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80여 분의 러닝타임. 영화가 끝났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 잘 봤다는 의미로 박수를 친 초대 손님들은, 감독과 배우들이 다시 무대로 올라가자 더 힘껏 박수 쳤다.
상영관이 환해졌다. 감독과 배우들이 단체로 감사를 표하자, 손님들은 눈치껏 자리에서 일어나 배우들에게 따로 짤막한 감상을 전했다.
어스래빗 멤버들은 한율이 배우 강덕심과 이야기를 나누는 걸 기다렸다가 다가왔다.
“한율이가 다른 애들처럼 비속어 남발하는 모습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충격적이면서도 신선했다.”
“한율아, 그럼 ‘못난이’는 지금 어디에 있는 거야?”
“하나는 감독님 집, 다른 하나는 희우 선배님 집에요.”
길우성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못난이가 두 마리야?”
“어. 똑같이 생긴 고양이 두 마리가 번갈아 가면서 촬영했어.”
“와…. 나 웬만하면 아무리 비슷하게 생긴 고양이라도 다 구분할 수 있다고 자신했는데…. 어쩐지 울음소리가 두 종류로 갈라지더라니, 두 마리라 그랬구나….”
“서한율, 재밌게 잘 봤다. 난 스케줄 있어서 먼저 가볼게.”
이야기 도중 불쑥 끼어든 JE는 한율의 대답도 듣지 않고 급하게 상영관을 나갔다. <고양이 난로> 제작을 맡은 눈길 프로덕션 측 직원이 낭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VIP 시사회를 찾아주신 초대 손님들을 위해 식사가 마련됐습니다. 이동하겠습니다~.”
시사회 뒤풀이 회식은 또 다른 만남의 장이었다. 영화감독을 비롯한 주요 스태프와 제작사 관계자, 투자자 관계자, 그리고 배우와 배우의 초대 손님들이 복작거리며 모이는 자리.
영화 주연이라 사람들에게 일일이 감사 인사를 하고 온 한율은 자리로 돌아오자마자 고기를 집어 먹었다. 이런 자리가 어색하다는 듯 멍하니 익어가는 고기를 보던 박가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이런 곳에서도 인맥이 만들어지는 거였어…!”
그의 시선은 이희우가 있는 테이블에 끼어서 이야기를 나누는 박현우, 카메라 감독과 영상 촬영 기법에 관해 신나게 이야기 나누는 이건우를 번갈아 보았다. 차남석은 화장실을 다녀오다가 제작사 측 캐스팅 디렉터에게 잡혀 외모 극찬을 받는 중.
“왜 이렇게 잘생겼어요? 어? 왜 이렇게 잘생긴 거야?! …요?”
“적당히 익었다. 먹어, 얘들아.”
“스타믹스 리더는 우리한테 고기나 구워주고 있고, 정작 우리 리더는 저기에서 진지하게 토론 중이고….”
유호는 영화음악 감독과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그때 영화투자자 중 한 곳인 FJ그룹에서 나온 중년 남성이 자리에 찾아왔다.
“저기, 실례가 안 된다면 사진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우리 딸 애가 아이돌을 무척 좋아해서요.”
박가람이 벌떡 일어나 공손히 말했다.
“여기 편히 앉으십시오, 선생님. 어떤 포즈와 표정을 원하시는지요.”
“하하하.”
한율은 투자자 관계자와 셀카를 찍고 악수했다. 중년 남성은 다른 멤버들, 스타믹스의 지헌과도 한 장씩 사진을 찍고 나서 조용히 물러났다.
“한율아, 드라마 종방연도 이런 분위기야?”
“네, 비슷해요.”
“보배 너 스무 살 맞지? 한잔할래? 아, 곧 컴백이라 안 되나?”
강보배가 조심스레 매니저의 눈치를 살폈다. 현장전이 고개를 끄덕였다.
“딱 한 잔이면.”
승낙이 떨어지자 강보배는 웃으면서 빈 잔을 들었다. 라이언이 질색한 표정을 지었다.
“보배, 술 마시려고?”
“과연 우리 피도 눈물도 없는 카리스마 래퍼의 술버릇은…?!”
“가람이 너도?”
박가람은 씨익 웃으며 옆 테이블의 맥주를 슬쩍 집어왔다. 옆 테이블에선 윤상진과 이윤영이 최근 개봉한 외국 영화에 관해 서로 분석한 의견을 나누고 있었다. 아주 신나게.
지헌이 라이언에게 물었다.
“라이언 넌?”
“난 싫어요.”
그때 부윤방 감독과 한참 동안 핸드폰으로 고양이 동영상과 사진을 보던 길우성이 돌아왔다. 실실 웃으며.
“나 나중에 부 감독님 집에 놀러 가기로 했다?”
“못난이 보러?”
“응. 다른 고양이도 한 마리 더 있대. 동영상 봤는데 완전 귀여움.”
다른 멤버들도 슬슬 자리로 돌아왔다.
“강보배, 박가람. 너희 누가 술 마시래.”
“장전이 형이 한 잔은 마셔도 된다 그랬어.”
“보배야, 몇 달 고생해서 만든 복근이 하루 만에 사라지는 마법을 몸소 체험하고 싶니?”
“아니, 딱 한 잔이라니까?”
“우리 컴백 일주일도 안 남았다.”
결국 강보배가 풀이 죽은 얼굴로 술잔을 내려놓자, 유호가 그 술잔을 집으며 지헌에게 물었다.
“한잔할까요, 선배님?”
“그럴까?”
“……?!”
시사회 회식 1차는 7시도 안 된 이른 시간에 마무리되었다. 처음부터 미성년자인 주연배우를 배려해 시사회 시간을 일찍 잡은 까닭이었다.
“그럼 다음에 또 봐요.”
“수고하셨습니다.”
“오늘 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먼저 가보겠습니다!”
“연락드릴게요.”
한참 동안 인사가 이어지고, 어스래빗 멤버들은 차 두 대에 나눠 탔다. 스타믹스의 지헌은 데리러 온 매니저의 차를 타고 먼저 돌아갔다. 박현우나 윤상진은 따로 가기로 했고, 강덕심은 이희우, 이윤영과 할 얘기가 있다며 남기로 했다.
“다들 회사로 갈 거지?”
“전 숙소요.”
“선물 받은 거 놓고 가게?”
한율은 차에 두었던 고양이 인형과 꽃다발, 가방을 챙겼다.
“네.”
“그래, 잠깐 들르자.”
“써한, 이거 봐봐.”
길우성이 키득거리며 너튜브 영상을 띄운 핸드폰을 건넸다.
“……?”
[RMMA/엠마 애커먼/전부 넋 놓을 때 혼자 다른 반응 보인 남돌]
바로 어제 RMMA에서 시상자로 엠마 애커먼이 등장했을 때 촬영된 직캠이었다.
자막.
[엠마 애커먼이 등장하자 그녀의 미모에]
[남녀 할 것 없이 술렁거리는 아이돌]
[우리 원제로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원제로의 팬이 찍었는지, 원제로를 중심으로 찍던 카메라가 주변을 훑었다. 그러다가 [?] 물음표 자막과 함께 흔들렸던 초점을 위로 맞춰 한율을 주목했다. 그러곤 확대.
[와중에 혼자 흐뭇한 미소 짓는 남돌 발견]
[이분 왜 혼자 따뜻하게 웃는지 이유 아시는 분?]
-아무리 봐도 ‘잘 자랐네’ 흐뭇해하는 미소 같음.
ㄴㅋㅋㅋㅋㅋㅋㅋㅋ
ㄴ19살 서한율이 20살 엠마 애커먼에게..☆
ㄴ지나가던 이프림인데... 어.. 저도 그렇게 느껴지네요ㅎㅎ;
ㄴㅋㅋㅋㅋㅋ
ㄴ심지어 엠마 애커먼이 13살 데뷔해서 배우로도 대선배ㅋㅋ
ㄴ뭐지ㅋㅋ 둘이 잘 아는 사인가?
“…….”
아주 잠깐이었는데 이게 찍힐 줄은.
한율은 속으로 한숨을 쉬며 핸드폰을 돌려주었다.
나도 한율이 영화 보고 싶다
[지헌·JE, <고양이 난로> VIP 시사회 참석]
[스타믹스 지헌과 JE가 8일 낮 영화 <고양이 난로> VIP 시사회에 참석했다.
(사진=앗싸일보)
(영화 <고양이 난로> 포스터=눈길 프로덕션 제공)
<고양이 난로>는 보이그룹 어스래빗 서한율이 첫 주연을 맡은 영화로…(중략).]
핸드폰으로 인터넷 기사를 보던 이해원은 한숨을 쉬었다.
‘나도 한율이 영화 보고 싶은데.’
사실 서한율로부터 VIP 시사회 초대를 받기는 했으나, 드라마 촬영 날짜가 겹쳐서 포기했다.
‘13일이 정식 개봉이니까….’
<뮤직센터>에 출근하는 14일 아침에 잠깐 여유가 있었다. 그러나 짧은 두세 시간 외출도 ‘E’에게 보고 및 허락을 받아야 한다. 이해원은 14일 <고양이 난로>가 상영되는 극장을 검색한 뒤 크게 심호흡했다.
[14일 아침, 출근 전에 극장에 영화보러 가도 될까요?]
E로부터 곧 답장이 왔다.
-[몇 시.]
[9시 20분 상영 영화입니다.]
영화 상영이 끝나도 허튼 곳으로 샐 만한 여유는 없다. 12시까지 샵에 가서 단장을 받고 <뮤직센터>로 출근해야 하므로. 그러니 허락해줄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이해원은 그러길 바라면서 핸드폰만 바라보았다. 답장은 10분이 지나도 오지 않았다.
“해원 씨, 나와서 대기해주세요!”
드라마 스태프의 부름.
“네!”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우웅.
이해원은 핸드폰을 가방에 넣으려다 말고 메시지를 확인했다.
-[같이 가.]
“……!”
뒤늦게 ‘VOD로 풀리면 그때 볼걸’이란 후회가 들었지만, 이제 와서 말을 바꾸면 무슨 꼴을 당할지 모른다.
이해원은 긴 한숨을 내쉬며 답장을 보냈다.
[네. 이만 촬영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 * *
9일 낮. 한율은 조유찬과 함께 샵에 들렀다. 오늘은 더순한화장품 크리스마스 스페셜에디션 세트 상품 출시 기념 팬 미팅이 있는 날이었다. 장소는 늘 가던 종합쇼핑몰.
“응? 은수 씨 일행은 아직 안 왔나요?”
쇼핑몰 내 관리실. 평소 임시 대기실로 사용하던 휴게 공간엔 아무도 없었다. 팬 미팅 진행요원이 대답했다.
“시간에 맞춰서 현장으로 바로 올라오시겠대요.”
“어디서요? 혹시… 차에서?”
“네. 마실 것 좀 드릴까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따로 챙겨왔어요.”
“네. 그럼 편히 쉬고 계세요.”
더순한화장품 측에서 나온 직원도 한율에게 편히 있으라며 자리를 비켜주었다.
“매번 올 때마다 대기실 따로 안 준다고 투덜거리더니, 이젠 아예 차에서 안 나오시겠다?”
조유찬이 목 뒤를 긁적였다.
“이 얘기 알려지면 괜히 우리만 배려 안 해줬다고 욕먹을 느낌인데?”
한율은 숙소에서 챙겨온 보온병을 열었다. 상큼한 레몬 향이 따뜻한 김과 함께 솔솔 올라왔다.
“차 한 잔 드실래요?”
“듣고 있니?”
한율은 휴게실에 비치된 종이컵에다 차를 따라서 조유찬과 경호원에게 나눠주었다.
“지금이라도 저희가 주차장으로 내려가고, 편히 여기 사용하라고 연락하는 건 어때요?”
“으음…. 그러는 게 낫겠다. 어휴….”
후륵. 조유찬은 미간을 구긴 채 소리 내어 차를 마셨다. 그러곤 들고 왔던 가방을 챙겼다.
“어? 어디 가세요? 아직 20분 남았는데.”
휴게실을 나오자 쇼핑몰 직원과 이야기를 나누던 더순한화장품 직원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한율이가 하는 말이, 후배를 배려해주는 게 더 마음 편할 것 같다고 해서요. 은수 씨 쪽에 연락해주세요. 여기로 올라와서 편히 있으라고.”
“아… 네.”
세 사람은 다시 관계자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그들이 차에 타자, 멀찍이 주차된 새카만 밴에서 진은수의 매니저와 경호원, 진은수가 차례대로 내렸다.
“오늘 <스타학교> 방송, 멤버들이랑 같이 연습실에서 볼 거야?”
한율은 고개를 돌리며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아니요. 그 시간에 연습하자고 했어요. 내일도 녹화로 연습에서 빠지니까.”
조유찬이 기특하단 얼굴로 웃었다.
“그래.”
내일은 이희우, 차남석과 함께 SBC <달리는 예능> 녹화가 잡혔다. 한율은 너튜브에서 가장 최근 방영된 <달리는 예능>의 클립 영상을 보았다.
“참, 배우 엠마 애커먼 말이야. 아직 한국에 있나 봐. 엠마가 RMMA에 참석한 거 보고 <달리는 예능> 제작진 쪽에서도 혹시나 하고 연락해봤는데, 전주에서 비빔밥 먹고 있었다더라.”
“…나온대요?”
“아니. <달리는 예능>이 어떤 프로그램인지 잘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무턱대고 출연하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다고, 정중히 거절하더래.”
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섭외되면 대박이었을 텐데. 대한민국 20대 대표 여배우랑 미국의 떠오르는 20대 여배우가 만날 수 있었던 거잖아.”
“그러게요. 형, 예습으로 영상 좀 볼게요.”
“응, 편히 봐.”
잠시 후, 팬 미팅 시작 5분 전. 팬 미팅 진행요원이 직접 그들을 데리러 내려왔다. 그들은 곧장 팬 미팅 진행 장소로 향했다.
꺄악! 한율이 등장하자 한율의 포토 부채나 머리띠를 한 여학생들이 짧게 비명을 질렀다.
“대박, 실물 대박…!”
“오빠, 예뻐요!”
“율아!”
지난번 브랜드 팬 미팅보다 다소 높아진 팬들의 목소리.
과연 저 아이들은 이 팬 미팅에 당첨되기 위해 몇 박스를 구매했을까.
하지만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일반 고객들이 드나드는 장소인데다, 한율의 팬만 모인 건 아니었다.
한율은 팬들을 향해 입가 앞에 검지를 세웠다. 부드럽게 미소 짓는 것도 잊지 않았다.
“쉿.”
그러자 일제히 제 입을 틀어막으며 좋아서 발을 동동 구르는 아이들. 반면 진은수의 팬들은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상관없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테이블 앞에 머쓱하게 앉아있던 진은수가 일어나 고개를 꾸벅였다. 한율도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바로 앞에 초롱초롱 눈을 빛내며 줄을 선 사람들이 잔뜩 있어, 안부 인사는 생략하고 자리에 앉았다.
팬 미팅은 전과 다른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지난번까진 한 번 줄을 서면 두 사람 모두에게 사인을 받을 수 있었지만, 이번엔 한 사람만 선택해 줄을 설 수 있었다.
진은수가 퍼플아워로 데뷔하며 팬이 부쩍 많아진 까닭이었다. 그리고 팬 대다수가 남학생이라, 한율을 고의로 무시하며 지나갈 수 있다고 생각한 업체 측 나름의 배려. 대신 이번엔 당첨자를 2백 명에서 3백 명으로 늘렸다.
“율아, 영화 대박 나자! 꼭 볼게! 열 번 볼게!”
“한 번만 보세요. 열 번 보면 질릴 거예요.”
“그래, 다섯 번만 볼게. 오늘 <스타학교>도 꼭 본방 사수할게!”
한율은 팬에게 씩 웃으면서 사인과 메시지를 적은 엽서를 내밀었다.
“고마워요, 누나. 추우니까 감기 걸리지 않도록 조심하구요.”
“응!”
“…님, 하이요.”
밝은 목소리의 팬이 퇴장한 뒤엔 낮고 굵은 목소리. 한율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안녕하세요, 개나리 오빠분.”
“너무 아는 척하지 마세요. 단골 된 것 같잖아요.”
이미 단골이 아닌가? 한율이 장난스럽게 웃자, 남학생은 입을 일자로 꾹 다물었다가 고개를 돌리며 한숨을 쉬었다.
“고작 세트 세 개 샀는데 두 장이나 당첨됐네요. 오늘도 ‘개나리야, 안녕?’하고, ‘공부 좀 하렴, 개나리야.’라고 적어주세요.”
“이 정도면 로또를 사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성인 되면 잔뜩 사보려고요. 한국 로또, 미국 로또.”
“꼭 당첨되길 바랄게요.”
“감사요.”
2시간 동안 진행된 팬 미팅은 별 탈 없이 끝났다. 스태프들이 팬들에게 받은 선물을 차로 옮기는 동안, 한율은 관리실로 가서 더순한화장품 측 직원과 인사를 나누었다.
“이젠 두 분 다 너무 대스타가 되셔서 지난번처럼 회식 자리에 모실 수 없는 게 참 아쉽네요.”
“대스타가 되기 위해 열심히, 바쁘게 노력 중입니다. 하하하.”
클라이언트 측엔 컴백이 얼마 남지 않아 미리 양해를 구했다. 그리고 이건 진은수 쪽도 마찬가지인 모양.
“팬들과 직접 소통할 수 있는 좋은 자리를 만들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두 분이 활약할수록 우리 회사 매출도 껑충껑충 올라가는걸요.”
“그럼 저희는 먼저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정말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어요.”
“수고하셨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상투적인 인사 끝에 한율 쪽이 먼저 관리실을 나왔다.
차에 타자마자 조유찬이 한율에게 물었다.
“혹시 은수 씨랑 싸웠어? 눈을 전혀 안 마주치던데.”
“제가 은수 씨랑 싸울 이유랑 틈이 어디 있어요, 형. 이젠 외부행동을 더욱 조심 해야 하니 그런 거 아닐까요?”
조유찬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렇겠다. 그나저나 오늘 그 개나리 오빠분? 진짜 신기하더라. 아무리 운은 타고나는 거라지만, 어떻게 매번 적게 사는데도 당첨돼서 오지?”
“그러게요.”
괜히 그 좋은 운을 팬 미팅 당첨에나 소비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
조유찬이 시동을 걸었다.
“다음 팬 미팅에도 오면, 그땐 정말 하늘이 내려준 행운아라고 인정하고 나 걔한테 사인받을 거야.”
그날 밤. 한율과 배우 이희우, 개그맨 이한정이 출연한 <스타학교>가 방송되었다.
교실로 꾸며진 세트장.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벌린 고양이 사진과 ‘고양이 난로 대박’이란 글자가 프린팅된 티셔츠에 교복. 여기에 지난번과 다른 토끼 안마봉에다 어두운 빨간색으로 머리를 염색한 서한율이 등장했다.
[오늘은 왜 인사 먼저 안 해줘?]
<스타학교> 프로그램 톡창이 떠들썩해졌다.
-무슨 웹툰에서 튀어나온 캐 같다ㅋ
-실제로 보면 얼굴 진짜 작다던데 피부도 더 좋고
-아니 벌써 차가 있다고???
-얘 고등학생 아니에요?
-오 이희우다
-미모 미쳤다;;
-비율ㄷㄷ
-이한정 원근감 개무시ㅋㅋㅋㅋ
-이한정이 한참 뒤에 서 있는데 얼굴이 더 컼ㅋㅋㅋㅋㅋ
게스트의 인사와 출연자들 간의 떠들썩한 토크가 이어지고, 본인이 스타라는 걸 증명하는 PR시간.
첫 번째 순서로 서한율이 교탁 앞에 섰다.
[지난번에 증명했는데, 또 해야 해?]
[어. 일정 기간 지나면 다시 증명해서 갱신해야 해.]
서한율이 웃음을 터뜨렸다.
[자격증이야?]
[응, 나중에 녹화 끝나고 3층 복도 끝으로 가서 스타 증명 자격증 받아가.]
-웃는 거 개예뻐ㅜㅜ
-카메라 감독님도 클로즈업한다. 평소엔 필요 이상 안 당기는뎅
[그리고 너 전에 부모님이랑 집 자랑만 하고 갔잖아.]
[그러니까 오늘은 새 차 자랑하고 가. 얼마 주고 샀어?]
-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
서한율은 토끼 안마봉을 어깨에 툭 걸쳤다.
[그 차 내 명의 아니고 아버지 명의야. 그러니까, 내 거 아니야.]
[네가 몰고 다니잖아!]
[아직 두세 번밖에 안 몰았어. 그래서 나도 아직 낯설어.]
[그런데 나 한율이랑 희우 만나면 묻고 싶은 게 있었는데, 진짜로 한율이 네가 희우랑 민준이 이어준 거야?]
[와.]
퉁. 서한율이 토끼 안마봉으로 교탁을 가볍게 내리쳤다. 퍼뜩 생각이 났다는 얼굴엔 희미하지만 억울한 감정이 스쳤다.
[나 방송에 나오면 그 얘기 꼭 하고 싶었어…! 나 정말 아니야. 나도 영화 촬영하러 가다가 기사 보고 알았어. 그전까진 민준 선배님이랑 희우가 서로 연락하는 사이인 줄도 전혀 몰랐거든? 애초부터, 영화 촬영이 끝난 지금도 희우 연락처를 모르는데?]
-율톢 진짜 억울해보인닼ㅋㅋㅋ
-이희우랑 민준 열애설 났을 때, 분명 서한율이 두 사람 이어준 거라고 말 많았짘ㅋㅋ
<스타학교> 출연자가 놀란 눈으로 이희우를 쳐다보았다.
[희우 너 한율이 팬 아니었어? 어스래빗 쇼케이스도 가면서 성덕 인증도 하고 그랬잖아. 그런데 연락처를 모른다고?]
[아. 개인적으로 친해지긴 싫다?]
이희우에게 집중되는 이목. 서한율도 뭐라고 대답할까 궁금해하는 얼굴로 이희우를 바라보았다.
이희우가 천연덕스레 웃었다.
[내가 최근 들어서 생각한 건데, 가깝게 지내는 남자는 가족이랑 내 남자만으로 충분한 것 같아. 그래서 연락처 교환 안 했어.]
-내 남자!!!!!!!
-크으
-민준이 이걸 봐야 하는데!
-민준 탈영하지 않게 잘 잡아라
-한율이 왜 따뜻하게 미소 지으면서 고개 끄덕이는뎈ㅋㅋㅋㅋ
어스래빗 vs 원제로
새벽 5시. 한율은 샵 의자에 앉고 나서야 어제자 <스타학교>와 방송 반응을 보았다.
[<스타학교> 서한율, ‘이희우♡민준 오작교 아니야’]
[9일 방송된 <스타학교>에 어스래빗 서한율과 배우 이희우, 개그맨 이한정이 게스트로 나왔다.
12월 13일 개봉을 앞둔 영화 <고양이 난로>의…(중략).
서한율은 영화 <고양이 난로>를 함께 촬영한 고양이들 이름이 걸그룹 감성소녀의 전 멤버와 현 멤버인 ‘제유’와 ‘미미’인 까닭에 처음엔 부르기가 조심스러웠지만, 다행히 고양이들이 사교성도 좋고 협조도 잘해주어서 촬영이 순조로웠다고 말했다.
한편 서한율이 속한 보이그룹 어스래빗은 14일 새 앨범 [Jump Up]을 들고 뮤닷에서 컴백 쇼케이스를 가질 예정이다.]
-영화감독이 제유 탈퇴 소식에 상심했다는 말 듣고 빵터짐ㅋㅋ ....ㅠㅠ
-그런데 정말 이희우랑 민준 썸타는 거 전혀 몰랐을까? 민준이랑 친한데?
ㄴ아무리 친해도 나이 차 많이 나는 동생한텐 연애 얘기 잘 안 하지 않나영? 멤버들도 있는데 궂이?
ㄴ궂이(x), 굳이(o)
-어제 쇼핑몰에서 서한율 봤는데, 생각보다 키 커서 조금 놀람;
ㄴL쇼핑몰서 더순한 팬미팅하는 거 보신 듯? 키는 작년에 쟀을 때 178.9cm였다고 했으니 지금은 179 무조건 넘었을 것 같네요ㅇㅇ 신발까지 생각하면 180이라고 봐도 무방할 듯
ㄴ어스래빗 평균 키가 179cm 정도라고 하더라구요ㅎㅎ 그래서 멤버들이랑 같이 있으면 그렇게 안 커 보이는데, 실제로 보면ㅎㅎㅎ
한율은 댓글을 대충 넘기며 생각했다.
‘키는 올해 4월에 재보고 다시 안 재봤는데.’
그때도 178.9cm가 나오고, 모친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에게 키 컸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없어서 멈췄나 보다 하고 말았다.
“형. 키 마지막으로 언제 쟀어요?”
잠이 덜 깨서 멍하니 거울을 보던 옆자리의 차남석이 대답했다.
“언제였더라…. 몇 달은 된 것 같은데.”
“몇 나왔어요?”
“181cm? 이제 슬슬 멈추는 것 같아. 넌?”
“전 4월에 쟀을 때 그대로였어요.”
“한참 전이네. 그래도 0.1cm는 크지 않았을까?”
헤어 메이크업을 다 받은 후엔 스타일리스트가 가져온 옷으로 갈아입고 차에 탔다.
촬영장으로 향하는 동안, 차남석이 핸드폰으로 <달리는 예능> 클립 영상을 보며 말했다.
“사람들 반응이 미적지근해도 뻔뻔하게 굴어야 할 것 같아. 아무리 게스트라도, 조금이라도 소극적이면 전혀 주목을 못 받는다더라고. 멘트 타이밍 잡기도 힘들고.”
오늘 <달리는 예능> 게스트는 한율과 차남석, 이희우 외에도 두 명 더 있었다. 바로 원제로의 리더 유지와 당시 내내 상위권에 머물다 1위로 뽑힌 라일. 원제로도 이번 주에 컴백하는 까닭에, 그들의 화제성을 생각해 섭외한 듯했다.
어쨌든 출연자들까지 더하면 무려 13명. 까딱하면 방송에 나왔는지 모를 정도로 존재감이 없어질 터.
조유찬이 말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건 다치지 않도록 조심하는 거야. 너희 컴백 코앞이다.”
한율과 차남석은 동시에 대답했다.
“네.”
<달리는 예능> 녹화가 진행될 장소는 경기도의 한 기업 연수원. 두 사람은 도착하자마자 제작진에게 먼저 인사를 한 뒤, 출연자 대기실을 찾았다.
방송에서는 게스트가 나올 때 모두 ‘저 사람이 나올 줄 몰랐다!’라는 반응을 보이지만, 사실은 섭외 단계에 있을 때 다른 출연자와 게스트 측에 알려주는 게 일반적이었다. 이렇게 녹화에 들어가기 전 인사를 나누기도 하고.
“안녕하십니까! 어스!”
“래빗! 의 서한율!”
“차남석이라고 합니다! 오늘 녹화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두 사람의 힘찬 인사에, <달리는 예능>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출연자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열심히 해.”
출연자 중에는 유기원도 있었다. 한율과는 KBC <목톡톡>에서 두 번, <신나는 친구>까지 해서 세 번째 만남. 그는 아주 반가운 얼굴로 한율과 포옹했다.
“오랜만이다, 한율아. 잘 지냈어?”
“네. 늘 방송 잘 보고 있습니다, 선배님.”
“그래. …와, 이 친구가 차남석이구나. 와, 실물로 보니까 정말 잘생겼는데?”
감탄사를 두 번이나 내며 그는 차남석과 악수했다.
“만나서 영광입니다, 선배님.”
“영광이라고 말해주면 내가 더 쑥스럽지. 나중에 녹화할 때도 말해줘.”
“네.”
다른 출연자들에게도 한 명씩 인사를 마칠 무렵엔 이희우가 도착했다. 뒤이어 원제로의 유지와 라일도.
“오늘 녹화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제작진, 데뷔 연차에 따른 출연자, 게스트 순으로 인사를 모두 마친 후엔 작가와 PD에게 간단히 피드백을 받고 나서 게스트 대기실에 앉았다.
이희우가 한율과 차남석에게 물었다.
“어제 <스타학교> 방송된 거 봤어?”
“네. 오늘 아침 샵에서 봤어요.”
“시청자 반응 좋던데요? 작품 속 모습이 아닌, 선배님에 대해 알게 된 것 같아 신선했다고.”
“이제 <뮤직마켓>이랑 이 프로그램까지 줄줄이 나가면 지겹다는 말이 나올 지도 몰라.”
“그렇진 않을 거예요. 그런데 그저께는 잘 들어가셨어요? SNS 보니까 새벽에 사진 올리셨던데.”
“잘 들어갔지. 잘 들어갔는데, 아침 되자마자 민준한테서 전화 왔어.”
고개를 흔들며 한숨을 쉰 이희우는, 울적한 얼굴로 민준이 했던 말과 톤을 그대로 재연했다.
“누나, 새벽까지 밖에서 술 마신 거야? …이러더니 정말 한~참 동안 아무 말도 안 하는 거야. 차라리 잔소리라도 할 것이지.”
“이젠 선배님이 취해도 데리러 가줄 수 없으니 걱정되신 거 아닐까요.”
“윤영이랑 강덕심 선생님, 그리고 민선이. 이렇게 여자들끼리 술보다는 수다에 집중해서 많이 취하지 않았다 그랬더니 그제야 웃더라.”
“선배님 휴가는 언제 나오신대요?”
“백 일 휴가라고, 입대한 지 서너 달 지나면 나온다던데. 나올 때 되면 연락 올 거야.”
“…….”
“…….”
한율과 이희우, 차남석이 편히 대화를 나누는 동안, 원제로의 두 사람은 눈동자만 가만히 굴렸다. 한율과 차남석만 있다면 몰라도, 이희우가 있어서 잔뜩 긴장한 눈치였다.
스태프가 들어와 고했다.
“10분 후 녹화 시작합니다. 다들 준비해주세요.”
“네.”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입을 다물고 거울을 보거나 스타일리스트 앞에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