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4화 (134/427)

* * *

KBC <뮤직뮤직> 생방송 한 시간 전. MBS K에서 <주말아이돌> 어스래빗 편이 방송되었다.

MC들이 건성으로 어스래빗을 맞이했다.

[아주 지겹다, 지겨워. 어떻게 1년에 두 번이나 오니? 이러다 정들겠어, 정말.]

[알아서들 인사해.]

어스래빗 멤버들은 MC들의 태도에 아랑곳하지 않고 환한 웃음을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차남석은 산타 옷을 입은 토끼 인형 두 개를 MC들에게 안겼다.

[여기 선물입니다, 선배님들! 미리 메리 크리스마스!]

그제야 MC들이 입가를 올렸다.

[빈손으로 와도 된다니까 꼭 이런 걸 챙겨와.]

[우리 조카가 좋아하겠다.]

프로그램 톡창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오늘 진짜 어스래빗 날이구나ㅎㅎ

-하루에 방송 3개 출연ㅜㅜ

-사과튠즈 K-POP 앨범 차트 1위 축하해!!!!

간단한 오프닝 인사가 끝나고 첫 번째 코너.

크리스마스 분위기로 꾸며진 스튜디오에 어스래빗 멤버들과 MC들이 의자에 앉았다.

[그래도 반년이면 오래간만에 온 거니까, 그동안 너희가 얼마나 변했는지 확인해보는 시간부터 가질 거야.]

스태프가 무언가가 놓인 동그랗고 작은 탁자를 가운데에 내려놓고 퇴장했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걸 바라보는 어스래빗 멤버들.

-고양이 머리띠?

-저런 거 가져오면 팬들이 좋아할 줄 알았냐 고맙다

-저거 나 아는데

-??

-일본에서 나온 뇌파 센서기

-저거 마음 동요하면 바로 귀 까딱까딱 움직여요ㅎㅎ

MC로부터 현재 톡창에 흘러나오는 설명을 들은 멤버들이 술렁거렸다.

[그럼 거짓말도 잡아내는 거예요?]

[재밌겠다. 그 전기 지지직 하는 건 많이 아프다고 하잖아.]

[세 가지 질문에 전부 한 치의 동요도 보이지 않으면 우리가 준비한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을 수 있어. 그럼 제일 솔직한 멤버부터 시작해볼까? ]

[너희 중에서 거짓말을 제일 못하고, 얜 비밀도 얼굴에 다 티 난다! 하는 멤버! 하나, 둘….]

-과연

-보배 아니면 우성이 예상

[호 형?]

[건우 형도 은근히….]

[솔직하면 나지!]

[셋!]

서로를 살피던 멤버들의 손끝이 교차했다. 가장 많은 지목을 받은 강보배의 얼굴이 잡혔다.

[나?]

[어스래빗 멤버들이 뽑은 가장 솔직한 멤버. 피도 눈물도 없는 카리스마 래퍼 강보배 씨는, 앞으로 나와서 고양이 헤드셋을 써 주시기 바랍니다.]

-저 호칭 대체 언제까지 붙는 건데ㅎㅎ

-저 고앵이 지금 KBC에 있죠?

[우리가 하는 질문은 모두, 이프림이 너희에게 묻고 싶었던 걸 추린 거니까 잘 대답해야 합니다.]

강보배가 씩씩하게 대답했다.

[네!]

[첫 번째 질문. 나 솔직히, 이만하면 춤 실력 많이 늘지 않았나? 하나, 둘, 셋.]

[늘긴 했지만, 아직 부족하다!]

고양이 귀는 잠잠했다.

[오오…. 솔직한데?]

[그럼 다음 질문. 이번엔 좀 센 거 갑니다. 나는, 어스래빗 멤버 중에서 아직도 대하기가 어렵고, 어색한 멤버가 있다.]

[어….]

헤드셋에 달린 고양이 귀가 앞뒤로 천천히 움직였다.

-동요한다

-있구나

-ㅎㅎㅎㅎㅎ

-보배 동공 지진ㅋㅋㅋㅋ

MC가 하나 건졌다는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보배야, 그럼 이것만 대답해. 동갑이야?]

고양이 귀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까딱까딱.

-아니 그러면서 남석이를 보면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

-남석이 충격받았엌ㅋㅋㅋ

[그래, 여기까지. 너희 둘은 녹화 끝나고, 포장마차에서 사이다라도 마시면서 얘기 좀 나눠.]

[어스래빗은… 메인보컬과 메인래퍼 사이가 별로다. 음.]

[…아니, 그런데 그런 거 있지 않아요?]

차남석이 뒤늦게 표정을 수습하며 말했다.

[형들은 형들이라 편하고 동생들은 동생들이라서 편하지만, 동갑끼리는 왠지 까딱하면 선을 잘못 넘게 될까 봐 조심스러워지잖아요.]

MC들이 생글생글 웃었다.

[그럼 남석이 넌 누가 제일 어렵고 어색한데?]

[라이언이요.]

[라이언 너는?]

[차남석이요.]

[이렇게 어스래빗에서 제일 대하기 어려운 멤버는, 차남석 씨로 밝혀졌습니다.]

-99즈 왜들 이래ㅋㅋㅋㅋㅋ

-남석이도 아니고 차남석ㅋㅋㅋㅋ

-라욘 성까지 앞에 붙여서 말하는 거 보니까 한국사람 다 됐넼ㅋㅋ

-존잘톢은 체념해서 웃는 모습도 존잘톢

순서는 돌고 돌아 마지막으로 한율이 고양이 헤드셋을 썼다. 멤버들에게 가장 속마음을 모르겠다는 멤버로 지목된 까닭이었다.

[마지막 순서는 데뷔 2년 만에 드라마 <별☆일없는 집> 주연! 영화 <고양이 난로> 주연을 꿰차며 승승장구 중인 금수저 아이돌, 어스래빗 두 번째 막내 서한율!]

[첫 번째 질문 바로 들어가겠습니다. 편안하고 따뜻한 20억대, 괄호 열고, 소곤, 괄호 닫고, 내 집 놔두고, 방송국의 차갑고 딱딱한 대기실이나 차에서 불편하게 잘 때 무슨 생각 들어?]

한율이 담담히 대답했다.

[아무 생각도?]

고양이 귀는 잠잠했다.

-오

[그럼 두 번째 질문. 나는 여자 아이돌을 보고 두근거린 적이 있다! 하나, 둘!]

[없다.]

잠잠.

-오오오오오

-연예인이라고 물어봐야죠ㅜㅜ

-율톢!!!

-침착해! 아이돌이라고만 했어! 배우 중에 있을 수도 있다고!

[형님, 쟤 미동도 안 하는데요? 센 거 하나 갑시다.]

[그럴까?]

[이 질문이 좋겠네.]

[솔직히 말해서, 어스래빗은 나 아니었으면 이 정도로 뜨기 힘들었을 것이다! 하나, 둘!]

영상 속 한율이 태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양이 귀는 여전히 잠잠했다.

[아마도?]

자막으로 [!!!!!!!] 커다란 느낌표가 여러 개와 경악하는 MC들의 얼굴이 잡혔다.

[쟤 뭐지?]

[아니, 너무 솔직해서 오히려 당황스러운데?]

뒤에 앉은 어스래빗 멤버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한율인 인정이지.]

[한율이 없었으면 우리 여기 출연하는 것도 힘들었을 것 같아.]

[밸런스나 팀 호흡을 생각해도.]

MC들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지금 멤버들도 다 인정하는 거야? 한율이 없었으면 어스래빗이 이만큼 오는 건 힘들었을 거라고?]

[조심스러운 말이기는 한데, 자존심 상하지는 않아?]

멤버들이 웃으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전혀요.]

[하뉼, 우리 팀 보물이에요.]

라이언의 시선이 한율을 향했다.

[같이 어스래빗으로 데뷔해줘서 고마워.]

[별말씀을.]

길우성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두 팔을 활짝 벌렸다.

[제가 데려왔습니다, 여러분! 제가 WB래빗으로 서한율을 인도한 장본인입니다!]

-길멘.

-ㅋㅋㅋㅋㅋㅋ

-맞아 춤톢이가 율톢이 떠비로 데려와서 오디션 보게 했다 그랬었짘ㅋㅋ

-막내의 빅픽처

-위에 길멘 도랏ㅋㅋㅋㅋ

“…….”

핸드폰을 통해 라이브로 <주말아이돌>을 보던 한율은 속으로 짧게 한숨을 쉬었다. 고개를 돌리고 있어서 카메라엔 잡히지 않았지만, 당시 아주 잠깐이나마 복잡한 표정을 지었던 게 생각났다.

[한율이가 세 가지 질문에 모두 동요 없이 대답했으므로!]

[미리 주는 크리스마스 선물!]

[감사합니다!]

처음 길우성을 따라 WB래빗 건물로 들어갔을 때 품고 있던 생각과 그로부터 벌써 2년하고도 9개월이 흘렀다는 사실. 그리고 그만큼 이 평화로운 일상이, 휴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

순간 이 모든 게 하나의 상념으로 얽혀서 둥실 떠올랐다.

[선물 뭐야?]

[양말?]

선물로 받은 양말 모양의 거대한 자루를 보며 멤버들과 웃는 자신의 모습.

[플리마켓 물건 담을 때 사용하면 좋겠네요.]

한율은 영상을 보며 날을 헤아렸다.

‘2021년 여름. 독일 바이로이트 바그너 페스티벌이 한창이던 때.’

앞으로 2년하고도 7개월.

거미줄처럼 얽혀있어

본래 세상. 전쟁이 흐지부지 끝나고 지구인들의 정보를 얻기 위해 위장 잠입했을 때였다. 그는 독일 출신의 ‘안톤’을 만났다. 성은 처음 인사를 나눴을 때 들었지만 잊어버렸다.

안톤은 그를 독일어를 잘 모르는 외국인으로 착각했다. 그렇게 보이도록 연기했다. 지구인 포로에게서 배운 독일어를 사용하며.

장기간 이어진 재앙과 재난, 미지와 무지로부터 오는 예상치 못한 사건들로 인해 모두가 혼란스러웠던 시기였다. 그래서인지 그는 쉽게 속았다.

어쩌면 속아주는 척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상대가 누구든, 본인의 이야기를 털어놓고 싶어서.

『바이로이트 바그너 페스티벌. 바이로이트 극장의 정원을 관리하는 아버지를 도우러 갔을 때였어. 티켓을 구하는 데에 3, 4년이 걸리는, 한여름에 에어컨도 안 되는 그 미친 공간에 들어가기 위한 사람들이 바글거리고 있었지.』

당시엔 이해가 안 되었지만 이젠 그마저도 그립다는 얼굴로, 안톤은 고개를 흔들었다.

『오페라에 미친 인간들. 어쨌든 나는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가지를 다듬었어. 사실은 페스티벌이 시작되기 전에 단장을 마쳐야 했는데, 원래 그곳을 함께 담당하던 막심 아저씨가 허리를 다치는 바람에 일정에 차질이 생겼거든. 그래서 내가 급히 불려간 거고. 어쨌든, 아무튼, 갑자기 신경이 곤두서는 거야. 마치 유령이 나온다는 성에 들어갔을 때처럼 쭈뼛쭈뼛. 머리도 아프더라고. 혹시 내가 인지를 전혀 못 했던 괴이한 병이 갑자기 발병이라도 한 건가, 온갖 생각을 하면서 고개를 들었는데.』

안톤은 그 광경을, 아름다운 하늘 그림에다 누군가 잉크를 떨어뜨린 것 같았다고 말했다. 또르르 흘러내린 잉크가 지상에 파앗, 지저분하게 번졌다.

안톤은 그에게 물었다.

『당신의 ‘그날’은 어땠어?』

그는 짤막한 독일어로 대답했다.

『엿 같았지.』

큭큭. 길우성의 웃음소리가 한율을 회상에서 끄집어냈다.

“방송으로 다시 봐도 웃기다. 가람이 형 얼굴 막 쓰는 거. 이렇게 하는 건가?”

“…….”

길우성이 입을 일 자로 꾹 다물고 눈썹을 모았다. 그리고 길우성이 영상 속 박가람을 따라 얼굴 근육을 움직이는 순간, 한율은 회상의 남은 잔재를 밀어냈다.

핸드폰 전원 버튼을 빠르게 두 번 누르고, 실행된 카메라 앱을 터치.

찰칵.

“…오!”

사진을 확인한 길우성이 박가람에게 손짓했다.

“형, 이 사진 봐봐!”

“와. 우성이 엄청 못생겼다.”

“<주말아이돌>에서 형이 했던 거 따라 한 건데.”

“그럼 같이해볼까? 나란히 서서.”

지나가던 유호가 끼어들었다.

“하지 마. 한율이 너도 그 사진 지우고.”

“네.”

“못생김을 사진으로 남기는 건 아직 이르다. 때가 아니야.”

잠시 후 5시. <뮤직뮤직> 생방송이 시작되었다. 이젠 컴백 인터뷰를 생방송으로 한다고 하여, 인터뷰 대본을 줄줄 외우면서 초조하게 발을 굴렀다. 곧 카메라와 함께 MC들이 대기실로 들이닥쳤다.

“여기 두 줄로 서서.”

MC인 JE와 유린과는 대기실 인사 순회를 돌 때 인사했던 터라, 그들은 가벼운 눈인사만 주고받곤 카메라 앞에 섰다. JE는 큐카드를 보여주며 멘트 순서를 한 사람씩 되짚어주었다.

“멘트를 이어서 할 때, 반 템포 정도 웃고 나서 말하는 게 자연스럽고 좋아요. 그 정도 시간은 있으니까 라이브라고 너무 조급해하지 마시고.”

“네엡.”

“10초 전. 카메라 보면서 웃고 계세요.”

스태프의 지시에 어스래빗 멤버들은 방긋 웃음 지었다.

“3, 2, …큐.”

“안녕하세요. <뮤직뮤직> MC, JE!”

“유린입니다!”

“오늘 저희가 찾아온 곳은 지난여름, 청량 칼군무로 우리의 가슴을 시원하게 만들어준!”

“어스래빗의 대기실입니다!”

MC들이 양쪽으로 성큼 물러났다. 카메라를 향해 내내 미소 짓고 있던 어스래빗은 손구호와 함께 인사했다.

“어스!”

“래빗!”

“컴백으로 인사드립니다!”

와아. 경쾌하게 웃으며 호응한 JE가 살며시 거리를 좁혔다.

“지난 앨범 [Invitation card] 활동이 끝나고 5개월 만에 세 번째 EP 앨범 [Jump Up]으로 컴백하셨는데, 우선 기다려주신 팬분들께 인사 부탁드려도 될까요?”

“네!”

카메라가 한율을 잡았다. 색이 조금 빠져서 한 톤 더 밝아진 붉은 머리카락. 그 사이로 귀에 한 은색 피어싱 두 쌍이 반짝거렸다.

한율은 환하게 미소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안녕, 이프림!”

한편 그 시각, KBC 시사교양국 국장실.

서석진 국장은 핸드폰으로 <뮤직뮤직> 생방송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뉘 집 아들인지, 참 곱상하게도 잘생겼네.’

똑똑.

“네, 들어오세요.”

서 국장은 핸드폰을 음소거로 설정한 뒤 거치대에 놓았다. 시사 프로그램의 최 CP가 들어왔다.

“조금 전에 말씀드린 취재 내용입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서 국장은 소파로 자리를 옮겼다. 최 CP는 맞은편에 앉아 들고 온 노트북과 바인더를 내려놓았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프로그램에 내보낼 내용을 진지하게 논의했다.

“그럼 이 부분만 더 보완한 뒤 진행하는 걸로 하죠.”

“네. …그런데 국장님.”

“네.”

논의가 끝났을 때, 최 CP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이 건에 대해 취재하다가 얼핏 들은 건데…. 하…. 이거 말씀드려도 되나.”

“무슨 일인데요?”

머뭇거리던 최 CP가 고개를 돌려, 아무도 없는 창을 훑었다. 그가 목소리를 낮췄다.

“요즘 가요계에 약이 돌고 있단 소문이 있어요.”

서 국장의 얼굴이 굳어졌다.

“네?”

“최근 가요계가 거의 아이돌 잔치잖아요. 그리고 아이돌 대부분은 소속사에 의해 통제받아서 클럽은커녕 외출도 자유롭게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고요.”

“그렇…죠. 그런 데에 놀러 다닐 시간이 생겨도, 요즘은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찍힐지도 모르고.”

서 국장은 한율의 사생 스토커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선은 지키지만, 스케줄마다 따라다니며 사진을 찍는 홈마들도 여럿이다. 그리고 이젠 드라마에 이어 영화, 예능에도 여러 번 출연해서 팬이 아니더라도 알아보는 사람이 늘지 않을까.

“그런데 어떻게…?”

“그래서 방송국에서 거래가 이뤄진다고 하더라고요.”

“네?!”

서 국장은 저도 모르게 큰소리를 냈다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저도 자세한 방법까지는 듣지 못했는데, 처음엔 먹는 사람도 마약인 줄 모르게 먹인다고 하더라도요. 그것도 소수의 몇 명만 골라서.”

“바로 옆에 매니저나 같은 팀 아이들, 스태프들이 있을 텐데 그게 가능한…. 설마.”

서 국장은 말을 멈췄다. 연예인과 가까이 있어도 별다른 의심을 받지 않는 사람은 업무 관계자나 방송국 스태프 등 아주 많다. 그러나 더 나아가, 아무렇지 않게 먹을 걸 주고받을 수 있는 사람은,

“같은 가수가?”

“아마도요. 어쩌면 약을 건넨 사람도, 그걸 제삼자로부터 받아서 마약인 줄 모르고 넘긴 것일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서서히 중독시켜서 구매자, 혹은 중개자로 만들고 또 그걸 빌미로 거미줄처럼 사업을 벌일 속셈인 것 같은데…. 이 소문이 사실이라면 국장님께 알려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아드님이 모르고 먹기라도 하면 정말 큰 일 아닙니까.”

심각한 얼굴로 생각에 잠겼던 서 국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려줘서 고마워요.”

* * *

KBC <뮤직뮤직> 스케줄을 끝내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 한율은 이희우와 함께 출연한 tv Mu 예능 <뮤직마켓>을 핸드폰으로 보았다.

-율아ㅋㅋㅋ 기껏 맞혀놓고 왜 음식을 먹질 못햌ㅋㅋㅋㅋ

-내가 싫어하는 음식이 걸렸지만 나는 퀴즈의 정답을 맞혀야겠어. 나는 서한율이니까. <대충 이런 승부욕ㅋㅋㅋㅋ

-회덮밥 진짜 맛있는데ㅜㅜ

-율이 은근 애기 입맛 같은데 아메리카노나 홍삼 먹는 거 보면 완전히 그런 것도 아닌 것 같고...

-편식쟁이 율톢

“얘들아, 내일은 새벽 3시 기상이니까 씻고 바로 자.”

“넵. 수고하셨습니다.”

대기실에서 30분 동안 컴백 첫 음방 기념 라이브 방송까지 하고 온 터라, 숙소로 돌아왔을 땐 9시가 훌쩍 넘은 시간이었다. 매니저들은 숙소 안까지 멤버들의 짐이나 팬들에게 받은 선물, 동료 가수에게 받은 앨범을 옮겨준 후 돌아갔다.

한율은 자신의 몫을 챙겨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말끔하게 씻고 나온 뒤 물건을 정리하다, 핸드폰이 깜빡거리는 걸 뒤늦게 확인했다.

부친이 초코톡 메시지를 보냈다.

-[조용히 통화 가능할 때 전화 부탁한다.]

무슨 일이 있나?

한율은 의아한 얼굴로 바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부친으로부터 가수들 사이에 약이 돌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일단 좌 대표에게도 말하기는 했지만, 행여 그런 짓을 저지르는 사람을 알게 되거나 의심되는 사람이 생기면 꼭 아버지한테 먼저 말해라. 마약류 관련 범죄자들은 무척이나 지저분하고, 또 거미줄처럼 얽혀있어서 자신들 범죄가 드러난다 싶으면 무슨 짓을 어떻게 할지 몰라.]

“네.”

-[남이 주는 음식도 항상 조심하고.]

“네, 조심할게요. …그럼 들어가서 쉬세요.”

부친과 통화를 끝낸 한율은 한숨을 쉬었다.

‘처음엔 약인 줄 모르고 먹게 한 뒤, 서서히 중독….’

어지간한 중독자가 아닌 이상 육안으론 마약 복용 여부 판별이 힘들다. V12의 티모에게서 위화감을 느끼긴 했지만, 합법적인 약의 부작용이었을지도 모른다고 넘겼다.

RMMA가 끝나자마자 V12가 일본으로 건너가기도 했고, 만약 국내에 있었어도 V12가 핸드폰이 없는 상태라 크게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일부러 길우성을 불러내 마약을 전파할 가능성이 작으므로.

‘하지만 정말로 마약 소문이 돈다는 건.’

잠가놓은 책상 서랍을 열어서 외장하드를 꺼냈다. 안인섭의 클라우드에서 빼돌린 파일 중에도 마약을 흡입하거나 운운하는 영상 파일이 여럿 있었다.

대부분은 이미 언론에다가 뿌린 배우 주인결과 1세대 아이돌 출신 배우의 몰카였으나, 한율이 떠올린 건 영상이 아닌 통화 녹음 파일이었다.

안인섭과 여자 연습생 간의 통화.

한율은 방문을 잠그고 노트북을 켰다. 외장하드를 연결해 해당 파일을 찾아 재생했다. 통화 시기는 올해 2월.

[그런데요, 오빠. 저 작년에 서바이벌 프로그램 찍었었잖아요.]

[어.]

[그때 만났던 애한테서 갑자기 연락이 왔는데… 혹시 약 구해줄 수 있냐고 묻더라구요. 제가 만나는 분 통하면 충분히 구할 수 있지 않냐고, 그런데 저랑 그분 관계에 대해 어디까지 아는지는 모르겠어요. 그런데….]

횡설수설하는 여자아이. 안인섭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야.]

[네?]

[너 그 말 사장님한테도 했어?]

[당연히 안 했죠! 일단 내가 그런 걸 어떻게 아냐고 시치미도 뚝 뗐는데, 그냥 좀 불안해서….]

[걔 데뷔했어?]

[곧 한다고 들었어요….]

[걔 소속사 어딘데.]

[전엔 세이브였고 지금은….]

[씨발, 세이브.]

[왜요, 오빠? 거기 무슨 문제 있어요?]

[거기 대표 동생이 마약 전과범이었어. 아무튼 너, 걔랑 연 끊어. 약에 빠지면 사리 분별 못 하는 걸레 짝 되는 거 시간문제다.]

한율은 인터넷에 들어가 세이브 엔터테인먼트를 검색했다. 작년에 폐업한 기획사였다. 그러나 여자 아이돌 연습생과 서바이벌, 세이브 엔터를 함께 검색했더니 조건에 부합하는 사람이 딱 한 명 나왔다.

걸그룹 뉴온의 소피아 한.

뉴온은 올해 3월에 데뷔한 신인 걸그룹으로, 어스래빗과는 뉴욕 K-POP 콘서트에서 마주친 적이 있었다. 하지만 RMMA엔 불참가. 소피아 한과 V12를 나란히 검색해봤지만, 딱히 함께 엮인 이슈는 없었다.

한율은 피곤한 눈을 끔뻑거렸다. 그리고 아직 정리하지 않은 물건을 돌아보곤 한숨을 푹 내쉬었다. 벌써 11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일단 자자.’

지금 침대에 누워도 4시간 겨우 잘 수 있을 터다. 한율은 외장하드를 다시 서랍에 넣어 잠갔다. 노트북 전원도 끄고 물건도 마저 정리해 조명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

그러다 문득 핸드폰으로 인터넷에 들어가, 소피아 한과 퍼스트라인을 검색했다.

인터넷 기사가 떴다.

[뉴온 소피아 한, 퍼스트라인 코우와 특급 콜라보!]

저 좀 살려주세요

새벽 3시. 잠이 덜 깨 멍했던 멤버들의 눈이 서서히 또렷해졌다.

“약이요…? 마약?”

“그래.”

조수석에 앉은 조유찬이 멤버들을 돌아보았다.

“정말 그런 사람이 있는지, 소문이 사실인지는 아직 몰라. 하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겠지?”

멤버들은 서로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좌기훈 대표가 괜히 이런 이야기를 전달하라고 하진 않았을 거라는 생각, 그리고 불안으로 물드는 얼굴로.

“그리고 이 이야기는 다른 사람한텐 절대 말하지 마. 자칫하면 오히려 너희가 소문의 근원지가 되어서 엉뚱한 오해를 살 수 있어.”

“우리가 조심하라고 이야기하면, 제 발 저린 놈들이 되레 이상한 소문을 낼 수도 있겠네요.”

차남석이 잔뜩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럴싸하게 진실과 섞어서 구체적인 목격담을 꾸미고 여러 사람의 입을 빌려 떠들면, 멀쩡한 사람 하나 쓰레기로 만드는 건 일도 아니니까.”

“그렇게 말하니까 좀 무섭다….”

아이돌에게 범죄 관련 루머는 상당히 치명적이다. 나중에 거짓임이 명명백백 드러나도 아니 땐 굴뚝 운운하며, 그래도 뭐가 있으니 그런 소문이 나는 거 아니겠냐 끈덕지게 몰아가는 사람도 많다. 여기에 여러 못난 이유로 공격하는 안티와 악플러들까지.

악독한 루머의 생성과 의심의 꼬리표.

이 바닥에 심심찮게 보이는 일들이었다.

“이젠 같은 동료가 주는 것까지 의심해야 한다는 게 슬프기도 하고.”

“건네는 사람도 모르고 건네는 경우가 있을 수도 있다니까, 다들 조심하자.”

“그런데 진짜 악질 아냐? 멀쩡한 애한테 약을 몰래 먹이고 중독시켜서 또 다른 수단으로 악용하겠다는 거잖아? 이 바닥 사람이면 상대가 데뷔하기 위해서 얼마나, 몇 년을 고생했는지 더 잘 알 텐데…. 개쓰레기보다 못한 핵폐기물 급인데?”

길우성이 오만상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생각할수록 욕 나와.”

“다른 차에 탄 애들한테도 장전이 형이 말해주고 있겠죠?”

“응.”

“라이언한테 더 주의시켜야겠다. 친한 사람이 주는 거라고 함부로 덥석덥석 받아먹지 말라고.”

한율은 핸드폰을 보며 그들의 대화를 들었다. 지금 그들이 가는 SBC 라인업. 퍼스트라인이 올라가 있었다.

“그나저나 최근 들어서 마약 범죄가 점점 느는 것 같지 않아?”

“우리나라가 마약 청정국이란 말도, 이젠 정말 옛말이라더라….”

오늘 에서 어스래빗은 ‘그레이트7’과 같은 대기실을 사용하게 되었다.

‘그레이트7’은 본래 7명이었지만, 그중 한 명이 건강상의 문제로 장기간 휴식에 들어가 현재 6명으로 활동 중인 보이그룹이었다. 작년 여름에 데뷔해 어스래빗보다는 3개월 후배이고, 인지도는 아직 블루액션, V12보다 낮은 편.

최소 1년 안에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하면 소위 ‘망돌’ 가도로 들어설 가능성이 큰 팀이었다.

똑똑. 대기실 문을 노크하고 들어가자 그레이트7 멤버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세요.”

데뷔 연도는 같지만 마주친 건 아스대나 어제 <뮤직뮤직>이 고작인 사이. 어색한 인사를 주고받으며 어스래빗 멤버들은 비어있는 안쪽 공간으로 들어갔다.

“아이고고, 삭신이야….”

“히익. 박가람 얼굴 땡글땡글 부은 거 봐.”

“잠을 설쳐서 두 시간밖에 못 잤어.”

마약 관련 이야기는 아예 듣지 못한 사람들처럼, 멤버들은 평소처럼 잡담을 나누며 소파에 널브러지거나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박가람이 슬그머니 한율을 보며 말했다.

“한율이 어머니 표 레몬 생강차를 마시면 괜찮아질 것 같기도 하고…?”

한율은 가방에서 레몬 생강차를 담은 보온병을 꺼냈다.

“오늘부터 한 잔에 2천 원씩 받을게요.”

“응. 돈은 초코톡 계좌로 보내줄게.”

“5천 원 받을게요.”

“그래. 달라고.”

“…만 원?”

“차라리 주기 싫다고 해…!”

“네.”

“…….”

박가람이 상처받은 얼굴로 한율을 쳐다보았다. 장난이었다는 듯 종이컵에다 레몬 생강차를 따라서 내밀자, 그제야 활짝 웃으며 차를 마신다.

이건우가 혀를 차며 박가람을 쳐다보았다.

“스물한 살 박가람이. 열아홉 살 동생 거 뺏어 먹으니까 좋냐?”

“응. 목이랑 속을 따뜻하고 상큼하고 부드럽게 보호해주는 느낌이야.”

“써한네 어무니가 좋은 국산 재료로만 담그신 거라 더 그럴걸요…는, 나도 한 잔 마시고 싶다.”

“이제 나 마실 것밖에 없어.”

“아쉽구먼.”

한율은 보온병 뚜껑을 닫다가, 이쪽을 쳐다보는 시선을 느끼곤 고개를 돌렸다. 그레이트7 멤버가 가방에서 뭔가를 꺼내려다 말고 딴청을 피우는 게 보였다.

“……?”

“다들 조끼 입어. PD님에게 인사 갔다가 곧장 스튜디오로 가자.”

“네엡.”

인사와 드라이 리허설을 다녀온 후엔 수면 안대를 쓰고 잠을 청했다. 처음엔 환한 조명, 그리고 다른 팀 멤버들이나 스태프들의 인기척 때문에 좀처럼 잠들지 못했지만, 이윽고 그레이트7 측이 불을 꺼줘서 겨우 잠이 들었다.

4시간 후.

“아이고고, 삭신이야….”

슬슬 일어나서 첫 번째 사녹을 준비해야 하는 시간. 박가람이 새벽에도 했던 앓는 소리를 똑같이 내며 일어났다. 한율은 딱딱한 바닥에서 자느라 굳은 몸을 스트레칭으로 풀었다. 담요와 돗자리를 개켜놓은 뒤엔 양치와 세수.

“누가 우성이 좀 깨워라.”

가위바위보로 이겨 푹신한 소파를 차지한 길우성은 아직도 취침 중. 한율은 길우성의 다리를 툭툭 쳤다.

“야.”

“…흐엉?”

“더럽게 침 흘리면서 자냐.”

“…엉?!”

길우성이 벌떡 일어났다. 부랴부랴 안경을 찾아 쓰고 거울을 확인.

“안 흘렸잖아…!”

“형. 길우성 깨웠어요.”

“잘했어.”

때맞춰 샵의 헤어 메이크업 아티스트들이 대기실을 찾아왔다.

“안녕하세요.”

“굿모닝~.”

“어, 안녕하세요….”

안면이 있는지, 그레이트7 멤버 및 관계자들과도 어색하게 인사하며. 그레이트7 멤버들은 인사를 하자마자 시선을 피하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어젠 동생 라인이 먼저 단장을 해서, 오늘은 형 라인이 먼저 거울 앞에 앉았다. 한율은 차남석, 라이언과 소파에 나란히 앉아 기다렸다. 길우성은 세면대 앞에서 양치 중.

슥. 차남석이 한율에게 핸드폰을 내밀었다.

[그레7 회사도 원래 우리랑 같은 샵이었는데, 6개월 동안 대표가 대금 지급을 차일피일 미뤄서 원장님이랑 한바탕 싸움, 법정 소송까지 갔다더라. 그래서 사이가 어색한 거.]

아하. 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윤승우가 핸드폰과 핸드폰 전용 펜을 들고 와서 물었다.

“너희들 밥 뭐 먹을래?”

“저 비프스테이크 도시락이요.”

“지난 반에 시켰던 곳 말하는 거지? 한율아.”

“네.”

“전 여기 방송국 샌드위치에 아메리카노요.”

“남석인 샌드위치에 아메…. 라이언 넌?”

“불고기덮밥!”

윤승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른 멤버들에게도 가서 일일이 메뉴를 물어본 후 대기실을 나갔다. 위이잉…. 시끄럽게 울리던 드라이어기 소리가 순간 잦아들고, 그레이트7 멤버들의 말소리가 들렸다.

“쟤넨 먹고 싶은 거 다 시켜주나 봐….”

“부럽…, 헙.”

들린 말소리가 민망했는지 그들은 황급히 고개를 돌렸고, 대기실 분위기는 조금 더 어색해졌다.

잠시 후. 그레이트7이 먼저 사녹을 하러 나가자, 대기실엔 어스래빗 관계자들만 남았다.

강보배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그레7 회사…. 사정 안 좋은가 보다. 샵에서 딱 둘만 나와서 헤메 대충하고 가고, 스타일리스트랑 매니저도 각각 한 명뿐이고…. 도시락도 팬들이 보내준 것 같던데.”

이건우가 나지막하게 한숨을 쉬었다.

“보통 2, 3년은 수십 억대 적자 감수하고 활동해야 하니까, 최대한 아끼는 거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서포트가 너무 부실하면…. 아무리 홍보에 돈을 쏟아부어도 이도 저도 안 돼서 망하는 팀이 많은 판에.”

“스타일리스트 분 엄청 힘들어 보이더라.”

“하하하.”

조유찬이 흐린 눈으로 웃었다.

“크래도 갓 데뷔했을 때 딱 저랬단다, 얘들아….”

“정말요?”

“응. 우리는 스타일리스트 두 명, 매니저 두 명이기는 했지만. 하지만 우리를 더 힘들게 했던 건 작은 기획사라고 무시하는 사람들의 시선이랑 말들이었다? 하…. 그때만 생각하면 정말.”

조유찬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쨌든 너희들, 항상 겸손해야 해. 지금은 상대 인지도가 낮아 보여도 사람 일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몰라. 3년 안에 안 뜨면 아예 가망이 없다는 인식을 깨고, 갑자기 역주행해서 급부상하는 팀도 있으니까. …아니, 상대가 뜨든 안 뜨든, 성적만 가지고 사람 판단하면 안 돼.”

“네에.”

“아직 우리도 쩌리인ㄷ….”

“너무 깎진 말자, 사과튠즈 1위.”

“겸손하란 말이 본인이 이룬 성과와 자신감을 꺾으란 말은 아니란다. 그럼 슬슬 이동할까?”

“네에.”

스튜디오에선 퍼스트라인의 사전 녹화가 한창이었다. 노래에 맞춰 응원 구호를 외치는 퍼스트라인 팬들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무대가 끝나고 스태프들이 영상을 확인하는 동안, 퍼스트라인 멤버들은 무대 끝으로 다가가 팬들과 웃으며 대화를 나눴다. 아주 다정한 얼굴로 목소리로.

어둠에 잠긴 백스테이지. 그 모습을 지켜보던 라이언이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가식 쩔어.”

“라이언, 쉿.”

이윽고 장내에 PD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울렸다.

[OK,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와줘서 고마워! 사랑해!”

꺄아! 팬들의 환호성을 들으며 퍼스트라인이 무대에서 내려왔다.

“수고하셨습니다, 선배님.”

백스테이지로 나온 퍼스트라인 멤버들을 향해 꾸벅 인사하자, 그들도 웃으면서 화답했다.

“네. 녹화 수고하세요.”

“컴백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한율은 말없이 고개만 꾸벅이는 코우와 시선을 맞추고 미소 지었다.

“나중에 대기실로 찾아뵐게요.”

순간 코우의 얼굴에 ‘왜 날 보면서?’ 이런 의문이 떠오른 듯했으나, 그는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네, 수고하세요.”

“나 쟤네 볼 때마다 존나 배 아픔. 으으.”

“열폭 멈춰!”

“크큭.”

퍼스트라인 멤버들은 대기실로 들어가며 낄낄거리며 웃었다. 대기실엔 함께 사용하는 후배 신인 그룹도 있었지만, 그들은 신경 쓰지 않았다.

“우리도 일단 아무나 띄우자. 무슨 짓을 해서든 띄우는 거야. 불쌍한 길고양이를 주워서 키우든, 천재 배우로 각성하게 매일 기도를 드리든, 성형 수술비를 모아주든.”

“미안, 나 고양이 알레르기. 수고.”

“이런 쓸모없는 새끼. 꺼져.”

“말하는 본인은.”

잠시 생각에 잠겼던 리더가 멤버들에게 물었다.

“그런데 우리 정말 숙소에서 고양이라도 키울까? 아니면 정말 특이한 동물이라도 키워서 동물 프로그램에 나가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순수하고 정감 가는 이미지 만들기 좋잖아.”

“수운수우? 으, 징그러.”

“아니면, 너희 부모님 집에 있는 너 닮은 못생긴 고양이라도 데려오든지.”

순수란 말에 질색하던 멤버가 이번엔 정색했다.

“싫은데. 그놈 스트레스받아.”

코우는 멤버들이 뭐라 떠들든 관심 없다는 얼굴로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핸드폰을 꺼내다가 함께 대기실을 사용하는 신인 아이돌을 보았다. 조금 전부터 힐끗거리며 훔쳐보는 시선이 거슬려서.

“왜?”

“네? 아, 아니에요. 죄송합니다….”

신인 아이돌은 황급히 고개를 숙이곤 같은 팀 멤버 옆에 찰싹 붙었다. 그리고 사과패드를 통해 옆의 멤버와 대화를 나누었다.

[그 소문, ㅍㅅㅌㄹㅇ 아닐까?]

[글쎄. 원래 성격들이 개차반이라던데.]

[그러니까.]

[그런데 내가 보기엔 ㅋㅇ는 아닌 것 가틈. 제일 멀쩡하자나.]

“…….”

아무리 봐도 메시지를 통해 뒷담을 나누는 모습. 그러나 코우는 조용히 고개를 돌려 자신의 핸드폰을 꺼냈다. 어디에 내놔도 부끄러운 멤버들이 그런 행태를 보일 때마다 겪었던, 익숙한 일이었다.

그보다 지금 그를 불편하게 만드는 건 다른 일이었다.

“하아….”

코우는 미간을 구긴 채 한숨부터 쉬었다. SNS. 보이그룹 V12의 티모로부터 DM이 들어와 있었다.

-[제발 부탁드릴게요, 형. 그 사람 초코톡 ID만이라도 가르쳐주세요. 정말 맹세코, 아무에게도 말 안 할게요.]

-[저 오늘도 순간 스트레스가 폭발해서 팬을 밀쳐 버리고 싶다는 충동도 느끼고, 멤버한텐 아무것도 아닌 일인데 화내고 심한 말까지 퍼부었어요. 내 마음과는 정반대로, 이래선 안 되는데, 머리론 아는데, 이대로 가다간 내가, 내가 아닌 게 될 것 같아요. 미쳐가는 것 같아요.]

-[저 좀 살려주세요.]

증거 있어?

‘어쩌다 이렇게 꼬인 걸까.’

지난달, RMMA 스페셜 퍼포먼스팀이 처음 한자리에 모였다. 대부분은 안면만 있던 사이였다. V12의 티모도 그중 한 명.

하루는 티모가 굉장히 죽을상을 하는 게 눈에 들어왔다. 예전에 티모가 일본에서 살았던 적이 있었다고 이야기를 나누었던 터라, 코우는 무심코 괜찮냐 물었다. 그러자 티모는 기다렸다는 듯, 잠을 제대로 못 자고 신경이 예민해져서 힘들다고 하소연했다.

『최대한 안 그런 척 연기는 하고 있지만, 점점 숨이 막혀요. 그럼 당장 때려치워라, 이 말 들을까 봐 가족한테도 못 털어놓겠고…. 다들 자기 일 아니라고 쉽게 생각하잖아. 기껏 데뷔했는데 사람들 시선이 무섭게 느껴진다니….』

더 들어보니, 최근 사생 스토커로부터 성추행을 당했다고 했다. 그 이후로 불면증과 신경 예민이 더 심해졌다고.

『멤버들한테도 어떻게 말해요. 다들 걱정할 텐데….』

티모의 불안은 코우도 데뷔 초에 겪었던 일이었다. 팬을 빙자하며 다가온 이죽거림과 추행. 수치심과 모멸감을 주는 날카롭고 지저분한 악플. 그로 인해 깊게 생기는 마음의 상처.

내가 잘못한 건가?

아예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나?

자존감이 깎이고 자존심도 무너지는 순간의 연속.

그때 코우는 예전에 소피아에게 받아, 가방에 처박아둔 알약 세 정을 떠올렸다.

『이거 한번 먹어볼래? 친구가 준 건데, 먹으면 기분 좀 나아진다고 하더라. 걔가 병원에서 처방받은 약이라니까, 다른 사람들한텐 비밀로 하고.』

나중에 티모 상태가 이상하다는 걸, 그 약이 정상적인 약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느꼈을 땐 이미 늦은 후였다.

『혹시 몰라서 반의반으로 쪼개서 먹어봤는데도 효과가 좋더라고요. 고마워요, 형. 다른 사람한텐 절대 비밀로 할게요…!』

‘그때 그걸 건네는 게 아니었는데.’

코우는 당장 소피아에게 진실을 확인하려 했지만, 상대방이 핸드폰이 압수된 상태라 연락 자체가 힘들었다. 그래서 위험을 무릅쓰고 숙소까지 찾아가 겨우 만났는데, 그녀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티모? 약? 내가 언제 너한테 그런 걸 줬는데? 증거 있어?』

“하….”

코우는 재차 한숨을 쉬며 앞머리를 쓸어넘겼다. 그리고 티모에게 답장을 보냈다.

‘미안하지만, 나도 살아야겠다.’

-[누구 ID를 말해달라는 건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힘들면 회사에 말해 잠시 쉬면서 상담을 받는 게 낫지 않을까?]

‘어차피 내가 티모에게 건네줬다는 증거도 없고.’

뭐 별일이야 생길까. 옆에 다른 멤버도 많을 텐데.

코우는 그렇게 생각하며 티모로부터 온 DM을 삭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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