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4화 (144/427)

* * *

23일 수요일. 고양이 사료 ‘캣앤프리’ 광고 촬영 현장.

한율은 영화 <고양이 난로> 시사회 이후 오래간만에 부윤방 감독을 만났다. 부윤방은 한율이 칠레에서 겪은 사고를 언급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별일 없어서 천만다행이에요.”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왜옹. 부윤방이 가져온 이동장 안에서 고양이 ‘미미’가 울었다. 한율은 그 안을 들여다보며 고양이처럼 눈을 천천히 깜빡거렸다.

“안녕, 미미야.”

앩옹. 미미가 한율을 향해 앞발을 뻗었다. 그러나 문이 닫힌 상태라 닿진 않았다.

왜옹.

“희우 선배님은요?”

“방금 통화했을 땐 거의 다 왔다고… 아, 왔다.”

스튜디오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술렁거리며 입구로 고개를 돌렸다.

“안녕하세요. 고양이 ‘제유’ 보호자입니다.”

이희우의 등장에 프로덕션 측 감독과 캣앤프리 관계자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이곳까지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희우 씨.”

“많이 바쁘실 텐데, 고양이 광고 촬영에 선뜻 응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이희우는 올해 서른이 되어 대한민국 20대 대표 여배우 타이틀을 놓게 되었지만, 실력파 배우는 고작 나이 앞자리가 바뀐다고 연기력과 커리어가 퇴색되지 않는다. 몸값 역시.

억 단위 광고 계약금을 받는 배우가 자신이 키우는 고양이의 광고 촬영을 위해 몸소 행차하니, 광고 촬영 비하인드 영상을 위해 돌아가던 카메라도 즉시 그녀에게 붙었다.

사람들과 인사를 마친 이희우가 한율을 향해 손을 들었다.

“한율아, 오랜만!”

“안녕하세요, 선배님.”

먀아! 이희우의 이동장에서 짜증이 잔뜩 난 고양이 울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희우가 프로덕션 직원에게 물었다.

“우리 모델분이 조금 예민해서요. 고양이 대기실은 어디인가요?”

고양이들을 위해 마련된 대기실엔 캣타워와 사료, 간식, 터널과 쿠션까지 모두 준비되어 있었다. 부 감독과 이희우가 이동장 문을 열자, 미미와 제유는 경계심이 가득한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낮은 포복 자세로 기어 나왔다.

킁킁. 두 고양이가 냄새를 맡으며 슬슬 한율에게 다가왔다.

“제유야, 한율 오빠 기억나? 보고 싶었어?”

두 마리가 눈을 게슴츠레하게 뜬 채 한율의 다리에 몸과 이마를 비비적거렸다. 한율은 살며시 앉아 고양이들을 쓰다듬었다.

“잘 지냈어? 오늘 촬영 잘 부탁해, 얘들아.”

앩옹. 먀아.

동물 촬영은 짧은 시간 안에 얼마나 좋은 그림을 많이 뽑아내느냐가 관건. 그리고 고양이들이 스트레스를 덜 받도록, 스튜디오엔 최소한의 필요 인원만 남았다.

“역시 두 고양이 모두 영화배우라 클라쓰가 남다르네요.”

이전에도 고양이를 데리고 캣앤프리 광고를 찍었던 감독은, 이렇게 촬영에 협조적이고 모델과 케미가 사는 고양이들은 본 적이 없다며 감탄했다.

“한율 씨 바라보는 눈에 애정도 가득하고, 말도 잘 따라주고. 아주 프론데요?”

CF 광고 영상과 화보까지. 촬영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예상 시간보다 일찍 끝났다.

“수고하셨습니다!”

“미미야, 제유야, 수고했어.”

먀아. 왜옹. 한율은 두 마리의 고양이를 한꺼번에 안은 채 촬영 감독과 스태프들을 향해 인사했다.

“수고하셨습니다.”

“무겁지 않아? 이리 줘.”

이희우가 제유를 받아 안았다. 부윤방도 와서 미미를 데려갔으나, 미미는 한율의 품에서 떨어지기 싫다는 듯 앞발을 쭉 뻗으며 항의했다.

왜오옭웽.

“마음 같아서는 같이 저녁 먹으러 가자고 하고 싶은데, 제유가 더 스트레스받을 것 같아서 힘들겠다. 집에 가서도 컨디션 괜찮은지 확인도 해야 하고.”

“괜찮아요. 고양이는 영역 동물이라 집에서 나오는 순간부터 대부분 스트레스받는다잖아요.”

“역시 같은 집사라 말이 통하네. 아, 지난주에 민준이랑 통화했다면서?”

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다음 달에 휴가 나오면 그때 보기로 했어요.”

“다음 달에 백호 영화제 있는 것도 잊지 않았죠, 한율 씨?”

“물론이죠.”

실시간으로 스트레스를 받는 고양이들을 배려해, 그들은 인사를 짧게 나누고 헤어졌다. 가장 먼저 이희우가 퇴장, 그 후엔 광고 촬영 감독과 명함을 나눈 부윤방이 떠났다.

한율은 마지막으로 촬영장을 나왔다.

“조금 전 캣앤프리 측 담당자랑 이야기를 나눴는데.”

차에 올라타자마자 조유찬이 말했다.

“다음 주에 같이 진행하고 싶대.”

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2월 2일 토요일, 어스래빗은 팬들과 함께 유기 동물보호소에 봉사활동을 가기로 했다.

“그럼 저희야 좋죠. 사료도 기부한대요?”

“응. 광고 모델도 계약금 일부를 기부하는데, 회사가 가만히 있으면 되겠냐고.”

“잘됐네요.”

소비자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주기 위한 마케팅이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어떻게 기부할 생각을 다 했어?”

조유찬이 기특하면서도 자랑스럽다는 눈으로 한율을 본 후 시동을 걸었다. 한율은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내 전원을 켰다.

“저 이제 정산받아서 여유 있잖아요. 그리고 전부도 아니고 반만 기부하는 건데요.”

“크으. 그래도 멋지다, 우리 아티스트.”

우웅. 전원이 켜지자마자 뜨는 초코톡.

스타믹스의 JE였다.

-[진짜 나 끼어도 되는 거냐?]

바로 내일이 출국인데 이제 와 새삼.

[네.]

다음 날 아침, 인천국제공항.

한율은 출국장 안으로 들어가고 나서야 답답한 마스크를 벗었다. 이건우와 길우성, JE도 마찬가지로 마스크를 벗고, 일부러 푹 눌러썼던 모자를 살며시 위로 올리거나 벗었다.

“아무도 안 따라온 것 같지?”

“네.”

“우리가 당일에 비싼 항공권을 끊을 정도로 집념이 강한 사생이 붙을 정돈….”

“야.”

JE가 진지한 얼굴로 길우성의 말을 막았다.

“말이 씨가 되는 수가 있어. 입 조심해.”

“헙.”

이번 여행에 JE가 합류하기로 한 건 불과 이틀 전이었다. JE가 한율에게 톡으로 여행가냐고 물었다. 지헌에게 들었다면서.

그 톡을 보자마자 한율은 JE도 여행을 가고 싶어 한다는 걸 알아차렸지만, 사실은 같이 데려가도 될까 고민을 조금 했었다.

‘괜찮을까? 그놈과 마주쳐도.’

하지만 이내 자신도 함께 있으니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설령 단둘이 마주친다고 해도, 지금껏 ‘그놈’과 비슷한 부류를 마주한 적이 전혀 없을 것 같지도 않고.

‘앞으로 게이트가 열리면 더한 일도 겪게 될 텐데. 그리고 그렇게 어린아이도 아니니, 괜찮겠지.’

그래서 JE에게 같이 가겠냐 물었고, 길우성과 이건우에게도 동의를 구했다. 두 사람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난 찬성. 그 선배님 남석 씨랑 비슷한 타입인 것 같으면서도 은근히 호기심을 자극하는 뭔가가 있단 말이지.』

『JE 선배님 영어 잘하고 이런저런 다양한 경험도 많잖아. 같이 가준다면 오히려 나야 든든하지?』

마침 세 사람이 예약한 항공편에 빈자리도 있어, JE는 무난히 합류하게 되었다.

“그런데 스케줄도 아니고 순수하게 놀러, 그것도 해외여행 간다고 생각하니까 엄청 설렌다. 크으, 길우성! 성공했다!”

“대표님이 몇 달 치 용돈을 당겨주셔서 경비를 마련한 거지만 말이야.”

“흐흐. 그래도 곧 광고…, 헙.”

길우성이 제 입을 틀어막으며 JE의 눈치를 살폈다. JE가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물었다.

“너희, 광고 섭외 물밀듯이 들어온다며?”

“엉? 어떻게 알았어요?”

“이 바닥 좁아.”

“아.”

며칠 전, 주말이 지나 평일이 되자 어스래빗 단체 광고 섭외가 3건이 더 들어왔다. 여기에 예능과 웹드라마 쪽에서도 연락이 온다고.

“그래도 무조건 좋다고 OK 하지 마. 우리 믿고 해당 광고 제품 소비하는 팬들도 생각해야 해. 안 그러면 나중에 후회한다.”

“넹.”

“명심하겠습니다. 그런데요, 선배님. 저 지난번부터 묻고 싶은 게 있었는데….”

이건우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다른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목소리를 낮췄다.

“유린 선배님과 사귄다는 소문이 있던데, 사실입니까?”

JE가 미간을 구겼다.

“미쳤어? 내가 걔랑 왜.”

흥미진진한 얼굴로 두 사람을 바라보던 길우성이 눈을 끔뻑거렸다.

“미쳤냐는 소리를 들을 만한 질문은 아닌 것 같은뎅….”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걔한테 이성적인 호기심 같은 거 절대 갖지 마.”

“왜….”

“아무튼, 그런 게 있으니까 일단 새겨들어.”

JE가 단호히 말했다.

“나중에 크게 후회하고 상처받기 싫으면.”

유린과 몇 년 동안 <뮤직뮤직> MC를 했던 사람의 말이다. 이건우의 어깨가 살며시 처졌다.

“네….”

그래도 JE는 악의는 없다는 듯, 이건우의 등을 툭툭 두드리며 화제를 전환했다.

“서한율 넌 머리 언제 다시 염색했어? 지난번에 금발 잘 어울리던데.”

본래 이렇게 말이 많고 오지랖 넓은 성격 같지는 않은데, 거리를 좁히기 위해 노력하는 걸까.

한율은 새카만 색으로 돌아온 제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그제요. 어제 광고 촬영이 있어서.”

“아아.”

면세점은 정말 거의 구경만 했다.

미리 받은 용돈으로 여행경비를 마련한 이건우와 길우성은, 마음에 들어서 집었던 물건의 가격표를 보고 조용히 내려놓는 걸 반복했다. 카페에 갔을 땐 이건우가 탄수화물과 당분이 가득한 고칼로리 메뉴는 피하라며 말렸다.

“방심했다간 진짜 박가람한테 질 수도 있어. 오늘 아침에 그 음흉하게 웃던 얼굴 봤지?”

“괜찮아, 형. 가람이 형이 아무리 빡세게 운동해도, 고작 일주일만으론 내 체지방률을 따라잡진 못해.”

“그리고 형도 있잖아요. 운동 기구도 챙겼고. …초콜릿 무스 케이크랑 아메리카노 따뜻한 걸로 한 잔이요.”

가끔은 단 음식이 당겼다.

“전 딸기 생크림 조각 케이크랑 아이스 아메리카노요. …뭐야? 활동 다 끝났는데 다이어트 해?”

“식스팩 누가 빨리 만드나 내기했거든요. 음…. 전 고구마 라떼랑 떠먹는 티라미수 주세욥.”

“치킨 샐러드랩이랑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이요.”

“네, 주문받겠습니다. 초콜릿 무스 케이크….”

삑삑. 주문받은 메뉴를 확인하는 직원의 시선이 그들을 차례대로 살폈다. 눈이 반짝거리는 걸로 보아, 다들 누군지 알아본 눈치. 그러나 알은체는 하지 않았다.

네 사람은 다른 손님들과 적당히 떨어진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아. 너희 원제로 기사 봤어?”

JE가 핸드폰에 기사 하나를 띄워 보여주었다.

“여기에 너희랑 친한 애들 많지 않아?”

[보이그룹 원제로, 그룹 내 따돌림 의혹 제기]

너무 저렴한 숙소는 의심하랬는데

[23일 밤, 한 커뮤니티 사이트에 원제로 그룹 내 따돌림 의혹을 제기하는 게시글이 올라왔다.

작성자는 원제로 데뷔 초와 최근 사진 등을 비교하며 멤버 A와 B의 사이가 멀어진 시점부터 A의 말수가 줄고 혼자 있는 시간도 많아졌으며, B와 친한 일부 멤버들이 A를 무시하거나 라이브 도중 A의 말에 제대로 호응하지 않는 등의 태도로 무안을…(중략).]

-한 줄 요약: 정민솔 악개들이 피해망상 소설을 쓰고 있다.

-원제로 안티가 작성한 걸 기사로 쓰는 멍청한 기레기가 있네

ㄴ작성자 IP 검색해보니 ㅈㅁㅅ악개던데? ㅋㅋㅋ 아카이브에 박제된 거 못 봤나 봄?

-원제로 팬은 아닌데, 지나가다 원제로 예능 보다보면 ㅈㅁㅅ 좀 주눅 들어 보이긴 하더라. 픽미 할 때는 이것저것 웃으면서 알려주고 활발하게 떠들던 애가 별로 말도 없고 잘 웃지도 않고

ㄴ저지른 잘못이 있으니 행동 조심해야죠.

ㄴ무슨 잘못이 있다는 건지? 이상한 루머 믿는 골빈머거리 증명이라면 넣어둬

-누가 주도하는 건지는 몰라도 최근 들어 원제로 음해성 루머와 기사가 판치네요. 지난주 생일 라방만 봐도 애들 다 사이좋은 거 아실 텐데.. 안타깝네요.

-민솔아, 슬슬 갠팬 단속 안 하면 너한테도 구정물 튄다.

-정민솔 악개 특징: ㅇㅅㄹㅂ 있으면 ㅇㅅㄹㅂ 패고, 없으면 같은 팀 멤버들 팸ㅇㅇ

ㄴ왜 ㅇㅅㄹㅂ 패는 건데ㅋㅋㅋ

ㄴㅈㅁㅅ이 ㅇㅅㄹㅂ 데뷔조에 있었을 때 거기 애들한테 따 당해서 떨어졌다는 카더라가 잠깐 돌았었음

-기사 본문만 보고선 A가 누군지 몰랐는데 댓글에 바로 답이 있어..!

ㄴ그 정도로 따돌리는 게 티가 났다는 거 아님?

ㄴ작성자가 ㅈㅁㅅ 악개라서 A가 ㅈㅁㅅ이구나 생각하는 거지, 실제로 따돌림이 있는 건 아닙니다.

댓글까지 훑은 길우성과 이건우가 동시에 한숨을 쉬었다.

“아이고야….”

“정말 이런 일이 벌어져도 순순히 당할 성격이 아닌데, 그 형이. 지금 이런 이슈가 자신에게 전혀 도움이 안 된다는 것도.”

현재 원제로란 팀으로 방송과 광고 섭외, 공연 등으로 돈을 쓸어 담고 있는데, 그룹 이미지를 망치는 짓을 할 리가.

계약이 다 끝나 스스로 폭로하는 거면 몰라도 말이다.

JE가 핸드폰을 회수하며 조용히 말했다.

“댓글에 적혀 있잖아, 악개가 작성한 글이라고. 기사 내용이 사실이 아니라면, 팬들이 오히려 정민솔의 발등을 찍어버린 거지.”

“그래도 팬 입장에선 나름 민솔이 형 걱정돼서 한 행동일 텐데…. 으음, 어렵네영.”

이건우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호의와 애정을 가지고 한 행동이라고 모두 정당화되거나 용서되진 않지. 그렇게 치면, 멋대로 집에 들어와서 속옷 빨래하는 사생 스토커도 용서해야 해.”

“으악, 끔찍해!”

길우성이 제 두 팔을 와락 감싸며 질색했다. 그 소리에 다른 손님들과 직원들의 시선이 이쪽을 향했다. 그들은 사방으로 고개를 꾸벅였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큰소리 내서 죄송합니다….”

“그럼 지금쯤 팬덤 내부도 시끄럽겠는데요?”

“그룹 이미지를 한순간에 쓰레기로 만드는 의혹이잖아. 가뜩이나 이 녀석 악개들, 평소에도 과잉보호 쌈닭으로 유명하던데. 회사가 허위사실 유포에 법적 대응 운운하면 대중들은 해프닝이라고 가볍게 넘기겠지만, 팬덤 내에선 이 일을 계기로 크게 폭발하지 않을까 싶다.”

“과잉보호 쌈닭….”

“음방 스태프들 사이에서도 소문이 자자해.”

이건우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긴. 이프림끼리도 가끔 싸움 나는데, 처음부터 따로따로였던 개인 팬들이 모였으니 오죽할까.”

“싸워? 이프림끼리?”

길우성이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건우 형이랑 가람이 형 팬들끼리 예전에 가끔 싸웠었잖아.”

“혹시 가람이 형 못생겼다고 놀린 것 때문에?”

이건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박가람도 동의한 거라 괜찮을 줄 알았는데, 진심으로 화내는 분들이 계시더라고. 유치하게 외모로 놀리지 말라고.”

“그래서 최근엔 안 놀리는 거구나…. 그럼 앞에 ‘귀엽고’를 붙이면 어떨까? 귀엽고 못생긴 박다람이.”

“싫어.”

JE가 다른 기사를 슥슥 훑으며 물었다.

“그런데 박가람도 바빠? 난 걔도 여행 갈 줄 알았는데.”

“고소공포증이 있어서 높고 스릴 넘치는 곳은 싫대요. 전에 한라산 갔을 땐 괜찮았는데.”

“등산은 괜찮나 봐. 당장 몸이 힘들고 눈앞의 길만 터벅터벅 오르면 되니까. 내려올 땐 라이언 옷 꽉 잡고 안 놓더라.”

“너희 보면 참 신기해?”

“뭐가요?”

어스래빗 멤버 셋이 JE를 바라보았다.

“몇 년 동안 붙어산 것도 모자라서 여행도 같이 다니는 거 보면. 안 지겨워?”

“그만큼 서로에 대해 잘 알고 익숙하니까, 오히려 편한 것 같아요.”

“라고, 써한과 어색하다던 이건우 씨가 말했다.”

“몇 년 전 일을 꺼내는 거냐.”

주문한 음료와 디저트가 나오고, 그들은 탑승 시간까지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다 일어났다. 나갈 때에도 카페 직원들에게 예의 바르게 인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수고하세요.”

직원도 활짝 웃으며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즐거운 여행되세요!”

폴란드의 바르샤바를 경유해 스위스 취리히에 도착, 예약한 호텔에 체크인한 건 현지 시각으로 밤 9시가 될 무렵이었다.

“잡혀라, 와이파이!”

호텔 측에서 알려준 와이파이 비밀번호를 핸드폰에 입력한 길우성이 복도에서 빙그르르 돌았다.

“음, 잡혔다!”

그들이 예약한 객실 두 개는 나란히 있었다.

“그럼 내일 아침, 호텔 레스토랑에서 봅시다.”

“내일 봐요.”

한율은 JE와 함께 왼쪽 객실로 들어갔다. 객실 안은 호텔 사용자들의 후기처럼 넓으면서도 깨끗했다.

캐리어를 구석에다 내팽개친 JE는 곧장 미니 냉장고를 열었다. 미니 냉장고 안엔 각종 위스키와 병맥주, 과일 주스 등이 진열되어 있었다.

“맥주 한잔할래?”

“…아니요.”

한율은 순간 흔들렸지만, 고개를 저으며 캐리어를 열었다.

“혹시 아직 술 한 번도 안 마셔봤어?”

“저 스무 살 된 지 한 달도 안 됐는데요.”

JE는 가볍게 웃으며 맥주 하나를 꺼냈다. 그러고 몸을 일으키다가 어깨를 움찔 떨었다.

“…아이씨, 깜짝이야.”

“……?”

한율은 의아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JE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너, 뒤. 순간 그 커다란 파충류 눈이 보여서.”

한율은 뒤를 돌아봤다. 아무것도 없었다.

“불편하면 다른 방으로 바꾸실래요?”

“아니, 괜찮아. 점점 익숙해지는 것 같거든.”

JE가 심호흡한 뒤 덧붙였다.

“그 서늘한 느낌도.”

“네.”

“그런데…. 왜 그런 게 너한테 붙었는지 전혀 짐작 가는 이유 없어? 어릴 때 죽어가던 파충류랑 마주쳤다든가, 아니면 반대로 구해줬다든가.”

한율은 잠깐 생각에 잠긴 척하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예전에 도움받은 적은 있어요.”

“도움? 네가?”

한율은 태연히 웃었다.

“네. 그런 게 있어요.”

“……?”

JE는 무척 궁금한 눈치였으나, 한율이 더는 말하지 않자 그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다음 날 한율 일행은 예정대로 취리히를 여행, 26일은 취리히를 떠나 베른을 가볍게 둘러본 후 인터라켄에 들어갔다. 숙소는 바로 앞에 강이 흐르는 전망 좋은 호텔이었다.

“와…. 아침에 일어나서 보면 전망 끝내주겠다.”

그들은 감탄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체크인하고 예약한 객실로 들어가려던 순간, 길우성이 우뚝 멈췄다.

“사진으로 봤을 때랑 좀… 아니, 많이 다른 것 같은데….”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여기저기 둘러보던 이건우도 객실 안을 보더니 멈칫했다. 그러곤 옆에서 생글생글 웃는 호텔 직원의 눈치를 살피며 중얼거렸다.

“꼭 귀신 나올 것 같은 분위긴데… 괜찮을까?”

반면 JE는 호텔 직원에게 적당히 팁을 건네곤 태연히 안으로 들어갔다. …끼익. 나무로 된 바닥에서 미약한 소리가 났다.

“조금 낡은 것 빼곤 괜찮은데? 거실도 있고, 방도 두 개고.”

“그런…가? 하하, 기분 탓이겠죠? 음, 서양 공포 영화를 너무 많이 봤나 보다.”

끼익…, 덜컹, 쿵. 철컥.

한율은 힘을 주어 문을 닫고 체인을 걸었다.

“문이 잘 안 닫히긴 하네요.”

“써한, 이 방 하루 숙박료 얼마였지…?”

“위치랑 객실 크기, 주변 다른 호텔과 비교하면 많이 저렴하긴 했지?”

“엄마가 너무 저렴한 숙소는 의심부터 하라 그랬는데….”

그들은 객실 여기저기를 살폈다. 전체적으로 낡기는 했지만, 화장실과 욕실은 새로 리모델링 했는지 깨끗했다. 발코니로 나가면 바로 앞에 흐르는 강과 설산, 인터라켄의 평화로운 정경이 보였으며, 무엇보다 바람이 청량하기 그지없었다.

“후…. 이 아름다운 스위스 한적한 마을의 풍경을 보니, 조금 전에 느꼈던 부정적인 감정들이 스르륵 사라지는구먼?”

룸메이트는 간단하게 손바닥 뒤집기로 정했다.

“데덴~찌.”

“제엔~디.”

“하~늘과 땅.”

“…….”

“…오키, 나랑 지은이 형.”

한율은 이건우와 오른쪽 방에다 짐을 풀었다. 차례대로 욕실을 사용하고 나서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후엔, 거실 소파에 모여서 사진을 찍었다.

“한국은 지금 몇 시지?”

“한국이 7시간 빠르니까… 새벽 1시겠네.”

“그럼 보내도 되겠다.”

한율은 이건우가 단톡방에 올린 사진을 그대로 가족 단톡방에 올렸다.

[인터라켄 숙소에 도착했습니다. 안녕히 주무세요. :)]

안 자고 있었는지, 이내 모친이 톡을 올렸다.

푹 잠든 고양이들의 사진과 함께.

-[저녁 맛있게 먹고, 잘 자 아들♡♡♡]

그들은 호텔과 그리 멀지 않은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해결했다. 느긋하게 밤 산책을 하는 동안에도 수시로 사진을 찍었다.

“여행에서 남는 건 사진뿐이지!”

도중엔 한국에서 신혼여행을 온 부부와 마주치기도 했다. 먼 해외에서 만난 같은 한국 사람이라, 반가운 마음에 잠시 대화를 나누고 사진도 찍었다.

“어쩐지, 멀리서부터 비율 좋고 얼굴 작은 분들이 함께 다닌다 했더니 다들 연예인이시구나.”

“패러글라이딩 정말 장난 아니에요! 하늘에서 내려올 때 구름 너머로 인터라켄이 쫙 나타나는데, 진짜 후회 안 하실 거예요!”

“감사합니다. 즐거운 여행되세요!”

“백년해로 응원하겠습니다!”

다시 호텔로 돌아왔을 땐 밤 9시가 조금 넘을 무렵이었다.

이젠 각자 느긋하게 쉬는 시간. 한율은 침대에 편히 누워 충전기를 꽂은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이건우는 공간을 활용해 실내운동을 했다.

“…후우! 한율아, 너도 가볍게나마 운동하는 게 좋지 않을까?”

대체 무슨 운동을 어떻게 했는지, 이건우는 20분도 안 되는 사이 전신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박가람이 단톡방에 올린 사진 봤잖아. 걔 이번엔 작심삼일로 안 끝날 것 같다. 왠지 느낌이 그래.”

한율은 핸드폰을 내려놓고 고개를 끄덕였다. 박가람처럼 일일이 사진으로 허세 부리며 인증하지는 않지만, 함께 내기하기로 한 차남석과 라이언도 은근히 승부욕이 강한 타입.

길우성은 거실에서 JE에게 스타믹스 안무를 가르쳐 달라며 귀찮게 구는 중이었다.

“이 안무 동작엔 무슨 뜻이 있는 거예요? 가사랑 다른 뜻을 품고 있는 것 같은데…. 형님, 귀찮아하지 말고 해석 좀. 의미를 알아야 무대 연기가 디테일해질 거 아니요.”

“아, 이놈 진짜 귀찮네.”

“수재 선배님은 물어보면 친절하게 다 가르쳐줬는데!”

“그럼 너도 선배님 따라 군대 가든가.”

“아니, 이 나쁜 사람…?!”

길우성은 견제하지 않아도 될 것 같지만, 그래도 혹시 모른다.

“일단 스트레칭부터 할게요.”

무대에서 복근을 공개하는 건 싫으므로.

잠시 후, 한율은 땀으로 흠뻑 젖은 몸을 씻고 나서 발코니로 나갔다.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 몹시 추웠지만, 설산의 향을 품은 바람은 상쾌했다.

한율은 크게 기지개를 켜며 바람을 만끽했다.

‘드디어 내일이면 만나겠네.’

‘위고’. 여러 건의 소아 성범죄 및 강도살인을 저지르고, 신분을 위조하고 얼굴을 성형해 유럽 여기저기를 전전, 현재는 이곳 인터라켄에 여자친구와 함께 정착한 남자.

게이트가 열린 이후 각성한 능력은 ‘투명 인간’.

그 능력을 이용하여 높은 지위까지 올라간 인간쓰레기는, ‘침략’ 이후 본색을 드러내며 온갖 끔찍한 짓을 저질렀다. 오죽했으면 그의 부하가 숨을 거두기 직전에 그의 위치를 알려주었을까.

한율은 시커먼 강물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결코 곱게 없애선 안 되겠지.’

이것도 재밌는데?

아침. 한율 일행은 조식을 먹기 위해 호텔 레스토랑으로 내려갔다. 어제 객실을 안내해 준 직원, 프론트에 있던 직원들이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지나가던 청소 직원들도.

[잘 잤어요?]

그들도 웃으며 화답했다.

[네, 좋은 아침이에요.]

“굿모닝!”

조식을 먹고 나선 다시 객실로 올라가 외출 채비를 했다. 여러 겹으로 옷을 껴입고 패딩을 걸쳤다. 햇빛이 눈에 반사되어 얼굴이 탈 수 있으므로 자외선 차단제도 꼼꼼하게 발랐다.

“그런데 아까 말이야. 직원들 조금 이상하지 않았어?”

“뭐가?”

길우성이 미심쩍은 얼굴로 말했다.

“아까 레스토랑에서 밥 먹을 때, 우리 쪽 자꾸 힐끗하면서 얘기하는 것 같던뎅.”

“우리 알아본 거 아니야?”

“아냐, 아냐. 그런 거랑 좀 다른 느낌이었어.”

“…….”

한율은 슬쩍 JE를 살폈다. 그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는지 괜찮아 보였다.

우웅.

예약했던 패러글라이딩 업체 측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5분 후에 호텔 앞에 도착한대요.”

“중요한 거 다 챙겼지? 내려가자.”

“드디어 패러글라이딩을!”

길우성도 미심쩍다는 표정을 던지고 어깨를 들썩거리며 외쳤다.

“오늘, 나는 하늘을 나는 토끼가 된다!”

잠시 후.

“우와, 우와, 하, …으하, 으하하하…!”

인터라켄이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은 언덕.

이건우가 한율의 팔을 덥석 잡았다.

“어떡하냐, 한율아? 우리 팀 메인 댄서가 미친 것 같다.”

“…….”

한율은 말없이 패러글라이더를 타고 멀어지는 길우성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정신을 놓은 것처럼 신난 길우성의 웃음소리와 환호성도 점점 멀어졌다.

“으하하…, 이프리임…!”

‘설마 잘못 떨어져 죽진 않겠지. 보호 마법 반지도 끼고 있고.’

두 번째 순서는 JE. 패러글라이딩 파일럿과 차분히 영어로 대화를 나누던 JE는 고글을 똑바로 고쳐 썼다.

“먼저 내려갈게.”

한율과 이건우는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곧 따라갈게요.”

JE 다음은 이건우의 차례.

이건우는 제자리에서 가볍게 뛰고 스트레칭을 쭉쭉하더니, 파일럿에게 호기롭게 외쳤다.

“I’m OK!”

그도 하늘을 둥실 내려가면서 이프림을 외쳤다.

“이프림, 사랑한ㄷ…으아아…!”

한율도 자신의 담당 파일럿에게 잘 부탁한다고 인사한 후 안장에 앉았다. 그리고 남의 눈치를 볼 필요 없이 하늘을 둥실, 편히 날았다.

비록 몸에 주렁주렁 단 장비는 거추장스러웠지만, 아름다운 자연의 경관을 보며 바람을 만끽하다 보니 입가엔 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크으, 이 몇 분을 위해서 스위스까지 날아온 게 아깝지 않았다. 풍경이 진짜, 와.”

“진지하게 말하는데, 나 한 번 더 타고 싶어.”

각자 다른 곳에 착지한 그들은, 패러글라이딩 업체 사무실에 모여서 파일럿이 찍어준 사진과 영상을 받았다.

“지은이 형은 괜히 5년 차 아이돌이 아닌데? 하늘에서 어떻게 이런 상큼한 화보를 찍지?”

“나 형이 이렇게 이 보이면서 웃는 거 처음 보는 듯?”

“짜릿해서 진짜 기분 좋더라.”

함께 여행을 다닌 지 며칠. 이건우와 길우성은 어느새 JE를 편하게 형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한율은 구름 위에서 환하게 웃는 제 사진을 들여다보며 조용히 물었다.

“우리, 내일 한 번 더 탈까요?”

그러나 안타깝게도 업체 측 예약이 모두 차 있었다.

이른 점심을 먹은 후엔 액티비티 장비 대여소에서 필요한 장비를 빌리고, 가까운 역에서 스키 PASS 티켓을 끊어 산악열차를 탔다.

한참을 올라가다 내린 곳.

“스키 초보자도 있으니, 안전하게 난이도 하 코스를 탑시다.”

“너희 셋 전부 스키 초보잖아. 당연한 소릴.”

그나마 스키 경험이 있는 JE가 어스래빗 멤버 셋에게 기본적인 것들을 가르쳐 주었다.

“욕심이랑 객기부리다 다치면 본인만 손해다. 아니, 팀이랑 회사 전체에 민폐야. 조심해.”

난이도 하 코스라 그리 어렵지는 않았으나, 조금씩 익숙해질수록 스키에 대한 재미도 붙었다. 자전거로 급경사 코스를 내려올 때와는 또 다른 쾌감.

‘이것도 재밌는데?’

재미를 느낀 건 한율만이 아니었는지, 그들은 스키를 타고 내려갔다가 다시 리프트로 올라오는 걸 반복했다. 스키 PASS 티켓 이용 시간이 끝날 때까지.

“나 정말 스위스 잘 온 것 같아.”

“몇 달 치 용돈을 당긴 보람이 있어.”

인터라켄으로 돌아와 스키 장비를 반납한 건 5시 무렵.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고 호텔로 돌아왔을 땐 6시였다.

프론트 직원이 친절한 미소로 그들을 반겼다.

[겨울의 융프라우는 즐거우셨나요?]

[네, 상당히.]

[부족하거나 불편한 게 있으면 언제든 말씀해주세요.]

[감사합니다.]

그들은 직원에게 객실 열쇠를 받고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객실은 말끔하게 청소된 상태였다. 목욕 가운이나 수건도 전부 새 걸로 교체되었다. 따뜻하게 라디에이터를 켜고 난 후엔 각자 편한 대로 쉬었다.

한율은 욕조에 온수를 가득 받아 느긋하게 목욕을 즐겼다.

“건우 형이랑 선배님은?”

나와보니 거실엔 길우성 혼자 있었다.

“호텔 바.”

“…….”

“표정이 왜 그래?”

“아무리 알아보는 사람이 없는 것 같아도, 혹시 모르잖아.”

“딱 한 잔만 마시고 금방 온다던데…. 야, 우리도 갈까?”

한율은 시간을 확인했다.

지금쯤이면 퇴근하고 없을 것 같지만, 혹시 모른다.

“첫 술은 가족이랑 마시기로 약속했다며.”

“스무 살 되면 가족이랑 술 마셔보고 싶다 그랬지, 첫 술을 가족이랑 마시기로 약속한 건 아닌뎅.”

“처음 술을 마실 때 어른에게 배워야 잘못된 버릇이 안 든다니까, 나중에 아버지랑 같이 마셔.”

“으음.”

한율은 소파에 늘어지는 길우성을 뒤로 하고 발코니로 나갔다.

덜컹.

“야, 머리 제대로 안 말리고 나가면 얼어.”

발코니 난간을 잡고 둘러보는 한율의 눈에 푸른빛이 짧게 아른거리다 사라졌다. 오늘 아침, 잠깐 스쳤을 때 심어놓은 추적 마법의 신호가 멀리서 잡혔다.

쿵쿵. 그때 누군가 객실 문을 두드렸다.

“문 열어.”

이건우와 JE였다.

“진짜 딱 한 잔만 마셨소?”

“아니, 두 잔. 그런데 여기 바텐더 조금 이상한 말 하더라?”

한율은 거실로 들어와 발코니 창을 닫았다.

“무슨 말이요?”

“간밤에 잘 때 별일 없었냐고.”

“……?”

“거실 나무 바닥이 오래되어서 가끔 뒤틀리는 소리가 나는데, 그걸 이상한 소리로 착각해서 놀라는 사람들이 있대. 그런데… 고작 그 정도로 안부를 묻는 게 이상하잖아?”

“다른 건요?”

“그것 외엔 딱히?”

JE가 이건우의 팔을 툭 쳤다.

“어차피 내일이면 떠나니까, 별 신경 쓰지 마.”

“네.”

그날 밤.

끼익…, 끽.

신경을 거스르는 불쾌한 소리에, JE는 문득 눈을 떴다.

“……?”

섬뜩한 느낌을 주는 서한율이 근처에 없던 터라, 따뜻한 이불 속에서 까무룩 잠들었었다. 그래서 단잠을 깨우는 이 소리에 미간을 구기며 그는 핸드폰을 찾았다.

28일 새벽 2시.

JE는 반대쪽으로 몸을 돌렸다. 검푸른 어둠 속에서 이불을 돌돌 말고 자는 길우성의 모습이 보였다.

‘바텐더가 말했던 그 소린가.’

JE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다시 눈을 감았다.

끼이익…, 드득. 뚝, …뚝.

하지만 불쾌한 소리는 좀처럼 그치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 거실을 서성거리는 것처럼 가까워졌다가 멀어지기를 반복했다.

무심코 떠오른 의문.

‘설마, 사람…?’

…드득. 불쾌한 소리가 점점 이 방과 가까워지더니 뚝 멈췄다. 바로 문 앞에서.

“……!”

그 순간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잠도 순식간에 달아났다.

잡것 특유의 익숙한 한기가 문 너머에 덩어리째 서 있었다.

‘…씨발.’

JE는 다시 핸드폰을 집어 서한율에게 톡을 보냈다. 직접 문을 열어 확인해선 절대 안 된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혹시 방금 화장실 갔다 왔냐?]

“…….”

묵묵부답. JE는 한참 동안 톡 옆의 ‘읽지않음’ 표시가 사라지지 않는 것을 보며 초조해졌다.

‘분명히 이 객실에 처음 들어왔을 땐 아무것도, 아무 느낌도 없었는데…. 왜? 서한율이 방에 들어가서? 서한율 뒤의 도마뱀보다 더 센 게 들어왔나? 그래서 숙소 요금이 저렴했던 건가?’

그렇게 얼마나 숨죽이며 문 앞의 한기가 물러나기를 기다렸을까.

덜컹. 돌연 발코니 창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이어서 들린 건 패딩에 묻은 무언가를 털어내는 듯한 생생한 소리.

툭툭.

“……?”

JE는 상체를 일으켰다. 문 앞의 한기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그리고 이번엔 정말로 사람의 인기척이 났다.

끼익, 득. 조금 전보다 생생한 나무 바닥 소리.

‘도둑? 강도?’

발코니에서 들어온 기척은 이건우와 서한율이 사용하는 방으로 향하고 있었다.

JE는 강도라면 정말 큰 일이란 생각이 들어, 부리나케 침대를 내려와 문을 벌컥 열었다.

“……?!”

그러자 건너편 방으로 들어가던 사람이 놀랐는지 JE를 휙 돌아보았다. 어둠에 적응한 JE의 눈이 상대방의 실루엣과 이목구비를 서서히 잡아냈다.

“…서한율?”

서한율이 눈을 끔뻑이며 고개를 기울였다.

“선배님? 왜 안 자고 나오세요?”

JE는 여전히 깊게 잠든 길우성을 한번 돌아보곤 거실로 나왔다.

“너야말로 안 자고 뭐 해? 그것도….”

서한율은 오늘 스키를 타러 갔을 때 입었던 두꺼운 패딩을 걸치고 있었다.

“아아.”

서한율이 주머니에서 수첩과 펜을 꺼냈다.

“잠도 안 오고, 밤바람을 쐬다 보면 좋은 가사가 떠오를 것 같아서 계속 발코니에 있었어요.”

“아아…. 난 또. 누가 거실을 돌아다니는 것 같아서 도둑이라도 들어왔나 했지.”

서한율이 살며시 웃었다.

“잠 깨워서 죄송해요. 이제 마음 놓고 주무세요.”

JE도 애써 입가를 올렸다.

“…그래, 너도 잘 자라.”

“네.”

달칵. JE는 서한율이 먼저 들어가고 난 뒤, 아무도 없는 거실을 눈으로 크게 둘러본 후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곤 천천히, 아주 조용히 심호흡했다.

놀란 심장이 쿵쿵 뛰었다.

‘그 눈….’

서한율의 뒤로 가끔 보이던 거대한 불덩이. 거기에 비뚜름하게 비치던, 파충류를 연상케 하던 한 쌍의 푸른 안광.

‘웃고 있었어. 분명히.’

한편, 한율은 이불 속에 놓았던 핸드폰을 확인하곤 미간을 구겼다. JE가 톡을 보낸 시각, 한율은 호텔 밖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숙소 요금이 저렴했던 거였나?’

그리고 한율은 귀신 같은 존재가 JE에게 자신의 부재를 알려주는 수단이 될 수도 있다는 걸 깨달았다.

‘쉽게 확신하진 못하겠지만.’

한율은 조용히 한숨을 쉬며 패딩을 벗었다. 그러다 문득 옷 냄새를 맡았다. 희미하게 피비린내가 났다.

“…….”

한율은 패딩을 고이 접어 캐리어 안에 넣었다. 이건우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곤 자신의 침대에 누웠다.

두 눈을 감으며 생각했다.

‘다음엔 스카이다이빙 하러 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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