 청량 120% 신고식!]
-180 훌쩍 넘는 오빠들 사이의 쪼꼬미 은수 너무 귀여운 거 아니냐
-얼굴 노래 춤 완-벽.
-1:36 호 웃는 거 뭐야ㅜㅜ 음색도 쩔어
-딱 그거 같음. 엄청 다정하고 스윗한 큰 오빠, 엄청 잘생겼는데 동생한텐 조용히 공부 잘 가르쳐주는 둘째 오빠. 그리고 두 오빠 덕에 ‘세상이 더럽다고요...?’ 금시초문이란 순수한 얼굴로 고개 갸웃할 법한 귀여운 동생ㅇㅇ
-이해원 사랑해♡♡♡
-처음 이 셋이 MC한다고 들었을 때 잉? 했는데 막상 신고식 보니 케미 상큼하다ㅎㅎ
-환상종 삼남매가 있다고 해서 보러왔습니다.
-퍼플아워 무대만 봤을 땐 잘 몰랐는데 은수 노래 개잘하네
ㄴ3단 고음 ㄷㄷㄷ
ㄴ괜히 아림이 아니었음
한율은 클립 영상을 재생해 보다가, 이해원에게 톡을 보냈다.
[선배님, 혹시 내일 만날 수 있을까요?]
곧 답장이 왔다.
-[내가 따로 외출이 허락 안 돼서ㅜㅜ]
-[24일 추석 저녁이나 25일 아침이면 괜찮을 것 같은데...]
한율은 이해원과 24일 저녁에 보기로 약속을 잡았다.
* * *
22일과 23일. 주말 동안 어스래빗 멤버들은 종일 회사에서 살았다. 작업실, 연습실, 보컬 연습실로 흩어져서. 한율도 이틀 내내 보컬 디렉터와 노래를 연습하고, 먼저 나온 안무를 연습하기도 했다.
24일 추석 당일 낮엔 고향으로 내려간 부모를 대신해 잠깐 집에 들렀다. 고양이들의 밥을 챙겨주고 화장실도 치우고. 고양이들과 놀아주는 건 길우성과 강보배의 몫이었다. TV에선 때마침 <2018 추석특집 아이돌 스포츠대회>가 방송되었다.
“큭큭. 정태현 님 표정 봐.”
다섯 번 연속 엑스텐을 명중시키면 피자를 쏘겠다는 정태현의 선언. 한율은, 단체전 첫 번째 경기에서 바로 다섯 번 연속 엑스텐을 명중시키며 정태현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이러다 다음 아스대에선 아무것도 못 얻어먹는 거 아냐?”
“다른 팀의 사기를 위해서 다음부턴 아예 한율이를 양궁 선수가 아닌, MC로 빼버릴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럴 수도 있겠당.”
와옹.
“그나저나 저 때 피자 엄청 맛있었는데. 또 먹고 싶다….”
“이따가 저녁에 우리 피자 시켜 먹을까? 호 형이랑 건우 형 내일 오잖아.”
“그것참 좋은 생각이요, 형님. 써한 넌 도미솔이지?”
냐아오옹.
“나는 패스. 저녁에 약속 있어.”
“헐. 누구랑?”
한율은 TV에 시선을 고정한 채 대답했다. 무릎에 올라와 턱과 뺨에 머리를 들이대는 퓨마를 떼어놓으며.
“있어.”
TV엔 다음 경기 주자인 MOHE의 안인섭과 이해원이 나오고 있었다.
몇 시간 후 저녁. 한율은 새카만 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이해원과 만나기로 한 약속 장소로 향했다.
약속 장소는 고은훤이 없는 고은훤의 집.
“미안해, 여기까지 오게 해서.”
한율과 마찬가지로 수수한 차림에다 모자와 마스크를 쓴 이해원이 나와 반겼다.
“하지만 남의 눈치 안 보고 편히 얘기할 만한 장소가 여기밖에 안 떠오르더라고. 들어와.”
물어볼 게 있어
고은훤의 집은 매트리스와 옷이 잔뜩 걸린 행거, 작은 책장 하나만 있는데도 무척 좁은 원룸이었다. 그래도 가운데엔 두 명이 앉을만한 공간이 있었다. 바로 옆이 신발이 놓인 현관이긴 하지만.
“이렇게 둘만 따로 보는 건 처음인 것 같다.”
이해원이 싱크대에 기대어 서있던 작은 상을 가져와 폈다. 그가 카페 로고가 그려진 봉투에서 샌드위치를 꺼내는 동안, 한율도 오면서 산 커피를 상에 올려놓았다.
“은훤이 형은 언제 온대요?”
“부모님 댁에서 잤다가 내일 아침에 온대. 지난주에 촬영한 뮤닷 새 프로그램은 어땠어?”
부스럭. 둘은 위생 물티슈로 손을 닦은 후 샌드위치 포장지를 벗겼다. 울긋불긋 피부트러블이 생긴 이해원의 손에 잠시 시선이 갔다.
“그럭저럭이요. 푸드트럭에서 할 음식 기본 준비를 하는데, <여름소풍> 때가 생각나더라고요.”
“그거 촬영한 지 벌써 1년 지났더라. 시간 참 빨라.”
“그러게요. 선배님은 뮤센 어땠어요? 촬영 시간이 겹쳐서 다 끝난 후에야 인터넷으로 보긴 했는데.”
“호 형이랑 은수 씨 덕분에 별 탈 없었어.”
샌드위치를 먹으며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었다. 굳이 이렇게 만나자고 한 이유가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겠지만, 이해원은 보채지 않았다.
“호 형한테 들었는데, 요즘 운전면허시험 준비한다면서?”
“네. 지난주에 필기 합격하고, 다음 주부터 학원 다니려고요.”
“나도 요즘 면허 따려고 학원 다니는 중인데, T자 주차 감 잡는 게 좀 힘들더라…. 그런데 한율이 넌 왠지 운전 잘할 것 같아.”
“어릴 때 어린이 자동차 좀 몰아보긴 했어요.”
“와.”
샌드위치를 다 먹고, 커피를 마시며 대화가 소강상태에 접어들어서야 한율은 본론으로 들어갔다.
“<감성 푸드트럭>, 안인섭이랑 같이 찍은 거 아시죠?”
“…응.”
안인섭의 이름을 거론하자 이해원은 충분히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그럴 것이, 한율이 만나자고 한 날이 <감성 푸드트럭>을 촬영한 날이었으므로.
“혹시 그 형이 불쾌하게 했어?”
“거두절미하고 물을게요, 선배님.”
한율은 고개를 젓곤 커피를 내려놓았다. 그러곤 미약한 불안과 의아한 빛이 도는 그의 눈을 직시했다.
“지금이라도 시궁창에서 빠져나올 생각, 없어요?”
* * *
[어스래빗 한율, <아이돌 스포츠대회> 금메달 인증샷 공개]
[보이그룹 어스래빗 멤버이자 배우인 서한율이 <2018 추석특집 아이돌 스포츠대회> 남자 양궁 경기에서 2년 연속 금메달을 획득했다.
24일 <아스대> 방송이 끝난 뒤 서한율은 개인 SNS에 당시 찍었던 금메달 인증샷을 공개…(중략).
한편 서한율은 최근 10월 2일 뮤닷에서 첫 방송 예정인 <감성 푸드트럭> 녹화를 마쳤다.]
-10월 2일 화요일 <감성 푸드트럭> 본방 사수!
-핏 미쳤다♡♡♡
-기왕 입은 거, 꽃도령 컨셉으로 사극 좀 찍어주면 안 되겠니ㅜㅜ
ㄴ꽃도령 콘셉트 앨범이라도!
ㄴ그런 컨셉은 성인되고 나서 했으면 좋겠습니다. 날 더 이상 쓰레기로 만들지 말아줘
ㄴ율톢 KBC 사극 특별출연 제안받았대요ㅎㅎ
ㄴㅁㅊ 너무 좋아ㅜㅜ
ㄴ아빠친구찬스?
-울 할머니 서한율 나오는 거 보더니, 작년에 엄청 활 잘 쐈던 애 아니냐고 알아보시더라구요ㅎㅎ
-다섯 번 기회 전부 엑스텐ㅋㅋㅋㅋㅋ 정태현 올해도 지갑 털렸죠?
-이번엔 양궁 감독이랑 대면 안 함?
ㄴ영입 포기하셨대요ㅎㅎ
-그 사진도 올려주세요. 예선 때 번쩍거리는 황금 왕좌에 왕관 삐딱하게 쓰고 거만하게 다리 꼬아 앉아서 카메라로 시선 내리깔던 샷.
ㄴ어스래빗이 팬들한테 끊임없이 먹을 걸 줘서 녹화 끝나고 집에 가보니 2kg 쪘다는 기사도요.
ㄴ2ㅋㅋㅋ키롴ㅋㅋㅋㅋㅋㅋㅋ
25일. 포털사이트 연예뉴스란엔 <2018 아이돌 스포츠대회> 관련 기사로 도배되었다. 한율은 자신의 이름이 거론된 기사를 무미건조한 시선으로 훑곤 다른 기사를 살폈다.
[원제로, 아스대 첫 출연 대활약!]
[아스대 첫 출전 ‘원제로’ 임승준, 남자 70m 육상 금메달!]
기사엔 임승준에게 밀려 올해도 아쉽게 은메달에 그친 길우성이, 슬퍼하며 임승준을 업고 뛴 내용도 담겨 있었다.
그 아래, 공감과 답변이 제일 많이 찍힌 댓글.
-아스대 비하인드 영상까지 보니까 원제로에 떠비 소속 애들이 둘이나 있어서 어스래빗이랑 친한 것 같긴 한데.. ㅈㅁㅅ이랑은 좀 아리송하더라
ㄴ저번 달에 시끄러웠을 때 실드 한마디 안 한 이유가 있긴 한 듯
ㄴ아리송하긴 뭐가 아리송해요. 전부 과장된 허위사실이란 거 밝혀지는지가 언젠데.
ㄴ보이는 게 전부라고 믿는 멍충이들ㅋㅋ
ㄴㅅㅎㅇ 보컬3 초반에 인성 논란 나왔던 거 기억하는 사람?
ㄴ그때 떠비가 허위사실 유포 강경대응 카드 꺼내니까 바로 꼬리내렸는데요
ㄴ피해자가 인성질 당할 걸 미리 알고 녹음이나 녹화로 증거로 남기는 경우가 있나? 상대는 돈도 많고 아빠는 방송국 국장인데? 억울해도 입 다물어야지
ㄴ가진 게 많은 사람이 무조건 나쁠 거라 생각하네. ‘언더도그마’란 말 아냐?^^ 제발 거기에서 좀 벗어나라 모지리야
ㄴ팩트1. ㅅㅎㅇ은 인성 논란 나왔을 때 같은 학교 다녔던 애들이 그런 애 아니라고 실드 많이 쳐줌. 팩트2. ㅈㅁㅅ의 ‘유일’한 실드러 ㅇㅋ의 김ㅎㅅ, ㅈㅁㅅ이 말 거칠게 한 건 사실이라면서 폭로자를 더 깜. <이렇게 논점 흐리는 거 보면서 더 뭔가 있구나 싶던데?
댓글에선 때아닌 설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지난번처럼 큰 이슈로 번질 것 같진 않았다. 부정적인 댓글이 달린 해당 기사가 금세 메인에서 사라지고, 다른 언론사의 비슷한 기사로 교체되는 걸 보니.
한율은 시간을 확인했다. 보컬 트레이너인 왕연수가 오려면 아직 10분이 남아, KBC 사극 <장인(匠人)> 1화 대본을 펼쳤다.
배우 윤상진에게서 특별출연 제의를 받고 난 뒤, 한율은 오 팀장에게 이야기를 전달했다. 오 팀장은 하루도 지나지 않아 <장인> 제작진 측과 대화를 마치고 대본을 받아왔다.
한율이 연기할 부분은 짧았으나, 그래도 드라마 배경, 연기해야 하는 캐릭터의 배경과 성격에 대해 파악해두고 어떤 식으로 연기를 할지 미리 고민하는 게, 나중에 연기하기가 더 수월하다. 그리고 이 특별출연 후엔 당분간 배우 활동은 접을 생각이었다.
‘개인적인 여유시간이 너무 없어.’
<별☆일없는 집>과 <고양이 난로>를 촬영하는 동안, 한율은 배우와 아이돌 일을 병행하는 게 생각보다 만만치 않다는 걸 느꼈다. 무엇보다 혼자 여유롭게 휴식을 즐길 수 있는 시간이 적었다. 높은 산 정상에 올라 느긋하게 바람을 만끽해본 게 언젠지 기억도 가물가물했다.
들어온 대본 중 딱히 끌리는 작품도 없고.
우웅. 핸드폰이 진동했다.
발신인은 이해원.
-[한율아, 나 생각해봤는데]
시간을 두고 다음 톡.
-[당장 그러기엔 사실 좀 무서워]
-[그래서 좀 더 고민해보고 싶어..]
“…….”
한율은 어제 그와 나눈 이야기를 떠올렸다.
지금이라도 시궁창에서 빠져나오고 싶지 않냐는 물음에,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빠져나오고 싶지, 당연히….』
이해원은 머뭇거리다가 2년 전, 안인섭의 손을 잡게 된 속사정을 털어놓았다.
넉넉하지 않은 집안 형편과 폐암 3기 진단을 받은 어머니.
『그땐 선택지가 없다고 생각했어. 대표님에게 사실대로 말하면 당장 급한 도움은 받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때까지 쌓인 빚도 많은데 더는 신세 질 순 없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거든. 그리고….』
이해원은 눈물을 참기 위함인지, 잠시 말을 멈추며 눈을 찡그렸다.
『당장 데뷔할 수 있다는 말이랑 엄청난 계약금에 혹한 것도 사실이야. 도장만 찍으면 엄마 병원비랑… 병원과 아주 가까운 곳에 전세를 마련할 수 있는 돈이 바로 들어온다는 생각에, 넘어갔어. 한심하지?』
하지만 그 당시 이해원의 나이는 고작 스무 살.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잘못된 선택을 할 수 있는 어린 나이였다.
한율은 강요받은 부당한 일이나 계약 조항이 있다면 상세히 정리해, 회사에다 계약 해지 소송을 걸고 위자료까지 청구해서 빚을 탕감받는 게 어떠냐 진지하게 제안했다.
안인섭이 수많은 몰카 파일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말하지 않았다. 알게 되면 무척 불안해질 테니.
-[기껏 걱정해줬는데 미안해...]
한율은 천천히 한숨을 쉬며 답장을 보냈다.
예상은 했지만, 역시나.
현재 MOHE는 3년 차 아이돌로, 한창 입지를 다지는 시기였다. 매주 K-POP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눈도장을 찍을 수 있는 음악방송 MC까지 된 지금, 그런 싸움을 하기엔 주저함이 들 수밖에 없다. 회사의 뒤를 봐주는 스폰서들의 힘을 누구보다 더 잘 알 테니 무서운 것도 당연하고.
[괜찮아요. 이해합니다, 선배님.]
[저한테 미안해하실 필요 없어요. :)]
-[고마워..ㅎ]
사실 이렇게 이해원을 배려해줘야 할 의리나 의무는 없다. 목표는 안인섭을 혼내주는 것이므로, 그를 ‘솔직하게’ 만들면 간단한 일. 그런데도 굳이 이해원을 불러서 그의 의지와 의사를 확인한 건, 얄팍하고 위선적인 동정심이었다.
『너 그 새끼 손 봤냐?』
지난주 <감성 푸드트럭> 안인섭의 대기실, 안인섭이 떠들었다.
『얼마나 닦아대는지 물만 보이면 씻고, 가만히 있을 때도 물티슈로 닦아. 지 스스로 더럽다고 느끼고 무의식중에 계속 그러는 거지. 그러니까 너 괜히 걔 이용해서 우리 일 터뜨리려고 하지 마라. 내가 볼 땐 그놈, 스폰받는 사실 세상에 쫙 퍼지면 백퍼 자살한다. 엄마한테 쪽팔리고 미안해서.』
그렇게 되는 꼴은 보기 싫으므로.
‘어쨌든.’
한율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일단 파일부터 가져와야겠다.’
그날 밤 자정. 본가에서 잔다며 부모가 사는 아파트 앞에서 내린 한율은, 조유찬의 차가 멀어지는 걸 지켜본 뒤 택시를 불렀다.
아이돌 필수품인 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내린 곳은 클럽이 즐비한 거리. 안인섭에게 심어놓은 추적마법 신호가 이곳에서 잡혔다.
한율은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적당히 높은 한 건물로 들어갔다. 꼭대기 층의 잠겨있는 옥상 문을 가볍게 열고, 쌀쌀한 밤바람을 맞으며 난간으로 향했다.
‘술에 잔뜩 취해서 나오면 참 좋을 텐데.’
그렇게 얼마나 기다렸을까.
사아아. 난간에 기댄 채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듣던 한율의 눈이 은은한 푸른빛으로 물들었다. 몇 시간 동안 한 장소에 처박혀있던 안인섭이 움직였다.
“…….”
한율은 멀리서 안인섭을 주시하다가 움직였다.
클럽 후문에서 일행과 헤어진 안인섭은 택시를 타고 이동했다. 한율은 검은색 안개와 바람으로 몸을 두르고 그 뒤를 쫓았다. 한참 떨어진 건물 사이를 거침없이 가볍게 건너며.
지난주 안인섭에게서 뽑아낸 마나를 정제한 마력이라 아까울 게 없었다.
‘방향을 봐선 숙소로 가는 것 같은데.’
끼익. 그때 택시가 급히 멈추더니 뒷좌석 문이 벌컥 열렸다. 안인섭이 비틀비틀 나오다가 전봇대를 붙잡았다. 술을 상당히 많이 마신 모양.
“…하.”
바랐던 상황이기는 하나, 한율은 한숨을 푹 내쉬며 10m 아래로 가볍게 몸을 날렸다. 동시에 주변 가로등과 조명, CCTV에 검은색 나비가 날아들어 어둑해졌다.
“무슨 술을 이렇게 많이 마셨어.”
“……어?”
조용히 다가가 등을 토닥거려주자, 안인섭이 손등으로 입가를 닦으며 돌아보았다.
“아….”
잠시 미간을 찡그리며 한율을 바라보던 안인섭이 히죽 웃었다.
“너구나? 여친은 어쩌고 여기 있냐?”
현재 안인섭은 한율을 조금 전 헤어진 일행 중 한 명으로 인식하는 상태. 한율은 안인섭을 부축하고, 어둑한 골목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물어볼 게 좀 있어서.”
“물어볼 거? 그런데 너….”
안인섭이 한율을 빤히 쳐다보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마스크를 썼지만 거리가 워낙 가까워, 술과 담배, 위액 냄새가 섞인 고약한 내가 느껴졌다.
“왜 갑자기 키가 줄었냐? 크큭.”
“…따뜻한 곳에서 눈뜨고 싶으면 입 다물고 걸어.”
일단 하나
26일 새벽. 이해원은 당혹스러운 얼굴로 매니저와 함께 지구대를 찾았다. 그리고 의자에 담요를 덮고 잠이 든 안인섭을 발견했다.
“혹시 조금 전에 통화하신 분?”
“네, 접니다.”
추석 연휴라 밤새 주취자들에게 시달렸는지, 경찰은 피곤한 얼굴로 서류를 내밀었다.
“여기 인계 서류 작성해주시고….”
매니저가 다른 경찰에게 물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조금 전 이분하고 통화하면서 말씀드렸다시피, 순찰차 세워놓는 곳 화단 턱에 쭈그리고 앉아서 자고 있더라고요. 깨워도 안 일어나길래 핸드폰을 잠깐 봤는데, 가족으로 추정되는 번호가 안 보여서 제일 최근 통화한 번호로 연락드렸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누구 한 명 알아보기라도 했다면 연예뉴스란 메인에 오를 법한 일이었다. 아이돌이 술에 잔뜩 취해 지구대 앞에서 잠들다니. 매니저는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리곤 잠든 안인섭을 깨웠다.
“야, 인섭. …안인섭.”
“그런데 훤칠하게 잘생기셨네. 꼭 요즘 TV에 나오는 아이돌 같으세요.”
이해원이 작성한 서류를 받으며 경찰이 허허 웃었다. 이해원은 어설픈 웃음을 지어 보이곤 안인섭을 돌아보았다.
한 시간 전, 한창 자고 있을 때 안인섭의 번호로 전화가 걸려 왔다. 겨우 잠에서 깨서 받자, 술에 잔뜩 취해 웅얼거리는 말소리가 들렸다.
-[…야. 넌… 네가 복에 겨운 줄 모르지?]
그러곤 뚝. 30여 분이 지난 뒤 이번엔 안인섭의 핸드폰으로 경찰이 전화를 걸었다. 이해원은 바로 매니저에게 연락해 함께 왔다.
‘복에 겹다니. 대체 뭐가?’
빨리 지구대부터 나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인지, 매니저가 안인섭을 등에 업었다.
“해원아, 차 문 좀 열어주라.”
“네, 형. …수고하세요, 감사합니다.”
안인섭은 정오 무렵이 되어서야 겨우 일어났다. 그는 스스로 지구대 앞으로 찾아가 잠들었단 사실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하마터면 인터넷 실검에 오를 뻔했다고 노발대발하는 매니저에게, 그는 되레 핸드폰을 붙잡은 채 짜증 냈다.
“택시 탄 뒤로 기억이 전혀 안 나는 걸 어쩌라고! 그것보다….”
“아무튼 안인섭 너 당분간 외출 금지야! 알았어?!”
“아이씨, 내 말 좀 들어봐! 내 핸드폰, 왜 잠금 해제돼있어?”
“몰라 새끼야! 경찰한테나 물어봐! 경찰이 해원이한테 전화 걸어서 너 데리러 간 거니까!”
“……!”
안인섭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왜 그래? 너 설마 핸드폰에 이상한 거 저장해둔 거 아니지?”
다급히 핸드폰을 살피는 안인섭을 보며 매니저가 물었다. 소파에 앉아 TV를 보던 이해원도 의아한 눈으로 안인섭을 바라보았다.
“……?”
뚝. 그 순간 안인섭이 동작을 멈췄다.
“없어….”
“뭐가?”
멍하니 중얼거린 그가 거칠게 제 머리카락을 헝클였다. 초조해진 얼굴로 핸드폰을 만지는데,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왜 그러는데. 너 진짜 뭐 이상한 거 저장해놨던 거야? 이리 줘 봐.”
타악!
“그런 거 아니라고!”
매니저의 손을 강하게 쳐낸 안인섭은 버럭 소리를 지르고 제 방으로 들어갔다.
쾅! 철컥.
매니저가 지긋지긋하단 얼굴로 소리를 질렀다.
“씨발, 뭐 문제 생기기만 해봐!”
“…….”
이해원은 속으로 한숨을 쉬며 리모컨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