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수고하셨습니다!”
어스래빗은 커버 무대와 <파라솔> 리허설과 모니터링을 마치고 무대에서 내려왔다. 지켜보던 매니저들이 다가와 수건과 물을 건넸다.
“두 팀 후에 스페셜 퍼포 리허설 시작하니까 건우랑 우성이는 여기에서 쉬고, 나머진 대기실로 돌아가자.”
“네.”
그들이 자리를 옮기려 하자, 리허설을 위해 대기 중이던 다른 아이돌들이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수고하셨습니다!”
그중 몇 명의 시선은 조심스럽게 차남석을 스쳤다. 차남석은 예의 바르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꾸벅였다.
“네, 감사합니다. 저흰 먼저 가보겠습니다.”
다른 어스래빗 멤버들 역시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인사했다.
“리허설 수고하세요!”
“먼저 가보겠습니다, 수고하세요!”
지금쯤 실검에 차남석의 이름이 올라갔을 테지만, 딱히 잘못한 게 없으므로 눈치 볼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어젯밤에 미리 감정적으로 날뛴 멤버도 있고.
『너 전에 나한테 호구 머저리라고 했어! 하지만 아냐! 네가 더 호구 머저리야, 이 호구 새끼야!』
라이언이 그렇게 화내는 모습을 보는 건 정말 오래간만이었다. 박가람은 그동안 얼마나 고생이 많았냐며, 훌쩍거리면서 차남석을 끌어안고 등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차남석은 부담스럽다며 밀어냈다.
그 뒤엔 유호와 이건우가 차남석을 방으로 데리고 들어가 진지하게 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나저나 괜찮겠지?”
“뭐가?”
강보배가 무대 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지나가는 스태프들에게 들리지 않도록 작은 목소리로.
“스페셜 퍼포 무대. 마지막 연습 날에 우성이 혼자 갔다가, 분위기 엄청 살벌해서 무서웠다 그랬잖아.”
마지막 연습이 있었던 날, 이건우는 낚시 예능 프로그램 녹화가 있어 빠졌었다.
“뭐 별일이야 생기겠어?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서 조금이라도 다퉜다간 어떻게 될지 뻔히 다 알 텐데.”
박가람의 말에 차남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싸워도 다 끝나서 싸우겠죠.”
“나중에 애들 오면, 퍼포 무대 끝나자마자 살벌한 애들한테서 떨어지라고 주의시켜야겠다.”
어스래빗은 한참을 걷고 나서야 대기실에 도착했다. 데뷔 연차가 낮을수록 무대와 대기실 거리가 먼 까닭이었다. 이는 음방에서도 마찬가지였으나, 라이언은 뚱한 얼굴로 투덜거렸다.
“원제로 대기실보다 멀어.”
“걔넨 뮤닷의 아들이잖아.”
“Yo! 또 만났네, 친구들?!”
박가람이 함께 대기실을 사용하게 된 V12 멤버들에게 요란스럽게 인사했다. 리허설 전에도 인사해놓고.
조유찬이 테이블에 쌓은 도시락과 음료를 가리켰다.
“얘들아, 밥 먹어.”
“난 우성이랑 건우 오면 그때 먹을게요.”
“난 지금 먹어야지.”
유호와 박가람을 제외한 멤버들이 먼저 자리에 앉아 도시락을 열었다. 한율은 밥을 먹으면서 한 손으로 핸드폰을 보았다. 예상대로 포털사이트 실검에 [차남석], [차남석 아버지빚], 연관 검색어에 [돈빌려주지마세요]가 올라와 있었다.
“형 기사 난리 났네요.”
차남석에게 보여주자 그는 어깨를 으쓱이곤 나무젓가락을 뚝 뗐다.
“난리 나라고 내보낸 거니까.”
“이 동창이라고 주장하는 사람 댓글, 사실이에요?”
“글쎄. 어린이날에도 할아버지 일을 돕기는 했는데…. 난 솔직히 내 처지가 불쌍하다고 생각한 적 없거든? 그런데 사람들이 날 너무 안쓰럽게 보는 것 같다. 너도 그러냐?”
“본인 잘못이 아닌데 하루아침에 거액의 빚이 늘어난 건 좀?”
“아니, 어린애가 할아버지랑 단둘만 사는 거 말이야.”
한율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본래 세상, 그는 걸음마를 떼기도 전 부모를 모두 잃었다. 그리고 눈이 먼 조모 손에서 자랐다.
“아이가 건강하고, 무엇보다 본인이 불행하지 않다고 느끼면 그만 아닐까요.”
“역시.”
차남석이 씨익 웃었다.
“넌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
이건우와 길우성은 한 시간이 지나서야 대기실로 들어왔다. 상당히 진이 빠진 모습으로.
“둘 다 리허설 수고했어.”
“앉아서 밥 먹어. 조금 식기는 했지만, 호 형이랑 가람이 형도 두 사람 기다리느라 안 먹고 있었어.”
“큰형….”
길우성이 감격한 얼굴로 유호를 가볍게 안았다가 떨어졌다. 옆에서 VJ가 카메라로 찍고 있었다.
“난 우리 팀 멤버들이 너무 좋아. 다들 착하고 순둥순둥해.”
대체 스페셜 퍼포 리허설 때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럴까. 유호는 당장이라도 묻고 싶은 얼굴이었지만, VJ가 있어서 그런지 말을 아꼈다.
“그래, 있을 때 잘해.”
“…뭔 뜻이죠, 그건.”
“순둥순둥하게 있을 때 잘하라고, 막내님아.”
“왜 그래요, 큰형. 요즘엔 장난도 잘 안 치는데.”
“내 작업실 인형에다 그런 짓을 하고 간 게 누구더라?”
“우성이가 뭘 했는데?”
유호가 핸드폰을 꺼내 이건우에게 사진을 보여주었다. 근처 의자에 앉아 커피를 마시던 한율도 일어나 사진을 보았다. VJ도 다가왔다.
유호가 사용하는 작업실 미니 냉장고 위. 새하얀 토끼 인형이 와인을 끌어안은 모양새로 앉아있었다. 머리에 넥타이를 두르고.
이건우가 큭큭 웃었다.
“멀쩡한 인형을 왜 술 취한 회사원으로 만들어놨냐. 꼭 와인바에서 마시던 와인 그대로 들고나온 것 같네.”
하필 토끼 인형 볼이 핑크빛으로 물들어 있어서 더 그렇게 보였다.
“아니, 옷걸이에 넥타이가 걸려 있기에 심심해서.”
“이 사진 SNS에 올리자.”
어스래빗 멤버들이 소소한 걸 가지고 키득거릴 때였다.
“티모? 너 왜 그렇게 젖었냐?”
활짝 열려있던 대기실 문으로 V12 멤버, 티모가 들어왔다. 머리카락과 얼굴, 상의가 흠뻑 젖은 채.
티모가 V12 매니저에게 손짓했다.
“형, 수건 좀 주세요.”
“뭐야? 너 꼴이 왜 이래?”
V12 매니저가 놀란 얼굴로 그에게 수건을 가져다주었다. 길우성과 이건우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티모 또한 RMMA 스페셜 퍼포먼스 팀인 까닭이었다.
조유찬이 눈치껏 VJ에게 카메라를 꺼달라는 신호를 보냈다.
카메라가 내려가자 티모가 수건으로 머리와 얼굴을 닦으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그가 길우성과 이건우에게 키득거리며 작게 말했다.
“내 한 몸 바쳐 싸움을 막았다.”
“음료수라도 대신 뒤집어쓴 거야?”
“어? 비슷해.”
길우성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게, 우리랑 같이 왔으면 좋았잖아.”
티모가 히죽 웃었다.
“코우 형이랑 할 얘기가 좀 있었거든. 어쨌든 이제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야. 내가 대신 맞으니까 두 사람이 사과하면서, ‘이게 이렇게까지 할 일인가?’ 하고 현타 맞은 얼굴을 하더라고.”
“그래, 네가 큰일 했다.”
“감기 걸릴 수 있으니까 머리 더 꼼꼼하게 잘 말리고, 옷 갈아입어.”
이건우가 티모의 팔을 토닥거렸다. 티모는 웃으면서 고개를 돌렸다. 그가 머리카락을 말리기 위해 거울 앞에 앉자, 그제야 V12 멤버 몇 명이 다가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한율은 말없이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미간을 살짝 구겼다.
‘저 녀석, 어딘가 좀 이상한데.’
티모를 그리 자주, 오래 본 건 아니다. 그러나 한율은 왠지 모를 위화감을 느꼈다.
‘원래 저렇게 웃음이 헤프고 들뜬 성격이었던가?’
속단은 금물
풀썸은 다음 달이면 데뷔 4년 차에 접어들지만, 이제야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 6인조 보이그룹이었다. 일본 음반 차트에서 1위를 한 게 기사화되고, ‘이런 아이돌이 있었나?’ 노래를 들어본 사람들이 묻힌 명곡이 많다고 입소문 내주며 뒤늦게 빛을 발하기 시작한 케이스.
여기에 최근 국내에서 발매한 앨범이 좋은 성적을 거두며 처음으로 RMMA에 초대를 받았다. 그래서 풀썸 멤버는 모두 잔뜩 들떠 있었다.
“정말 우리가 RMMA에 왔어요, 여러분.”
“이게 정말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겠습니다. 후보에 오른 것도 영광스러운데, 무대에도 올라가다니.”
“가슴이 너무 벅차서 심장이 사라질 것 같아.”
“무슨 소리죠, 그게?”
“너무 기뻐서 나오는 아무 말입니다.”
풀썸과 같은 대기실을 사용하는 퍼스트라인 멤버들은 셀캠을 들고 신나게 촬영 중인 그들을 보며 웃었다.
“그래봤자 상은 될 놈들만 챙겨가고 우리는 들러리 신세일 뿐인데.”
“쟤네도 그거 모르겠냐? 후배인 토끼 놈들이랑 원제로 놈들보다 무대 순서가 앞인데?”
풀썸의 리더 효운은 그들의 말을 무시하며 카메라를 향해 웃었다. 퍼스트라인이 몇 달 먼저 데뷔한 선배인데다, 상대하고 싶지 않은 인성 소유자가 태반인 까닭이었다.
“그런데 쟤 서한율이랑 친하지 않냐?”
“방송 한번 같이했다고 친한 척하는 거지. 정말 친한 후배면 이런 때에 대기실에 놀러 오지, 이렇게 조용히 쌩까겠냐?”
‘저것들이?’
자신이 그들의 말을 무시하자 일부러 더 속을 긁는다는 걸 눈치챘지만, 그런데도 효운은 울컥했다.
서한율과는 작년, 케이블 예능 <여름소풍>을 함께 찍으며 연락처를 교환하고 SNS 친구 사이가 되었다. 그러나 서한율이 이런저런 활동으로 바쁜 걸 보고 방해될까 봐 자주 연락하지 않았다.
그래도 방송에서 마주치면 반갑게 인사하고, 가끔 서로의 SNS에 좋아요를 누른다. 명절에는 안부 인사를 전하고, 얼마 전 일본에서 풀썸이 1위를 했을 땐 서한율이 축하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
‘애가 방송에 나오는 것과 달리 무뚝뚝하고, 대기실에 놀러 다닐 정도로 사교적인 성격이 아니라서 그런 거라고, 이것들아!’
효운은 그렇게 반박하고 싶은 걸 꾹 참았다.
서한율과 친한 블블의 민준도, 스카이러너의 용맹이나 스타믹스의 지헌도 서한율이 나서서 찾아간 적은 없다고 들었다. 그들이 먼저 가만히 있는 서한율에게 놀러 갔지.
‘가만.’
거기까지 생각하던 효운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나도 먼저 찾아가면 되지 않을까? 하지만… 그랬다간 괜히 잘나가는 애한테 친한 척하는 걸로 비칠 수도 있….’
“효운, 손님.”
“어?”
생각에 잠겨있던 효운은 멤버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열려있는 대기실 문 앞. 서한율이 웃으며 효운에게 손을 들었다.
“심심해서 놀러 왔어요.”
“……!”
효운은 눈을 끔뻑거리다가, 조금 전까지 멋대로 주절거린 퍼스트라인 멤버들을 돌아보았다. 그들은 언제 그런 말을 했냐는 듯 딴청을 피웠다.
“우리 집 고양이 사진이나 봐라. 존나 못생김.”
“어. 너 닮았네.”
서한율이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바쁘세요, 선배님?”
효운은 활짝 웃으며 서한율을 돌아보았다.
“아니? 전혀.”
풀썸과 퍼스트라인의 대기실에 한참 머물던 한율은, 길우성이 데리러 오고 나서야 어스래빗 대기실로 돌아왔다.
“참 나. 잠깐 놀러 간다더니 거기에서 왜 연기 특강을 하고 있냐.”
“특강이 아니라 연기에 대해서 잠깐 얘기를 나눈 것뿐이야.”
풀썸이 이번에 자체 콘텐츠로 짧은 기획 드라마를 찍게 되었다며, 한율에게 연기에 관한 조언을 구했다.
“너 제외하고 선배님들 전부 메모하고 있던데?”
한율은 대답 대신 조유찬에게 맡겨놓았던 가방을 집었다. 이제 슬슬 레드카펫 입장 준비를 할 시간이었다. 길우성도 대답을 재촉하지 않고 거울 앞 빈자리에 앉았다.
대기실 한쪽에 마련된 세면대에서 양치와 세수를 한 한율은, 기초화장품만 바르고 길우성 옆에 앉았다. 샵에서 파견 나온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한율의 앞머리를 핀으로 올려서 꽂았다.
“샵으로 영화 초대권 보내줘서 고마워, 한율아. 꼭 보러 갈게.”
“취향에 안 맞으실 수도 있어요.”
“고양이가 나오는데 취향에 안 맞을 리가.”
“고양이 그렇게 많이 안 나오는데.”
“어…. 그러면 생각을 좀 해봐야겠는데?”
편하게 잡담을 나누면서도 그녀의 손은 빠르고 세심하게 움직였다.
“다른 분에게 양도해도 괜찮으니까 부담 갖지 마세요.”
“그렇게 말해주니 한결 마음이 편하다. 사실은 초등학교에 다니는 조카가, ‘초대권 제발, 초대권, 이모!’ 하면서 얼마나 달라고 떼쓰던지. 내가 볼 땐, 학교에 가져가서 자랑하려는 것 같아.”
“전에 사인 부탁했던 조카분이요?”
“응. 잠깐 눈 감고.”
삭삭. 한율은 눈을 감고 눈가를 스치는 브러시의 감촉을 느꼈다. 이번엔 다른 멤버의 머리를 끝낸 헤어 아티스트가 한율의 뒤에 섰다.
“정말 볼 때마다 감탄이 나온다. 이게 어디를 봐서 탈색을 두 번이나 한 머리야? 헤어 제품, 전에 말한 그거 아직도 쓰는 거지?”
“네.”
“대박이다, 진짜. 피부도 이렇게 좋은데.”
헤어 아티스트는 연신 감탄하면서 메이크업 아티스트처럼 바쁘게 손을 움직였다. 곧 드라이어기가 켜지며 잡담도 자연스레 잦아들었다.
한율은 두 전문가에게 얼굴과 머리를 맡긴 채 조금 전 일을 떠올렸다. 티모에게 오늘따라 기분이 좋아 보인다고 묻자, 티모는 헤실헤실 웃었다.
『RMMA에 왔잖아.』
길우성에게도 은근슬쩍 티모에 관해 물었다.
『티모? 글쎄…. 퍼포 팀 처음 만났을 땐 우리 외엔 데면데면했는데, 언제부턴가 코우 형이랑 둘이서 조용히 자주 얘기 나누더라고. 티모도 예전에 잠깐 일본에서 살았었다니, 둘이 뭔가 통하는 게 있나 봐.』
왜 티모를 보며 위화감을 느꼈던 걸까. 한율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1950년대. ‘로건 워커’의 몸으로 탄 미국행 배 안엔 그처럼 심각한 PTSD 진단을 받은 이를 비롯해 무수한 부상자들이 있었다. 그들 사이엔 육체적 고통, 정신적 고통을 줄여주는 온갖 마약이 은밀하게 돌았다.
미국에 도착한 뒤에도 그는 무수한 마약 중독자를 보았다. PTSD에서 벗어났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꼬박꼬박 다녔던 병원과 상담센터에 득시글거렸다. 길바닥에도, 술집에도. 어디에나 있었다.
조금 전 본 티모의 모습은 진정제 종류의 마약을 막 접한 사람과 닮아있었다.
하지만 속단은 금물이다. 합법적으로 유통되는 약 중, 감정 기복을 일으키는 약을 먹은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 대한민국에선 이런 경우가 훨씬 많을 터.
그래도 설마 하는 마음에 코우가 있는 퍼스트라인의 대기실을 찾았다. 솔직히 다른 아이돌이야 무슨 약을 먹든 상관없지만, 티모는 길우성과 친해지는 단계에 놓여 있으므로.
당장 목숨과 직결되는 물리적인 사고만 위험한 게 아니다.
‘하지만 아무도 그런 걸 하는 낌새는 없었지.’
퍼스트라인 멤버들의 성격에 문제가 있는 건 아무리 봐도 약이 아닌, 본디 타고난 성품인 것 같으므로. 동공도 멀쩡하고, 코우도 조용히 책을 읽고 있었다.
“한율아, 눈 살짝.”
한율은 눈을 떴다. 내리깐 시선을 살며시 움직이며, 옆 거울 뒤에 작게 비치는 티모를 보았다. 티모는 V12 멤버들과 노트북을 보며 흥분해서 떠들고 있었다.
“정말로 시상자로 이분이 나오신다고?!”
“어. 마침 한국 여행을 계획 중이란 소식을 듣고 RMMA 측에서 섭외했대.”
“대박이다, 진짜.”
다른 멤버가 티모의 팔을 툭 쳤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들떴어? 너 뭐 잘못 먹었냐?”
“맞아. 오늘따라 하이텐션이다, 티모? 형이 아무거나 주워 먹지 말랬지?”
티모가 생글생글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나 커피밖에 안 마셨거든? 그나저나 우리 정말 이분 실물 영접할 수 있는 거? 나 진짜 재밌게 봤는데! 같이 사진 찍을 수 있나?”
“우리는 시상자 대기실에 못 가잖아.”
“끝난 다음에라도…!”
한율은 시선을 다시 정면으로 옮기며 생각했다. 일단 시간을 두고 지켜보다 다시 위화감이 느껴지면 그때, 조용히 물어봐야겠다고.
‘그나저나… ?’
* * *
오후 5시. 레드카펫이 시작되었다. 등장순서는 무대 순서와 동일. 어스래빗은 풀썸 다음으로 입장했다.
“어스래빗 여러분은 RMMA 참석이 두 번째잖아요. 어때요? 올해는 상 받으실 수 있을 것 같나요?”
키가 한참 작은 레드카펫 MC가 유호를 향해 마이크를 내밀었다. 유호는 마이크를 받으려 했지만, MC는 자기 거라는 듯 고개를 흔들며 넘겨주지 않았다. 그러자 유호는 공손히 몸을 낮춘 채 마이크에다 대고 대답했다. <뮤직센터> MC를 하며 몸에 밴 습관인지, 카메라를 정확히 보며 서글서글하게 웃었다.
“아주 조금, 사알짝 기대하고 있습니다.”
어스래빗은 ‘댄스 퍼포먼스 남자 그룹’과 올해 신설된 ‘차세대 월드 아이돌 남자 그룹’ 부문 두 곳에 후보로 올랐다. 그러나 멤버들은 물론이고 회사 측도 전자는 기대를 접었다. 다른 후보들이 모두 쟁쟁한 까닭이었다.
그러나 후자는 받을 가능성이 엿보였다. 같은 부문에 오른 후보 중 오늘 참석한 게 어스래빗과 V12 둘뿐인데다, V12는 한 곡만 부르는 것에 반해 어스래빗은 스페셜 커버 무대까지 두 곡을 부를 예정이므로.
RMMA 레드카펫이 생중계되고 있는 너튜브 뮤닷 채널.
-언니 일부러 마이크 안 넘겨줌ㅋㅋㅋㅋ
-키 거의 40cm 차이 나는 것 같은뎈ㅋㅋㅋㅋㅋ
-[저 아나운서 분이 굉장히 아담한 겁니까?]
-요런 스윗한 모습 보여주라고ㅎㅎ 언니센스짱
-키 차이 설렌다.. 나 이런 거 좋아하는 구나..
-[지구 토끼인데 왜 모두 동양인입니까?]
-유호 뮤센 땡땡이치고 저기 갔네
“다들 컨디션은 괜찮은 거죠?”
이번엔 차남석이 몸을 낮췄다.
“네! 몇 달 전부터 열심히 준비한 무대를 멋있게 보여드릴 테니, 기대해주세요!”
그러곤 카메라를 향해 부드러운 미소와 여유로운 윙크. 레드카펫을 촬영 중인 연예기자들이나 카메라맨, 레드카펫을 직관하는 타 팬들이 ‘잘생겼어!’ 감탄하며 술렁거렸다.
-남석아ㅠㅠㅠㅠㅠㅠ
-역시 프로다
-OMG
-자랑스럽다 차남석
-왜 이런 멋진 아들을 낳아놓고 그런 짓을 벌인 거예요, 아부지...ㅜㅜ 업고 다녀도 모자랄 판에ㅜㅜㅜㅜ
-타팬인데 잠깐 흔들렸다..
어스래빗은 포토존 단상에 올라가 준비한 포즈를 여러 번 취한 후 공연장 안으로 들어갔다. 강보배가 주변에 카메라를 든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하더니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RMMA 레드카펫은 처음이라 긴장했는데, 다른 데랑 비슷하구나.”
작년, 일본에서 열렸을 땐 레드카펫을 진행하지 않았다.
“그런데 좀 춥다.”
“조금이 아니라 많이.”
“참아.”
어스래빗은 그들의 이름이 적힌 가수석에 앉았다. 왼쪽엔 아이허니가, 오른쪽엔 풀썸이 자리를 잡았다. 뒤에는 V12. 곧 원제로가 들어와 어스래빗의 바로 앞자리에 앉았다.
“하이, 하이!”
임승준과 변지욱이 그들을 향해 손을 뻗었고, 어스래빗 멤버들은 두 사람과 스치듯 툭툭 손바닥을 마주쳤다. 정민솔은 고개만 꾸벅이곤 말없이 자리에 앉았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현강희가 큰소리로 한율에게 꾸벅 인사했다. 무대의 대형 전광판을 통해 레드카펫 현장이 나오고 있어, 장내는 다소 어수선했다.
“아까 대기실에 인사하러 갔었는데, 안 계시더라고요.”
“다른 곳에 잠깐 놀러 갔었어요.”
“그러시구나…. 아참, 영화 개봉 축하드려요! 꼭 보러 갈게요!”
상당히 바빠 보이던데, 보러 갈 시간이 있을까.
키가 자란 것인지 아니면 살이 빠진 것인지. 한율은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조금 앳된 기가 사라진 현강희를 향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현강희도 환하게 웃더니 자리에 바로 앉았다.
잠시 후 6시 30분. <2018 RMMA>가 시작되었다.
왜 혼자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어?
RMMA는 스페셜 퍼포먼스 무대로 시작되었다.
30여 분 전 자리를 비운 길우성과 이건우가 무대에 등장했다. 웅장하면서도 강렬한 느낌의 곡과 함께.
‘잘하네.’
두 사람은 평소 다른 멤버들과 함께 있을 땐 조금 묻히는 감이 없잖아 있으나, 춤을 출 땐 누구보다 돋보였다. 길우성이 춤 선이 곱고 강약 조절이 부드럽게 이어지는 게 특징이라면, 이건우는 조금 더 파워풀했다. 큰 키에 평소 관리를 한 탄탄한 몸 때문에 남성미도 도드라지고.
박가람이 유호에게 말했다.
“이건우의 벌크업을 멈추지 않으면 언젠가 우리랑 밸런스가 깨질 것 같소, 형님.”
“음.”
“우성이 춤 정말 잘 춘다.”
강보배는 무대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감탄했다.
“괜히 내가 다 자랑스러워. 쟤가 우리 팀 막내다!”
다른 보이그룹의 아이돌들도 잘 췄다. 시간이 없다면서 연습을 제대로 못 했다고 들은 원카운트의 기혁이나, 또 다른 연습 불량 학생이었던 ACCOM의 멤버도 제 몫을 했다.
그러나,
“어….”
뒤에서 안타까운 탄식이 들렸다.
V12의 티모가 박자를 놓치는 실수를 저질렀다. 한 번 놓친 박자는 그대로 춤에 영향을 주었고, 환한 스포트라이트 아래서 당혹스러워하는 티모의 얼굴이 고스란히 카메라에 잡혔다.
“아이고….”
곧 카메라 시점이 바뀌었으나, 무대와 가까운 사람들의 눈에는 보였다. 좀처럼 박자를 다시 맞추지 못한 티모의 발이 어지러워지고 시선이 흔들리는 게. 다행히 단체 군무로 들어가기 전 몇 걸음 이동하며 박자를 찾았으나, 티모의 얼굴은 무대가 끝날 때까지 하얗게 질린 채 굳었다.
스페셜 퍼포먼스 무대가 끝나고 10여 분 후. 다시 턱시도로 갈아입은 길우성과 이건우가 가쁜 숨을 내쉬며 돌아왔다.
“수고했어.”
“자, 물 마셔.”
멤버들은 두 사람에게 물을 챙겨주었다.
“으하하….”
“감사, 감사.”
뒤에선 V12 멤버들이 티모를 위로했다.
“괜찮아. 첫 참석에다 첫 무대였잖아.”
“다들 미안….”
“너무 속상해하지 마. 다음에 더 잘하면 돼.”
“어…….”
20여 분 후. 스태프가 다가와 슬슬 무대 준비를 하라고 알려줄 때였다. 마침 ‘차세대 월드 아이돌그룹’ 부문 수상 발표 차례가 되어, 어스래빗 멤버들은 백스테이지로 뛰어가려고 들썩거리다 멈췄다.
아름다운 드레스와 턱시도를 입은 시상자들이 등장하고, 인사가 이어졌다.
[…그럼 발표하겠습니다. 먼저, 차세대 월드 아이돌 남자 그룹.]
부스럭. 봉투에서 카드를 꺼내는 동작이 더디다. 박가람이 두 손을 모아 기도했다.
“제발, 제발, 부처님! 우리에게 힘을…!”
[축하합니다.]
가수석을 크게 둘러본 시상자가 미소 지었다.
[어스래빗.]
우오와아! 그룹명이 호명됨과 동시에 멤버들이 벌떡 일어나며 환호성을 질렀다. 박가람은 한율을 덥석 끌어안았다가 반대쪽의 유호와도 끌어안고 기뻐했다.
다들 올해 신설된 이 상이, RMMA에 참가한 팀에게 주려고 만든 참가상이나 다름없다는 걸 은연중 느끼고 있었지만 그래도 상은 상이었다. RMMA에서 처음 받은 상.
한율도 적당히 기쁜 척 환하게 웃으며, 주변에서 축하한다고 외치는 다른 아이돌에게 꾸벅꾸벅 인사했다. 그중엔 진은수가 속한 퍼플아워도 있었으나, 박수를 치던 진은수는 한율과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
장내에 <파라솔> 후렴 부분이 크게 울려 퍼졌다.
[어스래빗은 무대로 올라와 주세요.]
강보배가 한율의 어깨를 잡았다.
“가자, 가자.”
무대로 올라간 어스래빗 멤버들은 시상자들에게 상과 꽃다발을 받고 차례대로 악수했다.
일렬로 서서 정면을 향해 인사.
“안녕하십니까!”
“어스!”
“래빗!”
“인사드립니다!”
유호가 한 발자국 나와 스탠딩 마이크 앞에 섰다.
“올해도 RMMA에 초대해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한데, 차세대 월드 아이돌이라는 멋진 수식어가 붙은 상을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런 상을 받을 수 있도록, 우리를 응원해주고 사랑해준.”
유호가 짧게 말을 끊었을 때, 어스래빗 멤버들은 동시에 팬덤 이름을 외쳤다.
“이프리임!!”
멀리 이프림이 앉아있는 자리에서 화답이 돌아왔다.
꺄아아악!
“사랑합니다!”
“모두 이프림 덕분이에요!”
“감사합니다!”
다음은 이건우가 마이크에다 대고 말했다. 수상이 됐을 때를 대비해, 멤버들끼리 미리 상의해서 외운 대본대로.
“그리고 아무리 바빠도 꼬박꼬박 연습실에 나와서 성실히 연습해준 우리 멤버들에게도, 수고했다는 말 전하고 싶습니다. 특히, 우리 연기 천재 서한율.”
거대한 메인 전광판에 한율을 쳐다보는 이건우와 고개를 갸웃하는 한율의 얼굴이 잡혔다.
“영화 대박 나자.”
한율은 다른 스탠딩 마이크를 잡고 빠르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다음 주에 개봉합니다.”
꺄아아악!
무대 아래에서 스태프가 소감을 마무리하란 신호를 보냈다. 마지막으로 라이언이 해외 팬들을 위해 빠른 영어로 수상 소감을 말했다. 그가 ‘Thank you.’로 마무리하는 것에 맞춰, 어스래빗 멤버들은 재차 크게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열심히 하는 어스!”
“래빗! 되겠습니다!”
무대를 내려간 후엔 곧바로 백스테이지로 달렸다.
“시간 없다! 뛰어, 뛰어!”
-깨알 같은 영화 홍보ㅋㅋㅋㅋㅋㅋㅋ
-드디어 RMMA에서 상을!
-올해도 홀대하면 엎어버리려고 했다
-애들아 올해도 정말 수고 많았어!!
-♡♡♡어스래빗 12월 14일 [Jump Up] 컴백♡♡♡
-12월 13일 어스래빗 서한율 주연 <고양이 난로> 개봉합니다!
-[<고양이 난로> 미국엔 언제 배급???]
-걸그룹은 퍼플아워가 받네
-신인상은 원제로 몫이라, 아림이랑 척지지 않으려고 이거라도 주는 듯ㅇㅇ
<2018 RMMA> 시상자 대기실.
미국 드라마 의 주연을 맡으며 일약 스타가 된 배우 엠마 애커먼은, 핸드폰으로 너튜브 RMMA 생중계 채팅창을 보다가 대기실에 설치된 TV를 보았다. 차세대 월드 아이돌그룹 시상이 끝나고 ‘풀썸’이란 보이그룹의 무대가 시작되고 있었다.
‘어스래빗은 이다음 무대.’
시상자로 참석해줄 수 있냐는 RMMA 측의 연락을 받았을 때 흔쾌히 수락하기는 했으나, 사실 엠마 애커먼은 K-POP은커녕 한국에 대해 잘 몰랐다. 정확히는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었다. 진로에 대한 고민, 공부, 그리고 일을 하느라.
그러다 얼마 전, 번아웃이 찾아와 휴식을 위해 할머니가 있는 텍사스로 갔을 때였다. 할머니와 함께 토크쇼를 보는데, 빌보드 1위를 차지한 K-POP 아이돌이 게스트로 나왔다.
『참 느낌이 이상하구나. 한국에서 온 청년들이 미국에서 음악으로 크게 성공하다니.』
그러면서 할머니는 당신의 옛날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짐과 결혼하기 전, 내 약혼자가 한국 전쟁에 파병을 갔었지. 그때 그를 말리지 않았던 걸 무척 후회했단다. 돌아온 그는 아주 딴사람이 되어서 가족은 물론이고 나도 전혀 기억 못 했거든.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짐과 결혼해 네 아빠를 낳고, 엠마 널 만났으니 지금은 무척 행복하단다.』
한국에 관한 관심은 이렇게 사소하게 시작되었다.
엠마는 토크쇼에서 본 한국 아이돌 영상을 한참 찾아보다가, ‘한국 전쟁 미군 참전’을 검색했다. 알고리즘의 장난인지, 검색 결과에 ‘어스래빗’이란 한국 아이돌 영상도 함께 떴다. 워싱턴에 있는 한국전 참전 미군 용사비를 찾아 추모하는 영상이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미국인이라는 게 자랑스러워지는 마음도 들고.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어스래빗엔 제작사로부터 러브콜을 받았던 이도 있었다.
‘참 신기하네.’
엠마는 그날로 한국 여행을 계획했다. 계기가 사소하든 빈약하든 그런 건 상관없었다. 그녀는 자신에게 다양하고 즐거운 경험이 아주 필요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여행은 그걸 가장 많이 충족시켜주는 활동이고.
‘아, 나온다.’
풀썸의 무대가 끝나고 두 번의 시상. 드디어 어스래빗이 무대에 등장했다. 조금 전 상을 받았을 때 보여준 장난스럽고 밝은 모습관 전혀 다른 어둡고 멋진 분위기로.
너튜브 채팅창에 영어의 비중이 높아졌다.
-[사랑스러운 토끼들의 변신]
-[이렇게 멋진 토끼들이 어디 있나]
-[뉴욕엔 언제 다시 와? 뉴욕엔 언제 다시 와? 뉴욕엔 언제 다시 와? 뉴욕엔 언제 다시 와? 보고 싶어]
-[전 아직도 어스래빗을 홍콩에서 봤을 때가 생생합니다. 다시 이들의 밝은 에너지를 현장에서 느끼고 싶습니다.]
-[한율의 매력적인 텍사스 사투리 직접 듣고 싶다 :-) ♡♡♡]
잠깐 채팅창을 본 엠마는 고개를 갸웃했다.
‘텍사스 사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