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다들 어디 갔어?”
어스래빗의 대기실을 찾은 찬형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칸막이 안 공간엔 라이언과 매니저, 스타일리스트. 딱 셋만 있었다. 바닥에 깐 돗자리에 담요를 두르고 앉아있던 라이언이 일어났다.
“가람, 건우는 카페, 차남석은 김우재 선배님이랑 연습, 다른 네 사람은 외출.”
“넌?”
“자려고 했어. 왜 왔어?”
“같이 카페나 갈까 하고 왔지.”
“건우랑 가람이 샌드위치 사 온다고 했는데.”
그러면서 라이언은 자리에서 일어나 담요를 개키고 핸드폰을 챙겼다. 그러곤 조유찬에게 손을 흔들.
“놀다 올게요.”
“응.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전화하고.”
“네.”
방송국 곳곳엔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방송국 내에 있는 카페도 마찬가지. 지나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방송국이나 엔터 관계자들이라, 요란한 머리카락 색에 진한 메이크업까지 한 아이돌을 보고도 덤덤했다.
“라이언?”
카운터에서 막 포장된 샌드위치나 음료를 챙기던 이건우와 박가람이 두 사람을 발견했다.
“이제 막 가려던 참이었는데.”
“찬형이가 커피 사준다고 해서 왔어.”
“카페에 오자고 했지, 사준다곤 안 했는데?”
“……!”
그제야 라이언이 깨달은 표정을 짓자 이건우가 큭큭 웃었다.
“형이 사줄게. 찬형이 네 것도. 뭐 마실래?”
“감사합니다. 그럼 저는 밀크티요.”
“난 카페모카. 여기서 마셔?”
“대기실 가서.”
“둘 다 따뜻한 거 맞지? …밀크티랑 카페모카 따뜻한 걸로 주세요.”
“이것도 같이 먹어. 아직 한창 키 클 때니까 많이 먹어야 한다.”
박가람이 봉투에서 샌드위치 두 개와 쿠키를 꺼내 내밀었다. 라이언이 생글생글 웃으며 받았다.
“고마워.”
이건우와 박가람이 카페를 나가고, 라이언과 찬형은 빈자리에 앉아 음료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이 기사 봤어?”
찬형이 뉴온의 소피아 한, 퍼스트라인의 코우 관련된 기사를 핸드폰에 띄워 내밀었다. 내용을 슥슥 훑은 라이언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바보들 같아. 약이 얼마나 무서운 건데.”
“소피아는 말할 것도 없고, 코우는 조금 경솔하긴 했지. 그나저나….”
찬형이 목소리를 낮췄다.
“너희들 원제로랑 활동 겹쳐서 계속 음방에서 만나잖아. 뭐… 별일은 없지?”
부스럭. 라이언은 샌드위치 포장지를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없어.”
“그럼 다행이고.”
카운터에서 음료를 받고 나선 MC 대기실로 향했다. MC 대기실은 다른 출연자들의 단독 대기실과 붙어 있었기에, 복도엔 관계자나 방송국 스태프가 오갔다. 가수들은 물론이고.
“어? 라욘 형~.”
원제로 대기실에서 나오던 변지욱이 라이언을 보며 손을 흔들었다.
“카페 갔다 왔어?”
“응.”
“샌드위치 맛있겠다.”
“…자.”
0.5초의 머뭇거림 후 내미는 샌드위치. 변지욱이 빙긋 웃었다.
“방금 밥 먹어서 괜찮아.”
“응.”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변지욱의 인사에 찬형은 고개를 끄덕이며 쿠키를 내밀었다.
“먹을래요?”
“디저트는 환영입니다, 감사합니다.”
“…아.”
그때 원제로 대기실에서 이번엔 임승준이 나왔다. 라이언과 임승준의 시선이 마주쳤지만, 두 사람은 서로를 멀뚱히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변지욱이 라이언에게 물었다.
“호 형은 대기실에 있지?”
“리더 외출했어.”
“이런! 특별히 허락받고 나왔…, 가만.”
변지욱이 찬형을 보며 눈을 깜빡거리더니 임승준을 돌아보았다.
“여기에도 현역 있잖아, 형.”
현역? 찬형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 후 <락뮤닷> 생방송 2시간 전. 한율 일행이 돌아오자 라이언이 기다렸다는 듯 유호에게 말했다.
“리더, 임승준이 어드바이스가 필요하대.”
“어드바이스? 무슨 어드바이스?”
“<락뮤닷> 차기 MC 자리 도전한대.”
“오오, 승준이가? 잘 됐다.”
박가람이 감개무량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 목석 임승준이, 참 많이 노력했구나.”
“왜 그래. 승준인 원래 마음만 먹으면 잘하던 애였어. 진지한 연기도 잘하고.”
“그러고 보니 승준이 다시 연기할 생각 없대? 예전에 드라마 촬영 엎어지고 나서 한동안 상심했었잖아.”
“글쎄…. 아무튼 나 원제로 대기실 좀 다녀올게.”
“네엥.”
“형, 이것도 가져가.”
강보배가 오던 길에 사 온 군것질거리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유호는 그걸 가지고 대기실을 나갔다.
“뭔데?”
“버거랑 핫도그.”
“아….”
차남석이 제 입과 코를 손으로 덮으며 중얼거렸다.
“어쩐지 느끼한 냄새가 나더라….”
이건우가 안쓰러운 시선으로 차남석을 바라보았다.
“얜 정말 먹는 광고는 안 되겠다. 두 번 하다간 오히려 살이 더 빠지겠어.”
“힘내, 차남석. 나중에 더 성공해서, 대세 아이돌만 찍는다는 치킨 CF도 찍어야지.”
“그건 제가 싫은데요.”
담담한 한율의 말에, 박가람이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오븐구이 치킨이면 되겠니?”
그날 밤, <락뮤닷> 스케줄을 마치고 돌아온 숙소.
어스래빗 멤버들은 씻고 난 뒤 소파가 있는 자리를 중심으로 꾸미기 시작했다. 낮에 회사에서 가지고 온 미니 트리에다 장식을 걸고, 벽에는 지난주 <뮤직뮤직> 출근길에서 팬이 선물해준 현수막을 걸었다. 현수막엔 [Happy birthday] 문구와 왕관 쓴 토끼가 그려져 있었다.
“이 정도면 충분한 것 같다.”
“11시 30분에 시작할 거지?”
“어.”
이건우는 거실 구석에 요가 매트를 깔고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라이언도 그 옆에 요가 매트를 깔고 이건우를 따라 했다. 차남석은 소파에 길게 드러누운 박가람의 다리를 치우고 앉아 TV를 켰다.
한율과 길우성은 스케치북을 가져와서 차남석의 모습을 사인펜으로 슥슥 그렸다. 나중에 라방에서 팬들에게 보여줄 그림이었다. 강보배는 방에 들어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호 형.”
TV를 뉴스 채널로 맞추며 차남석이 유호를 불렀다. 바닥에 앉아 팬레터를 읽던 유호가 돌아보았다.
“응?”
“아까 원제로 대기실 갔을 때 분위기 어땠어요?”
“분위기?”
“임승준이 <락뮤닷> MC를 준비한다는 건, 지금 원제로 매니지 회사에서 임승준을 밀어주고 있다는 거잖아요. 솔직히 멤버가 열 명인데, 시샘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을까 해서요.”
유호가 쓴웃음을 지었다.
“민솔이?”
“그놈 예전에 음방 MC 꼭 하고 싶다고, 장난식으로 흉내 내는 척 자주 연습하고 그랬거든요.”
“그렇구나….”
“헉. 뉴스에 떴어!”
멍하니 TV를 보던 박가람이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뉴스에 [마약 상습복용 및 유포 아이돌]이란 큼지막한 자막이 나왔다.
[이어서 다음 소식입니다. 최근 인터넷을 떠들썩하게 만든 마약 상습복용 및 유포한 아이돌이, 올해 데뷔한 걸그룹 ‘뉴온’의 ‘소피아 한’으로 밝혀져….]
모자이크 처리된 채 나오는 뉴온의 무대 영상.
박가람이 쯧쯧 혀를 찼다.
“다른 멤버들은 대체 무슨 죄냐…. 데뷔한 지 얼마나 됐다고.”
“그런데 정말 모를 수가 있을까? 상습복용잔데?”
“글쎄…. 행동이 과격해지거나 감정 기복이 심해도 보통은 ‘쟤 원래 성격이 저런가 보다’, 아니면 ‘스트레스가 쌓였거나 우울한가 보다’라고 생각하지, 마약을 했을 거란 의심은 잘 안 하잖아.”
“코우도 이름 안 밝히고 A군에다가 모자이크 처리했네.”
“제보자 보호차원 아닐까.”
“이미 인터넷 기사로 다 알려졌는데?”
뉴스는 멤버들이 궁금해하던 부분도 긁어주었다.
[…경찰 조사에 따르면 소피아 한은 A군 외에도, 방송에서 만난 다른 아이돌에게 마약을 넣은 음료를 건네 당사자 모르게 복용하게 했으며, 이와 같은 범행엔 걸그룹 ‘락락’의….]
“와…. 소문이 사실이었네.”
“둘이 같이한 거야? 나 진심 소름 돋음.”
길우성이 소매를 걷으며 팔을 보였다.
“이거 봐, 닭살.”
이건우와 라이언도 동작을 멈추고 뉴스를 주목했다.
“이참에 아예 뿌리 뽑혔으면 좋겠다.”
“미쳤나 봐.”
“제정신이 아니니까 저딴 약을 처먹는 것도 모자라 퍼뜨리려고 한 거겠지?”
한율은 진심으로 화내는 멤버들을 바라보다가, 멈췄던 손을 다시 움직였다. 슥슥.
다음 날. 포털사이트는 여전히 소피아와 락락, 마약 사건으로 떠들썩했다. 그들이 동료 아이돌에게 마약을 몰래 먹이거나 판매하려 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연예계에 별반 관심이 없던 대중까지 공분한 까닭이었다.
-악랄 그 자체.
-이참에 아이돌들 싹 다 약물 검사ㄱㄱㄱ
커뮤니티 사이트의 몇몇 아이돌 게시판도 떠들썩했다. 락락과 뉴온, 특히 소피아 한과 스케줄을 한 적이 있거나 친분이 있다고 알려진 아이돌 중심으로.
퍼스트라인 게시판은 코우의 탈퇴를 반대한다는 글로 도배되었다.
-무슨 약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받고, 그걸 또 제삼자에게 넘긴 건 갤주가 잘못한 게 맞다. 하지만 이건 알아 둬야 함. 코우는 보복당할 위험을 감수하고 용기 내어 신고한 거란 걸. 약쟁이들 커넥션이 어디 보통이겠냐고ㅅㅂ 분명히 조폭보다 더한 것들이 얽혀있을 텐데
-약쟁이가 제일 무서워하는 건 법적 처벌도 아니고 약을 못 먹게 하는 거라고 함. 그래서 보통 흉악범들이 피해자나 제보자를 상대로 보복하는 반면에, 금단 증상으로 돌아버린 약쟁이는 무슨 짓을 할지 전혀 알 수 없음. ...이런 위험을 무릅쓰고 용기 내서 신고했는데 왜 탈퇴하냔 말이다
-코우 탈퇴 절대 반대
반면 V12 게시판은 아주 조용했다.
하필 이런 사건이 터진 시기에 티모가 건강상의 문제로 당분간 활동을 쉰다는 공지가 올라오자, 몇몇 사람들이 코우에게 약을 받은 게 티모가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으나, 게시판 운영자가 그런 글이 올라오는 족족 지우고 차단한 까닭이었다.
그래도 의혹은 스멀스멀 퍼져, 가십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눈에 띄어 다시 재생산되었다.
-코우한테 약 받은 사람 ㅂㅇㅅㅇ ㅌㅁ라던데 맞음?? 경찰이 코우한테 제보받고 약물 검사한 시기에 걔 혼자 건강 안 좋다고 조용히 입국했다던데
ㄴ내 친구 V12 팬인데, 최근에 ㅌㅁ 상태가 이상하긴 했다고 함. 엄청 우울해 보이기도 하고, 라방 켰다가 몇 초 만에 미안하다고 울면서 끄기도 하고 (너튜브 링크)
ㄴ사생이 ㅌㅁ 정신과에 들어가는 모습 찍음.
ㄴ빼박이네
ㄴ루머 만들지 마세요. 가뜩이나 번아웃으로 지쳐있는 애한테 마약 범죄 혐의 씌우면 즐겁습니까? 그것도 아직 열아홉 살밖에 안 된 애한테?
ㄴㅋㅇ랑 ㅌㅁ랑 친하지도 않은데 무슨 약을 주고 받아요ㅋㅋㅋ 갖다 붙이기는 진짜
ㄴ악성 루머는 PDF 따서 스케일 엔터로 보내겠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아무 상관 없는데, 이렇게 조용히 휴식하겠다고 팬들한테만 쉬쉬 알림?
ㄴ님 같은 루머 유포자랑 악플러들이 엮어서 떠들 거 뻔하니까요.
반면 어스래빗 게시판은 평화 그 자체였다.
[데뷔 후 최초 공개☆ 율톢의 경이로운 그림 실력]
[(이미지)]
-ㅋㅋㅋㅋㅋㅋㅋ다시 봐도 너무 웃겨
-있는 그대로 그리려던 게 잘 보여서 더 웃김
-율톢 성격상 정말 진지하게 그렸을 텐데, 웃지는 맙시ㄷ..(풉)
-(이미지) [존잘톢: 내가 이렇게 생겼다고?]
-율토끼 진심 납치하고 싶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건 전혀 꿀리지 않는 율톢의 자신감임.
-(이미지) [GOOD]
날 알아요?
SBC 라디오로 홍보, 내일 진행될 MBS 연말 특집 방송 카메라 리허설을 다녀온 후, 한율은 오래간만에 2층 사무실 내 회의실로 들어갔다.
“고양이 사료 CF요?”
“응. ‘못난이’들 쪽에도 제안이 들어왔대. 그리고 이게 해당 사료 회사랑 제품에 관한 자료.”
오 팀장이 바인더를 펼치며 내밀었다. 앞장에 끼워진 제품 사진. 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 이거. 집에 있는 고양이 중 하나가 먹는 사료네요.”
“클라이언트 쪽에서 들으면 반가워할 소린데?”
“그럼 자료 살펴보고, 부모님과 상의한 후에 결정할게요.”
“그래. 그리고….”
오 팀장이 잠시 뜸을 들이다가 물었다.
“아직도 연기는 쉴 생각인 거지?”
영화 <고양이 난로> 촬영을 끝낸 지도 벌써 반년이나 흘렀다. 중간에 윤상진의 부탁으로 사극 <장인>에 출연하기는 했지만 단발성이었고.
“내년 여름까지는 시간상 힘들지 않을까요.”
투어가 끝나면 바로 다음 앨범 활동에 들어가야 하니.
오 팀장이 미소 지었다.
“재촉하려는 건 아니야. 하지만 이번에 한율이 네 영화를 보고 났더니, 조금 더 다양한 연기를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도 유찬 씨한테 옮았나 보다.”
“아니에요. 그러잖아도 저도 요즘 고민하고 있거든요. 드라마 촬영하면서 만난 선생님들도 영화 봤다고, 언제 다시 연기할 거냐 전화로 닦달하시고.”
“그럼.”
“차분히 생각해볼게요.”
오 팀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난 나가 있을 테니까 편히 보고 나와.”
“네.”
오 팀장이 회의실을 나가고, 한율은 서류를 한 장씩 넘겼다. 그리고 해당 사료를 검색하기 위해 핸드폰으로 인터넷에 들어갔다가 실검을 보았다.
[퍼스트라인 코우 탈퇴].
퍼스트라인 팬들은 본인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하며, 더 크게 번질 수 있던 마약 유포 사건을 막았는데 왜 탈퇴하냐, 코우도 피해자다, 라며 탈퇴를 극구 말리고 소속사에도 집단항의했다. 그러니 회사 측에서도 분명 코우를 잡았을 테지만,
‘본인 의지가 확고한 거겠지.’
범죄자의 간계에 휘말려, 본인이 저지른 잘못보다 더 큰 대가를 치르게 된 건 안 됐지만 말이다.
“후우.”
한율은 한숨을 쉬며 코우의 일을 신경에서 밀어내고, 앞에 주어진 일에 집중했다. 퍼스트라인 소속사가 낸 공식 입장 기사를 클릭하는 대신, 광고 제안이 들어온 사료를 검색했다.
가격이 일반 사료보다 조금 비싸기는 하지만, 이는 그만큼 좋은 재료를 사용하는 까닭이었다. 기업 이미지도 괜찮은 편.
‘따로 집에 들를 만한 시간이….’
스케줄을 기재한 달력을 확인했더니 제일 가까운 휴일은 내년 1월 7일.
한율은 스케줄 도중 시간이 비었을 때 전달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일단 부친에게 톡을 보냈다. 회사 사람이 대신 자료를 전해줄 수도 있지만, 그러면 두 사람이 서운해할 테니.
우웅. 부친으로부터 답장이 왔다. 눈을 반짝거리며 빛내는 고양이 캐릭터 이모티콘과 함께.
-[29일에 KBC 오지 않니? 그날 잠깐 보면 되겠구나. ㅎㅎ]
KBC에서 만나자고?
한율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답장을 보냈다.
[네.]
어차피 그와 부자지간이란 사실이 알려진 지 오래. 그리고 작년 어스래빗에게 신인상을 안겨주었던 <가요시상식>은 폐지, 시상식이 사라지고 올해부턴 <뮤직뮤직 대축제>로 명칭과 포맷이 변경되었다.
‘딱히 문제 될 건 없겠지.’
이틀 후, 12월 29일 새벽.
전날 MBS 연말 특집 방송이 자정이 넘어 끝나는 바람에, 어스래빗을 포함하여 일찍 리허설을 나온 팀들은 하나같이 상태가 영 좋지 않았다. 그러나 한 해를 마무리하는 큰 무대에서 실수할 순 없기에, 멤버들은 정신 차리자며 커피를 마셨다.
“내일 SBC 연말 특집까지 무사히 치르고 나면 하루 쉴 수 있다. 버티자.”
“정작 말하는 사람 눈에 소울이 없는데.”
어스래빗이 오늘 할 무대는, 선배 아이돌의 노래 커버와 까지 두 곡. 편곡을 거쳐서 무대 시간은 4분 10초 남짓이었다. 이것도 작년에 이곳에서 신인상을 받은 그룹이라고 잘 챙겨준 것이었다.
“한율이 넌 리허설 끝나고 아버지 만난다고 했지?”
“네, 8시 즈음에.”
박가람이 눈을 반짝 빛냈다.
“그럼 우리도 같이 가서 국장님께 인사….”
“가족끼리 논의하는 자리에 끼면 되겠니, 가람아?”
“인사만 하고 바로 빠지면 되잖아.”
그들은 객석에 앉아 다른 팀의 리허설을 구경하고, 무대 장치에 문제가 생겨서 스태프들이 고군분투하는 것도 보면서 멍하니 차례를 기다렸다.
1부 초반 순서니 제일 일찍 나오라고 해서 나왔는데,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어스래빗 준비할게요.]
도착한 지 한 시간이나 지나서야 호명된 이름.
어스래빗 멤버들은 인이어와 마이크 체크, 카메라 순서와 동선에 관해 재차 설명을 듣고 나서 무대로 올라갔다. 주어진 무대 장치라곤 조정실에서 알아서 맞춰주는 조명과 전광판 영상 뿐이기에 복잡할 건 없었다.
“안녕하십니까!”
“어스!”
“래빗!”
“잘 부탁드립니다!”
큰소리로 인사하자 객석에 앉은 다음 대기 팀들, 원제로와 아이허니 멤버들이 짝짝짝 손뼉을 쳤다.
“어스래빗 분들이 다들 저렇게 키가 컸었나?”
어스래빗의 1차 리허설이 끝나고 피드백 타임. 아이허니의 멤버가 옆에 있던 유린에게 물었다.
“아직 성장 중인 멤버 분들이 많잖아.”
“확실한 건, 한율 님은 <고양이 난로> 찍었을 때보다 키가 더 크셨다는 거지. 작년에 갓 데뷔했을 땐 건우 님이랑 이 정도 차이 났었는데, 지금은 고작 1, 2cm?”
“떠비는 빨리 프로필 정보 갱신해라….”
아이허니 내 공식 서한율 팬인 막내 멤버 서래의 중얼거림에, 유린이 작게 웃었다.
“서래는 어떡해? 계속 활동 엇갈리다가 오늘 겨우 만났는데, 정작 사인받을 타이밍이 안 맞으니.”
서래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일단 지관통에 포스터 담아오기는 했는데….”
“<고양이 난로>?”
“응. 그런데 차에 두고 왔어. 기자님들 눈치 보여서….”
유린이 서래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렸다.
“다음 주에 언니한테 맡겨. 대신 사인 받아다 줄게.”
“응.”
“안녕하세요.”
그때 1부 특별 무대에 오르기로 한 크리스탈 래빗의 미랑과 라나가 도착했다. 두 사람보다 후배인 두 팀은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옆에 앉으세요.”
“감사합니다.”
마침 어스래빗의 두 번째 리허설이 시작되었다. 음악 소리가 아주 큰 까닭에 대화를 제대로 나눌 수 없어, 그들은 조용히 어스래빗의 리허설을 보았다. 라나는 어스래빗의 노래를 흥얼흥얼 따라부르며 어깨를 들썩였다.
[…OK,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윽고 어스래빗의 리허설이 끝났다. 무대에서 내려온 어스래빗 멤버들은 객석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다른 출연자들에게도 꾸벅 인사했다.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수고하세요!”
“수고하셨습니다!”
누구보다 큰소리로 인사하는 서래. 멤버들은 놀란 눈으로 서래를 바라봤다가 작게 웃으며 몸을 돌렸다. 유린이 당혹스러운 얼굴로 서래에게 등짝 스매싱을 날린 까닭이었다.
타악. …아얏!
길우성이 한율에게 속닥거렸다.
“많이 아프시겠당.”
“그러게.”
대기실로 들어왔을 땐 7시 40분이었다.
한율은 리허설 조끼와 인이어, 마이크를 제거하고 외투를 걸쳤다. 부친에게 톡을 보냈더니 8시 10분 즈음 도착한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30분 남았네.’
한율이 가만히 소파에 앉자 차남석이 물었다.
“아버지 아직 오시는 중이래?”
“네. 30분 정도 기다려야 할 것 같아요.”
“나도 같이 기다려줄까?”
“괜찮아요.”
“고작 30분인데, 뭘.”
한율은 단체로 동작이 굼떠지는 멤버들을 보며 말했다.
“괜찮으니 먼저 들어가서 조금이라도 자요. 그리고 형들이 가야, 저도 소파에 편히 누워서 조금이라도 자죠.”
조유찬도 걱정하지 말라는 얼굴로 멤버들에게 일렀다.
“그래, 내가 한율이랑 같이 있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크으, 그럼 서로의 숙면을 기원하며. 써한, 너무 늦지 않게 와라.”
“어.”
곧 대기실에는 한율과 조유찬만 남았다. 한율은 타이머를 20분 맞춰놓은 후 담요를 두르고 소파에 누웠다.
한편 그 시각, KBC 직원 전용 주차장.
서석진 국장은 들뜬 얼굴로 차에서 내렸다. 한율에겐 30분 후에 도착한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어쩌고 있나 보고 싶은 마음에 거짓말했다.
‘조금 더 빨리 왔으면 리허설하는 것도 볼 수 있었을 텐데.’
집에서 나오기 직전, 밥을 먹자마자 신나게 뛰어다니던 고양이가 그의 발에다 토하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뮤직뮤직 대축제>가 열릴 공개홀로 들어간 서 국장은, 오는 길에 사 온 간식거리를 들고 조정실부터 찾았다.
“안녕하십니까. 이른 새벽부터 수고하십니다.”
“안녕하십니까, 국장님.”
“이거. 당 떨어지면 드시라고 사 왔어요.”
“감사합니다, 국장님. 그런데….”
<뮤직뮤직 대축제>를 맡게 된 <뮤직뮤직> PD가 멋쩍게 웃었다.
“어스래빗 리허설은 이미 끝났는데….”
“네, 알고 있어요.”
서 국장은 일하는 데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스튜디오와 대기실을 둘러봐도 되겠냐고 양해를 구한 후 곧바로 그곳을 나왔다.
공개홀은 시사교양국에서도 종종 사용하는 곳이기에, 그는 헤매는 법 없이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반대편 멀찍이서 우르르 다가오는 보이그룹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다들 아직 어린데, 참 대견스럽기도 하지. 그나저나 아침으론 뭘…, 음? 내가 핸드폰을 어디에 뒀더라?’
그는 몸을 돌리며 외투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그리고 안주머니에서 막 핸드폰을 찾았을 때였다. 어느새 가까워진 아이들의 말소리가 들렸다.
“가수보단 배우 이미지가 강해서, 동료나 이성보다는 팬의 눈으로 보는 것 같던데? 좋아한다는 소문이랑 다르게.”
“그래도 인기가 많은 건 사실이지.”
“집안 좋지, 돈 많지, 성격…은 조금 무뚝뚝하지만, 이상한 소문 하나 없이 깨끗하지, 연기 잘하지. 나는 한율이, 누나 있었으면 당장 소개해달라고 했을걸?”
한율? 아들의 이름이 언급되자 서 국장은 핸드폰을 든 채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열일곱 살이나 되었을까 싶은 아이와 눈이 마주친 그 순간,
“어…?”
소년이 우뚝 멈추며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냅다 그를 향해 허리를 90도로 꺾었다.
“아, 안녕하십니까!”
“……?”
함께 있던 멤버들이 의아한 얼굴로 이쪽을 돌아보았다.
“음? 날 알아요?”
“네!”
현강희는 고개를 들어 두 손을 허우적거렸다.
“서한… 아니, TV로 뵀는데요, 서 국장님…. 그러니까 서한율 선배님 아버지….”
“……!”
서한율의 부친, 즉 KBC 시사교양국의 서석진 국장이란 소리에 다른 원제로 멤버들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원제로와 함께 이동하던 매니저도 마찬가지.
그들은 0.5초 당황해서 굳었다가 서 국장에게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완전한 하나!”
“원… 없는 무대!”
“원! 제로입니다!”
서 국장은 이쪽으로 쏠리는 사람들의 시선을 느끼곤 멋쩍게 웃었다.
“하하하…. 네, 만나서 반가워요. 그리고 한율이에게 누나는 없지만, 사촌 누나는 있습니다.”
“아, 그, 저….”
라일의 얼굴과 귀가 새빨갛게 물들었다.
“죄송합니다….”
아드님이 정말 훤칠하세요
깜빡 잠들었다가 일어난 한율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30분 후에 도착한다던 부친이 라일과 함께 찾아온 까닭이었다.
“안내해줘서 고마워요.”
“아닙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서 국장에게 꾸벅 인사한 라일은 한율에게 손을 흔들며 대기실을 나갔다. 조유찬이 서 국장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종종 통화 나눴던 어스래빗 매니저, 조유찬입니다.”
“오, 유찬 씨! 이렇게 직접 만나니 더 반갑네요.”
악수하는 두 사람. 한율은 손으로 대충 머리카락을 빗질했다.
“일찍 오셨네요?”
“…….”
“……?”
말없이 그런 한율을 바라보던 서 국장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밥은 제때 먹고 다니는 거냐?”
“나름 잘 챙겨 먹고 있어요.”
“키가 있으니 더 잘 챙겨 먹어야지. 나가자. 유찬 씨도 같이 가서 아침 먹어요.”
세 사람은 방송국 근처 식당에서 아침을 먹었다. 그리고 방송국 내 카페로 자리를 옮겨 광고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회사에서 미리 준비하고 왔는지, 조유찬은 어스래빗 활동 계획서까지 꺼내 서 국장에게 설명했다.
“그리고 얼마 전에 회사에서 어스래빗 시즌그리팅 굿즈 세트 보냈는데, 받으셨어요?”
“네. 따로 예약 주문해놓은 것도 도착해서 친척들에게 나눠주었습니다. 그런데 대체 왜 한 사람당 살 수 있는 수량이 정해져 있는 겁니까?”
“하하하….”
일에 관한 이야기가 어느 정도 마무리된 후, 조유찬은 잠시 회사와 통화할 일이 있다며 자리를 피해주었다.
“요즘 굉장히 바빠 보이던데, 힘들진 않고?”
“중간에 쉬는 날이 있어서 괜찮아요. 방학이라 학교도 안 가고.”
“방학이 끝나면 졸업이고?”
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받고 싶은 졸업 선물은? 있어?”
“공사대금으로 돈이 많이 나가고 있잖아요. 괜찮아요. 저도 정산받고 있고요.”
“그거랑은 별개지.”
“그럼 생각해볼게요.”
“그래. 참, 다음 달엔 칠레에 간다고 했지? 한율이 너야 해외에 가는 게 처음도 아니고 알아서 조심하겠지만….”
부친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남미 쪽은 다른 곳보다 더 조심해야 한다. 대낮에 핸드폰만 꺼내도 자전거나 오토바이로 휙 낚아채는 소매치기 범죄도 벌어지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칼부터 휘두르는 강도도 있어. 아버지가 아는 PD가 칠레에 사전 답사 갔다가 당한 일들을 들어보면 참…. 하루에 노상강도를 세 번이나 만난 적도 있다고 하더라.”
한율은 커피를 들며 대답했다.
“공연만 하고 바로 올 거라 괜찮을 거예요. 항상 옆에 멤버들이나 매니저 형들, 경호원도 있을 거고.”
부친도 고개를 끄덕이며 커피를 마셨다.
“…저기.”
그렇게 잠시 대화가 끊겼을 때, 조금 전부터 이쪽을 힐끗거리며 보던 여성 두 명이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국장님. 실례가 안 된다면 아드님이랑 사진 한 번만 찍을 수 있을까요?”
서 국장이 환하게 웃었다.
“물론이죠! 괜찮지, 아들?”
“민낯이라 엉망인데. 그래도 괜찮으시다면요.”
한율은 자리에서 일어나, 두 사람의 핸드폰으로 함께 사진을 찍었다.
“감사합니다. 영화 재밌게 잘 봤어요.”
“어스래빗 응원할게요!”
“감사합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두 사람이 고마움을 표하며 멀어지자, 이번엔 다른 테이블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슬그머니 다가왔다.
“저기, 괜찮으면 저희랑도 사진 한 번만….”
“고양이 영화 정말 재밌게 잘 봤습니다. 팬입니다.”
서 국장이 뿌듯하면서도 흐뭇한 얼굴로 함박웃음을 지었다.
“우리 아들이 참 인기가 많네? 하하하, 얘가 제 아들이에요.”
“아드님이 정말 훤칠하세요!”
서 국장과 함께 있어서 일부러 사진을 요청하는 건 아닐까. 조금 전 두 사람도 그렇고, 전부 방송국 사원증을 목에 걸고 있는데.
한율은 부드러운 미소로 생각을 감추었다.
“네, 두 장도 괜찮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