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와. 아까 정말 깜짝 놀랐다, 진짜….”
조금이라도 자기 위해 숙소로 돌아가던 원제로 차 안. 멤버들이 시끌벅적 떠들었다.
“어떻게 거기에서 국장님이랑 딱 마주치냐.”
“난 국장님 바로 알아본 강희가 더 신기하던데?”
“TV랑 기사로 사진 봤었거든요.”
“그런데 키 정말 크시더라. 키는 유전이라던데, 한율이 나중에 더 크는 거 아냐?”
“글쎄….”
유지는 고개를 흔들었다.
“어스래빗 안무 점점 빡세지는 거 보면 관절에 무리 가겠던데….”
“180cm 정도 됐으니 슬슬 그만 커도 괜찮지 않을까?”
“라일 형 그 말, 한율이 형한테 그대로 전해줌.”
“변지욱, 멈춰.”
“그런데 아빠가 방송국의 높은 분이면 대체 어떤 기분일까?”
“전에 우성이 형한테 들었는데, 한율이 형 아버지 정체 밝혀진 후로 <뮤직뮤직> PD님하고 스태프들이…!”
“PD님하고 스태프들이?”
멤버들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변지욱을 주목했다. 변지욱은 어깨를 으쓱였다.
“인사 잘 받아주는 것 외엔 크게 달라진 거 없대.”
“…싱겁네.”
유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보면 당연한 거야. 방송국 높은 분 아들이라고 티 나게 잘해주면 그게 오히려 상대방 엿 먹이는 거잖아. 요즘 갑질이니 특혜니 하는 이슈에 사람들이 얼마나 예민한데. 그래서 한율이 같은 경우엔 더 태도 조심해야 할걸? 자칫하면 본인뿐만이 아니라 부모님까지 욕 먹일 수 있잖아.”
“가족이 유명하다고 다 좋은 건 아니구나.”
그때 조용히 이야기를 듣던 임승준이 문득 정민솔을 돌아보았다. 정민솔은 입을 다물고 창밖만 보고 있었다.
“정민솔.”
“왜.”
“너 서한율한테 사과할 거 있지 않냐?”
“…무슨 사과?”
임승준은 대답 대신 가만히 정민솔을 쳐다보았다. 정민솔이 시선을 마주하며 불쾌하다는 듯 미간을 구겼다.
“예전에 떠비 있었을 때 일 말하는 거면, 이미….”
“그거 말고.”
무슨 이야기인지 의아해하며 두 사람을 바라보는 멤버들. 변지욱만 입술을 주먹으로 꾹 누르며 반대로 고개를 돌렸다.
임승준이 덤덤한 얼굴로 말했다.
“서한율도 알고 있다더라. 찬형한테 들어서.”
흠칫. 정민솔의 눈동자가 떨렸다.
“…뭐?”
“설마 당사자가 모른다고 생각해서 입 싹 닦고 지나가려던 건 아니지?”
“주어 빼놓고 너희끼리만 비밀 얘기하냐? 민솔이랑 한율이랑 왜? 무슨 일인데?”
“그런 게 있어요, 형.”
임승준은 정민솔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몸을 바로 했다. 나흘 전, <락뮤닷> MC 대기실에서 찬형에게 들은 이야기를 떠올리며.
『네가 MC 후보에다가 정민솔이랑 같은 팀이니까 미리 주의하라고 알려주는 거야. 괜히 PD님 앞에서 가짜로라도 정민솔이랑 친한 척하다가 오해받지 말라고.』
“…….”
현강희는 입술을 콱 깨물면서 다시 창으로 고개를 돌리는 정민솔을 보다가, 임승준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임승준이 조른다고 순순히 말해줄 타입은 아니기에, 변지욱의 팔을 툭 쳤다.
임승준이 원카운트 찬형과 따로 만난 건 지난 25일 <락뮤닷> 때뿐이고, 그때 임승준과 함께 다닌 건 변지욱이었으므로.
속닥속닥.
“무슨 얘기야? 너도 아는 얘기지?”
변지욱은 다른 멤버들의 눈치를 살피곤 속닥거렸다.
“나 입 싼 놈 아니야, 친구야.”
분위기가 어색해지자, 라일이 번쩍 손을 들며 매니저에게 말했다.
“형, 우리 노래 들어요!”
매니저가 큰소리로 대답했다.
“그만 떠들고 자라, 얘들아!”
“네….”
오후 5시. KBC 연말 특집방송 <2018 뮤직뮤직 대축제> 레드카펫 생중계가 시작되었다. 어스래빗은 순서에 따라 차에서 내려 레드카펫을 밟고, 포토존에 서서 여러 가지 포즈를 취했다.
차칵차칵.
이어서 레드카펫 MC들과 짤막한 인터뷰. MC 중엔 작년, 한율에게 ‘국장님 아드님’ 운운하며 어그로를 끌었던 개그맨 강바로도 있었다.
올해도 그와 함께 레드카펫 MC를 맡은 정태현이 물었다.
“우리 어스래빗. 작년을 끝으로 폐지된 KBC 가요시상식에서 신인상을 받았었죠? 그리고 올해 연말 특집방송, <뮤직뮤직 대축제>에 참가했는데, 소감이 어떤지 들어볼 수 있을까요?”
유호가 자신감 있게 대답했다.
“네! 작년, 저희에게 신인상을 주신 분들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노래와 안무 모두 열심히 연습했으니 기대 많이 해주세요!”
“아니요, 소감이요.”
“감개무량합니다!”
와아아! 멤버들을 불끈 쥔 두 주먹을 올리며 작게 함성을 질렀다. 이번엔 강바로가 앞으로 나서더니 뜬금없는 말을 던졌다.
“정말 고마워요, 한율 씨!”
“네?”
“사실은 저.”
강바로가 카메라를 한번 쳐다보더니 다시 한율에게 말했다.
“작년에 한율 씨한테 말실수하고 바로 잘리는 거 아닐까 두근두근 가슴 졸였었는데, 아! 별일이 안 생기더라고요. 그래서 올해도 무사히! 레드카펫 MC를 맡게 되었습니다! 혹시 아버지나 PD님께 따로 언질을 주신 건가요?”
“어? 그러고 보니….”
한율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올해도 여기에 계세요? 이상하네? 제대로 전달이 안 됐나?”
“……?!”
“PD님 어디 계시죠? PD님?”
뭔가 일이 잘못되었다는 얼굴로 한율이 PD를 찾자, 눈치 빠른 개그맨도 곧바로 콩트로 받아쳤다.
“PD님 미국 가셨어요, 찾지 마세욧!”
레드카펫이 생중계되는 너튜브 실시간 채팅창.
-ㅋㅋㅋㅋㅋㅋㅋㅋ
-강바로 멀쩡한 PD죽였엌ㅋㅋㅋ
-아버지랑 PD 얘기가 왜 나옴??? 나만 이해 못 하는 거???
-우리 율톢 또 정면으로 받아쳐서 웃음으로 넘겨버리네ㅎㅎ
-서한율 아버지가 KBC 시사교양국장인데, 작년에 강바로가 서한율 아버지가 국장이니 신인상 받을 수 있지 않겠냐는 비꼬는 식으로 말 뱉었거든요.
-얼굴 맛집 어스래빗
-그리고 진짜로 신인상을 받았지
-아
-애들 1년 동안 정말 성장했구나ㅎ 이번엔 강바로 어그로에 아무도 당황 안 했어ㅎㅎ
인터뷰를 마치고 안으로 들어간 어스래빗은, 무대가 아닌 출연자 대기실로 향했다. 복도에 선 VJ들을 향해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드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나중에 비하인드 영상으로 나갈 수도 있으므로.
대기실로 들어오자마자 길우성이 엄지를 척 세웠다.
“써한, 뻔뻔하게 잘 받아쳤다.”
“그 정도야.”
“리더, 이제 두 시간 동안 뭐 해?”
“헤메가 망가지지 않는 거라면 뭐든 다 해도 돼.”
작년 가요시상식과 다르게, 이번 <뮤직뮤직 대축제>에선 객석이 아닌 대기실에 있다가 나가기로 했다.
팬들의 직캠이나 카메라에 잡히는 자리에 내내 앉아 표정 관리를 하는 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닌 터라, 가수로선 반가운 일.
“얘들아, 한 시간 후에 대기실 단체 인터뷰 있다.”
“네엡.”
한율은 핸드폰을 꺼내서 SNS에 올릴 셀카를 찍었다. 평소의 무표정한 얼굴로 한 장, 팬 서비스를 할 때 보이는 미소 짓는 얼굴로 한 장, 이곳이 어색한 ‘윤우’를 연기하며 한 장, 뒤에서 불쑥 끼어든 못난 표정의 박가람과 화난 얼굴로 또 한 장.
“보정 안 하고 그냥 올려? 요즘 재밌는 앱 많던데.”
“크기만 조절하면 되죠.”
“에이, 줘 봐.”
박가람이 한율의 핸드폰을 가져가더니 어떤 앱을 다운받았다. 그러곤 조금 전 촬영한 사진을 불러와 몇 번 터치. 사진 속 한율의 얼굴에 토끼 귀나 고양이 귀, 수염이 찍찍 그려졌다.
“이젠 이런 것도 할 줄 알아야지 말이야, 아이돌이 말이야. 일단 올려봐. 팬 분들 많이 좋아할걸?”
“…일부러 안 하고 있다란 생각은 안 들어요?”
“넌 꽃토끼 할 때부터 이미 늦었어. 차남석 컴!”
박가람이 차남석을 불렀다.
“이리 와라, SNS에 올릴 사진 찍자!”
그렇게 셀카를 찍거나 TV에 나오는 레드카펫 생중계 영상을 보다가, 그들은 단체 대기실 인터뷰가 열릴 장소로 이동했다. 홀에서 제일 넓은 대기실엔 1부 출연팀이 모두 모여 준비된 의자에 앉아있었다.
“형!”
원제로도 그중 하나. 변지욱이 한율을 향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우리 아침에, 형네 아버지랑 인사했다?”
“어, 들었어. 구호도 외쳤다며.”
“흐, 그건 습관적으로. 그리고 라일 형이, 형 키 그만 컸으면 좋겠다고….”
“변지욱, 멈춰!”
큭큭. 소소한 고자질에 주변 아이들이 웃었다. 한율도 가볍게 웃어넘기다가 문득 고개를 돌렸다.
“……?”
휙. 시선이 마주치려던 찰나, 고개를 돌리는 정민솔.
한율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라일을 바라보았다.
“아 참. 소개할 누나가 없어서 미안해요, 형.”
라일은 제 머리를 부여잡으며 괴로워했다.
“으아아…!”
패러글라이딩하러 갈래요?
KBC <2018 뮤직뮤직 대축제>가 시작되었다.
어스래빗은 1부 다섯 번째 순서라, 두 번째 팀이 무대에 올라갔을 때 백스테이지로 와서 대기했다.
“블루액션 애들 괜찮을까? 시간 안 맞아서 리허설 못 했다던데.”
“그러게 왜 그렇게 스케줄을 빡빡해서 잡아선.”
그들은 조금 전 대기실에서 마주친 블루액션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아니 그것보다, 왜 안 오지? 걔네가 우리 앞인데?”
“우리가 일찍 온 거야, 가람아.”
“저기 오네요.”
블루액션이 백스테이지에 도착했다. 그들은 말없이 손을 들거나 툭툭 하이 파이브했다.
차남석이 절뚝거리는 안세현을 보며 물었다.
“의자에 앉아서 할 거지?”
“그래야지.”
안세현만이 아니라 다른 블루액션 멤버들도 컨디션이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소속사인 고동 엔터가 그들을 쉴 새 없이 굴리는 까닭이었다. 오늘도 지방 행사 일정을 소화하고 오느라 리허설에 참여 못 한 거고.
“너희들 밥은 먹고 다니니?”
블루액션 리더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먹기는 해.”
그러곤 자기네 스태프들 눈치를 살피더니, 재빠르게 유호의 귀에다 속닥거렸다. 뭐라고 하는지는 들리지 않았지만, 순간 미간을 구기는 유호의 표정에서 그들을 향한 안쓰러운 마음이 읽혔다.
쿵, 쿵. 스튜디오 쪽에서 VCR 영상이 끝나고 노래가 시작되었다. 그들은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슬슬 몸을 풀었다.
이윽고 블루액션 멤버들이 무대로 나가고, 어스래빗 멤버들은 백스테이지에 설치된 두 대의 TV를 주목했다.
무대 정면 카메라. 어둠 속에서 방송국 스태프가 우왕좌왕 돌아다니는 게 보이더니 곧 의자가 등장, 안세현이 착석하는 것과 동시에 무대 위 조명이 켜졌다.
멤버들 몇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슬아슬했다.”
“하마터면 방송사고 날 뻔?”
“사전에 분명히 의자 가져다 달라고 했을 텐데, 의사 전달이 제대로 안 됐나 보다.”
문제는 여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무대 자체만 놓고 봤을 땐 크게 흠잡을 곳 없었다. 하지만 실제로 송출되는 방송은 엉망이었다. 카메라가 잡아줘야 하는 파트 멤버를 놓치거나, 엉뚱한 멤버를 찍다가 뒤늦게 돌아가기 일쑤였다.
“아이고….”
아무리 사전에 안무 동선을 방송국 측에 전달해도, 그것만으론 한계가 있었다. 그렇기에 괜히 가수들이 새벽부터 나와서 카메라 동선과 액션을 여러 번 맞춰보는 게 아니었다.
‘카메라 팀은 욕 좀 먹겠는데.’
리허설에 참여 못 한 건 블루액션의 사정 때문이었지만, 시청자 눈에는 카메라 팀이 제대로 일을 안 한다고 느껴질 테니 말이다.
잠시 후, 어스래빗 차례.
무대로 올라가며 이건우가 선언했다.
“실수 한 건 당 헬스 한 시간.”
“으으.”
객석에선 형형색색의 불빛이 물결쳤다. 대부분 다른 출연팀의 팬들이 내는 불빛이었지만, 멤버들은 환한 웃음과 표정 연기까지 살뜰히 챙기며 커버 무대를 시작했다. 그리고 편곡에 따라 자연스럽게 이번 앨범 타이틀곡인 로 넘어갔다.
너튜브 <2018 뮤직뮤직 대축제> 생중계 실시간 채팅창.
-조금 전 블루액션이랑 카메라 잡는 게 완전 다르네;;
-아주 자연스럽게 상콤에서 멋짐으로 날아가는 8톢
-국장님 아들 있어서 카메라팀 기합 빡 들어갔죠? ㅋㅋㅋ
-비율 굿
-말 이상하게 하지 마세요. 어스래빗만이 아니라 다른 팀 카메라도 괜찮았어요. 유독 블루액션만 못 잡은 거;
-KBC랑 고동이랑 싸웠냐 카메라 차별 왤케 심해
-비주얼 깡패 토끼단
-차남석 신고하러 간다.
-래퍼들 죄다 쌩라이브
-얘네 더 뜨겠다
-엄마한테 장난으로 엄마 사위 저기 있어 이러니까 엄마가 진지하게 내일 정신과 같이 가재ㅋㅋㅋㅋㅋ
-차남석 화음 애드리브랑 윙크 미쳤네
-보컬은 AR 미약하게 깐 것 같기는 한데, 말 그대로 미약ㅇㅇ
-남돌은 군대나 가라!!!!!!!!
-나랑 혼♡인♡신♡고
-내일 일요일이라 병원 문 닫는데요
-원제로 언제 나와요?
-ㅡㅡ
-☆유호/이건우/박가람/강보배/라이언/차남석/길우성/서한율☆
-표정 연기 미쳤네 이 집
잠시 후. 대기실로 돌아온 어스래빗은 4분여 동안 흘린 땀을 조심히 닦으며 TV를 보았다. 아이허니와 특별 공연 무대가 끝나고, 막 원제로가 나오고 있었다.
함께 대기실을 사용하는 다른 보이그룹 멤버가 중얼거렸다.
“팬들 함성이 오디오를 뚫고 나오네.”
“픽미 시청자가 직접 뽑은 팀이잖아.”
“그런데 당장은 인기가 많아서 좋아 보여도, 그 점 때문에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겠더라.”
“무슨 소리야?”
한율은 거울 앞으로 가서 얼굴과 머리를 점검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두 사람의 대화는 이어졌다.
“몇몇 멤버들 악개 집단끼리 사이가 안 좋다 못해서, 서로 음해하고 욕하고 싸우는 게 장난 아니래. 우리 오빠 분량 가로채지 마라, 우리 오빠한테 민폐 끼치면 죽여버린다 등등. 픽미 때 받은 최종 순위를 등급으로 여기고 되레 날을 세우는 애들도 있고.”
“오히려 그게 자기네 오빠 욕 먹이고 무시하는 거 아냐?”
“그러니까.”
한율은 매니저에게 맡겨놓은 핸드폰을 찾아 의자에 앉았다. 포털사이트에 접속해보니 실검 1위엔 [2018 뮤직뮤직대축제]가 떠 있었다. 3위는 [뮤직뮤직대축제 원제로]. 원제로의 인기가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원제로의 인기가 어떻든 딱히 별 상관없기에, 한율은 검색창을 터치했다. 옆 의자에 강보배가 앉으며 물었다.
“뭐 검색해?”
“스위스 인터라켄이요.”
“……?”
“알프스산맥이요.”
“아. 거긴 왜? 여행 가려고?”
한율은 검색 결과를 슥슥 훑으며 대답했다.
“네. 이번 앨범 활동 끝나면 다른 때보다 쉬는 날이 조금 더 길잖아요. 그래서 이참에 다녀오고 싶어서요. 여기, 이 패러글라이딩 타는 거 재밌어 보이지 않아요?”
“와, 재밌어 보인다. 그런데 혼자 가려는 건 아니지?”
“같이 갈래요?”
으음. 강보배가 고민에 잠긴 얼굴을 하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이번 활동 끝나면 라이언이랑 트레리안 미니 앨범 작업하기로 해서. 남석이랑 가람이 형이랑 같이 가는 건 어때? 다른 세 사람은 시력 교정 수술받기로 해서 힘들 거고.”
한율은 고개를 끄덕이곤 박가람을 불렀다.
“가람이 형, 알프스산맥에 패러글라이딩하러 갈래요?”
박가람이 질색했다.
“싫엇!”
박가람은 고소공포증이 있어, 일본의 놀이공원에서 롤러코스터를 타고 속을 게워낸 적이 있었다.
길우성이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손을 번쩍 들었다.
“나! 나 갈래! 나!”
“1월 말에 갈 건데. 너 라식 받는다며.”
“시력은 나중에 찾아도 돼!”
길우성이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외쳤다.
“알프스! 알프스!”
“여행경비는 있고?”
“빌려줘!”
뭐 이런 뻔뻔한 녀석이 다 있나. 한율이 길우성을 대놓고 이상하게 쳐다보는 동안, 알프스산맥이란 말에 다른 멤버들도 관심을 표하며 다가왔다.
“알프스로 여행 가려고?”
“언제?”
“이번 앨범 활동 끝나고요.”
이건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일주일 넘게 머물 거 아니면, 잘하면 우리도 가능하겠는데?”
“회사에서 허락해주냐가 문제 아니야?”
“에이, 스위스가 무슨 우범 국가도 아니고. 유럽에서 치안이 정말 좋기로 소문난 곳인데.”
“거기 가려면 경비 많이 드나?”
어스래빗 멤버들이 모여서 수군거리자 조유찬이 슬그머니 다가왔다.
“얘들아? 해외여행을 가고 싶다면 회사와 먼저 상의하는 게 순서 아닐까?”
“한율이가 고등학교 졸업 기념으로 여행 간다잖아요. 당연히 형들이 보호자로 동행해야죠.”
“한율이, 졸업 기념이라곤 말 안 했는데.”
“응?”
한율은 저들끼리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눈에 띄게 혼자 돌아다니는 것보단, 일행이 어느 정도 있는 게 이목도 분산시키고, 알리바이를 만드는 데에도 도움 되겠지.’
본래 세상에서 얻었던 정보에 따르면 슬슬 ‘그놈’이 스위스 인터라켄에 터를 잡을 시기다. 게이트가 열리는 순간까지 그곳에 있었다고 했으니 서두를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한율은 인터라켄 숙소를 검색했다.
‘그런 인간쓰레기는 미리 처리하는 게 좋겠지.’
* * *
이틀 후 12월 31일. 한율은 tv Mu에서 진행하는 <2018 tv Mu 드라마 어워즈>에 참석했다. 올해 초 방영된 <별☆일없는 집>으로, 남자 신인상 후보에 오른 까닭이었다.
화려한 꽃바구니에 [별☆일없는 집] 작은 깃발이 꽂힌 원형 테이블. 오래간만에 드라마의 주·조연이 모였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잘 지내셨어요?”
“네. 영화 잘 봤어요, 한율 씨.”
“감사합니다.”
스타믹스의 지헌이 들뜬 얼굴로 웃었다.
“드라마 제작발표회 했던 게 바로 엊그제 같은데, 시간 참 빠르다. 벌써 1년 가까이 됐어.”
“그러게.”
“현우 넌 요즘 뭐 해? 아직도 게임만 하는 거 아니지?”
“곧 영화 촬영 들어갑니다.”
“오오. 한율이 넌? 작품 언제 다시 해?”
“아직 검토 중이에요.”
“아.”
박현우가 테이블에 놓인 생수를 집으며 한율을 보았다.
“너희 스위스로 여행 간다며?”
“스위스?!”
박현우의 말에 지헌이 놀란 눈으로 한율을 쳐다보았다.
“정말? 언제?”
“다음 달 24일이요.”
“어스래빗 멤버 다 같이 가는 거야?”
“아니요. 저랑 길우성, 건우 형하고 셋이서만요.”
강보배와 라이언은 트레리안 미니 앨범 준비, 차남석은 팀버거 홍보 이벤트 스케줄, 유호는 <뮤직센터> MC 스케줄과 곡 작업, 시력 교정 수술까지 받기로 해서 여행이 힘들었다.
수술을 받기로 한 건 이건우와 길우성도 마찬가지였지만, 여행을 다녀온 뒤에 받기로 했다. 박가람은 알프스산맥에 가봤자 숙소에만 처박힐 게 뻔하다며 뒷걸음질 쳤고.
지헌이 부러운 눈을 했다.
“나도 가고 싶다…. 알프스에 가는 거면 융프라우 산악열차도 타고, 스키도 타고, 등산도 하는 거지?”
“네, 패러글라이딩도 할 거예요. 선배님도 같이 갈래요?”
“드라마 촬영이 있어서….”
한율은 박현우를 쳐다보았다. 박현우가 어깨를 으쓱였다.
“난 아까 말했다시피 곧 촬영이라. 그리고 돈도 없다.”
“출연료 받은 거 다 어쩌고요.”
“동생 사교육비로 다 날아갔지.”
“그러고 보니, 지은이도 스릴 넘치는 거 좋아하는데.”
“JE 선배님이요?”
“응. 한율이 너처럼 스카이다이빙 해보고 싶다고 말한 적 있어.”
그렇구나. 한율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나 <뮤직뮤직> MC 스케줄이 있어서 시간상으로 힘들 터다. 스케줄이 없어도 함께 가려고 할지도 의문이고.
잠시 후, 한 걸그룹의 축하공연으로 드라마어워즈가 시작되었다.
한편, 스케일 엔터테인먼트.
JE는 아무도 없는 스타믹스 전용 연습실에 대자로 누워있었다. 현재 드라마 어워즈에 참석한 지헌을 제외하고, 스타믹스는 내일까지 스케줄이 오프였다. 그래서 멤버 대부분은 부모님이 있는 본가 혹은 친구네 집, 숙소로 흩어져 편히 쉬는 중이었다.
‘나도 그 잡것만 아니었어도.’
JE는 모처럼 늦잠을 자기 위해 핸드폰 전원까지 껐었다. 그러나 생전 처음 보는 웬 귀신이 가위로 그의 잠을 깨웠다. 이른 아침부터.
생긴 것도 냄새도 어찌나 고약한지, JE는 하릴없이 어슬렁거리기만 하는 회사 붙박이 귀신을 선택했다. 이쪽은 낮엔 잘 보이지도 않으니까. 그렇게 온종일 연습실에서 빈둥거리다, 안무와 노래 연습을 하다 보니 어느새 밤.
‘수상 결과 나왔나?’
JE는 리모컨을 들어서 TV를 켰다.
[2018년 tv Mu 드라마 어워즈 남자 신인상! …축하합니다, <별☆일없는 집>의 서한율 님!]
예의 바르게 여기저기 인사하며 무대로 올라가는 서한율. 공교롭게도 그때 TV 앞으로 희끄무레한 형상이 지나가더니, 벽을 통과하며 사라졌다.
JE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저 녀석을 뜬금없이 숙소로 부를 수도 없고. 대체 그 잡것은 뭐에 달라붙어서 들어온 건지…. 안티가 팬인 척하고 저주 인형이라도 보낸 건가? 거기에 딸려서 들어온 건가?’
JE는 이윽고 지헌이 한류스타상을 수상하는 걸 보곤 핸드폰을 집었다. 당장 볼 수 없다는 건 알지만, 스타믹스 단톡방에다가 수상 축하한다는 톡을 올렸다.
두 시간 후, JE가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 옷을 갈아입을 때였다. 우웅. 지헌으로부터 톡이 왔다.
-[회식 끝났다! 아직 회사?]
[ㅇ]
-[근처니까 너 픽업하러 감.]
[ㅇ]
-[전화하면 나와.]
[ㅇㅇ]
10여 분 뒤, JE는 지헌의 전화를 받고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드륵. JE가 나오자 바로 문 앞에 세워져 있던 밴이 활짝 열리더니, 서한율이 웃는 얼굴로 등장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네가 왜 거기서 나와?”
옆에서 지헌이 고개를 내밀었다.
“한율이 매니저분이 갑자기 일이 생겨서, 우리가 숙소까지 태워다주기로 했어. 타.”
JE는 냉큼 한율의 옆에 앉으며 문을 닫았다. 타악.
“너 숙소에 빨리 들어가야 해?”
“11시 30분까지 들어가기로 했어요. 왜요, 선배님?”
현재 시각 11시. JE는 마음이 급해졌다.
“그럼 잠깐 우리 숙소에 들렀다 가라. 줄 거 있어.”
스무 살 성인이 되었다
JE는 한율에게 향수 하나를 건넸다. 그는 거실에 있는 지헌에게 들리지 않을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하다.”
“곤란하면 언제든 부르라고 제가 먼저 말했잖아요. 그런데 이거 정말 주시는 거예요?”
“어. 예전에 공항 면세점에서 산 건데, 나중에 확인해보니까 내가 원래 사려던 모델이 아니더라고. 교환이나 환불받기 귀찮아서 그냥 가지고 있던 거야. 마음에 안 들면 다른 사람한테 넘겨도 괜찮고.”
“네, 감사합니다. 잘 쓸게요.”
“어.”
JE는 현관 앞까지 나와 한율을 배웅했다.
“그럼 토요일에 보자.”
“네, 쉬세요.”
한율이 지헌과 다시 나가고 난 뒤, JE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괜찮다고 해놓고 자꾸만 서한율을 인간 부적으로 이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일, 새해 첫날에도 가위에 눌려서 깨면 기분이 더러울 것 같아 어쩔 수 없었다.
서한율에게서 여전히 소름 끼치고 섬뜩한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 적어도 살아있는 사람이니.
JE는 깨끗하면서도 은근히 서늘해진 거실을 둘러보며 생각했다.
‘아니, 이런 식으로 사람 이용을 합리화하는 것도 경계해야겠다.’
평생 서한율에게 도움받는 건 불가능할 테니 말이다.
2019년을 30분 앞둔 밤 11시 30분.
어스래빗 멤버들은 서한율이 도착해 준비를 마치자마자 라이브 방송을 시작했다. 한율은 신인상 트로피와 JE에게 받은 선물을 팬들에게 자랑했다.
“tv Mu 드라마 어워즈에서 받은 남자 신인상 트로피입니다. 그리고 이건 조금 전 스타믹스 숙소에 잠깐 들렀을 때, JE 선배님에게 받은 축하선물이에요.”
-우오와와왕♡
-율톢이 받을 줄 알았어
-서 배우 신인상 축하해!!!!
-스타믹스 숙소도 놀러 가? 오옹
-JE님 축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전해줭ㅎ
“뭐 받은 건데?”
“향수?”
“어? 내가 쓰는 거랑 같은 브랜드다.”
한율은 작은 상자에 담긴 향수를 꺼냈다. 정말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새 상품이었다.
칙. 꺼내서 공기 중에 가볍게 분사하자 멤버들이 향을 맡았다.
-킁킁. 단체로 향수 냄새 맡기.
-토끼탈 쓴 멈머들 같다ㅎㅎ
-귀여워어어♡♡♡♡♡♡
“향 괜찮은데?”
“하뉼 이미지랑 딱이야.”
차남석이 카메라를 보며 말했다.
“제가 쓰는 향이랑은 다른 종류라, 헷갈릴 염려는 없겠네요. 다행입니다.”
-내일 음방 갈 때 뿌릴고야?
-JE님 센스 굿굿 감사합니당
-오늘로 율톢 길톢 미자 졸업이야 23분밖에 안 남았어 아쉬워ㅠㅠㅠㅠ
-남석이도 저 브랜드 쓰는 구낭ㅎㅎ
-율톢도 향 맘에 드나보다
이후 어스래빗 멤버들은 라방에서 2018년 한해에 있었던 기억나는 에피소드를 소소하게 풀기도 하고, 내년에 하고 싶은 일들을 하나씩 말했다.
“스무 살 되면 해보고 싶었던 거요?”
톡창에 올라온 걸 읽으며 한율은 길우성을 쳐다보았다. 길우성이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가족끼리 술 마시기요!”
“가족이랑?”
“술은 자고로 어른한테 배워야 한댔어. 아빠랑도 그렇게 하기로 약속했고.”
-올곧다ㅜㅜ
-암암 그래야지ㅎ
-우성이 가족사랑♡♡♡
“한율이 넌? 성인 되면 하고 싶었던 거.”
한율은 웃으며 대답했다.
“혼자 해외여행이요.”
-휴일에 책을 읽을 것 같은 이미지지만, 은근 활동적인 율톢
-뒤에 뭐가 빠진 것 같은데ㅋㅋ 해외 여행 가서 ‘등산’
-율톢은 정말 혼자서도 씩씩하게 잘 다닐 것 같아
-한율이 텍사스 여행기 보고 싶다
그러나 스위스 여행 관련 이야기는 일부러 하지 않았다. 사적인 일정을 구체적으로 노출하는 건 사생 스토커들더러 따라오라는 말밖에 되지 않는 까닭이었다.
“드디어 2019년까지 5초 남았네요.”
멤버들은 보신각 현장이 생중계되는 TV를 보며 함께 카운트다운을 셌다.
“4, …3, …2.”
“1!”
그리고 카메라를 향해 큰소리로 함께 외쳤다.
“이프림! Happy New Year~!”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2019년 1월 1일.
한율은 스무 살 성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