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6화 (126/427)

* * *

“안녕하세요, 선배님.”

더순한화장품 겨울 화보 촬영장. 진은수가 한율에게 꾸벅 인사했다.

“일찍 오셨네요?”

웃으며 묻곤 있지만, 지난주 CF 촬영으로 만났을 때보다 기운이 없어 보였다. 이유는 아마도, 용기 내어 건넨 쪽지가 무색하게 한율이 아무 연락도 하지 않았기 때문.

“오늘따라 눈이 빨리 떠져서요.”

“네…. 그럼, 옷 갈아입고 올게요.”

“네.”

진은수는 다시 고개를 꾸벅이곤 몸을 돌렸다.

한율은 어깨가 축 처진 진은수의 뒷모습을 보며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아직 마음을 접으라는 뜻도 전하지 않았는데, 사흘 내내 연락하지 않은 것만으로 의기소침해지다니.

“은수 씨, 왜 이렇게 다운됐어요? 미소~.”

한율의 첫 번째 단독 촬영이 끝나고 진은수의 단독 촬영. 대기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대기하는데, 감독의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배경음악도 더 신나는 음악으로 바뀌었다.

“하나, 둘…. 한번 웃고 긴장 좀 풀까요?”

오래 걸리네.

핏이 흐트러질까, 의자를 두고 서 있던 한율은 슬쩍 세트장 쪽을 보았다. 진은수가 아련하게 웃고 있었다.

환하게 웃으려 노력하는 것 같은데, 눈이 거짓을 말하지 못해 빚어진 표정이었다. 그리고 그 모습과 겹치듯이 보이는 작은 마물.

“…….”

…큭. 한율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며 웃고 말았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땐, 충격받은 얼굴로 이쪽을 보는 진은수와 눈이 마주쳤다.

조명에 반사된 눈의 물기가 반짝거리는 순간, 한율은 솔직히 말했다.

“미안해요. 순간 너무 귀여워서.”

“……?!”

“어머머?”

감독이 호들갑스럽게 끼어들었다.

“뭐지, 이 분위기?”

“하하하하!”

눈치를 보던 조유찬도 큰소리로 웃었다. 짝짝짝 박수까지.

“은수 씨 너무 귀여워요! 사랑스러워요! 그러니 자신감 있게 홧팅!”

“홧팅!”

다른 스태프들도 덩달아 박수를 치면서 진은수를 응원했다. 그러잖아도 커다란 눈을 더 크게 뜨고 멍해졌던 진은수는, 스튜디오 가득 울리는 사람들의 응원과 박수를 받고 정신을 차렸다.

“네, 넷! 감사합니다! …홧팅!”

“홧팅!”

“자, 이대로 갈게요~! 고개 살짝 들고 미소~!”

발그레 뺨을 붉히며 진은수가 환하게 미소 지었다.

차카차카차칵.

화보 촬영은 오후 4시 즈음 마무리되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저흰 스케줄이 있어서 먼저 가보겠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죄송합니다!”

한율이 감독에게 먼저 인사할 때였다. 내내 조용히 촬영을 지켜보던 진은수의 매니저가 사방에다 큰소리로 인사했다. 그러더니 막 옷을 갈아입고 나오는 진은수의 손목을 잡았다.

“오늘 정말 감사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먼저 가보겠습니다!”

“어? 네? 아, 수고하셨습니다…!”

어리바리하게 있던 진은수가 뒤늦게 사람들에게 인사했다. 그러고 매니저의 손에 이끌려 순식간에 퇴장.

스태프 중 한 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퍼플아워가 아주 바쁘긴 하죠.”

잠시 후, 차에 탄 한율은 안전벨트를 매고 난 뒤 핸드폰 무음 설정부터 진동으로 바꿨다. 그리고 인터넷에 접속. <락뮤닷>을 검색했다.

[MOHE 안인섭, <락뮤닷>으로 출근하며 환한 미소]

‘이번엔 멀쩡하네.’

한율은 메인 버튼을 누르며 고개를 들었다.

“왜요, 형?”

운전석에 앉은 조유찬이 시동도 걸지 않고 한율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조유찬이 씩 능글맞은 미소를 지었다.

“은수 씨한테 마음 전혀 없다면서요, 서한율 씨.”

“아주 오래전에요.”

“응?”

“잠깐 키웠던 동물을 닮았어요.”

“…응?”

한율은 담담히 대답했다.

“은수 씨요. 살짝 쳐진 커다란 눈에다 조금 귀여운 듯하면서도 바보 같아 보이는 이미지가, 그 동물이랑 많이 닮았어요.”

“한율이 너 지금 그 말….”

흥미진진한 얼굴로 한율을 쳐다보던 조유찬의 입가가 서서히 내려갔다.

“은수 씨한텐 절대 하지 마. 상처받겠다….”

“네.”

“그리고 은수 씨, 아까 네가 귀엽다고 해서 단단히 오해하고 있을지도 몰라. 은수 씨로선 지금 한율이 네 말 한마디, 한마디가 크게 와 닿을 테니까. 너 나중에 나쁜 남자, 바람둥이라고 소문나도 난 모른다.”

“오해는 안 할 거예요.”

지금쯤이면 진은수의 매니저가 진은수에게 잘 전달했을 터다.

진은수가 주었던 쪽지, 그리고 ‘미안해요.’ 사과 메시지가 동봉된 작은 봉투를.

한편, 진은수가 탄 차 안에선 고성이 터지고 있었다.

“너 제정신이야?! 내가 그랬지! 관심을 못 끊으면 티라도 내지 말라고! 그런데 어떻게 매번 이래, 매번! 그리고 안 쪽팔리니? 너 혼자 걔 좋아하는 티 실컷 내고, 응? 자존심 상하지도 않아?”

…훌쩍. 진은수는 울음을 삼키며 손등으로 눈가를 닦았다. 그녀의 손엔 서한율이 매니저를 통해 보낸 답장이 쥐어져 있었다.

“남자 만나고 싶으면 지금이라도 탈퇴하고 나가! 다른 애들한테 피해 주지 말고!”

그 말에 진은수는 번쩍 고개를 들었다. 억울한 감정이 그동안 지켜주었던 진실과 함께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그러나 진은수는 입술을 꼭 깨물고 닫았다.

‘루아 언니도… 원카운트 선배님이랑 사귀는데….’

루아만이 아니었다. 한 살 차이 동생인 막내 멤버 송의연 역시 데뷔 전부터 사귀는 남자친구가 있었다.

“몇 달 만에 한 번 만나서, 웃으면서 인사하는 게 그게 그렇게 잘못된 일은 아니잖아요….”

처음 음악방송에서 마주쳤을 때 반갑게 인사했다가 혼이 난 이후로 태도를 조심했다. 그런다 아스대 녹화 때, 고작 말 한마디 더 하려 했을 뿐인데 멤버들이 먼저 자리를 옮겼다.

당시 그 모습을 본 팬들은 커뮤에서 이런 말을 꺼냈다.

[진은수 ㅅㅎㅇ 좋아하는 듯?]

눈치 빠른 팬들. 그보다 더 눈치 빠른 팬들.

-둘이 같이 있는 거 부각되도록 은수만 남겨놓고 간 것 같던데. 엿되봐라 하고ㅋ

-얘네 연생 때부터 붙은 팬들은 잘 앎. 호수 동생에다 어릴 때부터 예쁘다고 소문나서 처음 아림 들어갔을 때부터 개유명한 게 은수임. 그런데 성격이 순해서 다른 연생들한테 대놓고 견제당했다고 함. 지금 퍼아 멤 중 연생 시절에 은수랑 친하게 지낸 애 한 명도 없음.

ㄴㄹㅇ 은수는 노래 잘 부르지 않았으면 더 무시당했을듯

“그러면 거기에서 그쳤어야지 톡 ID는 왜 줘!”

“…….”

“정 연애가 하고 싶으면 차라리 같은 회사 애를 만나든가!”

사람들은 아이돌이 무슨 연애냐, 특히 신인의 경우엔 특정한 이성에게 관심만 표해도 정신 나갔냐는 소리를 듣기도 한다. 그러나 이 바닥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

그런 비난은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는 걸. 그래서 회사는 어린 아이돌에게 말한다.

적어도 들키지만 마라.

정 연애가 하고 싶으면 차라리 같은 소속사 아티스트를 만나라. 그나마 티가 덜 나니까.

막을 수 없다는 걸 잘 아는 까닭이었다. 세대가 내려갈수록 아이돌의 연애에 관대해지는 추세이기도 하고.

그들도 사람인데, 연애 좀 할 수 있지.

본업만 소홀히 하지 않으면 괜찮아.

아이돌의 연애에 배신감을 느끼고 안티로 돌아서는 사람들도 있지만, 건전하게만 사귀면 상관없다고 이해해주는 사람들.

“연애가 목적이 아닌데….”

그리고 루아나 송의연뿐만이 아니라, 음방 대기실에서 손을 잡고 장난치는 다른 아이돌 커플을 보고 용기가 난 것도 사실이었다.

사귀는 것까진 바라지 않는다. 그래도 조금은… 가까워져도 괜찮지 않을까?

“뭐?”

진은수의 목소리가 너무 작아 제대로 듣지 못한 매니저가 되물었다.

“방금 뭐라고 했어?”

훌쩍. 진은수는 다시금 눈에 맺히는 눈물을 닦았다.

“아니에요. 죄송해요….”

난 이런 욕심도 내면 안 되는 거구나.

* * *

11월. 어스래빗은 RMMA 측으로부터 커버 무대를 할 수 있겠냐는 연락을 받았다. 다른 아이돌그룹 멤버와 유닛을 이루는 스페셜 퍼포먼스 무대도.

어스래빗 멤버들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OK를 외쳤다. 스페셜 퍼포먼스 무대는 길우성과 이건우가 나가기로 했다.

세 번째 EP 앨범 재킷 촬영과 녹음은 끝난 터라, 멤버들은 컴백 쇼케이스 공연 연습, 다음 달 발매 예정인 ‘하양 토끼, 까망 토끼’의 크리스마스 기념 스페셜 곡 연습, RMMA에서 선보일 무대 연습으로 바쁜 나날을 보냈다.

이 와중에 한율에게 들어온 또 다른 연락.

“<고양이 난로> 영화홍보 차 <스타학교> 출연 섭외가 들어왔는데, 나갈 거지? 희우 씨가 한율이 네가 나간다고 하면 자기도 나가겠다고 했다더라.”

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11월 16일.

차남석과 같은 대학의 연극영화과 수시합격 통보를 받은 날. 한율은 오래간만에 개인 라이브 방송을 켰다. 장소는 PC가 있는 보컬 연습실.

-연기천재돌!!!! 연영과 수시합격 축하한다!!!!!

-축하해 한율아♡♡♡

-연기 잘해서 대학까지 합격한 토끼가 있다고 해서 와봤습니다.

영상이 제대로 켜지기도 전부터 올라오던 축하 댓글은, 한율의 모습이 온전히 잡히자 흐름이 바뀌었다.

-세상에

-헉

-여러분!!!!!!! 드디어 율톢이 염색을 했어요!!!!!!!!!! (감격)

-율아아ㅏ아아아아

-존버는 승리한다

-레드 계열 잘 어울릴 줄 알았다

-아직 고등학생 주제에 누나를 또 나쁜 사람으로 만드네 얘가

-대학 합격 기념으로 피어싱도 새로 해쪄요? >ㅅ<)♡♡♡

“축하 인사 감사합니다.”

한율은 올라오는 톡을 보다가 제 머리를 손으로 슥슥 만졌다.

“이번에 처음으로 염색해봤는데. 이상하지 않아요? 며칠 더 지나야 색이 자연스럽게 보인다고 하더라고요.”

-아냐 이뻐ㅠㅠㅠㅠㅠㅠ

-티 한 점 없는 하얀 피부랑 찰떡

-너무 예쁘다 ㄹㅇ

“그리고 저 자랑할 것도 있는데.”

한율은 의자 옆에 둔 가방에서 지갑을 꺼냈다.

-???

-뭔뎅?

-귀여움?

-얼굴?

“짠.”

한율은 운전면허증을 카메라 렌즈에 들이댔다. 면허번호와 주민등록번호는 손가락으로 가렸다.

“면허 땄어요.”

오늘은 없어요

-!!!!!!

-토끼가 면허를 땄어?!!

-대박

-우와

-2n살인 나도 아직인데...........

-부지런한 율토깽이ㅎㅎ

“사실은 조금 더 느긋하게 따려고 했는데, 몇 달 동안 기다리던 차가 출고됐거든요. 그래서 하루라도 빨리 몰고 싶은 마음에 서둘렀어요.”

-인생 첫 차를 갖게 되어 신난 율톢

-플렉스..☆

-항상 안전 운전!!!

-첫 시승은 누구랑 할 거야?

-애기가 차를 몰아? 애기가? 나 지금 좀 혼란스러워질라 그래

-무슨 차 샀엉?

-율톢이 운전하는 모습 상상이 안 가

그때였다.

벌컥!

“……?”

이번엔 분명히 ‘이용 중’이라고 팻말을 잘 돌려놨건만, 누군가 예고도 없이 문을 열었다.

“써한! 차 뽑았다며! 나 태워줘!”

난데없이 들이닥친 길우성의 손엔 핸드폰이 들려 있었다. 연습실에서 라방을 보다가 달려온 모양.

“…….”

-길톢의 난입

-율토끼가 길토끼 눈으로 욕한다ㅋㅋㅋㅋㅋ

-레알 찐친이라 나올 수 있는 표정

-왜 한율이 라방할 때만 이렇게 깜짝출연이 많아ㅋㅋㅋ

“이프림! 써한이요, 호 형 차 세 번 긁어먹었… 읍, 읍!”

“나가.”

-내쫓는닼ㅋㅋㅋㅋ

-세 번ㅋㅋㅋ

-전에 건우랑 가람이도 호 차로 연습했다고 한 것 같은데

-아이돌이 면허를 딴다는 건 연애때문이라던ㄷ.. 아니지?ㅜㅜ

-인증샷! (짝) 인증샷! (짝)

-나도 태워줘

-리더 차 공공재였냐고ㅋㅋㅋ

방송은 팬들에게 대학 수시합격 소식 및 면허 취득에 대한 자랑을 목적으로 켠 터라, 한율은 10분 정보만 하고 연습실로 복귀했다.

“내일 뮤비 촬영 있으니까, 10시까지만 하고 들어가자.”

“네.”

“한율아, 새 차 뽑았다면서? 차는 부모님 집에 있는 거야?”

“네. 월요일에 학교 마치고 가지러 갈까 해요.”

“앗싸! 내가 첫 시승자다!”

“너 데려간단 소리는 안 했는데.”

“뭔가 기분이 이상해. 한율이가 벌써 차를 몰다니…. 서로 교복입고 마주쳤던 게 엊그제 같은데.”

잡담을 나누면서 몸을 풀고, 내일 촬영할 M/V의 곡 안무 연습에 들어갔다. 쉴 땐 웃으면서 말하던 이건우가 무표정한 얼굴로 외쳤다.

“각도 맞춰! …셋, 둘, 가람아, 버릇 나온다, 또, 또.”

“죄송함다!”

땀이 턱 끝에서 뚝뚝 떨어지고 숨이 차올라도, 연습하고, 또 연습하고. 정각 10시가 되어서야 멤버들은 마무리로 스트레칭한 뒤 휴게실로 향했다.

“연습생분들 열심히 하신다.”

휴게실로 들어가기 전, 바로 옆에 있는 연습실을 들여다본 강보배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최근에 추가된 새로운 연습생 2명까지 해서 총 10명. 그들 모두 열심히 안무를 연습하고 있었다.

길우성이 강보배 옆에 나란히 서서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아, 저 동작 저렇게 빡! 빡! 하면 나중에 문제 생기는데…. 가르쳐주고 싶다, 교정해주고 싶다….”

“들어가서 알려줘.”

“어? 그래도 돼?”

“당연하지. 우리 직속 후배가 될 애들인데.”

“직속 후배…! 흐흐.”

길우성이 이상한 얼굴로 웃으며 연습실 문을 똑똑 두드렸다. 문 근처에 있던 연습생이 안무 동작을 하면서 고개를 돌리다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곤 꾸벅.

길우성이 연습실 안으로 고개를 들이미는 동안, 한율은 휴게실로 들어가 씻을 준비를 했다. 다른 멤버들도 하나둘 들어와 각자 열쇠로 잠갔던 캐비닛을 열었다.

“호 형, 우리 아시아 팬콘 투어 블루레이랑 DVD 다음 달에 나오잖아. 그거 우리한테도 줘?”

“응. 부모님 드릴 몫까지 챙겨줄 거야.”

“오오.”

“아. 그 기사 봤어? 우리 다음 달 14일에 컴백하잖아. 원제로는 13일 컴백이라던데.”

“벌써? 주기 너무 짧지 않아?”

“걔네 진짜 빡세게 굴린다. 방송이랑 자체 예능, 해외 공연, RMMA 스페셜 무대…. 여기에 컴백 준비할 틈이 있었어?”

“어쨌든 음방 활동 내내 겹치겠네.”

한율은 갈아입을 옷과 수건, 개인 목욕용품을 챙기고 캐비닛을 닫았다.

끼익, 철컥.

돌아온 월요일. 한율은 학교가 끝나자마자 매니저 윤승우의 차를 타고 부모의 집으로 왔다. 길우성도 끼었다.

“똑순아, 밤순…아……. 왜 돼냥이가 된 거야?!”

“살이 아니라 털이 찐 거란다, 우성아. 그런데 정말 저녁 안 먹고 갈 거야? 오래간만에 왔는데?”

“레슨이랑 연습이 있어서요. 일요일에 잠깐 들를게요.”

“그래…. 그런데 머리카락은 괜찮아?”

모친이 한율이 머리를 쓰다듬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탈색에 염색한 것치곤 이전처럼 머리카락이 부드러운 까닭.

“괜찮아요. 케어에 신경을 많이 쓰고 있거든요.”

“그래. 헤어팩 좋은 거 구하면 회사로 보내줄게. 그런데 정말 차 몰고 갈 수 있겠어?”

모친은 그사이 고양이 털로 범벅이 된 길우성의 교복을 보곤 테이프클리너를 건네주었다.

“연습할 때 보셨잖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그래도 걱정이 되는지, 모친은 외출 준비를 하고 지하 주차장까지 따라 내려왔다.

길우성은 한율의 새 차를 보며 입을 쩍 벌렸다.

“우와, 와, 멋지다…! 겁나 쩔어!”

그러다 정색했다.

“그런데 왜 외제 차죠.”

“차가 멀쩡히 잘 굴러가기만 하면 됐지.”

“위험할 수 있으니까 우성이 넌 뒤에 타는 게 좋겠다.”

“넵.”

한율은 뒷좌석에 가방을 툭 던져놓은 뒤 운전석에 올랐다. 모친은 조수석, 길우성은 뒷좌석에 타고 안전벨트를 맸다.

“새 차 시승이라니. 두근두근하는구먼.”

그러면서 안쪽 손잡이를 꽉 움켜잡았다.

끼기긱. 타이어와 주차장 바닥이 날카롭게 마찰하는 소리를 내며, 초보운전자 한율이 모는 차는 지하 주차장을 무난히 빠져나왔다.

“어머니, 그런데 있잖아요.”

복잡한 도로에 진입해서 한참. 길우성이 잡고 있던 손잡이를 슥 놓으며 입을 열었다. 한율의 모친이 길우성을 돌아보았다.

“응.”

마침 신호에 걸려, 한율은 부드럽게 차를 멈추곤 라디오를 켰다. 주파수가 맞춰져 있었는지 깨끗한 음질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어머니 아들, 왜 이렇게 운전을 잘할까요? 꼭 운전 경력 5년 차 매니저 형이 모는 차를 탄 것 같은 안정감이 들어요. 한 달 전, 유 리더의 차를 세 번이나 긁어댄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예요.”

한율의 모친이 웃음 지었다.

“그러게. 참, 호는 정말 괜찮대?”

“네. 대신 몇 달간 집세 안 받으려고요.”

한율은 회사가 아닌 숙소로 차를 몰았다. 당장 이걸 등하교나 출퇴근용으로 사용할 마음이 없기 때문이었다.

숙소 지하 주차장. 길우성이 차에서 내리더니 위를 향해 두 팔을 활짝 벌렸다.

“무사히 도오차악! 무사히 첫 시승을 마친 기념으로 인증샷 갑시다!”

“그럴까? 율아, 이리 와.”

한율은 모친의 손에 이끌려 차 앞에서 함께 사진을 찍었다. 찰칵.

“이번엔 너희들 사진 찍어줄게.”

“아니요, 괜찮아요.”

“그러지 말고. 첫 차, 첫 시승에 함께 한 기념으로. 자, 여기 서서.”

“써한, 차에 기대도 되지?”

한율은 속으로 한숨을 쉬면서 길우성과 나란히 차 앞에 섰다.

“왼쪽 모델분, 좀 웃으세요~. 하나, 둘.”

찰칵.

잠시 후, 모친이 택시를 타고 돌아간 뒤.

한율은 모친이 보내준 조금 전 찍은 사진을 보면서 잠시 고민하다, SNS에다 올렸다. 그들의 소소한 일상을 궁금해하는 팬들을 위해.

[새 차 첫 시승을 함께한 직장동료와 인증샷. :) #교복입고운전함 #차이름도지어줘야하나요]

-블랙당근호

-삐까뻔쩍하다잉

-!!!!!!!!!!대박

->>>>>>교복입고 운전<<<<<<

-[Gil Useong]호 형보다 운전잘함ㅇㅇ 안정감굿

ㄴ으아닠ㅋㅋㅋㅋㅋ

ㄴ맏형.. 면허 딴 지 사나흘밖에 안 된 고3한테 밀린 고야....?

-토끼가 차를 몰다니.. 신기한 세상이군.

-볼ㅂ차니까 폭주하는젤리발바닥, 줄여서 폭리닥

ㄴ????

ㄴ???????

ㄴㅂ보랑 대체 무슨 연관이....?

ㄴ사진에선 엠블럼이 안 보이는데 어떻게 아신 거...??

한율이 차를 구매했다는 소식은 기사가 되어 포털사이트 연예뉴스란 메인에도 올라갔다.

[어스래빗 한율, ‘교복 입고 운전했어요’]

[19일 보이그룹 어스래빗 한율이 개인 SNS에 새 차와 함께 찍은 사진을 올렸다. 한율이 구매한 차는 출시가격만 7천만 원대인 스웨덴의 고급 자동차 브랜드 V사의 SUV로…(중략).

한편 한율은 KBC 시사교양국의 서석진 국장과 과거 미인대회 수상자이자 강남에 여러 채의 빌딩을 소유한 최은희의 아들로, 한강이 보이는 20억 원대 아파트를 소유하고 있다.]

-기자가 어지간히 부러웠나 보다. 재산과 잘난 부모를 이렇게 강조한 걸 보면.

ㄴ별일없는 드라마 출연료로 이미 찻값 벌고도 남았을 텐데

-고3도 차가 있는데... 집도 있는데...

-ㅅㅂ허세 쩐다ㅋㅋㅋㅋㅋㅋ

ㄴ원룸 월세 살면서 외제차 리스해서 타고 다니는 게 허세지ㅋ 얜 아파트 자가 소유자라니까? 빚이라곤 회사에 진 빚뿐일 걸?

-면허 따자마자 외제차 사는 거 보니까 정뚝떨어지네

ㄴ부모님이 사주신 겁니다. 한율이 생일 전부터 주문해서 몇 달 기다려 받은 차고요.

-빨간머리+피어싱+외제차+한강뷰고오급아파트+고3

ㄴ+연기쩌는아이돌..

ㄴ소설에도 이런 캐 넣으면 현실성 떨어진다고 욕먹는다고ㅡㅡ

ㄴ원래 허구보다 현실이 더한 것을

-그런데 얘는 연기하는 거 보면 지금 가진 것의 배는 혼자 힘으로 충분히 벌어들일 것 같아서...ㅋ

-그래서 이분 이상형이 어떻게 된답니까? (진지)

ㄴ힘쎄고 강하고 등산 좋아하는 여자요. 본인이 직접 말함.

ㄴ서한율 팬 단체로 헬스 끊고 주말엔 등산 간답니다. 경쟁률 어마어마해요. 포기하세요.

-ㅋㅋㅋㅋㅋ난 또 3억짜리 외제차 산 줄? 귀엽네 고딩자식^^

-같이 사진 찍은 앤 누구예요?

ㄴ같은 학교 동급생이자 절친이자 어스래빗 메인댄서인 길우성입니다! 춤을 굉장히 잘 춥니다! :D

-이 기사 암만 봐도 방구석열폭러들한테 ‘자 이번 타깃이다!’하고 던지는 느낌인데ㅇㅇ

기사가 메인에 오른 탓일까.

한율의 SNS엔 평소보다 많은 악플러가 몰려왔다. 대놓고 돈을 구걸하거나 요구하는 댓글도 적잖이 달렸다.

한율은 모니터링 직원과 로펌 측이 많이 바빠지겠다고 생각하며 덤덤히 넘겼다.

‘차량용 방향제나 사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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