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7화 (127/427)

* * *

“오늘도 감사합니다, 선생님.”

“그래, 조심히 들어가고. 다음 달에 보자.”

“네.”

라이언은 의사에게 고개를 꾸벅이곤 진료실을 나왔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검은색 마스크를 꺼내며 몸을 돌리다, 막 이쪽으로 오던 여성과 눈이 마주쳤다. 반대로, 그녀는 쓰고 있던 마스크를 살며시 내리고 있었다.

“어…?”

라이언은 그녀에게 꾸벅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놀라 덜컥 멈췄던 여성, 걸그룹 감성소녀 멤버 제유도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도 여기 다니세요?”

“아뇨, 이 병원은 오늘이 처음이에요.”

어색해하며 웃는 제유. 라이언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전 여기 다닌 지 2년째에요. 현 쌤 좋아요. 이야기 잘 들어주고, 감자떡도 줘요. 맛있어요.”

제유는 눈을 깜빡거렸다.

“감자떡이요?”

“그런데 오늘은 없어요.”

“네….”

“그럼 먼저 가볼게요, 선배님.”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라이언은 재차 꾸벅이곤 마스크를 올리며 옆을 지나쳤다.

“…….”

제유는 씩씩하게 걸어가는 라이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복도 벽에 붙은 실내간판의 입체글자가 그녀의 시야를 스쳤다.

[현재 정신건강의학과]

“후우….”

제유는 천천히 심호흡한 후 진료실 문을 두드렸다.

“상담은 잘 받았어? 별일은 없었고?”

라이언이 차에 타자 현장전이 물었다. 라이언은 조금 전 마주친 제유를 떠올리며 모자와 마스크를 벗었다.

“응, 없었어. 기다려줘서 고마워, 형.”

“고맙긴. 너흴 케어하는 게 우리 일인데. 회사로 갈 거지?”

“응.”

라이언은 고개를 끄덕이며 핸드폰을 꺼냈다.

“…어?”

“왜?”

“아냐.”

“……?”

라이언은 룸미러를 통해 이쪽을 보는 현장전의 시선을 피하면서 강보배의 톡을 확인했다.

-[회사 근처에 새로운 분식집 생겼다ㅎ 뭐 먹을래?]

-[메뉴판(이미지)]

힐끗. 라이언은 현장전의 눈치를 살피며 답장을 보냈다.

[치즈떡볶이랑 참치김밥]

-[ㅇㅇ 작업실로 와]

[ㅇㅇ]

휴일입니다

킁킁. 박가람이 공기 냄새를 맡았다.

“이상하네…. 이상하게 떡볶이 냄새가 나….”

“누가 떡볶이 먹고 온 거 아냐?”

“밖에서 먹고 온 것치곤 냄새가 진해. 그렇다고 여기에서 먹은 것 같지도 않은데…. 누구냐.”

“…….”

“…….”

라이언과 강보배가 동시에 딴청을 피웠다. 이건우가 핸드폰으로 알람을 맞추며 말했다.

“난 모르겠는데. 어쨌든 나랑 우성인 8시에 스페셜 무대 연습하러 가기로 했거든. 그래서 바로 단체 안무 연습 시작했으면 하는데.”

유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이 5시 30분이니까, 2시간 동안 빡세게 하고 저녁 먹으러 가자. 라이언, 괜찮지?”

“어? …응. 괜찮아.”

“그럼 커버 무대부터 연습할까?”

“네에.”

멤버들은 저마다 핸드폰이나 아이패드를 선반에 올려놓고 몸부터 풀었다.

그렇게 2시간. 단체 안무 연습을 끝내고 이건우와 길우성은 땀만 대충 닦고 옷을 갈아입었다. 한율은 다른 멤버들과 함께 구내식당으로 향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선배님.”

구내식당 저녁 운영시간은 8시까지. 그래서 사람이 별로 없으리라 생각했지만, 식당엔 드림래빗 멤버들이 막 식판이나 수저를 챙기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안녀엉.”

연예계에선 선후배 사이지만, 드림래빗 멤버들과는 비슷한 연습생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주요 레슨 과목인 보컬과 안무 레슨을 따로 받은 데다가, 다른 레슨 때 마주치더라도 회사 측에서 은근히 말을 섞지 않도록 주의시켰던 터라 대부분은 데면데면했다.

그나마 드림래빗 앨범에 작곡과 프로듀싱으로 참여한 유호가 그들과 친한 편이었다. MBS <뮤직센터>에서 만났을 때도 잘 챙겨줬을 테고.

“저녁 늦게 드시네요?”

“다른 데에 연습하러 가야 하는 멤버들이 있어서, 단체 연습부터 하느라.”

“그렇구나….”

“나 땀 냄새 좀 심하지 않아?”

“제 냄새가 더 심해서요. 히히.”

강보배와 라이언도 드림래빗 앨범에 참여하기는 했으나, 강보배는 작곡에만 발을 담가 직접 만난 적이 없어서 어색해 보였다. 라이언은 영어 랩 작사를 함께 한 박세은에게 손을 들었다.

“맛있게 먹어.”

“네. 선배님도 맛있게 드세요.”

“응.”

박세은은 한율관 인사 대신 빙긋 웃기만 하곤 고개를 돌렸다. 한율도 두루뭉술하게 드림래빗 멤버들에게 인사했다.

“맛있게 드세요.”

저녁을 먹은 뒤엔 보컬 레슨, 그리고 안무 연습.

밤 11시가 되자 이건우와 길우성이 돌아왔다. 한 사람은 한숨을, 한 사람은 씩씩거리며.

“하….”

“아오, 얄미워! 아오, 얄미워어!”

길우성은 씩씩거리다 못해 연습실 바닥에 널브러져 바동거렸다.

“흐아흐아아…, 속 터져어…!”

“왜 이래? 무슨 일 있었어?”

“스페셜 무대. 각자 연습해도 되는 부분이 많아서 일주일에 한 번만 만나서 맞추잖아.”

이건우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런데 개인 파트도 그렇고, 합을 맞춰야 하는 부분도 제대로 연습 안 하고 온 사람이 둘이나 있어서.”

“한 사람은 리허설 전까지만 잘 맞추면 되잖아! 라고 뻔뻔하게 나오고, 다른 한 사람은 우리가 너희처럼 연습할 시간이 많아 보이냐? 라고 되레 비수를 날리고…. 흐윽….”

유호가 발끈했다.

“어떤 놈이?”

“리허설 전까지 맞추면 되지 않냐고 한 놈은 ACCOM, 되레 성낸 놈은 원카운트.”

이번엔 라이언이 발끈했다.

“원카운트 누구?”

길우성이 라이언 쪽으로 뒹굴 구르며 고자질했다.

“기혁이란 사람이이….”

“그래도 일주일 만에 모인 거니까 참고 연습부터 했거든? 끝날 때 즈음에 차분히 말하려고? 그런데 연습 마무리하고 정리하는데, 내내 묵묵히 있던 퍼스트라인의 코우가 입을 열더라고. 이재랑 기혁이한테.”

차남석이 흥미진진한 얼굴로 물었다.

“뭐라고요?”

“당신들이 게으르거나 바쁜 게 우리랑 무슨 상관인데? 이런 식으로 제 몫도 못 할 거면 왜 하겠다고 나선 거야? 그래놓고 왜 다른 사람에게 양해를 강요해?”

“그 친구 한국말 잘하네.”

“박가람이 너보다 세 살 위다.”

“아, 그래?”

“나도 두 사람 얄미워서 뭐라 그러고 싶었는데 선수까지 빼앗겨서 속 터졍….”

길우성이 반대로 몸을 굴렀다. 털퍼덕.

“그런데 왠지 느낌이 싸해. 코우 형이 그렇게 일침 날리고 가는데, 기혁 씨 눈에서 불이 막 활활 타오르더라고.”

“아무래도 다음 주에 뭐 하나 건수 잡히면 바로 싸움으로 번질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

“그럼 다음 주엔.”

으음. 유호가 골똘히 생각에 잠기더니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최대한 그 셋, 아니 코우랑 기혁이랑 떨어져 있어. 괜히 싸움 났을 때 가까이 있으면 휘말리잖아. 말리다 다칠 수도 있고, 안 말리면 또 안 말렸다고 말 나올 테니까 애초부터 근처에 있지 말라고.”

“호 형 꼭 우리 엄마 같다.”

강보배가 키득거렸다.

“우리 엄마도 괜히 사이 나쁜 애들 근처에 있지 말라고 하는데. 중간에서 나만 피곤해진다고.”

“그래, 좀 떨어져 있어.”

박가람이 팔짱을 끼며 고개를 끄덕끄덕, 유호의 말에 동감을 표했다.

“사촌 형도 예전에 친구들 싸움 말리려다가 코뼈 부러진 적 있거든. 덕분에 코 수술해서 잘생겨졌다는 소리 듣는데, 열 받아.”

“…덕분에?”

“해피엔딩인가?”

“그러면서 원래 자기 코가 그렇게 생겼다면서, 수술 전부터 잘생긴 얼굴이었다고 뻔뻔하게 군다니까?! 여자친구만 데리고 와봐. 그땐 히아신스 친필 사인 화보 내밀어서 실실 웃게 만들어줄 테다.”

“악마다.”

“…….”

이 아이들, 언제까지 수다만 떨 생각인 걸까.

한율은 어느새 식어버린 땀을 수건으로 닦으며 멤버들에게 말했다.

“우리 연습 안 해요?”

“어, 해야지. 일어나, 막내.”

“흐엉….”

* * *

‘하양토끼, 까망토끼’ 두 번째 크리스마스 기념 스페셜 곡 녹음을 마친 다음 날, 일요일.

어스래빗 멤버들은 오늘을 ‘휴일’로 하자고 정했다.

12월 1일 토요일 ‘하양토끼, 까망토끼’ M/V 촬영을 시작으로, 컴백에 맞춘 여러 예능 녹화, RMMA, 새 앨범 활동 등으로 스케줄이 꽉 찬 까닭이었다. 한율의 경우엔 영화 개봉 홍보 활동도 겹쳤고.

“회사로 가서 연습하겠다면 말리진 않겠지만, 본격적으로 바빠지기 전에 하루 정돈 제대로 쉬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해.”

유호의 말에 모두가 동의했고, 오늘 아침 단체로 늦잠을 잤다. 10시간을 내리잔 한율은 11시에 일어나, 샤워 후 직접 차를 몰고 부모의 집으로 향했다.

와옹.

“너 혼자선 불안해서 못 보낸다. 어디 면허 딴 지 한 달도 안 된 초보운전자가 장거리에 나서려고.”

“그렇게 멀지 않잖아요. 괜찮아요.”

점심을 먹고 나서 고양이들과 놀아주는 중. 혼자 ‘비밀기지’ 공사 중인 곳을 찾아가겠다고 말하자 부친이 고개를 저었다.

“초보운전자에겐 서울 밖부터가 장거리란다, 아들아.”

“엄마랑 같이 가자, 율아. 그냥 차에서 보는 길이랑 직접 운전해서 달리는 길은 느낌이 달라. 내비게이션이 있어도 헷갈릴 수 있고.”

“오후에 고양이 병원 예약하셨다면서요. 정말 혼자 가도 괜찮아요.”

와오옹.

“당신이 호랑이 데리고 병원 좀 다녀와요.”

“음, 그래.”

“됐지?”

“…네.”

“아들. 내 아내 다치게 하면 혼난다.”

“네.”

모친은 많은 도움이 되었다. 아무리 ‘로건 워커’였을 적에도 운전했었고, 면허를 따는 과정에서도 새로이 배우기도 했지만, 그때보단 차량 성능도 발전하고 이곳 도로 환경에도 적응이 필요한 까닭이었다.

모친은 내내 한율이 자칫 나쁜 운전 습관이 들지 않도록 주의 깊게 살피며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아무리 어른스러워도 언제까지고 아이일 것 같았는데, 이젠 직접 운전해서 엄마랑 드라이브도 하고. 우리 아들 다 컸네.”

잠깐 들른 경치 좋은 카페. 커피를 마시며 모친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힘들진 않아? 아무리 옆에 우성이도 있고 다른 멤버들이 있어도, 마음껏 놀고 싶을 때가 있을 거 아냐. 남의 눈치 안 보고 편히.”

“괜찮아요. 지금 보내는 하루하루도, 지금이라 보낼 수 있는 시간이니까요.”

모친은 눈을 깜빡거리다 다시 미소 지었다.

“우리 아들, 정말 다 컸네.”

산속에 짓고 있는 집은 이제 막 상하수도 설비 작업을 끝낸 단계라 흙먼지만 풀풀 날렸다. 한율은 가만히 공사가 진행되는 현장을 보다가 근처를 한 바퀴 둘러보고 다시 차에 탔다.

모친을 집 앞까지 바래다주었을 땐 오후 5시가 지날 무렵이었다.

“이젠 아들 혼자 운전하는 거 걱정 안 해도 되겠다.”

“오늘 감사했습니다. 쉬세요.”

“응, 나중에 통화해. 조심히 들어가.”

“네.”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오며 한율은 잠시 고민했다. 이대로 숙소로 돌아갈까, 회사로 갈까.

모처럼 휴일이건만, 달리 할 게 없었다. 이제 곧 해가 질 시간이라 등산을 가기에도 애매하고. 그리고 내일 아침엔 <스타학교> 제작진과 사전미팅이 잡혀있었다.

‘안인섭도 최근엔 얌전하고.’

최근 국내 활동을 끝낸 MOHE는 현재 휴식 및 개인 활동 중. 몇 명은 일없이 쉬는 모양이지만, 안인섭은 리더와 중국으로 향했다는 기사를 보았다. 영화에 캐스팅되었다던가.

우웅.

거치대에 놓아둔 핸드폰이 울렸다.

[스카이러너 용맹]

한율은 무선 이어폰을 귀에 꽂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선배님.”

-[혹시 운전 중이야?]

“네.”

-[우와아, 진짜 운전 중이구나…. 너 진짜 멋있다. 아, 그럼 짧게 말할게. 이따가 저녁 같이 먹을래? 우성이랑 하신이랑. 우성이는 콜했거든.]

“네. 몇 시에 어디서요?”

잠시 후, 한율은 숙소에서 길우성을 태우고 스카이러너 숙소로 향했다.

스카이러너가 숙소로 사용하는 아파트 단지 밖엔 중학생에서 성인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두셋씩 모여있었다. 카메라를 든 채. 몇 명은 경비원 몰래 안으로 들어가려다 들켜서 혼나는 중.

전부 스카이러너 사생 스토커였다.

“이래서 맹이 형이 미안하다고 한 거구나….”

똑똑. 입구의 차량 차단기 앞에 잠시 멈추자 다른 경비원이 다가와 창을 두드렸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사람 좀 잠깐 태우러 왔어요.”

경비원은 몇 호의 관계자인지 묻고 나서야 한율의 차량을 들여보내 주었다. 그리고 한율의 차가 아파트 현관 앞까지 가서 멈추는 걸 주시했다. 어지간히도 사생 스토커들에게 시달린 모양이었다.

곧 길우성의 전화를 받은 용맹과 하신이 나오자, 상당히 떨어져있는데도 꺅꺅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길우성이 차에서 내리더니 뒷좌석 문을 열어주었다.

“어서옵쇼!”

“와, 진짜 서한율이 운전하고 있어.”

하신이 입을 벌리며 감탄한 데에 이어서, 용맹이 눈을 빛내며 조수석 문을 잡았다.

“나 조수석에 타도 되지?”

“네.”

용맹이 조수석에 타고, 길우성은 하신과 뒷좌석에 탔다. 타악. 문을 닫고 창도 올리자, 사생들이 지르는 비명 같은 환호성이 차단되었다.

“미안해, 여기까지 직접 오게 해서.”

“괜찮아요. 매니저들 전부 다른 멤버 스케줄에 갔다면서요.”

그리고 통화했을 때, 한율의 차에 타고 싶다는 마음을 은근히 비치기도 했었고.

뒷좌석에서 하신이 안전벨트를 매며 물었다.

“서한율, 운전할 때 말 시켜도 돼?”

“어.”

한율은 부드럽게 핸들을 돌리며 단지를 빠져나갔다. 사생 스토커 몇 명이 위험하게 가까이 다가와 사진을 찍어댔으나, 경비원들이 제지한 덕분에 다행히 사고는 벌어지지 않았다.

길우성이 뒤를 돌아보았다.

“몇 분은 택시로 쫓아올 기센데.”

용맹이 금세 풀이 죽은 얼굴을 했다.

“미안해. 내가 괜히 오라고 했다….”

“괜찮다니까요. 이런 상황을 제가 예측 못 했을까 봐요? 내비에 목적지 설정 좀 해주세요.”

“응.”

용맹이 찍은 주소는 식당이 아닌 아파트 주소였다. 용맹의 친형이 혼자 사는 아파트. 현재 형은 해외여행을 가고 없어, 그곳에서 편히 저녁을 먹기로 했다.

“그런데 우리 뭐 먹을까? 먹고 싶은 거 정해뒀어?”

“나 갈비찜. 무조건 갈비찜.”

“전 그냥 양념갈비요.”

“난 치즈돈가스!”

“우리 초밥도 시킬까?”

“콜.”

가는 도중에 미리 음식을 주문하고, 목적지에 도착. 용맹의 형이 사는 집은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정말 여기에서 먹어도 되는 거예요?”

“그럼. 여기 전세금을 내가 냈거든. 형한테 허락도 받았고. 편히 앉아.”

“어? 찬형이 형 여기 와도 되냐고 물어보는데? 일정 꼬여서 한두 시간 붕 뜬다고, 시간 때울 곳 필요하대.”

“먹을 복 있는 자식. 오라고 해. 괜찮지?”

“네.”

“저야 환영이죠.”

찬형은 음식 배달 기사와 함께 도착했다.

“기사님이랑 같이 엘리베이터 타는데 느낌이 오더라. 아, 나랑 목적지가 같으시구나.”

“안녕하세요.”

“하이, 하이.”

그들은 거실의 티 테이블에다 음식을 늘어놓았다. TV에선 일요일 예능 프로그램이 나왔다.

“한율이 너도 다음 달에 영화 개봉하잖아. 홍보 잡혔어?”

“일단 <스타학교>요.”

“거기 두 번째 출연 아냐? 나도 아직 한 번밖에 못 나갔는데….”

“나 형 만나면 묻고 싶은 게 있었는데.”

열심히 포장을 뜯던 하신이 찬형을 보며 말하자, 찬형이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또 그거야?”

“뭔데영? 뭔데?”

“원제로 정민솔. 어쩌다 락뮤 PD님한테 찍혔는지, 그렇게 이유를 안 알려준다? 치사하게.”

정민솔이 정민솔했구나

“그거 나도 궁금했는데.”

함께 <락뮤닷> MC를 보는 용맹도 자세한 내막은 모르는 모양. 길우성이 번쩍 손을 들었다.

“저도요!”

찬형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벌써 몇 달이 지났는데. PD님도 이젠 신경 쓰지 않는 걸 알아서 뭐 하려고.”

“궁금하잖아.”

“당사자가 이젠 신경을 안 쓴다면 말해도 무방한 거 아냐?”

“그럼 네가 직접 PD님에게 가서 물어봐.”

“진짜 입 무겁네, 이 사람!”

“다른 사람에 관한 입은 원래 무거워야 하는 법이야. 가볍게, 잘못 놀렸다가 나중에 어떻게 돌아올 줄 알고.”

찬형은 고개를 흔들었다.

“이젠 그런 일은 사양이다. 그런데 이거 왜 이렇게 안 뜯기냐?”

단호한 찬형의 태도에, 하신과 용맹도 더는 대답을 강요하지 않았다.

“이 플라스틱 칼로 째는 거야.”

사적으로 만나는 건 오래간만이라, 그들은 공식적인 자리에선 하지 못했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조금 전 스카이러너 숙소 앞에서 본 사생에 관한 이야기도 나왔다.

“그래도 밖에서 기다리는 건 그나마 양반이야.”

용맹이 흐린 눈으로 웃었다.

“숙소 안까지 들어오는 사람에 비하면.”

“안까지 들어온다고요?”

“응. 하루는 내가 화장실에 있는데, 누가 문을 똑똑 두드리는 거야. 그런데 그때 숙소엔 나밖에 없었거든? 그래서 ‘멤버들이 돌아왔나? 일이 빨리 끝났나?’ 이러면서 장난으로 ‘암호를 대라!’ 이렇게 외쳤다? 그랬더니 문밖에서 웬 여자애가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지금 생각해도 소름이 돋는지, 용맹은 젓가락을 내려놓고 두 팔을 문질렀다. 찬형이 웃었다.

“귀신이었던 거 아냐?”

“요즘 귀신은 전자자물쇠 삐리릭 누르면서 다녀?”

“그때 매니저 형이 맹이 형 얘기 듣고 현관문 앞이랑 엘베 CCTV 확인했거든? 그런데 진짜로 시커먼 모자 쓴 여자애가 비번 누르고 들어왔다 나가는 게 찍혀 있더라.”

“소오르음…!”

길우성이 제 두 귀를 손으로 툭툭툭 두드렸다. 하신이 해탈한 얼굴로 웃었다.

“전에 살던 곳에선 우리가 내놓는 쓰레기까지 뒤지는 애가 있어서, 매니저 형이 쓰레기 수거 차량 오는 시간에 맞춰서 가지고 나간 적도 있었어. 아니면 아예 챙겨가서 다른 곳에 버리거나.”

“나중에 잡혀서 한 말이 가관이었지. 분리수거 도와주려고 그랬다고.”

“지구 환경을 왜 우리 쓰레기로 지키냐고.”

“이런 얘기 들어보면 정말….”

길우성이 한율을 바라보았다.

“인기가 많다고 마냥 좋은 건 아닌 것 같다, 써한.”

찬형이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볼 땐 어스래빗도 슬슬 경계해야 할 것 같던데. 인기 붙는 속도 생각해보면. 최근에 부쩍 해외 팬들 늘지 않았어? 파라솔 뮤비 조회수랑 반응도 장난 아니던데.”

“아시아 팬콘 투어도 했겠다, 지금쯤 유럽이랑 미주 쪽에서도 연락 들어오고 있을걸? 여기엔 언제 오냐, 이렇게.”

잡담을 나누는 동안에도 음식은 하나둘 줄어들었다. 주로 듣기만 했던 한율이 가장 먼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채널 다른 데로 돌려도 돼요?”

“응.”

“…어? 잠깐. 저거 보자.”

콕콕. 다른 채널로 돌리는데, 하신이 문득 손가락으로 TV를 가리켰다. 한 케이블 채널에서 짤막하게 방송하는 연예 뉴스였다. 화면 하단에 큼지막한 자막이 떴다.

[제유, 고양고양과 작별! 감성소녀 탈퇴?!]

MC를 맡은 아이돌이 놀란 표정을 어색하게 지으며 대본을 읽었다.

[조금 전에 들어온 소식입니다. 2012년 감성소녀로 데뷔한 리더 제유 씨가, 오늘로 고양고양 엔터와 계약을 끝내고 감성소녀에서도 탈퇴한다는 공식 입장을 냈습니다.]

쯧쯧. 용맹이 혀를 차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전부터 아슬아슬해 보이더라니, 결국.”

“차라리 저게 나은 선택인 것 같아. 잘 모르는 내가 봐도 휴식이 필요해 보였거든.”

“좀 씁쓸하네요. 제유 선배님 없는 감소라…. 상상이 잘 안 가는데.”

“우성이 넌 처음 데뷔한 작품이 감소 뮤비라고 했지?”

길우성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벌써 2년이나 됐네영.”

“난 이런 소식 들을 때마다 기분이 조금 이상해. 마냥 남 일 같지 않아서 그런가?”

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일의 수명이 길지 않다는 게 실감도 나고.”

“맞아. 그리고 수명 운운하기 전에 사라지는 경우도 많잖아. 처음 대기실에서 만나 인사할 땐 오랫동안 방송국에서 마주칠 것 같았던 사람들이 몇 달, 몇 년이 지나 돌아보면 그림자도 안 보이고.”

“그 대신에 새로운 후배들이 잘 부탁한다며 인사하러 오고. 또 시간이 지나면 대다수가 사라지고…. 그래서 감소처럼 자리를 지키던 팀에서 누군가 탈퇴해 떠난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더 안타깝게 느껴지는 건가 봐.”

“솔직히.”

찬형도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빈 그릇을 정리했다.

“그래서 점점 사람 가려서 사귀게 되지 않냐? 이 바닥에 오래 있을 만한 사람인가 아닌가, 그것부터 보게 돼.”

그들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타인의 가능성을 쉽게 재단할 만큼 우리가 뭐 잘난 것도 아닌데. 아, 이제 슬슬 카페에서 음료 시킬까?”

“난 이제 가봐야겠다.”

찬형이 핸드폰을 확인하며 말했다.

“매니저 형이 근처래.”

“응.”

“조심히 들어가고, 일 수고해요.”

“어. 다들 나중에 보자. …아.”

자리에서 일어난 찬형이 문득 한율과 길우성을 돌아보았다.

“요즘 라이언 별문제 없지? 좀 심란해 보인다거나.”

“문제라면….”

한율은 고개를 저었다.

“떡볶이 먹은 거 숨기고 저녁까지 먹었다가 들켜서 혼이 난 정도?”

“별문제 없다면 다행이고. 그리고 너희 연락처 좀 줘 봐. 있는 줄 알았는데, 없더라.”

찬형은 두 사람과 번호를 교환하고 난 뒤 먼저 퇴장했다.

다음 날 아침.

“……?”

일어나자마자 습관대로 핸드폰부터 확인한 한율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원카운트 찬형이 새벽에 톡을 잔뜩 보냈다.

-[조금 전엔 애들이 있어서 말하지 않았는데, 너는 알아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톡한다.]

-[정민솔이 락뮤 PD님에게 찍힌 이유]

-[경위까지 구구절절 설명하기는 귀찮으니 요점만 말해줄게.]

-[정민솔이]

-[다른 사람은 몰라도 (락뮤)PD가 서한율 아버지가 국장이란 사실을 몰랐다는 건 말이 안 돼. 데뷔한 지 얼마 안 된 어스래빗을 스페셜 커버 무대에 세운 것만 봐도 답 나오잖아.]

-[이렇게]

-[PD님이 듣고 있는 줄도 모르고 지껄였거든.]

여기에서 나온 ‘스페셜 커버 무대’는 작년, <락뮤닷> 상반기 특집 당시 MOHE가 하기로 했다가 취소되어 어스래빗이 급히 대타로 올라간 무대였다.

데뷔한 지 두 달밖에 안 됐을 때의 일.

“…….”

한율은 천천히 눈을 끔뻑거리다가 핸드폰을 툭 덮었다. 반대로 돌아누워서 다시 잠을 청했다.

정민솔이 정민솔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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