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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1일 아침 인천국제공항. 어스래빗 멤버들은 KBC 측에서 설치한 카메라에 대고 손을 흔들며 출국장으로 들어갔다. 어스래빗 외에도 많은 인기 아이돌이 비슷한 시간대에 나타나, 공항은 그야말로 난장판이 되었다.
“오빠! 여기 좀 봐주세요! …야, 차남석!”
“왜 여권을 카메라에 찍히도록 들어요?! 다 찍히잖아!”
“호수 언니! 언니 너무 예뻐요!”
공항 보안요원들과 아이돌 경호원들은 저돌적으로 달려드는 팬들과 찍새들을 막느라 정신이 없었다.
“위험합니다! 물러나 주세요!”
출국장 안에서는 항공권까지 끊고 따라 들어온 사생들과 홈마들이 아이돌들의 뒤를 쫓았다.
비즈니스 라운지는 바로 어제 있었던 아스대 본선을 연상케 했다. 여기저기를 둘러봐도 온통 아이돌이었다.
“이러고 있으니까 8월에 미국 K-POP 콘서트 갔을 때 생각난다.”
“그러게.”
풀썸의 효운이 휴대용 게임기를 들고 다가왔다.
“한율아, 게임 같이 할래?”
“저 이거 한 번도 안 해봤는데.”
“괜찮아. 나도 초보야.”
딱히 할 일이 없던 터라, 한율은 효운과 나란히 앉아서 아케이드 게임을 했다. 다른 멤버들도 핸드폰을 들여다보거나 다른 팀 멤버와 이야기를 나누며 탑승 시간을 기다렸다.
차칵차칵. 멀리에서 그들을 촬영하는 카메라 셔터 소리를 들으며.
“어, 거기에서 점프해서 빠르게 왼쪽으로 턴. 그래야 함정에 안 걸려.”
언제 왔는지, 뒤에서 스타믹스의 JE가 훈수를 뒀다.
“중간 지점에서 폭탄 던지고. …그렇지.”
“선배님 이 게임 해본 적 있어요?”
“엔딩 몇 번 봤어. 숙소에 있을 땐 딱히 할 게 없으니까. …아, 효운이 형 거기에서 미리 점프하면 안… 되는데 하셨네. 아깝.”
“하하….”
비행기 탑승 자리는 원카운트 멤버들과 가까웠는데, 그들은 상당히 조용했다. 비즈니스석까지 들어온 누군가의 사생 스토커가 대놓고 카메라를 들어서 촬영하는데도, 익숙하다는 듯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올해 1월 1일부터 터졌던 원카운트 기혁과 퍼플아워 루아의 스캔들은 다음 날, 아림 측에서 ‘친한 선후배 사이일 뿐 연인 관계는 아니다’라고 딱 잘라 부정하며 조금 사그라졌다. 그러나 며칠 전, 누군가 아스대 예선 당시 루아가 기혁이 있는 쪽을 향해 웃는 사진을 올리며 다시 재점화되는 상황.
그래서일까. 기혁은 무표정한 얼굴로 내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다른 원카운트 멤버들도 마찬가지. 제각기 하고 싶은 일을 할 뿐이었다.
퍼플아워도 이번 <뮤직뮤직 in 칠레> 라인업에 올라갔지만, 다른 시간대 비행기를 탈 예정인지 공항에선 보이지 않았다.
“얘들아.”
사과패드로 칠레 영상을 보던 유호가 멤버들을 돌아보았다.
“산티아고에서 딱 한 군데만 갈 수 있다고 하면 다들 어디 가고 싶어?”
“거긴 아르마스 광장만 가도 된다던데? 주요 명소가 다 거기로 통한다고.”
“전 산티아고 대성당이요.”
대답하던 차남석이 문득 한율을 돌아보았다.
“서한율 너도 같이 갈래?”
“글쎄요. 시간 되면 효운 선배님이랑 보기로 해서 안 될 것 같은데.”
“…….”
“……?”
순간 실망하는 것 같은 차남석의 얼굴. 얘가 왜 이러나 한율이 의아해할 때, 박가람과 길우성이 동시에 아 소리를 냈다.
“효운 선배님한테도 성당 같이 가자 그러면 되지.”
“효운 선배님 어디 계시지?”
“저어기 앞에.”
“……?”
제 이름을 들었는지, 마침 효운이 이쪽을 돌아보았다. 박가람이 작은 소리로 물었다.
“효운 선배님, 종교가 뭔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효운은 의아해하는 얼굴로 대답했다.
“무교?”
“OK, 한율이가 산티아고 대성당에 놀러 가재요.”
“네?”
대체 누구 마음대로?
한율이 황당한 표정을 짓는데, 옆에서 길우성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위험한 객지에선 다 같이 뭉쳐 다녀야 안전하다네, 친구.”
칠레 날짜로 1월 12일, 산티아고.
이곳은 한낮 기온이 30도까지 올라가는 여름인 터라, 한율은 가볍고 편한 옷을 걸친 채 아르마스 광장에 섰다. 나오기 전에 선크림을 바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선크림을 덕지덕지 발라서 얼굴이 새하얘진 일행이 맞은편의 대성당을 보며 감탄했다.
“와아…. 진짜 예쁘다.”
함께 온 일행은 같은 팀의 차남석, 길우성, 스카이러너의 용맹, 풀썸의 효운, 스타믹스의 JE.
짧은 명소 산책 일행이 이렇게 꾸려진 경위는 별거 없었다. 첫 번째 경유지인 애틀랜타에서 2시간 넘게 대기하는 동안, 자연스럽게 섞여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여기에 현지 코디네이터와 경호원 넷까지 더해, 총 11명.
“인증샷부터 남깁시다. 형, 촬영 부탁드려도 될까요?”
“네.”
용맹이 경호원에게 핸드폰을 넘겼다. 최소 데뷔 3년 차 아이돌 여섯은 대성당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했다.
용맹과 길우성은 양 사이드에서 날개를 펼치는 듯한 포즈를, 차남석은 홀로 멋있는 척, 효운은 멋쩍게 웃으며 손하트, JE는 한율처럼 무난하게 브이 자를 그린 손을 들고 미소 지었다.
“찍습니다. 하나, 둘….”
찰칵.
이곳은 환태평양 지진대에 속한 나라로
“그럼 남석이 너도 세례명 있겠다. 세례명 뭐야?”
경이롭다는 시선으로 성당 내부를 둘러보던 차남석이 머뭇거렸다. 동갑이지만 딱히 친해질 기회가 없던 용맹과 차남석은 어느새 편히 말을 나누고 있었다.
“…몰라도 돼.”
“몰라도 된다니까 더 알고 싶다.”
“알고 싶다!”
길우성까지 용맹의 말을 따라 하자, 효운과 JE도 차남석을 주목했다. 차남석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스테파노.”
“이름 멋지다!”
“차 스테파노 씨, 앞장서시죠. 저 작품은 무슨 양식입니까?”
“몰라, 인마.”
천천히 성당을 둘러보고 나왔을 땐 어떻게 알았는지, 팬으로 추정되는 여성 셋이 기다리고 있다가 요란하게 비명과 환호성을 지르며 다가왔다. 현지 코디네이터와 경호원들이 제지하자 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양손을 펴서 보여주고, 가방 안에도 무기가 될 만한 게 없다며 증명했다.
[저기 핫도그 거리 가봤어요? 거기에서 꼭 마셔야 할 추천 음료가 있는데…!]
내일 열리는 <뮤직뮤직 in 칠레> 공연을 보기 위해 페루에서 여기까지 왔다는 그들은, 스카이러너뿐만이 아니라 어스래빗과 풀썸, 스타믹스도 잘 알고 있었다.
함께 사진을 서너 장 찍어주자 그들은 맛집을 추천해주곤 쿨하게 퇴장했다.
[내일 공연 기대할게요!]
잠시 후, 한율 일행은 핫도그와 음료를 든 채 차에 탔다. 차는 호텔이 아닌 <뮤직뮤직 in 칠레> 공연 준비가 한창인 국립 경기장으로 향했다.
“핫도그 진짜 맛있다.”
“나는 맛 선택 잘못했나 봐, 너무 매워. 그나저나….”
JE가 용맹을 보며 말했다.
“난 솔직히 너희 회사에서 외출 허락해줄 거라곤 생각 안 했는데. 조금 의외다.”
“흐. 우리 회사 그렇게 융통성 없는 곳 아니에요. 그런데 전부터 궁금한 거 있었는데.”
“……?”
“선배님은 한율이랑 어쩌다 친해진 거예요? 듣기론 선배님이 한율이한테 쿠키도 사주고 상 받았다고 축하선물도 줬다고 그러던데.”
JE가 한율을 한번 보더니 태연히 대답했다.
“앞으로 잘될 것 같아서 친하게 지내자고 했어.”
길우성이 소리 내어 핸드폰에 메모했다.
“JE 선배님은, 속물이었다….”
“…….”
명백한 장난이었으나, JE는 잠시 길우성을 말없이 쳐다볼 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오히려 길우성이 눈치를 봤다.
“진짜로 저장해요?”
“마음대로.”
“…남석 씨, 이럴 땐 뭐라고 대답해야 해?”
“핫도그나 먹어. 소스 흐른다.”
“넹.”
공연장 대기실엔 그들처럼 다른 곳을 잠깐 둘러보거나, 호텔에 있었던 멤버들이 먼저 와 있었다.
“성당은 어땠어?”
“대박이었음요. 형들이 간 곳은?”
“사진 볼래?”
오래간만의 해외 공연 녹화라 그런지 리허설은 팀마다 오래 걸렸다. 그나마 카메라는 일선에서 잠시 물러났던 베테랑 감독들이 잡아주어서, 전광판에 잡히는 무대 영상은 상당히 준수했다. 아이돌 몇 명은 정말 멋지고 예쁜 샷만 콕콕 잡아줬다며 카메라 감독을 향해 엄지를 치켜세웠다.
[어스래빗, 준비해주세요.]
이윽고 어스래빗의 리허설 차례.
어스래빗은 VCR이 나오는 동안 메인 스테이지에 등장, 무대를 하고, 돌출 스테이지로 이동해서 짧게 인사, 을 부르는 무난한 동선이었다. 하지만 다음 주 방영되는 방송분에선 무대가 편집되어 만 나갈 가능성이 크다는 귀띔.
가 음방에서 10위권 이내 진입, <락뮤닷>에서는 3위까지 오르며 좋은 성적을 거두기는 했으나, 이번 <뮤직뮤직 in 칠레> 라인업이 상당히 화려하여 현장에서 두 곡을 부르는 것도 감지덕지한 입장이었다.
[VCR, 스타트.]
암전된 장내. VCR 영상의 불빛과 계단과 바닥에 부착된 발광 테이프를 따라 멤버들은 무대로 올라갔다.
…흔들.
“……?”
리프트가 올라온 곳 바로 앞을 지날 때였다. 한율은 발밑이 흔들리는 느낌에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가, 안무 대형 자리로 들어갔다. 이 정돈 야외 설치 무대에서 간혹 느껴지는 소소한 흔들림이었기에.
[…OK, 수고하셨습니다.]
두 곡의 리허설과 모니터링을 끝내고 멤버들은 스태프들에게 꾸벅꾸벅 인사했다.
“아 참, PD님.”
무대에서 내려가기 전, 유호가 현장 PD에게 말했다.
“저기 메인 스테이지 왼쪽에서 두 번째 리프트 앞 무대 바닥이 조금 흔들리면서 소리가 난 것 같은데….”
현장 PD는 이미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젊어서 평형감각이 좋네, 그런 것도 잘 느끼고. 괜찮아요. 리프트 지지대 바닥 높낮이가 미세하게 다른 부분이 있어서 약간 흔들린 거지, 튼튼합니다.”
“아니요, 리프트가 아니라 그 앞 무대 바닥이….”
그때 입구 쪽에서 소란이 일어, PD가 그쪽으로 움직이며 무전기에 대고 물었다.
“거기 뭐예요?!”
[다음 팀 스탠바이하겠습니다.]
마침 조연출도 다음 팀을 불러, 유호는 머뭇거리다가 무대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조연출에게 PD에게 하려던 말을 마저 전달했다.
대기실로 돌아가는 길.
“흔들리는 건 나도 느꼈는데, 소리도 났었어요?”
“어. 조금 끼익? 하는 듯한 불쾌한 소리. 꼭 이음새가 엇갈려서 나는 소리 같았거든.”
“리프트 면이랑 무대 바닥이랑 마찰하는 소리 아니었어?”
“보배 너도 들었어?”
“응. 너무 바짝 붙여놨나? 그래서 서로 부딪치면서 흔들리나? 이렇게 생각하고 말았는데.”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한율과 강보배의 반응에, 유호는 고개를 기울였다.
“내가 너무 예민한 건가….”
“안전 문제는 항상 예민하게 생각해야지. 혹시 모르니까 팀장님한테도 말하는 건 어때?”
이건우의 말에 유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오 팀장을 찾았다.
호텔로 돌아와서 씻고 저녁을 먹을 때, 한율은 스타믹스 JE로부터 온 톡을 멤버들에게 말해주었다.
“무대 바닥 흔들리던 곳, 다른 팀에서도 PD님한테 말했나 봐요. 무대 제작팀에서 다시 살펴보고 보완했대요.”
“다행이다. 안전상 아무 문제 없이 단순히 흔들렸던 거라도, 불안하면 아무래도 신경 쓰여서 위축….”
그 순간이었다.
“어…?”
땅이 미약하게 흔들리더니 조명이 일제히 깜빡거렸다.
“지진?”
“다들 침착해! 이곳은 환태평양 지진대에 속한 나라로, 크고 작은 지진이 자주 일어난다!”
“가람이 제일 안 침착해.”
이내 진동이 그치고 조명도 원래대로 돌아왔다. 멤버들은 잠깐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일본에서 처음 지진 겪었을 때 생각난다.”
“다들 객실로 돌아가면 핸드폰이랑 노트북, 사과패드 전부 풀로 충전해놔.”
“네엡.”
객실로 돌아온 한율은 매니저의 말대로 핸드폰부터 충전시켰다. 그리고 양치하고 곧바로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내일은 아침 일찍부터 리허설이 있었다.
“넌 안 불안하냐?”
차남석이 핸드폰을 무선충전기 위에 올려놓으며 물었다.
“자는 중에 갑자기 큰 지진이 올 수도 있잖아.”
“불안해한다고 뭐가 달라지진 않잖아요. 오히려 더 피곤해져서 정작 다급한 상황이 닥치면 체력이 안 받쳐줄 텐데.”
“그렇긴 한데…. 가만 보면 넌 참 긍정적인 건지 낙천적인 건지 모르겠다.”
인지조차 못 하는 찰나에 일이 벌어지지만 않는다면야. 한율은 어깨를 으쓱이곤 침대에 누웠다.
“먼저 잘게요.”
“그래, 잘 자라.”
“형도요.”
다음 날, 다시 찾은 국립 경기장.
최종 리허설을 진행하는데, 정말로 어제 흔들렸던 무대 바닥이 오늘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전날 다소 미흡하게 느껴졌던 조명도 음악에 맞춰 적절하게 반짝거렸다. 출연자들이 없는 동안 연출팀이 조명 리허설에 공들인 게 느껴질 정도.
점심을 먹고 나선 가볍게 단장을 하고, 티켓 소지자 중 당첨된 소수의 팬을 대상으로 짧은 팬 미팅을 진행했다.
악수하고, 함께 사진을 찍고. 사전에 스태프들이 과도한 신체 접촉은 절대 안 된다고 당부했으나, 아주 자연스럽게 포옹하는 팬들도 있었다. 몇 명은 한국인 못지않게 또렷한 한국어를 구사했다.
“가람아, <빙글빙글>에서 너무 귀여웠어!”
“지금도 귀엽죠?”
“응! 귀여워!”
“와아아!”
박가람은 팬과 서로 두 손바닥을 맞부딪치면서 제자리서 방방 뛰었다. 참 죽이 잘 맞았다.
어떤 팬은 차남석이 불렀던 웹드라마 <한날한시 너와 나> OST 후렴구를 불러 그를 놀라게 했다. 놀란 이유는 해당 웹드 성적이 썩 좋은 편이 아니었던데다가, 데뷔 초에 불렀던 터라 그리 주목받지 못한 까닭이었다. 정말 팬이 아니고서야 존재조차 모르는 노래.
“정말 감동이에요. Gracias, gracias!”
한율에겐 <객귀, 해>와 <별☆일없는 집>을 언급하는 팬이 많았다. 한 팬은 미안한 얼굴로 스페인어로 속닥거리듯 말했다. 너무 궁금해서 영화 <고양이 난로>를 불법으로 다운받아 봤다, OTT 플랫폼을 통해 정식 서비스되면 꼭 구매하겠다는, 대충 그런 내용의 사과 같았다.
팬 미팅을 끝내고 대기실로 돌아가는 길. 강보배가 벅찬 얼굴로 웃었다.
“새삼 인터넷이 대단하다는 걸 느꼈어.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를 잘 안다니.”
“그래서 해외 팬 분들 만날 때마다 좀 신기한 것 같아.”
“만약 인터넷도 안 되고 SNS도 안 되면 어땠을까?”
“님들 누구세요?”
“크큭.”
저녁 6시. <뮤직뮤직 in 칠레> 공연이 시작되었다.
어스래빗 멤버들은 대기실에서 현장 중계 카메라가 잡는 영상을 보았다.
첫 무대는 V12가 열었다. 티모의 빈자리는 안무와 파트 분배를 수정하여 채웠으나, 메인 댄서였던 그가 중심을 잡았던 화려한 퍼포먼스는 다소 밋밋해졌다.
길우성이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티모는 잘 지내나 모르겠다….”
“최근에 연락 안 해봤어?”
“SNS에 접속을 잘 안 하더라고. 개인 폰 번호도 모르고.”
“걔는 네 번호 알잖아.”
“어. 그런데 연락을 안 한다? 많이 힘든가….”
지난번 마약 사건이 알려졌을 때 티모가 휴식에 들어가자, 사람들 사이에서 코우로부터 약을 받은 사람이 티모가 아니냐는 의혹이 짙게 퍼졌었다. 그러나 그게 명백한 진실이란 걸 아는 사람은 극소수.
“…….”
한율은 말없이 V12의 무대를 보았다.
어스래빗은 다섯 번째 순서라, 두 번째 무대가 시작되었을 때 대기실을 나섰다.
백스테이지엔 바로 앞 순서인 퍼플아워가 대기하고 있었다.
새해 첫날부터 원카운트와 스캔들에 휘말렸지만, 퍼플아워의 분위기는 원카운트와 사뭇 달랐다. 진은수와 다른 멤버 한 명을 제외하고, 루아를 중심으로 귓속말로 속닥속닥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다섯이서만 똘똘 뭉쳐서.
꾸벅. 그러다 진은수가 먼저 어스래빗을 먼저 발견하고 고개를 숙이자, 다른 멤버들도 고개를 돌렸다가 묵례했다. 어스래빗 멤버들도 꾸벅 인사를 한 후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채 섰다.
이윽고 계단 앞에서 대기하던 풀썸이 무대로 올라갔다.
음악과 관객들의 함성, 기척. 거대한 우레의 소용돌이 안에 들어온 것처럼 소리가 몸으로 쿵쿵 전달되었다.
그때 문득 한율의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
‘미진 정도는 아예 느껴지지도 않겠는데?’
풀썸의 노래에 맞춰 까딱까딱 몸을 흔들던 이건우가 활짝 웃었다. 그리고 큰소리로 한율에게 말했다.
“와아, 한율이 통화 연결음 나오네?”
이어서 박가람.
“와아! 어스래빗 서한율의 통화 연결음, 풀썸의 노래잖아?!”
길우성도 들썩들썩 춤을 추며 한율을 놀리는 데에 합류했다.
“씬나!”
“…….”
한율은 멀뚱히 그들을 바라보며 무안을 안겨주었다. 바보처럼 실실 웃으며 들썩거리던 박가람과 길우성이 동시에 정색했다.
“에이, 재미없어.”
풀썸의 순서가 끝나고 퍼플아워가 무대로 올라갔다. 어스래빗은 계단 앞으로 이동해 퍼플아워의 노래를 감상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멤버들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백스테이지에 도착한 다른 출연자들도.
“……?”
스태프 한 명이 급히 뛰어 들어오더니 PD에게 무어라 외쳤다. 그러자 PD가 황급히 뛰쳐나가고, 무전을 들은 다른 스태프들은 굳은 얼굴로 수군거렸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보이자, 아이들의 얼굴도 의아함과 불안으로 물들었다. 뭐지? 무슨 일 생겼나?
한율은 계단을 올라가 무대 쪽을 조심스레 살폈다. 퍼플아워가 돌출 무대로 이동한 터라 메인 스테이지엔 아무도 없었다. 계단 옆을 지키고 있던 스태프가 한율의 앞을 막았다.
“별일 아닐 거예요. 일단 내려가 계세요.”
“네.”
그의 말에 고개를 돌리려던 찰나였다.
“……?”
한율은 잠깐 스친 시야에서 이상함을 느끼고 몸을 숙였다. 고개를 꺾어서 멀리 시선을 던졌다.
“……!”
오른쪽 전광판 옆에 세워진 조명이 떨리고 있었다. 정확히는 트러스 자체가 미약하게나마 흔들려, 거기에 설치된 조명도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중.
들리지 않는 소리가 절로 상상되었다.
끼익, …끼익.
그 순간 퍼플아워의 무대가 끝나고, 전광판과 MC석을 제외한 조명이 일제히 꺼졌다.
삐빅. 계단 옆을 지키고 있던 스태프의 무전이 울렸다.
[어스래빗 스탠바이.]
고맙다, 생명의 은인
전광판 불빛과 발광 테이프에 의지해 어스래빗 멤버들은 무대로 올라갔다. 한율은 다른 조명 트러스를 살피려 했으나 조명이 모두 꺼진 상태라 어두워서 분간이 힘들었다.
‘눈에 띄게 흔들렸다면 관객들이 먼저 알아차렸겠지.’
[…어스!]
[래빗!]
기나긴 소개에 이어 MC들이 어스래빗을 호명했다. 전광판에 어스래빗 소개 VCR이 흘러나오자 장내가 환호성으로 가득 찼다.
한율은 차분히 안무 대형을 갖췄다. 다른 멤버들도 조금 전 스태프들의 행동 때문에 아직 불안이 가시지 않았지만, 현재 무대에 집중하려는 모습이었다.
전주와 함께 조명이 켜졌다.
한율은 카메라에 잡히지 않을 때, 안무 동선대로 움직이며 조금 전 흔들린 조명 트러스를 빠르게 살폈다. 몇 명의 스태프들이 그 아래에 모여있었다.
머뭇머뭇. 이제 한 팀만 더 나오면 1부가 끝나니 그때 살펴도 괜찮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훤히 보였다. 흔들리는 원인을 살피려면 안전하게 전원부터 차단해야 하는데, 당장은 조금 흔들리는 것 외엔 큰 문제가 없어 보이니 말이다.
가 끝나고 어스래빗 멤버들은 환하게 웃으며 돌출 무대로 이동했다. 한율도 관객들에게 손을 흔들며 걸음을 옮겼다.
‘만약 저게 쓰러진다면.’
거리가 있어 이쪽엔 고작 파편이나 튀는 정도. 하지만 그 아래에 깔리는 사람들은 크게 다칠 터다. 어쩌면 감전 사고가 일어날 수도.
[안녕하십니까!]
[어스!]
[래빗! 인사드리겠습니다!]
돌출 무대에 일렬로 선 어스래빗 멤버들은, 그동안 수십 번 연습하고 외운 스페인어로 관객들에게 인사했다.
[이번 <뮤직뮤직 in 칠레>로, 처음으로 칠레를 방문한 것도 영광인데!]
[정말 반갑게 환영해주신 여러분에게 오히려 감동이란 선물을 받게 되어 무척 감사하고, 마음도 따뜻해지다 못해!]
[남미의 열정에 물들었는지, 더 멋진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은 마음이 마구마구 솟구칩니다!]
이번엔 한율의 차례. 거대한 전광판에 한율의 얼굴이 크게 나왔다. 한율은 마이크를 들어 크게 둘러보면서 입을 열었다.
그 순간이었다.
흔들. 발아래에서 미약한 진동이 느껴졌다. 고막을 때리는 커다란 음악도 없고, 만 칠천 명의 관객도 가만히 이쪽을 주시하는 상황.
이번엔 정말 지진이었다.
[이번에 들려드릴 곡은.]
한율은 자연스럽게 문제가 있었던 조명 트러스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을 이었다.
[란 곡으로….]
조금 전보다 더 많은 스태프가 조명 트러스를 잡고 있었다. 안전을 위해 구조물 주변엔 관객이 접근할 수 없도록 펜스가 둘려있지만, 그래도 가장 가까이에 있던 관객들은 놀라 웅성거리고 있었다.
한율은 말하던 내용을 바꿨다. 스페인어로 말하기엔 아직 실력이 부족하여 영어로.
[갑자기 한꺼번에 움직이면 다칠 수 있으니, 관객분들은 차분히 한 걸음씩 이동해서 공간을 만들어주세요. 부탁드립니다.]
그 말을 알아들은 사람들이 한율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다른 이들도 의아한 얼굴로 덩달아.
흔들. 그 순간 다시 찾아온 미진. 반사적으로 놀라서 다른 사람을 밀치며 도망치려는 몇몇 사람을 향해 한율은 재차 말했다.
[스태프들이 잡고 있어서 바로 쓰러지진 않으니, 동요하지 말고 차분하게 이동해주세요. 급히 움직이면 오히려 서로를 다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때 <뮤직뮤직 in 칠레> 스페셜 MC로 온 칠레의 인기 배우도 한몫 거들었다. 그녀는 한율의 영어를 스페인어로 들려주고 부언했다.
[옆 사람의 눈을 보면서 침착하게 한 걸음씩 이동해주세요. 차분히, 침착하게.]
JE도 영어로 말했다.
[다치지 않도록 조심히 이동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제야 패닉에 빠지려던 사람들이 조금씩 진정하는 기미를 보였다. 문제가 생긴 조명 트러스와 관객들이 거리를 벌리는 동안 제작진들도 논의를 마쳤는지, 전광판엔 어스래빗 대신 무언가 전달을 받는 MC들의 모습이 나왔다.
JE가 새로 받은 큐카드를 보며 말했다.
[관객분들에게 양해를 구하겠습니다. 안전상의 문제로 <뮤직뮤직 in 칠레> 1부는 예정된 시간보다 10분 일찍 앞당겨 여기에서 마무리하겠습니다!]
이 상황 자체에 적잖이 놀랐는지,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유린도 큐카드를 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어스래빗의 무대는 점검이 끝난 후 2부 시작과 함께 이어지니,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장내에 두 사람의 말을 고스란히 전달하는 통역사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스래빗 멤버들에겐 PD가 인이어를 통해 지시를 내렸다.
[어스래빗은 일단 백스테이지로 돌아가 주세요.]
발전차로부터 들어오던 전원을 차단했는지 해당 트러스의 조명이 모두 꺼졌다. 이걸로 감전 사고의 위험은 사라진 셈.
그러나 한율은 긴장을 놓지 않았다. 지진이 한두 번으로 그치기는커녕 더 크게 올 수도 있기에.
흔들. 주의를 기울이기 무섭게 다시 찾아오는 미진.
“……!”
그 순간, 한율은 옆에 있던 차남석의 반대쪽 어깨를 잡아 힘껏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이런.’
파직, …콰창!
천장 트러스에 설치되었던 조명 하나가 무대에 떨어지며 박살 났다. 바로 조금 전까지 차남석이 있었던 자리에.
꺄아악! 뒤늦게 근처에 있던 팬들이 놀라 비명을 지르고, 차남석도 순간 무슨 일이 벌어졌나 멍하니 있다가 숨을 토했다.
“…하.”
“남석아, 괜찮아?!”
“형, 괜찮아?”
“어….”
놀란 멤버들이 차남석과 한율에게 다가왔다. 무대 아래에 있던 스태프도 황급히 올라와 다친 곳이 없는지 확인하고, 일단 이동하자며 그들을 백스테이지로 이끌었다.
“다행히 다친 곳은 없대요. 옷 속에 들어간 파편도 없고.”
대기실. 통역사가 의료진의 말을 전해주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많이 놀랐을 테니 무대는 쉬는 게 좋겠다. PD님에게….”
탈의실에서 나오며 차남석이 말했다.
“아니요, 그냥 할게요. 다친 곳도 없는데.”
“그래도 많이 놀랐잖아. 조금 쉬어. 마음 진정시켜야지.”
차남석은 고개를 저었다.
“바로 극복하지 않으면 더 되새김질 될 것 같아서 그래요. 그리고 이럴 때일수록 의연한 모습을 보여야죠. 아마추어도 아니고 프론데.”
덤덤하면서도 단호한 차남석의 말. 오 팀장은 가만히 차남석을 바라보다가 다른 멤버들을 돌아보았다.
“너희들 생각은 어때?”
사고를 당할 뻔한 당사자가 저렇게 말을 하는데 별수 있을까. 초조한 낯으로 서 있던 멤버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마터면 눈앞에서 차남석이 끔찍한 사고를 당할 뻔했다는 것에 놀랐는지, 훌쩍거리던 박가람도.
“무대에… 서야죠.”
“지구 반대편까지 날아왔는데, 한 곡만 하고 돌아가면 아쉽잖아요. 남석이 말대로 우리도 프론데.”
“지금 천장 조명도 살피고 있는 거죠? 흔들렸던 조명 트러스는 어떻게 됐어요?”
유호가 묻자 무전기를 꼭 쥐고 있던 <뮤직뮤직> 스태프가 대답했다.
“스탠드 트러스 쪽은 보완이 다 끝났고, 천장 조명은 앞으로 30분 정도면 끝날 것 같습니다.”
정말 괜찮다는 걸 보여주기 위함인지, 차남석이 씨익 웃었다.
“그 정도면 놀란 마음 추스르기에 충분하네요.”
멤버들의 의견이 일치하는 듯하자 오 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의료진과 통역사가 대기실을 나가고, 멤버들도 그제야 소파에 앉거나 심호흡으로 긴장했던 신경과 몸을 이완시켰다.
차남석은 한율의 팔을 툭 치며 웃었다.
“고맙다, 생명의 은인.”
잠시 딴생각을 하던 한율은 뒤늦게 어깨를 으쓱였다.
“…별말씀을.”
<뮤직뮤직 in 칠레>의 방송사고 기사는 공연이 끝나기도 전, 포털사이트 연예뉴스란을 점령했다.
[[속보]<뮤직뮤직 in 칠레> 어스래빗 위로 조명 떨어져]
[한국 날짜로 1월 14일 아침, 칠레 산티아고 국립 경기장에서 열리던 KBC <뮤직뮤직 in 칠레> 공연에서 사고가 발생했다.
사고는 1부 보이그룹 어스래빗의 공연 도중 미진이 발생하며 일어났다. 가장 먼저 사이드 전광판 옆에 설치된 스탠드형 조명 트러스가 휘청거려, 스태프들이 달려들어 트러스가 쓰러지는 걸 막았다.
제작진은 1부를 앞당겨 끝내 재정비하려 했으나, 다시 지진이 일어나며 이번엔 천장 트러스에 달린 조명 하나가 백스테이지로 돌아가려던 어스래빗 멤버, 차남석의 위로 떨어졌다.
다행히 함께 있던 같은 팀 멤버 서한율이 그를 잡아당겨 사고는 피했으나, 이번 일로 KBC <뮤직뮤직> 제작진 측의 안전 불감증 문제가…(중략).
한편 큰 사고를 당할 뻔했던 어스래빗은 2부 첫 무대로 등장, 후속곡 을 의연하게 소화했다.
(<뮤직뮤직 in 칠레> 어스래빗 사진=익명의 제보자).]
-와씨 기레기 ㅆ발 제목 어그로 ㅆ발
-신고로 비공개된 댓글입니다.
-기레기 제목 진짜 욕 나온다ㅋ 애들 다친 곳 없이 무사하다고 합니다.
-제목 보자마자 손 달달 떨리고 눈물 나와서 5분 정도 가슴 진정시키고 들어왔는데... 쓰레기 같은 기레기가 진짜..
-기자야 네 친동생이 당할 뻔한 사고라도 제목 이따위로 지을 거냐?
-그래도 무사해서 천만다행입니다.
-저도 제목 보자마자 심장 철렁.. 타팬인 나도 이런데 어스래빗 팬들은 오죽 놀랐을까
포털사이트 실검 1, 2위엔 [어스래빗 사고], [뮤직뮤직 방송사고]가 떴다. 공연이 끝난 직후엔 현장 관객들이 찍은 영상이 너튜브와 SNS에 하나둘 올라왔다.
영상은 사고 소식에 놀란 사람들의 클릭으로 짧은 시간에 높은 조회수를 기록했다.
-서한율 순발력 ㄷㄷㄷ
-율톢 아니었으면 진짜..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ㅜㅜ
-한율인 괜찮은 건가요? 남석이 끌어당길 때 손이 조명이랑 스친 것 같은데ㅜㅜ
ㄴ스쳤다고요?
ㄴ다른 직캠 보면 떨어지던 조명이랑 한율이 손이랑 스치면서 파란색 스파크 같은 게 튀는 게 보여요ㅠㅠ
커뮤니티 사이트의 어스래빗 게시판.
[제목: 현장 직캠이랑 목격담, 기사 종합해보면]
[1. 퍼플아워 때부터 스탠드형 조명 트러스 흔들림.
2. 어스래빗 업라이트 끝내고 돌출 무대로 이동해서 인사.
3. 이때 지진 약하게 옴. 한율이가 관객한테 조명 근처에서 떨어지라고 알려줌. (PD가 지시한 건지는 모름)
4. 안전 문제로 재정비한다면서 1부 일찍 끝내기로 함.
5. 다시 흔들림. 돌아가려던 남석이 자리로 천장 조명 하나 떨어짐. 한율이가 재빨리 끌어당겨서 사고 피함.
결론은 제작진 새끼들이 칠레가 지진 자주 일어나는 나라라는 거 알면서도, 스탠드 조명 말고도 천장 조명 시설도 제대로 점검 안 해서 하마터면 남석이 죽을 뻔했다는 소리임.]
댓글은 <뮤직뮤직> 제작진을 향한 욕과 비난으로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