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8화 (128/427)

* * *

11월 30일. 한율은 <스타학교> 녹화를 위해 J방송국을 찾았다. 이번 출연 목적은 다음 달 개봉 예정인 <고양이 난로> 홍보.

조유찬의 말에 따르면 <스타학교> 제작진은 평소 배우 이희우를 섭외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고 했다. 대한민국 20대 여자 배우 중 탑3 안에 들지만, 좀처럼 예능에 나오지 않는 인물인 까닭. 그래서 <고양이 난로> 개봉이 정해졌을 때 바로 이희우 측에 연락했는데, 이희우가 ‘한율이 나가면 나도 나가겠다’란 뜻을 밝혔다고.

“감사해요, 선배님. 선배님 덕에 여기 다시 출연하게 됐네요.”

한율은 <스타학교> MC들에게 인사를 마치고 이희우의 대기실을 찾았다. 이희우와는 영화 촬영이 끝난 6월 이후 처음 만나는 자리였다.

“나한테 고마워할 필요 없어. 내가 섭외 안 돼도, 한율이 너한텐 연락하려고 했다더라. 잘 지냈어?”

“전 잘 지냈어요. 선배님은요?”

“나도 뭐 잘 지냈지. 민준이랑 통화해봤어?”

“네, 주말에 잠깐. 매일 일정한 패턴으로 지내보니 스스로 성실한 사람이 된 것 같은 착각이 든다던데요.”

이희우가 어깨를 으쓱였다.

“의외로 군대 체질이었나 봐.”

“제유는요?”

여기에서 말하는 제유는 걸그룹 감성소녀에서 탈퇴한 제유가 아닌, <고양이 난로>의 ‘못난이’ 역을 맡은 고양이 이름이었다. 당시 또 다른 대역 고양이 ‘미미’는 촬영이 끝나도 부윤방 감독이 계속 키우기로 했으나, 제유는 이희우가 데려갔다. 이희우가 키우는 또 다른 고양이, ‘호빵’과 남매지간이기도.

“응. 사진 볼래?”

“네.”

이희우가 핸드폰에 고양이 사진을 띄워 한율에게 내밀었다.

“그나저나 윤방이, 최근에 많이 상심한 것 같더라.”

“왜요?”

“걸그룹 제유가 탈퇴했다고.”

“아아.”

이희우의 대기실을 나오고 나서야 한율은 자신이 사용하게 된 대기실로 향했다. 함께 대기실을 쓰는 사람은 또 다른 게스트인 이한정. 소위 ‘뚱캐’로 유명한 개그맨이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오늘 녹화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아이고, 저야말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꾸벅 인사하는 한율에게, 그도 고개를 깊게 숙이면서 바들바들 떠는 손을 내밀었다.

“아침을 덜 먹어서 손이…!”

인터넷에 나온 대로 장난기가 많은 사람인 듯했다. 한율은 그와 악수한 후 가방에서 에너지 바를 꺼냈다.

“이거 드세요.”

“이렇게 은혜로울 데가!”

한율은 옷을 갈아입었다. 고양이 미미의 사진과 ‘고양이 난로 대박’이란 글자가 프린팅된 티셔츠에 교복.

티셔츠는 <고양이 난로> 크랭크업 기념으로 배우들과 스태프에게 나눠주기 위해 WB래빗에서 제작한 것이고, 교복은 <고양이 난로>를 촬영할 때 입었던 의상이었다.

잠시 후, <스타학교> 녹화가 시작되었다.

한율은 지난번처럼 팬에게 선물 받은 토끼 안마봉을 들고, 교실로 꾸며진 세트장에 입장했다.

드륵.

“뭐지?”

문을 연 한율은 자리에 앉아 멀뚱히 저를 쳐다보는 출연자들에게 물었다.

“오늘은 왜 인사 먼저 안 해줘?”

“어? 아아…! 웬 빨간 머리 불량 청소년이 들어와서 시사교양 국장님 아들이라곤 생각 못 했지!”

두 번째 출연이라고, 출연자들은 친근한 태도로 한율을 대했다.

“한율이 오늘 레드와인으로 머리 감았니?”

“미성년잔데 설마.”

“야, 쟤 이제 차도 몰아.”

“뭐?!”

“쟤 교복 입고 운전한다니까?”

“안녀엉!”

한율의 뒤에서 이희우가 등장했다.

우당탕. 출연자들이 일제히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일어났다.

“으아니, 이게 누구야!”

“예능 첫 출연! 배우 이희우 님 아니야?!”

“그런데 뭐야. 왜 한율이랑 둘이 커플 티셔츠야?!”

“바람이야?!”

호들갑스럽게 떠드는 출연자 중, 살짝 선을 넘는 발언이 들리자 환하게 웃던 이희우의 눈빛이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잘못했어요….”

출연자 중 리더 격인 주동수가 화냈다.

“요즘 그런 무례한 무리수 발언은 시대착오적이야! 반성해!”

“네….”

이희우가 다시 활짝 웃었다.

한편 그 시각, WB래빗 엔터테인먼트.

매니지먼트 A팀이 사용하는 회의실은 조용했다. 저마다 생각에 잠긴 사람 중, 2년 차 매니저 이소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저는 좀 걱정스러워요.”

“어떤 점이요?”

“제희 씨 예쁘죠. 연기도 잘하고, 노래도 잘하고, 인기도 많고. 그런데…. 정신과에 다닌다는 소문이 있잖아요.”

같은 A팀 매니저인 김인정이 발끈했다.

“정신과가 어때서요. 우리 애들도 정기적으로나 유독 힘들 때 케어받잖아요. 그리고 요즘 누가 정신과 다닌다고 손가락질해요. 구닥다리 양반들이나 그런 소릴 하지.”

그들은 현재, 감성소녀에서 ‘제유’란 예명으로 활동하다 최근 고양고양과 계약종료와 동시에 그룹에서 탈퇴한 ‘유제희’와의 계약을 두고 회의 중이었다.

매니지먼트 A팀이 배우 관리도 맡은 까닭이었다. 비록 현재 배우는 박현우 한 사람뿐이긴 하지만.

“그게 아니라, 우리 회사가 이제 막 배우 매니지 업무를 익히는 서툰 단계잖아요. 그래서 제희 씨처럼, 휴식이 필요한 사람을 맡는 건 서로 안 좋을 것 같아서 한 발언이에요.”

“뭐가 안 좋을 것 같다는 건지 난 이해가 안 가는데요. 방금 소현 씨 입으로 말했잖아요. 연기도 잘하고, 인기도 많고, 예쁘고. 이전 회사에서도 빚을 다 갚은 지 오래라서 뭐 복잡한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매니지 계약만 하는 건데.”

“자자.”

유재용 팀장이 손뼉을 치며 주의를 끌었다.

“어제 제희 씨를 만났을 때, 제희 씨가 준비한 병원 의사 소견서를 봤습니다. 제희 씨, 그렇게 아픈 사람 아닙니다.”

무슨 일이 있는 게 분명해

유 팀장이 팀원들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약도 의사와의 상담으로 서서히 줄이는 단계인데다, 무엇보다 배우로 도약하고 싶은 의지가 강해요. 그런데도 배우 전문이 아닌 우리 회사로 연락을 준 건, 믿음 때문이라고 합니다.”

“믿음이요?”

“네. 평소 크리스탈 래빗과 어스래빗. 이 두 팀을 케어하는 우리 스태프들을 보고, 저 회사는 정말 아티스트를 우선으로, 사람으로 생각해주는 곳이라고 느꼈답니다.”

“그래도 우리가 아직 배우 쪽 업무는….”

이소현이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아이돌 케어랑 배우 케어는 전혀 다르잖아요. 그러니 아이돌을 케어하는 모습만 보고서 계약하면, 나중에 섭섭하단 말이 나올 것 같은데요.”

계속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이소현을 향해 김인정이 입을 열었다.

“준비부터 다 하고 영입하면 어느 세월에 성장합니까. 그리고 웹드 주인공, 지상파 드라마 조연을 거치면서 어느 정도 방송 연기환경에 대해 잘 알고 있을 텐데, 아이돌 케어와 같지 않다고 섭섭해하다뇨. 제희 씨를 너무 바보로 보는 거 아닙니까?”

“인정 씨, 제희 씨 팬이에요? 아까부터 왜 이렇게 감싸실까?”

“소현 씨야말로 제희 씨 안티세요? 왜 이렇게 부정적이시지?”

“저는 우리 회사 이미지를 우선으로 생각해서 이러는 거지, 제희 씨 안티 아닙니다.”

“우리 유 보살… 아니, 제희 씨 이미지가 어때서요.”

“이거 봐, 팬 맞네!”

“아니, 왜 갑자기 싸우고 그래요….”

“A팀이 좀 시끌벅적하네요. 무슨 일 있나?”

윤승우가 사무실 내 회의실 쪽을 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팔랑. 오동식 팀장이 대본을 넘기며 대답했다. 차남석에게 들어온 광고 모델 제안서였다.

“감성소녀 제유 씨가 우리 회사와 계약하고 싶다고 연락했대요.”

“정말요? 그런데 저렇게 논쟁하는 거 보면… 요구 조건이 까다로운 걸까요?”

“A팀이 직접 배우 계약을 진행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니 아무래도 신중하겠죠. 여기에 사람이 부족한 문제도 있고.”

신인 걸그룹 드림래빗도 현재 A팀이 담당하고 있었다.

드림래빗이 데뷔하기 몇 달 전 신입을 셋이나 뽑아 데리고 다니면서 일을 가르쳤으나, 정작 드림래빗이 데뷔하자 일주일 만에 한 명이 도망갔다.

새벽에 출근해서 밤에 퇴근, 두세 시간 자고 다시 음방에 출근하는, 고된 스케줄을 따라가기가 너무 힘들다고. 근무 시간을 조정해주겠다고 했으나 그는 핸드폰 전원까지 끄고 잠적했다.

다른 한 사람은 크리스탈 래빗과 드림래빗 멤버에게 치근덕거려 잘랐다.

그나마 남은 한 사람이 잘 버텨주어서 막내 직원이라고 아껴주곤 있지만, 언제까지 버텨줄지.

오 팀장이 따로 분류한 서류를 챙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믿을 만한 지원자가 빨리 와야 할 텐데 말이죠. 전 잠깐 대표실에 다녀올게요.”

“네, 다녀오세요.”

오 팀장이 사무실을 나가자, 매니지먼트 B팀 책상엔 윤승우만 홀로 남았다. 조유찬은 서한율의 <스타학교> 스케줄, 현장전은 유호의 <뮤직센터> 스케줄로 자리를 비운 상태.

윤승우는 어려운 업무 연락만은 오지 않기를 바라며 일어났다. 그러고 막 커피머신으로 가려는 순간이었다.

Rrrrr. 전화기가 울렸다.

윤승우는 작게 한숨을 내쉬곤 수화기를 들었다.

“네, WB래빗 매니지먼트 B팀입니다.”

-[평소 듣던 목소리가 아닌데, 누구십니까?]

그러는 그쪽은 누구십니까? 윤승우는 입안에 맴돈 말을 정중히 바꿔 내뱉었다.

“매니지 B팀 매니저 윤승우라고 합니다. 실례지만 어디십니까?”

-[아아.]

전화를 건 남자가 나지막하게 웃었다. 왠지 친숙하게 느껴지는 중저음의 목소리였다.

-[어스래빗 차남석의 아버지 되는 사람입니다.]

* * *

<스타학교> 녹화를 마치고 숙소로 가는 길. 거리에선 벌써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풍겼다.

“이제 2018년도 한 달밖에 안 남았네. 시간 참 빠르다. 그렇지?”

“그러게요. 형이랑 처음 만났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난 아직도 한율이 네가 직접 차를 운전한다고 생각하면 뭔가 혼란스러워. 어? 아직은 그럴 나이가 아니지 않나? 어? 아닌가?”

“다들 그렇게 말하더라고요.”

“아, 감성소녀 제유 씨 말이야.”

조유찬이 룸미러로 한율을 살피며 말을 이었다.

“어쩌면 우리 회사로 올지도 몰라.”

“정말요?”

“응. 가수가 아닌 배우로.”

트레이닝부터 시작해 앨범 제작, 홍보, 행사, 콘서트, 팬서비스 등등 신경 쓸 게 아주 많은 아이돌과 달리, 배우 관리는 상대적으로 손이 덜 가는 편이다. 여기에 제유 같은 경우엔 어느 정도 인지도와 필모그래피가 쌓인 상태.

“잘됐네요.”

“그러잖아도 드림래빗 스태프 인력도 확충해야 하는 상태라, 배우 전문 관리 인원도 따로 두자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나 봐.”

“단기간에 사업 규모가 커지는 것 같은데, 괜찮은 거예요?”

“너희들이 열심히 활동해준 덕분이지. 그리고 내년 되면 더 각오해야 할걸? 너희를 부르는 곳이 많아.”

조유찬의 목소리엔 벅찬 뿌듯함이 담겨 있었다.

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VIP 시사회에 초대할 사람은 정했어?”

영화 <고양이 난로> 개봉일은 13일. VIP 시사회는 8일 오후에 열릴 예정이었다.

“강덕심 선생님이랑 윤상진 선배님, 스타믹스의 지헌, JE 선배님이요.”

스카이러너 용맹과 하신도 ‘우리도 시사회란 곳에 가보고 싶다!’라고 말했으나, 그들은 유럽 투어 일정과 겹쳐 단념했다.

“현우는? 초대 안 했어?”

“아. 깜빡했네요.”

“한율아….”

한율은 그제야 박현우에게 톡을 보냈다.

[12월 8일 토요일 오후 5시. <고양이 난로> VIP 시사회 오실래요?]

금세 답장이 왔다.

-[참 빨리도 연락한다ㅡㅡ]

-[간다.]

[네.]

“현우 형 온대요.”

조유찬이 웃었다.

“말 꺼내기 잘했지?”

“네. 형 아니었으면 현우 형 삐치게 둘 뻔했네요.”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어느새 차는 숙소에 도착했다. 어스래빗이 사용하는 주차장 자리엔 유호와 한율의 차량이 세워진 상태라, 조유찬은 엘리베이터 앞에다 잠깐 차를 세웠다.

“어? 뒤에 오는 차… 장전 씨 차 같은데?”

“호 형도 이제 왔나 보네요.”

“그런가 보다. 아무튼 오늘 수고했어, 한율아.”

“네. 형도 수고하셨어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한율이 차에서 내리자 비슷하게 뒤차에서도 유호가 내렸다. 그들은 서로 가볍게 손을 들어 인사했다.

“오늘 녹화는 잘했어?”

WB래빗 차량 두 대가 지하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걸 보고 나서야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에 탔다.

“그럭저럭이요. 형은요?”

유호가 시선을 피하며 웃었다.

“…하하하.”

생방송 도중 자잘한 실수라도 한 모양.

“그런데 손에 든 건 뭐에요?”

“초콜릿. 해원이가 일본에 갔다가 사 온 거래.”

유호가 종이가방에서 초콜릿 상자 하나를 꺼내 한율에게 내밀었다.

“하나는 너한테 전해주라고 하더라.”

“고마워요, 형.”

“해원이는 바로 드라마 촬영장으로 간댔으니, 고맙다는 인사는 전화보단 톡으로 하는 게 좋을 거야.”

“네.”

아직 9시밖에 안 된 시간이라 숙소엔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내일 아침부터 ‘하양토끼, 까망토끼’ M/V 촬영이 있으니 다들 11시가 되기 전엔 들어올 터.

“그럼 쉬어요, 형.”

“응. 한율이 너도.”

한율은 방에 들어가자마자 이해원에게 고맙다는 톡을 보내고 욕실로 들어갔다. 씻고 나와보니 이해원에게 답장이 와 있었다. OK를 크게 외치는 곰돌이 이모티콘 하나.

한율은 핸드폰을 내려놓고 TV를 켰다. 어느새 밤 10시. TV 소리를 들으며 발코니의 화분을 돌보는데, 다른 멤버들이 숙소로 들어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서한율도 들어왔어?”

“응. 방에 있어.”

차남석과 유호의 대화도.

똑똑. 곧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네.”

열리는 문 사이로 차남석이 얼굴을 내밀었다.

“뭐 하냐?”

“화분 좀 보고 있었어요.”

“잠깐 들어가도 돼?”

“네.”

한율은 쭈그려 앉았던 몸을 일으키고 발코니에서 나왔다. 차남석이 뒤로 문을 닫으며 눈으로 한율의 방을 훑었다. 어슬렁어슬렁, 느릿느릿.

용건이 있지 않은 한 굳이 방을 찾아오진 않는 아이라, 한율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할 말 있어요?”

“뭐, 그냥.”

한율의 책장을 살피던 차남석이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이 멈춘 곳은 발코니 창 너머로 파릇파릇하게 자란 각종 허브.

“많이 자랐네. 가까이에서 봐도 돼?”

“네.”

발코니로 나간 차남석은 화분 앞에 쭈그리고 앉아 허브를 살피다가, 얼굴을 가까이 대고 향을 맡았다.

어딘지 모르게 기시감이 느껴지는 뒷모습이었다.

‘…아.’

이전 숙소에 살았을 때, 외출 후 돌아온 길우성이 난데없이 허브 향을 킁킁거리며 맡았던 때가 떠올랐다.

『허브 향에 사람 마음을 진정시키는 효과가 있다 그래서 냄새 맡는 중.』

“향 괜찮은데? 이거 키우기 어렵냐?”

1년 넘도록 관심을 두지 않다가 이제 와서?

“형이 지금 살피는 건 어렵지 않아요. 원하면 작게 옮겨서 하나 줄까요? 창가에 둘만 한 사이즈로.”

“그러면 나야 고맙지.”

“그럼 형이 알아서 화분 사 와요. 흙은 많으니 신경 쓰지 말고.”

차남석이 몸을 일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

다음 날 12월 1일. ‘하양토끼, 까망토끼’의 두 번째 디지털 싱글 <루돌프와 산타토끼> M/V와 앨범 재킷 촬영이 진행될 실내 스튜디오. 작년 <눈밭의 산타토끼>처럼 이번에도 음원 수익이 전부 기부될 예정이라 세트는 간소했다.

“그럼 어스래빗은 올해 봉사 활동이랑 플리마켓 안 하는 거야?”

“컴백 기간이랑 겹쳐서, 내년 2월에 하기로 했어.”

“설 기념으로?”

“응.”

다른 사람의 개별 촬영이 진행되는 동안, 준비가 끝난 이들은 어슬렁거리며 촬영을 구경하거나 소파에 앉아 잡담을 나누었다.

“눈썰매 타러 가고 싶당.”

“오빠, 정말로 제유 언니 우리 회사로 와요?”

“아직 조율 단계니까 쉿.”

한율은 촬영이 진행 중인 세트장으로 가서 구경했다. 차남석과 유호가 산타 복장을 한 루돌프 인형을 사이에 두고, 현장에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굉장히 밝은 얼굴로.

“남석 씨 좀 이상해.”

스윽. 길우성이 조용히 다가와 한율의 옆에 섰다.

“뭔가 일이 있는데 없는 척하는 것 같단 말이지.”

“그래?”

“평소엔 내가 헛소리하면 구박으로 장단 맞춰주던 사람이, 어제는 내내 시큰둥했단 말이지. 그런데 본인 힘든 건 워낙 내색하지 않는 스타일이라 잘 모르겠단 말이지.”

“어제 뜬금없이 방에 찾아와 허브를 살피긴 하더라.”

“……!”

길우성이 눈을 부릅뜨며 한율을 쳐다보았다.

“역시 무슨 일이 있는 게 분명해!”

<루돌프와 산타토끼> M/V 및 앨범 재킷 촬영은 새벽 2시가 되어서야 끝났다.

“수고하셨습니다!”

어스래빗 멤버들은 밴 두 대에 넷씩 나눠탔다.

길우성이 차남석을 따라 현장전의 차에 타서, 한율도 그 차에 올랐다. 졸려서 멍한 얼굴의 강보배도 탔다.

“남석아, 한율아.”

차를 출발시키며 현장전이 말했다.

“너희 둘은 내일 사무실로 와. 팀장님이 스케줄 문제로 할 얘기 있대.”

“네.”

차남석은 대답하고 난 뒤 좌석에 편히 몸을 기대곤 눈을 감았다.

한율은 내내 무음으로 뒀던 핸드폰을 살피다 문득 차남석을 쳐다보았다. 누가 요즘 아이들 아니랄까 봐, 길우성과 강보배도 피곤한 눈을 끔뻑거리며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평소라면 차남석도 그랬으나, 오늘은 촬영 도중 쉬는 시간에도 그가 핸드폰을 만지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지금도 피곤함에 잠을 청하는 척 눈을 감고 있지만, 생각이 많은지 미간을 잔뜩 구기고 있었다.

“…….”

다음 날 아침. 한율은 차남석과 길우성이 사용하는 방을 찾았다. 길우성은 세수하러 가고 없었다.

“형. 출근 전에 화분 사러 갈래요?”

“오늘? 지금?”

“네. 마침 저도 살 게 있어서 차를 끌고 갈 생각이거든요.”

차남석이 가만히 한율을 바라보다가 웃었다.

“나도 네 차 한번 타보는 거냐?”

기사로 내주세요

“뭐? 서한율이 차를 끌고 간다고? 나도!”

차남석과 따로 차를 타고 출근하겠다는 말에, 박가람이 손을 번쩍 들었다.

“동생 차 한번 얻어 타보자!”

“형 오늘 생일이잖아요.”

“그게 무슨 상관….”

한율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안 돼요.”

“…그렇군!”

자신을 위한 생일선물을 사러 간다고 받아들인 것인지, 박가람이 이상한 얼굴로 웃었다.

“흐흐. 운전 조심히 하고.”

“네.”

잠시 후. 한율은 차남석과 꽃집에서 산 물건을 차 트렁크에 실었다. 다른 가게에서 적당히 고른 박가람의 생일선물은 뒷좌석에.

탁탁. 가볍게 손을 턴 차남석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상가가 밀집된 거리였으나 일요일 이른 아침 시간대라 거리엔 인적이 드물었다.

“배고프다.”

“회사 가기 전에 뭐 좀 먹고 갈까요?”

“그래.”

두 사람은 근처에 있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자리에 앉아 편히 모자를 벗자, 식당 직원이나 손님들은 두 사람을 신기하게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요즘은 남자애들도 참 고와. 그것도, 항상 닮은 애들끼리 다니더라고.”

“끼리끼리라잖아.”

누구도 TV에 나오는 아이돌이라곤 생각지도 않는 눈치였다. 알아차려도, 아이돌에게 관심이 있지 않은 한 크게 호들갑을 떨지 않는 사람이 대다수.

“형은 뭐 먹을래요?”

“고등어구이 정식. 넌?”

“저도 같은 거요.”

음식을 주문하고 기다리는 동안, 차남석은 테이블에 팔꿈치를 세우고 턱을 괸 채 TV를 보았다. 그러다 미간을 구겼다.

“미친 거 아냐?”

“……?”

차남석이 TV를 가리켰다.

“가해자가 법원에다 공탁금 낸답시고, 변호사 통해서 피해자 이름이랑 주민등록번호, 주소까지 알아내서 피해자한테 찾아갔단다. 합의해달라고. 그것도 성범죄자 새끼가.”

한율은 고개를 돌려 차남석이 보는 뉴스를 보곤 한숨을 쉬었다.

“아침부터 불쾌한 뉴스네요.”

“우리나라는 범죄자한테 왜 이렇게 관대한지 모르겠다. 피해자가 합의해주기 싫어서 안 한 건데 공탁금 냈다고 감형해주질 않나…. 물론 다 그런 건 아니겠지만.”

차남석이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법이 너무 물러. 개인정보 관리도 너무 허술하고.”

“동감이에요.”

“식사 나왔습니다.”

직원이 테이블에다 음식을 내려놓았다. 두 사람은 언제 인상을 썼냐는 듯 반사적으로 환한 미소 지었다.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아침을 먹고 나선 카페에 들러 커피를 사고 차에 탔다.

“서한율.”

철컥. 차남석이 안전벨트를 매며 말했다.

“이제 슬슬 말할 때도 되지 않았어? 화분 핑계로 따로 나오자고 한 이유가 있을 거 아냐.”

한율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대답했다.

“그냥요. 안 그러던 사람이 갑자기 허브에 관심을 두는 것도 그렇고, 길우성도 형 상태 이상하다 그래서요. 멤버 중 형네 집안 사정 들은 것도 나뿐이잖아요.”

차남석이 창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한숨을 쉬었다.

커피를 한 모금 천천히 마시고 나서야 그가 대답했다.

“아버지가, 나 빚 어느 정도 갚았는지 그거 알려달라고 회사에 전화했다더라. 정확한 액수는 본인과 어머니 외엔 알려줄 수 없다고 했더니 순순히 끊었다곤 하는데, 느낌이 안 좋아서. 온갖 생각도 다 들고.”

“이런 거 물어봐도 되는지 모르겠는데.”

“뭔데?”

차남석이 한율을 바라보았다.

“형네 아버지는 뭐 하는 분이에요?”

“몰라, 나도. 이것저것 사업하다가 말아먹는 걸 반복해서 빚만 잔뜩 있다는 것 외엔. 할아버지에게 들은 바로는 최근엔 주식인가 뭔가 한다던데….”

차남석이 질린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답이 없는 사람이야. 어쨌든, 뭐라도 차분하게 마음 가라앉힐 수 있는 취미라도 가지면 어떨까 생각하던 차에, 네 화분이 생각나더라고.”

“아직까진 금전적 요구를 받은 적이 없는 거죠?”

“어. 하지만 슬슬 SNS에다 올릴까 생각 중이야. ‘누구든 제 이름을 거론하며 돈을 빌려달라거나 투자를 부추기는 사람이 있으면 절대 넘어가지 않도록 주의하세요, 저는 책임 안 집니다.’라고.”

“좋은 생각인 것 같네요. 팬들은 혼란스러워하고 기자들은 좋다고 취재를 나오겠지만.”

“그래도 나중에 큰 피해자가 발생하는 것보단, 사전에 차단하는 게 낫지 않을까.”

한율은 고개를 끄덕이며 커피를 컵홀더에 끼웠다. 한율이 시동을 걸자 차남석도 커피를 한 모금 마시더니 컵홀더에 끼웠다.

“그런데 팀장님은 왜 너랑 나랑 같이 부른 걸까? 뭐 들은 거 있어?”

한율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잠시 후, WB래빗 사무실 내 회의실.

오 팀장이 한율과 차남석을 나란히 앉혀두고 말했다.

“SBC <달리는 예능> 게스트로 섭외가 들어왔습니다.”

“<달리는 예능>이요?”

차남석이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달리는 예능>은 일요 예능 중 시청률이 가장 높은 프로그램으로, 해외에서도 인기가 많아 팬덤이 형성되어 있다.

“혹시 한율이 때문에 저도 섭외된 거예요?”

오 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희우 씨가 영화홍보로 예능에 출연한다는 소식이 알려지자마자, 그쪽 제작진에서도 이희우 씨에게 연락했다고 하네요. 워낙 예능 쪽으로 얼굴을 비추지 않던 사람이라. 한율인 그 영화의 주연이라 함께. 하지만 한율이가 아이돌이기도 하니, 같은 어스래빗 멤버인 너도 섭외하고 싶다네요.”

“존대인지 반말인지 확실히 해주시겠어요, 팀장님?”

“내 마음입니다. 어쨌든, 남석이 넌 어때?”

차남석이 씨익 웃었다.

“당연히 나가야죠. 이게 얼마나 좋은 기횐데.”

“제작진 미팅은 수요일 오전에 잡혔고, 녹화는 다음 주 월요일인 10일. 방송 예정 날짜는 16일.”

오 팀장은 <달리는 예능> 제작진과 만났을 때 어떤 점을 유의해야 하는지부터 시작해서, 녹화할 때 선보일 짤막한 PR 시간에 관해 회사에서 생각한 의견을 두 사람과 나누었다.

“혹시 모르니 너튜브나 공홈에서 하이라이트 영상 보면서 복습도 하고. 한율이 넌 내일 녹화 있으니까 오늘 너무 늦게까지 회사에 있진 마.”

“네. 그럼 전 먼저 가볼게요.”

한율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 팀장 앞에 아직 열리지 않은 바인더와 대본이 있지만, 눈치껏 자신의 것이 아니란 걸 알아차리고.

차남석도 오 팀장에게 따로 할 말이 있을 테니 말이다.

“그래. 가람이한테 점심 뭐 먹고 싶냐 물어보고.”

“네.”

연습실로 내려가자, 멤버들은 기대에 찬 눈으로 무슨 섭외가 들어왔냐고 물었다. 간단히 ‘달리는 예능’이라고 대답하자, 멤버들은 자기 일처럼 좋아했다.

길우성이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으오오…! 지상파 대세 프로그램에 멤버가 둘이나 나가다니이!”

“잘 키운 연기 천재 멤버, 열 아이돌 안 부럽다. 음음.”

“언제 방송되는 거야?”

“16일이요.”

“미친, 우리 컴백하고 바로 이틀 후네? 시기 대박인데?”

“건우가 욕하는 거 오래간만에 듣는다.”

“아, 나도 모르게.”

“그런데 남석 씬? 다른 섭외 얘기 중?”

한율은 연습용 옷으로 갈아입기 위해 캐비닛을 열었다.

“아마도?”

차남석은 오 팀장에게 광고 모델 제안서 및 드라마 대본을 받고 설명을 들었다.

“…그리고 남석이 너도 따로 하고 싶은 작품이 있으면 언제든 말해도 돼.”

“아니요. 서한율도 당분간 연기 활동을 쉬는데, 제가 시간이 오래 걸리는 스케줄을 잡으면 단체 활동에 지장이 생기잖아요. 조금씩 물 들어오고 있으니 멤버들이랑 같이 노 저어야죠.”

드라마 대본을 도로 내밀자, 오 팀장이 입가를 올리며 받았다.

“그래.”

“그럼 일 얘기는 끝난 건가요?”

“음. …그런데 남석아.”

오 팀장이 콧잔등에서 흘러내린 안경을 올렸다.

“혹시 할아버님께 연락받은 거 없니? 어제랑 오늘.”

“아니요. 그건 왜….”

“오늘 아침에 어떤 사람에게서 전화가 왔는데….”

평소답지 않게 뜸을 들이는 오 팀장의 모습. 차남석은 입을 다물고 오 팀장을 바라보았다.

“흥분하지 말고 잘 들어. 그 사람이, 너희 아버지에게 돈을 빌려줬다더라.”

“…….”

그 순간 차남석은 눈을 질끈 감으며 속으로 심호흡했다.

“네 어릴 적 사진, 그리고 네 방송 활동 사진이나 기사를 보여주면서 ‘내가 얘 아버지다. 해외에서 공연 한 번 하면 얼마나 큰 수익이 들어오는지 아느냐. 그러니 금방 갚을 수 있다.’ 이렇게….”

어제 전화해서 빚이 얼마나 남았는지 확인하려 했던 것도 이것 때문이었을까.

차남석은 언젠가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현실로 닥치자 속에서 분노가 울컥 올라왔다.

어스래빗이 본격적으로 알려지는 이 중요한 시기에.

“얼마나 빌렸답니까?”

“3천만 원.”

“하….”

차남석은 어이없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앞이 까매질 정도로 큰 액수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적은 액수도 아니었다.

“남석이 네가 대신 갚을 의무는 없는 돈이야. 상대도 그걸 모를 리가 없어. 하지만 일부러 회사로 연락을 했다는 건….”

“기사로 내주세요, 팀장님.”

“…뭐?”

아무리 억눌러도 새어 나오는 감정. 차남석의 눈시울이 점점 붉어졌다.

“기사로 내주세요. 아버지를 포함해서 누구도 날 담보삼아 그런 짓을 더 못하도록, 그딴 사탕발림에 누구도 넘어가지 않도록.”

“남석아….”

차남석은 일부러 소리 내어 웃었다.

“잘됐네요. 그러잖아도 서한율한테 그 얘기 했었거든요. SNS에다가, 누구든 내 이름 들먹거리면서 돈 빌려달라고 하면 넘어가지 마세요…라고 적어야지. 그런데 벌써 피해자가 나와버렸네요? 더 일찍 공지해야 했는데….”

오 팀장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차남석을 바라보며 물었다.

“혹시 예전부터 이런 일이 생길 걸 예상했던 거야?”

“네. 할아버지한테도 만약 이런 일이 생기면 법적으로 처리할 거라고 얘기했어요. 친척들한테도, 내가 TV에 나온다고, 내 이름 팔아서 허튼짓하면 바로 경찰서나 변호사. 둘 중 한 곳의 전화를 받게 될 거라고 경고도 했고. 아버지는 정말 그렇게까지 하겠나 생각하고 일을 벌인 모양이지만….”

차남석은 뒷말을 흐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툭. 오 팀장이 대본을 테이블에 세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희 할아버님, 그리고 어머니에게 연락할게.”

“네. 그럼 이만 가봐도 될까요?”

오 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차남석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고하세요, 팀장님.”

웃으면서 회의실을 나온 차남석은 다른 직원들에게도 묵례하며 사무실을 가로질렀다.

아무도 없는 복도.

차남석의 얼굴에서 억지로 만들어낸 웃음기가 사라졌다. 많은 생각과 감정이 담긴 한숨이 아주 낮게 퍼졌다.

“하…….”

그날 밤, 어스래빗 숙소.

내일 예능 녹화가 있어, 한율은 다른 멤버들보다 일찍 들어왔다. 차 트렁크에 놓았던 물건을 챙겨오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일단 허브부터 옮겨심고.’

방으로 들어가 외투만 벗어놓고 발코니에 신문지를 깔았다. 장갑낀 손으로 차남석이 골랐던 허브를 꺼냈다.

포기나누기하고 오늘 새로 산 두 화분에다 옮겨 심는 데엔 얼마 걸리지 않았다.

한율은 뒷정리를 깔끔하게 하고 나서 차남석과 길우성이 사용하는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책상 구석에 화분을 놓고 나오려는데, 문득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

한율은 그 물건으로 손을 뻗었다.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인형인데.’

전형적인 영국 신사의 옷과 모자, 지팡이까지 들고 있는 작은 토끼 인형이었다. 브랜드 로고가 그려진 작은 탭이 달린 걸로 보아 기성품.

‘그냥 스치듯 본 거겠지.’

한율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인형을 제자리에 놓았다. 팬들이 보내는 엄청난 양의 선물 중, 언젠가 스치듯 봤던 거라 생각하며.

그러고 몸을 돌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우뚝.

한율은 걸음을 멈추고 다시 인형을 돌아보았다.

생각이 났다.

본래 세상, 포로로 잡았던 지구인 아이들.

그중 한 아이가 소중히 품에 안고 있던 것과 똑같은 인형이었다. 죽을 때까지 몸에서 떼어놓질 않아, 그 아이의 무덤을 만들어준 병사가 마지막으로 봉분에다 인형을 올려놓던 광경이 떠올랐다.

“…….”

한율은 한참 동안 그 인형을 바라보다,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이 호구야!

“모두한테 할 얘기가 있어.”

12월 6일. <주말아이돌> 녹화와 연습을 끝내고 숙소로 돌아왔을 때, 차남석이 멤버 전원을 불렀다.

“뭔데?”

“남석 씨 사고 쳤어?”

“일단 앉아.”

장난스럽게 물었지만 돌아오는 차분한 반응에, 길우성은 입을 다물고 얌전히 소파에 앉았다. 멤버가 모두 앉을 정도로 소파 자리가 넉넉한 게 아니라서, 한율은 팔걸이에 걸터앉았다.

차남석의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지 며칠. 차남석은 평소와 다름없이 행동하고 오늘 녹화할 때도 내내 웃었다.

그러나 괜히 연습생 시절부터 몇 년을 동고동락한 사이가 아니었다. 다른 멤버들도 슬슬 차남석에게 뭔가 일이 있다는 걸 눈치채고 있었다.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이, ‘그러는 척’하는 것 같다고.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제야 털어놓을 마음이 생긴 거야?”

“너무 나쁜 소식은 아니지?”

차남석이 멤버들을 돌아보며 대답했다.

“내일 기사가 하나 나갈 거예요.”

“기사?”

고개를 끄덕인 차남석은 최근 자신에게 벌어진 일을 천천히 말했다. 그리고 슬픔과 안타까움, 분노 등. 제각기 다른 감정으로 얼룩지는 멤버들의 얼굴을 보며 담담하게 덧붙였다.

“기사로 보는 것보단, 나한테 먼저 듣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다음 날, 어스래빗이 RMMA 공연장에 발을 디딘 시간. 포털사이트 연예뉴스란 메인에 기사 하나가 올라왔다.

[어스래빗 차남석 의미심장 SNS “돈 빌려주지 마세요.”]

[2013년 에서 뛰어난 노래 실력을 선보이고 2016년 <보컬리스트 시즌3>를 거쳐 2017년 보이그룹 어스래빗으로 데뷔하며 차곡차곡 인지도를 쌓은 차남석이 개인 SNS에 의미심장한 글을 올렸다.

비가 내리는 도심 사진과 함께 차남석은 “절 아는 분들, 모르는 분들도 제 이름을 검색하면 이 글을 볼 수 있겠죠. 부탁드립니다. 가족을 포함해 누구든 절 거론하며 돈을 빌려달라거나 투자를 권유하면 절대 빌려주지도, 넘어가지도 마세요.”라고 적었다.

(사진=차남석 SNS)

(사진=WB래빗 엔터테인먼트)

WB래빗 관계자는 해당 SNS 내용에 대해 아티스트의 민감한 가정사라고 말을 아꼈으나 앗싸일보의 단독취재 결과, 차남석의 아버지 A씨에게 3천만 원을 빌려준 B씨가 오랫동안 돈을 돌려받지 못하자, 아들인 차남석에게 대신 갚으라며 WB래빗으로 연락한 사실이 드러났다.

차남석은 회사와 변호사를 통해 아버지가 B씨에게 빌린 3천만 원을 변제하기로 했으며…(중략).

한편 차남석은 9살 부모님의 이혼 후 할아버지의 집에서 지냈으며, 아버지와는 평소 전화 통화는커녕 명절에 얼굴을 보는 게 고작일 정도로 소원한 사이라고 알려졌다.]

-아니 그 돈을 왜 갚아줘, 이 답답아ㅅㅋ야!!!!!!!!!!!!!

-B씨 사정도 안 됐는데 좀 그렇다; 아무리 연예인이라도 고작 스무 살짜리 애한테 빚 대신 갚으라고 연락하냐

ㄴ님이었으면 다를 거 같음?? 저 3천이 어떤 돈인지 모르잖음 정말 급하게 필요한 병원비일지도 모르는데

-돈은 빌린 놈이 갚아야지

-“가족을 포함해 누구든 절 거론하며” <이게 핵심인듯

ㄴ아버지란 작자가 아들 팔아서 돈 빌렸네

-남석이 저 빚 안 갚아도 되는 건데... 본인도 오죽 답답했으면 SNS에다 저런 글을 올렸을까요ㅜㅜ

ㄴ돈 빌려주고 못 받은 B씨가 더 큰 피해자죠.

-부모 빚을 자식이 갚는 건 당연한 거다. 부모가 없으면 너희도 없는거여~~

-멍청아!!!!!!!!! 한 번 갚아주면 또 대신 갚아주겠지 하고 또 일 저지른다고 답답한 ㅅㅋ야!!!!!! 아오 내가 다 열받네ㅡㅡ

-3천을 그냥 갚아버리네ㅎㅎ 이러니 개나소나 연예인하겠다고 덤비지

ㄴ남석이 아직 정산받지 못한 상태입니다. 저 돈은 드라마 출연료랑 해외투어 수익의 차남석 몫(빚 갚을 예정인 돈)에서 나간다고 합니다... 한 마디로 회사에 갚아야 할 빚이 3천만 원 더 늘어난 거

ㄴ개나 소? 저 얼굴이 개나 소로 보임???(충격) 와 원댓은 혼자 어떤 세상에 살고있는 거지ㄷㄷㄷ;;

-법적으로 아무리 봐도 이건 얘가 대신 갚을 의무가 전혀 없는데???? 생긴 거 답지 않게 멍청한가;

ㄴ그걸 모르겠냐? 변호사까지 끼고 갚아주는 건데? 그런데 기사 내용에 담긴 당사자 심정도 못 읽고 멍청한가 ㅇㅈㄹ

-TV로 보면서 저런 아들을 둔 부모는 얼마나 자랑스러울까 생각했는데... 애 상황이 너무 안쓰럽고 안타깝네요... 부모 노릇 제대로 못 하면 애 발목이라도 잡지 말라고...ㅜㅜ

-차남석 님이 ‘착한 아들’ 타이틀과 대국민 동정표를 얻으셨습니다! (인지도+5) 짝짝짝!

ㄴ문틀 모서리에 새끼발가락이나 찧어라

ㄴ남의 가정사 가지고 놀리면 재밌냐?

-안녕하세요. 남석이랑 초중 동창에 같은 동네 살았던 스무 살 대학생입니다. 남석이가 중학생 때 연습생 되고 서울로 전학 가기 전까지 저는 물론이고 당시 학교 친구들, 동네 사람들 모두 남석이 부모님 본 사람 거의 없습니다. 어린이날에 남석이가 할아버지 따라 밭일 도우면서 노래 부르는 걸 본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네요ㅋ 모쪼록 지금보다 더 크게 성공하기를 바랍니다.

ㄴ맴찢이다 진짜......

ㄴ그래도 양육비는 보내주지 않았을까?

ㄴ지금껏 학원을 한 번도 다닌 적 없다는 걸 보면 형편이 넉넉하진 않았던 것 같아요.

ㄴ부모 대체 뭐 하는 작자들이냐

-다 모르겠고, 진짜 잘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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