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1화 (151/427)

* * *

6월 5일 수요일 새벽. 경기도의 한 글램핑장 주차장에 뮤닷 로고가 그려진 차량과 버스가 줄줄이 들어섰다. 7월 첫 방송 예정인 제작팀이었다.

에 출연할 보이그룹 6팀의 차량은 촬영 세팅이 모두 끝난 9시 무렵부터 하나둘 도착했다.

어스래빗은 세 번째로 도착했다.

차에서 내리자, 멀리서 봐도 서로 어색하게 인사하는 두 팀이 보였다. 2017년 7월에 데뷔한 ‘그레이트7’과 2018년 8월에 데뷔한 ‘원제로’였다.

“안녕하세요!”

“아안녕하십니까아!”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으면서 활발하게 인사. 두 팀의 아이돌이 어스래빗 멤버들을 돌아보며 고개를 꾸벅였다.

“어,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원제로 멤버들은 어스래빗이 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하는 얼굴이었고, 그레이트7 멤버들은 어스래빗의 등장에 정말 놀란 표정이었다.

원제로의 변지욱이 촐랑촐랑 뛰며 다가왔다.

“아아니, 이게 누구야! 얼마 전 월드투어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돌아온 지구토끼단이잖아?!”

그렇게 바보는 아니야

차에서 내리기 전 마이크를 착용한 상태라, 어스래빗 멤버들은 말실수에 주의하며 두 팀 멤버들과 인사를 나눴다.

원제로의 라일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어스래빗이랑 우리 진짜 인연인가 봐. 자꾸 마주쳐?”

“여기 인연 아닌 사람이 어디 있어요.”

박가람이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두 손을 벌렸다.

“데뷔한 순간부터 모두 K-POP을 알리는 동료들인데.”

“오오.”

“가람이 형이 웬일로 어른스러운 발언을?”

“라고, 우리 리더의 방송 버전 말투를 흉내 내어 보았습니다. 이제 며칠 함께 녹화할 사인데, 카메라 유무에 따른 태도 변화를 미리 알려드리는 게 순서···.”

“가람아, 잠깐 저기 가서 나랑 면담 좀 할까?”

“놓아라! 키 크면 다냐?!”

“와···. 키 진짜 크시다···.”

그레이트7의 멤버가 멀어지는 둘을 보며 감탄했다.

“어스래빗 분들 다 키 크셔.”

“비주얼이랑 비율도 진짜.”

꼭 오늘 어스래빗과 처음 만난 사람들처럼. 하지만 이것도 그들 나름대로 조금이라도 오디오나 카메라에 잡히기 위한 멘트일 것이다. 호기심과 동경이 섞인 눈빛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행동 또한.

한율은 그레이트7의 완언에게 물었다.

“우리도 여기 나란히 서면 되나요?”

“네? 아, 네. 편하게 서시면 될 것 같아요. 아니, 정해진 건 없는 것 같지만, 네.”

왜 이렇게 허둥대.

“우리 반년 만에 보는 거죠?”

“네. ···아, 영화 신인상 받은 거 축하드립니다.”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축하드립니다.”

“신인상, 축하해요.”

한 명이 시작하자 다른 아이돌도 한율에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 반사적으로 ‘감사합니다’ 말하며 꾸벅이는데, 그 사이로 변지욱이 끼어들어 한율의 어깨를 두드렸다.

“축하해용.”

“감사··· 하다.”

“와, 안 넘어오네.”

옆에 있던 길우성이 웃음을 터뜨렸다.

“감사하다래.”

웃음은 다른 이들에게도 번졌고, 한율은 변지욱을 가느다란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머리를 거칠게 헝클이듯 쓰다듬었다.

“으앗! 샵에 갔다 왔는데!”

“안 갔다 왔잖아.”

“흐흣, 티 나? ···아니, 손 냄새는 왜 맡아!”

“어? 다른 분들 오신 것 같은데?”

또 다른 새카만 밴이 주차장으로 들어왔다. 원제로의 유지가 고개를 기울였다.

“블루액션?”

밴에는 고동 엔터를 나타내는 귀여운 고둥 캐릭터 스티커가 붙여져 있었다. 이내 블루액션 멤버들이 차에서 내리며 잰걸음 혹은 뛰어서 다가왔다.

“아안녕하세요옵!”

블루액션에 이어서 도착한 다섯 번째 팀은, 2016년에 데뷔한 고양고양 엔터의 7인조 보이그룹 ‘하울링’. 마지막으론 길우성이 나오기를 바랐던 6인조 보이그룹, ‘풀썸’이 합류했다.

“이렇게 모이니까 진짜 많다.”

“다해서 몇 명이지?”

“원제로 10명, 어스래빗 8명, 그레이트7 7명, 하울링 7명, 블루액션 7명, 풀썸 6명. 총 45명이네요.”

“꼭 수련회 캠핑 온 것 같아.”

“비슷하지 않아?”

모두의 인사가 얼추 끝나자, 그들 앞에 쭈그려 앉은 PD가 마이크를 들었다. 출연자들이 그를 주목했다.

[아이돌의 재발견, OT에 오신 여러분 환영합니다.]

와아아! 그들은 우렁차게 환호하며 박수쳤다.

[는 그동안 뛰어난 실력을 갖추고 있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대중에게 그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한 아이돌을 모아, 그 매력과 능력을 마음껏 발산할 수 있는 장을 만들어주고자 기획된 프로그램입니다.]

와아아! 더 커진 출연자들의 환호성.

[그러려면 우선 여러분들이 서로에 대해 알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하는 게 좋겠다고 판단되어, 이렇게 1박 2일 오리엔테이션을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소속 그룹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일단’ 보컬, 랩, 퍼포먼스 부문으로 나뉘게 됩니다.]

PD가 한 호흡 쉰 후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럼 오늘 하루 함께 할 조원이자 룸메이트부터 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카라반은 총 9채. 각각 5명씩입니다.]

잠시 후.

한율은 캐리어를 들고 한 카라반 앞에 섰다. 제작진에게 받은 숫자 5가 적힌 쪽지와 현재 카라반에 걸린 숫자 패널을 확인했다.

“안녕하세요.”

낮은 목조 테라스 계단을 올라 카라반 안으로 입장. 그러나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카메라가 있으므로 자연스럽게 혼잣말을 중얼.

“내가 처음이구나.”

구석에 캐리어를 놓고 카라반 안을 살폈다. 두 명이 함께 잘 수 있는 널찍한 매트리스 하나와 이층침대 하나. 좁지만 단독 샤워실과 화장실도 있고, 냉장고나 싱크대 등 필요한 살림도 모두 갖춰져 있었다.

카라반 한 채당 5명이 사용할 거라고 했으니, 한 명은 바닥에서 자야 할 터.

쏴아아. 한율은 비치된 전기포트에다 물을 가득 담아 스위치를 올렸다. 그러고 컵에다 따로 챙겨온 레몬 생강청을 덜어 넣는데, 옆 카라반이 시끌벅적해졌다.

와아! 반갑습니다!

한율은 물이 끓는 것을 기다리며 싱크대에 기댔다. 제작진은 사전 미팅의 인터뷰를 토대로 오늘 함께 할 조원을 나눴다고 했다.

‘누가 올까.’

자박자박. 그때 누군가 자갈길을 밟으며 이쪽으로 점점 다가오더니, 한율이 있는 카라반 앞에 멈췄다.

“계세요···?”

귀에 익은 목소리.

한율은 밖으로 나가 조원을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

카라반 안을 기웃거리려던 원제로의 현강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와, 선배님···! 안녕하세요! 5번 카라반 맞으세요?”

“네, 들어오세요.”

“와···.”

현강희는 반갑기 그지없는 얼굴로 캐리어를 번쩍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레몬 생강차 마실래요?”

“주시면 감사히 마시겠습니다!”

“네.”

“와아···.”

뭐가 그리 신기하고 좋은 걸까. 한율은 현강희가 연신 내뱉는 감탄을 들으며 새 컵에다 레몬 생강청을 덜었다.

틱. 마침 전기포트에 넣은 물이 뜨겁게 끓었다.

“그런데 왜 대명사가 ‘현포도’에요?”

현강희의 가슴팍에는 한율처럼 테두리가 빨간색으로 된 별 모양 이름표가 달려 있었다. [현강희(19)/현포도].

한율의 이름표엔 [한율(20)/연기천재돌]. 이름 뒤에 적힌 건 제작진과의 미팅 당시 멤버들이 한율에게 붙인 대명사였다.

“제가 연습할 때마다 포도 그림이 그려진 티셔츠를 자주 입었거든요. 진짜 포도도 엄청 좋아하고. 그리고 머리까지 포도색이라고, 현포도라고 지어줬어요.”

“귀엽네요.”

현강희는 머리를 긁적이며 웃다가 한율이 내미는 차를 받았다.

“뜨거우니까 조금 식혀서 마셔요.”

“넵.”

이윽고 5번 카라반에는 하울링의 리더인 다감, 풀썸의 강속, 그리고 다시 원제로의 임승준이 도착했다. 한율은 세 사람에게도 레몬 생강차를 나눠주었다.

그들은 바닥에 편히 앉아 차를 마셨다.

“선배님은 대명사가··· 왜 거북이에요?”

다감이 웃으며 대답했다.

“생각하는 거랑 행동이 느려터졌다고, 멤버들이 지어줬어요.”

“편하게 말 놓으세요, 선배님.”

“어, 그래도 돼?”

“선배님 안무할 땐 엄청 빠르시던데요? 혹시 속도를 아껴뒀다가 무대에서만 쏟는 타입?”

“나도 어릴 때 엄마한테 왜 그렇게 동작이 굼뜨냐고 혼 많이 났었는데.”

“이름이 강속인데?”

강속이 감았던 눈을 아주 천천히 크게 뜨며 입을 벌렸다. 그러곤 느릿느릿 웃었다.

“하, 하, 하.”

그 모습은 흡사 유명한 애니메이션 영화의 나무늘보 캐릭터. 예고 없이 훅 치고 들어오는 리얼한 표정 연기에, 네 명은 차를 마시다 말고 웃음을 터뜨렸다.

삑, 치직.

바깥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반갑습니다, 출연자 여러분. 잠시 후 OT 1교시가 시작될 예정이오니, 출연자 여러분은 관리동 옆 펜션 앞으로 모여주시길 바랍니다.]

펜션 앞에 45명의 아이돌이 모였다. 펜션 옆에는 작은 야외무대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퀼리티로 보아 뮤닷 측에서 이번 촬영을 위해 특별히 설치한 것으로 보였다.

“크으, 뮤닷 클라쓰.”

한율은 다른 조를 살폈다. 보컬과 래퍼, 퍼포먼스가 특기인 이들이 15명씩 딱딱 맞아떨어졌을 리 없다. 그러나 자신 없는 곳에 배정되었다고 불안해하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제작진이 알아서 잘 조율한 모양.

‘개인적인 사이까진 고려 못 한 것 같지만.’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어떻게 알고. 방송가에 소문이라도 파다하게 났으면 모를까.

“포지션끼리 조 나눈다고 들었을 때부터 불안하기는 했는데.”

임승준이 마이크를 손으로 감싸며 한율에게 속닥거렸다. 한율이 바라보는 8조를 살피며.

“저거 요즘도 빡치면 욱하는 성질머리 나오지 않냐?”

8조엔 차남석과 정민솔이 함께 있었다.

예전에 인터넷에 정민솔이 WB래빗 연습생 시절, 현재 어스래빗 멤버들을 포함해 연습생들에게 막말했다는 이야기가 폭로된 적이 있었다. 당시 피해자 목록엔 차남석이 없었다. 오히려 정민솔이 차남석 앞에서만 얌전했다고 잠깐 거론되었을 뿐.

정민솔이 차남석의 심기를 건드려 주먹다짐까지 할 뻔한 사실도, 어스래빗 멤버들과 좌 대표, 임승준만 아는 일이기도 하고.

한율은 임승준처럼 마이크를 손으로 감쌌다.

“예전보다 더한 시비를 걸지만 않으면 괜찮을 거예요. 남석이 형이 바보도 아니고. 그리고 민솔이 형도 그렇게 바보 아니잖아요.”

“하긴. 그리고 저놈, 요즘 행동 많이 조심하거든. 팬들이 실드쳐주는 것도 한두 번이지, 계속 비슷한 이슈가 자신을 중심으로 터지면 어떻게 될지 뻔히 짐작 갈 테니까.”

그때였다.

아이들이 웅성거리며 한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바로 옆줄에 선 4조에서 변지욱이 호들갑을 떨었다.

“대박. 옥정훈 선배님 아냐?”

지금까지 별다른 부정적인 이슈 없이 활발하게 방송 활동을 하는 1세대 아이돌. 까마득한 대선배가 웃으면서 등장했다.

한율과는 작년, 뮤닷 <감성 푸드트럭>에서 MC와 게스트로 만난 적이 있는 사이였다.

PD에게 핸드마이크를 건네받은 옥정훈이 45명 앞에 섰다.

[안녕하세요, 출연자 여러분. 오늘 OT의 진행을 돕고자 잠시 찾아온 옥정훈입니다. 반갑습니다.]

1교시는 조별 미션으로, 제작진에게 받은 미션 카드의 곡 무대를 함께 선보이는 것이었다. 한율이 속한 5조에 주어진 미션 곡은, 에드 시런의 .

[준비 시간은 한 시간. 이 정도면 충분하겠죠?]

한 시간?! 생각보다 짧은 연습 시간에 출연자들이 수군거리려던 찰나, 옥정훈이 얄밉게 웃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이미 데뷔한 프로니까.]

데뷔 2년 차부터 4년 차까지. 이 자리에 모인 아이돌 45명의 자존심을 제대로 건드리는 말이었다.

[그리고 가장 높은 평가를 받은 보컬, 퍼포, 랩 세 팀에겐, 점심으로 한우가 주어집니다.]

승부욕과 식욕도 건드렸다.

잠시 후 5번 카라반. 다감이 조원들을 향해 물었다.

“이 노래 모르시는 분?”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2017년 발표된 는 빌보드 핫100 차트에 57주나 머물렀을 정도로 굉장히 유명한 곡이었다.

개인적으로 한율은 보컬 트레이닝을 받을 때 이 노래를 종일 부른 적도 있었다. 너무나 달달한 사랑 노래라 조금 힘들었던 기억이 났다.

“다 아는 것 같으니 일단 한 명씩 불러보고 나서 파트를 정하고, 후렴구는 두 명 혹은 세 명씩 화음을 맞추면 될 것 같아요.”

“찬성.”

시간이 없으므로 바로 핸드폰 뮤직 앱으로 노래를 재생했다.

카라반 곳곳에 설치된 카메라로 모든 모습이 촬영되는 상황. 그들은 진지하게 노래를 불렀다. 한율은 파트 분배 기록을 위해 연습장에다 가사를 썼다.

“진짜 다들 노래 잘한다. 그럼 이제 마지막으로 한율이 차례네?”

한율은 자신이 적은 가사를 보며 노래를 불렀다. 노래를 들은 조원들은 만장일치로 한율에게 도입부와 마지막 파트를 양보했다. 이유는, 듣는 이를 순식간에 몰입시키는 뛰어난 감정 연기와 발음.

강속이 웃으며 말했다.

“우리 조에 ‘연기천재돌’이 있어서 다행이야.”

“가사를.”

임승준은 바닥에 놓인 셀캠으로 한율이 적은 가사지를 찍었다.

“해독해야 할 암호 수준으로 적기는 했지만요.”

“다들 가사 알잖아요.”

현강희가 한율의 연습장을 가져가며 감탄했다.

“선배님은 필기체도 진짜 멋있게 잘 쓰시네요.”

“그냥 악필이에요.”

“아.”

의 첫 방송 날짜는 7월 5일 금요일 밤으로 잡혔다.

* * *

어스래빗이 1박 2일 녹화를 마치고 온 다음 날인 7일 오후 6시. 신곡 가 국내 및 해외 음원차트에 동시 공개되었다.

그리고 다음 날인 8일, 연예뉴스란 메인.

[어스래빗 M/V 공개 하루 만에 7백만 뷰 돌파]

[보이그룹 어스래빗의 인기 상승도가 심상치 않다.

어스래빗이 7일 오후 6시 공개한 디지털 싱글 가 8일 자정을 기해 국내의 한 음원사이트와 일본의 음원사이트 실시간 차트에서 각각 3위를 기록한 데에 이어, 음원과 함께 공개된 M/V는 24시간 만에 7백만 뷰를 돌파하며 자체 기록을 경신했다.

이번 신곡 는 지금까지 선보였던 기존 곡들보다 조금 어둡지만, 한층 더 파워풀해진 안무와 깊어진 무대 연기, 탄탄하게 성장한 보컬과 랩이···(중략).]

돌아다닌 보람이 있네요

반쯤 내려앉은 어둠. 온갖 아름다운 투명한 조각 뒤로 소녀가 지나간다. 불그스름한 뺨과 미소 짓는 입술.

아스라하게 사라지는 소녀의 모습을 담은 채 닫히는 눈. 처연하게 무릎 꿇은 소년의 뺨 아래로 눈물이 흘러내린다.

떨어진 눈물이 손등을 적시기 직전, 잿빛으로 멈추는 시간.

음률이 섞인 속삭임.

[I know I'm lost.]

[I know I'm obsessed··· with fantasy.]

삐이이···. 고래의 아련한 울음소리에 정지된 순간이 색을 되찾는다. 동시에 휘몰아치는 슬픔에 찔린 듯, 깊은숨을 몰아쉬는 소년.

주룩. 손등과 무릎을 타고 바닥에 떨어진 눈물은 불투명한 은빛으로 변한다. 영상은 순식간에 번지는 은빛을 따라 균열 진 대리석을 달려, 노을로 물든 거대한 저택 로비를 비춘다.

제각기 누군가를 찾는, 슬픈 모습으로 멈춘 8명의 그림자.

삐이이···.

영상이 암전되고, 본격적으로 노래가 시작되었다.

[EarthRabbit(어스래빗) - ‘Shadowy’ Official MV]

[조회수 7,129,458회 · 2019. 6. 7.]

-[빨리 콘서트에서 이 무대를 보고 싶습니다. :)]

-차남석 빨리 보험 들어 얼굴 보험 들라고

-[누가 감히 이 소년들을 홀리고 차버린 건가요?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제가 이 소년들에게 홀렸는데 찰 사람이 옆에 없네요. 제가 직접 차이러 가야 하나요?]

-이번 노래 진짜 분위기랑 노래, 랩, 가사, 퍼포, 스타일링 다 미쳤네

-난 잃었어, 나를 배신하려던 (죄로), 널 잃었어. 이 중2병스러운 가사가 이렇게 멋질 일이냐고

-[애들 연기 다 미쳤어!]

-울지 마 울지 마 울지 마 울지 마 울지 마 울지 마 울지 마 울지 마

-[1:34 우성의 춤은 예술 그 자체입니다.]

-아련하면서 처절한데 퍼포먼스는 관절 걱정되는 예술이고 율톢이랑 가람이 보컬 음색 쫙쫙 뻗어나가는 거에 흐를룰루 떨림

ㄴ흐를룰루ㅋㅋㅋㅋㅋ

ㄴ아니 의성어가 정말 이렇게밖에 표현이 안 돼요ㅜㅜ

-어스래빗 멤버 전원 숙소에서 백호영화제 신인남우상 수상자한테 감정 연기 집중 특강 듣는 거 아니냐

ㄴ어쩌면 투어 내내 붙잡혀서 특훈 받았을지도

ㄴ웃긴데 그럴싸하네요

-나 이런 거 좋아하는구나

-[이 영상을 계기로 데뷔곡부터 차례대로 모든 영상을 보고 있습니다. 시간에 따라 점점 성장하는 그들의 모습은 미소를 자아냈지만, 이 노래는 펄쩍 뛰어오르는 도약으로 내 심장을 흔들어놓았습니다. 짜릿하군요.]

-라이언 미모 레전드 찍었네

-중간에 광기 어린 미소 뭐냐고 나도 짓게 되잖아

-놔 봐요. 쟤네가 나 꼬셨다니까? 아 좀 놔 봐

-여러분, 다음 주 11일 컴백무대에서 어스래빗 멤버 중 한 명의 복근 공개가 예정되어 있습니다. 커밍 쑨.

‘이런 건 굳이 상기시키지 않아도 되는데.’

8일 토요일 밤. 스타믹스 지헌 주연의 공포 영화 <입> VIP 시사회에 가는 길. 한율은 뮤비에 달린 댓글을 훑다가 작게 한숨 쉬었다.

“너희 뮤비 내일이면 천만 찍을 것 같은데 웬 한숨이야. 설마··· 기대에 못 미치냐?”

옆에는 시사회에 함께 초대받은 박현우가 있었다.

한율은 핸드폰 전원을 가볍게 눌렀다.

“그럴 리가요.”

시사회가 열릴 극장 상영관 앞에는 초대 손님들을 촬영하기 위한 기자들이 모여있었다. 그들은 한율과 박현우가 함께 등장하자 일제히 셔터를 눌렀다.

차카차카차칵.

두 사람은 포토존에 올라가 3초 남짓 미소 지으며 인사하곤 내려왔다.

“와줘서 고마워, 얘들아.”

배우 대기실. 지헌이 환하게 웃으며 두 사람을 반겼다. 한율은 오면서 준비한 축하 꽃다발과 선물을 지헌에게 건넸다. 작년 영화 <고양이 난로> 때와는 반대였다.

“영화 개봉 축하드려요, 선배님.”

“영화 대박 납시다, 형님.”

“고마워, 고마워. 인증샷 찍을까?”

지헌이 셀카 모드를 실행한 핸드폰을 높이 들었다. 한율과 박현우는 자연스럽게 지헌의 양옆에 서서 미소 지었다.

차칵.

“SNS에 올려야지.”

지헌이 신난 얼굴로 사진에다 이런저런 효과를 넣는 동안, 한율은 바로 근처 의자에 가만히 앉아있던 JE에게 인사를 건넸다. 지난번 스위스에서 돌아온 뒤로 약 4개월 만이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어. 하이.”

다른 스타믹스 멤버들은 보이지 않았다.

“투어 다녀오느라 고생했다. 그래도 신곡 반응으로 바로 이어지니까 잘 다녀왔다 싶지?”

“네. 여기저기 돌아다닌 보람이 있네요.”

“괜히 돈 있는 기획사들이 신인들 데뷔하자마자 프로모션 투어 보내는 게 아니라니까. 소속사 선배한테도 고마워해. 월드 투어 준비하는 데에 돈이 얼마나 깨지는데. 그 준비 자금을 누가 다 벌었겠냐?”

한율은 스타믹스의 후배 그룹인 V12가 데뷔 초에 아시아와 북미로 프로모션 투어를 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아무리 소속사가 FJ그룹 산하 계열사라 하더라도 무턱대고 퍼주진 않았을 테니, 거기엔 스타믹스가 고생하며 번 돈이 적잖이 들어갔을 터다.

“네. 선배님들은 투어 계획 없으세요?”

“우린 가을 예정. 그나저나 너희 뮤닷에서 새 프로그램 찍었다며? 어땠어?”

“애들이랑 상영관 안 들어가고 뭉그적거리더니, 한율이 기다리던 거였어?”

지헌이 대화 도중 불쑥 끼어들며 물었다. JE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뚱하게 받아쳤다.

“아니거든?”

“전 잠깐 다른 분들에게 인사드리고 올게요.”

“그래.”

한율은 아까부터 이쪽을 힐끗거리는 <입>의 영화감독에게 다가가 개봉 축하 인사를 건넸다. 신인 영화감독은 기다렸다는 듯 환하게 웃으며 악수를 청했다.

“감사해요, 한율 씨. 평소 지헌 씨에게 얘기 많이 들었어요. 한율 씨가 출연한 작품도 모두 봤고요.”

“감사합니다.”

“다음 작품 계획은 잡힌 게 있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그러곤 잡은 손을 도통 놔주지 않는다.

“당분간은 본업에 집중하고 싶어서 보류 중이에요.”

“어머, 이런 욕심쟁이. 역시 실력만큼이나 주관도 뚜렷하시네요.”

“칭찬 감사합니다.”

주연배우 중에는 3년 전, 제유의 솔로곡 <이면(the back)> M/V에 함께 출연했던 모델 출신 배우 김수진도 있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어, 저 기억하세요?”

“그럼요. 같은 뮤직비디오에 출연했었잖아요.”

한율은 그에게도 준비한 꽃다발을 건넸다.

“영화 출연 리스트에서 선배님 보고, 준비했습니다.”

“와아···. 감사합니다. 저기, 그럼 실례가 안 된다면 사진 한 장만 같이 찍을 수 있을까요?”

“물론이죠.”

한율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곤 그와 함께 셀카를 찍었다.

상영관으로 들어간 후에도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묵례로 인사하고, 스타믹스 멤버들 뒷줄에 착석했다.

스타믹스 멤버가 한율 옆에 나란히 앉는 JE를 돌아보았다.

“손지은, 너 왜 뒤에 앉냐?”

“무서운 장면 나올 때 놀라게 하려고.”

“와, 손지은 인성 실화냐.”

“인터넷에 올리자.”

JE는 못 들은 척 좌석에 편히 앉은 채 팔짱을 꼈다. 곧 영화감독을 비롯한 주조연 배우들이 등장, 공포 영화 <입>의 VIP 시사회가 시작되었다.

한율이 한밤중에 공포 영화를 관람하는 동안, WB래빗 어스래빗 연습실에선 신곡 연습이 한창이었다.

“마지막으로 라이브 한번 하고 끝내자!”

“네에에···.”

볼륨을 낮춘 inst 버전이 흘러나오고, 그들은 거친 호흡에도 음정이 흔들리지 않도록, 안무와 표정 연기가 흐트러지지 않도록 집중하며 연습을 마무리했다.

“으가가각···.”

격한 안무 연습으로 혹사당한 근육과 관절을 적절한 스트레칭으로 달래던 중, 박가람이 앓는 소리를 내며 바닥에 철퍼덕 쓰러졌다.

“진작에 헬스장 열심히 다녀서 식스팩 검사받길 잘했지, 컴백 이랑 겹쳤으면 레알 빡셀 뻔···.”

“형은 운동보다는 식단 조절하는 게 더 힘들지 않았어?”

“흐윽···. 나트륨은 참아도 탄수화물 끊는 거는 진짜 너무 힘들지 않냐? 맛있는 건 왜 다 고열량인 건데?”

“형이 그런 음식 취향인 거지. 써한 봐. 요 며칠 양념 전혀 안 한 닭가슴살이랑 샐러드, 별 불만 없이 잘 먹으면서 꿋꿋하게 운동까지 하잖아.”

“걔는 치킨을 싫어하는 시점에서 이미 우리와는 다른 종족이야.”

차남석이 웃으면서 박가람의 옆을 지나쳤다.

“우리가 아니라 형이랑 다른 거죠. 같이 묶지 말아 줄래요?”

박가람이 더듬더듬 손을 뻗어 자신의 핸드폰을 집었다. 서글픈 표정으로 셀카를 찰칵.

“사진 파일명은, 한 살··· 아래 동생이··· 얄미운··· 나.”

“···하.”

그때 자신의 핸드폰을 확인하던 강보배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왜?”

“스팸? 아니면 사생?”

강보배가 고개를 흔들었다.

“동생이 학교에서 어떤 애랑 심하게 다퉜나 봐. 그런데 부모님이 아무리 싸운 이유를 물어도 대답도 안 하고, 지금은 방에 문 걸어 잠그고 안 나온다고 나보고 전화 좀 해보래.”

“저런.”

강보배는 재차 한숨을 내쉬며 연습실을 나갔다.

“보배 동생이 올해 몇 살이지?”

“열일곱 살이요. 고1.”

“음, 아직 전투력이 상승 중인 나이군.”

어느덧 밤 11시. 그들은 슬슬 각자 할 일을 위해 움직였다. 라이언은 다음 촬영에서 선보일 노래 연습을 위해 보컬 연습실로 향했다.

“···아, 라이언.”

그러다 보컬 연습실에서 나오던 강보배와 마주쳤다.

“동생은? 통화했어?”

“어. 그런데···.”

강보배가 주변을 살피더니 속상한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왜? 심각한 일이야?”

“잠깐 상의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 괜찮아?”

라이언은 고개를 기울였다.

“······?”

한율이 숙소로 돌아온 건 새벽 1시가 될 무렵이었다. 시사회가 끝나고 뒤풀이 회식에 잠깐 참석했다가 와보니 이 시간이었다.

“어서 와, 하뉼.”

“영화는 어땠어?”

거실엔 강보배와 라이언이 소파에 앉아 TV를 보고 있었다. 므앙. 캣타워 높은 곳에 누워있던 달냥이 폴짝폴짝 내려왔다.

“‘입을 함부로 놀리지 말자’라는 교훈을 주는 영화였어요.”

“재미는?”

한율은 말없이 제게 종종거리며 달려온 달냥을 안아 들었다.

“별로였구나.”

“단순히 내 취향이 아닌 건지도 몰라요. 현우 형은 나름 재밌었다고 했거든요.”

“오호.”

“그런데 안 자고 뭐 해요? 피곤하지 않아요?”

“한율이 너한테 물어볼 게 있어서.”

한율은 소파에 앉아 잠시 강보배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곤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전 괜찮아요. 형이 하고 싶은 거잖아요.”

“정말?”

“다른 멤버들도 전부 괜찮다고 했다면서요. 그리고 할 말은 해야죠. 왜 참아요.”

강보배가 슬쩍 웃었다.

“응.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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