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아이돌의 재발견! 뮤닷 ]
[한 해에 데뷔하는 아이돌그룹은 수십 팀. 그중 대중에게 기억되며 성공하는 팀은 과연 몇 %일까?
5일 첫 방송 된 뮤닷 새 프로그램 는, 출중한 실력을 갖추고 야심 차게 데뷔했으나 제대로 빛을 발할 기회를 찾지 못한 보이그룹 여섯 팀을 모아···(중략).]
-첫 방은 자기소개랑 인사만 하다 끝난 느낌. 예고 보니 다음 화부터 재밌어질 듯ㅇㅇ
-퍼포 조는 다 기대되더라
-래퍼들만 모인 팀은 분위기 어-색ㅋㅋ
ㄴ래퍼(x) 팀 내 랩 담당(o)
ㄴ아이돌그룹에서 얼굴은 되는데 노래랑 춤이 어중간한 애들이 맡는 파트가 랩 아님? 그냥 말만 빠르게 하면 랩인 줄 아는 애들ㅋㅋ 아 힙합 경연 프로에서 인정받은 소수의 애들은 제외하고
ㄴ래퍼는 무슨 ㅅ1발 화장 떡칠하고 웅얼웅얼 립싱크나 하며 실실 웃음 파는 기생오라비들이지 칵퉤
ㄴ우리는 힙씬에 1도 관심이 없는데 그쪽에선 대체 왜 툭하면 래퍼란 단어에 욱하며 비아냥거리려 안달하는지 모르겠네요.
ㄴ아이돌 래퍼들이 언제 힙씬 래퍼랑 동급으로 인정해달라고 했음?? 애들도 다 알아. 힙씬이랑 완전히 다른 바닥, 다른 장르에서 ‘랩’이란 단어만 똑같이 사용하는 거.
ㄴ거지같은 랩으로 귀를 썩게 하니까 그렇죠 빠순 씨^^
ㄴ싫으면 안 들으면 될 거 아녜요. 누가 님 귀에 강제로 아이돌 랩 쑤셔 넣었어요? 굳이 본인이 찾아서 들어놓고는 기생오라비니, 뭐니, 모욕까지. 그렇게 힙부심 쩔면 님이 있는 씬에서 증명하세요. 전혀 다른 카테고리에 속한 애들 깎아내리면서 우위에 서려 하지 말고.
ㄴ난 한 번도 내가 힙씬 래퍼라고 한 적 없는데? 증명하길 뭘 증명해ㅋㅋㅋ
ㄴ그럼 네가 좋아하는 힙합 래퍼나 빨러 가든가, 왜 아이돌 기사 와서 ㅈ1ㄹ이세요.
-원제로는 데뷔하자마자 막강한 화력으로 1위 후보에 올랐던 팀인데 ‘묻히기 아까운’ 수식어가 붙으니까 뭔가 많이 이상하다.
ㄴ내가 보기에 원제로는 여기 출연한 게 악수임. 가뜩이나 서너 명 빼고는 실력이 아닌 방송 인지도로 데뷔해서 그 서너 명한테 묻어간다는 소리 듣는데, 이 프로그램으로 다른 남돌이랑 실력 적나라하게 비교당하게 생김
ㄴ너 ㅇㅅㄹㅂ 팬이지?
ㄴ내 댓글 모음 봐라ㅋ 누구 팬인 것 같냐?
-서한율 너 아무 데서나 연기실력 뽐내고 다니지 말랬지ㅡㅡ
-다 모르겠고 눈은 제대로 호강함
-월드투어 성공하고 돌아온 모 팀은 그냥 빼지..
“하······.”
인천국제공항에서 서울로 향하는 차 안. 기사를 살피던 안인섭은 짜증 섞인 한숨을 쉬었다.
“이 새끼들은 진짜··· 어디 갔다 올 때마다 인지도가 배로 뛰어 있네. 짜증 나게.”
타악. 안인섭은 조수석에다 편히 발을 올렸다. 그리고 운전 중인 매니저에게 물었다.
“형. A&R팀 인원, 혹시 그대로야?”
“어.”
“씨발. 좋은 노래 뽑지도 못하는 것들을 대체 왜 계속 데리고 있는 건지 모르겠네. 혹시 학원 같은 곳에서 돈 받아 처먹고 곡 대충 가져오는 거 아냐?”
“앨범 내고 싶어?”
다시 핸드폰으로 시선을 내리려던 안인섭은 황당한 얼굴로 매니저를 쳐다보았다.
“왜, 내면 안 돼? 시발, 내가 중국 새끼들한테 아양이나 떨려고 이 지랄 저 지랄 해가면서 아이돌로 데뷔한 줄 알아?”
“······.”
매니저는 입을 다물고 전방을 주시했다.
“하. 생각해보니까 어이없네? 아니, 대표님도 OK 한 거를 왜 형이 내고 싶냐 묻는 건데?”
“···미안. 내가 선 넘었다.”
안인섭은 뭐라 더 쏘아붙이려다가 대놓고 한숨을 쉬었다.
“됐다. 말을 말자. 그동안 한국에서 얌전한 해원이 데리고 아아주 편하게 일한 형이 뭘 알겠어.”
“매니저 형한테 시비 그만 털고.”
옆에서 핸드폰을 들여다보던 MOHE 멤버, 강정민이 안인섭의 팔을 툭 쳤다.
“이거나 봐.”
“뭔데.”
“이 기사, 전에 그놈 맞지?”
[신인배우 유상호, <서울 구미호> 구미호 오디션 도전!]
[신인배우 유상호가 개인 SNS에 게재한 글이 화제다.
유상호는 ‘<서울 구미호> 구미호 역에 도전! ...실은 명배우 선배님들에게 가르침 받고 싶어서 갑니다ㅎ 두근두근 좋은 경험이 될 것 같아요ㅎㅎ’라고 SNS에 글을 쓰며 신인다운 패기를 보였다.
2017년 영화···(중략).]
“작년에 파성줌마 친구가 데려왔었잖아. 그때 테이블 아래 기어가는 거 존나 웃겼는데.”
“아아, 그때 그 호빠 출신이네.”
“호빠 출신이었어? 어쩐지.”
안인섭은 심드렁한 얼굴로 대답했다.
“이 새끼 전에 이채현한테 들이댔다가 귀싸대기로 까인 적 있어.”
“허얼···. 이우그룹 회장 손녀? 그 개싸가지 골초?”
“어. 그런데 신수 훤해진 거 보니까 어디 좋은 스폰 하나 물었나 보다.”
“오? 그럼 혹시 이놈인가?”
“······?”
강정민은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는 안인섭에게, 드라마 <서울 구미호> 제작사가 서한율에게 했던 캐스팅 제안을 돌연 철회, 오디션을 진행하기로 한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거 보고 애들이 떠들더라. 투자자 쪽에서 배우 하나 꽂으려고 제작사에 압력 행사한 거 아니냐고.”
“그래?”
안인섭의 입가에 빙긋 미소가 그려졌다.
“유상호 이놈···. 어떤 스폰서를 물었는지 궁금해지는데?”
마주치면 인사나 하자
“뭘 그렇게 봐?”
멀리 무성하게 빙 둘러심은 정원수가 프라이버시를 보호해주는 저택. 풀장 선베드에 수영복을 입고 누워 일광욕을 즐기던 여성이 물었다.
이해원은 보고 있던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닌 걸 심각한 얼굴로 봐?”
까딱. 이채현이 내놔보라는 듯 손짓했다. 이해원은 머뭇거리다가 핸드폰을 건넸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통 기억이 안 나서요.”
이채현의 새카만 선글라스에 [신인배우 유상호, <서울 구미호> 구미호 오디션 도전!]이란 기사 타이틀이 비쳤다.
이채현이 눈썹을 찡그리며 비소를 흘렸다.
“누가 골 빈 새끼 아니랄까 봐, 스폰 받는 티 더럽게 내네.”
“네?”
“너 서한율이랑 친구지?”
툭. 이채현이 핸드폰을 돌려주며 선글라스를 벗었다.
“친구는 아니고 가끔 연락하는···.”
“왜. 친하다 그러면 데려오라 그럴까 봐 벽 치는 거야?”
“······.”
이채현은 이해원을 빤히 바라보다가 웃으며 담배를 집었다.
“너 얼굴에 다 드러나거든? 아무튼 걔한테 주의 줘. 오디션장이든 방송국이든, 우연히라도 유상호 마주치면 좋게 좋게 피해서 엮이지 말라고. 아빠가 방송국 국장이 아니라 사장이라고 해도 지금 유상호 뒤에 있는 년은 못 이겨. 최소한 나 정도 되는 빽을 갖고 있으면 모를까.”
대기업 회장 손녀 정도의 빽이라니. 이해원은 놀란 내색을 감추며 조심스레 물었다.
“스폰서가··· 누군데요?”
치익. 불붙인 담배를 한 모금 깊게 빨아들이고 나서야 그녀가 대답했다.
“있어. 밤일에 환장한 변태 할망구.”
* * *
12일 금요일 밤. 2화가 방송되었다.
어스래빗 멤버들은 지난주처럼 거실 TV 앞에 모여 시청했다. 그들 곁에는 며칠 전 보호소에서 데려온 새끼 고양이 세 마리가 뒹굴뒹굴 레슬링을 하며 놀았다.
므양, 먀옹, 뻵.
“이렇게 노래하는 거 들으니까 다들 노래 잘하긴 잘한다.”
“몇 년 동안 보컬 트레이닝 받은 짬밥이 어디 안 가죠.”
지난주 1화가 인사와 소개 위주였다면, 이번 2화는 만난 지 몇 시간도 안 된 이들이 한 조가 되어 즉석에서 호흡을 맞추는 모습을 집중 조명했다.
-역시 프로는 프로ㅎ 같은 팀도 아닌데 바로 저렇게 화음을 쌓네
-동네 사람들 우리 애들 잘하는 것 좀 보세요!!
-평소 ‘그룹’으로 있기 위해 스스로 억눌렀던 개성과 실력을 드러내는 거죠ㅇㅇ
-우리 애 노래 정말 잘한다구요ㅜㅜ.. 회사가 이상한 곡만 가져와서 그렇지;
-크으 이런 걸 원했다고
그러나 프로그램 톡창 반응이 내내 좋은 건 아니었다. 첫 녹화 당시, 출연자들도 예의상 박수를 친 순간들이 나왔기 때문.
특히 랩 포지션 멤버들이 모인 4조가 나왔을 때였다.
-저거 랩 맞음?
-원제로 이럴 줄 알았다ㅋㅋㅋ
-아무리 아이돌이라고 해도 저건 조금 심한데;
-발음 하나도 안 들려
-같은 파트끼리 모아놓으니까 실력 차이도 적나라하게 드러남ㅋㅋㅋ
-웅얼웅얼도 아님. 웅엉웅어웅.
솔직한 감상이 겉으로 드러날까, 진지한 얼굴로 4조의 무대를 바라보는 출연자들의 모습. 그때와 비슷한 표정을 짓던 박가람이 호들갑을 떨며 강보배의 팔을 두드렸다.
“나온다, 이제 나온다···!”
강보배가 머쓱하게 웃었다.
“흐.”
뭉개지는 발음과 기어들어 가는 제 목소리에 스스로 귀가 빨개지던 원제로의 래퍼가 퇴장하고, 강보배가 시크한 얼굴로 센터로 나오며 랩을 이어갔다. 그러자 아이돌 래퍼 수준은 어쩔 수 없다며 욕하던 톡창 분위기가 금세 반전되었다.
-워후
-와
-이거지
-얘 목소리 귀에 익은데?
-워 발음 개 잘 들려
-귀가 뜨인다
-지금 나오는 아이는 어스래빗의 피도 눈물도 없는 카리스마 래퍼 보배입니다♡트레리안♡
-묵직한 사이다 크
-엇박 플로우 잘 타네
-아 트레리안
-ㅅ1ㅂㅏ잘생겼어, 짜릿해
-얘 트레 어쩌고 아님???
-출연자들 얼굴에도 화색 도는 거 봐ㅋㅋㅋㅋ
-시바견이 잘생겼다고?
다음은 한율이 속한 5조의 무대. 길우성은 새끼고양이를 품에 안고 소파에 드러누웠다.
“아무리 친구라도 유독 봐주기 힘든 비즈니스가 있지.”
한율은 강아지풀 장난감을 들고 고양이들과 놀아주었다.
“어. 나도 네가 카메라에 대고 애교란 거 부릴 때마다 견디기 힘들더라.”
“피차 마찬가지였구나, 써한. ···가만. 뭐? 애교도 아니고 애교란 거?”
방송이 끝난 뒤, 한율은 방으로 들어가서 <서울 구미호> 1화 대본을 펼쳤다. 대사는 이미 다 외웠지만, 시간이 지나 다시 살피면 새로운 관점으로 보이는 부분이 종종 있는 까닭이었다.
오디션이 바로 이틀 후이기도 하고.
우웅.
“······?”
오래간만에 MOHE의 이해원에게서 톡이 왔다.
-[리디스 잘 봤어. 혹시 지금 통화 가능해?]
이 시간에?
단순히 방송 감상을 들려주려 통화하자는 건 아닌 것 같아, 한율은 짧게 답장했다.
[네.]
이틀 후인 14일 일요일.
한율은 자신의 차를 몰고 혼자 <서울 구미호> 오디션이 열릴 소극장으로 향했다. 조유찬이 걱정된다며 함께 가겠다고 했으나, 오디션에 매니저를 데려오는 건 유난을 떠는 것 같아 괜찮다고 거절했다.
‘그때 그 거리네.’
내비게이션 안내를 따라 도착한 소극장은 3년 전 <하울링> 오디션을 본 곳과 가까웠다. 하지만 주변에 마땅히 차를 세울 만한 곳이 없어, 한율은 50여 미터 떨어진 주차장에다 차를 세웠다.
제작진이 한율에게 와 달라고 한 시간은 11시. 한율은 아직 30분이 남은 걸 확인하곤 근처 카페로 들어갔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 포장 부탁드립니다.”
“네, 4,100원 결제 도와드리겠··· 습니다.”
계산기에 입력하던 직원이 한율의 얼굴을 보곤 멈칫했다. 한율은 대외용 미소를 지으며 카드를 내밀었다.
“여기요.”
“감사합니다. ···여기 카드 드리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커피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엔 어스래빗 단톡방을 확인했다.
-[삼둥이 예방접종 완료.]
-[(사진)]
-[애들 왜 다 얼어있냐ㅋㅋ]
-[몰라 케이지 안에 넣으니까 그냥 굳음]
-[(이모티콘)]
-[귀여워(진지)]
-[SNS ㄱ]
-[ㅋㅋㅋㅋ]
단톡방엔 유호가 동물병원에서 찍은 새끼 고양이들 사진이 잔뜩 올라와 있었다. 한율은 케이지 안에 동상처럼 우뚝, 멍한 얼굴로 굳은 새끼 고양이들 사진을 따로 저장했다. 나중에 모친에게 보내주기 위해.
우웅.
“주문하신 아이스 아메리카노 나왔습니다.”
한율은 진동벨을 반납하고 커피를 받았다.
“감사합니다.”
“저기···.”
“······?”
빨대를 챙기던 한율은 직원을 바라보았다. 직원이 주변을 조심스레 둘러보더니 조용히 말했다.
“방금 고은훤 씨도 다녀가셨어요.”
“은훤이 형이요?”
“네. 아, 제가 최근에 보컬 시즌3 정주행하고 있거든요. 그리고 얼마 전에 <별☆일없는 집> 드라마도 다시 봐서···.”
“아.”
한율은 팬에게 곧잘 짓던 미소를 보였다.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괜찮으시면 사진 한 장만 부탁드려도 될까요?”
한율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잠시 후, 카페를 나온 한율은 커피를 마시면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크고 작은 공연장을 비롯해 놀거리, 먹을거리가 많은 거리라 우연일 수도 있다. 하지만 고은훤도 배우다. 연기를 하고자 여기저기 프로필을 돌리고 오디션을 보러 다니는, 흔한 배우. 그러니 <서울 구미호> 오디션에 도전하지 말란 법은 없다.
‘오늘 오전은 ‘형호’ 역 오디션만 본다고 했었지.’
고은훤에게 연락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정말 오디션을 보러 왔다면 지금쯤 한창 긴장하거나 집중하고 있을 테니.
‘마주치면 인사나 하자.’
한율은 오디션이 열리는 소극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드라마 <서울 구미호> 오디션이 비공개로 열리는 작은 소극장. 무대엔 ‘형호’ 역 오디션에 지원한 신인배우가 잔뜩 긴장한 얼굴로 심사위원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얼굴에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심사위원이 말했다.
“네, 잘 봤습니다. 수고하셨어요.”
“네, 감사합니다!”
시큰둥한 반응에 속상할 법도 하건만, 신인배우는 들어왔을 때처럼 씩씩하게 인사하고 퇴장했다.
“이제 열 사람밖에 안 남았는데··· 확 꽂히는 사람이 없네요, 대표님.”
“그러게요. 한율 씨는 언제 오기로 했죠?”
“11시요.”
권 대표는 무료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서류를 뒤적거렸다.
“23분이나 남았네···.”
<서울 구미호>는 이미 내년 1월 tv Mu 편성을 딴 상태였다. 그래서 늦어도 11월에는 촬영을 시작해야 하는데, 시청률을 잡아줄 만한, 어느 정도 검증된 배우를 캐스팅하는 것과 달리 오디션은 여러모로 시간도 오래 걸리고 번거롭다.
그런 까닭에 힐링 픽처스 측은 이번 오디션 정보를 이 바닥에서 어느 정도 자리 잡은 배우 매니지먼트 쪽에만 뿌렸다. 접수 기간과 검토 기간도 타이트하게 잡았다. 그렇다 보니 영상 오디션까지 합격한 배우들도 대본을 연구할 시간이 적어, 많이 헤매는 눈치.
‘그 점을 고려해 최대한 좋게 평가하려고 해도···.’
“많이 피곤하신가 봐요, 대표님.”
옆에서 박명길 PD가 웃으며 물었다. 권 대표는 태연히 거짓을 뱉었다. 박 PD는 투자자인 L그룹 측의 강력한 추천을 받아 영입하고, 이번 <서울 구미호> 총연출을 맡기로 한 사람이었다.
“이상하게 잠이 안 와서 오디션 지원 배우들 영상을 새벽 내내 돌려봤거든요. 굳이 이번 드라마가 아니어도, 다음 작품에 필요한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박 PD가 허허 웃었다.
“대표님도 참 꼼꼼한 성격인 것 같아요.”
권 대표도 따라 입가를 올렸다.
‘사실은 분해서 잠이 안 왔다!’
박 PD와 계약한 건 그가 L그룹 측에서 들이민 사람이라 할지라도 실력과 평판이 나쁘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이번에 돌연 L그룹이 배우를 모두 오디션으로 뽑는 게 좋겠다며 은근히 압력을 행사한 순간, 권 대표는 깨달았다.
‘이놈들, 지들 입맛대로 배우 꽂으려고 작업 친 거였구나.’
배우를 캐스팅하는 데엔 누구보다 PD의 의견을 귀담아들을 수밖에 없으므로.
사실 제작사 입장에선 누구를 데려다 찍어도 작품만 흥행하면 나쁠 게 없었다. 오히려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다고, 은근한 갑질 요구 뒤엔 마땅한 콩고물도 따라온다. 이 바닥에선 제법 흔한 일.
하지만 기분이 나쁜 건 나쁜 거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서울 구미호>의 두 구미호 역으론 이제설과 서한율이 딱이었다. 두 사람도 출연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었는데, 대체 누구를 꽂으려고 이렇게 여러 사람을 피곤하게 하는 건지.
‘적어도 캐스팅 단계 전에 말하든가.’
지금 이 짓거리가 그 한 사람 때문에 벌이는 쇼란 사실도 매우 스트레스였다. 열심히 오디션을 준비해서 여기까지 온 배우들은 또 무슨 잘못이란 말인가.
“다음 지원자 들어오라고 할까요?”
오디션 진행 보조를 맡은 스태프가 조심스레 물었다. 권 대표는 표정을 관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스태프가 대기실과 연결된 문을 열어 지원자를 불렀다.
“23번 유상호 씨.”
한율이 대기실에 도착한 건 그때였다.
“어?”
허공을 보며 대사를 소리 없이 중얼거리던 고은훤이 한율을 보곤 반갑게 웃었다.
“한율아, 왔어?”
서한율? 서한율이 왔다고?
대본에 집중하던 지원자들이 술렁거리며 한율을 보았다.
“오랜만이에요, 형. 잘 지냈어요?”
“나야 늘 잘 지내지. 실은 이번 오디션 일로 너한테 연락할까 고민했는데···. 그러면 괜히 신경 쓰이게 할 것 같아서.”
“이해해요.”
지금 대기실에 모인 배우는 모두 ‘형호’ 역을 따내기 위해, 짧은 준비기간에도 열심히 노력하여 이곳까지 온 사람들이었다. 그렇기에 한율은 잠깐이나마 떠들어서 미안하다는 얼굴로 그들에게 꾸벅였다.
막 공연장으로 나가려다 말고 이쪽을 바라보는 유상호를 향해서도.
그는 한율과 시선이 마주치자, 입가를 움찔거리며 올리곤 도망치듯 대기실을 나갔다.
한율은 닫히는 문을 보며 이틀 전, 이해원에게 들은 이야기를 떠올렸다.
『유상호란 사람과는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최대한 엮이지 마. 호빠라고 불리는 여성 전용 유흥업소 출신인데··· 뒤에 아주 힘이 센 스폰서가 있는 것 같아.』
내가 누군지 다 알잖아
처음 듣는 이름,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안인섭에게서 빼돌린 파일에도 없는 인물. 인터넷으로 검색해보고 나서야 작년부터 드라마, 영화에서 단역과 조연으로 활동한 신인배우란 사실을 알았다.
인물은 제법 괜찮았다. 키는 큰데 이목구비가 예쁘장한, 세간에서 흔히 말하는 꽃미남 타입. 나이는 21살.
하지만 그가 정말 스폰을 받고 있다 한들, 꼭 이번 일과 연관되었다고 단정지을 순 없다. 이해원도 그렇게 말했고.
‘그리고 스폰서 힘으로 주연 자리를 꿰차고자 했다면 제작사와 언론사를 이용해 작업만 쳐도 됐을 텐데, 굳이 오디션을? 캐스팅 제안을 철회했단 기사가 나온 시점을 생각해봐도···.’
혹시 오디션으로 제 실력을 증명하고 싶었던 건가?
한율은 고은훤의 옆에 앉아 대본을 꺼냈다.
‘뭐, 결과를 보면 알겠지.’
잠시 후. 한 지원자가 벽시계를 보더니, 공연장 쪽 문 앞에서 서성거렸다. 그가 다른 배우를 향해 조용히 말했다.
“이번엔 조금 오래 걸리네요.”
“그러게요. 10분은 지난 것 같은데.”
오디션에서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것은, 심사위원들이 해당 지원자에게 관심이 많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리고 다른 지원자들도 초조하게 시계를 들여다볼 때 즈음, 유상호가 대기실로 돌아왔다. 잔뜩 상기된 얼굴로.
“전 먼저 가보겠습니다. 수고하세요.”
“네, 수고하셨습니다.”
유상호는 다른 지원자들에게 꾸벅꾸벅 인사하며 자신의 가방을 챙겼다.
“먼저 가보겠습니다.”
“네, 수고하셨어요.”
한율과는 시선이 마주치려던 찰나에 고개를 숙이곤, 종종걸음으로 대기실을 나갔다.
고은훤이 유상호의 뒷모습을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표정이 밝은 걸 보니 좋은 평가 들으셨나 보다.”
“······.”
한율의 차례는 먼저 온 지원자들의 뒤였다.
앞서 오디션을 보고 나온 고은훤이 한율을 격려했다. 그의 얼굴은 큰 시험을 넘긴 사람처럼 아쉬움과 후련함이 섞여 있었다.
“한율이 넌 원래 잘하니까, 굳이 잘하라는 말은 안 할게.”
“네. 점심 뭐 먹을지 생각하고 있어요.”
오디션이 끝나면 마침 점심시간이라, 고은훤과 함께 점심을 먹기로 했다.
“응.”
작은 무대가 설치된 공연장에는 힐링픽처스 대표를 비롯한 심사위원 5명이 나란히 앉아있었다. 한율은 무대로 올라가 그들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서울 구미호> ‘형호’ 역에 지원한 서한율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들과 시선을 맞춘 후엔 저도 모르게 무대를 찍는 카메라를 향해서도 미소 지었다. 직업병이었다.
“안녕하세요, 서한율 씨. 자기소개할 때 이름 앞에 ‘배우’나 ‘아이돌’ 타이틀을 붙이지 않는 건 일부러인가요?”
질문을 던진 이는 <서울 구미호> 연출을 맡게 되었다고 알려진 박명길 PD였다. 본래 MBS 출신으로, 대하사극 조연출부터 시작해 가벼운 로코까지 다양한 드라마를 연출하며 센스가 좋다는 평을 받는 베테랑이었다.
한율은 담담히 미소 지었다.
“네. 아이돌 겸 가수, 혹은 가수 겸 아이돌이란 수식어를 붙이면 너무 길어서요. 그리고··· 굳이 붙이지 않아도 될 것 같기도 하고요.”
내가 누군지 다 알잖아.
한율의 표정과 말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자신감. 박 PD는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다른 심사위원들에게 말했다.
“내가 이래서 요즘 젊은 친구들을 좋아해요. 본인 실력만큼이나 솔직하고 시원시원해.”
힐링픽처스 권 대표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본으로 시선을 한번 내린 그가 <서울 구미호> 메인 작가를 돌아보며 물었다.
“바로 보실까요?”
“네.”
작가는 기다렸다는 듯, 대본도 보지 않고 한율에게 씬 넘버를 말했다.
“24페이지 14-1. 대본 보고 하셔도··· 괜찮은데, 대본을 안 들고 오셨네요?”
한율은 입가에 웃음기를 지우지 않은 채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곤 천천히 심호흡한 후, 며칠 동안 연구하고 이해한 ‘형호’에게 몰입했다.
작가가 보고 싶다고 말한 씬은, 형호가 죽은 남자 시신을 살피다가 누군가의 전화를 받는 장면이었다. 구미호의 사고가 엿보이는 모습에서, 인간을 연기하는 구미호를 표현하는 게 포인트.
한 번, 두 번, ···세 번.
눈을 깜빡일 때마다 서서히 변하는 한율의 눈빛에, 심사위원들은 놀라거나 진지한 얼굴로 집중했다.
한율은 눈앞에 가상으로 쓰려진 시신을 그렸다. 처참한 형태로 생을 마감한 주검이었으나, 형호에겐 안쓰러움은커녕 불쾌감과 미약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무언가였다.
이는 수백 년 동안 너무나 많은 인간의 죽음을 접하며 익숙해진 탓.
아무리 구미호가 인간의 정기를 취하며 살아간들, 늘 어디선가 끊임없이 증식하여 넘쳐나는 게 인간이었다. 여기에 명줄은 어찌나 짧고 약한지. 그렇기에 형호는 인간에게 일일이 감정을 낭비하는 건 하등 쓸모없는 일이라 여긴다.
남자의 시신을 보면서도 자연스레 이렇게 생각했다.
‘왜 여기에 이런 꼴로 죽어있어? 지저분하게.’
가상의 시신에서 흘러나오는 피가 신발을 오염시키지는 않을까 주의를 기울이며 그 자리에 개처럼 쭈그려 앉는다. 건조한 눈빛으로 시신을 살피다 옷을 들추곤 킁킁 냄새를 맡는다.
그러다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
권 대표는 저도 모르게 팔꿈치를 세우고 턱을 괸 채 손으로 입을 감쌌다.
핸드폰 화면을 확인하는 순간, 인간의 죽음을 대하는 데에 익숙함마저 느껴지던 한율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입가엔 천진한 미소가 번지고, 목소리는 막 학원 수업을 마치고 나온 평범한 고등학생처럼 들떴다.
“네, 쌤! 웬일이세요?”
그러면서 손끝에 묻은 피를 살며시 할짝거리는데, 그 순간 이성을 유혹하는 것처럼 눈빛이 요사스럽게 변한다.
“아아, 나 완전 까먹고 있었는데. ···히, 괜히 전화했다 싶죠?”
눈과 목소리에 담긴 감정과 표현이 아주 따로 논다. 눈에선 구미호의 본능이, 말과 목소리에선 낙천적인 10대 고등학생 특유의 분위기가 흘러나왔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전혀 어색하지 않아, 한시도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정말 보답하고 싶으면 빨리 우리 회사에 입사해요. 그리고 내 눈과 귀가 되어주는 거지.”
한율은 자리에서 일어나 신발 밑창을 확인했다. 그러곤 바닥에다 슥슥 문질러 닦곤 태연히 걸음을 옮겼다.
“크, 완벽하지 않아요?”
씬 14-1은 이걸로 끝.
한율은 움직이던 몸의 방향을 부드럽게 틀어 무대 중앙으로 돌아왔다.
“여기까지입니다.”
“······.”
권 대표처럼 한율의 연기에 집중하던 심사위원들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무슨 말이 필요하겠냐는 시선들이 오갔다.
“47페이지.”
이번엔 박 PD가 한율에게 보고 싶은 씬을 요청했다.
“형호가 딱 한 번 마음을 주었던 인간을 떠올리며 우는 장면. 한번 볼 수 있을까요?”
한율은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정오가 되자 ‘형호’ 역을 뽑는 오디션이 종료되었다. 한 시간 후부턴 또 다른 주인공인 구미호 ‘슬호’ 역을 뽑는 오디션이 시작될 예정이라, 심사위원들은 아예 그 자리에서 샌드위치와 커피로 점심을 때웠다.
권 대표는 단호하게 운을 뗐다.
“전 누가 뭐래도 서한율 씨입니다.”
L그룹에서 밀고 싶은 배우가 누군지는 아직 감이 잡히지 않는다. 어쩌면 서한율이 아닌 이제설을 밀어내려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이대로 순순히 입을 다물고 있기엔 제작자로서의 감이 근질거렸다.
서한율에게 형호 역을 맡기지 않는 건, 시청률 일부를 미리 내다 버리는 행위나 다름없다.
“중간에 정말 사람이 아닌 것처럼 눈빛이 소름 끼치게 변한 것도 그렇고, 형호를 이만큼 잘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은 서한율 씨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네. 한율 씨 연기를 직접 눈으로 보니, 왜 이사문 감독님이 저한테 센스 떨어졌냐 한소리하셨는지 바로 이해가 가더라고요. 하지만···.”
권 대표의 말에 동감을 표하는 듯했던 박 PD가 뒷말을 흐리며 다른 지원자 서류를 들췄다.
“구미호란 존재를 잘 표현한 것도 좋지만, 그래도 외모로 봤을 땐, 이 두 친구가 가만히만 있어도 사람을 잘 홀리게 생기지 않았나요? 물론 한율 씨도 곱상하게 잘생기긴 했지만요.”
박 PD가 내민 서류의 주인공은 고은훤과 유상호였다.
권 대표는 빙긋 웃었다.
‘유상호였구나?’
JZ엔터의 고은훤은 이번 오디션이 있기 한참 전 힐링픽처스에 직접 프로필을 돌리러 온 적이 있었다. 워낙 얼굴이 잘생기고 아이돌 연습생이었을 때 <보컬리스트 시즌3>에 나가며 소소하게 팬덤까지 만들어진 인물이라 인상에 남았다.
하지만 연기실력이 조금 아쉬웠다. 단역을 주고 싶어도 너무 잘생겨, 주인공에게 집중되어야 할 흐름을 깨기 십상이라 간간이 소식만 들었다. 아르바이트해서 번 돈으로 연기 학원에 다니고, 그러면서 오디션장마다 나타난다고.
만약 스폰서가 붙어있었다면 그렇게 스스로 발품 팔며 돌아다닐까.
“구미호 조건 중 하나가 출중한 외모이기는 하지만.”
골똘히 생각에 잠겼던 <서울 구미호> 작가가 입을 열었다.
“인간을 연기하는 구미호. 이 캐릭터를 잘 살릴 만한 연기실력이 없다면 구미호란 설정 자체가 퇴색되어 버립니다. 그럴 거였으면 애초에 구미호가 아니라, 초능력 가진 잘생긴 인간이나 외계인으로 설정했죠.”
“한율 씨가 우리 대본을 받은 게 언제였죠?”
“한 달 정도 됐죠?”
“이 두 사람이 지정 대본을 받은 건 일주일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형호 역을 연구할 수 있는 시간도, 정보도 굉장히 차이가 났죠. 안 그렇습니까?”
당신이 지금 밀고자 하는 배우에게 1화 통대본을 미리 보여주지 않았다면 말이지.
권 대표는 입안에서 맴도는 의심을 꿀꺽 삼켰다.
“그럼 이렇게 하는 건 어떨까요?”
그리고 오디션 현장을 내내 촬영하고 있던 카메라를 가리켰다.
“다른 구미호, ‘슬호’ 역 지원자들에게 직접 투표를 받는 겁니다.”
“대표님···. 한율 씨에게 꽂힌 건 이해하지만, 조금 섭섭해지려고 하네요. 조금 전에 말했듯이 연구할 시간과 정보량 차이가 있지 않았습니까. 그런 부족한 상태로 본 오디션 영상을 보여주면 사람들이야 당연히 한율 씨 뽑겠죠. 그렇지 않나요? 그리고 배우가 배우를 뽑다뇨. 이 바닥 생활 오래 한 분이 큰일 날 소릴.”
“이대론 의견이 계속 엇갈릴 것 같아 답답해서 그랬습니다. 보아하니··· PD님도 생각을 확고하게 굳히신 것 같네요.”
“그럴 리가요. 제가 바라는 건 오직 제가 연출하는 작품이 좋은 성적을 얻는 것, 그거 하나뿐입니다.”
웃으며 말하고는 있지만, 권 대표는 박 PD의 말속에서 ‘내가 연출자야. 연출자가 싫어하는 배우를 넣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이런 협박을 들은 것만 같았다.
‘하···. 그놈의 투자금만 아니었어도.’
권 대표는 애써 표정을 관리했다.
“그럼 형호 역은 슬호와 민해솔 역을 뽑을 때 함께 결정하도록 할까요? 배우 간의 호흡과 분위기도 맞아야 하니까요.”
이대로 의견 충돌이 심해져 다툼으로 이어지는 건 아닐까. 조마조마한 얼굴로 대표와 PD를 살피던 다른 이들이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날 밤. 한율은 이제설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한율아. 지금 잠깐 우리 집으로 올라올래? 드라마 얘기로 할 얘기가 있어.]
이제설은 오후에 있던 ‘슬호’ 역 오디션을 봤을 터.
무슨 얘기일까.
한율은 그러겠다고 대답한 후 편의점에 가는 편한 차림으로 숙소를 나왔다. 그리고 3분 만에 이제설의 집 앞에 도착했다. 같은 아파트, 같은 동에 사는 터라 엘리베이터만 타면 바로였다.
“어서 와.”
초인종을 누르자 이내 이제설이 문을 열어주었다.
“불편할 것 같아서 민초는 잠시 방에 넣어뒀어.”
“강아지 이름이 민초에요?”
“응, 영아가 지어줬어. 맥주 마실래?”
왜 나한테만 이런 일이 생겨
“아니요, 괜찮습니다.”
한율은 정중히 사양하며 눈으로 거실을 둘러보았다. 어스래빗 숙소와 구조는 똑같지만, 인테리어나 가전제품, 가구 등의 배치에서 모던함이 느껴졌다. 개를 위한 하우스나 식기 디자인도 튀지 않고 잘 어울렸다.
“선배님이 직접 꾸미신 거예요?”
“그럴 리가. 인테리어 디자이너 작품이야. 허브차라도 마실래?”
“네.”
식탁에 차가운 캔맥주와 따뜻한 허브차가 놓였다.
“잘 마실게요.”
“응.”
이제설은 캔맥주를 따서 시원하게 꿀꺽꿀꺽 들이켰다. 한율은 따뜻한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았다. 들어올 때부터 식탁에 놓여 있던 <서울 구미호> 1화 대본으로 시선이 갔다. 타이틀 옆에 온더로즈 영아의 포토 스티커가 붙어있었다.
“나 조금 전에 힐링픽처스 대표님 만났어.”
“출연 문제로요?”
“······.”
“······?”
이제설은 가만히 한율을 바라보다가 불쑥 본론을 꺼냈다.
“대표님이 형호 역으로 한율이 널 계속 고집하니까, 투자자 중 하나인 L그룹 쪽에서 대놓고 유상호란 친구를 쓰라고 요구했다더라. 그렇지 않으면 투자는 없던 일로 하겠다고. 혹시 알고 있었어?”
“따로 밀고자 하는 배우가 있는 건 아닐까 의심은 했었어요. 하지만 굳이 번거롭게 오디션까지? 이런 의혹도 들어서.”
이제설은 고개를 끄덕이며 덤덤히 말했다.
“대표님께 L그룹 투자, 받지 말자고 했어.”
한율은 눈을 끔뻑거렸다.
“네?”
드라마를 제작하는 데엔 기본 수십억이 들어간다. <서울 구미호>는 구미호와 범죄 스릴러까지 가미되었으니 CG와 소품, 세트 제작비 등으로 훨씬 더 필요할 터다.
최근엔 방송 제작 현장에도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란 지침이 강하게 내려와, 촬영 기간도 길어져 인건비 지출 역시 만만치 않고.
“제작사에 이래라저래라할 정도면 L그룹이 투자하기로 한 금액이 상당할 텐데, 다른 대안이 있는 거예요?”
“OTT 플랫폼에서 지금 <서울 구미호>에 관심을 보이는 중이야.”
한율은 고개를 기울였다.
“이미 tv Mu 내년 1월 편성을 딴 상태라고 알고 있는데요. tv Mu 측에서도 제작비 일부를 투자하기로 했고.”
“그래서 제작사만 원한다면, OTT 플랫폼 측에서 FJ그룹과 직접 협상을 진행해보겠대. tv Mu와 동시 방영할 수 있는 가닥으로. 단, 주연배우로 너랑 나를 쓴다는 조건하에.”
세계 최대 OTT 플랫폼이 최근 한국 드라마 투자에 열을 올린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전 세계 동시 방영 또한 배우로선 환영할 만한 일.
하지만.
“내부적인 조건을 비밀로 해도, 갑자기 투자자가 바뀌고 오디션이 무색하게 기존 캐스팅대로 가면 의심의 목소리가 나오지 않을까요?”
“의심이야 나중에 오디션 영상을 풀면 바로 잠잠해질걸? 다른 역은 몰라도 두 구미호 연기는 너랑 내가 단연 뛰어났으니까.”
“오디션 영상 보셨어요?”
이제설이 당당한 얼굴로 대답했다.
“응. 그리고 애초에 부당한 압력을 행사해서 오디션을 열게 한 건 L그룹 쪽이잖아. 투자자는 출연 배우를 보고 투자를 결정할 권리가 있지만, 반대로 투자를 미끼로 제작사에 갑질하는 건 엄연히 법에 저촉되는 행위야. 이 바닥에 워낙 고질적으로 만연하게 벌어지던 일이라 다들 모른 척 눈 감았을 뿐이지.”
“그래서, 대표님은 뭐라고 하셨어요?”
“고민해보겠대. 힐링픽처스 입장에선 L그룹과 사이가 완전히 틀어질 수 있는 모험이니까.”
한율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도 얼마 안 남았으니, 고민이 크겠네요.”
“그럼 한율이 넌 괜찮은 거지? 투자자가 바뀌는 것도, OTT 플랫폼에서 동시 방영되는 것도.”
“네. 촬영 환경이 괜찮고, 연기하는 데에 재미만 있으면 상관없어요.”
이제설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씨익 웃으며 캔맥주를 들었다.
잠시 후. 숙소로 돌아온 한율은 인터넷으로 [L그룹 유상호]를 검색했다. 작은 인터넷 언론사의 기사 일부가 떴다.
[L그룹 계열사 중 하나인 별구름 리조트에서 발탁한 새 광고 모델은 신인배우 유상호로, 그는···.]
포털사이트 유상호 프로필엔 없는 광고 모델 이력이었다.
‘L그룹이라.’
안인섭에게서 빼돌린 파일 중 L그룹 관련 건이 있었는지 기억을 더듬어봤지만, 딱히 떠오르는 건 없었다. 이해원도 유상호에 대해 잘 몰랐던 걸 보면, ‘그쪽’에서도 주로 어울리는 무리가 다른 모양.
‘어쨌든 최종 결정은 힐링픽처스 대표의 몫이지만.’
그 결정을 선택하는 데에 도움을 줄 순 있지 않을까.
정말 연기를 잘하지만, 단순히 신인이란 이유로 섭외 리스트에서 오르지 못한 게 분해 스폰서를 꼬드겨 오디션을 열었다 쳐도 혼날 일인데.
한율은 너튜브에서 유상호가 연기하는 영상을 찾아보며 생각했다.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타입일지도 모르겠네.’
다음 날 아침.
회사로 갈 채비를 하던 중, 한율은 생각지 못한 인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너 드라마 캐스팅에서 듣보 신인한테 밀리게 생겼다며? 내가 도움 될 만한 거 하나 줄까?]
저장되지 않은 연락처로 온 톡이었으나, 프사는 익히 아는 얼굴이었다.
바로 MOHE의 안인섭.
“······?”
한율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 녀석은 대체 어떤 경로로 ‘듣보 신인’에게 밀리게 되었다는 걸 알게 됐을까. 이해원 성격상, 다른 누구도 아닌 안인섭에게 이번 일에 대해 주절거리진 않았을 텐데 말이다.
[누구세요?]
-[프사 안 보이냐?]
[사칭일 수도 있잖아요. 제 번호는 어떻게 아셨어요?]
-[이해원 폰 털었다. 됐냐?]
-[어쨌든 지금 너한테 꼭 필요한 거니까, 오늘 시간 되면 나와.]
한율은 잠시 고민했다.
이번 드라마 캐스팅 건은, 힐링픽처스 대표만 이제설이 말한 플랜대로 하겠다 결심하면 잘 해결될 가능성이 크므로.
그래도 안인섭이 말하는 도움 될 만한 게 무엇인지,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건지 조금 궁금하기는 했다. 클라우드에서 삭제된 파일 중 두 번째 이슈가 터지자마자, 도망치듯 중국으로 간 이후 얼마나 변했는지도.
[네. 몇 시에 어디로 갈까요?]
안인섭이 만나자고 한 장소는 한강 앞 주차장이었다.
먼저 도착한 그는 양산에다 선글라스를 쓰고 차 앞에 서 있었다. 다른 한 손엔 얼음이 잔뜩 든 음료까지 들고.
“날도 더운데 왜 여기에서 보자고 한 거예요?”
안인섭이 한율을 돌아보며 대답했다.
“오래 대화하기 싫으니까.”
“그 오래 대화하기 싫은 사람 연락처를 굳이 알아내서 주고 싶다는 게 뭔지 참 궁금하네요.”
툭. 안인섭은 자신의 차 보닛에다 음료를 올려놓곤 주머니에서 사진 한 장을 꺼냈다.
“자.”
“······?”
한율은 사진을 받아 살폈다. 온갖 양주가 놓인 테이블 앞에서 허세 가득한 얼굴로 담배를 피우는 유상호가 찍혀 있었다.
“이게 뭔데요?”
“너랑 같이 오디션 본 유상호. 그놈 미성년자 시절에 유흥업소에서 찍힌 사진이야. 어디에서 어떻게 구했는지는 묻지 말고, 이거 써서 보내버려.”
무슨 속셈일까.
유상호의 과거야, 마음만 먹으면 스스로 실토하게 만들 수 있다. 정말 그렇게 할까 생각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단순히 과거 고백에 그치지 않고, 스폰서인 L그룹 관계자가 힐링픽처스에 압력을 행사, 기존 캐스팅을 철회해 오디션을 열었다는 사실까지 줄줄이 나온다면 어떻게 될까.
사람들은 L그룹과 유상호부터 욕하겠지만, 힐링픽처스 역시 비난을 피하지 못한다. 그딴 식의 유착 관계로 지금껏 얼마나 많은 배우를 울렸나 하는 의혹까지 더불어.
결국 사태는 꼬리에 꼬리를 물어 드라마 제작 자체가 무산될 수 있다.
그래서 사람의 입이 무서운 거다.
통제도 쉽지 않고.
하지만 말이 아닌 이런 사진 한 장은 어떨까.
도덕적 잣대가 엄격하게 적용되는 연예인에겐 미성년자 시절의 일탈 행위도 이미지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힌다. 그러니 인터넷에 퍼지면 유상호 스스로 물러나게 될 터.
그래도 L그룹은 여전히 투자자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
‘아무리 생각해도, 힐링픽처스 대표가 OTT 플랫폼과 손을 잡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이야.’
물끄러미 사진을 들여다보는 한율을 향해 안인섭이 웃었다.
“왜. 경쟁자 과거를 폭로하는 게 비겁한 짓 같아? 치사하게 새치기를 시도한 건 이놈이 먼저잖아.”
“그것보다, 선배님이 내게 이걸 주는 의도가 궁금해서요. 저 싫어하시잖아요.”
“싫어하긴. 존나 얄미운 거지. 재수 없는 금수저 재능충을 시기하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잖아?”
“······.”
“어쨌든 거창하게 의도까진 아니고.”
하. 안인섭이 한숨을 쉬더니 음료 빨대를 물었다. 한강을 바라보며 한 모금 마시더니, 힘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계속 겪어보니 결국 이 바닥, 인기 없고 힘없으면 금세 대중한테 잊혀서 나가리 되기 십상이겠더라. 그래서 앞으로도 평탄대로 쭉쭉 달릴 너한테 도움 한번 주고, 나도 도움 좀 받으려고.”
“무슨 도움이요?”
“너 그 드라마에 출연하게 되면, 나중에 잠깐이라도 특별출연 시켜줘. 그 정돈 쉽잖아.”
고작 그 정도 대가를 바라고 이런 사진을 준다고?
더더욱 그의 저의가 의심스러워진다.
그때였다.
“···네.”
무심코 주변을 살피던 한율의 시야에 들어오는 작은 파란 불빛.
안인섭 차에 설치된 블랙박스.
“생각해볼게요, 선배님. 하지만 사진은 돌려드릴게요.”
“뭐? 아니···.”
한율은 사진을 보닛에다 올려놓았다.
“해원이 형 적당히 괴롭히시고요.”
“야, 내가 기껏 생각해서 어렵게 구해줬더니···!”
사진을 덥석 집어서 다시 건네려는 안인섭. 한율은 두 손을 활짝 펼쳐 세우며 사양하는 제스처를 취한 후, 몸을 돌렸다.
“그럼 먼저 가볼게요.”
“야, 서한율! ···너 나중에 후회해도 모른다?!”
한율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신의 차에 올랐다.
“하···. 씨발. 이게 아닌데.”
안인섭은 서한율이 한참 멀어지고 나서야 욕을 중얼거렸다. 그러곤 우스꽝스러운 양산을 접어 차 뒷좌석에다 던지듯 놓았다.
‘설마 눈치챘나?’
기껏 준비한 각본이 어그러졌다. 서한율이 이 사진을 입수하는 모습이 찍혀야지만 완벽히 완성되는 각본이.
‘서한율이 사진을 받고 가는 모습이 블랙박스에 찍혀야, 나중에 이 사진을 그놈이 언론사로 제보했단 암시를 L그룹 쪽에 줄 수 있는데.’
사실 이 사진엔 눈썰미가 좋은 사람이 아니고선 쉽게 알아차릴 수 없는 비밀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유상호 옆에 한 여성이 함께 찍힌 원본이 따로 있다는 것. 다른 하나는 양주잔 뒤에 놓인 반지였다.
L그룹 오너 일가의 결혼반지.
‘할 수 없지. 아쉬운 대로 사진 받는 모습만 추출해서.’
안인섭은 한숨을 쉬며 운전석 문을 열었다.
그 순간이었다.
펑!
“······?!”
안에서 무언가가 터지는 폭발음에, 안인섭은 화들짝 놀라 그만 들고 있던 음료를 떨어뜨렸다. 촤악. 커피가 그의 신발과 바지를 지저분하게 적셨다.
근처에 있던 다른 사람들도 깜짝 놀라 이쪽을 바라보았다.
안인섭은 놀라 벌렁거리는 가슴팍을 누르며 조심스레 운전석을 살폈다.
“···씨발, 이게 무슨.”
대시보드와 좌석, 그리고 차량 바닥이 폭발한 블랙박스 파편으로 엉망이 되었다. 고약한 냄새도 났다.
“무슨 일이에요? 아이고···.”
놀란 행인 중 한 명이 급히 다가와 차 안을 살폈다. 그러곤 쯧쯧 혀를 찼다.
“블랙박스 보조배터리가 터졌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있지만, 블랙박스 자체가 터진 건 처음 보네···. 어느 회사 거예요?”
안인섭은 한 손으로 얼굴을 덮은 채 속에서 울컥 올라오는 분노를 삼켰다.
‘씨발, 왜 나한테만 이런 일이 생겨···!’
이변은 없었다
한율은 멀어지는 안인섭의 모습을 힐끗하다가 전방을 주시했다.
‘그나저나, 유상호는 본인의 과거가 전혀 들통나지 않을 거라고 자신했던 건가?’
분명히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을 텐데 말이다. 사업주는 물론이고, 함께 일한 동료들이나 마주쳤던 손님들.
‘아니지. 다들 미성년자였던 유상호가 그 일을 하는 걸 방조한 공범들이니, 웬만한 일이 아니고서야 폭로는 안 하겠네.’
무엇보다 유상호의 스폰서인 L그룹 관계자가 그를 배우로 키우려 하고 있었다. 그러니 멍청한 과거 역시 새어나가지 않도록 단속해주고 있을 터.
‘아.’
거기까지 생각하던 한율은 문득 한 가지 묘안을 떠올렸다.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한율은 천천히 차선을 변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