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3화 (133/427)

* * *

[어스래빗, 한층 성숙해진 컴백 ‘Jump Up!’]

[14일 오후 YY 라이브 홀에서 어스래빗의 세 번째 EP 앨범 [Jump Up] 발매기념 컴백 쇼케이스가 열렸다.

어스래빗의 리더 유호는 이번 앨범 [Jump Up]에 대해 ‘막내들의 10대를 어떻게 보내줘야 할까’하는 고민에서 시작…(중략).

어스래빗의 컴백 쇼케이스는 뮤닷과 너튜브를 통해 전세계에 생중계되었으며, 타이틀곡 M/V 조회수를 비롯하여 앨범 예약 판매량 또한 자체 최고 기록을 세우는 등…(중략).

어스래빗은 내일부터 한 달간 국내 활동에 전념할 예정이며 다가오는 1월 KBC <뮤직뮤직 in 칠레> 라인업에도 이름을 올리며 글로벌 대세를 입증했다.

한편 전날 13일에는 서한율 단독 주연 영화 <고양이 난로>가 개봉….]

-어스래빗은 8명의 멤버로 구성되어 있으나 한 명, 한 명 겹치는 이미지가 전혀 없으므로 일단 뮤비 한 번 보시고 결정하시면 됩니다. 아, 차남(유일하게 복근 까는 애)은 제 겁니다.

-보컬3 예고에서 중간고사에 대해 ‘아예 생각을 안 하려고요.’라고 웃던 17살의 한율이가 벌써 다음 달이면 스무 살..

ㄴ하.. 나만 늙지 또ㅜㅜ

ㄴㅠㅠ..

ㄴ전 아직도 99즈의 술 얘기를 들으면 인지부조화가 찾아오면서 동공이 흔들리더라고요. 얘네가 지금 뭔 소릴 하는 거지..?

-내일 MBS K<주말아이돌> 4시 어스래빗 편 방송! 5시엔 KBC <뮤직뮤직>에서 컴백 스페셜! 7시엔 tv Mu <뮤직마켓>에 서한율 나옵니다! :D

-후.. 오늘 뜬 달예 예고 보고 컴백 쇼케까지 흘러 들어가서 스페셜 보너스 무대랑 굿즈 추첨까지 본 사람?

-어스래빗 이번 앨범도 대박나자♡♡♡홧팅♡♡♡

-토끼가 지구정복을 하는 날, 고래는 다시 뒤집힐 것이다. -아무 말 위원회.

기자 간담회가 끝나고 2시간 만에 올라온 기사. 한율은 피곤한 눈을 끔뻑거리며 댓글을 훑다가 핸드폰 전원을 가볍게 눌렀다. 도로엔 여전히 불금을 보내는 듯한 사람들의 차가 많았다. 그러나 어스래빗에겐 토요일의 이른 출근이었다.

00시 05분. 숙소로 돌아가자마자 씻고, 30분 정도만 눈 붙이고 나왔다.

푹. 옆에서 꾸벅거리며 졸던 라이언의 머리가 크게 회전하며 꺾였다. 한율은 그의 머리를 잡아 좌석에 바로 기대게 해주었다. 룸미러로 힐끗 어스래빗 멤버들을 보며 조유찬이 말했다.

“피곤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리허설이 이렇게 일찍 잡힌 게 더 나은 걸지도 몰라. 애매하게 두세 시간 자다 깨고 나와서 대기실 바닥에서 쪽잠 자는 것보단.”

피곤한 건 매니저들이나 스타일리스트도 마찬가지일 터다. 한율은 하루 사이 수척해진 조유찬을 살폈다.

“형, 커피 얼마나 마셨어요?”

“다섯 잔? 이젠 나도 나이가 있어서 그런지, 몸이 예전 같지 않다.”

“그러고 보니.”

차남석이 중얼거렸다.

“유찬이 형이 내년이면 벌써 서른….”

“어허. 그래도 만으론 20대거든?”

길우성이 헤실거리며 웃었다.

“우리 돈 많이 벌어서 얼른 유찬이 형 장가보내자.”

“…갑자기?”

잠이 오지 않도록 심심한 잡담을 나누며 KBC 공개홀 바로 앞에 도착. 카메라를 든 사람들이 겨울 패딩이나 코트에 모자, 마스크, 목도리로 중무장한 채 차에서 내리는 어스래빗 멤버들을 찍었다.

“이쪽 봐주세요!”

‘출근길’은 나중에 재출근할 때 걸을 예정. 멤버들은 목도리나 마스크만 살짝 내린 채 카메라를 향해 웃었다.

차카차카차칵.

“구호 부탁드릴게요!”

“…어스!”

“래빗!”

차카차카차칵! 생글생글 웃으면서 순순히 포즈 요청에 따라준 후엔 꾸벅 인사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감사합니다!”

[뮤직뮤직/어스래빗]

대기실은 이번에도 단독. 멤버들은 가장 먼저 벽에 붙은 큐시트를 확인하고 리허설 조끼를 걸쳤다. 그리고 PD에게 인사하기 위해 조정실을 찾았다.

“오늘 컴백한!”

“어스!”

“래빗!”

“인사드립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PD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바로 옆에 있는 라이언의 어깨를 다정하게 두드렸다.

“20분 후에 리허설 멋지게 하고, 퇴근해서 푹 잔 뒤에 다시 봅시다. 쇼케이스하고 바로 와서 많이들 피곤하겠네.”

“네, 감사합니다!”

다음 달이면 어스래빗이 데뷔 3년 차라 그런 것인지, 한율의 부친을 의식해서 그런 것인지. 예전보다 더 살가워진 PD의 태도에, 멤버들은 몸을 돌리자마자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거리가 많이 떨어졌을 때 박가람이 중얼거렸다.

“뮤뮤 PD님이 친절하니까 이상하다.”

“여전히 적응이 안 돼. …어?”

모퉁이를 돌자 이쪽으로 오는 원제로가 보였다. 그들도 이제 막 도착한 모양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컴백 축하드립니다.”

“원제로 분들도 컴백 축하드립니다.”

다른 출연자 대기실 앞이고 늦은 시각이라 인사는 조용히.

“PD님에게 인사드리고 오는 길이에요? PD님 기분 어떤 것 같아요?”

“괜찮은 것 같아요. 웃으면서 어깨 두드려주시더라고요.”

“오.”

“형들 몇 분 자고 온 거야?”

“30분?”

“어우….”

“쇼케이스 정말 잘 봤어요, 선배님. 영화 개봉도 축하드립니다, 대박 나세요.”

현강희가 한율에게 꾸벅 인사하며 말했다. 한율도 꾸벅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서로 컴백 활동 열심히 해요.”

“네, 감사합니다. 나중에 대기실로 앨범 들고 찾아뵙겠습니다.”

“네.”

“…….”

그렇게 대화를 나누고 고개를 돌리자, 말없이 두 사람을 쳐다보던 유호가 웃었다.

“예의 차리는 것도 좋은데, 둘이 너무 오래간만에 만난 거래처 직원 사이 같다.”

“앗, 제가 선생님을 선배님으로… 아니, 선배님을 선생님으로 모시고 싶어서 더 공손하게 군다는 것이 그만.”

“선생님?”

“커흠.”

인사가 잡담으로 넘어가는 듯하자 원제로 매니저가 헛기침으로 눈치를 주었다. 변지욱이 손을 휙휙 저었다.

“그런 게 있어욥. 그리고 강희도 지금 30분만 자고 와서 제정신 아닌욥.”

“그래.”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네, 나중에 뵐게요.”

두 팀은 서로 다시 꾸벅거리며 옆을 지나쳤다.

잠시 후 조용해진 복도.

…달칵. 신인 아이돌 세 팀에게 공동 배정된 대기실 문이 열렸다. 복도를 내다본 신인 아이돌은 좌우를 한 번씩 살피곤 다시 문을 닫았다.

“두 팀 사이좋은데? 하나도 안 살벌해.”

“듣기만 해서 알겠냐? 서로 쳐다보는 시선이랑 표정을 봐야지.”

“그런데 사이가 좋든 말든 우리랑 뭔 상관이야?”

“친구들이 진짜 정민솔 인성에 문제 있는지 없는지 하도 물어봐서. 왜, 인기가 많을수록 안티 수도 비례해서 늘잖아. 높이 나는 새가 떨어지는 걸 보면서 희열을 느끼는 변태도 많고.”

“으.”

“두 팀, 비슷하게 컴백한 것만으로도 욕하는 애들 있을걸?”

“왜?”

거울 앞에 앉은 이가 손가락 두 개를 펼쳤다.

“컴백 스페셜 무대, 팀마다 두 곡 혹은 2.5곡. 달리 말하면 이름 모를 망돌 혹인 신인 두 팀의 무대 기회를 빼앗은 격이잖아. 그리고 컴백 스페셜 무대를 한 곳에서만 해? 방송사마다 돌아가면서 일주일은 하니까… 방송 출연 한 번이 아쉬운 망돌 입장에선 두 팀 다 진짜 얄밉게 보일걸. 저것들 왜 하필 같이 컴백해선, 어쩌고저쩌고.”

“아.”

“그게 분하면 성공해야지, 뭐. 어휴….”

“아니, 방송엘 나와야 어필을 하고 성공하든 뭘 하든 할 거 아냐. 에휴….”

“행사 뛰어라, 행사….”

“어휴….”

대기실엔 신인 아이돌들이 푹푹 내쉬는 한숨 소리만 조용히 퍼졌다.

“아. 그런데 너희 그 소문 들었어?”

“무슨 소문?”

한 아이돌이 스태프들의 눈치를 살피며 손짓했다. 그러곤 주변에 들리지 않도록 속닥속닥.

“아이돌 중에 이상한 약 파는 사람이 있대.”

“이상한 약?”

“어. 처음엔 먹으면 기분 좋아지는 약이라고, 은근슬쩍 권한다나 봐. 그리고 차츰차츰….”

Jump Up

“응? 너희 순서 한참 뒤 아니야? 왜 벌써 왔어?”

스튜디오 앞 복도. 어스래빗 멤버들은 변지욱과 라일, 현강희를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변지욱이 넉살 좋게 웃었다.

“하이욥.”

“20분 만에 다시 인사드립니다.”

라일이 꾸벅 인사하자 라이언도 고개를 숙였다.

“네, 안녕하세요.”

“자, 그럼 들어가실까요?”

“……?”

라일이 자연스럽게 스튜디오로 안내하자, 라이언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함께 들어갔다. 유호가 변지욱에게 물었다.

“혹시 우리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응. 리허설 염탐하려고.”

스튜디오에선 다른 팀의 리허설이 한창이었다. 다음이 어스래빗 차례라, 멤버들은 마이크를 차고 앞 객석에 앉았다. 원제로의 세 사람도 옆에 나란히 앉았다.

“형들 이번 노래 진짜 좋더라.”

“너희 노래도. 그런데 컴백 주기 엄청 짧던데, 컨디션은 괜찮아? 바쁠 때일수록 몸 잘 챙겨야 해.”

“으하하. 이 일은 잘될 때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댔어.”

“그래도 건강을 해치면 그게 무슨 소용이야. 내가 봤을 때 지욱이 넌 길게 봐도 되니까, 너무 조급해하지 마.”

“히히.”

스태프가 외쳤다.

“어스래빗 대기할게요!”

“갈게.”

“수고하세요, 선배님.”

“네, 나중에 봐요.”

어스래빗 멤버들은 사전에 회사와 <뮤직뮤직> 측에서 조율한 안무와 카메라 동선에 관해 재차 설명을 듣고 무대로 올라갔다.

오늘 컴백 스페셜 무대에서 선보일 곡은 10초 남짓 인트로와 두 곡. 그러나 두 번째 곡은 2분 20초 정도로 짧게 편곡한 버전이라, 방송엔 6분 10초 정도가 나갈 예정이었다.

[스탠바이. …3, 2, 1.]

음악이 시작되었다. 쇼케이스가 끝난 뒤 졸려서 내내 입을 다물고 눈만 끔뻑거리던 멤버들의 표정이 돌변했다.

“…….”

무대 아래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현강희는 조용히 입을 벌렸다. 드라이 리허설은 카메라 동선을 맞추는 목적이 가장 크다. 그래서 살짝 힘을 빼고 해도 아무도 욕하는 이가 없지만, 어스래빗 멤버들은 불과 몇 시간 전 쇼케이스에서 선보인 무대를 그대로 재연하고 있었다.

“어스 형들 가만히 보면.”

세 번째 곡으로 넘어가기 전 음악이 중단되었을 때, 변지욱이 조용히 말했다.

“은근히 승부욕이랑 자존심이 다 강하다?”

“그래?”

“연습생 시절에 회사에서 제일 늦게 퇴근하던 사람들이 모인 팀이야, 저 팀이. 그리고 또 다른 공통점은, 만약 다른 사람이 실수해도 ‘네 실수로 내가 돋보여서 좋아’ 이런 게 아니라 ‘네 실수는 네 실수고, 내 실수는 내 자존심이 용납 못 한다!’ 이런 마인드란 거?”

라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회사에서 제일 늦게 퇴근하는 연습생의 데뷔 가능성이 큰 게 이 바닥 정석이자 정설이기는 하지만, 역시 될 사람은 되는 이유가 있는 것 같지. 나처럼.”

“갑자기 자화자찬한다고?”

“난 회사 연습실에 텐트 치고 살았거든. 그리고 착하잖아.”

“그걸 본인 입으로 말한다고?”

어스래빗이 세 번째 곡 안무 대형을 갖췄다. 원제로의 세 사람은 동시에 입을 다물고 조용히 무대에 집중했다.

음악이 시작되기 직전, 이건우가 옆에 있던 한율에게 속닥거렸다.

“쟤넨 왜 아까부터 무서운 얼굴로 우릴 노려보는 걸까.”

“글쎄요….”

잠시 후. 리허설을 마친 어스래빗은 다시 숙소로 돌아갔다. 그리고 아침 8시. 샵에 들렀다가 KBC 공개홀로 재출근, ‘출근길’을 걸었다.

“어스래빗 컴백 축하해!”

“꽃길만 걷자, 얘들아악!”

‘출근길’에서 좋은 자리를 잡는 것도 굉장히 일찍 와야 가능한 일이다. 어스래빗 멤버들은 한 데 모여서 외치는 팬들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라이언이 활짝 웃으며 팬에게 손을 내밀었다.

“핸드폰!”

“자!”

찰칵. 함께 셀카를 찍은 후 돌려주거나 뒤쪽에 까치발을 하고 선 팬이 힘겹게 내미는 팬레터를 받거나 가볍게 대화를 나누거나. 한율은 대표로 들고 있던 종이가방을 팬들에게 넘겼다.

“핫팩이랑 핸드크림이에요. 핫팩은 화상 입지 않도록 조심해서 쓰세요.”

팬들이 감동한 얼굴로 한율을 바라보았다.

“율아, 사랑해….”

“회삿돈으로 산 거예요. 핸드크림은 화장품회사에서 컴백 축하한다고 잔뜩 보내줬어요.”

“감동 돌려내….”

처음 보는 얼굴이지만 친근한 사이처럼 편히 대화를 나누곤 손을 흔들며 헤어졌다. 뒤이어 도착한 다른 팀과 겹치지 않도록, 조금씩 걷는 속도를 높였다.

“이거 엄청 따뜻해.”

길우성은 조금 전 팬에게 받은 귀마개를 썼다. 길게 내려온 에어포켓을 가볍게 쥐자 머리 위로 토끼 귀가 파닥파닥 섰다.

“오, 귀마개 귀엽다. 그런데 소리는 잘 들려?”

“들려, 들려.”

포토타임을 갖고 안으로 들어간 후엔 곧장 대기실로 향했다. 대기실엔 먼저 도착한 스태프들이 멤버들의 무대의상과 액세서리, 신발을 정리하고 있었다.

“얘들아, 아침 먹어.”

매니저들이 테이블에다 도시락 전문점에서 산 온갖 도시락을 내려놓았다. PD에겐 새벽에 미리 인사를 다녀왔기 때문에, 멤버들은 마음 편히 외투를 벗고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먹으면서 들어. 너희 내년 봄에 미국이랑 유럽 간다.”

“크으.”

“생각보다 빨리 잡혔네요?”

미국과 유럽 투어는 아시아 투어를 할 때부터 슬쩍슬쩍 가능성이 엿보였던 터라, 깜짝 놀랄 이야긴 아니었다.

“몇 달 전부터 조용히 계획하고 추진했거든. 자세한 사항은 다음 주 월요일에 회사에서 알려줄 건데, 일단 어디를 가는지 알아둬야, 쉬는 시간에 기초 회화라도 공부할 수 있잖아.”

“크으.”

“미국 투어는 4월, 유럽 투어는 5월에 진행될 거야. 미국이나 영국이야 영어를 쓰니까 크게 걱정 안 되는데,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이탈리아… 그리고 또 어디였더라?”

“러시아, 스웨덴, 호주요.”

“…너무 많습니다, 선생님.”

“호주는 유럽이 아닙니다, 선생님.”

“아무튼, 기초 인사라도 외우자, 얘들아. 쉬는 시간에 틈틈이.”

“네엡.”

한율은 핸드폰 메모 앱에다 투어 예정 나라를 적으며 물었다.

“미국은 어디 어디 가는 거예요?”

“LA랑 뉴욕, 시카고, 댈러스, 올랜도, 애틀랜타.”

“크으.”

“스케일이 커서 남의 얘기처럼 느껴지네요, 형.”

“그러게.”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미국과 유럽 투어는 정말 국내의 탑티어 아이돌그룹만 가능하다는 인식이 있었으나, K-POP 인기가 많아진 현재는 유럽 투어에 나서는 아이돌그룹의 수도 늘어나는 추세였다.

대형 기획사에선 국내에서 막 데뷔 앨범 활동을 끝낸 신인 그룹을, 곧바로 해외 프로모션 투어에 보낼 정도.

그래도 어스래빗 멤버들에게 월드투어가 요원하게 느껴지던 이유는 WB래빗이 아직 작은 회사이고, 정말 자신들이 더 먼 나라, 넓은 세계에서도 통할까 하는 불안감 때문일 터다.

한율은 핸드폰을 내려놓고 도시락을 열었다.

“그럼 세트리스트는 이번 앨범 포함해서 정해지겠네요?”

잠시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겼던 다른 멤버들도 도시락을 열고 젓가락을 집었다.

“지금 앨범 타이틀곡이랑 후속곡까지 모으면 활동했던 곡이 일곱 개나 되지 않아?”

“세트리스트도 월요일부터 진행되는 회의에서 정해질 거야.”

“그럼 우리 투어 마치고 돌아오자마자 컴백….”

“쉿.”

“팍팍 먹어. 활동은 체력전이다. 서한율, 편식하지 마.”

연근조림을 강보배의 도시락으로 옮기던 한율의 젓가락이 멈췄다.

“…연근 싫은데.”

* * *

WB래빗 엔터테인먼트 기획홍보팀. 어스래빗 전담 직원은 긴장한 얼굴로 여러 인터넷 페이지를 돌아가면서 새로고침하고 있었다. 달칵, 달칵.

그러다 마침내 정오.

“오…, 오오오…!”

그가 환호성을 지르며 벌떡 일어났다.

“팀장님! 1위! 1위 찍었어요!”

기획홍보팀장 강순철과 매니지 B팀의 오동식 팀장이 동시에 반응했다.

“정말이요?”

“어디에서요?”

“미국이요!”

“미…국이요?”

“네! 이번 어스래빗 앨범, 정오를 기해서 미국 사과튠즈 K-POP 앨범 차트 1위 찍었습니다! 홍콩이랑 영국, 호주, 필리핀, 대만, 인도네시아, 싱가폴, 독일에서도요!”

오 팀장이 씨익 웃었다.

“아시아 투어를 다녀온 보람이 있네요. 다녀온 곳이 전부 1위라니.”

“애들이 영어극장 콘텐츠를 한 게, 영어권 나라에도 좋은 어필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강 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스래빗의 그린라이브 콘텐츠 중 ‘깡충깡충 영어극장’ 재생 기록을 보면 국내보다 해외에서 재생된 수가 훨씬 많았다.

“그런데 독일은 조금… 의외네요?”

“지난번 그것 때문 아닐까요? 몇 주 전인가…. 한율이가 라방 하다가 톡으로 올라온 독일어를 보고, 같이 독일어로 인사를 했거든요. 그걸 본 팬들이 신기하다고 독일어 더 해달라고 했는데, 그때 한율이가 말한 영상이 편집돼서 너튜브에….”

“아. 어쨌든 좋은 일이네요.”

Rrrr. 기획홍보팀 전화기가 울렸다.

“네, WB래빗…. 안녕하세요, 이 기자님. …하하, 보셨어요? …네, 저희도 막 확인한 참입니다. …축하는요.”

전화를 받은 강 팀장이 사과튠즈 페이지를 가리키며 웃었다. 사과튠즈를 비롯한 각종 음원사이트 차트 동향을 살피는 건 연예뉴스 전문 매체도 마찬가지였다.

“네. …네, 당연히 통화할 시간 되죠. …네.”

오 팀장은 시간을 확인했다. 어스래빗의 사녹이 막 끝날 시간이었다. 딜레이되는 것을 감안해도, 알려주기 딱 좋은 시간대.

‘아니, 좋은 소식을 알려주는 데에 최적의 타이밍은 따로 없는 법이지.’

오 팀장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조유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한편 그 시각, 앗싸일보 연예부 부장실.

“부르셨습니까, 부장….”

탁. 김 기자의 말이 끝나기도 전, 부장이 바인더를 소리 내어 내려놓았다.

“내가 이거 안 된다고 했지?”

“이미 다른 매체에서 기사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더 많은 정보를 확보한 우리가 보도하지 않는다는 건….”

“이 회장 성격이 얼마나 지랄 같은지 잊었어? 터뜨렸다가 회사에 조금이라도 손해 생기면 당신이 메울 거야? 얼굴 보니… 본인도 이미 안 될 거라고 예상했구만, 뭘.”

“…….”

“우리는 이걸 기사로 낼 게 아니라.”

부장이 한숨을 푹 내쉬며 바인더를 툭툭 두드렸다.

“이걸 가릴 연막을 터뜨려야 한다고. 이거 최초 보도한 곳에서도 기사 삭제했고 아직 크게 안 번졌으니까, 뭐든 띄워. 가벼운 거라도 괜찮아. 사람들 시선을 돌리라고. 지금쯤이면 다른 매체에도 다 연락이 갔을 거야.”

“…네.”

“정말이지….”

끼익. 부장이 의자에 몸을 기댔다.

“대기업 회장 손녀나 되어선 아침 댓바람부터 아이돌이랑 극장 데이트나 하고…. 쯧. 지 몸값을 스스로 낮추고 있어, 멍청하게.”

“이 회장 손녀, 원래 생각 없기로 유명하지 않았습니까. 중학생 때부터 담배에다 동급생 폭행, 운전사한텐 폭언과 갑질, 유학 가고 나선 매일 파티에 클럽, 카지노까지.”

“어릴 때부터 내놓은 자식이긴 했지. 어쨌든, 알았으면 얼른 나가서 일하시죠, 김 기자님?”

“네.”

김 기자는 부장에게 깍듯하게 인사한 후 그곳을 나왔다. 그러곤 생각에 잠긴 채 터덜터덜 걸음을 옮기다가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타닥타닥. 이 기자가 신나게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다.

“뭘 그렇게 급하게 쓰는 거야?”

“어스래빗 사과튠즈 K-POP 앨범 차트 1위 기사요.”

“오, 그거 좋다.”

“네?”

김 기자가 씨익 웃었다.

“아니, 열심히 쓰라고. 그리고 이 부분 오타 났다.”

한 시간 후 포털사이트 연예뉴스란 메인.

앗싸일보에서 낸 기사 하나가 올라왔다.

[국민 Pick 원제로의 맹추격! 따돌린 어스래빗 ‘Jump Up!’]

[13일 컴백하여 하루 만에 MBS <뮤직센터> 1위 후보에 오를 정도로 국내에서 대세로 자리 잡은 보이그룹 원제로가 14일 컴백한 어스래빗에게 바로 추월당했다.

14일 세 번째 EP 앨범 [Jump Up]으로 컴백한 어스래빗은 15일 정오를 기해 사과튠즈 K-POP 앨범 차트 미국, 영국, 홍콩, 호주, 필리핀, 대만, 인도네시아, 싱가폴, 독일 9개 지역에서 1위 했으며 타이틀곡 는…(중략).

한편 어스래빗은 4월부터 미국의 6개 도시를 시작으로 유럽 7개국 그리고 호주까지 월드투어에 나설 계획이다.]

-와 기레기 어그로 보소

-이건 대놓고 싸움 붙이겠다는 심본데

-아 쫌!!!!!! 애들 사이 좋다고!!!!! 그만하라고 쫌!!!!!!!!

-어스래빗은 어스래빗이고 원제로는 원제로입니다. 기레기 선동에 휘둘리지 맙시다.

-네네 어스래빗이 더 뛰어난 거 알아요. 영화, 드라마, 월드투어까지. 갓 데뷔한 원제로가 어떻게 뛰어넘나요. 그런데 이렇게 대놓고 비교하시니 기분이 참 그러네요.

ㄴ원제로가 2년 차 되면 따라잡을 수 있을 것 같다는?

ㄴ원제로 2년 프로젝트 그룹임. 아픈 덴 찌르지 맙시다..

ㄴ지금 인기로 보나 수익 면으로 보나 원제로가 얼마나 잘나가는데ㅋ 당연히 계약 연장하겠죠.

-그래봤자 국내 인지도는 원제로가 압승♡

ㄴ할많하않

ㄴ2222

ㄴ없으면서 있는 척은

-저 차트 어제 원제로가 다 1위 먹었던 건데?

-애쓴다.. 후배들 이겨보겠다고ㅋㅋ

-우쭈쭈 그래서 기뻐요, 토끼님들?^^

-2차전 가냐? 이제 ㅈㅁㅅ에 대한 진짜 진실이 밝혀지는 거? 시원하게 까발려봐라, 누가

ㄴ어스 팬들은 이거 아니면 꼬투리 잡을 거 없쥬? ㅋㅋㅋㅋ

ㄴ나 어스 팬 아닌데? 내 댓글모음 보고 얘기하자

-팬코질하는 분탕 종자들에게 넘어가면 바보.

-원제로엔 차남석이 없어..

-고양이난로 제작사는 메이킹필름을 내놔라!!!

한율인 인정이지

해당 기사를 본 어스래빗 멤버들은 미간을 구기거나 한숨을 내쉬었다.

“꼭 기사를 이렇게 써야 했냐….”

미국을 비롯한 몇몇 나라에서 1위 했다는 소식을 듣고, 사녹에 이어 미니 팬 미팅까지 즐겁게 마치고 돌아온 참이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원제로와 비교하는 기사라니.

“우리 기사만이 아니라, 오늘 전체적으로 연예 뉴스란이 이상해. 뜬금없이 연예인들 과거 실수 되새김질 기사가 나오지를 않나, 제목 어그로 끌어놓고서 정작 내용은 별것 아닌 것도 많고.”

“영아 선배님이랑 제설 선배님 불화설 기사도 있다? 제설 선배님 부모님이 10년 전에 했던 ‘연예인 배우자는 안 들였으면 좋겠어요’ 이 발언을 왜 굳이 지금…?”

“혹시.”

박가람이 상당히 수상쩍다는 표정을 지었다.

“윗선에서 단체 오더라도 내려왔나?”

“써한.”

기사 댓글을 보던 길우성이 한율에게 물었다.

“영화 메이킹필름은 진짜 언제 공개돼?”

“DVD랑 블루레이에 포함돼서 나올 거야.”

“한정판이라도 좋으니까 못난이 굿즈도 같이 나왔으면 좋겠다.”

“…….”

정말로 못난이 굿즈가 포함된 한정판 세트가 판매될 예정이지만, 한율은 굳이 알려주지 않았다.

유호가 앨범이 든 종이가방을 챙겼다. 새하얀 종이가방 우측 상단엔 WB래빗 회사 마스코트 토끼와 로고가 새겨져 있었다.

“기레기 기사에 감정 낭비 그만하고, 인사나 하러 가자.”

“네엡.”

사녹이 끝난 이 시간대에 주로 인사를 다니는 터라 복도는 어수선했다. 대기실 인사는 주인이 자리를 비운 상태가 아닌 이상, 데뷔 연차 순으로 찾아가는 게 암묵적인 룰이라, 어떤 대기실엔 줄이 길게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먼저 와 있던 후배 그룹이 어스래빗 멤버들에게 고개를 꾸벅이며 말했다.

“앞에 서세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아니에요, 먼저 들어가세요.”

“아니, 아니, 정말 괜찮아요.”

그렇게 선배 가수들에게 인사를 다녀오고 난 후엔, 반대로 대기실에 가만히 앉아서 찾아오는 후배들을 맞이했다. 교환할 앨범은 미리 적어둔 이름이 맞는지 몇 번이고 확인한 후에 건넸다. 앨범 포토북 안에다 받을 사람의 이름과 메시지를 일일이 적은 까닭이었다.

“와…. 응원 메시지 감사합니다, 선배님! 앨범 잘 들을게요!”

소속사에서 주입식으로 교육받은 듯한 과한 리액션. 감격한 표정을 유지한 채 네 번째 후배가 그룹이 퇴장하고, 이번엔 원제로가 들어왔다.

“완전한 하나!”

“원 없는 무대!”

“원! 제로입니다!”

“컴백 축하드립니다, 선배님!”

새벽에 마주쳤을 때보다 힘이 실린 목소리와 눈빛. 어스래빗도 공식 구호로 화답했다.

“안녕하십니까!”

“어스!”

“래빗!”

“인사드립니다!”

“컴백 축하드립니다!”

“바앋으으시이오오.”

18명이나 되는 대인원. 그러나 리더끼리 대표로 앨범이 든 종이가방을 교환해, 어지럽진 않았다.

변지욱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와, 종이가방 예쁘다. 이번에 회사에서 새로 만든 거야?”

“응.”

“찬이 형! 나도 이거! 이거!”

변지욱이 조유찬을 돌아보며 졸랐다. 조유찬은 부드럽게 미소 지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굿즈에도 안 들어갈 영업용 특별제작 아이템이란다.”

“그 말 들으니 더 탐나는데?”

“그럼 이 종이가방 하나는 지욱이한테….”

현강희가 번쩍 손을 들었다.

“나머지 하나는 제가 가질게요!”

“자자, 종이가방 소유권 분쟁은 대기실로 돌아가서 나눕시다, 원제로 분들.”

원제로의 추격을 어스래빗이 따돌렸다느니 하는 기사는 못 본 것인지, 아니면 보고도 무시한 것인지. 어스래빗을 대하는 원제로 멤버들의 분위기는 새벽에 만났을 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럼 쉬세요!”

“앨범 잘 듣겠습니다!”

“네, 나중에 뵐게요!”

원제로가 퇴장하고 문이 닫혔다.

“원제로 분들이 마지막이지?”

“응.”

멤버들은 그제야 선물로 받은 앨범들을 정리해서 나눴다. 단순히 사인만 해서 준 팀도 있고, 어스래빗처럼 일일이 이름과 메시지를 적은 팀도 있었다. 원제로는 후자였다.

“이건 건우 거, 이건 한율이 거.”

CD와 함께 케이스에 담긴 포토북. 첫 장 내지에 원제로 멤버들의 사인과 짤막한 메시지가 어지럽게 적혀 있었다. 대부분은 영화 개봉과 컴백을 축하한다는 내용이었다.

[자주 소통할 수는 없지만 SNS로나마 친구 하고 싶습니다!] 이렇게 본인의 SNS 계정을 적은 멤버도 있고, [표정 연기 강습받고 싶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선배님께서 편히 말을 놓으시는 날까지 분발하겠습니다! ㅎㅎ]라고 적은 이들도 있었다.

“으음.”

옆에서 길우성이 아리송한 표정으로 앓는 소리를 냈다.

“왜?”

길우성이 자신이 받은 원제로 앨범의 포토북을 내밀었다. 톡톡. 그러곤 손끝으로 정민솔이 쓴 메시지를 가리켰다.

[생각 없이 말 뱉는 습관 꼭 고칠게! 서로 홧팅하자, 우성아! ㅎㅎ -정민솔.]

마치, 길우성에게 생각 없이 말을 뱉었던 과거에 관해 충분한 대화를 나눈 뒤 쓴 메시지 같았다.

그런 생각을 담은 시선으로 길우성을 쳐다보자, 길우성은 자신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민솔 씨와 나 사이에 나도 모르는 맥락이 있었나 봐, 친구.”

앨범을 건네주기 전, 그 메시지를 볼 원제로 멤버들을 의식해서 적은 것일까.

인터넷을 떠들썩하게 했던 일은 이미 당사자와 풀었다, 그래도 여전히 반성한다. 이런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

그렇다면 라이언에게도?

툭. 라이언은 펼쳤던 원제로 포토북을 덮고 있었다. 길우성이 그에게 슬쩍 다가갔다.

“혹시 형도 민솔 씨한테 특별한 메시지 받았어?”

라이언이 뚱한 얼굴로 대답했다.

“빨간 사과는 맛있기라도 하지.”

“…엉?”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