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쏴아아.
현강희가 좋아하는 비는 <로얄K뮤직> 생방송이 시작되고, 어스래빗이 <락뮤닷>에 이어 두 번째 1위를 차지하고 기분 좋게 퇴근할 때도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비는 내일부터 온다고 하지 않았나? 바람도 어마무시하게 부네.”
“하하하. 그들에게 또 속았구나, 막내야.”
“그래도 내일은 스튜디오 촬영이라 다행이다.”
“그러게.”
“다 왔당.”
“오늘 수고하셨습니다.”
숙소 지하 주차장. 어스래빗 멤버들은 차에서 내리며 매니저들에게 인사했다.
“그래. 내일 아침 6시에 태우러 올게.”
“네엡. 안전 운전하세요!”
“이리 줘, 같이 들자.”
멤버들이 한율이 챙긴 도시락 가방을 하나씩 가져갔다. 라이언은 도시락 가방을 소중히 품에 안았다.
“아니, 우리가 다 들어야지. 설거지도 우리가 하고.”
“가위바위보 해서 진 사람 두 명이 설거지하기 어때?”
“콜.”
덕분에 한율은 홀가분하게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차남석이 다른 멤버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냥 내가 할게요. 맛있는 밥을 먹었는데, 당연히 해야죠.”
“···그렇게 말하면 우리가 뭐가 되냐.”
“염치없는 사람?”
“난 염치가 없으므로 차남석에게 넘기겠다.”
“염치없는 박다람이.”
숙소는 오늘 새벽에 나왔을 때처럼 캄캄하고 조용했다. 달냥은 활동 기간 내내 혼자 장시간 방치하는 게 미안해서 부모의 집에 잠시 맡겼다.
“오우, 습해. 제습기 켜야겠···, 잉?”
거실 전등 스위치를 켜자마자 길우성이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곤 TV 옆 선반을 가리켰다.
“달냥이 장난감이 원래 저기에 있었나?”
“응?”
“뭐야, 무섭게.”
“하지 마라, 길우성.”
“아니, 분명 내가 오늘 새벽에 잘못 건드려서 떨어뜨리고, 선반 두 번째 칸에다 놨던 기억이···.”
유호가 눈을 부리부리하게 뜨며 길우성의 양 볼을 잡아당겼다.
“흐즈 믈르그. 므습드그.”
“으그극.”
“아니, 잠깐. 뭔가 이상해.”
거실과 주방을 둘러보던 강보배의 표정이 돌연 심각해졌다.
“나 오늘 새벽에 나가기 전에 분명히 우유 마시고 컵을 테이블에 뒀거든? 그런데··· 컵이 없어. 싱크대에도, 컵 선반에도.”
툭. 길우성의 볼을 잡고 있던 유호의 손이 힘없이 풀렸다.
유호가 굳은 얼굴로 입가를 올렸다.
“너까지 왜 그래, 보배야. 혹시 뭐 깜짝 카메라··· 뭐 그런 거 찍는 거야? 납량특집으로?”
한율은 그들을 지나쳐 자신의 방문을 열었다. 환하게 조명을 켜서 방 안과 드레스룸, 욕실 겸 화장실을 살폈다. 발코니도. 딱히 달라진 점은 없었다.
“하뉼, 잠깐 들어가도 돼?”
문 앞에서 라이언이 물었다. 라이언의 손에는 팬에게 선물 받은 도청·몰카 탐지기가 들려 있었다.
“네.”
라이언은 탐지기를 들고 방 구석구석을 살폈다. 탐지기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조용하네. 다행이다.”
“고마워요, 형.”
“응.”
한율의 방을 나간 라이언은 이번엔 길우성과 차남석이 사용하는 방으로 향했다. 한율은 잠가놓은 책상 서랍을 확인했다. 안인섭에게서 빼돌린 파일을 저장한 외장하드는 무사했다.
그 순간이었다.
길우성과 차남석의 방에서 당혹스러워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어?”
잠시 후. 멤버들의 연락을 받고 온 오동식 팀장이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다른 없어지거나 혹은 새로 생긴 수상한 물건은 없습니까?”
차남석을 제외한 멤버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일단은···.”
“없는 것 같아요.”
“그럼 없어진 건 남석이 옷 몇 벌이랑 베개, 향수뿐인가···.”
“컵도요.”
충격을 받고 멍하니 있던 차남석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하···.”
“어쨌든 혹시 모르니 여러분은 오늘 밤 다른 곳에서 묵는 게 좋겠습니다. 라이언이 가지고 있던 탐지기로 일단 훑기는 했지만, 최근엔 탐지기에 잘 잡히지 않는 기기도 있다고 하니까요.”
“네.”
“팀장님.”
조유찬이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르며 들어왔다. 함께 관리실로 갔던 경찰과 함께.
“CCTV 확인해봤는데, 3시간 전에 음식 배달원으로 보이는 사람이 주민과 함께 건물 안으로 들어와 엘리베이터를 타고, 이 층에 내렸다가 7분 후에 다시 나오는 게 찍혔습니다. 하지만 펑퍼짐한 우비에다 헬멧, 마스크까지 쓰고 있어서···. 같이 들어왔던 주민도 ‘그냥 배달원인가 보다’하고 무심코 넘겨서 얼굴을 제대로 못 봤다고 하네요.”
“그럼 자세한 수사는 내일 날이 밝은 후에···.”
경찰은 차남석에게 없어진 물건에 관해 상세히 물었다. 길우성은 주방에서 비닐 팩을 가져와, 위치가 바뀌었던 달냥의 장난감을 넣어서 경찰에게 건넸다.
“용의자의 지문이 묻어있을지도 모릅니다, 선생님!”
“조금 전엔 말 안 했는데, 우성아. CCTV에 찍힌 유력용의자는 장갑을 끼고 있었어···.”
“우리 지문만 잔뜩 나오겠다.”
“그런데 컵은 왜 가져갔을까? 그것만 유일하게 남석이 물건이 아니네.”
“그만, 그만. 다들 중요한 소지품이랑 옷 챙기고 나오세요.”
이건우와 강보배, 라이언은 유호의 본가로, 한율은 길우성, 박가람을 데리고 부모의 집으로 향하기로 했다.
컵을 제외하고 자신의 물건만 도둑맞았다는 사실에 적잖이 충격받은 차남석은 오 팀장이 챙겼다.
으, 너무 싫어
“공항 같은 곳에서 정신없이 휩쓸리다가 팔찌나 선글라스 도둑맞은 적은 있지만···. 숙소까지 들어와서 훔쳐 간 건 처음이네···.”
“비번은 어떻게 알았을까?”
한율의 본가로 향하는 차 안. 불안해하는 길우성과 박가람을 향해 조유찬이 말했다.
“도어락이 잘 보이는 위치에 뭔가 설치된 흔적이 있었어. 아마 거기에다 카메라를 설치해 비번을 알아낸 것 같아.”
“그 말은··· 전에도 몇 번 들어왔었을지도 모른단 소리네요?”
“으아, 소름 끼쳐!”
한율은 천천히 한숨을 쉬었다.
“진작 자물쇠를 한두 개 더 달았어야 했는데. 제가 부주의했네요.”
“우리나 가사도우미분이 편히 드나들 수 있도록 그랬던 거잖아. 그리고 설마, 방범이 잘 된 아파트에 외부인이 그렇게 쉽게 드나들 거라고 생각이나 했니?”
“그래도 이참에 자물쇠를 바꿔야겠어요. 지문 인식에다가 누군가 출입할 때마다 핸드폰으로 연락이 오는 거로.”
“그나저나 남석 씨는 칠레에서 사고 날 뻔한 것도 그렇고···. 올해 무슨 액운이라도 꼈나 봐.”
박가람이 중얼거렸다.
“단순 절도는 목숨이 걸린 일이 아니라서 부적 효과가···.”
“부적이요?”
한율이 의아한 얼굴로 묻자, 박가람은 잠시 길우성과 서로 쳐다보더니 허둥거렸다.
“어엉? 웬 부적?”
“방금 부적 효과라고 했잖아요.”
“어?!”
“······?”
“흐아아암···.”
박가람이 기지개를 켜며 하품했다.
“불안이랑 스트레스 때문에 오늘은 잠 못 잘 것 같드아.”
“······.”
“써한. 전에 용맹 선배님도 숙소에 사생이 들어왔었다고 하지 않았냐?”
조유찬이 룸미러를 통해 그들을 보며 물었다.
“스카이러너 숙소에도?”
“네.”
숙소에 혼자 있던 용맹이 화장실에 들어갔을 때였다. 누군가 화장실 문을 똑똑 노크해, 용맹은 멤버가 돌아왔나 싶어 장난으로 ‘암호를 대라!’라고 외쳤다고 했다. 그러자 문밖에서 웬 여자의 웃음소리가 들렸다고.
그리고 하신이 전해준 뒷이야기.
『그때 매니저 형이 맹이 형 얘기 듣고 현관문 앞이랑 엘베 CCTV 확인했거든? 그런데 진짜로 시커먼 모자 쓴 여자애가 비번 누르고 들어왔다 나가는 게 찍혀 있더라.』
“범인은? 잡았대?”
“잡았다는 얘긴 못 들었어요.”
“그런데 남석 씨 물건 훔쳐 간 범인, 어떻게 남석 씨 물건만 쏙쏙 골라가 훔쳐 간 걸까? 방은 또 어떻게 알고?”
“방이야 사람 물건 보면 알 수 있잖아. 대학 교재 이런 거. 서한율도 차남석이랑 같은 학교에 같은 과지만, 쟤 독방 쓰는 거야 팬들이면 다 아는 사실이고.”
“그리고 옷이나 베개엔 남석이 형이 쓰는 향수 냄새가 알게 모르게 배어 있을걸.”
조유찬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쨌든 내일도 아침 일찍 스케줄 있으니까,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말고 일단 푹 자. 마음 같아서는 쉬면서 놀란 마음 추스르라고 하고 싶지만···.”
“괜찮아요. 그런 류의 범죄자들은 자신의 행동으로 상대가 동요하거나 흔들리면, 자신이 큰 영향을 끼쳤으니 스스로 대단한 존재가 됐다고 착각하잖아요. 우리가 갑자기 빠지면 다른 출연자들한테도 큰 민폐고.”
“맞아.”
길우성이 동감을 표했다.
“이럴 때일수록 짱쎈 모습을 보여야죵. 음, 남석 씨는 하루 쉬어도 이해하겠지만.”
“차남석 성격상 스케줄은 절대 안 빠질걸. 아마 내일이면 충격에서 완전히 벗어나서, 절도범을 향한 분노로 이 박박 갈면서 나타날 거다.”
“남석 씨를 참 잘 아는 박가람 씨.”
“내가 그놈을, 어? 6년 전부터 봐왔거든. 크으.”
“크으.”
다시 가벼운 모습을 보이곤 있으나, 두 사람의 손은 초조하게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한율은 못 본 척, 빗줄기가 죽죽 그어지는 차창으로 고개를 돌렸다.
“······.”
다음 날 새벽. 어스래빗 멤버들은 샵 앞에서 재회했다.
박가람의 예상대로 차남석은 범인을 향한 분노로 날이 서 있었다.
“절대 가만 안 둬.”
잠을 제대로 못 잤는지, 그는 퀭해진 눈을 하고선 특유의 중저음 목소리를 내리깔며 중얼거렸다.
“반드시 잡아서 감옥에다 처넣어버릴 거야···.”
“남석이가 흑화했어.”
“검색해보니까 초범이면 잡혀도 거의···.”
“쉿.”
“요즘 너무 바빠서 힘들죠? 다들 피곤해 보여요.”
샵 안으로 들어가자 원장이 그들을 맞이했다. 씩씩거리던 차남석의 표정이 스르륵 부드럽게 풀렸다.
“안녕하세요, 원장님.”
“어머, 잘생긴 얼굴에 다크서클 생긴 것 좀 봐. 잠 제대로 못 잤어요?”
“네, 좀.”
숙소에 누군가 무단 침입하여 차남석의 물건을 훔쳐 간 이야기는, 경찰 수사 결과가 나오기 전까진 떠들지 않기로 했다.
멤버들은 샵의 스태프들에게 밝게 웃으며 인사했다.
“오늘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하지만 같은 아파트 주민들을 통해 알음알음 퍼진 소문은 곧 인터넷에도 올라갔다.
[제목: ㅇㅅㄹㅂ 숙소에 경찰들 다녀감.]
[(내 친구가 ㅇㅅㄹㅂ 숙소랑 같은 아파트에 사는데, 어젯밤에 경찰들이랑 매니저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심각한 얼굴로 관리실 들락거렸다고 함. 누가 배달 라이더로 위장하고 숙소에 침입해서 뭐 훔쳐 간 것 같다던데ㅋ)
퍼옴. 출처는 생판 남 SNS]
-빼박 사생
-걔넨 돈도 많이 벌면서 방범을 신경 안 썼나? 집에 비싼 것도 많을 텐데
ㄴ아무리 방범이 좋아도 배달원은 거의 프리패스 아님?
ㄴ앞으로 거기 배달 가는 라이더들만 죽어나겠네ㅋ 이런 사건 터질 때마다 점점 출입 까다롭게 변하고 의심받는데
-전에 어떤 남돌도, 숙소에서 기다리다가 본인들 사진 찍고 도망치는 사생 직접 추격하고 잡아서 경찰서에 넘기는 일 있지 않았나?
ㄴ모 아이돌 사생은 바로 맞은편 같은 층 아파트로 이사 와서 망원경으로 훔쳐봤다고 그랬는데
ㄴ아 ㅈㄴ 싫어
-얘네야 그런 미친 것들까지 달라붙는 거 감수하면서 일하는 거니까 그렇다 쳐도, 같은 아파트 주민은 뭔 잘못임
-아이돌은 웬만하면 외딴곳에 집 짓고 살아라. 전에 우리 동네에 어떤 남돌 숙소 있었는데 팬이란 것들이 매일 그 앞에 죽치고 꺄꺄 소리 지르고 담배 피우고 카메라 들고 맹수의 눈빛으로 오가는 차 감시하고 길막하고 그러니까 괜히 그놈들한테까지 살의가 생기더라
-그냥 도둑 아닌가? 사생이란 단어는 어디에도 없는데?
이 소문은 어스래빗과 같은 아파트에 사는 주민들의 또 다른 목격담, 경찰의 탐문조사에 응했다는 경험담이 신빙성을 덧붙이며 어스래빗 팬들을 분노하게 했다.
-어떤 정신병자냐 ㅆ욕나오네
-애들 그저께랑 어제 이틀 연속 1위 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귀가했을 텐데
-건물 출입이야 배달원 위장해서 들어갔다 쳐도, 현관문 비밀번호는 어떻게 뚫은 거???
-애들 오늘도 스케줄 갔던데.. 이럴 때 보면 정말 프로의식 필요한 극한직업이다 싶다
-떠비에서 불법 촬영기기 탐지전문업체까지 불러 애들 숙소 샅샅이 살폈다고 하네요.
ㄴ그 말인즉슨, 떠비에선 진짜 단순 도둑이 아니고 사생 짓이라고 판단했단 거
-나 예전에 퇴근하고 집에 갔다가 서랍 다 열려 있고 바닥에 옷이랑 속옷 널브러진 거 보고 진짜 멘탈 나가서 한동안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집에도 무서워서 못 들어가고 그랬었는데..ㅜㅜ
-ㅆㅂㅅㄲ 내 손에 걸리면 진짜 찢어 죽여버린다
-우리 톢톢이들 정말 괜찮나
어스래빗 멤버들은 녹화가 끝나 차에 타고 나서야, 간밤의 일이 인터넷에 퍼졌다는 걸 알았다. 포털사이트 실검에 그들의 이름이 올라와 있었다.
[어스래빗 숙소도둑], [어스래빗 사생팬].
“으아···.”
“사생 뒤에 ‘팬’자 붙이지 말라고, 이 사람들아···.”
한율은 스카이러너 용맹이 보낸 톡을 보았다. 그는 본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경찰 수사가 어떤 식으로 진행되었는지,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더 강력하게 처벌할 수 있는지 아주 장문의 편지를 보냈다.
-[···그리고 절대 직접 만나면 안 돼. 그게 그런 애들한텐 특급 선물이거든. 보통 사람하고 사고방식, 뇌 구조 자체가 달라ㄷㄷ]
한율은 예전에 자신을 쫓아다니다가, 엉뚱하게 이희우를 해코지하려 했던 사생 스토커를 떠올렸다.
‘확실히 일반인과 비교하면 사고방식이 판이하긴 했지.’
다른 연예인 지인들도 걱정과 위로의 톡을 보냈다. 스타믹스의 JE는 생각지도 못한 조언을 했다.
-[칫솔이랑 샤워 타월, 면도기 같은 건 일단 다 버려. 뭔 짓 했을지 아무도 모른다.]
불쾌한 상상한 자극하는 조언이었으나, 세상엔 비상식적인 일을 저지르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예전에 블블의 민준과 수재에게 들었던 사생 관련 일화도 그랬고.
한율은 멤버들에게 말했다.
“JE 선배님이 그러는데, 칫솔이랑 샤워 타월 같은 거 다 버리래요.”
멤버들은 1, 2초 멍하니 있다가 진저리를 쳤다.
“으, 너무 싫어···.”
“끄으···.”
“잡히면 형사처벌은 물론이고 민사까지 걸어서 탈탈 털어버릴 거다, 진짜. 씨발···.”
“남석 씨 쌍욕 오래간만에 듣는다. 하지만 이해됨.”
“형.”
차남석이 조유찬에게 물었다.
“가는 길에 잠깐 침구 파는 데에 들러도 될까요? 이불이랑 시트, 베개 전부 새로 사고 싶은데요.”
“승우 씨한테 전화해서 부탁할까?”
“그렇게 해주시면 감사하고요.”
“차남석 네 취향과 백만 광년 떨어진 디자인의 침구 세트가 올지도 몰라. 승우 형 요즘 이상한 곰돌이 캐릭터에 빠졌잖아. 그 캐릭터 이불이···.”
“박가람이는 이제부터 자기 전까지 아무 말 금지.”
“······.”
박가람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경기도에 있는 스튜디오에서 서울에 있는 WB래빗에 도착할 때까지 정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박다람이 너 설마···.”
연습실로 들어가기 전, 박가람에게 ‘아무 말 금지’를 시킨 이건우가 조심스레 물었다.
“일상에서 꺼내는 말이 전부 아무 말이었던 거냐···?”
복도에 박가람의 목소리가 쩌렁 울렸다.
“싸우자, 이건우!”
연습실에는 측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었다.
다음 달 4일에 있을 녹화는 그룹별 미션. 미션 내용은 함께 출연 중인 다른 팀의 곡을 커버하는 것으로, 어스래빗이 커버할 그룹은 ‘그레이트7’이었다.
“다들 어떤 곡이 하고 싶어?”
멤버들은 카메라에 모두가 들어갈 수 있도록 반원형으로 모여 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스튜디오에서 녹화할 때도 그랬듯이, 도둑 때문에 일어난 불쾌한 감정을 숨긴 채.
한율은 먼저 손을 들었다.
“저는 ‘섬’이란 노래요. 심적으로 고립된 소년의 내면을 잘 그렸다고, 그레이트7 팬들 사이에서 숨겨진 명곡이란 평이 자자하더라고요. 노래도 좋고요.”
“어, 그 노래 좋더라.”
강보배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감을 표했다.
“조금 어둡기는 한데, 요즘 학생들이 한 번 이상 했을 법한 생각이 가사랑 멜로디, 전체적인 분위기로 잘 표현되어 있는 것 같아.”
“한번 들어볼까?”
한 시간에 걸쳐 곡 선정과 편곡 방향, 안무 등에 관한 논의가 이뤄졌다. 잠시 후 측 카메라가 철수하고, 오 팀장이 연습실로 찾아왔다.
“사실 회사에선 경찰 수사에 방해되지 않도록 범인이 잡히기 전까진 조용히 있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지만, 인터넷 여기저기 퍼진데다가 여러분을 걱정하는 팬들의 문의도 이어져, 내일 공식 입장을 내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당분간 라방을 안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경찰한테서 연락은요?”
“우리 사건을 담당하게 된 형사님과 통화를 나눠봤는데, 범인의 얼굴이 제대로 찍힌 CCTV나 블랙박스가 없어서 시간이 걸릴 것 같다더군요. 그래도 믿고, 차분히 기다려봅시다.”
“네에.”
오 팀장의 시선이 차남석과 한율을 향했다.
“남석이랑 한율이 너흰 내일 아침 나랑 같이 경찰서 가자. 형사님이 물어볼 거 있다고 하시니까.”
“네.”
“그럼 오늘은 이만 숙소로 돌아가서 쉬도록 해요. 만약을 위해 도청·불법 촬영기기 탐지전문업체를 불러 꼼꼼하게 다 살펴봤으니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겁니다. 도어락도 바꿨고요. 그래도 정 불안하면 어제처럼 호나 한율이 부모님 집에···.”
“아니요, 괜찮습니다. 숙소로 들어갈게요. 오늘 수고 많으셨습니다, 팀장님.”
차남석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한율을 비롯한 다른 멤버들도 일어났다.
“수고하셨습니다, 팀장님.”
“싸랑합니다, 팀장님.”
“만수무강하세요, 팀장님.”
오 팀장이 피식 웃었다.
“네, 감사합니다.”
사과 가져와
경찰들과 도청·불법 촬영기기 탐지전문업체 사람들이 들락거렸다더니, 숙소는 깨끗하게 청소된 상태였다.
주방 식탁에는 포장을 뜯지 않은 새 칫솔과 샤워 타월 등이, 차남석의 침대엔 새 시트와 이불, 베개가 놓여 있었다.
“새로 장만한 침구 세트 디자인은 어떤가, 차남석이? 네 취향과 맞는가?”
“누가 보면 가람이 형이 산 줄?”
유호가 차남석에게 물었다.
“남석아, 오늘 나랑 방 바꿔서 잘래?”
“괜찮아요.”
한율은 자신의 방을 살폈다. 도둑의 흔적을 찾는답시고 멀쩡한 물건을 헤집어놓지는 않았는지, 달라진 건 없었다. 노트북이나 잠긴 서랍도 그대로고.
거실에서 이건우가 크게 고했다.
“얘들아, 도어락에 지문 등록하자.”
다음 날 이른 새벽.
멤버들이 걱정되었던 걸까. MBS <뮤직센터> 앞에는 여느 때보다 많은 팬이 어스래빗을 기다리고 있었다.
차에서 내리자 팬들이 외쳤다.
“어스래빗! 너희가 행복해야 우리도 행복해!”
“사랑해 얘들아! 늘 행복하자!”
“어스래빗 홧팅!”
몇 명은 멤버들을 보자마자 훌쩍거리며 울었다. 소중한 사람이 큰일을 당한 게 무척 속상하다는 듯이.
어스래빗 멤버들은 팬들을 향해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걱정해줘서 고마워요!”
“돌아갈 때 차 조심, 사람 조심, 비 조심!”
“이프림, 사랑해!”
차카차카차칵.
그리고 그들의 모습을 담는 무수한 카메라.
“얘들아, 이거어!”
펜스 너머로 팬이 작은 종이가방을 내밀었다. 매니저 현장전이 다가갔다. 팬은 그에게 종이가방을 넘기며 어스래빗 멤버들을 향해 외쳤다.
“우리가 쓴 편지야! 꼭 읽어줘!”
대기실로 들어간 뒤 확인해본 종이가방 안에는 편지 봉투가 빼곡했다. 멤버들은 드라이 리허설 준비를 마친 후 편지를 하나씩 읽었다. 편지에는 그들을 향한 애정과 걱정이 잔뜩 담겨 있었다.
길우성이 울적한 얼굴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범죄자 하나 때문에 괜히 우리 착한 이프림까지 상처받고···. 뭐야, 이게.”
“빨리 범인 잡혔으면 좋겠다.”
“······.”
차남석은 별 말없이 읽은 편지를 봉투 안에 넣었다. 조금씩 어두워지는 그의 표정.
“왜 그래요, 형?”
“···하면 안 되는 생각이 들어서.”
“무슨 생각이요?”
“의심.”
“······.”
짤막한 단어 하나였으나 멤버들은 힘없이 입을 다물었다.
조금 전 자신들에게 사랑한다고, 힘내라고 외친 팬들 사이에 이틀 전 사건의 범인이 섞여 있었을지도 모른다. 멤버들이, 차남석이 어떤 표정으로 나타날지 궁금해서.
“하···. 이런 부정적인 생각은 한번 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어진다고 하는데···.”
“자, 남석아? 좋은 생각만 하자, 좋은 생각만.”
유호가 차남석을 다독거렸다.
“우리 데뷔 쇼케이스 했던 날을 떠올려. 그날 느낀 감동, 전율···. 널 바로 앞에서 보고 막 떨려서 말도 제대로 못 하고 동동거리던 순수한 팬들 말이야.”
“설령 팬 사이에 숨었다고 그 사람이 선량한 팬이 되는 건 아니잖아. 그러니 범죄자 때문에 아무 잘못 없는 이프림까지 의심하는 오류는 범하지 말자.”
이건우에 이어 조유찬도 조심스레 말했다.
“너희에게 해가 될 범죄자를 의심하고 골라내는 건 회사가 할 일이야, 남석아. 의심 대신에, 반대로 우리를 믿어주면 안 될까?”
복잡한 상념으로 가득 찼던 눈이 조유찬을 향했다.
“···네. 죄송해요, 형.”
“죄송할 게 뭐 있어. 네가 뭘 잘못했다고.”
“이프림 의심한 건 잘못이지.”
“그건 이프림한테 더 큰 팬 서비스로 사과하고.”
“옳소.”
똑똑. <뮤직센터> 스태프가 노크 후 들어왔다.
“어스래빗 리허설 갈게요.”
“네!”
멤버들은 팬들의 편지를 갈무리하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후, 드라이 리허설을 마친 한율은 차남석, 오 팀장과 함께 뒷문에 대기하고 있던 차에 탔다. 차는 방송국을 빠져나와 경찰서로 향했다.
사건담당 형사는 그들을 형사과 내부의 회의실로 안내했다.
“혹시··· 근래에 누군가와 크게 다퉜다거나 시비가 붙었다든가 하는 일 없었어요? 아주 사소한 거라도 괜찮아요.”
“글쎄요. 안티들 말고는 딱히···.”
“여러분에게 악플을 달고, 허위사실을 유포했다가 고소당한 사람들이 많던데. 그중 한 명일 가능성은요?”
“원한을 가진 사람의 소행이라면, 그런 자질구레한 걸 훔쳐 가는 데에 그치진 않았을 것 같아요.”
“네.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싶어서 물어봤어요.”
형사는 따로 의심 가는 사람은 없는지, 해당 집의 비밀번호를 누가 알고 있는지에 대해 상세히 물었다. 없어진 물건에 대해서도. 최초로 출동한 지구대 측 서류나 오 팀장을 통해 다 들었겠지만, 확인차 물어보는 듯했다.
형사는 CCTV 영상 여러 개도 보여주었다.
“6월 16일 오후 1시경, 아파트 공동현관과 엘리베이터 CCTV 영상입니다. 19일 CCTV에 찍힌 유력용의자가 들고 있던 배달용 가방이나 신발이 똑같죠? 그리고 17일, 한 번 더 찍혔습니다. 그래서 CCTV에 찍힌 날짜와 시간을 토대로 해당 동 주민분들에게 탐문해봤는데, 이 사람의 얼굴을 본 사람이 있더라고요.”
“그게 정말입니까?”
잠자코 있던 오 팀장이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네. 한 여성분이 17일, 여러분과 같은 아파트에 거주하는 남자친구를 만나기 위해 방문했다가 주민 한 명, 배달원 한 명이 먼저 탄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숙소가 있는 층 버튼이 눌러져 있어 의아함을 느꼈답니다. 주민은 다른 층에서 내리고, 배달원만 남아서 더욱.”
형사가 고개를 기울이며 이야기를 이었다.
“어? 어스래빗은 일본에 갔을 텐데? 앞집으로 배달 가나? 그런데 그때 배달원이 돌연 다른 층을 누르고 허둥지둥 내려서, 그때 수상함을 느끼고 옆얼굴과 귀, 체격을 유심히 살펴봤다고 합니다.”
한율과 차남석의 시선이 얽혔다.
배달원을 자세히 목격한 사람이, 우리 일본 스케줄을 알고 있었다?
형사가 시간을 확인했다.
“이 시간에 직접 방문해 주신다고 했는데. 마침 여러분이랑 아는 사이라고 하더라고요.”
“혹시···.”
똑똑.
“네!”
문이 열리고 얼굴이 잔뜩 상기된 경찰이 들어왔다.
“주 형사님, 참고인 분 오셨습니다.”
슬그머니 비켜주는 경찰 옆으로 낯익은 여성이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조금 전 통화했던 최영아라고 합니다.”
“······!”
한율과 차남석은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대한민국 탑티어 걸그룹 온더로즈의 멤버이자, 배우 이제설의 연인인 영아였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