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온갖 서류와 책, 영상 기록물로 가득 차 좁디좁은 대표실. 힐링픽처스 대표, 권성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은 채 고민하고 있었다.
“하아···.”
이제설에게 새로운 대안을 들은 지 20시간째였다.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비몽사몽 상태로 박명길 PD의 재촉을 듣고, 멍하니 인터넷에서 이것저것 검색하다가 고민을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다시 밤이었다.
낮에 이제설이 말한 OTT 플랫폼 측에서도 전화가 걸려왔었지만, 머릿속이 복잡한 상태라 행여 말실수라도 하게 될까 봐 부재중으로 넘겼다.
‘정말 어떻게 해야 하나.’
L그룹과 같은 대기업에 한 번 찍히면, 자신뿐만이 아니라 이 회사에 소속된 직원들까지도 부당한 일을 겪을 수 있다.
사람들은 설마하니 대기업이 그렇게까지 쪼잔한 짓을 하겠나 생각하겠지만, 권 대표는 두 눈으로 종종 봐왔다. 대기업이나 권위 있는 단체에 강하게 맞섰다가 소리소문없이 파산하고 사라진 동료들을.
‘지금 이렇게 미적거리는 것도 L그룹 쪽에선 상당히 아니꼽게 여길 텐데.’
우웅. 또 울리는 핸드폰.
“······.”
권 대표는 이번에도 L그룹 쪽인가 생각하며 퀭한 시선을 움직였다가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서울 구미호>의 또 다른 투자자인 FJ그룹 측 담당자 전화였다.
‘혹시 이쪽을 통해서도 압력을 넣으려고?’
겉으로는 경쟁 관계처럼 보여도 뒤론 긴밀하게 연결된 게 대기업들이기에.
권 대표는 심호흡을 깊게 하곤 전화를 받았다.
“네, 힐링픽처스 대표 권성입니다. 이 시간엔 어쩐 일로···.”
-[대표님! 알고 계셨어요?]
“네? 뭘요?”
핸드폰 너머에서 호들갑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L그룹, 우리한테 폭탄 던지려 했던 거요!]
“네? 그게 무슨···.”
-[역시 대표님도 전혀 모르셨네···. 대표님, L그룹이랑 아직 투자계약 체결 안 했죠?]
권 대표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눈을 끔뻑거렸다.
“네. 배우들 출연 계약 마무리되면 그때 하겠다고 해서···.”
-[그쪽에서 대표님에게 주연으로 쓰라고 미는 배우 있었죠? 유상호.]
“아···. 그게요.”
-[오늘 우리 쪽으로 제보가 들어왔어요. 제작이나 방영 도중 우리한테 빅엿 먹이는 용도로 쓰려고, 일부러 미성년자 시절에 호스트로 일한 유상호를 주연으로 넣으려 한다고요. 자기들은 손해입지 않도록, 배우들 출연 계약 성사되면 투자자 리스트에서 쏙 빠지고.]
빅엿? 호스트?
권 대표는 멍하니 두 단어를 읊조리다가 벌떡 일어났다.
“···네?!”
-[처음엔 설마하니 L그룹이 바보도 아니고 그딴 치졸한 수법으로 우리한테 싸움을 걸까, 누가 장난치는 거겠거니 하면서 제보를 의심했거든요? 그래도 증거라고 첨부된 사진 때문에 찝찝해서 L그룹에 확인을 요청했더니··· 하.]
어이없다는 듯한 웃음소리.
-[이 사람들이 뭔가 우물쭈물하는 게 영 수상쩍더라고요? 그래서 우리 쪽에서 조금 세게 물어보니까 그제야 말하더라고요. 유상호를 주연으로 넣으란 오더가 내려와서 힐링픽처스에 압력을 행사하기는 했지만, 유상호 과거에 대해선 잘 몰랐다 어쩌고저쩌고···.]
권 대표는 머리가 어질어질해졌다.
목요일 밤. 한율은 이제설을 통해 힐링픽처스 대표의 결정과 <서울 구미호>의 향방을 들었다. 해당 소식은 다음 날인 금요일, 포털사이트 연예뉴스란에 도배되었다.
[<서울 구미호> 주연배우 오디션 결과 공개!]
[<서울 구미호>, OTT 플랫폼과 tv Mu 동시 방영 논의한다]
[<서울 구미호> 제작사, ‘원한다면 오디션 영상 공개’]
[이변은 없었다··· 서한율 <서울 구미호> 오디션 합격]
[배우 이제설과 서한율을 캐스팅했다가 돌연 오디션으로 캐스팅 방식을 전환하여 많은 의혹을 받았던 드라마 <서울 구미호> 제작사 힐링픽처스가 오디션 결과를 공개했다.
이변은 없었다. 힐링픽처스가 당초 캐스팅한 대로 <서울 구미호>의 구미호 ‘슬호’ 역에는 이제설이, ‘형호’ 역으로는 서한율이 최종 합격했으며 미제사건 전담팀 형사 ‘민해솔’ 역으로는 배우 현미나가···(중략).]
-‘오디션에서 아쉽게 탈락한 지원자 중 몇 명은 조연 혹은 단역으로 출연 제안할 예정’<ㅇㅇ
-오디션 영상 내놔 빨리 내놔 현기증 나
-뭐? 서한율과 이제설이 구미호라고? 뭐? 이제설과 서한율이 구미호라고? 뭐? 서한율과 이제설이 구미호라고? 뭐? 이제설과 서한율이 구미호라고?
-뻔한 결말ㅋㅋ 둘을 연기로 이길 신인이 있었으면 진작 떴겠지
-이럴 거면 오디션은 대체 왜 본 거???
ㄴ일종의 마케팅 아니었을까요
ㄴ이제설이 주연인데 마케팅을 따로 할 필요가 있나?
-OTT 동시 방영ㅜㅜ 제발 플리즈
-이것 봐 지원한 애들도 떨어져도 본전은 찾는다니까ㅎ
-여주 현미나ㄷㄷㄷ
-연기 구멍 하나 없고 OTT에서 투자도 받으면 제작비도 빵빵하겠네ㅋ 스토리랑 연출만 잘하면 무조건 대박 터진다 이거
‘예상은 했지만, L그룹이나 유상호 이야기는 없네.’
회사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는 중. 한율은 기사를 대충 훑어 넘기곤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한율아.”
옆에서 다른 기사를 보던 강보배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정말 현미나 님이랑 같이 드라마 찍는 거야?”
강보배는 현미나가 아역 시절 찍은 사극을 3번 정주행, 공포영화도 챙겨봤으며, 한율에게 대신 사인을 부탁했을 정도로 그녀의 팬이었다.
“기사를 보니 그렇게 될 것 같네요.”
“잉? 확실치 않은 거야?”
맞은편에서 차남석이 말했다.
“아무리 오디션에 합격해도, 출연 계약서에 도장 찍기 전까지는 장담 못 하지. 계약 내용 조율하다가 안 맞으면 틀어질 수도 있잖아.”
“하긴···. 그래도 같이 찍었으면 좋겠다.”
“보배 형, 현미나 님 팬이었어?”
“응, 어릴 때부터. 전에 한율이가 <객귀> 종방연에서 사인도 대신 받아다 줬어.”
“오호. 써한, 이번 드라마는 보배 형이 꼬박꼬박 본방 사수해 주겠다.”
“너도 좀 해.”
점심을 먹고 난 후 한율은 오 팀장의 부름을 받고 2층 사무실로 올라갔다. 힐링픽처스에서 회사를 통해 공식으로 오디션 합격 통보를 보냈다.
“합격 축하한다, 한율아.”
“감사합니다.”
“출연 계약서 조항 협상은 월요일부터 들어갈 예정이야. 그리고 계약이 확정되면··· 기사로 봤는지는 모르겠지만, 힐링픽처스에서 오디션 영상을 공개하고 싶다더라. 나중에 홍보 자료로도 사용할 겸.”
“네.”
드라마 출연 계약 과정 설명이나 주의사항 등은 <별☆일없는 집> 출연을 결정했을 때와 비슷했다.
“그리고···.”
오 팀장이 얇은 바인더를 내밀었다.
“더순한화장품 CF 콘티가 도착했어. CF 촬영은 다음 주 토요일, 화보 촬영은 일요일.”
지난주, 치열한 오디션 경쟁을 뚫고 더순한화장품의 새로운 여학생 모델이 결정되었다. 올해 17살인 신인배우 ‘이단영’.
“브랜드 팬 미팅은 리뉴얼 제품이 나오는 10월에 이단영 씨랑 함께 진행하기로 했어.”
“네.”
한율은 고개를 끄덕이며 브랜드 팬 미팅마다 찾아왔던 진은수의 팬을 떠올렸다.
‘이제 개나리 오빠는 안 오겠네.’
그날 밤. 3화를 시청하고 방으로 들어간 한율은, 마침 걸려온 이해원의 전화를 받았다.
-[오늘 리디스 방송 잘 봤어. 오래간만에 한율이 네가 당근이랑 양파 시원하게 써는 모습 보니까 나도 마음이 후련해지더라.]
“고마워요, 형. 그런데 이 시간에 어쩐 일이에요?”
-[드라마 오디션 합격 축하한다는 인사가 첫 번째 용건이고, 두 번째는···.]
잠시 머뭇거리던 이해원이 말을 이었다.
-[한율아, 혹시 최근에 인섭이 형이랑 통화하거나 만난 적 있어?]
한율은 여전히 거실에서 TV를 보며 떠드는 어스래빗 멤버들을 힐끗하곤 문을 닫았다.
“네. 월요일에 갑자기 만나자고 하더라고요. 연락처는 형 핸드폰 털어서 알았다면서.”
-[아···. 미안해. 내가 간수를 잘했어야 했는데.]
“아니에요. 원래 마음만 먹으면 어떤 방법을 써서든 알아낼 사람이잖아요. 핸드폰에 다른 뭐 중요한 건 없었죠?”
-[응. 중요하거나 사적인 내용이 담긴 건 확인하자마자 바로 삭제하거든.]
“다행이네요. 저도 그때 형한테 바로 알렸어야 했는데.”
박박. 그때 무언가가 발톱으로 닫힌 문을 긁는 소리가 났다. 철컥, 철컥. 문을 열고자 손잡이를 건드리는 소리도.
문을 열었더니 달냥이 손잡이를 앞발로 내리치기 위해 점프 중이었다.
므앙?
“···다른 데에 정신이 팔려서 잊어버렸어요.”
사뿐히 착지한 달냥이 꼬리를 바짝 세운 채 도도하게 안으로 들어온다. 한율은 달냥이 침대로 폴짝 올라가는 걸 보곤 다시 문을 닫았다.
-[아냐, 괜찮아. 그건 그렇고··· 그날 인섭이 형이랑 무슨 이야기 나눴는지 물어도 될까? 아무래도 형이 뭔가 사고를 친 것 같은데··· 한율이 너랑 관련된 일인 것 같아서.]
혹시 벌써 찾아낸 건가?
한율은 대기업의 정보 수집력에 감탄하며, 한강 앞 주차장에서 안인섭과 나눈 대화 및 그가 보여준 사진에 대해 알려주었다. 이야기를 들은 이해원은 한율이 그랬듯, 그런 사진을 구해서 건네려 한 안인섭의 저의를 의심했다.
-[그 형도 정말···. 왜 자꾸 한율이 너한테 수작 부리는지 모르겠다. 이젠 아예 오기로 그러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무슨 사고를 쳤는데요?”
-[나도 <뮤직센터> 스케줄로 자리를 비웠던 터라 자세히는 모르는데, 오늘 낮에 회사 직원이랑 어떤 남자가 숙소로 와서 인섭이 형 노트북을 들고 갔대. 아주 심각한 얼굴로. 그리고 인섭이 형은···.]
이해원이 잠시 한숨을 쉬더니 말을 이었다.
-[조금 전에야 들어왔는데, 귀신에 홀린 사람처럼 완전 넋이 나가 있더라.]
그럴 만도 했다. FJ그룹에다 유상호에 관해 제보할 때 안인섭의 노트북과 이메일을 사용했으니.
그리고 제보자를 역추적하던 L그룹도 안인섭이 유상호와 비슷한 부류란 걸 알아차렸을 것이다. 안인섭이 유상호의 과거나 스폰서 정보에 대해 잘 알 수 있을 거란 사실도.
그에 더 확신했을 터다.
안인섭이 제보자라고.
-[그러면서 나한테 조용히 묻더라고. 혹시 유상호 스폰서가 L그룹 사람인 거 한율이 너한테 말했냐고. 나도 모르는 사실을 어떻게 알려주냐고 되물으니까 조용히 나가기는 했는데, 으음···. 한율이 넌 혹시 알고 있었어?]
“L그룹이 갑자기 드라마 투자에서 빠지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의심하긴 했어요. 그런데··· 정말로 스폰서가 L그룹 관계자인가 보네요.”
-[응···.]
“어쨌든 걱정해줘서 고마워요. 합격 축하 인사도.”
-[아니야. 그럼 이만 끊을게. 잘 자.]
“네. 형도 잘 자요.”
지금쯤 안인섭은 정말 미치고 환장할 노릇일 터다. 지난번 클라우드의 파일이 몽땅 삭제되었을 때처럼 또 이상한 일이 일어났으니.
한율은 안인섭이 자신에게 뒤집어씌우려 했던 짓을 고스란히 그에게 덮었단 사실을 모른 채, 가볍게 기지개를 켰다.
‘내일은 별장에나 가봐야겠다.’
건축사가 사진과 영상을 보내기는 했지만, 얼른 직접 가서 살피고 싶었다.
과연 어떻게 완성되었을까.
숨바꼭질하기 좋겠다
한율의 차가 산속 별장으로 이어진 길을 구불구불 올랐다.
한율의 ‘비밀기지’가 준공되었다는 소식에, 자신들도 보고 싶다며 따라온 멤버 넷은 기대로 가득 찬 눈으로 차창 밖을 보았다.
킁킁. 박가람이 냄새를 맡더니 들뜬 목소리로 떠들었다.
“음, 자연의 피톤치드!”
“생각이나 마음 복잡할 때 와서 쉬기에 좋겠다.”
“여기까지 공사 차량이 왔다 갔다 한 거야? 대단하다.”
유호의 감상에 이어 이건우가 감탄하며 물었다.
“언제부터 지었댔지?”
“건축사 만난 게 작년 이맘때쯤이었으니까··· 설계 기간 빼면 9개월? 그 정도 걸린 것 같네요.”
“단독 주택 맞지?”
“상하수도랑 전기 같은 기본 설비 갖추는 데에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고요. 지금 이 길을 닦는 데에도.”
이윽고 저택을 둘러싼 돌담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율은 밖에서부터 천천히 둘러보고 싶어서 차를 차고가 아닌 대문 앞에다 대충 세웠다. 어차피 여기로 또 올라올 차는 없었다. 산 초입에다 설치한 사유지 출입문도 다시 닫아 놓았고.
“와···. 전에 왔을 때 본 모습이 어땠는지 전혀 기억이 안 나. 남석 씨도 왔으면 진짜 놀랐을 텐데.”
길우성은 입을 크게 벌리며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대문 옆 차고를 가리켰다.
“주차장은 저택 지하에 만든다고 하지 않았어?”
“차고를 꼭 하나만 만들란 법은 없잖아.”
“아.”
“빨리 문 열어, 주인장! 궁금해서 현기증 날 것 같단 말이야.”
한율은 오는 길에 부모에게 받은 열쇠를 꺼냈다. 그러곤 쪽문이 아닌 널찍한 대문을 활짝 열었다. 이건우가 핸드폰으로 그럴싸한 BGM을 틀었다.
“빰빰빰빰빰~.”
갓 심은 푸릇푸릇한 잔디 사이. 널찍하고 평평한 돌길이 2층짜리 저택 본채와 자그마한 별채, 예쁘게 잘 꾸며진 정원으로 연결되어 있다.
박가람이 목도리도마뱀처럼 튀어 나갔다.
“새집이다아···!”
“뛰지 마! 자빠지면 다쳐!”
길우성은 웃음을 터뜨리며 정원 한곳을 가리켰다.
“써한, 저것도 네 설계야?”
“······.”
길우성의 시선을 좇은 한율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정원 곳곳에 귀여운 토끼 모양을 한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었다.
모친이 사서 가져다 놓은 걸까.
“이제 꾸미고 채우는 재미만 남았구나.”
정원에서 생각지도 못한 조형물을 발견하기는 했지만, 저택 안에는 미리 주문해놓았던 기본적인 가구와 전자제품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새집 냄새가 생각보다 심하진 않은데?”
“부모님이 어제 종일 환기했대요.”
기온이 높아, 한율은 거치대에 놓인 에어컨 리모컨을 꺼내 작동시켰다. 천장에 설치된 에어컨에서 곧 시원한 바람이 내려왔다.
“꼭 풀옵션 임대주택에 들어온 것 같구나, 한율아. 뭔가 당장 생활하려고 하면 할 게 TV 보는 것 말곤 아무것도 없을 것 같아.”
“그러네? 휴지통이나 컵 같은 생활용품도 하나 없어.”
“냉장고랑 싱크대 선반도 텅 비었엉. 우리 여기에 계속 있다간 굶어 죽겠다.”
“필요한 물건은 내가 알아서 채우기로 했거든요.”
지금 숙소로 사용하는 아파트를 받았을 때와 달리, 부모는 이번엔 한율이 알아서 하라고, 사소한 것 하나 터치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정원에 토끼 모형 조형물을 갖다 놓기는 했지만 말이다.
“어쨌든 온 김에 전부 다 잘 되는지 확인해보자. 물이 잘 나오고 잘 빠지는지, 변기 물은 잘 내려가는지, 전등은 이상 없이 잘 작동되는지.”
“이미 다 확인···.”
“Yes, Sir!”
그들은 한율의 말을 듣지 않고, 집 구경도 할 겸 여기저기 흩어졌다. 한율은 작게 한숨을 쉬곤 2층 계단을 밟았다.
한발 먼저 2층에 올라온 박가람은 주변 풍경이 환히 내려다보이는 발코니 앞에 서 있었다.
“대박이다, 진짜. 방은 전부 몇 개야?”
“1층 4개, 2층 3개. 다락방 하나요.”
사실은 건물 안에 또 다른 비밀 공간이 두 군데나 더 존재하지만, 그건 말하지 않았다.
박가람이 창 너머로 보이는 별채를 가리켰다.
“저기엔?”
“저기는 방 하나요.”
“오호. 야, 그나저나 집이 이렇게 넓어서야··· 숨바꼭질하기 진짜 좋겠다. 너 그 영화 봤냐? 한집에 모르는 사람이 숨어 살았는데, 집주인이 몇 년 동안 감쪽같이 몰랐던 이야기.”
“그래서 방범 시스템도 설치해뒀어요.”
“크으, 역시 철저해.”
2층과 다락방을 둘러본 한율은 다시 1층으로 내려와 가장 넓은 침실을 확인했다. 침실엔 전용 드레스룸과 욕실, 화장실을 따로 구비하고, 서재와 연결되는 문도 설치했다.
여전히 1층을 살피던 유호가 박가람과 똑같은 말을 했다.
“여기 숨바꼭질하기 정말 좋겠다, 한율아. 우리 그라 콘텐츠 회사에서 알면 바로 장소 빌려달라고 할 것 같은데?”
“그건 좀.”
그리고 유호가 서재를 나갔을 때, 한율은 다시 침실 안 드레스룸으로 들어갔다. 붙박이 옷장 중 하나를 열어, 안쪽에 희미하게 난 홈에다 손끝을 대고 옆으로 밀었다.
철컥. 숨겨진 도어락이 모습을 드러냈다.
“······.”
한율은 가까이에 멤버들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걸 확인하곤 지문으로 잠금을 해제,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닫자마자 자동으로 벽 센서 등이 켜졌다.
‘여기도 신경 써서 잘 만들어놨네.’
한율은 비밀 공간을 가볍게 둘러보곤 곧바로 나왔다.
“좋은 탐험이었다.”
별장이 있는 산에서 내려온 그들은, 인근 식당에 들어가 점심을 먹었다.
“나도 얼른 내 마음대로 설계한 집 갖고 싶다. 재밌을 것 같아.”
“써한, 필요한 생활용품 오늘 안 사도 돼?”
“나중에 인터넷으로 사려고.”
“거기까지 배달이 돼?”
“되지 않을까?”
“우리가 어떤 민족이냐.”
“전투 민족?”
“나중에 손 필요하면 말해. 도와줄게.”
“네.”
“서한율, 집들이는 언제 해?”
“안 할 건데요.”
박가람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충격받은 표정을 지었다.
“왜지?!”
“가람아, 명색이 비밀기진데 집들이로 손님을 잔뜩 초대하는 건 말이 안 되잖아.”
“아니, 우리 멤버들끼리만이라도 할 수 있잖아. 이제 저 집 안 가본 멤버는 트레리안 뿐 아니야?”
“아. 보배 형이랑 라이언한테는 간식 뭐 사다 줄까요?”
트레리안 두 사람은 어제부터 다음 어스래빗 정규 1집 앨범에 들어갈 곡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차남석은 약속이 있다며 아침 일찍 외출했고.
박가람이 핸드폰을 꺼냈다.
“본인들한테 직접 물어보자.”
“작업하는 데에 방해될 수 있으니까 알아서 사 가자.”
“응.”
“박가람, 호 형 말에 0.3초 만에 의견 철회.”
“그나저나 오래간만에 이렇게 교외로 나오니까 좋다. 느긋하게 드라이브도 하고, 새집도 구경하고.”
“나온 김에 맛있는 것 좀 더 먹고 갑시다. 전에 이 근처에 왔을 때 어떤 카페에서 먹은 디저트가···.”
이건우가 씩 웃으며 길우성을 바라보았다.
“우성이 너 요즘 복근 아슬아슬해졌더라?”
“헉···?”
“오늘 단체 연습 끝나면 운동 가자. 기껏 보기 좋게 다듬었는데 이대로 무너지면 아쉽잖아. 그리고 했다 말았다 하면 몸에 버릇까지 들어서 나중에 더 힘들어져. 자, 지금 집은 김치도 도로 내려놓고. 우리 막내, 오늘 짠 거 많이 먹었지?”
“어흑···.”
“······.”
유호와 박가람은 자신에게도 화살이 날아올까 싶었는지, 조용히 수저를 내려놓고 딴청을 피웠다. 한율도 김치를 집으려던 젓가락을 두부 반찬이 있는 쪽으로 돌렸다.
우웅. 어스래빗 멤버들과 매니저들이 함께 있는 단톡방 알림이 울렸다.
-[삼둥이 입양희망자 나타났다>.<]
이건우의 운동 압박에 쪼그라들던 길우성이 울적하게 중얼거렸다.
“많이 정들었는데···.”
유호가 길우성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임보가 그래서 힘든 거지. 잠깐이나마 애들한테 안전한 보금자리 내어주고, 좋은 주인을 찾아 보냈다는 데에 만족하자.”
“응···.”
* * *
WB래빗 엔터테인먼트 내의 음악 작업실. 피곤한 눈으로 모니터를 들여다보던 강보배가 문득 시간을 확인했다.
“라이언, 너 2시까지 병원 가기로 하지 않았어?”
“어?”
라이언도 그제야 시간을 확인했다. 어느새 1시였다.
“가야겠다.”
킁킁. 자리에서 일어난 라이언은 거울로 자신의 상태를 확인했다. 어젯밤부터 지금까지 꼬박 작업실에 처박혀서 그런지 꼬질꼬질했다.
“병원 갔다가 숙소에서 조금이라도 자. 어차피 작업 너무 서두를 필요 없잖아. 수면이 부족하면 두뇌 회전이 느려지기도 하고.”
“보배 넌?”
“난 조금 더하다가 여기에서 자려고.”
“응. 이따 봐.”
라이언은 작업실을 나오며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작업하는 데에 방해받기 싫어서 무음 상태로 둔 동안, 제때 확인 못 한 연락이 몇 개 있었다.
우선 매니저가 단톡방에 올린 글을 보았다.
‘삼둥이들 보내는구나. 좋은 주인 만나면 좋을 텐데.’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이번엔 사촌 동생인 테디가 보낸 이메일을 확인하려는데, 보컬 연습실에서 나오던 남자 연습생이 라이언을 향해 인사했다.
“응, 안녕.”
[점심 먹으러 가세요?]
아주 자연스러운 본토 발음의 영어. 라이언은 잠시 고민하다가 한국어로 대답했다.
“아니, 씻으러 가.”
“Ah···. 그러시구나.”
발음이 조금 어눌한 걸로 봐선 한국에 온 지 얼마 안 된 모양이었다. 연습생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라이언과 나란히 걸었다.
“······?”
다른 용건이라도 있는 걸까. 라이언이 의아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자, 그도 어리둥절한 얼굴로 라이언을 바라보았다.
[왜 그러세요, 선배님?]
“넌 어디 가?”
[휴게실이요.]
“응.”
목적지가 같아 밀어내기도 뭣하다. 라이언은 고개만 끄덕이고선 다시 핸드폰으로 시선을 옮겼다.
라이언의 눈치를 살피던 연습생이 말을 걸었다.
[선배님도 예전에 아림에 있으셨다면서요?]
“응.”
[내 친구가 지금 아림에 있는데, 거기 월말 평가가 정말 깐깐하다고 하더라고요. 애들끼리도 어찌나 서로 견제가 심한지···.]
“······.”
상대방이 제게 관심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친해지려 웃으며 떠드는 게 꼭 예전의 저를 보는 것 같다. 라이언은 혹시 이 아이가 자신의 연습생 시절에 관해 이야기를 듣고 이러는 건 아닐까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무렴 어때.’
“넌 어디에서 왔어?”
라이언이 관심을 표하자 연습생이 활짝 웃었다.
[LA요! 한국 온 지는 8개월 정도 됐어요.]
라이언은 진지하게 조언했다.
“한국어 공부 열심히 해. 우리는 그렇게 해야 해. 그래야 사람들 오해, 많이 안 해.”
“어···.”
뒷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아, 라이언은 재차 영어로 말해주었다. 그제야 연습생은 다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공부 여르시임히? 하께요!”
“여르심히 아니고 열심히.”
“여를심히!”
“열심히.”
“열시임이!”
“···너 이름 뭐야?”
한번 신경 쓰기 시작했더니 자꾸만 걸려서 고쳐주고, 가르쳐주고. 라이언은 결국 후배 연습생에게 10분이나 내어준 뒤 병원에 갈 채비를 했다.
“어디 가냐?”
깔끔하게 씻고 휴게실을 나오자 마침 이쪽으로 오던 차남석과 마주쳤다.
“병원.”
차남석의 시선이 라이언을 위아래를 훑었다.
“어디 아프냐?”
“······.”
“뭘 그렇게 봐.”
“많이 변해서.”
차남석이 별 싱거운 소릴 다 한다는 얼굴로 받아쳤다.
“너 어디 아프기라도 하면 우리 팀 전체에 영향이 오니까 그렇지. 아, 그런데 너 혹시 가람이 형한테 무슨 얘기 들은 거 없냐?”
“무슨 얘기?”
“가람이 형이 지난달에 무슨 예능 섭외 들어왔다고, 출연 확정되면 얘기해주겠다고 했잖아. 그런데 나 아는 사람이 지난주에 형을 MBS에서 본 것 같다고 해서.”
라이언은 어깨를 으쓱였다.
“몰라.”
“그럼 됐고.”
촬영만 지연되잖아
21일 일요일 밤. 회사에서 숙소로 돌아온 멤버들은 텅 빈 캣타워나 방석을 보며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삼둥이들 없으니까 허전하다.”
“서로 머리채 잡고 발로 퍽퍽 차면서 레슬링하는 거 진짜 귀엽고 웃겼는데.”
“새로운 집에서 잘 적응해야 할 텐뎅.”
“달냥인 왜 안 보여? 설마 착각하고 달냥이도 데려간 건 아니겠지?”
“소파에 있는데?”
달냥은 소파에 한가하게 드러누운 채 그들을 맞이했다. 므앙. 멤버들은 익숙하게 달냥을 한 번씩 쓰다듬었다.
“얘는 삼둥이들 간 게 아쉽지도 않나 봐. 오히려 더 편해 보인다.”
“응?”
그때 유호가 핸드폰을 확인하더니 박가람을 돌아보았다.
“가람아, 너 혹시 <누구SONG> 출연했었어?”
“···어?”
막 장난감 낚싯대를 집은 박가람이 어깨를 움찔 떨며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MBS <누구SONG>은 연예인들이 정체를 감추고 노래 경연을 펼치는 예능 프로그램이었다.
“아니? 내가 거기를 왜 나가?”
“아니면 아닌 거지 시선은 왜 피하며, 동공은 왜 흔들려.”
“아닌데? 안 나갔는데? 그런데···.”
한율은 박가람의 귀가 서서히 빨개지는 것을 보았다. 무언가를 뻔뻔하게 우길 때마다 나오는 특유의 표정도.
“그건 왜 물어?”
“팬들이.”
유호가 핸드폰 화면을 보여주며 말했다. 커뮤니티 사이트의 어스래빗 게시판이 떠 있었다.
“오늘 방송된 <누구SONG>에 박가람 네가 나온 것 같다고 확신하고 있대.”
“아···닌데? 내가 거기 나갈 시간이···.”
“지난달 앨범 활동 끝나고 쭉 한가했죠.”
“혹시 1라운드에서 떨어졌어요?”
“아니거든? 나 안 나갔다니까?”
“지난주에 형을 MBS에서 본 사람이 있어요.”
“몰라, 나 아냐···!”
박가람은 일방적으로 부정하곤 낚싯대를 든 채 방으로 휙 들어갔다. 달냥이 벌떡 일어나 그를 쫓아갔다. 므아우왕.
이건우가 어깨를 으쓱였다.
“출연 확정되면 말해주겠다더니. <누구SONG>이면 말 안 할 법도 하겠네.”
“무슨 이름으로 나갔대?”
강보배가 TV를 켜서 너튜브에 접속했다. 유호가 리모컨을 건네받아 [누구송 감자떡]을 검색했다.
“이름이 벌써 박가람인데?”
곧 <누구SONG>에 ‘감자떡’으로 나간 사람의 노래가 크게 흘러나왔다. 어스래빗 멤버들은 목소리를 듣고 3초 만에 고개를 끄덕였다.
“맞네, 박가람.”
감자떡은 1라운드에서 상대를 이겨, 다음 주 방송에선 2라운드 무대를 선보일 예정이었다.
“하지만 <누구SONG> 녹화가 매주 금요일에 있는데, 형 지난주엔 내내 우리랑 같이 있었잖아.”
“결승까지는 못 갔나 보다.”
“쯧쯧.”
박가람이 방에서 외쳤다.
“다들 빨리 잠이나 자! 안 그러면 나처럼 키 안 큰다···?!”
26일 금요일. 포털사이트 연예뉴스란에는 한율과 이제설, 현미나의 <서울 구미호> 출연이 확정되었다는 기사가 올라왔다. 한율이 출연 계약서에 도장을 찍은 지 하루만이었다.
[<서울 구미호>, tv Mu·OTT 플랫폼 동시 방영 결정!]
OTT 플랫폼과 tv Mu 간의 협상도 잘 진행된 모양인지, 동시 방영 결정도 일사천리였다. 더순한화장품은 이런 기사를 내기도 했다.
[더순한화장품, 서한율과 모델 계약 연장··· ‘신뢰 고마워’]
“서한율, 너 그 소문 들었냐?”
4화를 보기 위해 거실로 모인 멤버들.
한율은 내일 있을 CF 촬영을 위해서 얼굴에 마스크팩을 붙이고 소파에 앉았다. 방에서 혼자 편히 볼 수도 있지만, 지난번에 그렇게 하려다가 박가람이 섭섭하게 왜 혼자 따로 보냐 쫑알거려서 거실로 나왔다.
“무슨 소문이요?”
차남석이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대답했다.
“대기업 계열사인 화장품 회사에서, 더순한화장품 광고 모델 위약금 대신 내주고 너 데려가고 싶어 한다는 소문.”
“금시초문인데요.”
“역시 헛소문인가 보다.”
이건우가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그렇겠지. 정말 그런 짓을 했다간 대기업이 상도덕도 없다며 욕을 한 바가지로 먹을 텐데, 아무리 한율이가 탐이 나도 그렇게까지 할까.”
···므아앙. 한율의 무릎에 앉으려는 달냥을 길우성이 데려가 안았다.
“그런 소문들은 대체 누가, 왜 만드는 걸까?”
“글쎄.”
“남석 씬 누구한테서 들었어?”
“박현우.”
“현우 형은 누구한테서 들었는데?”
“아는 배우.”
“그 아는 배우는 누구한테서···.”
“그만.”
4화에서는 7, 8명씩 새롭게 한 조가 된 동일 포지션 출연자들이 미션 곡을 준비하고 선보이는 모습이 그려졌다.
“저거 찍을 때 정말 정신없었지···.”
당시 어스래빗은 한창 로 음방 스케줄을 뛰고 있었다. 사녹을 마치면 연습실로 가서 연습하고, 다시 생방송 무대를 뛰고. 스케줄을 끝낸 뒤에도 시간을 쪼개며 연습을 거듭했다. 다른 출연자들보다 뒤처지는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그래도 피곤한 건 감춰지지 않았다.
프로그램 톡창.
-토끼들 텐션이 지난 방송보다 낮은 건, 컴백이랑 겹쳐서 스케줄이 완전 빡셌을 때 찍은 거라 그렇습니다ㅜㅜ
-새벽 음방 출근, 스케줄 도중 연습, 끝나고 또 연습; 쟤네 잠은 언제 잤대;;
-아 음방 도중에 와서 풀메 상태구나
-남석아 잠 덜 깼니
-존잘톢_나른한_미소_저장
가 처음 방송되기 전, 원제로 중심으로 편집되는 거 아니냐 우려를 표한 시청자들은 이젠 그 문제에 대해선 조용했다.
한 네티즌이 1화부터 3화까지 전 출연진의 방송 노출 시간을 모조리 기록해 인터넷에 올렸는데, 그 덕에 같은 그룹 멤버 간에 격차는 있지만, 팀별 노출 시간은 거의 비슷하다는 게 밝혀진 까닭이었다.
그래도 사소한 꼬투리를 잡거나 부정적인 말을 쏟아내는 사람들은 여전히 있었다.
-연습 제대로 참여 안 하면서 민폐 끼칠 거면 아예 푹 쉬지ㅋ 팀 하나 없어도 될 것 같은데ㅎㅎ
-PD가 유독 한 팀만 신경 써서 편집한 거 나만 느끼냐
-음방 병행하는 게 뭐 대수라고ㅋㅋ 다른 애들도 음방 도중에 스케줄 뛰는 일 허다한데? 그게 리디스가 아니었을 뿐이고
-어스래빗 까는 애들 왜 이렇게 많음?
-어스래빗 까는 거 거의 원제로 팬들요
-요즘 시대가 어느 땐데 타돌을 함부로 깎아내려요; 그러면 본진 욕만 더 먹이는 꼴인데;; 저것들은 원제로 팬을 사칭하는 분탕충입니다.
-어스래빗 까는 애들 원제로 팬들이에요<이 말 하는 거 어스래빗 팬들ㅇㅇ
방송이 끝나면 새벽 1시인지라, 한율은 자정 즈음 되었을 때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 내일 스케줄 있어서 먼저 잘게요.”
“엉.”
“잘 자, 하뉼.”
뫙. 달냥도 길우성을 앞발로 꾹 밀어내곤 한율을 쫓아왔다.
한율은 방문을 닫은 후 거울을 통해 피부를 살폈다. 방송을 보던 중 마스크팩을 떼고 대충 두드렸는데, 잘 흡수된 모양이었다. 피부가 반짝거렸다.
‘9시에 데리러 온다고 했으니.’
핸드폰 알람을 8시로 설정해놓고 침대에 누웠다. 달냥도 익숙하게 옆에 자리 잡고 누워, 가만히 한율을 쳐다보았다. 그렁그렁.
한율은 달냥을 천천히 쓰다듬으며 체내의 마나와 마력 순환을 도와주었다. 그러자 달냥의 골골송이 더욱 커졌다.
그렁그르렁.
다음 날 아침, 더순한화장품 CF 촬영장. 촬영장에는 새로운 모델인 이단영이 먼저 와 있었다.
이단영은 한율을 보자마자 씩씩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오늘부터 함께 더순한화장품 모델을 하게 된 배우 이단영입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안녕하세요, 서한율이라고 합니다. 오디션 합격하신 거 정말 축하드려요. 우리, 앞으로 모델 활동 잘 해봐요.”
“네!”
오늘 찍을 CF 콘티는 별거 없었다.
A 버전은 교복 치마에다 체육복 바지를 입은 이단영이 친구들과 교실에서 말뚝박기 놀이를 하는데, 그런 이단영의 모습을 한율이 재밌게 바라보다가 스케치한다. 그리고 시선이 마주친 두 사람의 미소 짓는 얼굴이 클로즈업.
B 버전은 버스에서 우연히 나란히 앉게 된 두 사람이, 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에 눈을 찡그리다가 서로 눈이 마주치자 머쓱하게 웃는 걸로 끝.
“역시 배우끼리 붙여놔서 그런가, 진도가 착착 나가네.”
수백 명을 제치고 가장 높은 점수로 뽑힌 사람답게, 이단영은 감독의 이런저런 요구에도 당황하지 않고 야무지게 응했다. 연기도 자연스럽게 잘하고.
덕분에 촬영은 순조롭게 진행되었으나, 촬영장을 방문한 더순한화장품 김용철 부장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예쁘기는 해도 흔하게 예쁜 얼굴이라 임팩트가 약한 것 같은데. 아, 은수 양만 잘 잡았어도···.”
화장품 광고 특성상 모델의 외적인 모습을 중요하게 여기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러나 상대방 귀에 들릴 만한 거리에서 대놓고 부정적인 말을 내뱉는 것도 모자라, 이전 모델 언급까지.
“······.”
참 무례한 태도였으나, 광고 프로덕션 직원들과 스튜디오 관계자들은 그의 말을 못 들은 척했다. 이단영의 매니저까지도.
상대가 광고주 측 임원인 까닭이었다.
“···거기 머리 오른쪽으로 묶은 학생, 바짓단 정리 좀 할게요.”
“네···!”
그러나 그 말을 들은 당사자인 이단영의 표정은 흐려지고, 엑스트라로 출연 중인 배우들은 흠칫거리며 조용히 눈치만 살폈다.
한율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왜 굳이 촬영장 분위기를 망칠 법한 말을 지껄이는 건지.’
촬영 시간만 지연되게 말이다.
한율은 스케치북을 든 채 김용철 부장에게 다가갔다.
“부장님.”
더순한화장품 입장에선 한율이 끊임없이 매출 상승을 일으키는 귀인이라 그럴까. 뚱했던 김 부장의 얼굴이 활짝 피었다.
“네, 한율 씨.”
“콘티 대로 따라 그려봤는데, 어때요? CF에 나갈 수 있을까요?”
“어디···. ······.”
웃으며 스케치북을 받아든 김 부장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한율은 ‘당연히 칭찬과 긍정적인 답변이 돌아오겠지?’란 기대에 가득 찬 시선으로 김 부장을 바라보았다.
본래 광고에 나갈 스케치는, 광고 프로덕션 직원이 그린 걸 한율이 그린 것처럼 꾸미기로 했다.
“···하하!”
차마 개발새발 그림이 훌륭하다곤 바로 내뱉긴 힘든지, 김 부장이 크게 웃었다.
“이 개성적인 그림이 나가면 요즘 말로··· 그 뭐냐, ···아! 킬포가 되겠는데요? 이야, 역시 한율 씨! 연기실력만큼이나 그림에서도 아주 뛰어난 예술적 감각이 느껴지네요!”
“정말요?”
“네!”
한율은 뿌듯한 얼굴로 웃으며 스케치북을 돌려받았다. 그러곤 눈시울이 붉어지지 않도록 최대한 참고 있는 이단영에게 다가갔다.
“이 그림 어때요, 단영 씨?”
그러곤 스케치북을 그녀의 눈높이에 맞게 들어, 김 부장의 시야에서 이단영을 가렸다.
“아···.”
이단영은 멍하니 한율이 그린 자신의 모습을 보다가 황급히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비집고 나오는 눈물을 손끝으로 빠르게 훔치곤, 한율에게 꾸벅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한율은 뒤를 돌아보았다.
정말 한율의 그림을 CF에 내보내도 될 것인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던 김 부장은, 한율과 시선이 마주치자 어색하게 씩 웃었다. 그러더니 핸드폰을 꺼내며 바쁜 일이 있는 것처럼 걸음을 옮겼다.
“아이고, 급히 전화할 데가 있다는 걸 깜빡했네.”
한율은 다시 이단영을 돌아보며 작게 말했다.
“충분히 잘 어울리고, 잘하고 있으니까 너무 속상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네···. 감사합니다.”
이단영이 재차 고개를 꾸벅였다. 상황을 지켜보던 스태프들이 그제야 이단영에게 다가와 어깨를 토닥거리면서 임시 분장실로 데려갔다.
한율은 이번엔 광고 프로덕션 직원에게 향했다.
“제가 한번 그려봤는데, 괜찮을까요?”
“어···.”
조용히 상황을 주시하던 조유찬이 스윽 다가와 스케치북을 가져갔다.
“응, 안 돼.”
건강이 최고야
28일 일요일 저녁.
본인은 아니라고 박박 우기지만, 어스래빗 멤버들은 ‘감자떡’의 2라운드 무대를 보기 위해 연습실 TV를 켰다.
박가람이 바닥에 엎드린 채 구시렁거렸다.
“왜 같은 팀 멤버 말을 안 믿어줘, 왜···.”
“무대에서 음 이탈이라도 했어? 결국 밝혀질 텐데 왜 계속 아니라고 우길까?”
“아직 가람이 형 순서는 먼 것 같아.”
“음소거 상태로 두고 계속 연습하자. 한율아, 가람이 좀 일으켜.”
한율은 바닥에 자빠진 박가람을 강제로 일으켜 세웠다. 박가람은 흐느적흐느적 연체동물처럼 움직이며 안무 대형을 갖췄다.
“흐엉엉.”
바로 사흘 뒤가 녹화였다. 그리고 내일은 어스래빗 정규 1집 수록곡 최종 선택을 하는 날. 본격적으로 앨범 준비 작업에 돌입해야 하므로 이젠 여유 부릴 시간이 없었다.
MBS <추석특집 아이돌 스포츠 대회> 녹화, 소리구름어워즈, FJ그룹이 주관하는 뉴욕과 LA K-POP콘서트, 9월 6일 생방송 최종화에서 공개할 새로운 디지털 싱글 곡 준비까지.
할 일이 많았다.
“어? 가람 나온다.”
“나 아니라니까···.”
20여 분 정도가 지났을 무렵, TV에 [2라운드 진출 ‘감자떡’ VS···] 자막이 나왔다. 멤버들은 동작을 멈추곤 각자 수건으로 땀을 닦았다.
“노래 부르는 목소리와 창법을 아무리 바꿔도 우린 알 수 있지. 저 블라인드 뒤에서 노래 부르는 사람이 누구인지.”
<누구SONG> 톡창에서도 이프림이 한두 마디 올리고 있었다.
-[저 아이는 지구에 사는 작은 토끼다람쥐가 맞습니다.]
-[톢람]
등 돌리고 누운 박가람은 이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감자떡의 무대가 시작되었다. 깨끗한 발성으로 고음을 넘나들며 부르는 애절한 발라드. 멤버들은 조용히 노래를 감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잘 불렀네.”
“아니, 이렇게 잘 불렀는데 여기에서 탈락했다고?”
평소엔 차남석에게 가려 잘 두드러지지 않지만, 박가람 또한 연습생 시절에 월말 평가마다 좋은 성적을 받았을 정도로 노래 실력이 뛰어났다. 현재 팀에서는 한율과 함께 고음을 담당하고 있고.
“대체 붙은 상대가 누구기에?”
이제 대결 상대인 ‘콜라는콕콕’의 무대. 이번에도 가만히 노래를 듣던 멤버들은 살며시 고개를 기울였다. 콜라는콕콕도 잘 부르기는 하지만, 조금 전 박가람의 무대를 이길 정돈 아니라는 생각이 든 까닭이었다.
한율도 의아한 표정을 짓다가 핸드폰에 띄운 톡창으로 시선을 내렸다.
-[감자떡 승]
-[기교나 몰입도에서 뭔가 노련함이 느껴지기는 하는데, 목소리가 관리 제대로 안 한 목소리임]
-[평소 술 담배 많이 한 사람의 목소리 같은데.. 가수는 아닌 듯?]
-[몰입도도 감자떡이 좀 더 좋았던 것 같음]
-[감자떡이 이겼네ㅇㅇ]
-[가수 중에도 술 담배 하는 사람 꽤 있어요]
-[실력 레벨은 콕콕이 높기는 한데, 너무 옛날 아재 감성이라 취향 탈 듯]
현장 방청객 200명의 투표 점수도 감자떡이 조금 더 높았다. [112/88]. 그러나 한 명당 5점씩 처리되는 연예인 패널 13명이 준 점수는 반대였다. [20/45].
도합 [132/133].
단 1점 차이로 감자떡이 패배하고 콜라는콕콕이 3라운드로 진출했다.
“허얼···.”
“잉? 진짜로 가람이 형이 졌다고?”
“사람마다 듣는 취향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으음, 모르겠다.”
“······.”
라이언은 말없이 박가람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렸다.
-[??]
-[나만 감자떡 노래가 더 좋았나?]
-[감자떡이 졌다고?]
-[패널들한텐 콕콕 완숙미가 취향이었나 보지]
-[감자떡 노래가 더 좋았는데...]
-[톢다람ㅜㅜ..]
-[현장에서도 스물 몇 명 밖에 차이 안 난 거 보면 그냥 취향 탄 듯. 나도 그중 한 명이고]
-[방청객 2백 명 중 88명이 선택한 노래를, 패널 13명 중 9명이나 선택한 게 취향 차이??? 딱 봐도 콕콕이 한 끗발 날리는 사람이니까 알아서 점수 갖다 바친 거고만ㅋㅋ]
-[애매하다 애매해]
사람들이 저마다 느낀 걸 텍스트로 떠드는 동안, TV 속 감자떡은 3라운드에서 부르려고 준비했던 노래를 시작했다. 블라인드가 천천히 올라가며, 뒤돌아서 노래를 부르는 감자떡의 모습이 나타났다.
-[뒤태 보니 아이돌이네ㅎㅎ]
-[누구냐]
-[지구톢톢!!!]
이윽고 반주 부분. 감자떡이 우아한 몸짓으로 턴, 방청객들을 향해 허리를 깊이 숙이며 인사했다.
[감자떡의 정체는 바로···!]
MC가 특유의 벅찬 목소리로 감자떡의 정체를 소개했다.
[보이그룹 어스래빗의 보컬, 박가람 씨였습니다!]
뒹굴, 철퍼덕.
“흐윽.”
박가람은 아예 개구리처럼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명색이 팀의 보컬인데, 2라운드에서 졌다는 게 면목 없다는 듯이.
한율은 그런 박가람의 머리를 툭툭 가볍게 쓰다듬었다.
“그래도 잘했어요.”
“엉···.”
이건우도 와서 쓰다듬었다.
“수고했다, 박다람이.”
“엉···.”
유호는 박가람을 일으켜 세웠다.
“다 봤으니 이제 연습하자. 일어나, 박가람.”
“···흐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