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오 팀장에게 설명을 들은 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오디션 볼게요.”
처음부터 오디션 보러 오라는 연락이 아니라 캐스팅 제안을 건넸던 곳에서 말을 번복한 것이지만, 딱히 불쾌하진 않았다. <서울 구미호> 드라마 제작사인 힐링픽처스 대표가 직접 메일로 사정을 설명하고 사과한 까닭이었다.
“투자자가 원한다는데 어쩌겠어요.”
그리고 오디션을 본들, 1화 통 대본을 가진 한율이 훨씬 유리한 상황이었다. 대본 유출을 경계해야 하는 제작사 측에서는 지원자들에게 지정 대본을 줄 가능성이 크므로.
배역을 연구할 수 있는 주어진 정보량 자체가 다르다.
‘그나마 형평성을 맞추기 위해 나한텐 따로 범위를 지정하지 않은 건지도 모르겠네.’
덕분에 대본을 통째로 외우게 생겼지만 상관없었다. 암기하는 건 조금 자신이 있으므로.
“그래. 그리고 더순한화장품에서 계약을 1년 더 연장하고 싶다는 제안이 왔어. 진은수 씨 쪽에도 연장을 제안했지만, 그쪽은 거절했다고 하더라. 아림이 퍼플아워 단체 화장품 광고를 염두에 둬서 그런 것 같아.”
“동종업계 광고 출연 금지 기간 때문에요?”
“은수 씨가 계약을 1년 더 연장하면 단체 화장품 광고 가능 시기도 그만큼 멀어지니까. 걸그룹에게 화장품 광고 모델 발탁은, 그야말로 인지도와 미모를 동시에 증명하는 화려한 트로피잖아.”
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인기가 많아도, 외모가 소비자의 구매 욕구를 자극하지 못하거나 피부 상태가 엉망이면 하기 힘든 게 바로 화장품 광고 모델이니.
“그럼 은수 씨 대신할 새로운 모델은요?”
“이미 1차 서류 접수 끝났고, 다음 주 주말에 2차 심사로 뽑을 거라고 하더라. 어쨌든 자세한 건 여기에 다 적혀 있으니까 천천히 살펴봐. 더순한이 새롭게 제시한 계약금도. 물어볼 거 있으면 언제든 편히 물어보고.”
“네. 감사합니다, 팀장님.”
한율은 오 팀장이 회의실을 나간 후 더순한 측에서 보낸 서류부터 살폈다. 모델이 1년 동안 의무적으로 촬영할 CF나 화보, 브랜드 이벤트 참여 횟수 등. 계약금은 처음 계약했을 때보다 수 배가 뛰어 억 단위가 되었다.
‘광고 계약금이 곧 인지도의 척도라더니.’
이번엔 <서울 구미호> 오디션 안내 서류를 살폈다. 한율은 특별히 서류 접수 단계, 영상 오디션을 건너뛰고 현장 오디션을 보기로 했다. 날짜는 다음 달 14일.
활동도 29일 KBC <뮤직뮤직> 하나만 뛰면 끝이라 준비할 시간은 충분했다. 관련 연습도 해야 하지만 온종일 하는 것도 아니고.
툭툭. 한율은 서류를 정리하여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느새 단체 안무 연습 시간이었다.
이틀 후, 포털사이트 연예뉴스란 메인.
[내년 방영 예정 드라마 <서울 구미호>, 서한율 섭외 취소?!]
[2020년 1분기 방영 예정 드라마 <서울 구미호> 드라마 제작사 ‘힐링픽처스’ 측에서 배우 서한율에게 했던 캐스팅 제안을 철회했다.
<서울 구미호>는 미제 사건 전담팀 형사와 전생과 현생에 얽힌 두 구미호의 이야기로, 서한율은 구미호 ‘형호’ 역으로 캐스팅 제안을 받아 시나리오를 검토 중이었다. 그러나 돌연 힐링 픽처스 측에서 주연배우를 오디션으로 뽑겠다고 선언하며···(중략).
한편 서한율은 드라마 <객귀, 해>, <별☆일없는 집>, 영화 <고양이 난로>로 좋은 성적을 거두었으며 올해 백호 영화제에서 신인남우상을 수상했다.]
-출연료 과하게 불렀나 본데ㅋㅋㅋㅋㅋ
-협상이 안 되니 ‘됐다. 꺼져. 너 말고 배우 없냐?’ 이렇게 나오는 건가?
-오디션 정보 어디에서 보나요?
-ㅅㅎㅇ 얘 ㅈㄴ 싸가지 없다는 거 업계 소문 자자하다니까ㅋㅋ 그러니 제작사에서 갑자기 제안 철회하고 보란 듯이 오디션 열지
-솔직히 연극 쪽에 서한율보다 연기 잘하는 사람 널리고 널렸습니다. 빽도 없고 외모도 화려하지 않아서 그렇지
ㄴ연기 잘하는 사람이야 당연히 있겠죠. 그런데 구미호 역 자체가 화려한 외모를 요구하는데 굳이? 여기 와서? 이런 말을?
ㄴ구미호가 전부 잘생기고 예뻐야 한다는 선입견 좀 버려라 내용으로 승부해야지 얼굴만 봄?
ㄴ서한율이 얼굴만 있다고 여기시는 거??? 부모가 누군지 전혀 안 밝힌 상태 그대로 아이돌 연습생 신분으로 오디션 보고 이사문 감독한테 뽑힌 앤데?
ㄴ구미호가 사람 홀리는 여운데 못 생기면 어쩌라는....?
ㄴ그래서 멸종한 거 아닐까
ㄴ멸종ㅋㅋㅋ 누가 보면 진짜 있었던 종족인 줄
-제작사에서 서한율한테 제안했다가 깐 건 나름대로 이유가 있을 거라고 본다ㅇㅇ
“······.”
한율은 마치 이때다 하고 자신을 깎아내리는 댓글을 보다가, 옆에서 한숨을 푹푹 내쉬는 조유찬에게 물었다.
“내가 눈치 없이 오디션 보겠다고 나선 걸까요?”
“아냐. 아까 회사로 힐링 대표한테서 전화가 왔는데, 기사 뉘앙스가 이상하다고, 절대 오해하지 말고 꼭 오디션 보러 와달라고 하더라. 그리고 이 기사, 이제설도 오디션 보게 되었다는 내용은 쏙 빼놨잖아.”
조유찬이 불쾌하기 짝이 없다는 얼굴로 기자 이름을 노려보았다.
“누가 봐도 한율이 너랑 제작사 간에 문제가 생겼다고 암시 주려는 듯 말이야. 아무튼 곧 힐링 측에서 공식 기사 낸다고 했으니까, 기다리자.”
“네. 그리고 옮겨줘서 고마워요, 형.”
“별말씀을. 그럼 나중에 회사 올 때 전화해. 데리러 올게.”
“괜찮아요. 제 차 끌고 갈게요.”
“응, 수고해.”
한율은 현관 앞까지 조유찬을 배웅하고 거실에 쌓인 상자를 보았다. 며칠 전 오사카 미니라이브&하이터치회에서 팬들에게 받은 선물이었다.
한율은 자신의 이름이 적힌 상자를 방으로 옮겼다. 얌전히 옆을 지키고 서 있던 달냥이 그 뒤를 졸졸 따라왔다. 다른 멤버들은 모두 스케줄과 회사를 간 터라, 숙소엔 한율과 달냥 둘뿐이었다.
“···달냥.”
한율은 상자에서 물건 하나를 꺼낼 때마다 대신 들어가서 빈자리를 채우는 달냥을 꺼냈다.
“기다려. 정리 끝나면 그때 들어···.”
폴짝.
“······.”
한율은 입을 다물고 물건과 달냥을 꺼내는 걸 반복하며 하나씩 정리했다. 그 후엔 노트북으로 여우 관련 영상을 보고, 대본을 읽으면서 캐릭터 연구에 집중했다.
‘형호’가 어떤 환경에서 어떤 일을 겪으며 살고, 어떤 사고방식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갖게 되었는지, 그러면서 오랫동안 몸에 밴 습관은 무엇인지, 이 대사는 어떤 생각과 경험, 가치관에서 나온 것인지 등등. 가상의 인물을 실존 인물처럼 입체적으로 구성해나가는 작업이었다.
‘여기에 종족의 차이.’
한율은 본래 세상, 인간과 비슷한 외형, 지능을 지닌 것들을 떠올렸다. 고약한 냄새가 나는 날개를 파닥거리던 자들, 인간을 꾀어내 잡아먹는 마물, 거지꼴을 하고선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던··· 가짜 용족도.
『죽음으로 헤어질 걸 뻔히 알면서 얽히는 게 허무하지 않냐고? 나는 그녀의 62년을 차지했어. 그녀의 기억과 감정 대부분을 나로 가득 채웠다고. 죽을 때까지도 그녀의 눈엔 내가 담겼지. 그런데 허무할 리가. 죽음으로 매듭지어 비로소 완성되는 게 인생 아닌가? 난 한 인간의 인생을 가졌어.』
한율은 그를 아주 조금 참고하기로 했다.
므엉? 그때 한율의 무릎에 자리 잡고 있던 달냥이 불쑥 책상 위로 올라갔다. 이내 현관 도어락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삐릭.
“우왕, 선물이당.”
박가람의 목소리.
한율은 거실로 나갔다.
“제작진 미팅은 어땠어요?”
박가람은 예능 프로그램 게스트로 섭외가 들어와 미팅하러 나갔었다. 어떤 프로그램인지는 출연이 확정되면 그때 알려주겠다고.
“음, 날 섭외하려던 회차가 게스트나 고정 출연자들 간의 궁합이 조금 애매한가 봐. 다음 주에 다시 미팅하재.”
산뜻하게 웃으며 대답하는 모습에서 실망하는 기색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기분이 좋아 보였다.
“네. 번복되진 않아서 다행이네요.”
“회사엔 몇 시에 갈 거야?”
“이제 가려고요.”
어느새 1시. 에서 선보일 무대 연습은 3시부터 하기로 했지만, 슬슬 배가 고팠다.
“밥 먹으러?”
“네.”
“으음···. 가는 길에 나랑 따로 점심 먹을래? 형이 쏜다.”
“뭐 먹을 건데요?”
박가람이 제 이름이 적힌 선물 상자를 들었다.
“시원하게 콩국수 어때?”
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오늘따라 왜 이렇게 못생겼어
“아···. 이놈 또 톡 보냈네.”
“누구요?”
눈앞의 음식과 일행에게 집중하는 사람들 틈에서, 한율은 박가람과 마주 보고 앉아 점심을 먹고 있었다.
박가람은 짜증 난다는 듯 인상을 쓴 채 대답 대신 핸드폰을 건넸다. 함께 에 출연 중인 보이그룹 ‘하울링’의 ‘진정’이 보낸 톡이 떠 있었다.
-[둘이 친하다면서ㅡㅡ]
-[아 좀]
-[동갑끼리 친하게 지내면 좋잖아]
한율은 어제 날짜로 온 톡도 살폈다.
-[오늘도 안 되냐?]
[ㅇㅇ앞으로도 안 될 예정]
그저께 톡.
-[머하냐 술 먹자]
-[미랑이도 데리고 와]
-[나도 여자 사람 데려감ㅋㅋ]
[거절]
[거부]
후루룩. 콩국수 국물을 들이켠 박가람이 그릇을 탁 내려놓았다.
“이 자식 며칠 전부터 툭하면 미랑이 소개해 달라고 지랄이야. 프로그램 끝날 때까지 참으려고 했는데, 지금이라도 차단할까?”
한율은 박가람의 핸드폰을 돌려주었다.
“그러는 게 좋을 것 같네요. 검색해보니까 이분, 팬 미팅 같은 자리에서도 생각 없이 말 뱉어서 팬들에게 상처 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던데. 괜히 방송은 물론이고 주변에서도 친하다고 오해 사면, 형 이미지도 안 좋아질 것 같아요.”
“그렇지? 어우, 진짜 마음에 안 들어.”
박가람은 질색하는 표정을 지으며 진정에게 답장을 보냈다.
[5초 후 차단할게요☆뿅☆]
그러곤 정말 시계를 보며 5초를 세곤 차단했다.
“후우.”
박가람이 가슴에 손을 얹으며 편안한 표정을 지었다.
“당장 이놈에게 욕먹어도, 배려도, 생각도 없는 놈이랑은 가까워 보이고도 싶지 않다. 그나저나···.”
“······?”
“너 괜찮냐?”
“뭐가요?”
대충 다 먹은 것 같아, 한율은 티슈로 입을 닦았다. 박가람이 웅얼거리듯 말했다.
“구미혼가 뭐시긴가 드라마 말이야. 캐스팅 제안 받았다가···.”
“아. 그거 투자자가 배우 모두 오디션으로 뽑았으면 좋겠다고 해서 바뀐 거예요. 제작사 쪽에서 정말 미안하다고, 오디션 보러 와 달라고 메일 왔어요.”
“배우 모두면··· 서한율 너한테만 그런 게 아니란 거네?”
“네. 또 다른 주인공으로 제안받은 이제설 선배님도 오디션 보기로 했대요.”
박가람의 미간이 구겨졌다.
“그런데 왜 기사가 그딴 식으로 나? 꼭 너랑 문제 있어서 제작사가 거하게 손절한 것처럼 보이도록 작성됐던데.”
“나야 모르죠.”
“이노므 기레기 자식, 우리 애가 만만해?”
“······.”
한율은 핸드폰으로 해당 기사를 찾는 박가람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오늘따라 은근히 살가운 태도가 조금 수상하다.
“형. 혹시 나한테 부탁할 거 있어요?”
“······!”
헉. 박가람이 헛바람을 들이켜며 한율을 쳐다보았다. 그러곤 눈동자를 살며시 굴리며 시선을 피하다가 웃었다.
“흐. 아닌데?”
“아닌 게 아닌 것 같은데요.”
“야, 네 눈엔 내가 그렇게, 어? 필요할 때만 잘해주는 속물로 보여?”
“조금은?”
“젠장, 전적이 있으니 부정할 수가 없군. 다 먹었으면 나가자.”
“네. 잘 먹었어요, 형.”
늦은 오후가 되었을 땐 조유찬의 말대로 힐링픽처스에서 낸 기사가 연예뉴스란 메인에 떴다.
[<서울구미호> 제작사 힐링픽처스, ‘모든 배우 오디션으로 뽑을 것’]
[···힐링픽처스 측은 배우 서한율과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는 네티즌들의 의혹을 강하게 부정하며 오디션으로 전환된 캐스팅 방식을 이해해주고 참여 의사를 밝혀준 배우 이제설과 서한율에게 깊은 감사를 전한다고 밝혔다. 그리고 이번 오디션은 배우 이제설과 서한율 못지않게 실력과 재능이 넘치지만, 그동안 선보일 기회가 없던 신인 배우들의 도전의 장이···(중략).]
-이제설이랑 서한율한테도 오디션으로 역을 따내라는 패기
ㄴ패기랄 것까지 있냐? 둘이 연기 잘하는 건 알겠다만 어차피 배우도 제작사 없으면 작품 못 하는데? 이제설은 몰라도 서한율은 갑질 농락 제대로 당하는 중인 듯
-배역에 어울리고 잘하기만 하면 인지도 낮은 신인이라도 뽑겠다는 건데 뭐가 문제임?
-내가 보기엔 제작사나 투자자 쪽에서 뒤늦게 스폰 받는 배우 하나 꽂으려고 작업 치는 것 같은데
ㄴ이제설 자존심까지 뭉개가면서? ㅋㅋㅋㅋ
ㄴ이제설 말고 배우 없냐?
ㄴ그럼 발탁되자마자 논란 일어날 텐데?
ㄴ어차피 대중들은 결과만 좋으면 신경 안 씀
-이제설도 오디션 본다고? 그런데 왜 아침엔 서한율만 팽당한 것처럼 기사가 뜸?
-이제설도 진짜 대인배다ㅋㅋㅋ 다른 배우들 같았으면 캐스팅 제안했다가 갑자기 쌩 신인들이랑 같이 오디션 보라 그러면 자존심 상해서 안 하겠다고 했을 텐데. 그것도 얼마 전에 회당 3억씩 출연료 받던 사람인데
-두 사람 다 눈치 없이 오디션 보겠다고 한 건지도 모릅니다..
ㄴ빅엿 먹이려고 눈치 없는 척 구는 거란 생각은 안 드세요? ㅋㅋㅋㅋ
ㄴ엌ㅋㅋㅋㅋ 그럴수도 있겠넼ㅋㅋㅋ 이런 외모도 안 되고 연기도 안 되는 애들하고 경쟁하라고? 이러면서 연기력으로 압살해버리는 거지
ㄴ구미호 역으로 지원하는 배우들 레알 용자 인정한다ㅋㅋ 신인들 쫄아서 지원이나 하겠냐
ㄴ왜요 경험 삼아 볼 수도 있죠
ㄴ둘 중 한 명이라도 이기면 몸값이랑 인지도 ㅈㄴ 올라가는 거고, 떨어져도 크게 손해 볼 건 없지 않나? 잘하면 제작사 눈에 들어가서 조연이라도 맡게 될지 누가 아냐
-서한율한테 문제 있어서 제안 철회하고 오디션으로 돌린 거라고, 뇌피셜로 비아냥거리던 애들 다 어디 감?
6월 29일. 어스래빗은 KBC <뮤직뮤직> 상반기 결산특집에서 ‘1위 후보’ 타이틀을 건 채 마지막 무대를 선보였다. <뮤직뮤직>이 음반 판매량을 중시하는 터라 이번 주도 2위에 그쳤지만, 다른 음방에서 1위를 여러 번 하며 좋은 성적을 거두었기 때문인지 멤버들은 크게 아쉬워하지 않았다.
“오늘 <뮤직뮤직>에서 마지막 무대를 했습니다. 3주 동안 고생 많았습니다, 멤버들.”
생방송이 끝난 뒤 어스래빗은 대기실에서 라방을 진행했다.
“다들 고생 많았어.”
“이프림도 우리 응원하느라 고생 많았지. 그리고 오늘 막방이라고 이런 선물까지.”
이건우가 팬 매니저를 통해 받은 단체 티셔츠를 펼쳤다. 앞에는 해변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밤하늘 달을 바라보는 8마리의 토끼 캐릭터가, 뒤에는 어스래빗 글자가 멋지게 적혀 있었다.
“이 티셔츠는 나중에 여행 가면, 그때 단체 티로 입기로 했습니다. 정말 고마워요, 이프림~.”
멤버들은 팬들의 톡을 보면서 이번 활동을 하며 기억에 남는 무대나, 데뷔 후 첫 1위 했을 때의 소감과 비하인드를 신나게 떠들었다. 해외투어 중 겪은 일도.
“그때 제가 뉴욕에서 뮤비 촬영 끝내고 돌아오자마자 염색했거든요? 그런데 새벽에 일어나보니까, 베개가 시뻘겋게 물들어 있는 거예요. 너무 당황해서.”
이건우가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을 지으며, 옆에 앉은 라이언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옆 침대에서 자는 라이언을 깨웠어요. 야, 라이언, 라이언. 그러니까 라이언이 눈을 딱 뜨고 날 멍하니 쳐다보다가, 갑자기 으아아 하면서 베개로 나를 퍽퍽 치는데··· 와.”
“이마 한쪽이 시뻘게서 놀랐어.”
“아니, 피로 보였으면 걱정을 해줘야지 때리면 어떡해.”
“눈도 막 퉁퉁 부어 있어서 귀신인 줄 알았어.”
알고 보니 현지에서 공수한 염색약에 문제가 있어서 벌어진 에피소드였다.
“베개는 어떻게 됐냐고요? 호텔 측에 사정 설명하고 변상했습니다.”
“건우 형 돈으로요?”
“아니. 회사에서 물품 구비 제대로 못 한 탓이라고, 회사에서.”
-사자톢 진짜 놀랐겠다ㅋㅋㅋ 자다가 깨보니 이마가 뻘겋게 물든 건우가 뻘겋게 물든 베개 들고ㅋㅋㅋㅋ
-떠비가 잘못했네ㅋㅋㅋㅋㅋ
-멋있고 슬픈 분위기 미친 뮤비 뒤에 이런 비하인드는 반칙이지ㅋㅋㅋㅋ
-라욘 너무 귀엽당
-리디스커버리 예고 떴던데 봤어?
“ 예고요? 당연히 봤죠!”
“이제 활동도 끝났으니 당분간 녹화에도 집중하고···.”
라방을 끝내고 퇴근하고 난 뒤엔 곧장 회사로 향했다.
연습실에는 카메라가 곳곳에 설치되어 있었다. 멤버들은 피부와 두피 건강을 위해 메이크업을 지우고 머리만 감은 후, 자정까지 ‘그레이트7’ 커버 무대를 연습했다.
음방 스케줄을 끝내고 돌아와 연습하는 게 꼭 ‘우리 이만큼 열심히 한다!’ 생색내는 것 같지만, 다음 날 일찍 스케줄이 없으면 한두 시간이라도 연습하고 들어가는 게 보통이었다.
다른 리디스 출연팀보다 연습량이 부족하기도 하고.
다음 날인 1일 저녁엔 회사 내 녹음실에서 녹음을 진행했다. 그리고 다시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며 며칠.
세 번째 녹화 날이 다가왔다.
“박가람!”
이번 녹화 장소는 뮤닷 내 실내 스튜디오. 헤어와 메이크업, 무대 의상까지 풀세팅하고 출근하는데, 복도 끝에서 하울링의 진정이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복도엔 벌써 카메라 여러 대가 돌아가고 있었다.
“아무리 내가 질척거려도 그렇지, 초코톡 차단은 너무한 거 아니야?”
박가람은 당황한 기색 없이 웃으며 화답했다.
“차단할 만하니까 차단했지?”
무슨 이야기인지 의아해하는 스태프들과 멤버들.
“부담스러우니까 앞으로도 지금처럼 거리를 두고 지냈으면 좋겠구나, 동갑내기 아이돌 동료야.”
그러나 설마하니 사람들 앞에서 대놓고 매몰차게 벽을 치리라곤 생각 못 하는 눈치였다.
대답을 들은 당사자까지도.
진정이 입을 삐죽거리며 불쌍한 척 표정을 지었다. 그에게 콩깍지가 씐 팬들에게나 먹힐 법한 부담스러운 모습이었다.
“너무 매정한 거 아니야? 난 너랑 친해지고 싶다니까?”
“난 너 싫다니까? 부담스러워, 저리 가.”
“남석아, 내가 그렇게 부담스러운 스타일이야? 네가 대답해 봐.”
첫 녹화 때 진정과 한 조였던 차남석은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많이.”
그러곤 카메라에 대고 고자질했다. 진정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속닥속닥.
“진정 선배님이, 우리끼리 있으면 자꾸 야한 얘기 해요. 그래서 부담스러워요.”
“뭐야? 뭐라고 말한 거야, 남석아?”
“편집되지 않고 방송으로 나가면 알게 되실 거예요.”
그때 한율의 눈에 하울링 대기실에서 나오는 다감이 보였다. 계속 이렇게 대치하면 그림이 이상해질 것 같아, 한율은 그에게 큰 소리로 인사하며 주의를 환기시켰다.
“선배님, 안녕하세요!”
다른 멤버들도 따라 큰 목소리로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다감도 반갑게 웃으며 화답했다.
“안녕하세요!”
잠시 후, 어스래빗 대기실.
“아깐 왜 그런 거야, 가람아?”
대기실에도 카메라가 여기저기 설치되어 있었지만, 궁금증을 참을 수 없었는지 유호가 박가람에게 다가가 물었다.
“편집 잘못 들어가면 너만 이상한 사람 되기 딱 좋겠더라.”
“······.”
박가람은 핸드폰을 꺼내서 단톡방에다 대답을 올렸다. 카메라에 화면이 잡히지 않도록 각도에 주의하며.
-[자꾸 술자리에 미랑이 데리고 나오라 그러잖아ㅡㅡ]
“······.”
“······.”
대답을 확인한 멤버들의 표정이 일순 굳었다.
한율은 테이블에 비치된 부채를 들어, 장난치는 척 길우성의 얼굴을 가렸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못생겼어.”
너 혹시 연애하니?
녹화는 아침 8시부터 시작되었다. 첫 녹화 때 깜짝 등장했던 1세대 아이돌 옥정훈이 다시 MC로 등장, 진행을 맡았다.
[···그렇게 해서 오늘 자체평가 1등을 하면, 오늘 이 방송이 끝난 후 해당 팀의 뮤직비디오를, 그것도 원하는 곡의 뮤직비디오를 붙여드리겠습니다.]
무대 세트 교체 작업이나 인터뷰 시간도 있어서 녹화는 오래 걸렸다. 여기에 음방과는 달리 내내 곁에서 돌아가는 카메라 때문에 피로감은 더했다.
“괜찮으세요?”
중간 휴식 시간. 제작진이 출연자들에게 협찬으로 들어온 음료를 나눠주었다. 한율은 뚜껑을 열 생각도 없이 멍하니 있는 그레이트7 멤버에게 물었다. 그는 한동안 건강상의 문제로 장기간 활동을 쉬었다가, 이번 로 복귀한 ‘권석’이었다.
“네? 아, 괜찮아요.”
권석은 머쓱하게 웃으며 그제야 음료수 뚜껑을 열었다.
“어제 긴장하느라 잠을 제대로 못 잤더니···. 아직 무대를 하기 전인데도 피곤하네요.”
“선배님, 잠깐 옆에 앉아도 괜찮을까요?”
그때 원제로의 현강희가 음료를 든 채 찾아왔다. 한율은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멤버들도 화장실 혹은 다른 출연자들하고 떠들러 간 터라 자리가 듬성듬성 비었다.
“네.”
“감사합니다.”
권석과 반대쪽 옆에 앉은 현강희는 음료를 조용히 마시다가 말을 꺼냈다.
“지난번 녹화 끝난 날 뜬 기사 보고 많이 놀랐는데, 범인이 빨리 잡혀서 다행이에요.”
“경찰분들이 고생 많으셨죠.”
“그런데 숙소에서 고양이 키우시지 않아요? 고양이는 괜찮아요?”
“마침 부모님 집에 맡겨두었을 때라 괜찮았어요.”
“다행이네요. ···저, 묻고 싶은 게 있는데요, 선배님.”
현강희는 부모님이 유기 동물보호소에서 고양이를 데려와 키우고 싶어 하시는데, 그 절차와 유의해야 할 사항, 필요한 물품 등에 관한 조언을 구했다.
“그럼 선배님들은 다음 임보 언제쯤 하실 계획이세요?”
“한동안은 덜 바쁠 것 같아서, 다음 주에 보호소 다녀오려고요.”
“다음 주···.”
골똘히 생각에 잠겼던 현강희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혹시 월요일은 어떠세요?”
“월요일이요?”
“네. 그때 저희가 하루 휴일이거든요. 선배님만 괜찮으시면 보호소에 같이··· 가보고 싶은데.”
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가 됐든 어스래빗 멤버 몇 명도 같이 가게 될 텐데, 한 명 더 는다고 문제 될 건 없었다. 현강희가 함께 다니기에 거슬리거나 시끄러운 성격도 아니고.
“네. 일단 소장님께 월요일에 방문해도 되는지 전화로 여쭤볼게요. 다음 휴식 시간이나 오늘 녹화 끝나고.”
현강희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잠시 후, 한율은 현강희와 월요일에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다.
다음 날인 7월 5일 금요일 밤 11시 10분.
어스래빗 멤버들은 1화 본방 사수를 위해 일찍 귀가해 거실에 모였다.
“처음 녹화한 지 벌써 한 달이나 지났네.”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당. 첫날에 오프닝하고 다 따로 흩어졌었잖아.”
“그때 1박 2일 촬영한 거 몇 화 분량으로 나올까?”
“못해도 3화까지는 나오지 않을까? 프로그램 취지가 묻히기 아까운 팀을 끌어 올리는 거잖아. 너무 스피디하게 편집하진 않았을 것 같아. 팀마다 분량 문제도 신경 써야 했을 테고.”
“그래도 너무 늘어지면 재미없다고, 나중엔 팬들만 보는 프로가 될 텐데.”
“오? 우리 찍었던 신발 CF 나온다.”
한율은 핸드폰으로 를 검색했다. 프로그램 정보 아래로 톡창이 떴다.
-솔직히 망돌 살리기 프로젝트에 어스래빗이랑 원제로 출연은 오버 아닌가
-월드투어 마치고 음방 1위까지 한 애들이 묻히기 아까운 아이돌ㅋㅋㅋㅋ 욕심 무슨 일이냐
-원제로야 뮤닷의 아들이니 그렇다 쳐도 어스래빗은 왜 나옴?
-망돌이라뇨ㅡㅡ
-그레이트7 많은 관심과 사랑 부탁드립니다! 이대로 묻히기엔 정말 아까운 애들이에요ㅜㅜ
-어스래빗 출연은 월드투어 가기 전에 확정된 겁니다. 1위도 리디스 녹화 도중 컴백하면서 찍은 거고요. 서한율과 차남석은 아이돌이 아닌 배우로 아는 분들이 많고, 그룹으로선 아직 인지도가 낮은 편입니다. 너무 날 세우지 말아주세요ㅜㅜ
-듣보끼리 서로 잘 되자며 모인 프로그램인데 정작 팬이란 것들이 서로 비난하고 다투면 되겠냐
-난 진심 어스래빗이 여기에 왜 나오는 건지 모르겠다. 이미 잘 나가고 있지 않나?
-비난한 사람 없는데요? 굉장히 예민하신가 봄?ㅎㅎㅎ
-블루액션♡♡♡♡♡
-데뷔 순-하울링·풀썸·어스래빗·블루액션·그레이트7·원제로
-이거 보나 마나 원제로 위주로 편집했을 듯
-어스래빗 팬들 예민한 게 뭐 원투데이인가요ㅎㅎ
-다툼(x). 다른 출연팀 팬덤 모두 가만히 있는데 원제로 팬덤만 일방적으로 어스래빗 까는 상황ㅇㅇ
-우리는 짱쎈 이프림. 흔들리지 마라 체통을 지켜라
“······.”
원제로 일부 팬들이 어스래빗을 싫어하는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었으나, 어스래빗이 월드투어를 마치고 돌아온 이후부턴 노골적으로 꺼리는 내색이 잦아졌다.
뭘 해도 후배인 원제로보다 성적이 낮다고 비교당하고 놀림당한 분노를 차곡차곡 쌓아온 이프림이, 이제 반격의 때가 왔다며 도리어 그들을 약 올리기 시작한 까닭이었다.
[국내랑 아시아 일부에서만 대박 터지면 뭐 함? 세계에선 안 먹히는 우물 안 개구리 왕자들인데ㅋㅋ]
[솔까 몇 명 빼고는 연습생 생활 짧아서 기본기 엉망 아닌가? 지금까지야 방송 이미지로 얻은 인기로 아슬아슬하게 덮곤 있지만, 슬슬 역량 부족으로 인한 실력 격차가 눈에 보일 텐데 벌써 안쓰럽다ㅎㅎ 아, 주어는 없습니다>ㅅ<]
[팬 이벤트 당첨 경쟁으로 음반 사재기하게 만들어서 1위 VS 음반 0점 가지고도 1위. 말이 더 필요함?]
물론 양측 팬덤 전체가 그런 건 아니다. 그러나 아직 국내 팬이 원제로가 많은 만큼 자연스레 톡창을 차지하는 지분도 높아, 그들의 목소리가 전체 여론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출연팀이 처음 공개되었을 때, 다른 출연팀 팬덤은 대개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는데 말이다.
-어스래빗 분들이랑 친해지면 좋을 듯해영ㅎㅎ 나쁜 소문도 하나 없구
-풀썸 멤버들이 서한율 님한테 연기 특강 받고 표정 연기 좋아졌다던데ㅎ 지금도 잘하지만, 같은 아이돌이니 좋은 눈높이 쌤이 될 것 같당 애들앙ㅎㅎ
-보컬3 동기 재회!
“시작한다.”
한율은 고개를 들어 TV를 보았다.
[꺄아아악!]
공연장 관객들의 높은 환호성. 그러나 잿빛으로 물든 화면 속 등 돌린 소년은, 마이크를 힘없이 쥔 채 쓸쓸히 백스테이지에서 퇴장하고 있었다.
환호성은 소년의 것이 아니었다.
[지직··· 직···.]
노이즈가 잔뜩 들어간 음악이 흘러나왔다. 하울링부터 원제로까지. 출연팀의 데뷔 무대가 차례차례 빠르게 스쳤다.
[축하합니다! 이번 주 1위는!]
음방 엔딩 무대 뒤쪽에서 누군가의 1위 수상을 축하하며 박수치던 모습도.
지금보다 조금 앳되고 촌스러운 7명의 블루액션 멤버들이, 뮤닷 옥상에서 양손을 입가에 모아 처절하게 외친다. 어색한 발연기가 웃음을 자아냈다.
[여기 사람 있어요···!]
블루액션이 데뷔 초에 찍었던 리얼리티 프로그램의 한 장면이었다. 그들의 모습이 훅 멀어지며 자막이 떴다.
[좋은 실력과 좋은 노래]
[그러나]
[좋지 못한 타이밍과]
[적은 기회의 장···.]
이어서 프로그램 취지가 멋들어진 영상으로 소개될 때였다.
므앙? 벽걸이 TV 아래 선반으로 달냥이 폴짝 올라가더니, 당당히 화면 중앙 아래를 가렸다. 왜 다들 이걸 멍청히 쳐다보느냐는 듯이 고개를 갸웃.
“달냥아, 자막 안 보인다.”
“달냥, 이리 와.”
불러도 태연하게 세수하던 달냥은, 한율이 제 무릎을 툭툭 두드리고 나서야 느긋하게 기지개를 켜고 선반에서 내려왔다. 그 사이 오프닝 VCR이 끝나, 한 달 전에 갔던 글램핑장의 광경이 나왔다.
가장 먼저 보이그룹 그레이트7이 쭈뼛쭈뼛 등장했다.
[안녕하세요···.]
[여기에 서면 되나?]
[우리가 제일 먼저 온 거야?]
TV를 보던 멤버들이 실소했다.
“쟤네 왜 카메라 중앙이 아니라 구석에 몰려서 서냐.”
“PD님도 웃는다.”
톡창에서는 어스래빗 출연에 부정적인 반응을 쏟아내던 이들이 입을 다물고, 그레이트7 팬들이 한두 마디 꺼내고 있었다.
-우리 애들이 음방 말고 TV 프로그램에 나오는 게 익숙하지 않아요ㅎ 예쁘게 봐주세요♡
-권석아아아아아;ㅂ;
-애들 공손히 앞에 손 모으고 나란히 선 거 귀엽다
-웬일로 기획사가 큰일을 했네
-교무실에서 벌 받는 것 같자나ㅠㅠㅋㅋㅋ
서로 눈치를 보면서 머뭇거리는 그레이트7 멤버들. 그러다 용기 낸 얼굴로 프로그램이 어떻게 진행될까 조심스럽게 서로 의견을 나누었다. 곧 시끌벅적하게 원제로가 등장했다.
[안녕하세요!]
어스래빗이 도착한 건 두 팀 멤버들이 한 명씩 어색하게 인사를 나눌 때였다. 프로그램 톡창은 방송 전, 원제로 팬들이 뭐라 지껄이든 조용히 있던 어스래빗 팬들이 합세해 복작거렸다. 일반 시청자들 톡도 중간중간 끼었다.
-어스래빗 오니까 애들 대부분 갑자기 키가 작아진 것 같은데 뭐지ㅋㅋㅋ
-안 돼 완언아!! 서한율 옆에 세우지 마..!
-차남석은 레알 사기캐 아닌가 얼굴 비율 키 다 가졌네ㄷㄷ
-원래 어릴 때부터 춤 많이 추면 키가 잘 안 커요..
-어스래빗에 배우 상이 많은 듯
-어스래빗 최장신은 리더인 유호로 187.2cm이고, 가장 작은 멤버는 박가람으로 169.9cm입니다!
-우리 애들 팩 사줘야겠다..
-타팬이지만 어스래빗 멤버들 비율 좋은 거 진짜 인정
-서한율 피부 진짜 넘사네ㅋ 이 와중에 감사하다 머야ㅋㅋ
-변지욱 떠비 형아들 만나서 신난 거 봐ㅎㅎ 그래 다 네 편이다 지욱아♡♡♡
이어서 블루액션, 하울링, 풀썸이 도착했다. 카메라는 인사를 나누는 아이돌 사이에서, 유독 친하게 인사하는 이들을 두어 번 더 잡았다.
3년 전 <보컬리스트 시즌3>에 함께 출연했던 ‘꽃을 단 토끼’의 서한율과 차남석, ‘흥보이즈’의 안세현과 은강. 이 넷이 모여서 오랜만이라고 인사를 나누는 모습도.
“이렇게 보니까 한율이가 인싸네. 풀썸 선배님들이랑도 친하고.”
“써한 SNS 맞팔 보면 감독님들이랑 배우들도 잔뜩 있엉.”
90여 분으로 구성된 1화는 45명의 아이돌이 5명씩 한 조가 되어 카라반에서 만나 인사를 나누고, OT 1교시 미션 곡을 확인하는 것에서 끝났다.
다음 주 예고 영상. 미션 곡을 부르거나 수행하는 출연자들의 모습이 빠르게 이어졌다.
마지막은 한율이 장식했다. 정말 사랑하는 누군가를 앞에 둔 것처럼, 그 기쁨과 행복을 노래로 부드럽게 그려내는 모습으로.
“···으아아!”
쿵. 강렬한 효과음과 함께 로고가 박히며 예고가 끝났다. 길우성이 질색하는 얼굴로 벌떡 일어나 비명을 질렀다. 제 두 팔을 거칠게 문지르며 제자리에서 뱅글뱅글 돈다.
“이런 거 싫으다! 너무 싫으다! 으아아! 친구의 비즈니스 너무 싫으다! 내 손, 내 손이···!”
“후···.”
차남석은 두 손으로 눈을 덮으며 나지막하게 한숨 쉬었다.
“가까운 사람의 로맨스 연기는 맨정신으로 보기 힘들다더니···.”
“무대에서 부르는 거 볼 때는 역시 연기를 잘하니까 몰입도도 수준급이라고 생각했는데, 클로즈업 원샷으로 보니까··· 으음.”
“한율아.”
유호가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너 혹시 연애하니? 썸 타는 애 있어? 있으면 솔직히 말해. 내가 연기에 대해선 잘 몰라도, 방금 그 표정은 그냥 나올 수 있는 게 아닌 것 같거든?”
옆에서 이건우가 말했다.
“왜, 첫사랑 떠올렸을 수도 있지.”
“······.”
이건우는 무심코 말한 것이겠지만, 정곡을 찔린 한율은 무표정을 가장한 채 말없이 무릎 위 달냥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품에 안으며 일어났다.
“전 먼저 잘게요.”
므앙.
뒤에서 길우성이 외쳤다.
“톡창에서 이프림이 폭주하고 있잖아! 어쩔 거야, 이거! 오그라든 내 손도 펴주고 가···!”
커뮤니티 사이트의 어스래빗 게시판.
[제목: 존버는 승리한다.]
[기억한다. 2016년 제유 님의 뮤비 <이면(the back)>.
느꼈다. 미미 님을 바라보던 율톢의 연기.
그 안, 로맨스 연기 내공.
외쳤다. 풋풋한 학원 로맨스물.
나는 존버했다.
가능성이 보인다.
보고 싶다.
리디스커버리 다음 화.
서한율의 럽송.]
혹시 이놈인가?
주말이 지나 월요일 정오.
길우성, 박가람을 태운 한율의 차가 원제로 숙소 앞에 도착했다. 골목엔 원제로 사생 스토커들이 모여서 꺅꺅 떠들고 있었다.
길우성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지난번 스카이러너 숙소에 갔을 때가 생각나는구먼?”
“보안시설 좀 좋은 곳으로 이사시켜주지. 빌라 담 넘어서 들어가도 아무도 모르겠네.”
“원제로 리얼리티 예능 보니까 숙소도 좁더라. 우리 처음 지냈던 숙소보다··· 1.5배 정도밖에 안 크던데.”
윈도 틴팅이 짙게 된 차가 빌라 대문 바로 앞에 멈춰서 그럴까. 저들끼리 떠들던 사생들이 하나둘 한율의 차에 의아한 시선을 던졌다.
“어? 강희 나온다.”
그때 약속 시간에 맞춰 야구모자를 깊게 눌러쓴 현강희와 매니저가 나왔다. 꺄아앗! 사생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지르며 핸드폰과 카메라를 들었다.
차카차카차칵!
“강희야!”
“현강희! 누나 봐봐!”
“우리 막내, 어디 가?!”
몇 명은 위험하게 한율의 차에 바짝 붙어서 현강희의 사진을 찍었다. 매니저는 사생들이 달려들까 잔뜩 경계하며 대문을 열었다.
“가까이 오지 마세요, 위험합니다!”
“비켜어!”
“강희야, 여기 봐!”
“현강희!”
뒷좌석에 앉아 타이밍을 재던 길우성이 대문이 열리자마자 뒷문을 활짝 열었다.
“웰컴!”
고개를 푹 숙인 채 사생들에게 시선 한 줌 던지지 않던 현강희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피었다.
“···안녕하세요!”
“강희 잘 부탁드립니다!”
매니저는 인사할 시간 없다는 듯, 현강희를 냅다 차 안으로 밀어 넣고 차 문까지 대신 닫아 주었다. 타악! 그러곤 차와 가까이 붙은 사생들을 물러나게 했다.
“비켜주세요! 위험합니다!”
“누구야?!”
“어스래빗? 어스래빗 아니었어?”
운전석 차창에 달라붙은 사생이 삿대질했다.
“맞네! 서한율, 서한율!”
다른 사생은 조수석 차창에 달라붙어 얼굴을 바짝 들이대고 눈을 뒤룩뒤룩 굴려, 박가람을 화들짝 놀라게 했다.
“어우, 깜짝이야.”
원제로의 매니저가 위험하다며 금세 그들을 떼어냈으나, 이번엔 다른 사생이 뒷문을 쿵쿵 두드렸다.
“어디 가, 강희야? 스케줄 가는 건 아니지?!”
한율은 저도 모르게 속으로 혀를 찼다. 본인들의 욕구 충족을 위해, 상대방의 의사나 감정을 짓밟으며 무례를 범하고 떼를 쓰는 모습들이 참 가관이었다.
그것도 아직 열여덟 살밖에 되지 않은 미성년자를 상대로.
“죄송합니다. 제가 괜히···.”
환했던 미소는 순식간에 사그라지고, 대역죄인이라도 된 것처럼 현강희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길우성이 현강희를 토닥토닥 달랬다.
“괜찮아, 네 잘못 하나도 없어. 우리도 이런 상황 다 예측하고 직접 데리러 오겠다고 한 건데 뭘.”
그때였다. 꺄아악! 차를 에워쌌던 사생들이 돌연 빌라 담으로 붙었다. 어떤 이는 따로 챙긴 듯한 접이식 사다리를 펼쳐 그걸 밟고 올라갔다.
빌라에서 원제로 라일이 창을 열고 사생들을 향해 외쳤다.
“조용히 해주세요! 부탁드립니다!”
꺄아악!
“라일아···!”
그의 부탁은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그래도 덕분에 사생들이 차에서 떨어졌다. 원제로 매니저도 이때라는 얼굴로 나머지 사생들을 떨어뜨렸고, 한율은 최대한 주의를 기울이며 차를 움직였다.
“우리, 점심은 뭐 먹을까?”
차가 무사히 대로에 합류했을 때, 놀랐던 가슴을 진정시킨 박가람이 뒷좌석을 돌아보며 물었다. 한율도 룸미러를 통해 현강희에게 물었다.
“강희 넌 뭐 좋아해?”
“네? 전···. 어?”
반사적으로 한율의 질문에 대답하려던 현강희가 돌연 놀란 소리를 냈다. 한율은 지금까지 현강희에게 썼던 존댓말을 버리고 태연히 물었다.
“싫어하거나 못 먹는 음식 있어?”
시무룩했던 현강희의 얼굴에 차츰 웃음기가 번졌다.
“네, 전 고기 좋아하고, 갑각류 못 먹습니다!”
그들은 보호소로 가기 전, 한 불고기 전문식당에 들러 점심을 주문했다. 원제로 사생 몇 명이 대기하던 택시를 타고 쫓아왔으나, 일부러 복잡한 도로로 들어가 빙빙 돌다가 따돌렸다. 예전에 블블의 사생을 능숙하게 따돌렸던 배우 김재신처럼.
“강희 넌 동물보호소 가본 적 있어?”
“중1 때 친구들이랑 봉사활동 시간 채우려고 간 적 있어요. 하지만 그땐 정말 멋모르고 시키는 대로 청소만 했던 터라···. 그런데 정말 오늘 봉사활동은 안 해도 괜찮은 거예요?”
“오늘 보호소 방문 예정인 봉사자들이 많다고, 소장님이 괜찮다고 했어.”
“좋은 일이네요. ···아, 우리가 청소하지 않아서 좋다는 게 아니라, 보호소를 찾는 봉사자분들이 많다는···.”
“알아, 알아.”
박가람이 흐뭇한 눈으로 현강희를 바라보다 물었다.
“그런데 우리랑 보호소 간다고 했을 때 멤버들이 뭐라 안 했어? 이번 리디스 미션도 그룹 간 경쟁이잖아.”
“이참에 선배님들이랑 더 친해져서 이런저런 노하우 좀 훔쳐 오라고 하던데요?”
“이런! 나의 귀여움과 흘러넘치는 끼는 훔친다고 훔칠 수 있는 게 아닌데···!”
“이런! 박다람 씨의 주접을 막아 줄 건우 형이 없네···!”
“떠들지 말고 조용히 밥이나 드세요.”
“네···.”
몇 달 만에 방문한 유기 동물보호소는 여전히 개 짖는 소리로 시끄러웠다. 방호복을 입은 채 개들을 데리고 산책을 나서는 자원봉사자들이 한율의 차를 한 번 슥 보곤 지나갔다.
차에서 내리자, 막 바닥에 물을 뿌리던 소장이 반색하며 웃었다.
“어서 오세요, 우리 대스타분들!”
“안녕하세요, 소장님!”
“안녕하세요!”
그들은 그늘에 앉아 쉬고 있던 봉사자들을 향해서도 꾸벅 웃으며 인사하고선, 트렁크의 짐을 꺼냈다.
“아이고, 이게 다 뭐에요?”
다가오던 소장이 놀란 목소리를 냈다.
“심장사상충 약이랑 구충제, 간식 좀 사 왔어요.”
“지난번 묘사에 에어컨이랑 공기청정기, 수술비 기부해주신 것도 정말 감사한데···. 정말 고마워요. 아이고, 고맙다는 말 밖에 안 나오네요.”
“혹시···.”
봉사자 몇 명이 마스크를 내리며 조심스레 다가왔다.
“아이돌··· 아니세요?”
“후···.”
각각 심장사상충과 캔 간식 박스를 안은 박가람과 길우성이 상큼하거나 느끼한 미소를 지었다.
“네. 안녕하십니까, 어스.”
“래빗. 인사드리겠습니다.”
두 사람 옆에서 현강희도 차분히 고개를 꾸벅였다.
“안녕하세요, 원제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