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오늘의 주제는, ‘고양이가 지켜보고 있어’입니다. 여러분 중에는 착하고 사랑스러운 고양이, ‘못난이’를 노리는 나쁜 사람 두 명이 숨어있습니다.”
게스트 등장과 인사, PR 시간이 끝나고 오늘 할 게임에 관한 설명이 이어졌다.
“여러분이 이 두 사람으로부터 끝까지 못난이를 지키면, 못난이는 자신의 소중한 보금자리로 여러분을 안내할 것입니다. 못난이가 있는 장소나 나쁜 사람에 대한 힌트는 게임을 통해 획득한 점수로 알아낼 수 있으며, 나쁜 사람 둘 중 한 명이 먼저 못난이를 찾아내 이기면, 점수가 가장 낮은 팀과 해당 나쁜 사람이 속한 팀의 팀원도 함께 벌칙을 받게 됩니다.”
“나쁜 사람만 빼고요?”
“네. 하지만 중간에 나쁜 사람을 걸러낼 기회가 주어지므로….”
게임 룰을 숙지한 후엔 팀을 정하는 간단한 게임이 이어졌다. 3명씩 세 팀, 나머지 한 팀만 4명으로. 한율은 <달리는 예능> 고정 출연자인 가수 김중구, 배우 송혜지와 같은 팀이 되었다.
준비된 팀복으로 갈아입고 다시 카메라 앞에 선 곳은, 널찍한 트램펄린 두 대가 나란히 설치된 강당이었다.
“첫 번째 게임은, 못난이가 좋아하는 장난감 수집입니다. 위에 걸린 털 뭉치 장난감을 점프로 낚아채, 아래에서 팀원이 들고 있는 바구니에 던져서 골인하면 개당 10점입니다. 한 사람당 제한 시간은 2분으로, 팀원이 4명인 유 팀은 세 명만 나올 수 있습니다.”
“우리 팀은 누가 먼저 나갈까?”
한율은 먼저 손을 들었다.
“제가 먼저 나갈게요.”
김중구가 고개를 끄덕이며 한율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그래. 컴백 얼마 안 남았으니까 다치지 않도록 조심하고.”
옆에서 힐끗거리며 염탐하던 유기원이 질색하는 얼굴로 야유했다.
“어우, 김중구 한율이한테 새삼 따뜻하게 구는 거 봐. 누가 보면 평소에도 후배 아끼는 선밴 줄 알겠어.”
“평소에도 후배 잘 챙기거든요? 자주 볼 일이 없어서 그렇지. 한율아, 아버지한테 말 잘 전해주고. 나 시사교양 프로그램도 자주 챙겨보는 남자야.”
방송 재미를 위한 멘트 및 장난이었다. 카메라가 돌아가지 않을 땐 다치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말로 그쳤었다.
“그럼 선배님께서 제일 감명 깊게 본 프로그램은 뭐예요?”
“어? 감명 깊게 본 거?”
잠깐 당황해하는 김중구 옆에서 유기원이 또 끼어들었다.
“인체 탐험 근육의 세계.”
“아잇, 이 사람이 진짜!”
한율은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첫 번째로 대결할 팀은 한율의 팀과 원제로의 유지가 속한 팀이었다.
“처음부터 아이돌끼리 붙는 거야?”
“오오, 기대된다.”
“어스래빗 대 원제로! 원제로 대 어스래빗! 과연 누가 이길 것인가!”
다른 팀에 속한 라일이 외쳤다.
“형! 10대한테 지지 마!”
한율은 보호장비를 착용하고 트램펄린으로 올라갔다. 발밑이 푹푹 탄력적으로 꺼지는 느낌이 무척 생소했다. 바구니를 머리에 진 송혜지가 소리 높여 물었다.
“한율아, 트램펄린에서 놀아본 적 있지? 초등학교 다닐 때나 어릴 때.”
한율은 시험 삼아 가볍게 뛰어보면서 웃었다.
“아니요, 처음이에요.”
“……?!”
김중구가 황당한 얼굴로 벌떡 일어났다.
“야, 너 그러면서 제일 먼저 나가겠다고 한 거야?!”
“자신감 굿굿.”
“유지 넌?”
“한때 방방장에서 날아다녔습니다!”
“오오!”
위에서 털 뭉치 모양의 장난감 여러 개가 낚싯대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 내려왔다.
“놓쳐서 떨어진 장난감을 다시 주워서 본인 팀 바구니에 넣는 건 무효지만, 상대 팀 바구니에 넣는 데에 성공하면 10점을 뺏어올 수 있습니다! 그럼 첫 번째 대결 시작하겠습니다. 3, 2, …1.”
삑. 휘슬이 울렸다.
한율은 가볍게 점프하며 손을 뻗었다. 닿지 않았다. 무릎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부드럽게 착지한 후 반동을 이용해 힘껏 점프. 시선은 오로지 낚싯대에 걸린 털 뭉치를 향했다.
‘꼭 고양이가 된 기분이네.’
부모의 집에 갔을 때 고양이에게 장난감 낚싯대를 흔들며 놀아주곤 했는데, 반대 입장이 될 줄이야.
타악.
“오, 한율이가 먼저 잡았어!”
“이제 바구니에!”
제한 시간은 2분. 한율은 송혜지가 든 바구니의 위치를 가늠하곤 가볍게 던졌다. 그러나 의욕이 넘친 송혜지가 얼른 바구니로 받기 위해 폴짝 뛰었다가, 손과 털 뭉치가 부딪쳐 바닥에 떨어지며 아웃.
“미안해…!”
“괜찮아요!”
“시간이 없어, 바로 다음 거 잡아! 혜지 넌 가만히 있어!”
한율은 다시 폴짝폴짝 뛰며 털 뭉치 장난감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때 들리는 PD의 목소리.
“유지 팀, 20점!”
벌써? 한율의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 그리고 곧바로 들려온 해답.
“오, 두 개 한꺼번에 잡아서?”
한율도 마저 다른 손을 급하게 뻗어, 장난감 두 개를 움켜잡았다. 그러고 같은 팀 바구니를 찾기 위해 몸을 돌린 순간,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는 상대 팀의 장난감을 포착.
한율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왼손에 든 장난감을 던졌다.
휙, …툭.
한율이 던진 털 뭉치가 유지의 털 뭉치를 쳐내고 대신 바구니로 쏙 들어갔다.
“……?!”
“뭐야!”
“날아가는 걸 맞춰서 떨어뜨리고 자기네 걸 넣은 거야?!”
“아니, 저래도 되는 거예요?! 떨어진 것만…!”
한율은 당황한 얼굴로 저를 쳐다보는 유지와 그 팀원들의 항의를 뻔뻔하게 무시하며, 다른 손에 든 장난감을 같은 팀 바구니에 골인시켰다.
PD가 씨익 웃으면서 외쳤다.
“네, 떨어지지 않은 장난감으로 빼앗은 점수도 인정! 김중구 팀 단번에 20점 획득합니다! 유지 팀은 10점 빼앗겨서 10점!”
“저거 맞출 생각을 어떻게 한 거야?”
“첫 대결부터 치열하다, 진짜.”
“양손잡이는 반칙이지…!”
한율은 유지를 향해 환하게 웃으며 도발했다.
“이번엔 제가 던져볼게요, 선배님!”
이번엔 어디 네가 한번 맞춰보라는 말.
당황해서 어떤 리액션을 보여야 할지 망설이던 유지는, 한 템포 늦게 울컥하는 반응으로 보였다. 조금이라도 방송 분량을 확보하려는 한율의 의도를 읽고서.
“콜!”
한율과 유지의 첫 번째 대결은 70점과 40점으로 한율이 승리했다.
컴백 축하
“나중엔 완전히 체력전 아니었냐?”
<달리는 예능> 녹화를 끝내고 서울로 돌아가는 차 안. 덜 마른 머리카락을 손으로 대충 빗질하며 차남석이 헛웃음을 흘렸다. 8시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하늘은 캄캄했고, 그들은 녹초가 되었다.
녹화 중간 쉬는 시간이 몇 번 있었지만, 분량 확보를 위해 내내 카메라를 의식하며 리액션하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여기에 녹록지 않은 고정 출연자들 사이에서 멘트 타이밍을 노리는 것 또한.
게스트에게 이목이 쏠리는 토크 위주의 예능, 팬들에게 항의받지 않도록 제작진이 분량을 신경 써주는 뮤닷 쪽 예능과는 정말 달랐다.
“그리고 희우 선배님이 그렇게 힘센 줄 나 처음 알았다.”
“승부욕이 강하시긴 하더라고요.”
“그러는 너는.”
한율은 어깨를 으쓱였다.
“이왕 하는 거, 이기면 좋잖아요.”
“남석아, 히터 더 세게 틀어줄까?”
“아니요, 지금이 딱 좋아요.”
“너희들 저녁은 어떡할래? 회사로 돌아가면 9시 조금 넘을 것 같은데.”
한율은 전원을 꺼둔 핸드폰을 켜면서 잠시 고민했다. 돌아가서 안무 연습을 하려면 뭔가를 챙겨 먹긴 해야 한다. 힘이 실리지 않은 채 연습하면 안 하느니만 못하므로.
“간단하게 샐러드 하나 먹을까요?”
“닭가슴살?”
“단호박도 괜찮고.”
“승우 씨한테 지금 사놓으라고 해야겠다.”
마찬가지로 핸드폰 전원을 켜던 차남석이 대답했다.
“제가 전화할게요.”
한율은 그사이 들어온 연락을 확인하곤 인터넷에 들어갔다. 연예뉴스란 메인에 제유가 WB래빗과 전속계약을 맺었다는 기사가 떠 있었다.
[감성소녀 탈퇴 제유 WB래빗行! 본명 유제희로 배우 활동]
[고양고양 엔터테인먼트와 전속계약이 만료되며 걸그룹 감성소녀에서도 탈퇴한 유제희(제유)가 WB래빗 엔터테인먼트와 전속계약을 체결했다.
2008년 MBS <꿈과 요리하자>로 데뷔한 유제희는…(중략).]
-제유 솔로 앨범 기대해도 되는 거? ㅎㅎ
-얘 같은 멤버 폭행하지 않았나? 얠 품어주는 회사가 있네ㄷㄷ
ㄴ일방적 폭행 아니고 다툼이었고, 화해한 지 오래됨.
ㄴ비글 사이에서 6년 넘게 보살처럼 지낸 사람입니다ㅜㅜ
ㄴ비글 욕하지 마라ㅡㅡ
ㄴ보살ㅇㅈ
-떠비 소속 연예인이 한 명 빼고 다 아이돌인데 배우로?
ㄴ떠비 배우 매니지 일에도 본격적으로 손대는 듯요. 배우 매니지 업무 경력자 구인 공고 뜸ㅇㅇ
ㄴ지금 있는 애들한테나 신경 써주지..
ㄴ다른 아이돌들 데뷔하자마자 폰 뺏기고 매니저랑 숙소에서 감시받고 지내면서 심지어 쌍욕까지 먹으면서 기합받고 그럴 때 떠비는 통제? 감시? 그런 거 뭐임? 이러면서 애들 제대로 인간 대접해준다고 다른 아이돌이 전부 부러워했음ㅇㅇ 이제 막 데뷔한 드림래빗 빼고, 크래랑 어스 매니저 전부 애들 데뷔 때부터 같이 일한 것만 봐도ㅋ
ㄴ떠비가 직원 복지도 좋아서, 한번 채용되면 잘 안 나가려고 그런대요ㅋㅋㅋ 다른 회사에선 로드매니저 월급 최저도 못 받고 그러는데 여긴 4대 보험에 특근까지 다 잘 챙겨준다고ㅎㅎ
ㄴ그만큼 채용할 때 엄청 까다롭게 뽑는다네영ㅇㅇ
-돌판 오래 지켜본 사람들은 알지. 떠비가 융통성은 없어도 소속사 애들은 잘 챙겨준다는 거
-유제희 앞으로 꽃길만 걷자!!!! 홧팅!!!!!
-WB래빗 대표님, 지금껏 제희에 대해 악플달고 악성 루머 뿌린 녀석들 PDF 수집 파일 전부 회사 메일로 보냈습니다. 법적 대응이 취미란 거 다 알고 있어요.(찡긋)
ㄴ떠비 법적 대응 취미설
ㄴ과연ㅋㅋㅋㅋ
차남석 관련 기사도 떴다.
[아버지 빚투 논란 차남석, 오늘 <달리는 예능> 녹화 예정대로 소화]
[어스래빗 차남석, 오늘 10일 아버지 채무 전액 변제]
“형 얘기는 잠잠해지려면 며칠 걸릴 것 같네요.”
“그럴 것 같다.”
윤승우와 짧은 통화를 마친 차남석이 핸드폰을 높이 들었다. 그러곤 살며시 미소 지으며, 찰칵.
곧 핸드폰에 차남석이 SNS 새 글을 올렸다는 알림이 떴다.
[녹화 끝나고 회사로 돌아가는 길! 16일 일요일 <달리는 예능> 기대해주세요! :)]
* * *
12월 13일. 한율의 첫 단독 주연 영화 <고양이 난로>가 정식으로 개봉했다.
확보된 상영관은 그리 많지 않았지만, 영화 제작 규모나 장르, 주연배우의 영향력과 필모그래피를 감안하면 첫날 성적은 나쁘지 않았다.
-소소하게 보기 좋은 힐링 영화★★★★☆
-퇴근 시간 맞춰서 보러 갔는데 어스래빗 팬들이랑 랜선 집사는 일단 다 예매한 듯함ㅋㅋㅋㅋ
-이거 부제 ‘못난이의 비밀’로 해야 함
ㄴ스포 자제요ㅡㅡ
-일단 연기 구멍은 한 명도 없어서 좋았다
-스토리는 쏘쏘. 영상미랑 음악이랑 배우들 연기는 굿굿.
-못난이 티셔츠 사고 싶은데 어디에서 팔아요? 스타학교에서 배우들이 입고 나온 티셔츠요ㅜㅜ
ㄴ그거 서한율 소속사에서 배우랑 스태프들 선물로 특별제작한 거라 시중엔 안 팔아요ㅎ
ㄴㅠㅠ....
-영화 한 줄 평: 못난이 선생의 캔 따개 간택 수난기.
ㄴ이거 맞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고양이 싫어하던 윤우가 마지막에 마음 열고 못난이 소중하게 안아주는 장면에서 보는 내가 다 울컥함ㅠㅠ 평생 행복해라
ㄴ정말 그 장면에서 윤우 평범한 남자애 특유의 자존심 땜에 담담함을 가장하려고 하지만 눈동자나 못난이 안는 손길이..(말잇못)
-고난 제작사는 빨리 메이킹필름을 내놓아라
-메이킹필름내놔
몇몇 연예인들은 SNS에 영화 관람을 인증하기도 했다. 이희우와 친분이 있는 배우나 감독을 비롯해, 한율과 친한 아이돌들도. 보이그룹 풀썸은 단체 관람을 인증했다.
[RMMA에서 30분 동안 무료 연기 특강을 해주신 서한율 님의 <고양이 난로>를 봤습니다. #못난이너무귀여워 #고양이난로대박 #어스래빗1214JumpUp컴백축하]
여기에 엠마 애커먼까지. 그녀는 <고양이 난로> 팸플릿을 들고 셀카를 찍어 올렸다.
[[한국말은 잘 모르지만, 고양이는 귀여웠다!!]]
-이분 아직도 한국에 있..?
-현재 제주 관광 중이시군요ㅎㅎ
-존예
한율은 다음 날인 14일이 되어서야 영화 반응을 보았다. 어스래빗 세 번째 EP 앨범, [Jump Up] 컴백 쇼케이스 공연장으로 가는 길에. 옆에서 한율의 핸드폰을 멋대로 들여다본 길우성이 중얼거렸다.
“나도 못난이 티셔츠 갖고 싶다아….”
반대편에 앉은 강보배가 고개를 끄덕.
“나도. 유찬이 형, 정말 못난이 티셔츠 남는 거 없어요?”
“응, 없어.”
“와.”
뒷좌석에서 이건우가 툭툭 앞자리를 두드렸다.
“원제로 오늘 뮤센 1위 후보.”
“왓?!”
길우성이 놀란 얼굴로 이건우를 돌아보았다.
“어제 컴백했는데?!”
“앨범 판매량이랑 스밍 화력이 장난 아닌 것 같아.”
“컴백하자마자 1위 후보…. 걔네 인기 정말 장난 아니구나….”
“노래랑 뮤비도 좋더라. 괜히 애들 사이에서 2년 프로젝트 그룹이라 다행이란 소리가 나오는 게 아닌 것 같아.”
“비교하지 마, 얘들아!”
조유찬이 돌연 큰 소리로 말했다.
“너흰 너희만의 매력이 있어. 그리고 팀워크만 놓고 보면 너희, 탑 티어에 거뜬히 들걸? 성실한 면도, 인성도.”
“와아, 유찬이 형이 칭찬해준다아.”
“확실히 우리 애들이 성격이랑 팀워크가 좋기는 하죠.”
이건우가 씨익 웃었다.
“틀린 부분이 없는데도, 꼬투리 잡아 아무리 빡세게 반복 연습시켜도 군말 없이 잘 따라와 주기도 하고.”
“네? 이건우 씨? 방금 제가 뭘 들은 거죠?”
…틀린 부분이 없는데도?
한율도 이건우의 말을 한 번 곱씹은 뒤 그를 돌아보았다.
“이 자리에 가람이 형 있었으면 바로 형 멱살 잡았을걸요.”
“하하하. 없으니까 마음껏 말한 거지.”
이번에 그들이 컴백 쇼케이스를 할 장소는 지난번에도 왔던 YY 라이브 홀.
당시 이곳에 처음 발을 들였을 땐, 이렇게 큰 규모의 공연장을 단독으로 채운다는 것에 부담을 느낀 멤버들이 있었으나, 이번엔 달랐다. 이미 한번 와 본 곳이고, 아시아 해외 투어를 성공적으로 마치며 자신감과 경험도 붙은 상태.
멤버들은 익숙하게 무대 끝에서 끝까지 가볍게 합을 맞춰보면서 동선을 점검, 그걸 찍은 영상을 확인하고 소소하게 걸리는 걸 캐치해서 조정했다.
인터뷰와 VCR 없이 첫 번째 리허설을 진행할 때도, 피드백만 받고 따르는 데에 그치지 않고 공연 연출가에게 의견을 내는 일도 많아졌다.
“왼쪽 객석 앞, 오른쪽 객석 앞, 이렇게 이동할 때 위의 조명이 바로 따라오잖아요. 하지만 한 줄 뒤 조명이 은은하게 다, 다, 다. 이런 느낌으로 오는 게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 PD님 생각은 어떠세요?”
“이 부분에선 카메라 구도가 뒤의 메인 LED랑 같이 잡혀서 좀 산만하게 보이는 것 같은데 괜찮을까요?”
“여기에선 정말 눈에 띄게 환한 미소 지으면서 원, 투, 따단. 속으로 박자 잘 맞춰야겠다.”
“보배, 시선 처리 진짜 많이 좋아졌는데?”
그사이 MC 김태건이 도착하여 최종 리허설을 진행. 그러다 보니 어느새 쇼케이스 2시간 전이 되었다.
위이잉. 드라이어기 소리가 시끄럽게 울리는 대기실 안. 단장 순서가 나중인 멤버들은 구석에서 흩날리는 먼지를 마시며 도시락을 먹었다.
조유찬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여유가 더 있었다면 전날도 리허설할 수 있도록 잡았을 텐데.”
“연말이라 공연장 대관 예약 잡는 거 힘들잖아요. 괜찮아요.”
“12월 불금에 이만한 공연장 잡는 게 어디 보통이에요?”
도시락을 먹고 나선 양치와 세수를 했다. 토너로 듬뿍 적신 화장 솜으로 피부 결을 정돈한 후엔 스킨을 바르고 마스크팩 부착. 그 상태로 소파에 앉아서 최종 리허설 영상을 돌려보며 미흡한 점을 찾았다.
비하인드 영상을 찍는 카메라에 대고 장난스럽게 웃거나 노래를 흥얼거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잠시 후 저녁 8시.
2,500여 명의 관객 앞. 그리고 뮤닷 채널을 통한 생방송으로 어스래빗의 세 번째 EP 앨범 [Jump Up]의 컴백 쇼케이스가 시작되었다.
“선배님들 표정 연기 진짜 좋다….”
MBS <뮤직센터>에서 퇴근하고 숙소로 돌아가는 원제로의 차 안. 매니저에게 빌린 핸드폰으로 어스래빗 컴백 쇼케이스를 보던 현강희가 중얼거렸다.
“섬세한 디테일도.”
함께 영상을 보던 변지욱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율이 형이랑 남석이 형이야 뭐 말할 것도 없고, 보배 형도 본인 얼굴의 매력이랑 장점을 활용하기 시작했는데?”
라일도 감탄했다.
“표정 맛집이다, 진짜. 그러면서 박자 딱딱 맞는 것 봐. 아직 타이틀 곡도 안 나왔는데 이 정도면.”
“그렇게 좋아?”
뒷좌석에 앉아있던 유지가 물었다. 세 사람은 핸드폰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네.”
“어.”
“응.”
“…….”
“내가 장담하는데, 이번 앨범으로 어스래빗 더 확 뜰 것 같아. 안 좋은 이슈이기는 하지만, 남석이가 더 크게 노출되기도 했잖아. 완전 존잘이라고. 여기에 <달리는 예능>까지 출연하… 와, 키 작은 형님도 고음 대박인데? 소름.”
“조용히 해 봐요, 라일 형. 안 들리잖아.”
“넵.”
곧 차 안에는 어스래빗 노래만 맴돌았다.
차창에 머리를 기댄 채 깜빡 잠들었던 정민솔은 살며시 미간을 구겼다가 눈을 떴다. 노래를 부르는 익숙한 음색을 듣고.
“…….”
이윽고 노래가 끝나자 조용히 집중하던 멤버들이 떠들었다.
“어스래빗, 바로 내일 <뮤직뮤직>에 나오지?”
“네, 라인업에 있었어요. 컴백 스페셜 스테이지 한다고.”
“드라이 리허설하는 거 눈앞에서 보고 싶다.”
“잘하면 볼 수 있지 않을까? 우리 순서가 뒤잖아.”
어스래빗의 차남석, 서한율과 함께 <달리는 예능> 녹화를 하면서 따로 친해지기라도 한 걸까. 라일이 웃으면서 장난스럽게 말했다.
“일찍 가서 기다렸다가 ‘어, 남석아, 왔어? 컴백 축하해.’ 이러면서 함께 스윽 들어가서 보는 거야. 자연스럽게.”
“그러고 보니 음방에서 어스 형들 단체로 만나는 건 처음인데? 교환할 앨범에다 메시지 따로 적어야겠다.”
들뜬 목소리로 말한 변지욱이 앓는 소리를 냈다.
“으음…. 그런데 뭐라고 적지?”
“단순히 컴백 축하한다고 적는 건 너무 무난하고.”
“난 표정 연기 강습받고 싶다고 적을 거야.”
“…….”
그래봤자 우리보다 인기도 성적도 낮은 팀인데, 뭐가 저렇게 좋을까.
정민솔은 다시 눈을 감으며 잠을 청했다.
일상화(花)
“지난번 [Invitation card] 쇼케이스 이후로 반년밖에 안 지났는데, 다들 이번 앨범 타이틀 [Jump Up]처럼 실력이 꺼엉충 향상됐어요. 그동안 미국에도 다녀오고, 아시아 투어도 다녀오고 정말 많이 바빴을 텐데, 언제 이렇게 레벨업한 거예요?”
어느덧 세 번째 무대가 끝나고 토크 시간. 박가람이 환하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첫 해외 공연, 첫 해외 투어. 그 자체가 아주 큰 경험이 된 것 같아요. 나라는 달라도 우리의 노래, 우리의 무대를 보면서 즐거워하는 분들을 보면서 자신감도 많이 생기고, 어? 조금 더 뻔뻔하게 귀여운 척, 멋진 척해도 되겠는데? 이런 생각도 들고?”
박가람이 객석을 향해 귀엽거나 치명적인 척하는 표정이나 포즈를 취했다. 팬들이 호응했다. 꺄아! 귀여워!
이건우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이러면서 이프림 분들도 점점 너그러워지시고요. …왜 그렇게 보시죠, 박가람 씨?”
“벌크업 그만하세요.”
“네?”
“벌크업 그만하고 싸우자고요, 이건우 씨.”
다음 무대를 준비하는 동안 흘러나오는 VCR 영상. [2018. 09. 14. 홍콩] 자막이 먼저 표기되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시죠, 서한율 씨?]
유호의 목소리. 발코니 난간에 팔을 걸친 채 도시의 야경을 바라보는 한율의 옆모습이 나왔다. 방금 막 씻었는지, 메이크업을 전혀 하지 않은 얼굴은 새하얗고 깨끗했다.
한율이 야경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젖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천천히 흔들렸다.
[평화롭다는 생각? 형은요?]
[으음…. 참 적막하다?]
한율이 살며시 미소 지었다.
[공연장에 비하면 아주 조용하기는 하죠.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음악이랑 팬분들의 함성이 가득 울리는 공간에 있었는데, 갑자기 혼자 동떨어진 느낌도 들고.]
[맞아, 그런 느낌. 평소엔 괜찮은데, 큰 공연장에 섰다가 돌아오면 단순히 조용한 게 아니라 적막으로 느껴져. …나만 이렇게 느끼는 게 아니었구나.]
유호가 웃자 카메라도 흔들렸다.
[그리고 한편으론 신기하기도 해.]
[뭐가요?]
영상에 홍콩의 야경이 담겼다.
[이 도시 어딘가에 조금 전 우리 이름이랑 노래를 불러준 누군가가 있는 거잖아. 그분에겐 여기가 일상이고, 우리는 그 일상에 잠깐 찾아간 깜짝 이벤트일지도 몰라. 그런 생각을 하면 뭔가 막 감정이… 뭐라고 해야 하지? 딱 집어서 표현하기가 힘드네.]
[나중에 이 영상 다시 보면서, 지금 느꼈던 감상을 차분히 정리하면 좋은 가사가 나올 것 같은데요?]
한율이 카메라를 잡았다. 휙 돌아간 영상은 이번엔 유호를 담았고, 객석에선 웃음이 터져 나왔다. 팬에게 선물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사과 머리띠로 앞머리를 넘기고, 여기에 큼지막한 안경까지 쓴 유호가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으음…. 방금 내가 한 말을 그대로 담기엔 너무 흔한 것 같은데. 그럼 작사 작업할 때 한율이 네가 도와주는 걸로.]
[제가요?]
[응. 네가요.]
팬들의 웃음은 이내 잔잔한 미소로 변했다. 불과 몇 시간 전 공개된 이번 앨범 수록곡 중, 작사에 ‘서한율’이 올라간 곡은 딱 하나였다.
‘이번 무대는 그 곡이구나.’
VCR은 유호가 진지한 얼굴로 곡 작업을 하고, 한율과 함께 가사지를 두고 의논하고 수정하는 모습으로 이어졌다.
이윽고 메인 LED 전광판이 암전되더니, 새카매진 화면에 흰색 선이 슥슥 그려졌다. 선은 피어나는 꽃과 도심의 풍경, 곡명이 되었다.
[일상화(花)]
천천히 밝아지는 조명. 관객이 VCR을 주목하는 동안 무대에 꾸며진 파스텔 톤 세트와 소품이 드러났다. 미소 띤 얼굴로 안무 대형을 갖춘 어스래빗 멤버들도.
음악이 시작되자 그들은 하나의 유기체처럼 부드럽게 움직이다 갈라졌다. 가벼운 몸짓, 그러나 뛰어난 춤 실력을 선보이며 길우성이 센터로 나왔다.
[톡 튀어 오른 꽃씨 하나, 네 일기 속 꽃잎 될까.]
[내 일상의 너, 적막을 빛으로 물들여, 화(花).]
[겨울에도 불러줘서 고마워, 소소한 이벤트야.]
길우성이 빙글 몸을 돌리고, 이번엔 한율이 등장.
[같은 바람을 맞으며 밴 향기, 사라져도 괜찮아.]
[1년, 2년, 일상이 계속되는 한 지지 않아.]
[언젠가 마른 책갈피가 된대도.]
한율은 환하게 미소 지었다.
[난 너의 일상 속 화(花), IDO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