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수고했다, 얘들아. 대기실 가서 옷 갈아입고, 화장실 다녀올 사람은 다녀와. 이제 곧 1부 끝나고 2부 시작까지 시간 좀 있으니까.”
두 곡의 무대를 끝내고 다시 백스테이지. 어스래빗 멤버들은 거칠어진 숨을 몰아 내쉬며 바삐 걸었다.
“형, 상은 어디에 뒀어요?”
조금 전엔 무대 준비가 급하여, 수상했다는 기쁨의 여운을 느낄 새도 없이 백스테이지의 퀵 체인지 룸으로 뛰어 들어갔다. 상과 꽃다발은 매니저들에게 덥석 넘긴 채.
조유찬이 씨익 웃으며 품에서 상을 꺼냈다.
“축하한다, 어스래빗.”
현장전은 내내 들고 있던 꽃다발을 건넸다.
“축하합니다.”
“감사합니다!”
멤버들은 그제야 상을 돌려보면서 웃었다.
“RMMA에서 받은 첫 상!”
“흐흐흐.”
“빨리 라방하고 싶다. 이프림한테 자랑하고 싶어.”
“나중에 숙소에서 할까? 차에서 하면 몇 명은 못 나오잖아.”
“…어?”
가장 먼저 대기실로 들어간 박가람이 의아한 소리를 냈다.
“왜 아직도 여기에 있어? 혹시 몸 안 좋아?”
대기실에는 V12의 리더와 티모가 있었다.
V12는 어스래빗보다 무대 순서가 한참 앞이었던 터라, 가수석으로 돌아가고도 남을 시간.
“아….”
V12 리더가 당황한 얼굴로 어스래빗을 보더니 들고 있던 휴대용 티슈를 티모에게 넘겼다. 티모는 고개를 푹 숙인 채 티슈를 손에 꽉 쥐었다.
혹시 울고 있었던 걸까.
어스래빗 멤버들은 눈치껏 더 묻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옷 갈아입고 메이크업도 잠깐 수정하자.”
“휴대용 선풍기 남는 사람? 내 거 멈췄다.”
V12 리더와 티모는 어스래빗 멤버들이 옷을 갈아입고 메이크업을 수정할 때 조용히 대기실을 나갔다.
길우성과 이건우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퍼포 무대 실수한 거 엄청 속상했나 보다. 그래도 울 거라곤 생각도 못 했는데…. 안 좋은 일이라도 겹쳤나?”
“그러게. 아침만 해도 굉장히 기분 좋아 보였었는데. 아니면 자존심이 상해서 그런 걸지도.”
RMMA 2부는 걸그룹 멤버들의 스페셜 무대로 막을 열었다.
어스래빗의 무대는 1부에 모두 끝낸 터라, 이젠 지루함과의 싸움이었다. 여기에 언제 카메라에 찍힐지 모르므로, 기계적으로 보이지 않는 자연스러운 리액션도 해야 한다. 한율은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띤 채 무대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렇게 얼마나 견뎠을까.
어스래빗이 후보로 올랐던 또 다른 부문인 ‘댄스 퍼포먼스 베스트상’ 발표 순서. 한국 배우와 미국 배우가 시상자로 등장했다. 미국 배우는 인기리에 종영된 미국 드라마 의 주연 엠마 애커먼.
“와….”
“진짜 예쁘다….”
대형 전광판에 잡히는 엠마의 모습에 아이돌들이 술렁거렸다. 입을 벌린 채 넋을 놓은 이들도 있었다.
반면, 한율의 입가엔 어색한 미소가 번졌다.
몇 달 전 처음 엠마의 사진을 봤을 때 그는 깜짝 놀랐다. ‘로건 워커’의 약혼녀였던 크리스티나와 너무 닮은 까닭이었다. 그래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엠마 애커먼에 대해 검색해봤더니, 하필 또 고향이 텍사스였다.
조부의 이름은 ‘짐 애커먼’. 할머니의 이름은 ‘크리스티나 애커먼’.
엠마는 크리스티나의 손녀였다.
‘세상에 이런 우연이 있을 수가 있나.’
소설에서 그려내면 너무 작위적이라며 욕하는 일이, 현실에선 종종 벌어지긴 하지만.
한율은 RMMA의 초대를 받은 소감을 말하는 엠마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자연스레 크리스티나가 투영되었다.
마지막으로 봤을 땐 아름다운 20대 여성이었던 크리스티나가, 저 아이의 할머니라니.
이렇게 시간을 뛰어넘었다는 게 체감되는 일이 또 있을까.
‘꼭 친구의 손녀를 보는 기분이네.’
비록 크리스티나는 지금의 그를 전혀 모르지만 말이다.
그때 무심코 한율을 본 박가람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얜 왜 혼자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어?’
영화 개봉 축하한다
밤 11시가 되어갈 무렵 <2018 RMMA>가 끝났다.
모두의 안전을 위해 탑 티어 아이돌그룹이 먼저 출발해야 하기에, 어스래빗은 바로 그곳을 떠나지 못했다.
“라방 지금 할까? 시간도 많은데.”
“V12 친구들도 같이 있잖아. 그냥 숙소에 가서 하자.”
“응.”
한율은 멤버들의 잡담을 들으며 핸드폰으로 인터넷에 접속했다. 포털사이트 실검은 온통 RMMA 관련. 그러나 말미엔 여전히 차남석의 이름이 떠 있었다.
차남석의 아버지에게 돈을 빌려주었던 B씨의 아들이 SNS에 글을 올린 모양이었다. 정확히는 노트에다 자필로 쓴 글을 사진으로 찍어서 올렸다.
[안녕하세요. ㅇㅅㄹㅂ의 ‘C’ 사건에서 C의 아버지 A씨에게 돈을 빌려준 B씨의 아들입니다.
이렇게 SNS를 공개하고 글을 올리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제때 돈을 받지 못한 피해자인 우리 가족을 되레 비난하는 분들이 있어서입니다.
우선 저희 아버지는 C를 보고 A씨에게 돈을 빌려준 게 아니란 사실을 확실히 밝힙니다.
돈을 빌려줄 당시 C는 막 데뷔한 고등학생이었는데, 바보가 아니고서야, 아무리 연예인이라도 누가 고등학생 아들을 믿고 돈을 빌려줍니까. 아버지는 ‘설마하니 부모가 연예인 아들 얼굴에 먹칠할까’라는 생각으로 A씨를 믿고 빌려준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WB래빗으로 전화를 한 건, A씨가 아들인 C를 거론하며 돈을 빌린 사실을 C가 아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지, 돈을 대신 갚으라고 요구하기 위함이 절대 아닙니다.
하지만 연락을 받은 C가 먼저 대신 갚겠다는 의사를 표했고, 빌려준 돈을 제때 받지 못해 형편이 어려워져 다른 곳에서 빚지고, 또 그 빚을 빚으로 메우던 힘든 상황인 저희는 받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아침 기사를 보고 나서야 저희도 A씨가 C에게 결코 좋은 아버지가 아니었단 사실을 알았습니다.
미리 알았다면 아버지는 절대 C에게 연락하지도 않았고, 애초에 A씨에게 돈을 빌려주지도 않았을 겁니다.
취재에도 응하지 않았을 겁니다.
저는 아직도 대체 왜 저희 아버지가, 우리 가족이 욕을 먹어야 하는지 도통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답답합니다.
부모라면 자식의 얼굴에 먹칠하지 않을 거란 믿음. 사람에 대한 믿음으로 돈을 빌려준 게 그렇게 잘못인가요?]
이하, 댓글.
-ㅇㅅㄹㅂ 빠순이분들은 피해자를 향한 공격을 멈춰주세요.
ㄴ공격한 적 없는데요...ㅜㅜ
ㄴ우리 이프림(어스래빗 공식 팬덤명입니다)은 이번 사건을 멤버의 민감한 개인 가정사라 보고, 조용히 지켜보기로 했습니다. 공식 입장문(링크)
-미리 말하는데, 저는 ㅊㄴㅅ씨가 누군지 잘 모릅니다. 그냥 인터넷에서 시끄럽길래 무슨 일인가 본 사람인데.. 약간 의아한 점이 있네요. ㅊㄴㅅ씨가 알고 있나 확인하려고 소속사에 전화했다고 하셨죠.
ㄴ그럼 당사자 바꿔 달라고 해서 조용히 물어봤으면 될 일입니다. 아니면 A씨 아버지를 통해서 묻거나요. 그런데 기사보니까 T님 아버지가 회사 사람에게 ‘나 ㅊㄴㅅ 아버지한테 돈 빌려준 사람이다’라고 액수까지 ‘먼저’ 정확히 말씀하셨던데요.
ㄴ아무리 회사 측에서 무슨 용건으로 전화했냐고 물어봤어도 그렇지, 그걸 왜 회사 사람에게 말합니까? T님의 아버진 아무 상관 없는 제삼자한테 ㅊㄴㅅ씨 가족의 채무 문제를 까발린 겁니다. 그거 자체가 고작 스무 살짜리, 그것도 이미지가 생명인 연예인을 압박한 거로밖에 안 보입니다.
ㄴ만약 T님이 다니는 회사에 은행 직원이 전화해서 T님 직장 상사한테, ‘그 회사 다니는 T님의 아버지가 대출금 얼마얼마를 갚지 않네요’ <이렇게 떠든다고 생각해보세요. 이게 과연 상식적인 일인지.
ㄴ오우쉣... 예시 상상만해도 끔찍...
ㄴ돈 빌려준 피해자가 뭔 잘못이냐!!! 고개 끄덕이고 있었는데 이 댓글 보니까 정신이 번쩍 드네ㄷㄷ;
ㄴ듣고 보니 왜 A씨 아버지(ㅊㄴㅅ할아버지)한테 안 찾아가고 바로 그 아들 소속사에 전화했는지..? ㅊㄴㅅ보고 빌려준 거 아니라며
ㄴ확실히 B씨는 피해자입니다. A씨에게 돈이 떼먹힌 피해자요. 그러나 ㅊㄴㅅ씨에게만큼은.. 가해자 같네요.
ㄴ상대가 연예인이니, 가정사 까발려져서 망신당하기 싫으면 바로 돈 주겠지 하고 연락한 거 같은데ㅋ
-위의 장문 댓글.. B씨가 경솔하게 말한 건 잘못입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비난받을 일입니까? 빌려준 돈 제때 못 받는 것도 억울하고 분한데,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전화했다곤 생각 안 해요? 만약 님 가족이 아파서 당장 수술해야 하는데 3천이 없다면요? 그때도 예의 다 지켜가면서 기다릴 수 있을 것 같습니까? 3천이 적은 돈도 아닌데?
ㄴ그럼 갚을 의무가 없는 아들(민사상 미성년자)이 속한 회사에 다짜고짜 전화해서 떠벌리는 게 정당행위라는 거? A씨 아버지 놔두고? 누가 봐도 ㅊㄴㅅ이 드라마에도 나오고 해외 투어도 다녀오면서 잘 되는 것 같으니까 연락한 건데?
ㄴ차남석 보고 빌려준 거 아니라면서, 돈 못 받으니까 바로 차남석 회사로 전화한 것 자체가 이상하기는 함ㅇㅇ 만약 차남석이 데뷔하자마자 바로 묻혔어도 연락했을까?
ㄴ그러니까 오죽 힘들었으면 그랬겠냐고요. 잘못은 A씨가 했는데... 참 답답하네요.
-돈 빌린 사람은 나몰라라 잠수탔는데 정작 피해 본 사람이 비난을 받다니.. 돈 떼먹히면 하루하루 얼마나 피가 마르고 자다가도 분노가 치미는지 모르시나요? 다들 참 잘나셨네요... 상식부터 거론하는 거 보면.
한율은 고개를 돌려 차남석을 보았다. 그도 핸드폰으로 해당 SNS와 댓글을 진지한 얼굴로 보고 있었다.
“후회해요? 기사 낸 거.”
기사가 나오자 차남석의 부친을 비난하는 사람이 대다수였으나, 피해자인 B씨를 되레 의심하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었다. 차남석까지.
-갚을 거면 조용히 갚든가, 왜 기사를 내서 본인 아버지한테 당한 피해자를 욕 먹임? 부모 빚 대신 갚는 게 뭐 그리 대수라고ㅋㅋ 너희 집안일을 왜 우리가 알아야 하냐?
차남석은 물끄러미 한율을 쳐다보다가 이어폰 한쪽을 내밀었다.
“들어볼래?”
“……?”
한율은 이어폰 한쪽을 귀에 꽂았다. 차남석이 녹음 파일 하나를 재생했다.
-[그동안 우리 가족이 받은 정신적 피해보상금 천만 원. 그 이하는 안 됩니다. 차남석한테, 아버지가 감방 가는 거 보고 싶지 않으면 잘 생각하라고 하세요.]
-[선생님. 잘 아시겠지만, 저희 의뢰인은 사실 이 돈을 갚을 법률상 의무가 전혀 없습니다. 하지만 아들로서….]
-[싫으면 알아서 하세요. 원만하게 합의해주려고 했더니, 누굴 사기꾼 거지로 압니까?]
뚝. 파일이 끊겼다.
차남석이 웃으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변호사님이랑 그 아저씨 아들의 통화. 그런데 조금 전에 원금이랑 이자만 받겠다고 연락 왔다더라. 기사 반응 보고, 피해보상금까지 요구했다는 말이 나오면 더 비난받을까 봐 위축된 것 같아. …이거, 내가 죄송해야 하는 거겠지? 그쪽에서 필요 없다고 해도 아버지가 벌인 짓이니까, 그것도 챙겨드려야 하나….”
“형.”
한율은 이어폰을 차남석에게 돌려주며 말했다.
“호구 맞네요.”
“…….”
“호구 이미지로 더 깊게 각인되고 싶으면 주고, 아니면 말고.”
차남석은 고개를 돌리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한율은 고민이 많아 보이는 그의 얼굴을 보다가 문득 시선을 멀리 던졌다. 반대쪽 소파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있는 티모가 눈에 들어왔다. 상당히 우울해 보였다.
첫 무대에서 실수했다곤 하지만 아주 잠깐이었고, 이후 본인 팀 무대는 잘했다. 하지만 여전히 저 상태인 걸 보면 길우성의 말처럼 안 좋은 일이 겹친 것일지도.
그때 티모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복도로 고개를 내밀었다.
한율은 조용히 다가갔다.
“누구 찾아?”
“……!”
복도 밖을 살피던 티모가 화들짝 놀라며 한율을 돌아보았다.
“어? 아…. 그냥. 사람이 얼마나 빠졌나 궁금해서.”
티모는 당황한 얼굴로 얼버무리더니 다시 소파로 가서 얌전히 앉았다.
* * *
[오늘 8일 어스래빗 서한율 주연 <고양이 난로> VIP시사회]
[크리스탈 래빗·어스래빗 <루돌프와 산타토끼> 21일 음원 공개!]
[어스래빗 한율, 영화 개봉 맞춰 <스타학교> 녹화! 9일 방송]
[이희우·어스래빗 한율, tv Mu <뮤직마켓> 예고 영상 공개]
[어스래빗 건우와 라이언, 낚시 예능 <한방> 22일 방송]
[어스래빗 꽃토끼, SBC <달리는 예능> 나간다]
[어스래빗 남석, ‘팀버거’ 광고 모델 발탁!]
[RMMA ‘차세대 월드아이돌’ 어스래빗, 쉴 틈 없는 러브콜과 스케줄]
-얘네 원래 이렇게 잘나가는 애들이었나?
-생전 듣도보도못한 듣본데.. 나 뒤쳐진 거?
ㄴㅇㅇ
-남석이 아부지 빚 갚으려고 광고 찍는고니..?
ㄴㅋㅋㅋㅋ웃프다ㅠㅠ
ㄴ광고가 찍고 싶다고 찍을 수 있는 건가요; 그것도 팀버거인데
ㄴ???: 통장에 광고 계약금이 들어왔는데요, 사라졌습니다.
-얘네 멤버 한 명 한 명 자세히 보면 안 뜨는 게 이상한 그룹이긴 함. 특히 차남석 얼굴이랑 서한율 연기만 봐도
-지구토낔ㅋㅋㅋㅋ 누가 이름 이 따구로 지었냨ㅋㅋㅋㅋㅋㅋ
ㄴ놀랍게도 회사 내부투표로 정해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ㄴㅋㅋㅋㅋ
-이런 애들도 있었구나
-어스래빗출연방송:예능-보컬리스트시즌3,댄스단수,동갑내기,여름소풍,한방,목톡톡,아이돌장학퀴즈쇼(골든벨♡),주말아이돌,선데이동물,스타학교,바다의백조,아이돌스포츠대회,뮤직센터(MC),감성트럭//드라마-하울링,수의형사,객귀,집도,별☆일없는집,빙글빙글(웹드),장인(특별출연)
ㄴ이분 최애 사자톢 예상
ㄴ남석이 데뷔 전 K노래열전도 있습니다ㅎㅎ
ㄴ은근히 여기저기 많이 나왔구나;
-그래봤자 후배 원제로에게 처 발린지 오래죠^^
ㄴ스카이러너 기사에서도 이러더니 여기서도 이러네
ㄴ원제로 욕 먹이려는 안티입니다. 무시하고 지나가 주세요.
포털사이트에 ‘어스래빗’을 검색한 박현우는 핸드폰을 옆 사람에게 보여주었다.
“어때요, 형? 얘네 성장하는 거 보면?”
스타믹스의 지헌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멋지다?”
지헌의 옆에서 힐끗 핸드폰 화면을 본 JE가 끼어들었다. 고개를 까딱거리며.
“인지도가 쌓이는 과정은 정석이지만, 속도가 유난히 빠르다 정도?”
그들은 함께 영화 <고양이 난로> VIP 시사회에 가는 중이었다. 지금쯤이면 언론 시사회가 끝나고, 기자들이 VIP 시사회에 참석하는 초대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을 터다.
“그런데 형 <뮤직뮤직> MC잖아요. 시간 괜찮겠어요?”
“영화 끝나자마자 바로 달려가야지.”
“난 지은이 네가 먼저, 같이 가도 되냐 묻는 거 보고 솔직히 놀랐다? 너 극장 싫어하잖아.”
JE는 어깨를 으쓱이곤 차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런데 제유가 떠비 새 식구로 들어간다면서?”
“그렇다고 들었어요. 조만간 기사로도 나갈 거라던데.”
“만나면 잘해줘. 이미지는 무뚝뚝하고 까탈스럽지만, 속은 은근히 여린 애야.”
“잘 아는 사이에요?”
지헌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 잠깐 같은 학원에 다녔었어. 같은 유 씨, 먼 친척이기도 하고.”
“아아. 그런데… 배우끼리는 아무리 같은 소속사라고 해도 만날 일이 거의 없어서요.”
“그런가?”
“중요한 일 얘기할 때 외엔 회사에 갈 일 자체가 거의 없더라고요. 대본도 매니저 형이 직접 찾아와서 건네주고.”
“그렇구나. 하긴, 우리야 연습이랑 회의 때문에 자주 가는 거니까. 그럼 제유도 크래나 어스 애들이랑 마주칠 일은 거의 않겠구나.”
“아마 그렇지 않을까요? 앨범을 낸다면 또 몰라도.”
잠시 후 <고양이 난로> VIP 시사회가 열리는 극장 상영관 앞. 세 사람이 함께 등장하자 카메라 셔터 소리가 크게 울렸다. 차카차카차칵. 포토존에 올라가서 사진을 찍고 나선 꾸벅 인사를 하고 내려왔다.
“이쪽입니다.”
기다리고 있던 진행요원이 세 사람을 임시 배우 대기실로 안내했다.
“요오, 서한유울~.”
박현우가 대기실로 들어오며 손에 든 꽃다발을 높이 들었다.
“영화 개봉 축하한다.”
“첫 주연, 첫 영화 축하.”
“자, 받아.”
스타믹스의 지헌과 JE도 한율에게 축하선물을 건넸다. 한율은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와줘서 고마워요.”
“우리가 더 고맙지. 네 덕에 기사로 나갈 일이 생겼으니.”
“어? 안녕하세요. 박현우라고 합니다.”
부스럭. 한율에게 꽃다발을 건넨 박현우가 누군가를 향해 꾸벅 인사했다. 먼저 도착해서 한율과 이야기를 나누던 윤상진이었다.
윤상진도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배우 윤상진이라고 합니다. 한율이랑은 2년 전에 드라마 <하울링> 같이 찍으면서 친해졌습니다.”
배우와 배우를 겸하는 아이돌, 아이돌 간의 머쓱한 인사가 오고 갔다.
“안녕하세요. 스타믹스의 지헌이라고 합니다. 전 <별☆일> 드라마 찍으면서 잠깐 형, 동생 사이가 되었습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손지은이라고 합니다. 그냥 이 사람 따라온 아이돌입니다.”
한율은 지헌에게 받은 고양이 인형을 소파에 앉히고 꽃다발을 안겨주었다. 그리고 JE에게 받은 작은 선물상자를 열어봤다가 실소했다. 가톨릭 묵주가 담겨 있었다.
혹시 자신의 뒤에 비친 걸 ‘안 좋은 거’라 판단하고 이런 선물을 준비한 게 아닐까.
JE가 한율에게 말했다.
“해외 갔을 때 직접 산 거다. 잃어버리지 마.”
<고양이 난로>
“저 가톨릭 아닌데요, 선배님.”
“알아. 그냥 가지고 있으라고.”
“선배님도 가톨릭 신자 아니죠?”
묵주는 기도할 때 사용하는 성물이지, 부적이 아니다.
JE가 당당히 대답했다.
“어.”
한율은 웃으며 상자를 닫았다.
“아무튼 고마워요.”
“멤버들은? 아직 안 왔어?”
“10분 전에 도착해서, 지금 상영관에 있을 거예요.”
박현우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나는 이희우 선배님께도 인사를 드리고 싶구나, 동생아.”
“영화 끝나고 시사회 회식 있어요.”
“음.”
잠시 후 <고양이 난로> VIP 시사회.
작품에 관한 상세한 인터뷰가 오가는 언론 시사회는 아침에 했던 터라, 배우들과 감독은 초대 손님들을 향해 인사 및 영화에 관한 설명을 짤막하게 하고 가장 앞자리에 앉았다.
상영관 내부가 서서히 어두워졌다. 뒤쪽에서 다른 멤버에게 속닥거리는 길우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양이 빨리 보고 싶다.”
영화 <고양이 난로>가 시작되었다.
* * *
왜에에엥! 와아아앙!
각기 다른 고양이들의 날카로운 울음소리. 어둠에 잠긴 주택가 골목길 윤곽이 서서히 드러났다. 두 마리의 길고양이가 좁은 길을 쏜살같이 가로질러 담을 타고 사라졌다.
와오옭와왕!
“하.”
짜증스러운 한숨과 함께 핸드폰 화면이 켜졌다.
[11월 4일 23:14]
평범하지만 여유라곤 찾아볼 수 없는 삭막하고 좁은 방. 윤우는 핸드폰에 이어폰을 꽂았다. 고양이 울음소리는 숨이 넘어갈 듯 심해졌으나, 윤우는 내다보기는커녕 이어폰 볼륨을 높였다.
시끄러운 음악 소리가 이어폰 바깥으로 새어 나왔다.
“아이, 왜들 저래!”
쿵쿵. 열려있는 윤우의 방문 사이로 윤우의 누나, 윤주가 지나갔다. 그제야 윤우는 고개를 돌려 이어폰 한쪽을 뺐다.
“그냥 둬!”
“어떻게 그냥 두냐? 저러다 큰일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끼익, 쿵. 윤주가 현관 밖으로 나갔다. 곧 ‘시끄러워, 그만 싸워!’ 고양이들의 싸움을 말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참 쓸데없는 오지랖. 윤우는 한숨을 쉬곤 다시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그리고 시끄러운 음악을 들으며 오답 노트를 작성하다가, 풀썩 책상에 엎드려 누웠다.
새벽의 푸른빛이 가시지 않은 아침. 오래된 2층 짜리 주택.
앩옹.
“…….”
교복을 입고 집을 나온 윤우는, 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 층계참에 앉아있는 고양이와 마주쳤다. 그 옆엔 윤주가 길고양이들에게 사료를 챙겨주는 그릇 두 개가 놓여 있었다.
애옹.
윤우는 질색하는 얼굴로 고양이를 발로 툭툭 차는 시늉을 했다. 고양이가 절뚝거리며 느릿하게 피했다.
계단을 내려가는 윤우의 뒤통수를 향해 고양이가 울었다.
왜옹.
학교. 윤우 근처에 모여 앉은 여학생들이 고양이 영상을 보며 호들갑을 떨었다.
“완전 귀여워!”
“여기 말고, 최근에 새로 생긴 채널 있거든? 메인쿤이랑 레그돌, 러시아에서 데려온 시베리아 고양이 키우는데, 진짜 장난 아니야.”
“그 사람 돈 많나 보다?”
“고양이 키우려면 돈 많아야지.”
“그 말이 아니라, 고양이는 품종 상관없이 도도한 외모에 병신미를 탑재한 존나 귀여운 생명첸데, 왜 굳이 비싼 품종묘를 키우냐 이거지. 널린 게 고양인데.”
“본인 마음 아냐?”
“길고양이 잘못 거두면 온 집안에 진드기 퍼지고 사람도 피부병에 걸리잖아.”
시끄러워. 윤우는 이어폰을 꺼내서 귀에 꽂았다.
오후. 학교가 끝나자마자 윤우는 곧장 집으로 돌아왔다.
층계참에 놓인 사료 그릇. 수북하게 쌓인 사료를 먹던 고양이들이 윤우의 등장에 놀라 순식간에 담을 타고 사라졌다. 집안에선 윤주가 캐리어에다 짐을 싸고 있었다.
“야, 나 내일부터 수학여행 가니까 나 없는 동안에 고양이 밥 잘 챙겨. 사료는 신발장 위에 있고, 물은 그냥 수돗물 떠서 두면 돼.”
“싫은데.”
“매일 사진 찍어서 보고해. 제대로 안 주면 너 용돈 없어.”
방으로 들어가려던 윤우는 짜증스럽게 윤주를 돌아보았다.
“돈 안 아깝냐? 고양이 밥 주려고 알바 해? 등록금 안 벌어?”
윤주는 뒤도 보지 않고 가운뎃손가락을 날렸다.
“하.”
윤우는 대놓고 한숨을 쉬며 방으로 들어갔다.
다음 날 오후.
앩옹. 학교에서 돌아온 윤우는 빈 그룻 옆에 앉아서 우는 고양이와 마주쳤다. 어제 아침에 본 그 못생기고 꼬질꼬질하고 발까지 절뚝거린 고양이였다.
“…….”
윤우는 인상을 쓰며 발로 툭툭 고양이를 밀어내곤 계단을 올랐다.
쾅. 닫히는 현관문을 고양이가 물끄러미 올려다본다.
왜옹. 왜옹. 밖에서 들리는 고양이 울음소리를 무시하며, 윤우는 옷을 갈아입고 TV를 보며 저녁을 대충 차려 먹었다. 그러다 문득 고양이 울음소리가 더 들리지 않는다는 걸 눈치챘을 때였다.
…와아아앙! 왜오와앙!
밖에서 자지러지는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윤우는 인상을 쓰면서 방으로 들어갔다가, 쿵쿵거리며 다시 나왔다. 윤주가 없으니 저 소리를 멈추게 할 사람도 없었다.
벌컥! 문을 열자 싸우던 고양이 중 하나가 쏜살같이 담을 타고 도망쳤다. 남은 건 오후부터 계속 앉아있던 못난 고양이. 애옹. 윤우는 한숨을 내쉬며 문을 닫았다.
다시 다음 날.
한쪽 눈가에 상처까지 생긴 못생긴 고양이가 윤우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
윤우의 얼굴에 미안함과 후회가 짧게 스쳤다. 만약 어제 사료를 제때 줬다면, 여기에서 계속 기다리다가 싸움이 나는 일은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윤우는 한숨을 내쉬곤 집에 들어갔다. 쾅. 어제처럼 굳게 닫히는 현관문을 올려다보면서 우는 고양이.
왜옹….
벌컥. 윤우가 사료 봉투를 통째로 들고 나타났다. 고양이는 절뚝거리며 피하더니 윤우가 사료를 그릇에 붓는 걸 물끄러미 보았다. 그리고 윤우가 물그릇을 채우는 동안엔 허겁지겁 사료를 먹었다.
다음 날 아침도, 오후도. 고양이는 윤우를 기다리다가 급기야 뒹굴뒹굴하며 애교를 부렸다.
그날 TV에서 사료에 섞인 독극물을 먹고 죽은 길고양이 뉴스를 본 윤우는, 고양이를 향해 중얼거렸다.
“내가 나쁜 마음만 먹으면 넌 바로 죽어.”
앩옹.
“왜 이렇게 사람을 쉽게 믿어, 병신같이.”
애엥? 드러누운 채 안 만지고 뭐 하냐는 얼굴로 쳐다보는 고양이. 윤우는 미간을 찡그린 채 웃었다.
“존나 못생겼네.”
만지기 싫으면 말고.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고양이는 반대로 몸을 굴렸다. 뒹굴.
그때였다.
“저기요?”
“……?”
“저기요? 학생?”
담 너머로 한 여성이 얼굴을 내밀며 손을 흔들었다. 손목에 새겨진 문신과 팔찌, 화려한 네일아트가 인상적인 손이었다.
“그 고양이 좀 잡아줄래요?”
“왜요?”
그녀가 살포시 웃었다.
“내가 잃어버린 고양이 같아서.”
그 순간 고양이가 벌떡 일어나더니 담을 타고 주택 사이 좁은 길로 들어갔다. 절뚝절뚝.
“어?!”
고양이가 도망치자 당황한 소리를 낸 여성, 천희는 멀뚱히 서 있는 윤우의 눈치를 한 번 보곤 고양이가 도망친 방향으로 움직였다.
“모, 못난아? 못난아, 언니야…! 못난아…?!”
주인이 있는 고양이라고? 윤우는 의심스럽다는 얼굴을 했지만 이내 신경을 끊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곧 윤주가 캐리어를 끌고 등장. 층계참에 놓인 고양이 밥그릇을 보며 작게 웃었다. 그러곤 집 안으로 들어가며 윤우에게 큰소리로 물었다.
“야, 너 오늘 나 오는 날인 거 깜빡했지?”
다음 날 아침. 윤주가 빈 그릇 옆에 앉아있는 ‘못난이’를 가리키며 물었다.
“얜 누구야? 처음 보는 앤데?”
윤우는 의아한 얼굴로 윤주를 쳐다보았다.
“원래 여기 오던 고양이 아니었어?”
“아닌데?”
“……?”
왜옹.
그날, 윤우는 기이한 사건에 휘말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