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뮤닷 <락뮤닷> 출연자 대기실.
어스래빗이 사용할 대기실엔 아직 다른 팀들이 오지 않아, 무척 캄캄하고 고요했다.
“이 넓은 곳에 우리만 있으니까 뭔가 으스스하다. 공기도 진짜 서늘해.”
“저 칸막이 안에 누가 숨어있어도 모르겠다.”
유호가 하얗게 질려서 문 앞에 우뚝 섰다.
“그런 소리 하지 마, 무섭잖아…!”
그 옆으로 키가 작은 <락뮤닷> 스태프가 쏙 들어가며 외쳤다.
“히터 틀어드릴게요! 그리고 20분 후에 스튜디오로 이동할게요!”
“…네, 감사합니다!”
어스래빗 멤버들은 <락뮤닷> 측에서 준비해준 의상으로 갈아입고, 예고 영상을 촬영할 스튜디오로 이동했다.
“호 형은 나중에 정말 용감하고 강한 여성분을 만나야 할 것 같아.”
“보배 네가 누가 숨어있어도 모를 것 같다느니 그런 말을 해서 순간 겁을 먹은 거지, 그런 말 안 들었으면 의식조차 안 하고 그냥 들어갔을걸?”
“하긴. 호 형 혼자 아무도 없는 작업실에서 밤새는 거 보면, 뭐.”
길우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벌레도 잘 잡더라.”
“회사에 벌레가 있어?”
“아니, 예전 숙소에서 바 선생 나왔을 때.”
“거기 바퀴벌레 있었어?”
“몰랐어, 남석 씨?”
“거기 지금 드림래빗이 숙소로 쓰고 있잖아….”
“드림 애들한텐 절대 비밀이다.”
“아냐. 어쩌면 이미 맞닥뜨려서 한바탕했을지도 몰라.”
“걔네.”
앞서 걷던 조유찬이 끼어들었다.
“바퀴벌레 보자마자 티슈 상자 집어서 후려치더라.”
이건우가 진지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멋진데?”
길우성은 질색했다.
“멋지긴 뭐가 멋져! 그렇게 후려쳐서 죽이면 사방에 뭔가가 촤악 퍼진다고…!”
“뭔가가 뭔데?”
“있어! 그… 극혐스러운 뭔가가!”
“안녕하세요!”
복도에 울리는 그들의 인기척을 들었는지, 스튜디오에서 원제로의 현강희가 나와 꾸벅 인사했다. 변지욱도 불쑥 고개를 내밀며 손을 뻗었다.
“하이욥! 무슨 얘기하는데 이렇게 시끄러워? 복도 전세 냈어, 형님들?”
“바퀴벌레 얘기했다.”
“…으. 새벽부터 뭐 그런.”
“안녕하세요!”
스튜디오로 들어가선 스태프와 원제로 멤버들에게 큰소리로 인사했다. 대본을 들고 미리 연습하던 원제로 멤버들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안녕하세요.”
조연출이 외쳤다. 스튜디오가 작아서 그의 목소리가 쩌렁 높이 울렸다.
“대사부터 맞춰볼게요! 대본 들고 하셔도 됩니다!”
“네!”
10여 분 동안 연습과 리허설을 하고 곧바로 촬영에 들어갔다.
컨셉은 어스래빗과 원제로의 합동 크리스마스 파티.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잔뜩 나는 세트장에서, 그들은 어색한 발연기를 펼쳤다.
“그리고, 어스래빗과 크리스탈 래빗의 ‘하양토끼, 까망토끼’가 두 번째 디지털 싱글, <루돌프와 산타토끼>로 돌아온대!”
“뭐어?!”
한율도 다른 아이들처럼 깜짝 놀란 표정을 과장되게 지었다. 한 손엔 오븐구이 닭다리를 든 채.
“정말 산타가 <락뮤닷>에 찾아오는 거야?”
“여기에 여심을 따뜻하게 스르륵~ 녹일 티스트 선배님의 솔로 무대까지!”
“그리고!”
어스래빗 메인 래퍼와 원제로의 메인 래퍼가 다른 출연자들의 이름과 곡명을, 아주 빠르고 정확한 딕션으로 줄줄이 말했다. 다른 이들은 이름이 바뀔 때마다 지정된 리액션을 보였다.
중간에 실수해서 당황하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조연출은 그런 모습 또한 주요 시청자들에게 웃음을 줄 수 있다고 판단했는지 좀처럼 NG를 외치지 않았다.
“OK,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PD님.”
오븐구이 치킨과 거대한 케이크를 뚫어져라 보던 라이언이 조연출에게 물었다.
“촬영에 쓴 음식들은 어떻게 돼요? 케이크 같은 거….”
“버려야죠. 먼지가 많이 묻어서, 진짜로 먹으면 배탈 나요.”
“네….”
“단 거 먹고 싶어요, 형?”
한율의 물음에 라이언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나중에 매장 열리는 시간 되면 아이스크림 케이크 주문할까요? 형 요즘 살 빠져서 그 정돈 먹어도 될 것 같은데.”
“그거 비싸잖아.”
“괜찮아요. 선물로 받은 모바일 쿠폰이 많이 남았거든요.”
“뭐야, 우성?”
그때 그들 옆으로 정민솔이 지나가더니, 변지욱과 어깨동무하며 스튜디오를 나가는 길우성에게 손을 뻗었다. 그러곤 장난스럽게 머리를 쓰다듬었다.
“키 좀 큰 것 같은데?”
“…엉? 정말?”
“너 나보다 작았었는데, 지금은 비슷하잖아. 키 컸네.”
“오…? 오오!”
길우성이 손으로 정민솔과 제 키를 가늠하며 탄성을 질렀다.
“깔창을 깐 보람이 있었군!”
“아? 나도 깔창 깔았는데.”
“오오…?!”
멤버들을 비롯해 스태프들도 많은 자리다. 여기에 길우성은 사람을 노골적으로 배척하기는커녕, 돌려 까지도 못하는 성격. 그래서 보란 듯이 친한 척을 하는 걸까.
라이언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뚱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원제로 오늘도 2위 해라.”
잠시 후, 대기실.
한율은 핸드폰을 확인했다. 퍼스트라인의 코우로부터 초코톡이 들어와 있었다.
-[리허설 끝나고 빨간색 자판기 앞.]
또 엄청 시끄러워지겠다
[누구한테 어디까지 들었어?]
빨간색 자판기 앞. 한율은 핸드폰에 메시지를 적어서 내미는 코우를 바라보았다. 시선을 피하는 그의 얼굴엔 불안과 수심이 가득했다.
티모의 이상한 감정 기복, 아이돌 사이에서 은밀히 퍼진다는 마약 소문, 그리고 스폰을 받는 연습생에게서 마약을 찾던 여자 아이돌, 그녀와 콜라보했던 코우.
이 연결고리를 보고 혹시나 해서 찔러본 건데, 정말 티모에게 무언갈 건넨 모양이었다.
한율이 대답 없이 가만히 쳐다만 보자, 코우가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으며 메시지를 수정했다.
[티모?]
한율은 입을 열었다.
“요즘 소문이 돌더라고요.”
흠칫. 코우의 시선이 그제야 한율을 향했다.
“…무슨 소문?”
“아주 대범하게 방송국에서, 동료 아이돌에게 이상한 걸 퍼뜨리는 사람이 있다는 소문이요.”
“난 아냐…!”
말이 끝나기 무섭게 코우가 강하게 부정했다. 지나가던 사람들의 시선이 이쪽을 향하고, 코우는 그들의 눈치를 살피며 목소리를 낮췄다.
“네가 어디까지 아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알고서 건넨 거 아니야. 절대. 내가 미쳤어? 들키면 매장은 물론이고 당장 추방당할 텐데?”
코우는 핸드폰을 빠르게 두드렸다.
길어지는 글. 시간이 조금 걸리겠다 싶어, 한율은 주머니에서 지폐를 꺼내 자판기에 넣었다.
삑, 덜컹.
소피아 한이 현재 퍼지는 소문의 주인공인지는 아직 확실치 않다. 그러나 마약 범죄는 퍼뜨리는 것 자체에 있는 게 아니라, 그걸로 이익을 거두는 데에 있다. 그러니 아무나 목표물로 잡지는 않았을 터.
마약을 한 게 들통나면 잃을 게 많은 사람. 그만큼 가진 게 많아, 착취하고 갈취할 만한 게 많은 사람. 마지막으로, 외부로 발설하지 않는, 공범이 될 만한 사람.
한율은 음료수 뚜껑을 따면서 코우를 보았다.
코우에 대해 검색해보니, 그의 아버지는 대학교수, 어머니는 의사, 형은 변호사였다. 그야말로 명예와 재물을 두루 갖춘 집안.
티모 혹은 제삼자에게 약을 건네라는 말을 듣고 넘긴 게 아니라면, 원래는 코우가 타깃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본인도 그걸 깨달았을 터.
“…….”
코우가 한율에게 말없이 핸드폰을 내밀었다. 메모 앱엔 약을 티모에게 건네게 된 경위가 구구절절하게 적혀 있었다. 소피아의 이름, 최근 티모로부터 받은 DM까지.
[…그리고 이건 내 느낌인데, 티모는 처음부터 그런 약인 걸 눈치챘던 것 같아. 알면서도 먹은 것 같다는 말이야.]
한율은 마지막 문단을 물끄러미 보다가 코우에게 말했다.
“선배님 한국어 정말 잘하시네요. 한국에 온 지 3, 4년밖에 안 됐다고 들었는데.”
“…….”
한율이 다 읽은 듯하자 코우는 적었던 글을 모조리 삭제했다.
“그런데 정말 그 사람한테 티모 이름을 말했어요?”
하. 코우가 크게 한숨을 쉬며 제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넘겼다. 염색과 탈색을 반복하여 상할 대로 상한 머리카락은 그대로 엉망이 되었다.
“…어.”
“선배님 말이 사실이라면… 지금쯤 그 사람, 굉장히 불안하겠네요. 엉뚱한 사람이 먹고 지금 부작용까지 겪고 있는데, 회유나 통제는커녕 연락하기도 쉽지 않은 사람이니.”
“이제 말해줘. 어떻게 안 거야? 너….”
코우는 주변에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티모한테 들은 거 아니지?”
“그 사람이요.”
한율은 느긋하게 음료를 한 모금 마신 후에야 대답했다.
“전 소속사 대표 동생이 그쪽 전과범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찍었어요.”
“…뭐?”
“지난번 RMMA 때 티모 상태가 이상해 보이더라고요. 굉장히 들떴다가, 실수 한 번에 굉장히 우울해졌다가. 그런데 최근 들어서 선배님이랑 종종 단둘이서 이야기했다지, 컴백하고 보니 그런 이상한 소문이 돌지…, 그래서?”
“…그럼.”
한율을 쳐다보는 코우의 얼굴이 멍해졌다.
“고작 그런 단서로… 날 떠본 거라고…?”
“사실 우연에 가깝기는 했어요. 선배님이랑 그분이 콜라보했다는 기사를 보지 않았다면, 아마 끝까지 연관성을 찾진 못했을 거예요.”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사람처럼 코우는 기가 막힌 표정을 지었다.
“…하.”
“어쨌든 지금이라도 경찰에 사실대로 신고하고, 티모에게도 사과하세요. 그래야 나중에 이 일이 드러나도, 최소한 선배님이 공범이란 소리는 안 들을 거예요. 티모도 제때 치료받을 수 있고요.”
“…….”
경찰과 신고란 단어에 코우의 눈이 흔들렸다. 한율은 그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을 이었다.
“그 사람, 혹은 그 사람 뒤에 있는 브로커와 티모가 직접 연락이 닿으면 일이 어떻게 크게 번질지, 전혀 상상이 안 가세요? 오늘 안에 신고 안 하시면, 제가 제보합니다.”
잠시 후, 한율은 대기실로 돌아오며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녹음 정지, 저장.
“밥 안 먹고 어디를 그렇게 돌아다녀. 아이스크림 케이크 다 녹겠다.”
어스래빗이 사용하는 칸막이 안으로 들어가자 도시락과 아이스크림 케이크가 도착해있었다. 한율은 빈자리에 앉아 도시락을 열었다.
“아이스크림은 알아서들 드세요. 전 생각 없으니.”
“그래도 한율이 네가 선물 받은 걸로 주문한 건데.”
“괜찮아요.”
“그럼 나 조금만 더 먹어도 돼?”
“이언아. 너 이미 나랑 남석이 몫까지 먹었잖니. 그만 먹어라.”
“한율아.”
조유찬이 한율에게 대본 한 장을 내밀었다.
“30분 후에 보배랑 MC 대기실 가서 인터뷰 연습.”
“네.”
한율은 밥을 먹으면서 컴백 기념 인터뷰 대본을 읽었다. 서너 줄밖에 되지 않았지만, 원래 MC인 찬형이 마지막에 덧붙이듯 말하는 영어 소개가 한율의 몫이 되어있었다.
“아, 써한. 조금 전에 그레이트7의 완언 님이 너 찾았었음.”
“왜?”
“<고양이 난로> 팸플릿을 들고 있던 걸로 봐선…, 사인받으러 왔던 것 같은데.”
어제부터 눈치를 살피며 머뭇거렸던 게 그거였나.
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 * *
“괜찮네요.”
<락뮤닷>의 강정진 PD는 새벽에 어스래빗과 원제로가 촬영한 영상을 확인했다.
“시간이 촉박했는데, 수고하셨습니다.”
아무리 짧은 영상이라도 당일이 아닌, 하루 이틀 전 촬영하고 편집하는 게 퀼리티를 위해 좋지만, 원제로가 워낙 바쁜 탓에 오늘 새벽에 촬영하게 되었다.
강 PD의 무뚝뚝한 칭찬에, 조연출 김준태는 머쓱하게 웃었다.
“애들이 알아서 잘하더라고요.”
“애들 분위기는 어땠어요?”
“대부분은 사이가 좋은 것 같은데, 유심히 보니까 정민솔 만은 그런 게 있긴 있더라고요.”
김준태가 목소리를 낮췄다.
“다 같이 인사할 때만 웃고, 잠깐 대본을 볼 때나 촬영 끝났을 땐 대화를 전혀 안 나누더라고요. 나갈 때 어스래빗 멤버에게 장난을 치듯 말을 걸기는 했지만, 그것도 정민솔이 성큼 다가오니 받아준다는 느낌이 강했고.”
“흐음.”
“그리고 원제로 스태프한테 슬쩍 들었는데, 원제로 안에서도 사이가 소원한 애들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특히 임승준하고 현강희랑은 쉬는 시간에 말 한마디 나누는 걸 거의 못 봤대요.”
인원이 많으면 파벌이 생기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각기 다른 사람들이 모여 두루두루 친하게 지내는 건 동화 속에나 가능한 일.
강 PD는 예전에 경솔하게 입을 놀리던 정민솔의 행태를 떠올렸다.
“이번에 심 작가님이 원제로 리얼리티 프로그램으로 간다는데, 고생 좀 하겠네요.”
“초 단위로 영상을 보고 멤버 간의 케미를 분석하는 팬들에게 들키지 않게 그림을 만들려면… 어후. 그럼 전 스튜디오로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네, 수고했어요.”
조연출이 나가고 나서 강 PD는 진지한 얼굴로 다시 영상을 돌려보았다. 카메라 앞에서 위축되지 않고 표정도 좋고 말도 잘하는 원제로 멤버를 찾아서.
3월이 되면 원카운트의 찬형과 스카이러너의 용맹이 MC 자리에서 내려오기로 했다.
아림과 스엔, 두 기획사 측에서 약속이나 한 것처럼 내년 2월까지만 해야겠다고. 이유는 점점 많아지는 인기와 더불어 늘어가는 해외 스케줄, 아티스트의 컨디션 관리를 위해서.
‘어스래빗에도 잘할 법할 친구들이 많지만, 이미 타사의 음방 MC가 있으니.’
그의 아쉬운 시선이 어스래빗의 라이언에게 머물렀다.
우웅.
강 PD는 핸드폰에 뜬 발신인 이름을 확인하곤 전화를 받았다.
“네, 강정진입니다. …네?”
그는 놀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평소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로 유명한 무뚝뚝한 사람이 황급히 놀란 소리를 내자, 주변의 다른 스태프와 작가들이 그를 주목했다.
강 PD는 황급히 조정실을 나가 사람이 없는 대기실로 들어갔다.
“그게 정말입니까? …네, …네. 알겠습니다.”
후우. 통화를 끊자마자 그는 미간을 구긴 채 한숨을 쉬었다. 다시 조정실로 돌아가자 작가가 긴장한 얼굴로 물었다.
“무슨 일 있으세요?”
강 PD는 스튜디오 화면을 보았다. 그곳에선 현재 사녹 준비가 한창이었다. 다행히 아직 팬들은 입장하지 않은 상태.
“걸그룹 ‘락락’ 빼야겠습니다.”
“네?”
“왜….”
삑. 강 PD는 현장 PD와 연결된 마이크를 잡았다.
“최 PD님, 지금 무대 준비 올스탑하세요. 그 팀, 오늘 무대 못 올라갑니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드러그 이슈 터졌습니다.”
헉. 그 말에 스태프들은 일제히 ‘X 됐다’라는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방송 시간 3, 4분을 다른 걸로 채워야 한다는 소리이므로.
마이크에서 입을 뗀 강 PD도 고민에 잠겼다.
‘이제 어쩐다.’
생방송까지 앞으로 6시간. 대타를 구하기엔 한참 늦은 시간이었다. 남은 사녹도 있는 데다가 아무나 데려올 수도, 데려온다고 해도 카메라 리허설을 맞출 시간도 빠듯할 테니.
그때 문득 강 PD의 눈에 조금 전 보던 영상이 들어왔다.
‘…아.’
“어스래빗 매니저 분?”
어스래빗이 두 번째 사녹을 준비하기 위해 의상을 갈아입고 헤어 메이크업을 수정할 때였다. <락뮤닷> 조연출이 어스래빗을 찾아왔다.
“네!”
“컴백 기념 인터뷰 대본이랑 큐시트 수정됐습니다. 확인해주세요.”
“네, 감사합니다.”
큐시트가 바뀌어? 거울 앞에 앉아 단장을 받는 이들을 제외한 멤버들이 조유찬에게 다가왔다. 조유찬이 대본을 한율과 강보배에게 나눠주었다.
“다음 팀 무대 소개 멘트가 바뀌었는데?”
“……?”
한율은 의아한 얼굴로 대본을 확인했다. 정말로 기존 대본에 있던 걸그룹 ‘락락’에 대한 소개 멘트가 그다음 팀으로 바뀌었다. 큐시트에선 아예 락락이 사라졌다.
강보배가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조금 전 스튜디오에서 만났을 땐 별일 없어 보였는데…. 뭔가 큰일이라도 생긴 건가?”
락락이 갑작스레 빠진 이유는, 사녹을 모두 마치고 MC 대기실을 다시 찾았을 때 찬형에게서 들을 수 있었다.
“예전에 터졌던 이슈 기억나? 주인결 2탄, 1세대 아이돌 출신 배우 장원길.”
“네.”
“그때 폭로된 영상에 그 사람이 여자 아이돌 두 명한테 마약 권유했다는 내용도 담겼었잖아. 그런데 오늘 장원길이, 자신의 권유를 받고 진짜 마약을 한 사람이 있는데 그게 락락 멤버라고 밝혔대.”
허억. 강보배가 놀란 얼굴로 헛바람을 들이켰다. 용맹이 주변을 살피더니 낮은 목소리로 속닥거렸다.
“그리고 너희들 이런 소문 들어봤는지 모르겠는데…. 최근에 신인들 사이에서 마약을 파는 사람이 있다는 괴소문이 돌고 있거든? 그래서 PD님이, 해당 멤버만이 아니라 락락 자체를 아예 라인업에서 빼버린 것 같아.”
두 사람도 소문을 알고 있었구나. 그러나 한율은 처음 듣는 이야기인 것처럼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런 소문이 있어요?”
용맹이 세상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정말 그런 사람이 있는지는 확실하진 않지만, 오늘도 봐. 바로 우리 곁에 마약 범죄자가 있었던 거잖아.”
찬형은 불쾌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생각만 해도 역겨워. 그딴 걸 여기저기 퍼뜨리려는 사람이 있다는 게.”
한율과 강보배, 용맹은 동감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새로 바뀐 인터뷰 대본으로 가볍게 연습한 후엔 MC 대기실을 나왔다.
“이 일 알려지면 또 엄청 시끄러워지겠다.”
“그렇겠죠. 거론된 사람은 물론이고, 같은 팀 멤버들, 친한 다른 연예인, 더 나아가서 이 바닥 전체를 싸잡아 비난하는 사람도 많아질 테고.”
“하아…. 가뜩이나 안 좋은 편견을 가지고 우리를 보는 사람이 많은데.”
“그러게요.”
그때 한 대기실에서 퍼스트라인 멤버들이 나왔다. 이번 앨범 활동 후 처음 만나는 선배 가수팀에게 인사를 하러 왔던 모양.
그때, 무심코 고개를 돌리던 코우와 한율의 시선이 마주쳤다.
“…….”
…휙. 코우가 먼저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돌렸다.
한율은 초조한 걸음으로 멀어지는 그를 보며 생각했다. 오늘 락락이 급히 빠진 이유를 알게 되면, 재촉하지 않아도 알아서 신고하지 않을까.
현재 그의 마음을 잠식하는 불안감. 마약의 ‘약’자만 들어도 크게 증폭될 테니 말이다.
밝혀지는 것도 시간문제
<락뮤닷> 생방송이 시작되었다.
한율과 강보배는 두 번째 무대가 시작될 때 즈음 MC석으로 올라갔다. 긴장한 강보배가 제자리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뛰자, 찬형이 진정하라며 덥석 잡아 카메라 쪽으로 돌렸다. MC석 근처에 앉아있던 찬형과 용맹의 팬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이윽고 무대가 끝나고 MC석 카메라에 불이 들어왔다. 한율과 강보배는 카메라를 보며 환하게 웃다가 힘차게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어스!”
“래빗!”
“컴백으로 인사드립니다!”
컴백 소감 인터뷰와 짤막한 포인트 안무 시범에 이어 다음 무대 소개까지. 한율이 유창한 영어로 마무리할 땐 <락뮤닷> 톡창엔 소소한 잡담이 올라왔다.
-발음 개좋아ㅜㅜ
-보배는 보기에 새침하고 도도하고 차가운 도시 남자처럼 보이지만 실은 강원도 출신의 순둥순둥한 길치입니다.
-와 친구한테 들었을 땐 구라치지 말라고 했는데 진짜 텍사스 사투리 쓰네;; 댈러스 그립다
-서한율 찬형이보다 키 크네?
-나 어제 고양이난로 봤는데ㅎㅎㅎㅎ
-옆의 애는 웹소설 표지 그림체 같다
-윤우야아아아♡♡♡♡♡
-님들 오늘 방송 갑자기 ‘락락’ 빠진 이유 기사 뜸ㄷㄷ
포털사이트 연예뉴스란 메인.
[걸그룹 ‘락락’, 음악방송 준비 중 마약 의혹 날벼락]
[2016년 데뷔한 인기 걸그룹 ‘락락’이 음악방송 <락뮤닷> 사전녹화 준비 도중 돌연 방송 출연을 취소했다.
익명을 요구한 제보자에 따르면 금일 오전, 검찰 조사에 출석하던 배우 장원길이 기자의 ‘마약을 권유한 아이돌이 누구입니까’란 질문에 ‘락락 친구와 함께했습니다!’라고 대답하며…(중략).
이에 락락 소속사 측은 당사자를 상대로 사실 여부를 파악 중이며 공식 입장이 나오기 전까진 음해성 추측을 자제해 달라고 당부…(중략).]
-락락이 언제부터 인기 걸그룹이었냐ㅎㅎ
-장원길이 암만 또라이 같아도 아무 상관 없는 사람 이름을 거론했을까? 것도 듣보 아이돌을?
-잠깐이지만 진심으로 좋아했었다...ㅅㅂ..ㅜㅜ
-술집에서 옷 다 벗고 더럽게 놀던 놈이랑 같이 어울렸단 거네? 약까지 하면서? 그러면서 방송에선 청순한 척 순진한 척ㅋㅋㅋㅋ 구역질 나와^^ㅣ발
-더러운 연예계. 하지만 내 새끼는 달라. <네 새끼도 그래요. 구정물에 들어갔는데 안 물들겠냐?
-개충격
-어젯밤까지 아무렇지 않게 라방했던 애들 출연이 갑자기 취소돼서 느낌 좀 싸하더라니;;
-어쩐지ㅋ 얘네가 갑자기 빠져서 클쓰 특집 예고 영상이 풀버전(+비하인드포함)으로 올라왔던 거구나ㅋㅋ 왤케 분량을 몰아줬나 했다ㅎㅎㅎ
ㄴㅅㅎㅇ 닭다리 들고 하는 어색한 발연기에 ㅈㄴ 빵터졌는데ㅋㅋ
ㄴ???: 발연기도 자연스럽게 소화해야 연기돌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ㄴ서한율 드라마랑 영화 안 본 사람들은 진짜 연기 못하는 줄 착각할 것 같음ㅋㅋㅋㅋ
<락뮤닷> 방송이 끝나고 출연자 대기실은 어수선했다. 사람들이 이제야 ‘락락’의 갑작스런 출연 취소 이유를 알게 된 까닭이었다.
“정말이야, 그거? 락락 멤버 전부…는 아니지? 누구야?”
그레이트7의 완언이 가져온 <고양이 난로> 팸플릿에 메시지와 사인을 해주던 한율은 고개를 들었다. 다른 팀의 매니저가 당혹스러운 얼굴로 통화하며 지나갔다.
“…아이씨, 전에 락락이랑 같이 스케줄 뛰어서 그렇지!”
“정신이 없네요.”
“그러게요…. 사인 감사합니다. 누나가 좋아하겠어요.”
한율은 완언과 웃으며 인사를 나누곤 어스래빗 대기 공간 안으로 들어왔다. 조유찬이 멤버들에게 고했다.
“불미스러운 이슈가 터지기는 했지만, 우리와는 아무 상관 없는 일이야. 그러니 평소처럼 행동하자. 조금 전에 찍은 셀카도 SNS에 올리고.”
“네에.”
어스래빗 멤버들은 바로 짐을 싸고 대기실을 나섰다. 단독 대기실이면 몰라도, 여러 팀과 함께 사용하는 널찍한 공용 대기실은 오래 있기가 불편한 까닭이었다. 공기도 서늘하고, 시끄럽기도 해서.
“집에 가자, 가자.”
“남석이 넌 회사로 가자. 광고 관련해서 전달 사항 있어.”
“네.”
숙소로 돌아왔을 땐 밤 10시였다. 씻고 나서 편한 옷을 걸친 건 10시 반 무렵. 내일도 새벽에 일어나야 하는 터라 한율은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코우의 신고 여부도 내일이 되면 자연스레 알게 될 것이다. 내일 MBS K <로얄K뮤직>엔 퍼스트라인도 출연 예정이므로.
다음 날, <로얄K뮤직> 어스래빗 단독 대기실.
드라이 리허설을 다녀온 후 아침을 먹는데, 차남석이 밥을 먹다 말고 멤버들이 먹는 모습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왜 그렇게 봐, 부담스럽게.”
“누가 제일 맛있어 보이게 먹는지 보려고요.”
“팀버거 광고 때문에?”
차남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우리 중에서 제일 맛있어 보이게 먹는 사람이야.”
멤버들의 시선이 일제히 한 명을 향했다. 이건우가 라이언을 가리켰다.
“정말로 맛있게 먹는 이 사람이지.”
입을 다문 채 꼭꼭 씹어먹던 라이언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
“하지만 다른 사람의 모습을 참고하는 건 형이랑 안 맞을걸요. 외모랑 분위기 자체가 다르잖아요.”
“그렇긴 한데.”
차남석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버거를 잔뜩 사서 연습해야 하나….”
“먹는 광고가 그래서 힘들다고 하긴 하더라. 연습할 때도 많이 먹고, 촬영할 때도 그림이 잘 나올 때까지 먹어야 해서, 오히려 해당 광고 음식이 싫어지기도 하고.”
“남석인 이미 경험자 아니야? 한율이랑 보컬3 촬영할 때, 음료 광고 찍었었잖아.”
“아, 그랬었지?”
한율은 2년 전, 비타민 음료 광고 촬영 당시의 기억을 떠올렸다. 배가 터질 것처럼 불러도 카메라를 향해 방긋방긋 웃으며 음료를 한 모금, 두 모금 계속 들이켰었다. 고역이었다.
“고생해요, 형.”
“하….”
길우성이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차남석, 파이팅!”
똑똑. 그때 누군가 대기실 문을 두드렸다. 윤승우가 문을 열어 찾아온 사람을 확인하더니 한율을 돌아보았다.
“한율아, 손님.”
문 앞엔 퍼스트라인의 코우가 서 있었다.
“어제 못 했어.”
인적이 없는 복도 끝. 코우가 솔직히 말했다.
“일본에 계신 아버지랑 형이랑 상담하느라. 나도… 용기와 각오가 필요했고.”
“그래서요?”
“사녹 끝난 다음에, 변호사랑 같이 신고하러 갈 거야. 설마… 벌써 제보한 건 아니지?”
“네.”
코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잠시 머뭇거리더니, 복도를 지나는 스태프들, 가수들을 눈으로 좇았다.
“어제… 티모한테도 DM 보냈어. S 이름은 안 밝혔지만 사실대로 다 적어서. 넌 내 경솔함의 피해자다, 그러니 더 늦기 전에 신고하겠다고.”
“회사에는요?”
“아직. 회사에 말하면 이것저것 따지면서 시간만 더 흐를 것 같거든. 어제 터진 일 때문에… 불안하기도 하고.”
후우. 코우가 크게 심호흡을 하며 한율을 바라보았다.
“락락에, S랑 친한 애가 있더라고.”
“아.”
처음 안 사실. 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끼리끼리 어울린다더니.
“아무튼, 이 얘기하려고 불렀어.”
“네.”
“…그럼.”
코우가 먼저 몸을 돌리며 자리를 떴다. 한율은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참 공교롭다고.
배우 장원길이 마약 혐의로 조사를 받게 된 건 한율이 언론사에다 뿌린 영상 때문이었다. 그 과정에서 드러난 또 다른 마약 범죄자. 그로 인해 코우가 신고를 더 빨리 결심하게 되었으니.
‘달리 말하면, 이렇게 거미줄처럼 얽혔을 정도로 엇나간 인간들이 이 바닥에 많다는 뜻이겠지.’
한율은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몇 시간 후 <로얄K뮤직> 생방송, 퍼스트라인 순서.
방송엔 사전녹화 영상이 흘러나가고 있었지만, 퍼스트라인은 무대로 올라가 노래를 불렀다.
코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