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1월 19일 오후. 광고 모델로 활동 중인 팀버거 브랜드 팬 미팅을 하러 갔던 차남석, ‘아이돌의 보이는 라디오’에 출연했던 랩&퍼포먼스 멤버들이 회사 연습실로 돌아왔다.
“남석, 개인 팬 미팅 처음이었잖아. 어땠어?”
“혼자 대기하는 게 심심했던 것 빼곤 괜찮았어요.”
본래라면 오늘 <뮤직뮤직 in 칠레>편이 방송될 예정이라, 이번 주 <뮤직뮤직> 녹화는 애초부터 없었다. 그래서 어스래빗도 브랜드 팬 미팅이나 보이는 라디오 스케줄을 잡았다.
결국 사고 문제로 관계자들이 조사와 징계를 받으며 칠레 편 방송이 한 주 미뤄졌지만, 음악방송도 사전 준비에 시간이 오래 걸리는 터라 이번 주는 아예 결방 결정이 났다.
“우리야 칠레 편이 <뮤직뮤직>에서의 이번 앨범 활동 마지막 무대였으니 상관없지만, 다음 주 <뮤직뮤직>에 출연하기로 한 팀들은 조금 억울하겠다. 방송이 한 주 밀린 탓에 스케줄 하나가 날아간 거잖아.”
늘 <뮤직뮤직>이 시작되던 시간. 안무 연습을 하다가 TV를 켜 본 멤버들은, 결방된 음악방송 대신 재방송되는 예능 프로그램을 보며 한숨 쉬었다.
“에휴….”
“그중 제일 억울한 건 다음 주 컴백하는 팀이 아닐까?”
“ACCOM이랑 블루액션?”
우웅. 냐옹, 냐옹.
“……?”
그때 멤버들의 핸드폰이 동시에 울렸다. 매니저들과 어스래빗 멤버들이 함께 있는 단톡방에 오 팀장이 톡을 올렸다.
-[어스래빗에게 단체 광고 섭외가 들어왔습니다.]
처음으로 들어온 단체 광고 섭외 소식.
한율과 차남석을 제외한 멤버들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해당 톡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진짜로?”
우웅. 오 팀장이 다시 톡을 올렸다.
-[두 건입니다.]
이건우와 길우성이 동시에 중얼거렸다.
“대에박.”
어스래빗에게 들어온 단체 광고 섭외는 아기자기한 동물 캐릭터들이 나오는 모바일 게임과 신발이었다.
“얄궂게도 칠레에서의 사고가 이목을 끈 것 같습니다. 광고주 쪽에서 말하기를, 뉴스와 인터넷에서 사고 소식을 접하며 자연스럽게 여러분에 대해 알게 되고, 앞으로도 잘 될 팀이란 느낌을 받았다고 하더군요. 큰일을 당할 뻔하고도 의연하게, 프로답게 다시 무대에 서는 모습도 무척 인상 깊었다고요.”
멤버들은 당시 프로 아니냐며 무대에 서겠다고 말했던 차남석을 바라보았다. 차남석이 씩, 조금은 뻔뻔해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다들 내 덕인 줄 알아요.”
“엄연히 따지면 네 생명의 은인 덕분이지.”
“고맙다, 서한율.”
“네.”
“한율에게 감사의 박수.”
짝짝짝. 심심한 박수 시간이 이어졌다.
단체 광고 말고도 차남석에게는 의류 광고, 한율에게는 공익 광고와 홍삼 광고 섭외가 들어왔다. 오 팀장은 클라이언트 측과 계약 조건을 맞춰보고 구체적인 내용이 나오면 그때 말해주겠다며 말을 아꼈다.
“그리고 내일 새벽, 이번 앨범 활동 마지막 스케줄인 에 출근해야 하잖습니까. 오늘은 이만 퇴근하세요.”
“네! 수고하셨습니다!”
사무실을 나가며 길우성과 박가람이 어깨춤을 추었다. 들썩들썩.
“광고, 광고, 단체과앙고오!”
“빨리 찍고 시잎~다아아~!”
“복도에서 노래 부르지 마.”
다음 날 새벽, SBC 스튜디오 앞엔 여느 때보다 많은 팬이 찾아와 멤버들을 격려했다.
“한 달 넘게 수고했어, 얘들아!”
“마지막까지 파이팅!”
민낯에다 마스크, 모자를 눌러쓴 멤버들은 팬들에게 머리 위로 크게 하트를 그리거나 손하트를 날리며 안으로 들어갔다. 차남석은 자신의 슬로건을 든 팬에게 성큼성큼 다가가, 어스래빗이 미리 준비한 역조공 선물을 턱하니 건넸다.
“사이 좋게 나눠 가져요. 싸우지 말고.”
팬들이 발을 동동 구르며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 고마워! 잘생겼다, 차남석! 사랑해!
곧 SNS와 커뮤니티 사이트 어스래빗 게시판엔 자랑 인증이 올라왔다.
[지구톢이 마지막 음방 기념(?) 깜짝 역조공 토끼 손목 쿠션! 애들처럼 완전 졸귀ㅠㅠㅠㅠ #차남석목소리대박 #사이좋게나눠가져요싸우지말고]
아침엔 어스래빗 관련 기사 세 건이 메인에 올라왔다.
[어스래빗 차남석, 팀버거 팬 미팅 훌륭히 소화]
[‘설맞이 WB래빗 플리마켓’ 입장 응모 내일부터]
[어스래빗 서한율, 올해 플리마켓엔 신발 위주 기부(feat.한정판)]
[어스래빗 서한율이 올해 ‘설맞이 WB래빗 플리마켓’에 내놓을 물품을 어젯밤 자신의 개인 SNS에 공개했다.
(사진=서한율 개인 SNS)
2017년 크리스마스 기념 플리마켓에서도 고가의 프라모델이나 개봉 안 한 게임기, 의류 등을 내놓았던 서한율은…(중략).
참고로 서한율의 신발 사이즈는 280이다.]
-신발 사이즈까지 친절히 알려주는 기자 센스ㅋㅋㅋㅋㅋ
ㄴ기사에 사진에 나온 신발 브랜드랑 가격까지 다 적은 거 봐요ㄷㄷ; 특히 한정판 신발 소개는 왜 이렇게 자세한 건데ㅋㅋㅋ
ㄴ기자도 노리는 거지ㅇㅇ
-현재 리셀가 4백만, 3백만 원짜리 한정판 신발이 두 켤레나 보이는데요, 형님들.
-신발 왤케 많냐
-입장 응모 어디에서 해요?
ㄴ아직 안 열렸습니다.
-구석에 발렌티ㄴ 6백만 원짜리 코트도 보임.
-저거 판 돈 전부 기부하는 거예요?
ㄴ네.
ㄴㄷㄷㄷ
-무조건 간다. 무조건 뚫고 만다.
-작년엔 항공모함 프라모델로 사람을 애타게 만들더니
-보증금 100에 월세 30짜리 곰팡내 나는 지하 원룸에서 이걸 보는 나 자신이 정말 초라해진다...
ㄴ다음 생을 노립시다ㅜㅜ
-나 저 프라ㄷ 워커 진짜 갖고 싶었던 건데ㅋ 싸게 파나?
-부탁하건대, 어스래빗 여성 팬분들은 응모를 자제해주세요. 이번 플리마켓은 저 신발들을 쟁취하기 위한 남자들의 치열한 전장이 될 것입니다.
잠깐 멀리 드라이브 좀 갈래요?
해외 스케줄을 위해 공항으로 이동 중인 스타믹스의 차 안.
한율의 기사를 본 에이플이 감탄했다.
“얜 플리마켓에 내놓는 물건만 보면 우리랑 비슷한 연차 같아.”
“개인 인지도는 나 훌쩍 제친 지 오래야.”
“뿌듯해하는 유지헌 미소 보소. 같은 팀 동생 기사에 좀 그렇게, 어? 좀, 어?”
“지헌이 형이 서한율 편애하는 게 어디 하루 이틀이야?”
조수석에 앉은 JE가 그들을 돌아보았다.
“드라마 끝난 지 한참이 지났는데, 아직도 서한율 보고 ‘우리 동생’ 이러잖아.”
“서한율을 굳이 숙소까지 데려와서 축하선물 준 사람이 누구더라?”
“…….”
지헌이 놀리는 어투로 받아치자, JE는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맞아. 손지은 저거 초반엔 서한율 느낌 안 좋다고 뭐라 그러지 않았어? 겉으론 생글생글 웃는데 눈빛이 은근히 싸하다고.”
“에이플, 기억력 좋다?”
“나도 대본 외우는 남자야, 이거 왜 이래?”
“그땐….”
JE가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그래, 그땐 내 촉이 좀 맛이 갔었다. 됐냐?”
“됐냐? 한 살 위 형한테, 됐냐?”
“그나저나 지은이 너 다음 주 뮤뮤 스케줄 취소됐다면서. 어떡하냐, 혼자 심심해서?”
연차와 인지도가 쌓일수록 대부분의 아이돌그룹은 개인 활동이 많아진다. 데뷔 5년 차인 스타믹스도 예외는 아니었다. 지헌은 배우 활동을 병행한 지 오래되었고, 다른 멤버들도 드라마나 뮤지컬, 예능 고정 출연, 보이는 라디오 진행자 등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JE도 몇 년째 <뮤직뮤직> MC로 활약하고 있으나, 고정 스케줄은 그것 하나뿐이었다.
“하필이면 다들 이런저런 일로 바쁠 때.”
“혼자 있으면 조용하고 좋지 뭐.”
“어디 잠깐 놀러라도 다녀와. 후배들 연습하는 거라도 봐주든가.”
“한율이넨 다음 주에 알프스 가서 패러글라이딩한다던데…. 부럽다.”
“알프스?!”
에이플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대박이다, 걔네. 벌써 정산받나?”
“그건 모르겠는데, 한율이랑 우성이랑 건우. 이 셋이서만 간대. 다른 애들은 스케줄이랑 곡 작업 때문에 못 가고.”
“어쨌든 부럽다. 그런 여행도 시기 한번 놓치면 계속 못 가잖아. 걔네 이제 더 빵 떠서 지금보다 바빠질 텐데.”
“…….”
지헌이 JE를 향해 말했다.
“이번 주 목요일에 출국해서 일주일 안에 돌아온다더라. 지은이 너도 같이 놀러 갔다 오든가.”
“내가 거기에 왜 끼어.”
“너 스카이다이빙 해보고 싶다며. 스카이다이빙은 아니지만, 하늘 잠깐 나는 건 비슷하지 않아?”
운전하던 매니저가 JE를 힐끗 한번 보더니, 룸미러로 지헌을 살폈다.
“왜 애를 다른 팀 애들이랑 해외로 보내려고 그래.”
“형, 지은이가 친하게 지내는 다른 연예인 본 적 있어요? 우리랑 유린이 말고.”
“어?”
곰곰이 생각에 잠겼던 매니저가 산뜻하게 대답했다.
“없네?”
“…….”
JE가 조금 상처받은 얼굴로 매니저를 쳐다보는 가운데, 지헌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서 그래요.”
* * *
SBC 생방송을 마치고 돌아온 회사. 어스래빗 멤버들은 메이크업도, 무대 의상도 벗지 않은 채 2층 회의실에 모여서 라이브 방송을 시작했다.
[어스래빗-☆Jump Up! 활동 마무리 기념 라방☆]
“Jump Up, 어스!”
“래빗!”
“안녕, 이프림!”
“드디어 오늘, 1월 20일! 세 번째 EP 앨범 [Jump Up]의 공식 활동이 끝났습니다. 박수!”
짝짝짝. 손뼉을 치며 자축한 멤버들은 서로 악수했다.
“수고했다, 얘들아.”
“다들 이번 앨범 활동도 수고하셨습니다.”
“이프림 분들도 우리 챙겨주느라 고생 많이 하셨죠.”
-했다 마음고생
-아니양ㅠㅠ
-이번 앨범 활동 시작할 땐 미자였던 애들이 스무 살 성인이 되는 걸 실시간으로 목격
-고생은 너희가 했지
-라방 해줘서 고마워ㅜㅜ 음방 무대도 정말 좋지만, 너희들 이야기도 듣고 싶었어
접속하자마자 반갑게 인사를 건넨 팬들은 곧 멤버들의 심신 안부를 물었다. 칠레에서의 사고 때문이었다. 차남석은 환하게 웃으면서 괜찮다고,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소매를 걷어서 팔근육을 보여주었다.
“다친 곳 하나 없이 정말 멀쩡합니다.”
-누가 우리 애한테 이런 식으로 대답하는 법 가르쳤어ㅡㅡ 나와♡
-(심장 멈춤)
-이렇게 훅 들어와서 심장 때리기 있음?
-차남석 야 차남석
팬들은 상당히 좋아했다.
“음….”
핸드폰으로 올라오는 톡을 보던 이건우가 고개를 들었다.
“내일부턴 뭐 할 거냐고요?”
“일단 난 내일도 라이브 해. 할 거예요.”
-이프림 밖에 모르는 라욘♡
-너희들 식스팩 내기한 거 안 까먹었지? ㅎㅎ
-가람아 헬스 가자!!!
-맛있는 거 잔뜩 먹으면서 일단 푹 쉬자 얘들아ㅜㅜ
“아, 맞다. 식스팩 내기!”
“그런데 그거 제일 늦게 완성하는 사람이 지는 거지?”
“응.”
-저 의미심장한 웃음 뭔데
-가람이 갑자기 음흉하게 웃는다.
-박다람이 뭔가 계획 있는 듯?
의아해하는 팬들과 달리 멤버들은 박가람이 웃는 이유를 단번에 파악했다.
박가람이 한율과 길우성을 차례로 가리켰다.
“제가 얘네 둘은 이깁니다. 이길 자신 있어요. 후후….”
한율과 길우성이 이건우와 함께 스위스로 놀러 갔을 때, 미리미리 빡세게 운동해서 제쳐놓겠다는 선언.
“아, 그러고 보니.”
한율은 아무렇지 않게 주제를 바꿨다.
“내일, 드라마 <별☆일없는 집>이 일본 TV 채널에서 정식으로 방영된대요. 일본에 계신 이프림 분들, 많은 시청 부탁드릴게요.”
-한율이 완전 아무렇지 않게 가람이 선전포고 무시했엌ㅋㅋㅋㅋㅋ
-가람이ㅋㅋㅋ
-분노한 박다람이 표정ㅋㅋㅋㅋㅋ
-가람이 눈 진짜 크다ㅋㅋㅋ
-율톢에겐 깃털보다 가벼워 타격 1도 없는 박다람이 선전포고
-ㅋㅋㅋㅋㅋㅋㅋㅋ
-그러지 마 다람아 진짜 하찮은 형 같잖아ㅋㅋㅋㅋ
한 시간에 걸친 평화로운 라방을 끝내고 나선 매니저의 차를 타고 숙소로 돌아갔다.
차남석은 내일 한율과 조부의 집으로 간다며 멤버들에게 사과했다.
“미안해요. 사실은 할아버지가 멤버 전부 데려오라고 했지만, 그러면 할아버지가 힘들 것 같아서요.”
“괜찮아. 남자 8명이 먹을 밥 준비하는 게 어디 보통 일도 아니고. 한율이 차 타고 가는 거지?”
“네.”
“그런데….”
강보배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갔다가….”
“없을 거야.”
주어는 말하지 않았지만, 차남석은 강보배의 우려를 읽고 대답했다. 강보배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조심히 갔다 와.”
길우성이 중얼거렸다.
“나도 남석 씨네 집밥 궁금한데.”
“…….”
차남석이 별 반응이 없자, 다시.
“나도 남석 씨네 집밥 궁금한데!”
“…….”
“남석이 고민한다.”
“막내도 데려가서, 밥값으로 청소라도 시켜.”
차남석은 작게 한숨 쉬었다.
“그래, 길우성 너도 가자.”
“흐.”
다음 날 정오.
한율은 차남석, 길우성과 함께 남양주로 향했다.
“집이 좀 좁아. 그래도 이해해라.”
“괜찮아요.”
차남석이 어릴 적부터 조부와 살았다던 집은 남양주 시내와 조금 떨어지고, 오래된 단독주택이 모여있는 작은 동네에 있었다.
철컹, 끼익. 차남석이 자신의 키보다 조금 작은 낡은 대문을 열었다. 단층으로 된 아담한 집 앞마당엔 작은 텃밭, 그리고 사용한 흔적이 거의 없는 먼지 쌓인 개집 하나가 놓여 있었다.
“남석 씨, 강아지 키웠었어?”
“어릴 때 잠깐. 개 도둑이 훔쳐 간 뒤론 안 키워서… 한 10년쯤 됐을걸?”
“나쁜 개 도둑놈 새끼.”
“그럼 그때부터 계속 방치한 거예요?”
“비 오거나 추운 날이면 가끔 길고양이들이 들어가길래, 그냥 뒀어.”
그때 대문이 열리는 소리나 기척을 들었는지, 집에서 차남석의 조부가 나왔다.
“저 왔어요, 할아버지.”
마치 오늘 아침 이 집에서 등교했던 아이처럼 덤덤히 인사하는 차남석. 길우성은 큰 소리로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어스래빗의 길우성!”
한율도 꾸벅 인사했다.
“서한율입니다.”
차남석의 조부가 살며시 미소 지었다.
언젠가 차남석이 이런 말을 했었다. 조부의 젊은 시절 사진을 보면 지금의 자신보다 더 잘생겼다고. 정말 그 말 그대로였을 것 같은 모습이었다.
“어서 와요.”
집은 방 두 개와 거실 겸 주방, 화장실 겸 욕실, 보일러가 있는 다용도실로 이뤄져 있었다. 거실은 어스래빗 단체 포스터와 차남석의 사진, 굿즈로 가득했다.
길우성이 아무 앱도 실행하지 않은 핸드폰을 마이크처럼 들고 떠들었다.
“저희는 지금 어스래빗의 대표 비주얼이자 메인보컬인 차남석 씨의 집에 와 있습니다. 우선 차남석 씨의 방부터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목표는, 차남석 씨의 온갖 흑역사가 고이 저장된 앨범입니다.”
“뭐 하냐?”
한율은 방문 선물로 사 온 양갱 선물 세트를 차남석의 조부에게 건넸다.
“죄송해요. 쟤가 좀 시끄러워요.”
“써한 네 이놈…?”
차남석이 조부와 함께 점심을 준비하는 동안, 한율은 길우성과 차남석의 방을 구경했다. 조부가 상당히 고심하여 정리한 듯한 많은 양의 선물을 제외하곤 평범했다.
길우성은 차남석의 앨범부터 펼쳤다.
“형은 진짜 어릴 때부터 잘생겼구나…. 아, 이분들이 부모님인가 보다.”
지금의 차남석과 아주 판박이인 젊은 남성과 상당한 미인인 여성이 어린 아이를 안고 찍은 사진.
“무시무시한 비주얼 유전자….”
한율은 차남석이 팬들에게 받은 선물을 구경하다, 눈에 띄는 무언가를 발견하고 집었다. 길우성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그건 뭐야?”
“호신용 전기충격기.”
“…우리 이프림 말이야. 멤버마다 대하는 태도가 조금씩 다르잖아. 가람이 형은 조금 우쭈쭈해주는 느낌이고, 보배 형은 외모와 다른 갭을 놀리면서 귀여워하는 그런 느낌이고. 그런데 남석 씨 좋아하는 팬 분들은 가만 보면, ‘차남석은 우리가 지킨다!’ 이런 느낌이 강한 것 같지 않냐? 혹시….”
길우성이 무언가 깨달은 얼굴로 외쳤다.
“남석 씨가 싸움 못 하는 약골이란 걸 알아차린 건가?!”
“야.”
활짝 열린 문 사이. 언제 왔는지, 차남석이 길우성을 향해 입꼬리만 씨익 올려 웃었다.
“나와서 밥 먹어.”
“히익….”
차남석의 조부가 준비한 점심은 불고기와 온갖 싱싱한 채소, 두부전골이었다.
점심을 먹는 동안 길우성은 차남석에 관한 이야기를 주절주절 잘도 떠들었다. 차남석이 한율과 ‘꽃을 단 토끼’가 되어 임시로 함께 살았을 때 툭하면 자신을 구박했다는 것부터 시작해, 가끔 욱해서 라이언과 유치하게 다투는 것까지. 주로 고자질이었다.
차남석의 조부는 흐뭇한 미소 띤 얼굴로 이야기를 들었다.
“워낙 무뚝뚝한 할애비 손에 자라서 얘도 그런다. 그래도 지난번에 전화로 그러더구나. 너희에게 정말 도움을 많이 받는다고, 다들 참 든든하다고.”
“제가 언제….”
“기억 안 나니?”
“…….”
차남석은 멋쩍은 듯 고개를 돌리며 시선을 피했다. 길우성도 흐뭇한 미소를 짓더니 핸드폰을 들었다.
찰칵.
“남석 씨 레어 사진 겟.”
세 사람은 후식까지 먹고 한참 동안 느긋하게 쉬어서야 갈 채비를 했다.
대문을 나가기 전, 차남석의 조부는 한율의 어깨를 천천히 감싸듯 두드렸다.
“우리 남석이 구해줘서 정말 고맙다. 넌 남석이뿐만이 아니라, 내 목숨까지 구한 은인이야.”
그의 얼굴은 손자를 향한 각별한 애정으로 가득했다.
한율은 살며시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아니에요. 만약 다른 멤버였더라도 그 상황에선 다들 주저 없이 손을 뻗었을 거예요. 그럼 다음에 기회 되면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건강하세요.”
“다음에 또 맛있는 집밥 축내러 오겠습니다, 할아버지!”
“이따가 전화할게요.”
“그래, 조심히들 들어가고.”
차남석의 조부는 대문 앞까지 그들을 배웅했다. 그리고 한율의 차가 골목을 빠져나갈 때까지 지켜봤다. 그들 또한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고개를 꾸벅이며 인사했다.
“추워요, 얼른 들어가세요!”
“바쁠 때 부르세요! 도와드릴게요!”
“전화할게요!”
곧 그들은 내렸던 차창을 올렸다.
“후아, 나 배 터질 것 같아.”
길우성이 제 배를 두드렸다.
“형네 할아버지가 담근 식혜 진짜 맛있더라.”
“그거 우리 할아버지가 담근 거 아냐.”
“엥? 그럼?”
“친한 동네 할머니가 주셨대.”
“헐….”
“시간 괜찮으면 잠깐 멀리 드라이브 좀 갈래요?”
“어디로?”
한율은 룸미러를 통해 뒷좌석에 앉은 두 사람을 힐끗했다.
“비밀기지 건설 현장이요.”
말이 씨가 되는 수가 있어
“미친.”
한창 시공 중인 ‘비밀기지’를 본 길우성의 첫 감상이었다.
“방송에서 빈말은 안 할 거라 생각하긴 했지만…. 진짜 짓고 있었어?”
그러면서 길우성은 시공 현장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차남석도 마찬가지.
“예전에 네가 그린 도면 보기는 했는데…. 정말 대박이다, 서한율. 준공은 언제야?”
“빠르면 여름 즈음이요.”
“오래 걸리네. 규모가 커서 그런가?”
“써한, 저기는 뭐야? 왜 저렇게 팠어?”
“건물이랑 연결된 주차장 만들려고.”
두 사람을 이곳으로 데려온 데엔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혹시 모르니, 대략적인 위치만이라도 미리 알아 두라고.
“솔직히 비밀기지 이런 건 어리고 뭣 모를 때나 막연히 갖는 로망 아니었냐? 그것도 엄청나게 큰 나무 위에다 짓는, 어? 그런 소소한 거?”
그들은 공사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주변만 간단히 둘러보고 다시 차에 탔다.
“그런데 왜 주변에 다른 집이 하나도 없어?”
내비게이션을 조작하던 차남석이 돌아보았다.
“아까 올라갈 때 못 봤냐? 외부인 출입 금지 경고판. 이곳은 개인 사유지로서, 어쩌고저쩌고 적힌 경고 팻말 있었잖아. …아, 저거.”
도로 합류 지점. 차남석이 차창 너머에 꽂힌 팻말을 가리켰다. 들썩거리며 창에 달라붙은 길우성의 고개가 멀어지는 팻말을 따라 움직였다.
“사유지면….”
“이 일대가 개인 땅이란 소리야. 그래서 주변에 다른 집이 전혀 없었던 거고.”
“써한….”
길우성이 경악한 얼굴로 한율을 돌아보았다.
“나중에 저기 무서워서 어떻게 사냐? 밤중에 누가 쿵쿵쿵 문만 두드려도 스릴러 장르로 바뀌겠다…!”
“나중에 담도 쌓을 거야. 높고 튼튼하게.”
“그런데도 누가 노크하면…. 으으, 소오름!”
차남석이 말없이 길우성을 쳐다보다가 물었다.
“그런 내용의 공포 영화 무서워하냐?”
“귀신보다 더 무서운 게 사람이라잖아…!”
한율은 태연히 대답했다.
“걱정하지 마. 저기에 너 혼자 살라고 가두는 일은 없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