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9화 (149/427)

* * *

4월 6일. 미국 텍사스주 휴스턴.

드라마 으로 스타 배우 반열에 오른 엠마 애커먼은, 한 편의 짧은 영화 촬영을 끝내고 할머니 크리스티나 애커먼의 집에서 지내고 있었다.

할머니 없이 혼자.

“할머니. 내일 저녁에 저, 보이밴드 콘서트 보러 가요.”

올해 아흔. 최근 부쩍 몸이 안 좋아진 크리스티나는 요양원에 머물고 있었다. 엠마는 면회 시간마다 크리스티나를 찾아가 함께 TV를 보고, 책을 읽고, 산책하며 시간을 보냈다.

엠마가 내민 콘서트 티켓을 유심히 보던 크리스티나가 미소 지었다.

“이름이 참 깜찍하구나.”

“노래하는 모습은 깜찍하고 거리가 멀지만요.”

무슨 주제든 상관없었다. 엠마는 크리스티나와 최대한 많이 대화하고 싶었다. 하지만 자질구레한 이야기는 수도 없이 한 상황.

엠마는 크리스티나가 최근 한국과 관련된 신문 기사를 주의 깊게 읽던 걸 떠올리곤 핸드폰에 영상을 띄웠다.

“봐요. 한국 보이밴든데, 멋있죠?”

“한국…?”

“네.”

“사람이 반짝반짝거리 게… 꼭 별 같구나.”

영상을 보는 크리스티나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엠마는 당황했다.

“왜 그러세요, 할머니? 어디 불편하세요?”

“아니, 아니다, 얘야.”

크리스티나가 눈가에 맺힌 눈물을 손수건으로 닦았다.

“예전에 내가 들려준 약혼자 이야기, 기억하니?”

비쩍 마르고 두 손이 손수건을 고이 접었다. 엠마는 크리스티나 앞에 쭈그려 앉으며 그녀와 눈을 맞췄다.

“네. 한국전쟁에 파병 갔다가 아주 딴사람이 되어서 돌아온 그분 말씀하시는 거죠?”

“얼마 전 알버트가 찾아와서 그러더구나…. 사실 내가 신경 쓰일까 봐 오래전부터 비밀로 하던 이야기가 있다고.”

알버트는 크리스티나와 나이 차이가 15살이나 나는 동생이었다.

“뭔데요?”

“로건, 그가… 50년 전 한국을 다시 찾아갔다가 실종됐다고 하더구나.”

“네…?!”

“그런데 정말 이상한 건.”

크리스티나가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그가 고향을 떠나기 전 가지고 있던 재산 대부분을 조카에게 줬다는 거야. 10년 넘게 일하면서 번 돈, 차, 자그마한 집까지. 마치… 돈이 필요 없는 먼 곳으로 떠날 사람처럼 말이지. 대체 왜….”

한쪽이 뿌예진 크리스티나의 푸른 눈동자가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왜 자신에게 큰 상처를 입힌 그 나라로 다시 돌아간 건지, 나는 잘 모르겠다. 잃어버린 것을 찾으러 간 건지, 아니면 다른 특별한 사정이 있었던 건지….”

엠마는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고민하다가 크리스티나의 손을 잡았다.

“설마 할머니 잘못이라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죠? 할머니가 끝까지 곁에 있었다면 그분이 타국에서 실종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고.”

“그건 아니란다, 얘야. 다만…. 한때 사랑했던 사람이자 친구가 먼 곳에서 거짓말처럼 사라졌다는 소식에… 놀랐을 뿐이야.”

엠마는 몸을 일으켰다. 그러곤 이제야 수십 년 전 실종된 친구의 소식을 듣고 슬픔에 빠진 크리스티나를 말없이 안아 위로했다.

사아…. 불어오는 바람에 정원수 나뭇잎들이 일제히 흔들렸다. 여전히 엠마의 손에 쥐어져 있던 콘서트 티켓도.

[EarthRabbit WORLD TOUR –THE TOUR-]

감흥이 없기는

[어스래빗 월드투어 ‘The Tour’ 첫 번째 LA 콘서트 성료]

…툭.

한율은 연예뉴스란에 올라온 기사를 읽다가 고개를 들었다. 앞자리에 탄 라이언의 고개가 통로 쪽으로 푹 꺾였다. 굉장히 피곤한 모양. 한율은 라이언의 머리를 조심히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바로 어제, 이번 투어 첫 시작인 LA 단독 콘서트를 마쳤다.

공연장을 가득 채운 관객들, 그들의 이름과 사진이 걸린 현수막과 한글로 적힌 각종 슬로건. 한국어로 된 가사까지 따라 부르는 그들의 모습에, 멤버들은 하나 같이 전율을 느꼈다고 했다.

마지막 노래를 부를 땐 박가람의 울먹거리는 모습이 전광판에 한참 동안 잡히기도 했다.

[또 올게요! 진짜로 또 올 거야! 우리 잊으면 안 돼요!]

한국말이었으나 몇몇 관객들은 박가람을 따라 울면서 무어라 크게 대답했다.

콘서트가 끝나고 호텔로 돌아온 뒤엔 모니터링만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아침 비행기를 타고 댈러스 포트워스 공항에 도착, 현재는 리허설을 위해 공연장으로 이동 중이었다.

나란히 앉은 이건우와 길우성이 어제의 콘서트 영상을 다시 핸드폰에 띄웠다.

“8시 비행기를 타고 3시간을 날았는데 도착해보니 낮 1시…! 우리의 2시간은 어디로 갔을까요, 건우 형님.”

“다시 LA로 돌아가면 생기지 않을까?”

한율은 고개를 돌려 차창 밖을 보았다.

수십 년 만에 돌아온 텍사스. 그러나 ‘로건 워커’로 살던 곳은 이곳과 한참 떨어진 샌안토니오로, 댈러스는 이번이 처음이기에 별 감흥은 들지 않았다. 같은 주라고 해도 워낙 땅덩이가 넓은 까닭이었다.

“한율이 넌 어디 가고 싶어? 식물원?”

옆에서 핸드폰으로 댈러스 지도를 살피던 유호가 물었다. 어스래빗은 내일 콘서트를 마치고 댈러스에서 하루 더 머물다가, 팬콘 준비 및 스케줄을 위해 귀국하기로 했다.

“여기 클라이드 워런 공원 앞 미술관이요. 이프림이 그러는데, 볼거리가 많대요.”

“오호. 표시해 놓을게.”

“형은요?”

“나는 일단 트램 타고 시내 돌아보고 싶어. 그러다가 가고 싶은 곳 보이면 내려서 무작정 탐험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

“그런데.”

길우성과 공연 영상을 보던 이건우가 문득 유호에게 물었다.

“존 F. 케네디가 댈러스에서 암살당하지 않았었나? 어릴 때 영화로 봤던 것 같은데.”

“여기?”

유호가 이건우에게 지도의 한 부분을 확대해 핸드폰을 내밀었다.

“지도에도 암살 현장이라고 적혔네….”

“갈래?”

“으음…. 아니. 가벼운 마음으로 가기엔 좀. 이 아래에 있는 전망대나 가자.”

“그래.”

존 F. 케네디 암살.

한율의 머릿속에 한 가지 기억이 떠올랐다.

한낮. 그곳을 떠나기 위해 살림살이를 정리하고 있을 때였다. 무료해서 켜놓은 흑백 TV에서 흘러나오던 정규 방송이 돌연 중단되고, 뉴스 앵커가 떨리는 목소리로 속보를 전했다.

존 F. 케네디가 암살당했다고.

그때, 앵커의 침통한 얼굴과 대조되는 천진난만한 얼굴이 흑백 TV 위로 불쑥 올라왔다.

『로건 삼촌! 정말 이거 나 주는 거야?』

당시 열 살이던 조카, 메이슨. 메이슨은 짧은 팔로 뚱뚱한 TV를 끌어안으려고 애썼다.

『그래. 분해하든, 팔아서 장난감을 사든 마음대로 해.』

『우히히힛!』

메이슨은 뭐가 그리 좋은지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면서 이상한 춤을 췄다.

『잇힝!』

56년이 흐른 지금은 66살의 노인이 되었을 터.

한번 떠오른 기억의 단상은 또 다른 기억을 연쇄적으로 끌고 왔다. 한율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감흥이 없기는.’

다음 날. ‘The Tour’ 두 번째 순서인 댈러스 공연장.

같은 이름을 걸고 하는 투어는 무대 구성과 세트리스트가 모두 같다. 그러나 공연장 무대마다 객석과의 거리, 위치, 설비 성능이 다른 까닭에 어스래빗은 아침부터 리허설을 하며 문제가 없는지 점검했다.

두 번째 리허설은 사전 리허설 관람 특전이 포함된 VIP 티켓 소지자 50여 명 앞에서 진행되었다.

[한율, 정말로 텍사스가 처음이에요?]

콘서트 시작 전, 짧은 팬 미팅 시간. 일부러 비싼 티켓을 사고 들어온 팬들답게, 그들은 한율이 텍사스 사투리를 사용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고양이 난로> 대사 부탁해도 될까요?!]

[물론이죠.]

그리고 한율의 토박이 못지않은 텍사스 사투리에 비명을 지르며 좋아했다. 텍사스는 처음 왔다면서 사투리를 구사하는 게 신기하고 재밌는 듯했다.

“우리 팀에 영어가 되는 멤버가 셋이나 있어서 다행인 것 같아. 팬들도 전혀 불편해하지 않고.”

팬들과 한 명씩 사진 촬영까지 끝내고 대기실로 돌아갈 때, 이건우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몇몇 분은 어설퍼도 열심히 생각하면서 영어로 말하는 모습 자체를 좋아하시는 것 같더라. 특히 남석이.”

“남석인 잘생겨서 그런 거 아닐까.”

“나도 팬분한테 흐뭇하고 따뜻한 시선 받았어…!”

“그래, 그래. 축하한다, 막내야.”

멤버들은 헤어 메이크업을 수정하고 첫 번째 곡 무대 의상으로 갈아입었다. 무대 의상은 대부분 빠르게 갈아입기 쉽도록 뒤에 똑딱이 단추나 지퍼로 되어 있었다.

“다치지 않도록 스트레칭 하고, 물도 미리 마시고.”

“헛차, 헛차.”

“나가기 전에 파이팅 한번 하자.”

데뷔 쇼케이스 때부터 단독 공연에 설 때마다 하게 된 의식 같은 행위. 멤버들은 한 손으로 서로의 등을 감싸며 모여, 가운데로 주먹을 뻗었다.

“어스!”

“래빗!”

“가자아!”

장내엔 고래의 울음소리가 잔잔하게 퍼지고 있었다.

우우웅…, 삐이…….

‘깜짝이야.’

무대와 가까운 스탠딩 자리. 멍하니 주변 사람에 맞춰 응원봉만 흔들던 엠마는, 신비로운 느낌을 주는 고래 울음소리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촤악! …텀벙.

대형 전광판에 어둑한 바다를 헤엄치는 고래의 실루엣이 그려졌다. 그리고 그 앞으로 조각상처럼 선 8명의 인영.

꺄아악! 관객들이 일제히 기대로 가득 찬 환호성을 질렀다.

『제가 로건 삼촌의 조카인 메이슨 워커입니다. …네. 20년 전 제가 직접 한국까지 가서 알아낸 건, 삼촌이 정말 증발하듯 사라졌다는 사실 하나뿐이었습니다.』

할머니의 상심을 달래줄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다가 수소문하여 닿은 연락. 엠마는 시작과 동시에 벽에 부딪힌 막막함을 느꼈다.

‘일단… 지금은 콘서트 관람에 집중하자.’

근처에 있는 관객이 자신을 알아보고 핸드폰으로 영상을 찍는 듯했지만, 엠마는 공영장 앞에서 산 어스래빗 응원봉을 흔들며 주변 사람들과 함께 외쳤다.

“어스! 래빗!”

* * *

[엠마 애커먼, ‘어스래빗’ 월드투어 콘서트장에?!]

[미국 현지 날짜로 7일 저녁 댈러스에서 열린 어스래빗 ‘The Tour’ 콘서트장에 배우 엠마 애커먼의 모습이 찍혀 화제다.

엠마 애커먼은 미국 드라마…(중략).]

-???? 머지 이 기시감은?

ㄴ[배우 이희우, 당당히 아이돌 덕밍아웃?!]<2년 전 어스래빗 데뷔 쇼케이스 다음 날 기사

ㄴ아 이거였네ㅋㅋㅋㅋ

-할리우드 배우도 한국 아이돌 콘서트 관람하는 구나.. 신기하당

ㄴ안 될 건 뭐 있나요?ㅎㅎ 우리나라 아이돌이 빌보드 1위도 하는 마당에

ㄴ빌보드 1위 찍으신 분들 덕분에 후배들도 그 덕 톡톡히 보는 중ㅎㅎ

-아 가슴 속에 차오르는 이거슨!!!!

ㄴ국뽕?

ㄴ실리콘?

ㄴ그대?

ㄴ위에 실리콘 도랏냐ㅋㅋㅋㅋㅋ

ㄴ실맄ㅋㅋㅋ콘ㅋㅋㅋㅋ

ㄴ야ㅡㅡ

-SNS에 당당히 콘서트 간 거 맞다고 인정한 것도 똑같넹

-누굴 보러 간 걸까? (˵¯͒⌄¯͒˵)

“어제 엠마 애커먼이 왔었다고…? 우리 콘서트에?!”

8일 아침. 조식을 먹기 위해 호텔 레스토랑에 모인 멤버들은 해당 기사를 보고 호들갑을 떨었다.

“그렇다네요.”

“아니, 오시면 오신다고 미리 연락이라도 해주시지….”

“왜?”

“어떻게?”

이건우가 주먹을 불끈 쥐면서 대답했다.

“I’m 엠마 애커먼!”

“자기소개로 그냥 통과야?”

“건우 형, 엠마 님이 형보다 두 살 아래인 21살이란 건 알지?”

“아니, 누추한 곳에 웬 귀한 분이…!”

“누추하다뇨, 그건 아니죠.”

차남석이 낮은 목소리로 정색하며 화내자, 박가람이 움츠러들며 시선을 피했다.

“아니, 그냥 장난삼아 한 농담인데….”

여전히 화난 얼굴로 차남석이 대답했다.

“네, 저도 장난이에요.”

“…너 이리 와, 인마. 한 살 위 형한테, 어? 그렇게, 어? 목소리 쫙 깔고, 어?”

“가람, 차남석 싸움 못 해. 쫄지 마.”

“라이언 네가 더 나빠….”

“써한, 뭘 그렇게 유심히 봐?”

한율이 물끄러미 엠마 애커먼의 기사를 보고 있자, 길우성이 이상한 얼굴로 웃었다.

“혹시… 기뻐서?”

“기쁜 얼굴로 보이냐?”

“아니. 평소처럼 심드렁하네. 어.”

한율은 ‘뒤로가기’를 누르곤 아무 기사나 클릭했다. 그러나 머릿속엔 기사 말미에 적힌 문단이 맴돌았다.

[한편, 엠마 애커먼은 SNS에 콘서트 관람 후기 외에 ‘1960년대 중반, 한국을 방문했다 실종된 텍사스 출신의 로건 워커 씨를 찾습니다. 크리스티나가 기다려요.’라고 적어 사람들의 궁금증을 자아냈다.]

한율은 커피를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아직 살아있었구나….’

반쯤 식은 커피는 유난히 썼다.

잠시 후, 호텔을 나선 어스래빗 멤버들은 유호가 알차게 짠 일정에 따라 움직였다. 호텔 앞에 진을 치고 기다리던 몇 명의 팬들도.

그러나 현지 코디네이터와 VJ, 매니저, 경호원들이 있어서 그런지 가까이 오거나 촬영을 방해하진 않았다.

“이번에 갈 곳은 어디죠, 리더?”

“라이언이 가고 싶다고 말한 수족관입니다. 바다생물뿐만이 아니라, 조류와 파충류, 나무늘보, 펭귄 등도 있는 곳입니다.”

중간에 점심을 먹기 위해 들어온 레스토랑. 미리 촬영 허가를 받고 예약까지 한 자리에 편히 앉았다. 주변 테이블은 이미 다른 손님들로 가득 찬 상태라, 팬들은 들어오지 못하고 레스토랑 앞에서 서성거렸다.

“펭귄 빨리 보고 싶다.”

“펭귄 하니까 생각났는데, 전에 워싱턴 갔을 때 우성이가 이언이 너한테 펭귄 그려진 슬리퍼 선물하지 않았어?”

웨이터들이 주문한 음식을 테이블에 차례대로 세팅했다.

“응. 책이랑 같이 뒀어.”

“그걸 왜 책이랑 같이 둬, 형.”

“더러워질까 봐.”

“……?”

“그러고 보니, 라이언. 이번에도 테디 만나러 갈 거야?”

테이블엔 VJ가 설치한 카메라도 있었지만, 멤버들은 늘 그랬듯이 알아서 편집해주겠거니 생각하며 편히 대화를 나눴다.

“아니. 안 만나도 될 것 같아.”

“난 뉴욕 콘서트 다음 날 제이슨 만나기로 했지롱.”

“제이슨? 아, 네 오랜 팬이자 친구?”

길우성이 히죽 웃었다.

“응. 시간 괜찮다고 해서, 29일 뉴욕 콘서트 초대권 보냈어. 동생이랑 같이 온대.”

제이슨은 10년 전 길우성이 너튜브에 올린 영상을 보고 춤을 배우기 시작한 소년으로, 작년 길우성을 만나기 위해 <뉴욕 K-POP 콘서트> VVIP 티켓을 끊기도 했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SNS로 연락을 주고받으며 친분을 유지하는 중.

한 사람은 댄스팀 소속, 다른 한 사람은 아이돌그룹에서 퍼포먼스 담당. 춤이란 공통 관심사가 있어 대화가 잘 통하는 모양이었다.

“좋아?”

“응. 그동안 열심히 갈고 닦은 내 영어 실력을 보여주겠어. 후후….”

“서한율.”

옆에 앉은 차남석이 한율을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넌 무슨 고민 있냐? 왜 이렇게 깨작거려.”

“그냥, 입맛이 없어서요.”

“어디 안 좋은 건 아니지?”

“네.”

한율은 고개를 끄덕이다, 시야에 스쳤던 시계를 바라보았다. 오후 1시 30분.

“우리 내일 몇 시 비행기였죠?”

“아침 10시 50분.”

인터넷에 엠마 애커먼을 검색해보니, 그녀는 최근 휴스턴의 한 양로원을 매일 드나들고 있었다. 그리고 SNS에 ‘로건 워커’를 언급한 건 이번이 처음.

‘크리스티나가 올해… 아흔.’

언제 눈을 감아도 이상하지 않을 고령이다.

지금까진 거리가 멀어서,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서, 막연히 잘 지내고 있든, 이미 숨을 거뒀든 그랬을 거라며 넘기고 살았다.

하지만 비행기로 한 시간밖에 걸리지 않는 거리에 아직 살아있고, 그리고 곧 숨을 거둘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마음 기저에서 한 가지 감정이 스멀거리며 올라왔다.

어쩔 수 없다고 합리화하며, 그녀의 마음에 크고 작은 상처를 입힌 미안함.

“팀장님.”

한율은 옆 테이블의 오 팀장에게 물었다.

“저 혼자 하루 늦게 귀국해도 될까요?”

다음 날, 휴스턴의 한 양로원.

모두가 잠든 늦은 시각. 은은한 푸른빛 마나가 넘실거리며 창문을 소리 없이 열었다. 마나는 아늑한 방을 가득 채웠다가 창문을 천천히 닫았다.

야밤의 침입자는 조용히 침대 옆에 마련된 의자에 앉았다.

60여 년 만의 재회.

“…….”

비쩍 마르고 주름진 크리스티나의 손을 내려다보는 한율의 눈에 푸른빛이 일렁거렸다.

입을 열어 내는 목소리는 ‘서한율’이 아닌, ‘로건 워커’의 목소리.

“크리스티나.”

잠들었던 크리스티나의 손이 떨렸다.

180으로 칩시다

먼 나라의 전쟁에서 돌아온 약혼자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 언어도, 기억도 모두 잃어버렸다.

가족과 약혼자를 바라보는 무심한 시선은, 마치 투명한 유리 너머로 그들의 행동을 관찰하는 듯했다. 그러다 손이 닿기라도 하면 거부감을 드러냈다.

크리스티나는 어떻게든 이전의 그로 되돌리고자 노력했다.

다정하게 단어 하나, 문장 한 줄을 가르쳐주고, 어떨 때는 장난을 치며 거리를 좁히려고 했다. 그리고 서서히 그가 고향인 이곳에 ‘적응’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을 때, 욕심을 부려보았다.

그게 실수였을까.

그가 다시 성큼 거리를 벌렸다.

『미안해, 크리스티나. 나 고자가 됐어.』

처음엔 노골적이고 직설적인 화법에 웃음이 나왔다.

『…오, 신이시여. 우리 귀여운 늑대에게 무슨 이런 끔찍한 형벌을…!』

기억과 함께 마음마저 모조리 사라졌다 해도 자신은 여전히 그를 사랑하기에, ‘그때 당신의 말을 장난처럼 웃어넘겨 다행이야’라고 말하는 순간으로 남겨지기를 바랐다.

차분하고 진지한 그의 눈을 마주하기 전까진.

크리스티나는 깨달았다.

그는, 로건은 정말로 성불구자가 된 걸 고백하는 게 아니었다.

이런 나날이 계속되어도 나는 당신과 결코 연인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못 박은 것이었다.

웃음이 흐려지고 눈물이 나왔다.

그동안 사랑과 배려란 이름으로 꾹꾹 눌러 참았던 아픔과 서운함, 배신감이 울음과 섞여 쩌렁쩌렁 목구멍 밖으로 나왔다.

대가를 바라는 건 사랑이 아니라고, 자신은 진정으로 그를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란 걸 깨달은 순간, 스스로 정립한 모순에 찔려 초라해지는 자신을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화도 났던 것 같았다.

그 분노 역시 그에게 퍼부었다.

“로건…?”

노화로 시야가 뿌예지지 않았다면, 방안을 가득 채운 이 아스라한 푸른빛 물결은 더 예쁘지 않았을까.

크리스티나는 그날로 헤어진 연인이자 오래된 친구인 로건을 향해 손을 뻗었다.

“날 데리러 와 준 거예요…?”

로건은 그녀가 퍼붓는 비난과 악담을 묵묵히 듣던,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 모습 그대로 여전히 젊고 멋있었다.

그에 비해 비쩍 마르고 주름진 제 손이 창피하다. 하지만 꿈인 게 분명하기에, 크리스티나는 마음을 놓았다.

전쟁에서 돌아온 뒤 로건은 한 번도 그녀의 손을 먼저 따뜻하게 잡아준 적이 없으므로.

“내겐 그럴 자격도… 마음도 없어, 크리스티나.”

크리스티나는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다행이네요. 아직 손녀에게 못 해준 이야기가 많이 남았거든요. 이렇게… 볼품없이 늙고 기억력도 나빠져, 했던 사실을 잊은 것일지도 모르지만.”

“당신은 전혀 볼품없지 않아.”

한율은 천천히 눈을 깜박이며 마주 미소 지었다.

“내 마음을 흔들리게 했던 그때처럼 여전히 멋지고 아름다워. 그리고….”

깊게 주름진 크리스티나의 눈가에 번지는 눈물을 닦아주며, 한율은 그녀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전했다.

“늘 고마웠다는 말을 이제라도 전할 수 있게 해줘서, 고마워.”

크리스티나는 눈물을 삼키며 웃었다.

“나도 그때 ‘꺼져버려, 고자 새끼야’라고 했던 말, 사과할 수 있게 해줘서 고마워요, 로건.”

크리스티나의 눈에 비치는 로건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도 조용히 웃었다.

두 사람의 작은 웃음소리, 나지막한 말소리를 따라, 아늑한 방을 채운 푸른빛의 마나 입자도 넘실넘실 흔들렸다.

다음 날 아침. 크리스티나를 만나러 온 엠마는 깜짝 놀랐다. 크리스티나가 여느 때보다 기운을 차린 밝은 모습으로 그녀를 반겨준 까닭이었다.

“무슨 좋은 일 있으셨어요, 할머니?”

크리스티나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래. 간밤에 아주 그립고… 좋은 꿈을 꾸었단다, 아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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