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2화 (142/427)

* * *

-[정말 어디 다친 곳은 없는 거지?]

호텔로 돌아오자마자 한율은 모친과 통화를 나눴다.

“네, 전 괜찮아요.”

-[아침부터 대표님에게 전화 받고 어찌나 놀랐던지…. 너희 아빠는 예능국장님이랑 관계자들 가만 안 두겠다고 씩씩거리면서 출근했는데, 어쩌고 있는지 모르겠다.]

한율은 농담 같지 않은 모친의 말에 조용히 웃었다.

-[16일 스케줄은 어떻게 하기로 했어? 쉬는 거지?]

“아니요. 예정대로 하기로 했어요.”

-[정말로 괜찮겠어? 남석이뿐만이 아니라 한율이 너도 많이 놀랐잖아. 혹시… 회사에서 강요한 건 아니지?]

어스래빗은 한국 날짜로 16일 새벽 4시 20분 도착해 곧바로 MBS K <로얄K뮤직>으로 출근하기로 했다. 회사에선 하루라도 쉬는 게 낫지 않겠냐, 좌 대표가 직접 차남석과 통화하며 설득도 했었다.

한율은 조부와 통화 중인 차남석을 힐끗했다.

“회사에선 말렸는데, 형이 괜찮다고 고집을 피우네요.”

-[그 애도 참….]

모친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겉으론 괜찮아 보여도 속은 아무도 몰라. 본인도 본인의 상처를 제대로 못 알아차리거나 외면할 수 있으니까, 한율이 네가 옆에서 잘 지켜봐. 무리한다 싶으면 말리고.]

“네, 그럴게요. …그럼 나중에 뵐게요. 쉬세요.”

“…네, 그럼 끊을게요.”

한율과 비슷하게 차남석도 통화를 끝냈다.

“서한율, 나 먼저 씻는다.”

“네.”

차남석이 욕실을 사용하는 동안, 한율은 당장 쓸 화장품과 갈아입을 옷만 꺼내놓고 짐을 정리했다. 앞으로 두 시간 후 공항으로 출발, 새벽 2시 30분 비행기를 탈 예정이었다.

딩동.

“……?”

그때 울리는 초인종 소리.

한율은 문으로 다가가며 물었다.

“누구세요?”

“나다.”

어색하게 낮게 깐 목소리.

“하이.”

문을 열자 손을 들어 인사한 박가람이 성큼성큼 들어왔다.

“차남석은 씻는 중?”

“네.”

풀썩. 박가람은 멋대로 차남석의 침대에 누워 리모컨을 들었다.

“형네 객실에 뭐가 나왔어요?”

“아니, 그냥. 너희 둘이 뭐 하고 있나 궁금해서.”

한율은 고개를 끄덕이며 콘센트에 꽂아두었던 핸드폰 충전기를 뺐다. 스페인어가 어지러이 나오는 TV를 보던 박가람이 한 바퀴 뒹굴 구르더니 한율을 빤히 쳐다보았다.

“왜요?”

“이제부터 서한율 네 별명은.”

“……?”

“복덩이다.”

“…….”

“복돌이라고 할까 했는데 그건 너무 강아지 이름 같아서.”

한율은 작게 한숨 쉬었다.

우리 8시 뉴스에도 나왔대

산티아고 공항 라운지에서 탑승을 기다리는 동안엔, 대기실에서 인사를 나누지 못한 다른 아이돌들이 다가와 말을 건넸다.

큰 사고로 이어지지 않아, 다들 다치지 않아 천만다행이라고.

하마터면 자신들이 당할 뻔한 일이었기에 그들도 적잖이 놀란 눈치였다. 원제로의 변지욱은 아예 어스래빗 자리 옆에 앉았다.

“아까 잠깐 매니저 형 폰으로 인터넷 들어가 봤는데, 한국 완전 난리 났더라. 아침 뉴스에도 나갔대.”

<뮤직뮤직> 측에서는 현지에서 조달한 설비에다 한국에서 가져간 장비를 설치하는 작업 도중 미흡한 점이 있었던 것 같다며 공홈과 공식 SNS에 사과문을 게재했다.

그러나 무대 설치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현지 업체 측과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았다는 등의 변명을 붙여, 네티즌들의 비웃음을 사고 해당 문구를 삭제하는 작은 해프닝도 벌어졌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도 아찔하다. 그때 중단하지 않았으면 형들 한창 무대할 때…. 어우…….”

“한율이가 우릴 살렸지.”

“응?”

차남석만이 아니라? 변지욱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다가 아 하며 이해했다. 차남석이 사고당했다면 어스래빗이란 팀도 크게 휘청거렸을 테니.

“한율이 형 쩔었으.”

한율은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우는 다른 의미로 한 말이겠지만, 해석을 달리한 것 같은 변지욱의 생각을 굳이 바로잡진 않았다.

공연이 끝나고 난 뒤 <뮤직뮤직> PD와 스태프들은 출연자들을 찾아와 일일이 고개 숙여 사과했다. 어스래빗에게도.

『그때 한율 씨가 아니었다면 예정대로 공연이 계속 진행되어 더 큰 사고가 일어났을 겁니다.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 그리고….』

잠시 망설이던 PD는, 한율이 인사 도중 한 주의성 멘트를 제작진으로부터 지시받아 한 것으로 해달라고 부탁했다.

매니저들은 노발대발했다.

당신들의 안전 점검 소홀로 아이들에게 큰 사고가 일어날 뻔했다, 그런 돌발성 멘트를 하는 것 자체가 제작진에게 미운털이 박힐 수 있는 짓인데, 만약 한율이 그걸 감수하지 않고 넘어갔다면 어떻게 되었겠는가, 그런데 그 판단까지 당신들 욕 덜 먹으려고 날름 가로채려는 거냐 등등.

오히려 한율이 흥분한 매니저들을 말렸다.

『네, 그렇게 할게요.』

사실이 알려지면 사람들로부터 당장 잘했다고 칭찬은 많이 받겠지만, 그게 어디 오래 갈까. 선행 이슈도 하루만 반짝 뜨고 사람들 뇌리에서 금세 잊히는데.

그래서 차라리 <뮤직뮤직>과 KBC 측에 큰 빚을 지워, 두고두고 좋은 대접을 받는 게 더 낫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변지욱과 함께 온 현강희가 조심스레 물었다.

“스케줄은 어떻게 하기로 했어요?”

“예정대로 소화할 거야.”

“조금은 쉬는 게 낫지 않아요?”

차남석은 어깨를 으쓱였다.

“다들 횡단보도 건너다가 쌩하니 달려드는 차량에 놀라서 멈추거나 피한 경험 한 번씩 있잖아? 그거랑 비슷한 일 겪었다고 생각하고 있어.”

“크으, 의연한 남석 씨.”

길우성이 엄지를 치켜세우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러나 다른 멤버들은 입가를 올리다 말거나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몇 시간 전엔 다들 경황이 없었다. 차남석이 아닌 자신이 큰 사고를 당할 뻔했다는 생각도 제대로 못 한 채, 그저 차남석이 무사하다는 것에 안도했다.

한편으론 놀랐던 마음을, 눈앞의 무대에 집중하자는 생각으로 무시하고 넘어가지 않았을까.

혼란스러워서.

그리고 공연이 끝나고 이처럼 괜찮냐고 묻는 사람들의 반응을 보며 ‘아, 우리가 정말 큰일을 당할 뻔했구나’라고 실감하며 뒤늦게 지난 일을 이성적으로 더듬는다. 이 과정에서 불거지는 여러 감정. 제작진을 향한 분노, 혹은 다시 그런 사고가 발생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등이 겉으로 드러날까 주의를 기울이며.

적어도 한율이 보기엔 그랬다.

아직 여러 풍파를 겪어보지 못한 아이들이기에.

그래도 비행기에 탑승했을 땐 24시간 가까이 깨어있던 상태에다 피로까지 겹쳐서 그런지, 다들 기절하듯 잠에 빠졌다.

10시간 넘는 비행 후 첫 번째 경유지 애틀랜타. 어스래빗 멤버들은 공항 비즈니스 라운지에 갖춰진 샤워실에서 가볍게 샤워하고 나왔다.

“으아, 개운하다.”

“길우성 우리 아빤 줄?”

“형네 아버지도 안경 쓰심?”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란 걸 알잖아?”

한율은 덜 마른 머리카락을 손으로 슥슥 빗질하며 라운지에 마련된 커피 팬트리로 향했다. 같은 라운지를 사용하는 퍼플아워의 루아가 그 앞에 서 있었지만, 한율은 아무렇지 않게 나란히 서서 일회용 컵을 꺼냈다.

커피에다 시럽을 넣고 스틱으로 젓던 루아가 입을 열었다.

“별일 없어서 다행이에요.”

한율은 커피머신에서 추출되는 에스프레소를 보며 대답했다.

“네.”

“은수.”

루아가 완성한 커피를 들고 몸을 돌렸다. 그리고 주변을 살피며 조용히 물었다.

“엄청 울었던 거 알아요?”

“…….”

“그냥, 그랬다고요.”

루아는 그 말만 남기곤 자리를 떴다. 한율은 고개를 돌려 퍼플아워 멤버들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진은수는 이쪽과는 등진 방향의 소파에 앉아있었다. 민낯에다 야구모자를 푹 눌러쓰고 귀에는 이어폰을 낀 채, 무언가를 홀짝홀짝 마시고 있었다.

여전히 그룹에서 소외된 느낌.

“…….”

삑. 커피머신에서 추출이 끝났다는 소리가 났다. 한율은 고개를 돌리며 시커먼 에스프레소를 들었다.

어스래빗 멤버들이 있는 자리로 돌아가자, 길우성이 사과패드를 보여주었다.

“써한, 이 뉴스 봤냐? 우리 8시 뉴스에도 나왔대.”

“그래?”

“그런데 너 손 괜찮냐? 직캠 보니까 떨어지는 조명이랑 네 손이 스쳐서 파란색 스파크 비슷한 게 튀었다고, 이프림들이 다 걱정하던데.”

말하면서 길우성은 커피를 들고 있는 한율의 손을 주목했다.

“안 닿았어. 멀쩡해.”

“그럼 다행이고.”

한율은 길우성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매니저에게 맡겨두었던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당당하게 민낯 셀카, 찰칵.

SNS 업로드.

[작위적인 에스프레소 설정. #민낯주의 #공항라운지]

-민낯이라고? 민낯이라고? 민낯이라고? 민낯이라고? 민낯이라고? 민낯이라고? 민낯이라고? 민낯이라고? 민낯이라고?

-태어나줘서 고마워♡ 지구토끼가 되어줘서 고마워♡

-설정 아니잖아 율아ㅎㅎㅎ

-민낯이 풀메한 나보다 백만 배 더 예쁘지만 사랑한다 율톢

-손 진짜 괜찮구나..는 율톢 손 크기에 치이고 갑니다.

-사랑해

-우리가 손 걱정하는 거 알구 일부러 손 나오게 사진 찍은 거??? 울 애긔애긔했던 꽃토끼가 언제 이렇게 컸어ㅠㅠ어엉ㅇ

-저 손으로 머리 쓰담쓰담 당하고 싶다

-[Park Garam]우리 서 복덩이ㅎ

ㄴ가람아..?

ㄴ복덩잌ㅋㅋㅋㅋㅋㅋㅋ맞말ㅇㅈ

-율아, 아부지가 예능국장님 멱살 잡았다는 거 사실이야?

-팬으로선 당분간 쉬면서 마음 추스르라고 하고 싶은데, 울 아이들 프로의식이 너무 강해

-SSS급 슈퍼율톢♡♡♡♡♡

-서한율 너 솔직히 말해. 인간 아니고 천사 맞지?

기다렸다는 듯이 실시간으로 달리는 댓글들.

한율은 가볍게 훑다가 포털사이트에 접속했다. 실검 1위가 [뮤직뮤직in칠레 사고]로 바뀌었다. [어스래빗 사고]는 3위.

[어스래빗, <락뮤닷>에서 무대 방송 최초 공개]

-잉? 칠레에서 하루도 안 돼서 날아왔다고? 이게 가능함?

ㄴ기사 본문 제대로 안 읽냐. 지난주에 미리 찍은 사녹이라잖아.

[어스래빗 16일 귀국, 예정대로 후속곡 활동 시작]

-나 같으면 방송국 놈들한테 정신적 피해보상 소송 걸고 배째라 병원에 드러누웠을 것 같은데

ㄴ열심히 일해서 빚 까야죠. 아이돌 빚이 최소 억 단위라는데

ㄴ서한율(20억대 아파트 소유자):???

ㄴ방송 취소가 쉽진 않을 거예요. 아이돌 음방 뛸 때마다 무대 세트 제작에다가 샵 예약한 것까지 다 걸려있어서;

-차남석은 연초부터 액땜 거하게 했네

-나 방금 웃긴 거 보고 옴ㅋㅋㅋ 원래 1부 마지막이 원제로였고 2부 시작이 원카운트였잖음? 그런데 사고로 원제로 순서가 2부로 밀리고, 어스래빗하고 원카운트 사이에 끼니까 원제로 팬들 지들 오빠 존재감 밋밋해졌다고 단체로 지랄발광중임ㅋㅋ

ㄴ빠순이들 처도랏나 진짜; 지들 오빠한테도 일어날 수 있었던 사고란 걸 생각할 뇌가 없??

ㄴ원제로한텐 별 감정 없는데 그 팬들 하는 꼬락서니 보면 걔네까지 싫어짐..

ㄴ잘 알지 못하면서 떠들지 마세요. 원래 1부 마지막 때 멤버들이 칠레 공연이 방송으로 나가는 날 생일인 멤버에게 특별한 메시지를 던질 예정이었습니다. 그런데 2부로 밀린 것도 모자라 원래 주어지기로 했던 무대 시간까지 잘려서 화가 난 겁니다.

ㄴ그러니까 타돌이 디질 뻔한 사고가 일어나서 재점검으로 공연이 밀리든가 말든가 그런 건 방송국 측 잘못이지 우리가 알 바는 아니다, 우리 오빠들 재롱부리는 시간 왜 뺏었냐 이 말 아님? 와, 쏘팬가?

ㄴ굳이 어스래빗 기사에 기웃거리는 것만 봐도 뭐

ㄴㅇㅈㄹ 팬들이 ㅇㅅㄹㅂ한테 열폭하는 거 하루 이틀인가

ㄴ열폭ㅋㅋㅋ 막 데뷔한 후배한테 앨범 판매량 밀린 게 누구? >>>ㅇㅅㄹㅂ<<< 풉

ㄴ다음, 팬들 단합 1도 안 되는 오합지졸 국민픽 아이돌

ㄴ원카운트가 아니라 큰일 날 뻔한 어스래빗 기사에 와서 지랄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구만 무슨.

ㄴ팬들만 기사 보란 법 있음? 어스 팬들 무논리 얼척없네

ㄴ팬들만 실드치란 법 있냐?

“…….”

왜 또 싸워.

한율은 속으로 한숨을 쉬며 다른 기사를 클릭했다.

* * *

한국 날짜로 1월 16일 새벽 5시. <뮤직뮤직 in 칠레> 출연팀 일부가 인천 국제 공항 입국장에 차례차례 모습을 드러냈다.

굉장히 이른 시간이었지만 입국장 앞에는 그들을 찍거나 보기 위한 사람들이 잔뜩 몰렸다. 연예 뉴스 전문 매체는 물론이고, 이례적으로 MBS나 SBC, 뉴스 전문 채널 로고가 붙은 카메라도 설치되었다.

아이돌들은 언제나 그렇듯, 본인과 다른 사람들의 안전을 위해 빠르게 걸음을 재촉했다. 어스래빗이 나갔을 땐 카메라가 일제히 이쪽을 향했다. 차카차카차칵.

“여기 봐주세요!”

공항 보안요원과 경호원들에게 제지당한 팬들은 목청껏 외쳤다.

“얘들아, 안 다쳐서 다행이야!”

“어스래빗 사랑해엑!”

걱정해줘서 고맙다는 작은 신호에도 더 크게 흥분하여 달려들 수 있기에, 멤버들은 경호원과 매니저의 보호를 받으며 입국장을 빠르게 빠져나갔다.

우르르. 어스래빗 슬로건을 들고 있던 팬들도 뒤를 쫓아왔다.

“후아….”

바로 앞에 대기 중이던 미니버스에 탑승, 문이 닫히자마자 멤버들은 좌석에 편히 몸을 맡겼다.

“이제야 한국에 돌아왔다는 실감이 든다….”

왕복하는 데에만 60시간 가까이 소요된 여정. 닷새 만의 귀국이었다. 오 팀장이 멤버들을 돌아보며 웃었다.

“다들 고생했습니다.”

어스래빗을 태운 차는 곧바로 MBS K <로얄K뮤직>으로 향했다.

한편 그 시각, <로얄K뮤직> 스튜디오 앞. 그곳엔 사전녹화 입장 인원 체크를 위해 모인 아이돌 팬들로 가득했다. 어스래빗 팬들은 막 체크를 마치고 슬슬 따뜻한 곳으로 이동하는 중.

“애들 무사히 귀국해서 여기로 출근 중이래요.”

“오빠들 몸 괜찮을까 모르겠네요. 비행기 오래 타는 것도 굉장히 피곤하다고 하던데….”

“그러니 더 힘이 나도록 크게 응원하자구욥.”

겨울의 캄캄한 새벽. 자칭 서한율 1호 팬 이아름은 추위를 이겨내기 위해 제자리에서 동동거리다가 걸음을 옮겼다. 팬 활동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친해진 일행과 함께.

“아, 언니들 혹시 그 영상 보셨어요? 바로 어젯밤에 어떤 너튜버가 올린 건데….”

올해 막 중학교에 들어간다는 어린 팬이 핸드폰에 너튜브를 띄웠다. 재생하려는 영상 썸네일은, 드라마 <하울링>에서 서한율이 차에서 기어 나오며 악에 받친 눈빛을 하던 바로 그 장면.

[어스래빗 서한율, 미스테리한 그의 정체! -그는 정말 파랑 요정인가?!]

어스래빗 팬들이 가장 잘 나왔다고 인정한 서한율의 프로필 사진이 뜨고, 너튜버의 담담한 내레이션이 자막과 함께 흘러나왔다.

[2019년 1월. 보이그룹 어스래빗의 서한율, 배우 서한율에 관한 미스테리한 이야기가 들려왔다.]

[사실 난 이 친구가 가순지 몰랐다. <객귀, 해>라는 옴니버스 공포 드라마를 보면서.]

SBC <객귀, 해>에서 서한율이 어머니를 찾아 헤매는 장면.

[와, 연기 ㅈㄴ쩌는 신인 나왔네?]

[심지어 곱상하게 잘생겼어, ㅆㅂ]

[라고 욕했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아이돌이란다.]

2016년 뮤닷 <보컬리스트 시즌3> 첫 출연 당시, 서한율과 차남석이 인사하는 영상.

[안녕하세요! 저희는!]

[WB래빗의!]

[꽃을 단!]

함께 머리 위로 세운 손을 토끼 귀처럼 까딱까딱.

[토! 끼! 입니다!]

영상이 그 장면에서 흑백으로 멈췄다.

거 토끼가 마법 좀 쓸 수도 있지

너튜버의 무미건조한 내레이션.

[자본주의 시장에서 살아남기 참 힘든 세상이다.]

[아무튼, 얘 좀 이상… 아니, 수상하단다.]

[다른 누구도 아닌 팬들이 한 말이다.]

[우선 서한율에 대해 간단히 알아보자.]

어스래빗 그린라이브 영상 콘텐츠에서 공개된 적이 있는 서한율의 어릴 적 사진이 떴다. 푹신한 쿠션에 앉은 한 살배기 어린아이가 창밖의 한강을 바라보는 사진이었다.

[서한율은 2000년 8월 30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현 KBC 시사교양국장 서석진이고, 어머니는 미인대회 출신에다 강남에 빌딩 여러 채를 소유한 건물주느님이시다. 와우.]

[초등학생 시절.]

서한율의 초등학교 졸업사진.

[동창들 증언으론 공부는 잘했는데 애가 좀 무뚝뚝하고 무심하고 잘 웃지도 않고, 같이 어울려 놀지도 않았다고 한다. 오로지 집, 학교, 학원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래도 유치하게 장난치는 또래 남자애들보다 어른스럽고, 힘든 일 하고 있으면 말없이 도와주고 쿨하게 사라지기도 해서, 여학생들에게 인기가 괴엥장히 많았다고 한다.]

[외모도 한몫한 것 같다.]

[아니, 아홉 몫은 한 것 같다.]

이번엔 중학교 졸업사진.

[중학교 때도 Ctrl+v였다고 한다. 그래서 서한율이 꽃토끼가 되었을 때 동창들 다 놀라 자빠질 뻔했다고 한다.]

<보컬리스트 시즌3> 꽃을 단 토끼 1차 예선 영상 댓글 캡처.

[-내가 초중 9년 내내 봤던 서한율 맞나? 혹시 이중인격이거나 영혼이 바뀐 거라면 다음 무대에서 당근을 흔들어줘.]

어스래빗 무대에서 서한율의 보컬 파트 영상.

[데뷔하고 몇 년째, 그는 당근을 흔들지 않고 있다.]

[아.]

토끼 귀가 기다랗게 늘어진 새하얀 잠옷을 입고, 커다란 당근 베개를 든 채 현타를 맞은 얼굴로 웃는 서한율. [Invitation card] 컴백 쇼케이스 영상 캡처본이었다.

[당근 베개는 든 적이 있다.]

[이제 본격적으로 팬들이 제보한 수상한 점을 하나씩 짚어보자.]

쿵. 강렬한 효과음.

썸네일에 나왔던 <하울링>의 장면과 함께 큼지막한 자막이 떴다.

[1. 푸른색으로 물든 눈.]

[2017년 4월 16일. 서한율이 소속된 보이그룹 어스래빗의 첫 번째 팬 사인회에서 찍힌 사진이다.]

팬들이 선물한 머리띠나 장신구를 달고 노래 부르는 서한율의 사진이 떴다. 푸르스름하게 반짝거리는 서한율의 눈이 천천히 확대되었다.

[솔직히 이 사진은 조금 애매하다. 조명이랑 눈 색이 같기 때문이다. 조명에 반사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팬들도 그냥 넘어갔단다.]

[그런데 2017년 11월 7일. 웬 정신이 해괴한 아이가 어스래빗 미니 팬 미팅을 난장판으로 만든다.]

[그때 찍힌 사진이다.]

아, 아아, 아아아….

공포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괴이한 BGM이 미약하게 깔렸다. 거세게 휘몰아치는 바람에 머리카락이 어지러이 휘날리는 서한율의 모습.

확대.

[눈이 또 푸르스르름름르음하게 물들어 있다.]

[타이밍이 공교로워서 이때 팬들 사이에서 잠깐 서한율 마법사 설이 돌았다고 한다.]

[서한율이 분노의 바람을 일으켰다고.]

쿵. 흑백으로 변한 섬네일과 다음 자막.

[2. 텍사스 사투리.]

[서한율은 드라마 <하울링>에서 텍사스에서 뉴욕으로 이사 왔다는 설정의 ‘은호’ 역을 맡았다. 그래서 은호는 텍사스 사투리를 썼다.]

드라마 <하울링>에서 서한율이 영어로 대사하는 모습.

[사실 난 영포자라 뭐가 다른 건지 모르겠다. 그냥 사투리라니까 아, 그런가보다 말았다.]

[그런데 실제로도 서한율은 텍사스 사투리를 쓴다고 한다.]

뮤닷 <바다의 백조> 미국인의 인터뷰 영상과 자막.

[오마갓, 텍사스 토박이인 우리 할아버지와 발음과 억양이 똑같아요!]

잠시 침묵하던 내레이션이 말을 이었다.

[사실 이게 팬들이 가장 의아해하는 대목이다.]

[왜냐하면 서한율은 태어나서 텍사스를 한 번도 가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뭐지?]

[그런데 저엉말 현지인처럼 잘한다.]

어스래빗 콘텐츠 <깡충깡충 영어극장>에서 서한율이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장면이 흘러나오고.

[혹시 서한율 주변에 텍사스와 연고가 있는 사람이 있는지 살펴보았다.]

[없었다.]

[강남 빌딩 건물주느님 어머니가 잠깐 어렸을 때 발레 공부를 위해 유학을 떠난 적이 있지만, 미국이 아니라 러시아였다고 한다.]

중얼거리는 내레이션.

[뭐야 대체? 인생 2회찬가?]

[팬들도 물었다. 어디에서 텍사스 영어를 그렇게 찰지게 배웠냐고.]

서한율이 방송에서 미소 지으며 한 말이 적절한 편집으로 들어갔다.

[비밀이에요.]

쿵.

[3. 신들린 활 솜씨.]

서한율이 아스대에서 연속으로 엑스텐을 명중, 카메라를 박살 내는 장면이 빠르게 재생되었다. MC 정태현이 눈물을 흘리는 사진 편집과 함께.

[이건 뭐 전 국민이 다 아는 유명한 이야기니, 패스한다.]

쿵.

[4. 치킨을 싫어한다.]

쿵.

[5. 동료를 구한 푸른 빛?]

[최근에 일어난 일이다. KBC <뮤직뮤직 in 칠레>에서 천장 조명 하나가 떨어지는 아찔한 사고가 발생했다. 하마터면 어스래빗의 잘생긴 차, 남석이가 큰일 날뻔했다. 그걸 옆에 있던 서한율이 구해줬다.]

잡음이 많이 들어간 현장 관객의 직캠. 조명이 떨어지는 순간, 한율이 차남석의 어깨를 잡아 제 쪽으로 감싸듯 끌어당겼다.

[보았나?]

[천천히 다시 돌려보면.]

조명이 떨어지는 순간으로 되돌아간 영상이 느릿느릿, 확대되어서 재생되었다. 서한율이 차남석의 반대쪽 어깨를 잡아 끌어당기던 그 순간, 떨어지던 조명과 서한율의 손이 가장 가까워졌을 때 영상이 뚝 정지되었다.

조명과 서한율의 손 사이로 희미하게 번지는 푸른빛.

[또 푸른색이다.]

[정말 수상하다.]

[서한율 그는 대체.]

쿵.

드라마 <객귀, 해>에서, 덜컹덜컹 거세게 흔들리는 창에 놀라 돌아본 서한율이 구시렁거리는 장면.

[어우씨, 깜짝이야.]

너튜버의 마무리 멘트.

[정체가 뭘까.]

[-끝-]

영상엔 벌써 댓글 여러 개가 달려있었다.

-거 토끼가 마법 좀 쓸 수도 있지.

-모아놓고 보니 신기하긴 하네요ㅎㅎ

-신들린 연기실력이 빠졌습니다, 선생님.

-중간에 ‘4.치킨을 싫어한다’ 뭔데요ㅋㅋㅋㅋ

-저 아는 분이 한율이 유치원 선생님인데, 유치원에서도 인기가 많았다고 합니다. 여자애들끼리 서로 한율이 짝하겠다고 다투기도 했대요^^

-그냥 우연에 우연이 겹친 거지만, 그래도 재밌게 잘 편집하셨네요. :)

‘객관적으로 보면 수상하기는 하네.’

<로얄K뮤직> 어스래빗 대기실.

한율은 생방송이 끝난 후 SNS 댓글에 달린 팬의 제보로 해당 영상을 보았다. 하지만 진지하게 해명할 수준도 아니고 그럴 의무도 없는 일이기에,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넘겼다.

“한율아.”

차남석과 조용히 얘기를 나누던 오 팀장이 말했다.

“너도 내일 같이 가자.”

“전 괜찮아요.”

“가볍게 이야기 나눈다고 생각하면 돼. 부담가질 필요 없어.”

해외 스케줄에 이어서 음악방송까지 따라온 오 팀장은, 멤버들에게 내일 심리 상담센터에 가자고 설득 중이었다.

“정말로 괜찮아요. 부모님 집에도 들러봐야 해서요.”

완곡한 한율의 거절에, 오 팀장은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한율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가 그러고 싶다면.”

“와, 너무들 하네.”

핸드폰으로 인터넷 기사를 보던 박가람이 툴툴거렸다.

“후속곡 활동 지난주부터 시작했는데, 이번 주부터 시작했다고 오보 낸 곳이 한두 곳이 아니야.”

“인터넷 언론사들, 조회수 잘 나온다 싶으면 다른 기사 진위 확인 안 하고 복붙하는 게 어디 하루 이틀이냐….”

그날 밤. 숙소로 돌아온 어스래빗 멤버들은 짐을 거실에 방치한 채 아무 데나 널브러졌다.

“보일러 바닥… 따뜻하다….”

“누가 나 이불 좀 갖다줘…. 나 그냥 여기에서 잘래….”

“써한, 나 따뜻한 레몬생강차 한 잔만….”

한율은 냉장고에서 꺼낸 2리터 생수를 길우성 옆에 놓고, 자신의 캐리어를 방으로 옮겼다.

짐 정리와 허브 돌보기, 목욕을 끝내고 다시 거실로 나왔을 땐 박가람과 길우성만 그대로 남아있었다. 두 사람의 캐리어도.

박가람은 소파에 누웠다가 그대로 잠든 모양새였다. 길우성도 여전히 대자로 뻗어 있었지만, 조금 전 가져다 놓은 생수는 반으로 줄었다.

“서한율.”

차남석이 방에서 나오며 한율을 불렀다.

“너 다음 주에 시간 있냐? 스위스 가기 전에.”

“왜요?”

“할아버지가 너 밥 한번 먹이고 싶다고 하셔서.”

“다음 주 월요일이나 화요일, 아무 때나 괜찮아요.”

“그럼 월요일 점심 어때?”

“네, 좋아요.”

차남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뒤늦게 길우성이 손이 뻗었다.

“나도 남석 씨네 집밥….”

한율은 주방에서 자신이 마실 레몬 생강차를 타며 길우성에게 말했다.

“가람이 형 저대로 자면 컨디션 나빠지니까 네가 챙겨.”

“엉…. 아니, 왜 날 시키세요?”

다음 날 아침. 한율은 오래간만에 차 시동을 걸었다.

먼저 간 곳은 세차장. 숙련된 솜씨로 차를 깨끗하게 만들어주는 직원을 유심히 관찰하며, 세차 순서와 방법을 머릿속에 새겼다.

“세차하는 걸 보다 보면 내 마음도 후련해지는 것 같아.”

한율과 나란히 세차장 휴게실 앞 의자에 앉은 강보배가 말했다. 라이언도 고개를 끄덕.

“반짝반짝 변하는 거 기분 좋아.”

두 사람은 세차장에 들렀다가 집으로 갈 거라는 한율의 이야기에, 세차하는 걸 구경하고 싶다며 함께 나섰다. 나중에 음향 장비 전문점 앞에만 내려 달라고.

바쁜 스케줄 사이에 생긴 짧은 휴일이지만, 이렇게나마 잠깐이라도 숨을 돌리고 싶은 모양이었다.

“형은 면허 언제 딸 생각이에요?”

“조금 여유가 생기면 그때 따려고.”

“난 바이크 타고 싶어.”

한율과 강보배가 동시에 라이언을 말렸다.

“바이크는 안 돼. 위험해.”

“안 돼요, 위험해요.”

“…응.”

두 사람을 음향 장비 전문점 앞까지 태워다 준 후에는 부모의 집으로 향했다. 모친은 한율을 꼭 끌어안고 등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잘했어, 율아. 정말 잘했어.”

“운이 좋았어요.”

“남석이 구한 것도 그렇고…. 관객들에게 조명에서 떨어지라고 차분히 안내한 거 말이야.”

한율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관객에게 한 주의 멘트는 제작진에게 지시받은 것으로 하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대표님에게 들으셨어요? 아니면 팀장님?”

모친이 고개를 저었다.

“방송국에서 <뮤직뮤직 in 칠레> 제작진과 스태프들 상대로 사고에 관한 경위를 조사하던 중에, 현장에 있었던 스태프 중 몇 명이 사실대로 말했대. 율이 네가 관객들을 주의시킨 게 제작진이 그러라고 지시한 게 아니라, 율이 네가 임의로 꺼낸 말이었다고.”

“아….”

“정말 잘했어, 율아.”

당신의 자식을 자랑스럽게 바라보는 따뜻한 눈빛. 한율은 멋쩍게 미소 지었다.

모친과 함께 점심을 먹는 동안엔 이번 활동, 칠레를 다녀오는 동안 있었던 일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그 후엔 고양이들과 놀면서 SNS에 올릴 사진도 여러 장 찍었다.

“박스는 미리 열지 마. 고양이랑 털 들어가.”

“네.”

한율은 자신의 방에서 다음 달 플리마켓에 내놓을 만한 옷과 물건을 꺼냈다. 그러나 개인 침실에다 드레스룸까지 있는 현재 숙소로 옮기고 나서부턴 그곳에다 옷과 물건을 두다 보니, 여기에선 챙길 만한 게 별로 없었다. 작년 플리마켓 때 많이 내놓기도 했고.

“이 코트는 어때? 율이 네 키가 훌쩍 커서, 다시 입기엔 조금 짧아진 것 같은데.”

“작년보다 1, 2cm만 자랐는데요?”

“크긴 컸잖니.”

그래도 정리하다 보니 한 박스 정도는 나왔다. 주로 친척들이 해외에 다녀오며 선물로 사 왔던 신발 종류로. 한두 번 신었던 것도 있고, 디자인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아 태그도 떼지 않은 새 상품도 있었다.

“그럼 이만 가볼게요.”

“응. 운전 조심히 하고.”

와옹. 먀아.

플리마켓에 내놓을 물건이 담긴 박스는 차 트렁크에, 모친이 새로 담근 레몬 생강청은 뒷좌석에 실었다.

이번에 향한 곳은 회사나 숙소가 아닌, 심리상담센터.

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길우성과 이건우, 차남석을 태웠다. 그들을 여기까지 데려다 준 회사 차량이 드림래빗 스케줄에 투입되어, 한율이 태우러 오겠다고 했다.

“어서 오시게, 기사 양반. 모처럼이니 드라이브나 즐기는 건 어떤가?”

“기사님, 전 WB래빗 엔터테인먼트까지 부탁드릴게요.”

“난 숙소.”

한율은 세 사람이 안전벨트를 매는 걸 확인하곤 차를 움직였다.

“숙소로 통일할게요.”

한율에게 감사의 박수

[<뮤직뮤직 in 칠레> 더 큰 사고 방지, 서한율 덕분이었다!]

[KBC가 ‘<뮤직뮤직 in 칠레> 사고조사위원회’를 구성해 내부 조사를 진행했다. <뮤직뮤직 in 칠레> 사고는 공연 도중 발생한 미진으로 인해…(중략).

진실은 사고 당시 현장에 있었던 스태프 일부의 증언으로 드러났다. 그들은 서한율이 공연 도중 흔들리는 조명 트러스를 주목하고 경고한 건 제작진의 지시가 아닌 서한율의 임의 판단이었으며, 사고에 대한 비난이 거세질까 두려워한 제작진 측에서 어스래빗 측에게 ‘그런 지시를 받은 걸로 해달라’라고 부탁하는 걸 들었다고 밝혔다.

이에 KBC는 당시 공연 총책임자였던 PD를 비롯하여…(중략).]

-잘 가라.

-외쳐 갓한율!!!!!!!!!

-조금 의아하기는 했다. 무대에서 인사 도중 어떻게 지시를 전달하냐고ㅋ 스케치북? ㅋㅋㅋㅋㅋ

ㄴ님.. 가수들이 귀에 꽂는 인이어에 지들 노래랑 목소리 듣는 기능만 있는 게 아니예요...

ㄴ내가 그런 것까지 알아야 함?

ㄴ???? 뭐지

-그나마 서한율이라 그런 돌발 멘트가 가능하지 않았나 싶다. 아빠가 본사 국장이니, 나중에 별일이 안 생겨도 크게 혼나지 않을 것 같아서ㅇㅇ

-뮤뮤PD 방청 갈 때마다 하는 꼬락서니 보고 ㅈㄴ 쪼잔하다 싶긴 했는데ㅋㅋㅋ 지들 욕 덜 먹으려고 스무 살짜리 애 판단을 홀랑 가로채려다 들켰네ㅋㅋㅋㅋ

-서한율 직캠 보셈. 서한율 무대로 나왔을 때부터 카메라에 안 찍힐 때마다 흔들리던 조명 트러스 쪽 주시하고 있음ㅋ

ㄴㄷㄷㄷ;

-스태프 하나가 조명 구조물 흔들리는 거 보고 당장 중단해야 하는 거 아니냐 심각하게 말했는데, 그땐 1부 끝나고 점검하자 미루다가 서한율이 대놓고 무대에서 말해서야ㅋ 서한율이 관객이랑 멤버만 살린 게 아니야. 그대로 진행했다가 더 큰 일 났어 봐라. 내부 징계가 뭐냐? 바로 깜빵행이었어

ㄴ그래놓고 본인들 지시로 해달라고 부탁까지 했다는 게 괘씸하네요. 양심 어디?

-ㅆ1발 당장 영화 <고양이 난로> 티켓 20장 끊는다!!!

ㄴ그거 극장에서 내려간 지가 언젠데ㅡㅡ

-잘하긴 했는데, 부탁한다고 들어준 거 보면 ㅋ? 싶음.

ㄴ퍼플아워 처돌이님, 요즘 댓글모음 비공개 설정 사라졌어요ㅎ

한율이 모친에게 들은 이야기는 다음 날인 18일, 기사로 나왔다. 그리고 한율에겐 KBC ‘<뮤직뮤직 in 칠레> 사고조사위원회’에서 잠깐 KBC로 와 줄 수 있냐는 연락이 왔다. 당사자에게 사고 당시에 있었던 일을 직접 듣고 싶다며.

“MBS 스케줄 도중에 KBC에 놀러 가는 아이돌이 있다?!”

“놀러 가는 걸로 보이냐?”

“어. 거울을 보세요, 선생님.”

사녹을 끝내고 대기실에서 편한 옷으로 갈아입던 한율은, 길우성의 말대로 거울을 힐끗 봤다가 입을 다물었다. 희미하게 핑크빛이 도는 밝은 금발에다 진한 무대 메이크업, 반짝거리는 피어싱과 푸른색 컬러 렌즈.

참 화려했다.

“…….”

한율은 주섬주섬 피어싱과 컬러 렌즈를 뺐다. 메이크업은 나중에 생방송 무대를 뛰어야 해서 지우지 않았다.

오 팀장이 한율의 가방과 외투를 챙겼다.

“한율이랑 KBC에 잠깐 다녀올 테니까, 다들 미니 팬미팅 잘하고 있어요.”

“네에.”

잠시 후, 한율은 오 팀장과 함께 KBC 신관에 도착했다. 예능 토크쇼 <목톡톡> 사전미팅 때 온 이후로 세 번째 방문이었다. 지나가던 이들의 시선이 한 번씩 한율을 향했다.

“어서 오세요. WB래빗 엔터의 오동식 팀장님과 서한율 씨 맞으시죠?”

1층 로비에는 ‘<뮤직뮤직 in 칠레> 사고조사위원회’에서 나온 직원이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쪽으로.”

그를 따라간 곳은 여섯 사람이 모인 한 회의실이었다. 그중엔 부친인 서석진 국장과 예능국장도 있었다.

한율은 들어가자마자 깍듯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어스래빗의 서한율이라고 합니다.”

“WB래빗에서 나온 오동식 팀장입니다.”

서 국장을 제외한 사람들이 일어났다.

“어우, 부모님 닮아서 아주 훤칠하네. 편히 앉아요.”

“바쁜데 여기까지 불러서 미안해요, 한율 씨. 몇 가지만 짧게 묻고 끝낼게요.”

“그 전에 마실 것 좀 드릴까요?”

“자, 이것도 들고.”

“감사합니다.”

그들은 친절하게 이것저것 챙겨주었다. 잔뜩 화가 난 얼굴로 팔짱을 낀 채 앉아있는 서 국장의 눈치를 살피며.

“국장님도 조사위원회 구성원이세요?”

부친이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네 부모 자격으로 온 거다. 하마터면 머나먼 지구 반대편에서, 안전 불감증에 걸린 어떤 사람들에 의해, 큰 사고를 겪을 뻔한 아들의, 부모 자격으로.”

말을 뚝뚝 끊는 그의 시선 끝엔 조금씩 어깨가 움츠러드는 예능국장이 있었다.

“업무 시간 아니세요?”

“점심시간이란다, 아들아. 밥은 먹었니?”

“네, 먹었어요.”

“그래.”

“그럼 전 잠깐 나가 있겠습니다.”

예능국장이 흐릿한 미소를 지으며 회의실에서 퇴장했다.

조사는 앞서 들은 바대로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한율은 당시 조명 트러스의 문제를 처음 인지하게 된 경위와 관객에게 주의를 당부하게 된 이유에 대해 솔직히 말했다.

‘정말로 PD가 자신들이 지시한 걸로 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나?’라는 질문에도 그렇다고 대답했다. 이왕 다 드러난 거, 계속 거짓말로 감싸줄 의무는 없으므로. 양심적으로 솔직히 증언한 현장 스태프들의 입장도 있고 말이다.

이에 한 사람이 ‘그들의 잘못을 일부 덮어주는 행위라는 걸 인지하지 못했냐’라는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기는 했으나, 한율은 덤덤히 거짓을 섞어 대답했다.

“미처 거기까진 생각 못 했어요. 공연은 무사히 마쳤지만, 사실 PD님에게 그 부탁을 들었을 땐 저도 경황이 없었거든요. 그 자리에서 ‘싫어요’라고 대답하면 더 피곤해질 것 같은 느낌도 들었고요. 빨리….”

한율은 한 호흡 쉬고 나서 말을 이었다.

“안전하고 조용한 곳으로 가서 쉬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거든요.”

“아….”

“이제 막 스무 살밖에 되지 않았는데 큰 사고를 당할 뻔했으니, 이성적인 사고가 제대로 안 될 법도 하죠. 이해합니다.”

“한율 씨 잘못이라고 따지려고 한 질문은 아니었습니다. 마음 상했다면 미안해요. 세세하게 기록으로 남겨야 하는 사안이라.”

한율은 살며시 미소 지었다.

“괜찮습니다.”

반대로 부친은 속상한 얼굴로 한숨 쉬었다.

조사가 다 끝난 뒤, 부친은 주차장까지 한율과 오 팀장을 배웅했다.

“대입 선물로 뭐 받고 싶은지는 아직 안 정했고?”

“졸업 선물로 스위스 항공권 끊어주셨잖아요. 괜찮아요.”

“별개다.”

“…생각해볼게요.”

“그럼 가서 일 잘하고.”

서 국장이 한율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네. 가볼게요, 아버지. 수고하세요.”

“그래.”

“가보겠습니다.”

…차칵차칵.

그때 어디선가 이쪽을 향한 듯한 셔터 소리가 작게 들렸다. 한율은 못 들은 척 태연히 차에 탔다. 사생 스토커가 한 명 더 늘었구나,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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