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3화 (123/427)

* * *

똑똑.

“한율아, 회사 안 가?”

문 너머에서 들리는 강보배의 목소리. 한율은 노트북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고 헤드셋도 벗었다.

“전 나중에 갈게요.”

“알았어.”

“…써한 안 간대?”

“응. 1차 실기 준비로 바쁜 거 아닐까?”

길우성과 강보배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이윽고 거실 쪽에서 다른 멤버들의 목소리가 들리더니, 희미하게 현관문을 여닫는 소리가 났다. …띠릭.

어느새 해가 중천이었다. 한율은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스트레칭으로 굳은 몸을 풀었다.

‘사람을 고문하며 난교까지 벌이던 것들에 비하면 귀여운 수준이지만, 계속 보다 보니 피곤하네.’

양이 워낙 많아 다 살피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았다. 어차피 외장하드에 다운받은 뒤 클라우드의 파일을 모조리 삭제한 터라 급할 건 없지만 말이다.

‘그나저나 이 녀석….’

안인섭이 모은 동영상 파일엔 규칙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안인섭 자신의 모습이 찍힌 파일이 없다는 것. 일부 파일에 그의 목소리가 담기긴 했으나, 그것도 아주 짧았다. 다른 하나는 안인섭의 스폰서로 추정되는 누군가가 찍힌 파일도 없다는 것.

‘누군지 몰라도 상관없긴 하지만.’

스폰서가 안인섭을 버리게 만들만한 총알은 여기 잔뜩 있으므로. 그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이 영상 파일들을 본다면 금세 영상을 촬영한 게 누군지 특정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해원이 찍히거나 함께 있었던 걸로 추정되는 영상은 확인 직후 외장하드에서도 삭제한 지 오래다.

‘일단 하나 보내볼까?’

한율은 미리 준비한 저렴한 USB 여러 개를 꺼냈다.

다음 날인 27일, 포털사이트 실검 1위.

[주인결 업소녀폭행]

2위와 3위엔 각각 [주인결 마약], [주인결 성추행]이 올라왔다.

“개충격…. 이분 평소에 인성 좋고 기부도 많이 하고 애처가라고 소문나지 않았어? 얼마 전에 아이가 태어나서 기쁨의 눈물 사진도 올라왔던 걸로 기억하는데….”

“이래서 믿을 사람 하나 없다더니….”

“나 예전에 이분 영화 다섯 번 넘게 봤을 정도로 완전 팬이었는데….”

40대 대표 남자배우 주인결의 유흥업소 여성 폭행과 성추행, 그리고 마약 흡입 의혹 이슈는 대한민국을 발칵 뒤집어놓았다. 그의 평소 이미지가 워낙 좋았던 까닭에 충격받은 사람이 많았다.

“…….”

어스래빗 멤버 중 연예계 소식에 가장 빠삭했던 차남석도 적잖이 충격받았는지, 그는 주인결의 기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멤버들은 아예 수저를 내려놓았다.

“이 동영상 제보, 다른 언론사에도 갔는데 앗싸만 유일하게 보도했다네?”

“허얼.”

“그런데 이거 누가 제보한 걸까? 동석자 중 한 명? 술집 직원? 기자?”

“확실한 건, 이런 데에 들락거릴 수 있는 사람 중 하나란 거지. 어쨌든 이분은 이제.”

이건우가 쯧쯧 혀를 차며 고개를 흔들었다.

“끝났네.”

“그런데 내일이요.”

멤버들이 시선이 한율을 향했다.

“라방 몇 시에 해요?”

내일은 길우성의 생일이었다. 유호가 MBS <뮤직센터>로 출근하는 날이기도 해서, 멤버들의 시선은 이번엔 유호를 향했다.

“밤에 하는 게 나을 것 같아. 한 열 시쯤?”

“내일이면 막내도 만 18세가 되는구나.”

“그래도 10대네. 부럽다.”

멤버들은 그제야 놓았던 수저를 들고 식사를 재개했다. 연예계에 큰 이슈가 터지기는 했으나, 그들은 그들의 일과를 보내야 하므로.

“전 먼저 일어날게요.”

멤버들이 인터넷을 살피는 동안 식사를 마쳤다. 한율은 자리에서 일어나 다 먹은 식판을 정리하며 생각했다.

안인섭은 뭘 하고 있을까.

기사를 봤다면, 거기에 실린 영상 캡처 이미지가 자신의 클라우드에서 삭제된 파일이란 걸 단번에 알아봤을 터다.

‘그러니 지금쯤이면….’

제 머리를 부여잡고 속으로 쌍욕을 뱉어내고 있지 않을까.

대체 어떤 새끼가 이런 짓을 벌인 거냐며.

이후엔 굉장히 초조해질 것이다.

이번에 터진 건 그저 돈 많고 인기 많은 배우였지만, 만약 기업 회장의 차남, 재벌 3세의 영상이 공개된다면? 그리고 하나둘 영상이 더 공개되어, 영상을 찍은 게 자신이란 사실이 들통난다면?

영상에 찍힌 인물들로 보아, 험한 꼴을 당하는 건 절대 피하지 못할 터다. 그땐 아무리 잘난 스폰서라도 커버할 수 없을 정도로 큰 파문을 일으킨 후일 테니.

한율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구내식당을 나왔다.

‘못된 짓 할 때마다 공개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겠네.’

* * *

10월 1일. 전날 조유찬과 함께 경북 문경으로 내려온 한율은, 새벽부터 유명한 사극 오픈세트장으로 향했다. KBC에서 내년 방영 예정인 사극 <장인(匠人)>의 촬영을 위해.

“안녕하십니까! 어스래빗의 서한율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어서 오세요!”

“안녕하십니까.”

“와줘서 고마워요.”

<장인> 촬영 제작진들은 한율을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감독은 잘 왔다며 한율을 가볍게 안아 등을 툭툭 두드려주기도 했다.

윤상진은 두 팔을 위로 활짝 펼치고 한율을 환영했다.

“오랜만이에요, 선배님.”

“반가워, 한율아. 왜 이렇게 얼굴 보기가 힘들까.”

한율과 가볍게 포옹한 윤상진은, 곧바로 다른 배우들에게 한율을 데려가 소개했다. 생판 모르는 사람도 있고, 매체로 얼굴만 아는 사람도 있었다. 다른 촬영장에서 마주쳤던 사람도.

“서한율이라고 합니다. 오늘 촬영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별일 드라마 재밌게 잘 봤습니다. 노래도 잘 듣고 있어요.”

“안녕하세요, 한율 씨. 저 기억하실지 모르겠는데….”

배우들과도 인사를 끝낸 후엔 의상 분장팀으로 가서 본격적으로 촬영 준비에 들어갔다.

<장인>은 15세기 조선, 어릴 때부터 건축물을 보면 그 설계가 환히 보인다는 천재 설정의 주인공이 이런저런 일을 겪으며 토목과 영선을 담당하는 관서인 선공감(繕工監)에 들어가 성공하는 이야기였다.

한율이 연기할 인물은 선공감 부정(副正)의 아들, ‘곽종무’.

호리호리한데다 곱상하고 똑똑해 보이지만 실상은 똑똑한 척하는, 머리보단 몸을 쓰는 걸 더 좋아하는 인물이었다.

1화에선 부모의 뜻에 따라 문과를 준비 중이지만, 사실은 무과시험을 보고 싶어서 몰래 무예도 연마 중. 그러다 막 선공감 장인이 되고 싶다며 상경한 주인공인 윤상진과 어쩌다 얽히게 된다.

“잘 어울리시네요. 이쪽으로 오세요. 촬영 전에 잠깐 자세 좀 봐 드릴게요.”

분장을 마치고 나오자 무술팀의 젊은 스태프가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촬영해야 하는 씬 중, 곽종무가 활을 잡는 장면이 있는 까닭. 처음 연락을 받았을 때, 윤상진을 한심하게 쳐다보며 패물만 던져주면 된다고 했던 설명과 다르게 말이다.

“양궁은 해보셨죠? 되게 유명하시던데.”

“네. 그리고 어제 잠깐 국궁장에 들렀어요.”

“오, 그래요?”

한율은 무술팀 스태프의 도움을 받아 소품용 활을 들어 동작이나 자세를 연습했다. 양궁과 국궁은 활은 물론이고 사법이나 과녁을 바라보는 자세가 달랐다.

이후엔 함께 씬을 촬영할 다른 배우와도 대사를 맞췄다. 사극은 처음이었으나 이틀 전, 연기 레슨 트레이너에게 속성으로 과외를 받아 곽종무의 대사를 연습하고 또 연습했다.

그러는 동안 하늘은 점점 밝아져 아침이 되었다.

“리허설부터 가겠습니다!”

처음 촬영할 장면은 윤상진과 스치는 씬.

사람이 잘 찾지 않아 수풀이 우거진 곳에서 몰래 활쏘기를 연습하는데, 어디선가 괴성이 들려온다.

“으아아…아아…!”

거지 같은 몰골을 한 윤상진이 불쑥, 수풀 사이로 튀어나온다. 깜짝 놀란 한율은 잡고 있던 활시위를 놓치고, 활은 과녁을 저만치 비껴간 나무 위에 퍽 박혔다.

“잡아!”

퍼석퍼석, 우르르. 그리고 윤상진의 뒤를 쫓는 한 무리의 사람들. 한율은 놀람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어리둥절, 의아하게 변하는 시선으로 그들의 장난 같은 추격전을 돌아보았다.

“……?”

다음 씬은 윤상진에게 처음 들었던 그 장면이었다.

한율은 윤상진을 한심하게 쳐다보며 툭. 그 앞에 패물 하나를 던졌다.

“이거나 갖고 내 눈앞에서 사라지거라. 하나, 조금 전 날 보았단 사실을 떠들어댔다간 그땐 내가 널 잡아, 과녁으로 써주겠다.”

“어…, 아니, 그, 뭔가 오해를 하신 것 같은데요, 도련님. 전 도련님을 뵌 적도 없고 구걸이나 그런 걸 하려고 그런 게….”

윤상진과 호흡을 맞추는 건 <하울링> 촬영 이후 2년 만이었으나, 신기하게도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한율은 제게 다가오는 윤상진에게서 한 걸음 사뿐히 물러났다. 그러곤 턱을 살며시 든 채 거만한 시선을 내리깔았다.

“세 치 혀가 길구나.”

“…….”

재수 없는 한율의 태도에 윤상진의 표정이 썩어들어갔지만, 한율은 고고하게 몸을 돌려 집 안으로 들어갔다.

“컷.”

라이브 방송의 위험성

모니터링 후 감독의 OK 사인이 내려왔다. 그리고 같은 장면을 다른 구도로 여러 번 촬영해 완성. 이걸로 윤상진과 함께 나오는 씬이 끝났다.

“고마워, 한율아. 다음엔 내가 도울 수 있는 일 있으면 꼭 도울게. 불러만 줘.”

“네. SNS에 올릴 사진 같이 찍어도 될까요?”

“응.”

찰칵.

“상진 씨, 이동할게요!”

“네!”

씬이 많은 드라마는 두 팀으로 나뉘어서 촬영을 진행하기도 한다. 조연출이 윤상진을 호출했다. 한율은 다른 배우들과 마저 찍어야 하는 씬이 남은 상태.

윤상진이 말하는 속도를 높였다.

“이번 주 일요일에 시간 돼? 나 그날 오픈데, 같이 밥 먹자.”

“점심? 저녁?”

“언제가 편해?”

“점심이요.”

“그럼 메뉴는 톡으로 정하자, 일요일에 봐!”

윤상진은 시간이 없다며 조연출에게 잡혀가는 와중에도 손을 흔들었다.

“오늘 와줘서 정말로 고마워!”

“네, 일요일에 뵐게요.”

마저 촬영을 마치고 문경을 나온 건 오후 4시가 조금 지났을 무렵이었다. 조유찬이 운전을 하며 운을 뗐다.

“상진 씨 연기 정말 늘었더라. 아니, 원래도 잘하긴 했는데 여유가 좀 생긴 것 같다고 해야 하나? <하울링> 땐 초반에 NG 많이 냈었잖아. 이사문 감독님이랑 면담도 자주 하고.”

“2년이나 지났잖아요. 그동안 경험을 쌓으려고 독립영화나 연극 무대에 닥치는 대로 출연했대요. 이제설 선배님 본받아서.”

“아, 이제설 씨 최근에 개봉한 영화 대박 났더라. 그분하곤 연락해?”

“가끔이요. 추석 때도 톡으로 안부 인사 주고받았어요.”

“그래. 꼭 만나진 않아도, 그렇게 연락하면서 관계를 유지하는 게 나중에 다 도움 될 거야.”

한율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SNS에 두 장의 사진을 올렸다. 윤상진과 함께 찍은 사진, <장인> 1화 대본을 들고 찍은 셀카.

[첫 사극 도전으로 <장인(匠人)> 특별출연! 내년에 방송된대요! :) #윤상진선배님 #장인드라마 #내일은뮤닷감성푸드트럭]

“주인결 사건 보면, 유명하다고, 잘나간다고 무턱대고 친해지는 것보단 그 사람에 대해 잘 알기 전까진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게 더 나은 것 같기도 하고.”

사흘 전, 배우 주인결이 유흥업소에서 종업원으로 추정되는 여성을 폭행하고 추행, 마약까지 언급했다는 기사가 나왔다. 그리고 그의 이름은 오늘도 실검에서 내려갈 줄 몰랐다.

주인결의 소속사가 해당 영상 속 여성과는 합의된 행위였으며, 마약 언급도 술자리의 농담이었다며 진화에 나섰으나 아무 소용없었다.

-언론사에 뿌려진 제보 영상 자체가 전부 여자 얼굴은 모자이크 처리된 채 왔다던데, 합의했던 거라고? ㅋㅋㅋㅋㅋ 상대가 누군지 바로 기억나는 거 보니 그때 술 취한 상태도 아니었단 소리네?

-솔까 그런 ‘플레이’를 했다고 치자. 그래도 더럽게 노는 인간이란 건 변하지 않음.

-룸에서 저렇게 놀고 집에 가선...

ㄴ가족은 언급하지 말죠.

ㄴ제일 큰 피해자는 주인결 아이ㅇㅇ..

-주인결 광고 전부 내려갔네요. 몇몇 회사는 손배 청구도 검토 중이라고 하고.

-마약 검사 안 받냐?

-[스릴러 영화에서 잔혹한 살인마 역을 연기한 후 주인결은 한동안 수면제 없이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며]<6년 전 기사ㅇㅇ 그리고 현재도 수면제 처방받으러 병원 다님다 함.

ㄴ정말 수면제만 처방받았을까 싶다ㅋ

ㄴ수면제랑 술 같이 먹어도 돼요?

ㄴ굉장히 위험함요ㅇㅇ 그래서 다른 거 처방받은 거 아닌지 의심되는 거

ㄴ주인결 평소 술 자주 마신다던데

-나 아는 사람이 앗싸 다니는데, 영상 실제로 보면 더 가관이라고 하네요. 눈이랑 귀가 썩을 지경이라고;

최근 주인결이 찍은 영화는 개봉이 미뤄졌으며, 평소 주인결과 친분이 있다고 알려진 연예인들도 덩달아 의심의 눈초리를 받고 있었다. 몇 명은 주인결의 SNS 계정을 언팔하고 함께 찍은 사진도 비공개 처리했다.

이번 이슈로 발생한 피해 금액도 상당한 수준. 그래도 딱히 불쌍하진 않았다. 결코 합의된 행위로 볼 수 없는, 짐승만도 못한 짓을 저지르는 또 다른 영상도 봤기 때문이었다.

‘그의 아이에겐 조금 미안하긴 하지만.’

한율은 자신의 SNS에 달리는 팬들의 평화로운 댓글을 살피다가 어스래빗 단톡방으로 들어갔다. 새로운 톡이 몇 개 올라와 있었다.

[박가람][차남서가ㅋ; (링크)]

[차남석][;]

[유호][아이고;]

뭔가 싶어 링크를 누르자 너튜브 영상이 떴다.

[[원제로/임승준]승주나 너 정말 ○○○ 부하야?]

원제로 라이브 방송 일부가 편집된 영상이었다. 원제로 단체 라방이었는데, 사과패드로 팬들의 톡을 보던 변지욱이 그중 하나를 읽은 게 발단이었다.

[승준아, 너 잘생긴 토끼 친구의 부하라는 말이 사실이야? …이게 무슨 말이에요?]

어리둥절한 얼굴로 묻는 변지욱의 머리 위로 노란색 물음표 두 개가 띄워졌다. 변지욱을 바라보는 다른 멤버들의 머리 위에도. 영상 게시자의 의도인지, 정민솔에게만 물음표가 박히지 않았다.

[잘생긴 토끼 친구?]

[토끼? 어스래빗 분들 말하는 건가?]

자막도 첨부되었다.

[난생처음 듣는다는 표정의 멤버들.]

[이 아이들은 모르는 게 확실합니다.]

임승준이 미간을 찡그린 채 눈을 끔뻑거리는 모습이 클로즈업되었다. 물음표도 더욱 커졌다.

[잘생긴 토끼면.]

현강희가 조심스레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남석 선배님 말하는 거 아닐까요…?]

임승준이 순간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1초도 안 되는 그 찰나의 표정 변화는 두 번이나 느릿하게 반복 재생되었다.

[내가 왜 걔 부하야?]

동시에 정민솔이 당황한 얼굴로 눈동자를 굴리는 모습이 클로즈업으로 포착. 영상은 그걸로 끝이었다.

단톡방에 길우성이 톡을 올렸다.

[길우성][라방의 위험성ㅋ]

* * *

10월 2일 밤. 뮤닷 <감성 푸드트럭> 첫 회가 방송되었다.

MC와 게스트들이 차례대로 등장, 이런저런 토크를 나누며 스튜디오에서 푸드트럭에서 할 음식의 기본준비를 하고, 짐을 옮기고, 트럭을 타고 목적지로 출발하는 건 간략하게 편집되어 나갔다.

첫 번째 푸드트럭 선물 수취인으로 지목된 배우 강덕심의 극단 연습실. <감성 푸드트럭> 팀은 연습실 근처의 허가받은 구역에다 푸드트럭을 세워놓고, 배우 강덕심을 응원하는 현수막과 포토 배너를 설치했다.

MC와 게스트 모두 모자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터라, 행인들은 무관심하거나 의아한 시선만 슥 던지고 지나갔다. 어느 정도 음식도 준비되었을 때, 유일하게 제작진으로부터 연락받은 극단 관계자가 자연스럽게 배우들을 데리고 나왔다.

[나한테? 누가…?]

연습하다 말고 밖으로 나온 강덕심. 그녀는 얼떨떨한 얼굴로 자신의 포토 현수막이 걸린 푸드트럭으로 다가왔다. 그러다 테이블을 세팅하는 한율을 발견.

[너 한율이 아니니?]

톡방에 접속한 채 방송을 보던 팬들은 웃음 의성어를 쳤다.

-ㅋㅋㅋㅋㅋ

-율톢 순간 동공지진ㅋㅋㅋ 마스크를 썼는데 어떻게..?

-객귀 찍은 게 작년인데 바로 알아보셔ㅎㅎㅎㅎㅎ

-율이 당황하는 거 너무 귀엽다

-평소 의연했던 우리 율톢맞나요♡♡♡

푸드트럭을 선물로 보낸 의뢰인의 VCR 영상을 강덕심과 함께 확인. 그 뒤엔 강덕심을 비롯한 배우와 극단 관계자가 게스트들의 노래를 들으며 저녁을 먹는 모습이 이어졌다.

노래는 한 곡도 편집되지 않아, 방송 분량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했다.

-배우 이름 일일이 자막 넣어주는 따뜻한 센스

-안인섭 노래 잘하네

-좋다

-그냥 아이돌 노래 들으면 정신없는데, 이렇게 하나씩 떨어져서 부르는 거 보면 가수가 맞긴 한 듯

-즉석에서 듀오로 부르는데 왤케 잘 맞춰ㅜㅜ 이 음색천재들 같으니라고

-인섭이 목 상태 많이 좋아졌당ㅎ

-라움♡♡♡♡♡

자극적이지 않은 방송이라 그런지 첫 방송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뮤닷 측에서 너튜브에 올린 미방영 영상 반응도. 실검엔 잠시 [감성 푸드트럭], [감성푸드트럭 라움], [서한율], [안인섭]이 올라오기도 했다.

WB래빗 엔터테인먼트 대표실.

“서한율, 한 곡을 통으로 부르는 건 처음 듣는데, 잘하네.”

좌기훈 대표는 서한율을 거론한 댓글을 소리내어 읽곤 흐뭇하게 웃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2층 사무실엔 직원 몇 명이 남아 야근 중이었다. 그러나 TV는 켜진 상태. 채널은 뮤닷이었다.

“안녕하십니까.”

“다들 수고가 많아요.”

좌 대표가 들어오자 직원들이 인사를 건넸다. 좌 대표는 화답을 보낸 후 오동식 팀장을 찾았다.

“오 팀장님, 내일 애들 맛있는 거 먹입시다. 애들 첫 투어에서 돌아온 지 조금 되었는데, 아직 마땅한 수고 인사를 못 한 것 같아서요.”

“네. 한도는 어디까지 가능합니까?”

좌 대표가 지갑에서 법인카드가 아닌 개인 신용카드를 꺼냈다.

“한우 먹이죠.”

“감사합니다. 애들이 좋아하겠네요.”

“매니지 B팀도 함께요. 단, 술은 안 됩니다.”

오 팀장은 씨익 웃으며 좌 대표의 카드를 받았다.

“당연한 말씀을.”

“그나저나.”

좌 대표는 빈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애들 뭐 필요한 건 없대요? 하고 싶은 콘텐츠나, 나가고 싶은 프로그램이 있다거나.”

“국내 콘서트요.”

“…곧 연말이라 공연장 잡기가 힘들다고 말해주세요. 좋은 곳은 내년 여름까지 다 예약이 찬 상태니 원….”

“아. 배우 강덕심 님이 연극 공연 초대장을 보내줬다고, 토요일 낮에 다 같이 관람하러 가도 되겠냐 하더라고요.”

“당연히 괜찮지만… 그쪽에 폐가 되지 않을까요?”

오 팀장이 고개를 저었다.

“주 타깃층도 다르고, 그쪽에선 오히려 어스래빗이 단체관람을 해서 화제가 되면 그게 더 환영이라던데요.”

“그렇다면야.”

좌 대표가 일어났다.

“어쨌든, 내일 잘 부탁드려요.”

“네. 들어가세요, 대표님.”

오 팀장도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했다.

좌 대표가 사무실을 나가자, 조용히 대화를 듣던 매니지 A팀 직원이 웃으며 말했다.

“우리 대표님, 정말 팔불출 같아요.”

다른 직원들도 동의의 뜻으로 작게 고개를 끄덕이거나 웃었다. 오 팀장도 가볍게 웃어 보이곤 좌 대표의 신용카드를 안주머니에 넣었다.

같은 시각, MOHE의 소속사인 VEL 엔터테인먼트.

소속 아티스트가 출연한 예능 반응이 썩 괜찮고 실검에도 올라갔지만, 대표실 분위기는 심상치 않았다.

타악! …촤악.

MOHE 매니저의 머리를 강타한 노란색 바인더가 바닥에 떨어졌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매니저는 꿈쩍도 하지 않고 어지럽게 흩어진 서류를 바라보았다.

“애들 간수 잘하라고 했지?”

“…죄송합니다.”

“죄송? 씨발, 애가 뒈질뻔했는데 죄송하단 소리가 나와?!”

퍽! 분을 못 이긴 대표가 이번엔 주먹으로 매니저의 얼굴을 갈겼다. 매니저는 휘청거리다 다시 곧게 섰다. 코에서 피가 흘러내렸지만 닦지 않았다. 대표의 심기를 더 건드릴 테니.

“하….”

대표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몸을 돌렸다. 그리고 손만 휙휙 흔들었다.

“나가. 그리고 홍보팀 불러와.”

“네, 알겠습니다.”

매니저는 허리를 90도 꺾어 그에게 인사하고 대표실을 나왔다. 문을 닫고 나서야 속에서 올라오는 화를 드러내며 씩씩거렸다.

‘씨발, 안인섭 이 새끼 때문에 진짜.’

그러고 발을 옮기려다 우뚝 멈추곤 대표실 문을 돌아보았다.

‘그거… 확 말해버려?’

지구대에서 자는 안인섭을 데려온 날. 안인섭은 자신의 핸드폰 잠금이 해제된 걸 보고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이후엔 자신의 방에 틀어박혀 두문불출. 멤버들 말에 따르면 어딘가 굉장히 불안해 보였다고 했다. 밥도 한 숟가락 뜨지도 않고, 담배만 뻑뻑 피워댔다고.

그런데 바로 다음 날 배우 주인결 이슈가 터졌다.

우연치곤 너무나 공교로운 타이밍이었다.

사실 매니저는 안인섭이 술자리에서 누구와 만나는지 몰랐다. 그저 위에서 어디로 데려가란 지시가 떨어지거나, 멤버가 태워다 달라고 했을 때 운전사 노릇만 했을 뿐이므로.

멤버가 인사불성이 됐을 때 연락을 받고 들어가는 일도 있었지만, 그럴 때도 동석자들은 어디로 갔는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나중에 멤버들끼리 나누는 이야기를 듣고 ‘아, 그 사람도 있었구나’ 짐작하는 정도.

그래서 확신이 서지 않는다. 주인결을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뜨린 영상이 안인섭의 핸드폰에서 유출된 것인지. 주인결과 함께 술을 마셨다는 이야기도 들어본 적이 없으므로.

대표에게 말하면 알 수도 있겠으나,

‘정말 안인섭의 핸드폰에서 유출된 거라면, 또 애 간수 못 했다고 나만 처맞겠지.’

이번엔 서류 바인더와 주먹이었으나, 다음엔 의자나 명패가 날아올지도 모른다.

“하…. 쓰읍.”

매니저는 깊은 한숨을 쉬다가 입술까지 내려온 코피를 닦았다.

어쨌든 지금은, 빈속에 술만 처먹다가 피를 토하며 쓰러진 안인섭이 회복하는 게 급선무.

‘돈만 아니었어도 이런 쓰레기 같은 곳은 바로 때려치우는 건데…. 아오, 썅.’

생각보다 멘탈이 약한가?

[MOHE 안인섭, 컴백 스트레스로 쓰러져 입원]

한율은 연예뉴스란에 뜬 기사를 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생각보다 멘탈이 약한가?’

“안 먹고 뭐 해, 한율아.”

익은 고기를 집게로 집어 멤버들의 접시에 나눠준 유호가 새 고기를 불판에 올려놓았다. 치이익.

“이럴 때 팍팍 먹어야지.”

한율은 핸드폰을 가방에 넣고 젓가락을 들었다.

“네.”

10월 3일. 어스래빗, 어스래빗을 담당하는 매니지먼트 B팀은 때아닌 점심 회식을 하고 있었다. 그것도 비싼 한우 전문점에서.

길우성이 상추와 깻잎에다 고기 다섯 점을 올리며 오 팀장에게 물었다.

“나중에 대표님, 카드 결제 문자 받고 기절하시는 거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많이 드세요.”

“사이다 시켜도 돼요?”

“스쿼트 백 개 할 거면 주문해도 됩니다.”

그 말을 들은 라이언이 직원 호출벨을 눌렀다.

“여기 사이다 한 병 주세요!”

“이언아….”

“형….”

오래간만에 든든하게 점심을 먹은 멤버들은 다시 회사 연습실로 돌아갔다. 14일 부산에서 열릴 아시아 뮤직 페스티벌에 오를 무대와 새 앨범 안무를 연습, 저녁을 먹은 이후엔 각자 하고 싶은 걸 했다.

한율은 PC가 있는 보컬 연습실을 찾았다. 조금 전 점심을 먹을 때 오 팀장에게 가끔은 개인 라방을 해달라는 말을 들은 까닭이었다.

“안녕, 이프림.”

라이브 방송을 켜자마자 바로 접속하는 사람들.

-라방 제목 [서한율]ㅋㅋㅋ

-갑자기 라방 시작이 떠서 놀랐는데 라방 제목에 이름 석 자만 달랑 적혀 있어서 더 당황ㅋㅋㅋㅋㅋ

-공휴일인데 출근한 거야?

-세상 정직하고 간결한 제목

-율톢이 43758일 만에 개인 라방을!

-어제 감푸 잘 봤어

-보컬 연습실?

-이게 누구야? 맑고고운투명한목소리를가진연기천재아이돌서한율, 줄여서 서한율 아니야?

톡을 보느라 살며시 시선을 내리까는 모습이 영상에 고스란히 나왔다.

“다들 뭐 하고 있었어요?”

-이제 일어났어ㅎ

-우리 율톢 생각?

-♡♡♡♡♡♡♡♡♡

-전철 멈춰서 갇혔어ㅠㅠㅠㅠㅠㅠ

-늘어짐 _(:3ㄱㄴ)_

-지금 막 객귀 다시보기 하고 있었는데!

-저녁 먹었어?

“전철이 멈췄다고요? 위험한 상황인 건 아니죠?”

한율은 정신없이 올라오는 톡을 보며 팬들과 소소하게 대화를 나눴다. 가끔 다른 멤버는 어디에 갔느냐, 다른 멤버는 뭐 하느냐는 질문, 뒤에 뭐가 있다느니 하는 톡도 올라왔지만, 그런 건 가볍게 패스했다.

“오늘은 레슨이 없는 날이라서 종일 멤버들하고 안무 연습하다가 조금 전에 저녁 먹고, 잠깐 쉴 겸 들어왔어요. 안 씻어서 좀 꼬질꼬질한 상태이긴 한데.”

-스스로 꼬질꼬질하다면서 웃는 율토끼 저장

-그래도 화장품 모델이시겠다?

-괜찮아 방금 씻은 나보다 반짝거려

우웅. 핸드폰이 진동으로 울렸다.

“잠깐만요.”

-폰케이스 토끼 세상 귀엽

-이프림에게 받은 선물을 적극 활용하는 서한율

-멤버한테서 톡?

-한율인 이게 너무 좋아ㅜㅜ 본인 취향 아니더라도 이프림이 준 선물 잘 써줘서ㅜㅜ

-전엔 방송에 선물 받은 토끼 안마봉 들고 나가더니ㅎㅎ

“팀장님이 톡을 보내셨는데…. 광고 화보 촬영 날짜가 정해졌다고 하시네요. 그런데 오늘 공휴일인데 업무 연락이…. 다들 노고가 많으십니다.”

그때였다.

벌컥!

“미안해요, 난~ 이제….”

예고 없이 보컬 연습실 문이 열리더니 흥얼거리는 노랫소리가 침투했다.

“……?”

의아한 얼굴로 돌아보자, 노래를 부르며 들어오던 크리스탈 래빗의 라나가 덜컥 굳었다.

“헉…?!”

-응?

-라나님????

한율은 라나에게 꾸벅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어…, 어어….”

라나가 당황한 얼굴로 뒷걸음질쳤다.

“라방 중?”

“네.”

“헉. 죄송해요, 이프림 분들~. 죄송해요~.”

-자연스러운 빽스텝 퇴장

-라방 중인 거 모르고 들어오신 듯?

-ㅎㅎㅎㅎ

한율은 자리에서 일어나 문의 팻말을 확인했다. 팻말이 ‘연습해라’라고 걸려 있었다.

“죄송해요. 제가 이걸 돌리는 걸 깜빡했어요.”

“아니야. 노크 안 하고 문 벌컥 열어서 미안해. 그럼 방송 잘해~.”

“네, 들어가세요.”

-떠비토끼 장녀와 막내의 대화

-같은 회사 소속 아이돌끼리 사이좋은 거 보면 뭔가 가슴이 훈훈해짐

-아까 라나 무슨 노래 부르고 있었던 거죵?

-노래 부르며 들어온 큰누나와 한창 라방 중이던 7살 아래 남동생

한율은 팻말을 ‘이용 중’으로 뒤집어놓고 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올라오는 톡을 보며 머쓱하게 웃었다.

“연습실 팻말을 ‘이용 중’으로 돌려놓는 걸 깜빡했어요.”

-오늘도 평화로운 떠비ㅎㅎㅎㅎ

한율은 라방을 10여 분 정도 더 진행하다가 다시 연습하러 간다며 종료했다.

숙소로 돌아온 건 자정께. 씻고 나서 침대에 누웠을 땐 새벽 1시였다. 핸드폰을 확인해보니 강보배가 단톡방에 너튜브 링크를 올려놓았다.

[[크래/라나]노래 부르며 자연스럽게 동생 라방 침입]

“……?”

오늘 한율이 했던 라이브 방송 중 일부가, 크리스탈 래빗 팬 계정에 편집되어 올라와 있었다.

‘다들 노고가 많으십니다.’라는 말부터 시작되어, 노래를 부르며 들어오는 라나에게 ‘???’이 띄워진 채 돌아보는 한율과 당황한 소리를 내며 뒷걸음질로 나가는 라나.

영상은 한율이 머쓱하게 웃는 모습에서 끝났다.

-실수가 아니라 일부러 들어간 거였어?!

ㄴ뇌피셜 제목임

-예의 바른 토끼 남매

-노래 부르며 벌컥! (1초정지) 죄송해요8ㅅ8 (빽스텝) 이렇게 사랑스럽고 귀여우면 어쩌란 거냐

-전엔 박가람이란 친구가 은영이 라방 하는데 들어왔다 나가지 않았었나? 뚜잇이힛효우!(0.5초정지)뜨허억죄송함다!

ㄴ그거 진짜 웃겼는뎈ㅋㅋㅋ 왜 덩실핑그르르 돌면서 들어오는데

ㄴ(링크) 이 와중에 은영이 덤덤하게 돌아보고, 차분하게 ‘어스래빗의 박가람 씨가 왔었습니다.’ 말하는 게 더 킬포ㅋㅋㅋ

-이제 드림래빗까지 데뷔하고 나면 더 정신 없어지겠네

-율톢 고개 갸웃하면서 돌아보는 거 너무 귀욥다

-떠비래빗홧팅♡♡♡

-곧 드림래빗도 데뷔하는데, 원제로 간 두 친구도 데려와서 WB래빗 패밀리 콘서트 함 가자↗↗↗

‘드림래빗’은 12일 데뷔하는 WB래빗의 새로운 7인조 걸그룹으로, 그 안엔 연습생 시절 함께 중국어나 연기 레슨을 받았던 아이들이나 동갑내기인 박세은도 포함되었다.

한율은 달력을 확인했다.

‘열흘도 안 남았네.’

그리고 하루 전인 11일은 블블의 수재와 민준이 입대하는 날. 두 사람과는 이번 주 토요일 저녁에 만나 밥을 먹기로 했다.

‘그러고 보니 입대 선물도 준비해야 할 텐데….’

불을 꺼놓은 방. 한율은 침대에 누운 채 한참 동안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 스르륵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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