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5화 (125/427)

* * *

원제로가 사용하는 단독 대기실에선 부산 아뮤페 비하인드 영상 촬영이 한창이었다. 멤버들은 신나는 얼굴로 서로를 보며 웃고 떠들었다.

“작년에 TV로만 보던 <부산 아시아 뮤직 페스티벌>에 와 있다니…. 아직도 믿기지 않습니다.”

“조금 전에 리허설을 하는데, 나 자신도 놀라운 거야. ‘내가 부산 아뮤페 무대에 선다고? 내가?’ 이러면서.”

“성공하셨군요.”

“성공했습니다. 우리 팬분들의 사랑과 응원 덕분에….”

그러나 카메라가 꺼진 뒤, 그들의 얼굴 가득 번졌던 웃음은 어색하게 변했다. …슥. 현강희가 제 어깨에 얹어진 정민솔의 손을 무표정한 얼굴로 치운 까닭이었다.

“실장님, 잠깐 화장실 좀 다녀와도 될까요?”

“어, 그래. 지욱이랑 유지도 같이 다녀와. 딴 길로 새지 말고.”

“네.”

현강희와 유지, 변지욱이 대기실을 나갔다. 다른 멤버가 정민솔의 눈치를 보더니 작게 한숨 쉬었다.

“오해면 오해라고 속 시원히 푸는 게 낫지 않겠냐?”

“…….”

정민솔이 말없이 쳐다보자 그가 말을 이었다.

“차라리 당사자들한테 그런 일 없었다, 확실히 듣게 하라고. 이게 뭐냐? 분위기만 이상해지고.”

정민솔은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입술을 잘근 씹었다.

“말했잖아, 형. 걔들 나 싫어한다고.”

“싫어해도, 거짓말은 안 할 거 아냐. 걔네도 생각이 있으면.”

“생각이 있으니까.”

임승준이 끼어들었다.

“그때 아무 피드백도 안 한 거란 생각은 안 해요?”

“승준아.”

실장이 임승준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곤 아직 철수하지 않은 VJ팀을 보았다. 원제로 분위기가 왜 이러나, 미적거리며 카메라를 매만지던 VJ들이 그제야 웃으며 대기실을 나갔다.

“내 말투에 화났다면 미안해요, 형. 순간 짜증이 나서요. 형이 아니라, 이놈한테.”

“…….”

정민솔은 시선을 내리깐 채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임승준은 가소롭다는 얼굴로 정민솔을 쳐다보았다.

“너 그런 식으로 억울한 피해자인 척 굴지 마. 여기 있는 사람들, 네 팬 아니고 같은 팀 멤버거든?”

“임승준.”

실장의 목소리가 커졌다. 정민솔에게 뭐라 더 말하려던 임승준은 입을 살며시 다물었다가 실장을 돌아보았다.

“실장님도 들으셨잖아요. 얘 <락뮤닷> PD님한테 찍혔다는 소문. 그래서 <락뮤닷> 스페셜 스테이지 촬영할 때도… 하.”

“그건 강PD님이 잠깐 오해해서 그랬던 거야. 그러니까 그만해. 조금 전 네 말마따나 너희 지금 같은 팀 멤버잖아. 어? 잠이라도 자. 너희 요즘 너무 바빠서 신경 예민해졌다. 자.”

실장은 멤버들을 가볍게 토닥거리며 떨어뜨렸다. 정민솔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죄송합니다’ 중얼거리곤 구석진 자리로 향했다.

“승준이 너도 잠깐 눈 좀 붙이고.”

임승준은 실장의 손에 끌려 정민솔과 가장 멀리 떨어진 소파에 앉았다.

털컹. 변지욱은 자판기에서 꺼낸 음료를 현강희에게 내밀었다.

“어떡할래? 지금 한율이 형 찾아가서 직접 물어볼래? 오늘 아니면 다음에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르는데.”

“모르겠어. 진짜면 어떡해? …어떡해요, 형?”

현강희는 불안한 얼굴로 차가운 음료를 만지작거렸다.

“난 민솔이 형이, 비단 한율 선배님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한테 그런 식으로 상처 주는 말을 잔뜩 해놓고, 정작 그 사람들에 대해 잘 아는 척 말했다는 게… 너무 싫어.”

“그러니까 정말 그렇게 말했는지….”

“아니었다면 논란이 터졌을 때 아니라고 직접 말하셨겠지. 그런데 안 그러셨잖아. 그게 무슨 뜻이겠어.”

“강희야. 민솔이한테 실망한 건 잘 알겠는데, 너 지금 그냥 학생 아니야. 데뷔한 아이돌이야. 무슨 일이 있어도 방송에서 웃을 수 있는, 웃어야 하는 프로라고.”

주변에 듣는 사람이 없는지, 유지는 주변을 둘러보곤 말을 이었다.

“그리고 계속 널 프로를 있게 만들어주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팬이야. 널 특히 아껴주는 팬도 있지만, 우리 원제로 자체를 좋아해 주는 분도 아주 많아. 그분들 생각해서라도 이러면 안 돼. 우리가 어떻게 데뷔했는데.”

“그래, 현강. 사람이 다 좋을 순 없는 거잖아. 그냥, 민솔이 형이 덜 성숙하구나~ 그렇게 생각해. 너까지 이러면 민솔이 형 울어, 인마. 가뜩이나 락뮤…. 엄마, 깜짝야!”

말을 하며 무심코 주변을 살피던 변지욱이 놀란 고양이처럼 펄쩍 뛰었다. 덩달아 유지와 현강희도 움찔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언제 왔는지, 창백한 안색의 안인섭이 서 있었다.

“여기 자판기에 녹차도 있어요?”

“아, 안녕하세요…. 네, 녹차 있어요.”

“그럼 잠깐 비켜줄래요?”

“네.”

세 사람은 자판기 앞에서 비켜주었다. 변지욱은 안인섭에게 고개를 숙였다.

“소리 질러서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안인섭이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자판기에 지폐를 넣었다.

조금 전 내가 한 말 들었을까? 변지욱은 불안한 시선으로 유지와 현강희를 쳐다보았다.

유지는 안인섭, 그리고 멀찍이 서 있는 MOHE 매니저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그럼 저흰 이만….”

“앞으로 골치 좀 썩겠어요.”

“네?”

“논란이 한 번도 아니고, 두 번.”

삑. 털컹.

“사람은 한번 저급해지면.”

안인섭이 몸을 굽혀 자판기에서 녹차를 꺼냈다.

“다시는 정상인의 범주로 못 올라오거든. 올라온 척 연기야 할 순 있지만….”

그가 세 사람을 향해 미소 지었다.

“그게 언제까지 갈까?”

우리 애들은 안 그러거든요?

MOHE와 어스래빗이 함께 사용하는 대기실. 안인섭이 들어오며 어스래빗 멤버들과 관계자들에게 꾸벅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형? 몸은 괜찮아?”

안인섭이 온다는 걸 몰랐던 건지, 안쪽에 자리하고 있던 MOHE 멤버들이 놀란 얼굴로 일어났다.

“괜찮으니까 왔지. 리허설은 잘했어?”

“메인보컬이 없으니까 힘들더라, 야.”

MOHE 리더가 안인섭의 등을 두드리며 반겼다.

한율은 이어폰에서 나오는 영화 사운드를 들으며 그 모습을 보았다. 안인섭은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부쩍 살이 빠지고 창백해진 인상이었다. 그러나 그가 다시 무대에 올라가든 말든 크게 관심 없기에, 다시 고개를 돌려 영화에 집중했다.

오후 6시. <2018 부산 아시아 뮤직 페스티벌> 2일째 공연이 시작되었다. 어스래빗이 공연장에 서는 건 지난달 14일 홍콩 팬콘 이후 한 달만. 그러나 아시아 투어가 큰 경험이 되기는 했는지, 어스래빗은 큰 실수 없이 두 곡을 무사히 소화하고 무대에서 내려왔다.

MOHE는 리허설할 때 빠졌던 안인섭도 무대에 올라갔다. 안인섭은 의자에 앉아 노래를 불렀다.

“참 쇼하는 게 능해.”

“뭐가요?”

대기실로 돌아가는 길. 차남석이 조용히 대답했다.

“아무리 창백한 안색도 메이크업으로 생기발랄하게 다 커버할 수 있는데, 일부러 살렸잖아.”

이건우가 어깨를 으쓱였다.

“멤버들한테도 아무 말 없이 등장했을 때부터 계산했다는 것에 한 표. 팬들이 좋아할 만한 이야기잖아. 무대에 오르고 싶어서, 팬들이 보고 싶어서 아픈 몸을 이끌고 부산까지 왔습니다.”

“그래도 팬들에게 좋은 이야깃거리를 주는 건 좀 배울 필요도 있어, 얘들아.”

조유찬이 쓴웃음을 지었다.

“요즘은 또 ‘실은 그때 좀 계산했어’라고 솔직하게 말하면, 그건 또 그거대로 팬들이 좋게 받아들여 주잖아. 약았다고 욕하지 않고.”

“하긴. 이프림만 봐도, 정말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우리한테 관대할 때가 많긴 하죠. 귀여운 척하는 박가람 씨보고 귀엽다고 해주는 거 보면 뭐.”

“싸우자, 차남석!”

“공공장소에선 조용.”

대기실로 돌아온 후엔 소파나 의자에 앉아 현재 생방송으로 송출되는 아뮤페 공연을 보았다. MOHE 다음 순서인 원제로의 무대가 시작되고 있었다.

“임승주니, 무대에선 쫌 멋있다?”

“무대 매너도 많이 좋아졌어. 카메라 보고 웃을 줄도 알고.”

“…아이코. 민솔 고음 흔들렸다.”

“어쩔 수 없지. 저 격한 안무에다 라이브까지 안정적으로 하는 건, 연습이랑 경험치, 자기만의 노하우가 어느 정도 쌓여야 수월한 거니까.”

“한율아.”

딱히 할 일이 없어서 TV를 보는데, 유호가 옆에 앉았다.

“내일 학교 끝나고 회사로 오면 형 작업실에 들러. 잠깐 얘기 좀 하자.”

지금 이곳에서 꺼내기엔 곤란한 용건일까.

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다음 날. 한율은 유호의 말대로 회사로 오자마자 유호의 작업실을 찾았다. 유호는 미니 냉장고에서 여러 가지 과일이 먹기 좋게 썰려서 담긴 밀폐용기를 꺼냈다. 포크도.

“먹어. 내가 아침에 숙소에서 준비한 거야.”

“감사합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에요?”

“음…. 어제 티모한테서 조금 이상한 이야기를 들어서.”

한율은 딸기부터 포크로 콕 찍었다.

“무슨 이야기요?”

“네가 바람둥이란 찌라시가 돈대.”

“…네?”

한율은 딸기를 먹으려다 황당한 소리를 냈다.

“그것도 양다리도 아니고 오다리.”

한율은 미간을 구겼다가 어이없는 웃음을 지었다.

“상대가 누구래요?”

유호가 손가락을 꼽으며 대답했다. 전달해주는 본인도 전혀 안 믿는 눈치였다.

“우리 회사 연습생, 은수 씨, 감소의 미미 선배님, 아이허니의 서래 씨, 마지막으론 크래의 라나 선배님.”

“참 잘도 갖다 붙였네요.”

“그럴싸한 스토리까지 만들어졌나 보더라. 어린애들이 보면 쉽게 믿을 정도로.”

한율은 한숨을 푹 쉬었다.

“사무실에 오 팀장님 계시죠?”

* * *

돌아온 주말. 매일 학교와 회사, 숙소만 오가던 한율은 오래간만에 다른 곳으로 향했다. 오늘은 더순한화장품 겨울 버전 CF를 새로 촬영하는 날이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촬영장에 도착하자 먼저 와 있었던 진은수가 인사를 건넸다. 음악방송이나 아스대에서 마주쳤을 때보다 씩씩하게.

“안녕하세요, 은수 씨. 한참 늦었지만 <뮤직센터> MC 되신 거 축하드려요. 방송 잘 보고 있어요.”

“감사합니다!”

한율은 촬영장에 온 클라이언트 측 사람들, CF 제작 촬영업체 스태프, 보조출연 배우들에게도 일일이 인사했다. 그 후엔 감독에게 콘티에 대한 세세한 설명을 들은 후, 진은수와 가볍게 포즈나 동작을 맞춰본 뒤 단장에 들어갔다.

겨울에 방영될 CF라, 맞춤 제작된 교복에다가 코트 혹은 패딩에 목도리를 둘렀다.

“리허설부터 갈게요!”

겨울. 늦은 시간까지 난방기구가 켜진 학원과 독서실에서 공부만 하다 보니 피부가 거칠어진 학생들. 그러나 각기 다른 장소에서 나와 만나는 한율과 진은수의 피부는 깨끗하게 윤이 났다. 서로 머뭇거리다 잡는 두 사람의 손도.

리허설을 지켜보던 조유찬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만화에서나 나올 법한 풋풋한 고등학생 커플을 보는 것 같네요. 안 그래요?”

진은수의 매니저, 장미소는 가느다란 시선으로 조유찬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정말 풋풋하기는 해요?”

“네?”

“쟤. 한밤중에 클럽 거리에서 봤다는 사람이 있어요.”

조유찬은 눈을 끔뻑거리다 웃음을 터뜨렸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세요. 한율이, 매일 회사랑 숙소밖에 모르는 성실한 아이라 오히려 걱정될 정도거든요? 그리고 한밤중에 그런 곳에 얼굴 드러내놓고 다닐 정도로 멍청하지도 않고요.”

“그럼 여자친구가 많다는 찌라시도 거짓말이겠네요?”

“당연히 거짓말이죠. 지금 회사에서 허위사실 유포로 고소 준비 중입니다. 그리고 누군가를 폄훼함으로써 반사이익만 거둘 수 있다면, 상대가 미성년자든 뭐든 악랄한 찌라시를 뿌리는 사람들도 있잖아요. 이 바닥 한두 해 계신 것도 아닐 텐데 왜 이러실까.”

“아니면 다행이고요. 요즘 워낙 흉흉한 소문도 돌고 그래서.”

“흉흉한 소문이요?”

리허설이 끝나고 본 촬영이 시작되었다. 장미소는 카메라가 돌아가는 동안 입을 다물고 있다가, 모델들이 모니터링을 하는 동안 조용히 대답했다.

“연습생이나 신인 걸그룹 멤버를, 스폰서와 연결하는 남자 아이돌 브로커가 있대요.”

조유찬은 놀란 표정을 지으며 주변을 살폈다.

“정말요?”

“저도 건너 건너 들은 거라 정확한 건 모르지만, 데뷔한 지 그렇게 오래되지 않은, 활발하게 활동 중인 아이돌이라고 하더라고요. 배우 주인결 지인이, 현역 아이돌한테서 미성년 연습생을 소개받았다 자랑하는 걸 들었다고도 하고.”

“끔찍하네요. 역겹기도 하고. …설마 그 브로커를 한율이라고 의심하는 건 아니죠?”

“의심하고 있으면 제가 지금 이 자리에서 얌전히 지켜보고 있겠어요?”

장미소가 어이없는 표정을 짓자, 눈을 부라리려던 조유찬은 머쓱하게 목 뒤를 긁적였다.

“하긴.”

“아무튼, 내 새끼니까 내가 제일 잘 안다고 자만하지 마세요.”

한숨을 푹 내쉬며 장미소가 팔짱을 꼈다.

“요즘 애들이 얼마나 영악한데. 방송국의 은밀한 장소 찾아내서 그 짓거리 하고 시치미 뚝 떼고 나오는 애들이 어디 한둘이에요? 청소용역업체 직원이 비어있던 대기실 휴지통에서 피임 도구 발견했다는 말, 들은 적 없으세요?”

“흥. 우리 애들은 안 그러거든요?”

“네, 네.”

“진짜 안 그러거든요?”

“네에, 네에.”

“…….”

조유찬은 건성으로 대답하는 장미소를 못마땅하게 바라보다가 고개를 홱 돌렸다.

“수고하셨습니다. 그럼 화요일에 봐요.”

CF 촬영이 끝난 뒤, 한율은 진은수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그러나 진은수는 할 말이라도 있는지 머뭇거렸다.

“…저기, 선배님.”

“네.”

진은수가 의자에 두었던 자신의 콘티 대본을 냉큼 집어서 펼쳤다. 촤라락. 그러더니 대본 사이에 끼워진 작은 쪽지를, 아주 재빠르게 한율의 주머니에 쏙 넣었다.

“……?”

“시, 심심할 때.”

대본을 쥔 진은수의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긴장한 얼굴로 말하는 그녀의 귀가 새빨갛게 물들었다.

“편하게 톡, 주세요…. …그럼 수고하셨습니다!”

꾸벅.

진은수는 한율의 대답도 듣지 않고 대기실 칸막이 쪽으로 후다닥 도망쳤다.

잠시 후. 한율은 차에 타고서야 쪽지를 꺼내 펼쳤다. 거기엔 진은수의 초코톡 ID가 적혀 있었다.

한율은 천천히 한숨을 쉬었다.

자신을 향한 진은수의 호감이 이성적인 관심으로 슬슬 넘어가는 느낌은 받고 있었다. 아스대를 관람한 퍼플아워 팬들도, 진은수가 한율을 바라보는 표정이나 눈빛을 보고 ‘진은수가 서한율 좋아하는 거 같더라’라고 커뮤에다 떠들었을 정도.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눈 시간이 짧아도 얼마든지 자라날 수 있는 감정. 하물며 의지대로 제어되는 종류도 아니다.

그래도 지금까진 직접적인 태도로 마음을 표현하지 않아 가만히 두었건만.

‘쓸데없는 희망은 심어주지 않는 게 좋겠지.’

“한율아.”

룸미러로 한율을 살피던 조유찬이 불렀다. 한율은 쪽지를 주머니에 넣었다.

“네.”

“너 혹시… 다른 아이돌들한테서 이상한 소문 들은 적 없어?”

“무슨 소문이요?”

“신인 걸그룹 멤버나 연습생을 스폰서와 연결하는 아이돌 브로커 소문.”

“안인섭이요?”

작년 이해원으로부터 안인섭을 조심하란 이야기를 들었을 때, 한율과 차남석은 어스래빗 멤버들과 매니저들에게 안인섭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가 이전 기획사에 있었을 때 스폰을 받다가 들통나 계약위반으로 쫓겨나고, 연습생들을 업소에 소개하는 브로커 짓을 했다는 소문을.

“으음…. 그럼 그 녀석인가? 하지만 아직도 그런 짓을 할까? 이젠 어느 정도 얼굴도 알려졌는데?”

“저야 모르죠.”

“걔 말고 다른 사람은? 그런 짓을 할만한 다른, 짐작 가는 놈은 없어?”

“글쎄요…. 그건 왜요?”

“조금 전에 은수 씨 매니저한테 들었는데….”

이틀 뒤 월요일 아침.

교실은 여느 때보다 더 시끄러웠다.

“그 기사 봤냐? 개더러워.”

“아침부터 눈갱 당함. 크.”

“우리 학원 쌤이 그러더라. 아무리 잘나가는 연예인이라도, 술이랑 클럽 둘 다 좋아하면 절대 가까워지지 말라고.”

“어쩐지. 이 사람, 전에 예능 나와서 술 얘기, 클럽 얘기 막 할 때부터 좀 싸하긴 했어.”

마흔 넘은 아이돌 출신 배우가, 유흥업소에서 속옷까지 다 벗은 채 추잡스럽게 노는 영상 캡처본이 기사를 통해 퍼진 까닭이었다. 그의 모습은 얼굴을 제외한 몸뚱이만 모자이크 처리되었다.

[제보로 들어온 영상엔 이외에도 A씨가 걸그룹 B, C의 멤버 두 명에게 마약을 권유했다는 충격적인 내용이 담겼으며…(중략).]

-주인결 2탄인가?

-이거 분명 주인결 영상 찍은 놈이 찍었다. 킹리적 갓심ㅇㅇ

-살색 모자이크ㅋㅋㅋㅋㅋㅋㅋㅅㅂ

ㄴ안 보이는데 보이는 것 같아...

-3탄은 언제 나오냐

-보고 있나, 빠수니들? 너희들 오빠의 미래다^^

ㄴ신고로 비공개된 댓글입니다.

-마약 권유받은 여돌 누구?

-돈 많은 남자가 마흔이 넘어도 장가를 안 간다? 그 남자가 노는 것도 좋아하고 술도 좋아하고 여자도 좋아한다? 지뢰다 피해라

ㄴ셋 다 좋아하지만, 돈만 없는 놈의 말씀입니다.

ㄴ절제하는 인간이냐 본능질주 짐승이냐의 차이지, 뭘 좋아하고 말고 자체의 문제가 아닙니다.

자리에 앉은 한율은 다른 기사를 살폈다. 낯익은 이름이 적힌 기사 제목에 시선이 갔다.

[어스래빗 팬클럽, 유호 생일 축하 기념 기부 이벤트]

[원제로, 호주 K-POP 콘서트 위해 출국]

[아이돌 7년 차 징크스? 감성소녀 해체 수순 밟나]

[고양고양 엔터, 감성소녀 미미 재계약 완료]

[계약만료 앞둔 제유, SNS서 ‘쌀 떡볶이 먹고 싶다’]

[블블 민준♡ 이희우, 새 작품에서 파격 변신 예고]

[스타믹스 지헌, <별☆일> 인연 배우 최혜승과 열애설 부인]

[MOHE 정규 1집, 앨범 판매량 자체 최고 기록]

지난주, MOHE가 정규 1집을 들고 컴백했다. 그래서 이번 주도 굉장히 바쁘게 보낼 테지만, 오늘은 음악방송이 없는 날. 안인섭의 멘탈이 안녕한지 확인이 힘들었다.

그렇다고 이해원에게 연락할 정도로 궁금하진 않다.

‘내일 되면 알겠지.’

사실은 이틀 전, 배우 주인결이 미성년 연습생을 소개받았다고 들었을 땐 다시 그의 추잡한 영상을 언론사에 보내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러면 영상을 촬영한 이가 안인섭이라는 사실이 빨리 밝혀질 것 같아 관뒀다.

아직 재벌 3세와 대기업 회장의 차남 영상도 남았는데.

‘그나저나….’

한율은 검색창에 커서를 대고 잠시 고민하다가 톡톡 두드렸다.

[상처 주지 않게 거절하는 방법] 검색.

많이 닮았어요

“하….”

안인섭은 침대에 널브러진 채 욕을 뱉었다.

“씨발….”

클라우드에서 삭제된 파일 하나가 더 공개되었다. 우연인지 아니면 철저히 의도된 것인지, 배우 주인결과는 접점 없는 인물의 것이. 그렇다고 안심할 순 없는 일이었다. 두 사람이 서로 연락해 영상을 찍은 사람이 누군지 추릴 수도 있으므로.

안인섭은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차라리 돈을 요구하라고, 개새끼야….’

처음 클라우드의 파일이 모두 삭제되었다는 걸 알았을 때, 그는 극심한 불안에 시달렸다. 영상 속 등장인물들은 자신에게 막대한 피해를 준 이를 사회적 매장이 아닌, 정말로 소리소문없이 생매장하고도 남을 자들이므로.

그래서 차라리 자신이 술김에 전부 날려버린 것이기를 바랐다. 그게 아니면 최소한 해킹범의 소행이기를 바라기도 했다. 억대 금액을 요구하더라도 협상의 여지는 있으니까. 하지만 범인은 협박이나 금전 요구는커녕, 언론사에다 영상을 툭툭 던졌다. 이번에도.

‘씨발, 대체 왜 하필…. 아니, 대체 어떤 새끼가 어떻게….’

클라우드의 파일이 삭제된 건 26일 새벽.

그전까진 멀쩡했다. 클럽에 들어가기 전 통화녹음 파일 하나를 업로드하느라 접속했고, 술을 마실 때나 화장실을 갈 때도 핸드폰을 몸에서 떼어놓지 않았다.

클럽에서 나온 뒤엔 앱으로 택시를 불렀다. 당시 호출했던 택시 기사의 정보가 남아있어 직접 찾아가 블랙박스 영상을 확인했다. 택시를 탄 것에서 기억이 끊겼었으니, 분명 그 안에 단서가 있을 거라고.

그러나 영상 속 자신은 토하고 싶다면서 택시에서 내린 뒤 어둑한 골목 안쪽으로 사라졌다. 그걸로 끝이었다.

‘핸드폰 해킹이 아니면 분명 그때 유출된 게 확실한데….’

누가 그 부분만 기억을 도려낸 것처럼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정말 답답해 미칠 노릇이었다.

지구대 외벽 CCTV에도 스스로 비척비척 걸어와 화단 턱에 쭈그려 앉는 모습만 찍혀 있었고.

우웅.

클라우드 파일이 털린 뒤 새로 바꾼 핸드폰이 울렸다.

[BLUE]

안인섭은 짧게 심호흡을 하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사장님.”

-[아직도 연락 들어온 거 없어?]

“네.”

-[일단, 그 동네에다 몰카 설치하고 다니는 놈이 있단 찌라시 뿌려놨어. 혹시 몰라 대역도 준비해뒀고, 영상 제보 경위도 역추적 중이야.]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번 활동 끝나면 당분간 중국에 가 있자.]

안인섭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중국이요…?”

-[주인결 이 새끼가 평소 입을 싸게 놀린 모양이야. 단단히 경고는 해뒀지만, 그래도 당분간 눈에 띄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그래. 지금도 막 컴백한 직후라 불안하기는 하겠지만, 그치들이 애들 나오는 방송이나 보니?]

날 이대로 잘라 내치려는 건 아닐까.

머릿속에 강한 의심이 돌았다. 화도 났다.

그런 영상을 찍으라고 시킨 게 누군데. 바로 이 여자와 ‘그 남자’였다.

-[마침 그쪽에서 영화 캐스팅 제안도 들어왔고. 어차피 대사는 성우가 더빙해줄 테니, 넌 입 모양만 그럴싸하게 할 수 있도록 익히면 돼.]

속이 울렁거렸다.

안인섭은 손으로 제 입을 꽉 틀어막았다가 대답했다. 날이 선 감정이 들키지 않도록, 기운 없는 웃음을 실어.

“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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