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토요일 저녁. 한율은 차남석, 길우성과 함께 블블의 민준, 수재, 배우 김재신을 만나기로 한 약속 장소로 향했다.
약속 장소는 프라이빗룸이 갖춰진 레스토랑. 직원의 안내를 받아 들어간 룸에는 세 사람이 먼저 와 있었다.
“왜… 왜 머리가 아직도 화려한 거죠?! 빡빡을 기대했는데!”
길우성이 충격받은 얼굴로 말하자 수재가 씨익 웃었다.
“이리 와, 길우성.”
“머리는 들어가기 전날 깎을 거야….”
“여기 입대 선물입니다.”
“돈 모아서 종류별로 하나씩 샀어요.”
“뭘 이런 걸 다. 고마워.”
“땡큐, 땡큐.”
선물은 민준과 수재만이 아니라 김재신에게도 주었다. 그는 2주 후 입대 예정이었다.
“아시아 투어는 어땠어?”
“비행기 타고 이동, 리허설, 공연, 기절해서 잤다가 다시 비행기, 리허설…. 정신없더라고요.”
“그나저나 선배님들 입대하면 우린 누구랑 놀죠?”
“친구들 많이 사귀었던데 뭘.”
“친구랑 선배님은 다르잖아요.”
주문한 음식이 나오고, 직원이 몇 번 빈 그릇을 치우러 왔다가는 동안에도 이야기는 끊이질 않았다. 6명이 함께 나누던 주제가 슬슬 둘 셋으로 갈라지고, 한율은 김재신과 배우, 연기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다가 연극 이야기로 빠졌다.
“강덕심 선생님은 어떠셔? 그분 주로 연극만 하시니까, 난 만나 뵌 적이 없어서.”
“좋은 분이세요. 후배 배우들도 따뜻하게 잘 챙겨주시고. 그리고 선생님이 멤버들이랑 다 같이 와서 보라고 연극 초대장도 보내주셔서, 오늘 낮에 보고 왔어요.”
“오오. 공연은 어땠어?”
“재밌었어요. 배우분들 연기도 좋았고.”
“꽃다발도 들고 가고?”
“당연하죠.”
“그럼… 다른 연극배우들하고도 인사했겠네?”
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김재신은 ‘그렇구나’ 중얼거리더니 잠시 할 말이 있는 것처럼 머뭇거렸다.
“왜요? 마음에 걸리는 거라도?”
“아니, 음….”
수재가 끼어들었다.
“재신이, 예전에 연극배우분한테 혼난 적 있었거든.”
“혼이요?”
“그 얘긴 하지 맙시다, 형님? 그리고 혼이 아니라 폭언 수준이었거든?”
“연기 못한다고요?”
“…….”
김재신이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선배님이 연기 못한다는 말은 아니고, 그런 말을 들으셨나 해서요.”
“아아, 기억난다.”
차남석과 웬 핸드폰 영상을 함께 보던 민준도 끼어들었다.
“그때 김재신 술 처먹고 엄청 서럽게 울었었는데. 내가 못 하고 싶어서 못한 게 아니고, 흐으윽, 잠도 못 자고 열심히 연습해도 안 된 것도 서러운데, 흐으윽.”
“…믄즌. 흐즈므르.”
“대체 무슨 얘길 들었기에….”
“하….”
차남석과 길우성도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자, 김재신은 한숨을 푹 내쉬곤 탄산수를 집었다. 콸콸. 빈 컵에 물 대신 탄산수를 채우며 고저 없이 하는 말.
“어디서 딴따라로도 실패한 새끼가 면상만 믿고 와서 물을 흐려. 이따위로 할 거면 당장 이 바닥에서 꺼져.”
“진짜 그런 말을 했다고요? 면전에다?”
“…어. 상대가 술에 엄청나게 취한 상태로 시비조로 말한 거라, 상대했다간 싸움 날 것 같아서 참았는데.”
김재신이 제 가슴에 손을 얹으며 상처받은 표정을 지었다.
“여기에 대못이 쾅.”
“저런.”
“작품 같이 한 사람이었어요?”
김재신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기울였다.
“아아니?”
“그럼 아는 사람?”
“아아니?”
“설마 생전 처음 보는 사람한테서…?”
김재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예전에 드라마를 같이 한 선생님 중에 술자리 좋아하는 분이 계시거든? 하루는 그분한테서 연락이 온 거야. 네 또래의 좋은 배우들이 있다, 같이 술 한잔하자, 소개해주고 싶다. 그래서 갔지? 이 바닥은 그런 거 잘못 거절하면 안 되니까? 그런데 딱 도착하고.”
그가 잠깐 말을 끊으며 한율과 차남석, 길우성을 돌아보았다.
“테이블에 가니까 뭔가 느낌이 싸한 거야. 입은 웃으면서 반갑다고 인사하는데, 눈은 날 위아래로 이렇게 훑더라고. 그리고 처음엔 대형 기획사 연습생 출신은 다르네, 뭐네 하면서 술 마시다가 선생님이 잠깐 화장실 간다고 자리를 비운 사이에…!”
“그 말을 들으신 거군요.”
“어. 그때부터 연극배우분들은 좀… 꺼려지더라고. 아니, 성격이랑 인성이 훌륭하신 분들이 많은 것도 잘 알아. 내 친구나 동기 중에도 연극무대에 올라가는 애들도 있고, 나 예뻐해 주는 선생님도 대부분 연극배우 출신이니까. 그런데… 하…….”
김재신이 고개를 흔들며 탄산수를 마셨다.
“…크으.”
“뭔 탄산수를 술처럼 마시냐.”
“마시면 안 되니까 기분이라도 내보는 거지. 어쨌든, 스무살 되자마자 연극영화과 들어가고, 연기 레슨에 몇천 쏟아부으면서 그렇게 몇 년을 달렸는데 미성년자 때 아이돌 연습생이었다는 이유 하나로 까이니까 울컥하더라고. 연습생이었던 과거도 내 경험, 그것도 아주 소중한 경험으로 내 일부나 다름없는데. 그래서 난 혹시 너희들도 그런 사람을 만나 무시당하진 않았을까….”
“야.”
민준이 황당한 얼굴로 끼어들었다.
“한율이랑 너랑 같냐? 한율이 연기실력 엄청 쩔거든? 누나도 인정한 연기 천재를, 어디 감히 김재신 같은 놈이랑 동일선상에 두고 걱정을 해?”
“…네가 더 나빠, 새끼야. 나와, 싸우자.”
“싸우려거든 나가서 싸워. 후배들 앞에서 추태 부리지 말고.”
한율은 잠시 오늘 낮, 강덕심에게 들은 말을 떠올렸다.
『한율이 넌 연극, 관심 없어?』
<객귀, 해>에서 종조부 역을 맡았던 배우 양무석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었다. 여유가 되면 연극 활동도 한번 생각해보라고.
『이 카메라, 저 카메라 눈치 보느라 뚝뚝 끊기는 일 없이, 원 테이크로 연기의 흐름을 타고 놀 수 있는 곳이 바로 연극무대다. 한번 맛 들이면 굉장히 재밌어서 쉽게 놓을 수 없을걸?』
“아, 그런데….”
수재가 투닥거리는 민준과 김재신을 무시하며 조심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그 친구 좀 큰일 난 것 같더라?”
“누구요?”
“원제로의 정민솔인가 하는 애.”
“……?”
어스래빗 멤버 셋은 의아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정민솔과 어스래빗이 관련된 이슈는 최근, 정민솔의 안티들만 물고 늘어지는 정도이기 때문에.
“아. 못 들었어?”
“뭘요?”
수재가 닫힌 문을 한번 본 뒤 목소리를 낮췄다.
“그 친구, 락뮤닷 PD님한테 단단히 찍혔다던데?”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어쩌다가요?”
“나도 자세히는 모르는데, 락뮤닷 PD님이 워낙 무뚝뚝해서 상대가 인기가 많든 적든, 표정이나 태도 변화가 거의 없잖아? 그런데 그런 PD님이 마음에 안 든다는 티를 냈다고 한 거 보면, 뭔가 크게 실수한 것 같아.”
길우성이 혀를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에휴.”
“그런데 그 친구, 태도에 문제가 있었다는 거 사실이야?”
차남석이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사람에 따라 대하는 태도가 다르긴 했어요. 지금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PD님한테 찍혔다는 거 들으니 딱히 변한 게 없는 것 같네요.”
수재는 고개를 끄덕거리곤 화제를 돌렸다.
“다음 주에 너희 회사에서 신인 나온다며?”
그들은 저녁을 먹고 난 후 레스토랑 앞에서 헤어졌다. 세 사람의 입대가 코앞인 만큼, 약속이 많은 까닭이었다.
“그럼 몸 건강히 잘 다녀오세요.”
“나중에 면회 갈게요!”
“괜찮아, 남자는 사양이야.”
“나중에 휴가 나오면 연락할게.”
“어스래빗 대박 나라.”
“감사합니다.”
한율은 그들에게 웃으며 인사했다.
2018년 현재 육군 복무 기간은 21개월. 게이트 열리기 전에 제대할 예정이라 딱히 걱정되진 않는다.
“세 분 모두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 * *
[블블 수재·민준, 오늘 11일 동반입대]
[보이그룹 블랙블러드 멤버 수재와 민준이 오늘 11일 동반입대 했다. 이날 논산 훈련소 입소 현장엔 블블 멤버 전원이 그들을 배웅…(중략).]
-잘 다녀와♡♡♡쁠럽♡♡♡
-이희우는 배웅 안 나감?
ㄴ어제 민준이랑 데이트하고 헤어샵도 같이 갔다는 거 보면 일부러 안 간 듯요
ㄴ헤어샵에서 민준 머리 빡빡 깎인 거 보고 엄청 웃었다던데
ㄴㅋㅋㅋㅋㅋㅋㅋ
ㄴ하지만 그 머리를 서슴없이 만지는 모습이 남들의 부러움을 굉장히 많이 샀다는 사실...
ㄴ...비웃을 때가 아니었다스벌
-타팬인데, 고동만 ㅈ같이 안 굴었어도 계약 연장해서 더 높게 날 수 있었던 팀이라 좀 아깝다
ㄴ고동은 신인개발팀이 애들 잘 발굴해서 키워놓으면, 양아치 같은 영업이랑 케어로 다 말아먹음
-까방권 획득을 위한 퀘스트 여정의 시작(비장)
-현역 입대만으로도 어디냐 잘 갔다와라ㅋ 한참 어린 동기들 힘 나게 맛있는 것도 많이 사주고, 걸그룹이랑 통화도 하게 해주면 더 좋고ㅇㅇ
-2년 후에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만나♡♡♡♡♡
점심시간. 교실은 수시 실기나 수능에 관한 이야기로 떠들썩했다. 한율은 커피를 마시며 민준과 수재의 입대 기사를 훑곤 다른 볼 만한 기사를 클릭했다.
털썩. 누군가 한율의 앞 의자에 반대로 앉았다.
“하이.”
“……?”
연영과의 고재영이었다. 올해 초 급식소에서 눈치 없이 굴던 신입생들을 떼어 내준 이후, 마주칠 때마다 은근히 친한 척을 하던.
한율이 귀에 꽂고 있던 이어폰을 빼자 고재영이 곧바로 용건을 꺼냈다.
“너 일요일에 상진이 형 만났지?”
“어.”
고재영이 싱글싱글 웃었다.
“어떻게 알았냐고 안 물어봐?”
“…….”
멀뚱히 쳐다만 보자 그는 알아서 떠들었다.
“강진아가 엄청 찡찡거리더라고. 너 만나면 자기한테도 말해달라고 그렇게 상진이 형한테 부탁했는데, 무시하고 둘이서만 밥 먹었다고. 나랑 걔랑 같은 학원 다니거든. 상진이 형이랑은 전에 드라마 같이 찍기도 했었고.”
“그래.”
한율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핸드폰으로 시선을 내렸다. 그러나 고재영은 용건이 다 끝나지 않았는지, 한율의 책상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괬다.
빤히 쳐다보는 시선이 거슬려, 한율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왜?”
“너 <안시> 캐스팅 제안 거절했다는 거 사실이냐?”
“어.”
“왜?”
“대답해야 해?”
“넌 뭐 하나 순순히 대답해주는 법이 없냐, 진짜. 너무 치사한 거 아니냐?”
귀찮네.
한율은 대답하려 입을 열었다. 그때 길우성이 스윽 끼어들더니 속사포처럼 떠들었다.
“멋대로 와서 친한 척 말 걸고 꼬치꼬치 캐물으면서 대답 안 해준다고 치사하다니, 넌 너무 자기중심적인 거 아니냐? 세상이 다 네 위주로 돌아가? 너 아닌 다른 사람은 네 인생의 조연이고 설명 캐릭터야? 널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해? 세상이 그렇게 만만하게 보여? 우리는 우주의 먼지보다 작은 존재다. 우리랑 아주 가까운 안드로메다도 250만 광년이나 떨어져 있고, 우주엔 그런 은하가 수없이, 끄읕어어없이 아주 많다고. 그러니 우리 존재, 항상 겸손하게 굴자. 인생의 중심은 나지만 세상의 중심은 세상 그 자체다. 알겠나, 연영과 친구?”
“…….”
“어떠냐, 써한. 내 딕션이.”
“많이 나아졌네.”
“후후.”
“…하아.”
말없이 길우성을 쳐다보던 고재영이 대놓고 한숨을 쉬며 일어났다. 한율은 몸을 돌리는 그에게 물었다.
“그건 왜 물어본 건데?”
“…….”
고재영은 입을 달싹거렸다가 도로 다물었다. 그러곤 툭 내뱉듯이 말했다.
“그냥.”
고재영이 교실을 나갔다.
“삐쳤나 보다.”
“나중에 너 소문 이상하게 나도 난 모른다.”
“하지만 저 녀석.”
길우성은 유명한 추리 만화의 주인공처럼 턱에다 손을 대며 굉장히 수상쩍단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봐도 속셈이 있어서 기회만 되면 접근하는 것 같단 말이란 말이지.”
다음 날 12일. MBS <뮤직센터>로 출근한 유호를 제외한 어스래빗 멤버들은, 드림래빗 데뷔 쇼케이스를 보기 위해 회사 3층의 영상실에 모였다.
“기분 진짜 이상하다. 우리한테 동생 그룹이 생기다니.”
“크래 선배님들도 지금 어떤 기분일까? 동생 그룹 데뷔 쇼케 직관은 처음이잖아.”
“드림래빗 데뷔조 월평 때마다 함께 했다고 했으니, 우리보다 더 뿌듯하기도 하고 기특하기도 하고 그러지 않을까?”
영상실에는 어스래빗의 데뷔 앨범 재킷 촬영 당시 소품으로 사용한 거대한 토끼 인형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건우가 스크린에다 그린라이브 드림래빗 채널을 띄우는 동안, 라이언은 토끼 인형에 파묻히듯 앉아 셀카를 찍었다.
찰칵, 찰칵.
“히힛.”
“저 거대인형, 빨기는 하는 걸까?”
“전에 보니까 직원분들이 짐수레에 실어서 가더라. 석 달에 한 번 대형빨래 전문점에다 맡긴대.”
“그렇구나.”
한율은 하릴없이 핸드폰을 봤다.
3시간 전, 박세은과의 톡.
-[너무 떨려ㅜㅜ..]
-[ㄱㅣ]
-[기운 좀 나눠주세요, 선배님ㅠㅠ..]
[[기운]]
-[ㅜㅜㅋㅋㅋ..]
“그나저나 조금 걱정된다. 드림래빗도 이 바닥에 생각보다 이상한 사람도, 이상한 일도 많이 일어난다는 걸 직접 겪는다 생각하니까.”
“크래 선배님들이 많이 도와주겠지. 그리고 적어도 <뮤직센터>에선 호 형이 잘 봐줄 거야.”
“하지만 엔딩 무대 때 별의별 일이 다 생기잖아. 전에 본 것만 해도.”
강보배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지난번 앨범 활동 당시, 어스래빗 멤버들은 눈살이 찌푸려지는 광경을 목격했다.
데뷔 4년 차인 한 보이그룹 멤버가, 바로 옆에 서 있던 신인 걸그룹 멤버의 치마 끝을 살짝 잡아당긴 것. 걸그룹 멤버가 깜짝 놀라 돌아보자, 그는 시치미를 뚝 뗀 채 다른 멤버들과 잡담을 나누었다. 그러더니 무대에서 퇴장할 땐 빨리 가라고 재촉하는 척하며 그녀의 허리를 스치듯 만졌다. 사람들에 가려 카메라에 잡히지 않도록 교묘하게.
“상종 못 할 개새끼가 좀 있긴 하지.”
박가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드래 후배들에게 조심해야 할 남돌 블랙리스트를 건네야겠어. 그리고 누구든 우리 백흑토끼단을 건든다면, 절대 가만두지 않을 테다.”
“백흑토끼단…이라고 하니까 뭔가.”
강보배가 질색하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굉장히, 너무, 싫다….”
“소속, 백흑토끼단.”
차남석도 고개를 저었다.
“…하, 끔찍하네.”
“백흑토끼단이 어때서! 한글 차별 반대!”
산만하게 떠들던 어스래빗 멤버들은, 드림래빗 데뷔 쇼케이스가 시작되자 입을 다물고 영상에 집중했다.
크리스탈 래빗이 청초하면서 사랑스러운 이미지를 추구했다면, 드림래빗은 몽환적이면서도 강한 이미지를 내세웠다. 보컬이나 안무도 파워풀했다.
드림래빗이 다음 무대 준비를 위해 백스테이지로 퇴장하고 MC가 혼자 떠들 때, 이건우가 감탄했다.
“와…. 애들 진짜 빡세게 준비한 티 난다. 방금 노래, 호 형이랑 장 쌤, 그리고 보배 너도 같이 만든 거지?”
“응. 영어 랩 작사는 라이언이 세은이랑 의논해서 하고.”
“고생했다. 돈 길만 걸어라, 트레리안.”
“으흐.”
“…….”
“……?”
한율은 의아한 얼굴로 길우성을 바라보았다. 자리에 앉자마자 갈팡질팡하는 얼굴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더니, 지금은 손안에서 빙글빙글 돌리고 있었다.
“화장실 가고 싶으면 갔다 와.”
흠칫. 길우성이 작게 놀라더니 시선을 피하며 꿍얼거렸다.
“…그런 거 아니거든?”
길우성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으며 영상에 집중했다.
드림래빗 데뷔 쇼케이스가 끝난 뒤, 어스래빗 멤버들은 연습을 위해 다시 지하로 향했다. 그러다 막 휴게실을 나오던 연습생과 마주쳤다.
“아, 안녕하십니까…!”
연습생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복도에 쩌렁 그의 목소리가 울렸다.
“안녕하세요. 연습실 가세요?”
“네!”
연습생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삐걱거리며 대답했다.
“이제 2주 정도 됐죠? 불편한 건 없어요?”
“네, 없습니다!”
“그럼 홧팅하세요.”
연습생이 사용하는 연습실은 휴게실 바로 옆. 짧은 동행에 이어진 인사에, 그는 다시 깊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수고하십시오!”
어스래빗이 데뷔한 뒤 김형수와 정민솔이 회사를 이적, 박현우가 완전히 배우로 전향하면서, 남자 연습생은 윤은성, 임승준, 이예찬, 김권, 변지욱만 남은 상황이었다.
이중 임승준, 변지욱이 원제로로 데뷔하게 되자 회사에서는 오랫동안 닫아놓았던 오디션 페이지를 열었고, 지금까지 5명의 새로운 연습생을 받았다. 덕분에 지하는 한율이 갓 들어왔을 때처럼 사람들의 기척과 음악으로 활기가 돌았다.
신입 연습생이 연습실로 들어가자 박가람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파이팅이 넘치는 분이로군.”
“앞으로 연습생 두 명 정도 더 받는다고 했지?”
“대표님, 이번에도 직접 원석 캐내서 데려오지 않을까?”
“보배처럼?”
박가람이 강보배를 보며 웃었다.
“보배 처음 왔을 때 생각난다. ‘내가 여기에 있어도 되나?’란 어리바리한 얼굴로 기본기 업앤다운, 업앤다운.”
“그랬던 애가 어느새 자라 피도 눈물도 없는 복근의 카리스마 래퍼가 되다니….”
“오오, 벌써 복근 생겼어?”
어스래빗 멤버들의 말소리와 웃음소리가 복도에 울렸다. 핸드폰을 들여다보느라 마지막으로 걷던 한율은, 모퉁이를 돌 때 문득 고개를 돌렸다.
“……?”
“……!”
복도로 얼굴만 내밀고 그들을 훔쳐보던 신입 연습생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는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꾸벅이더니 도로 안으로 들어갔다.
한율은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멤버들에게 말했다.
“호 형 이제 퇴근한대요. 케이크도 가지고.”
오늘 생일을 맞은 라이언은 조용히 두 팔을 높이 뻗어 흔들었다.
한편 그 시각, MBS <뮤직센터> 남자 MC대기실.
“수고하셨습니다, 형.”
막 어스래빗 단톡방에 퇴근한다는 톡을 올린 유호는 고개를 들어 화답했다.
“수고했어, 해원아. …아.”
“……?”
“너희 팀 멤버, 아픈 건 좀 괜찮아? 퇴원했다는 기사는 봤는데.”
이해원은 소파에 앉아있는 매니저를 한번 보곤 대답했다.
“많이 나아지기는 했는데, 컨디션 회복하려면 시간이 조금 걸릴 것 같아요.”
“컴백은?”
“일단 예정대로요.”
유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솔로 가수가 아닌 이상, 아이돌그룹은 한 명이 아프다고 일정이 미뤄지거나 중단되지 않는다. 일정이 꼬이는 건 물론이고 여러 금전적인 손실이 발생하는 까닭.
“부산 아뮤페도?”
“네. 인섭이 형 없이 갈 것 같아요.”
“그렇구나…. 쾌유 바란다고 전해줘.”
“네.”
유호는 협찬으로 들어온 재킷만 고이 벗어 스타일리스트에게 넘기고 가방을 챙겼다.
“그럼 모레 부산에서 보자. 먼저 갈게.”
“네, 들어가세요.”
“먼저 가겠습니다.”
유호는 다른 스태프들에게도 꾸벅꾸벅 인사하곤 대기실을 나왔다.
“라이언 생일 케이크는 어디에서 주문했어?”
매니저 현장전이 유호의 사복 재킷을 건네며 물었다. 복도는 막 <뮤직센터>에서 퇴근하려는 사람들의 기척으로 어수선했다.
“상수역 근처에 있는 케이크 전문점이요. 차 많이 막히겠죠?”
“불금이잖아.”
“호 형, 지금 퇴근해요?”
그때 무대의상을 걸친 채 복도를 어슬렁거리던 V12 멤버 티모가 손을 들어 말을 걸었다.
티모와는 미국 LA K-POP 콘서트를 갔을 때 같은 비행기를 타기도 하고, 아스대를 촬영할 때 티모가 어스래빗 자리로 자주 놀러 와 어느 정도 친해졌다.
“응. 너흰 안 가고 뭐 해?”
“대기실에서 라방하고 퇴근하려고요. 지금은 스태프분들 정리하는 거 기다리는 중. 형, 안 바쁘면 잠깐 카페에서 수다 떨래요?”
“미안. 오늘 멤버 생일이라, 지금 케이크 사서 들어가기로 했거든. 중요한 용건이야?”
“중요하냐…라고 물어보면.”
티모는 미간을 살며시 찡그리며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형을 붙잡으면서 말할 정도까진 아닌 것 같고… 음, 부산에서 말씀드릴게요.”
“응. 그럼 그때 봐.”
“네, 들어가세요.”
알아서 하겠죠
<2018 부산 아시아 뮤직 페스티벌>. 13일과 14일, 이틀 연속으로 열리는 공연 중 어스래빗은 14일 일요일 무대에 오르기로 했다.
“작년에 처음 왔을 땐 우리가 두 번째 순서였는데.”
V12의 리허설이 한창 진행 중인 야외무대 앞. 음악이 잠시 꺼졌을 때 강보배가 감개무량한 얼굴로 말했다.
“올해는 네 번째에다가 두 곡이나 부르네.”
“열심히 활동한 보람이 있다.”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십니까.”
새로운 팀이 도착했는지 뒤에서 인사가 들렸다. 어스래빗 멤버들은 고개를 돌렸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섯 번째 순서인 MOHE가 도착했다. 안인섭은 보이지 않았다.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세요.”
이해원은 한율과 유호에게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이어서 원제로도 도착했다.
유호를 제외하곤 정민솔과는 인성 폭로 이슈 이후 처음 만나는 자리. 그러나 마침 음악이 다시 시작되어, 가수들은 목청을 높이는 대신 고개만 꾸벅였다. 정민솔은 어스래빗 멤버들과 전혀 모르는 사이인 것처럼 이쪽으로 고개만 한번 꾸벅이곤 시선을 피했다.
잠시 후, 리허설을 마친 어스래빗은 곧바로 대기실로 향했다.
“얘들아, 밥 먹어.”
멤버들은 문에 붙은 ‘MOHE/어스래빗’ 종이보단 매니저들이 테이블에 널려놓는 도시락에 관심을 보였다.
“오오, 고기다!”
“역시 아침엔 고기지.”
“내일부터 앨범 재킷 촬영에 대비해서 관리 들어가야 하니까, 오늘까지 실컷 먹어둬.”
MOHE는 어스래빗 멤버들이 한창 아침 겸 점심을 먹고 있을 때 들어왔다. 그들은 가볍게 눈과 고개로만 재차 인사했다.
“맛있게 드세요.”
페스티벌 공연 시작까지 이제 6시간 남짓. 헤어메이크업을 받고 단장하는 시간을 생각해도 최소 2, 3시간은 붕 떴다.
이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는 모습은 MOHE나 어스래빗이나 비슷했다. 핸드폰을 하거나 자거나, 책을 읽거나.
이해원은 대본으로 추정되는 얇은 책자를 진지하게 들여다보며 펜을 끼적거렸고, 길우성은 테이블에 사과패드를 세워놓고 다른 가수의 안무를 따라 췄다. 무선 이어폰을 귀에 꽂고 조용히.
대기실은 활짝 열어놓은 문을 통해 들어오는 복도 소음이 어수선하게 느껴질 정도로 조용했다.
한율도 귀에 이어폰을 꽂고 핸드폰으로 볼만한 영화를 찾았다. 그때 누군가 슬며시 다가와 옆에 앉았다.
“……?”
고개를 돌리자, 시선이 마주친 V12의 티모가 씨익 웃었다. 유호가 다가와 물었다. 온갖 종류의 음료가 세워진 테이블을 가리키며.
“왔어? 뭐 좀 마실래?”
“마셔도 돼요?”
“응.”
티모가 테이블로 가서 음료를 고르는 동안, 이번엔 다른 누군가가 한율의 옆에 앉았다.
“…하이.”
스타믹스의 JE였다. 한율은 귀에서 이어폰을 뺐다.
“어쩐 일이세요?”
“그냥. 뭐 해?”
“영화나 보려고요.”
“어? 안녕하세요, 형.”
홍차 음료를 들고 몸을 돌린 티모가 JE에게 인사했다. JE는 손만 가볍게 들었다. 유호가 물었다.
“선배님도 뭐 드실래요? 음료 많은데.”
“괜찮아, 커피 마시고 왔어. …아, 이 영화 재미없어. 반전이고 뭐고 다 시시해.”
“그래요?”
한율은 훑고 있던 영화 페이지에서 뒤로가기를 눌렀다.
“정 할 거 없으면 우리 대기실 가자. 지헌이 형이 혼자 구석에서 대본 중얼중얼 읽는데, 그 모습이 좀 그래.”
정말 지헌 때문일까. 말없이 JE를 쳐다보자, 그는 반대로 고개를 휙 돌리더니 옆에 앉는 티모에게 말을 걸었다. 둘은 같은 스케일 엔터테인먼트 소속이었다.
“넌 여기 왜 왔어?”
“심심해서 놀러요.”
한율은 속으로 작게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JE가 들어왔을 때부터 수상쩍으면서도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이쪽을 주시하던 박가람도 일어났다.
“나도 간만에 에이플 형님 얼굴이나 보러 갈까? 형, 잠깐 스타믹스 대기실에 놀러 가도 되죠?”
조유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만 가는 거면 OK.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하고.”
“네.”
JE는 박가람의 동행에 별말을 하지 않았다.
“아. 화장실 좀 잠깐 들를래?”
복도를 걷던 중. JE가 도중에 화장실을 가리키자 박가람이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서한율을 찾은 진정한 목적이 이거 였습니까, 선배님?”
JE는 음악방송 MC 특유의 반짝거리면서도 생글생글한 미소를 지었다.
“네가 먼저 들어가 볼래?”
“서한율아, 앞장서라.”
“…….”
“어? 안녕하십니까!”
그때 화장실에서 우르르 나오던 원제로 멤버 넷이 그들을 발견하곤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한율과 JE, 박가람도 그들에게 가볍게 꾸벅. 그러곤 서로 머쓱하게 웃으며 지나쳤다.
“쟤들.”
그들이 한참 멀어진 후에야 박가람이 한율에게 물었다.
“왜 네 눈치 보고 가냐?”
조금 전 지나칠 때 몇 명의 시선이 한율에게 잠시 머물다가 떠났다.
“글쎄요.”
이유는 스타믹스 대기실에서 들을 수 있었다.
“원제로 친구들이 최근에야 안 것 같더라.”
머리를 새파란 색으로 염색한 지헌이 대본을 돌돌 말며 말했다. 대본 표지엔 피가 흘러내리는 듯한 [입]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최근 공포 영화 주연으로 발탁되었다더니, 그 영화 대본인 모양.
“두 달 전 인터넷 실검에 오른 일.”
“아아.”
“사실 몇 달 동안 몰랐던 게 신기하지. 아무리 평소 핸드폰 사용이 금지됐었다고 해도.”
“아냐. 내가 볼 땐.”
에이플이 손을 저었다.
“리더인 유지는 알고 있었던 것 같아. 전에 음방에서 걔네 대기실 근처 지나다가 얼핏 봤는데, 정민솔 인성 논란에 동요하는 멤버를 잘 달래더라고. 마치 그런 상황이 올 거란 걸 예전부터 짐작하고 준비한 사람처럼.”
“그런데 정민솔은 지금 그것보다 더 큰일나지 않았어? 락뮤 PD님한테 찍혔다는 소문 돌던데.”
박가람이 금시초문이란 얼굴로 물었다.
“그런 소문이 있었어요?”
“응. 어쩌다 그렇게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찬형인 아는 것 같던데?”
“원카운트 찬형?”
“어. PD님 태도가 싸하게 변한 그 시점에, PD님이 찬형일 따로 불러서 오랫동안 면담했다고 하는 거 보니까.”
지헌이 한숨을 푹 내쉬더니 고개를 저었다.
“이 바닥에서 비밀만큼 제 구실을 못 하는 단어는 없을 거야.”
잠시 후 어스래빗 대기실로 돌아가는 길. 박가람이 조용히 말을 꺼냈다.
“원제로 말이야. 지금 분위기 괜찮을까?”
“글쎄요.”
정민솔 성격상 두 달 전 인성 논란 이슈가 터졌을 때부터 멤버들이 알게 되었을 때를 대비해, 온갖 말을 생각하고 정리를 거듭했을 터다. 그래서 해당 이슈는 언변으로 잘 어물쩍 넘어갈 수 있었겠으나, 음악방송 PD에게 찍힌 건 다른 문제다.
멤버들 입장에선 <락뮤닷>에서 조금이라도 부당한 일을 당하면 ‘정민솔 때문이 아닐까’란 의심부터 들 터. 그리고 누군가를 향한 부정적인 감정은 언제고 무의식중에 드러나는 법이다.
정민솔을 제외한 멤버는 9명. 여기에 초 단위로 그들을 주시하는 커다란 팬덤.
“걔넨 팬덤도 큰데다가, 민솔이 팬은 또 과격한 사람이 많아서 자칫하다간…. 어후.”
“알아서 하겠죠.”
박가람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승준이랑 지욱이가 걱정돼서 그렇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