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9화 (159/427)

* * *

31일 수요일. 어스래빗은 녹화를 위해 뮤닷으로 출근했다.

본래 녹화는 처음을 제외하고 2주일에 한 번 목요일마다 진행되었으나, 이번 주는 특별히 수요일로 앞당겨졌다. 바로 내일 MBS <추석특집 아이돌 스포츠 대회> 예선이 있어, 뮤닷 측에서 배려해준 것이었다.

“선배님들은 미국 언제 가세요?”

녹화 도중 휴식 시간. 어스래빗 대기실로 원제로 라일과 현강희가 놀러 왔다.

“금요일 아침에. 호 형은 <뮤직센터> 스케줄 있어서 토요일에 따로 출발하기로 했어.”

“그러고 보니 우리 처음 만나서 인사 나눈 게 작년 뉴욕 K-POP 콘서트 아니었나? 와, 벌써 1년이나 됐다?”

“시간 참 빨리 지나가는 것 같아요.”

“참깨는 잘 지내?”

‘참깨’는 지난번 함께 갔던 유기 동물보호소에서 현강희가 눈여겨보고, 이후 그의 가족이 입양한 고양이 이름이었다.

“네. 이젠 집에 잘 적응해서, 엄마 뒤만 졸졸 쫓아다니면서 이것저것 잔소리하고 참견한대요.”

“귀엽겠당. 사진 보고 싶당, 영상 보고 싶당.”

“제 핸드폰이 매니저 형한테 있어서···. 나중에 기회 되면 보여드릴게요. 아 참, 저 가람이 형 <누구SONG> 나온 거 봤어요.”

“어흑···.”

소파 팔걸이를 잡고 쭉쭉 스트레칭하던 박가람이 그대로 풀썩 무릎을 꺾으며 고개를 숙였다.

“더 잘할 수 있었는데···.”

대기실에 설치된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던 터라, 그들은 너무 사적이거나 민감한 대화는 나누지 않았다. 다음 주 열리는 소리구름어워즈 이슈도 그중 한 가지.

[아림 엔터, 올해 소리구름어워즈도 보이콧?!]

[작년에 이어 올해도 아림 엔터테인먼트 소속 아티스트들이 8월 9일 열리는 <2019 소리구름어워즈>에 불참한다.

아림 엔터는 아티스트의 건강관리 및 스케줄 문제로 불참하게 되었을 뿐 소리구름 측과 큰 갈등은 없다고 밝혔으나···(중략).]

기사엔 아직도 아림 엔터에 갑질 중이냐며 소리구름을 비난하는 댓글이 대부분이었다.

한율은 핸드폰으로 기사를 보며 작년 일을 떠올렸다.

이해원이 알려준 바에 따르면 작년, 어스래빗은 소리구름어워즈에서 글로벌 라이징스타상을 받을 예정이었다. 그러나 안인섭이 스폰서를 통해 훼방을 놓는 바람에, 수상에 실패한 거라고.

‘그러고 보니··· 지난번 일 이후 어떻게 됐는지 궁금하네.’

안인섭의 스폰서가 어디에서 뭘 하는 사람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느낌상 유상호의 스폰서인 L그룹 관계자보다 권력이 있는 것 같진 않았다. 그런데 FJ그룹 측에 유상호 관련 제보를 하며 그쪽에다 시비를 건 꼴이 되었으니, 상당히 처지가 난처해졌을 터.

‘내가 한 짓이긴 하지만.’

그래도 MOHE 전체를 표적으로 삼아 보복하진 않을 것이다. 이해원의 스폰서가 L그룹과 맞먹는 대기업, 이우그룹 회장의 손녀이므로.

스태프가 대기실 안으로 들어와 고했다.

“10분 남았습니다.”

“이제 가야겠네요. 무대에서 봐요.”

“응.”

“남은 무대도 파이팅··· 아니, 쉬엄쉬엄하세요, 어스래빗 여러분.”

“거절한다.”

한율은 거울을 보며 얼굴과 옷매무새를 점검했다.

‘어차피 내일이면 만날 수 있겠지.’

멀쩡하다면 말이다.

다음 날. 늘 아스대 녹화가 진행되던 경기도의 한 실내종합운동장에 이번에도 아이돌그룹 수십 팀이 모였다. 프로그램 협찬으로 들어온 똑같은 디자인의 운동복에다 신발을 신고.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음방에서 마주쳤거나 처음 보는 후배들이 차례차례 어스래빗에게 찾아와 인사를 건넸다.

어느새 데뷔 3년 차. 어스래빗 멤버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인사하러 오는 후배들이 많아진다는 걸 느끼며 화답했다.

“안녕하세요! 후배님들, 오늘 몸 다치지 않게 조심하시고, 파이팅하세요!”

“감사합니다!”

“하안유울아아, 우우서엉아아···!”

저 멀리서 스카이러너의 용맹이 느릿느릿 달려왔다. 활짝 벌린 두 팔을 흐느적흐느적 흔들며.

길우성이 어깨를 움츠리며 경계심을 보였다.

“이 형님 상태 왜 이래?”

“흐하하하아···.”

“안녕하세요, 선배님.”

덥석. 한율은 자신들을 한꺼번에 끌어안으려는 용맹의 두 팔을 잡아 막았다.

“잠 못 잤어요? 많이 피곤해 보이네요.”

“어···. 나 e스포츠 나가잖아. 그래서 그 핑계로 게임 실컷 했더니.”

이번 아스대부터 e스포츠 종목이 신설되었다. 그들 또래라면 어릴 적 한 번쯤은 다 해봤던 유명한 레이싱 게임과, FPS 게임. 어스래빗 멤버 중에선 박가람과 차남석이 나가기로 했다.

“그럼 양궁이랑 게임, 두 종목에 출전하는 거예요?”

“응. 아, 너희 내일 몇 시 비행기야?”

“아침 10시요.”

“오, 우리도 그런데. 같은 비행기 타면 좋겠다.”

“어?”

그때 길우성이 어느 곳을 보더니,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곤 이내 짓는 반가운 표정.

“티모다.”

어슬렁어슬렁 무리 지어 들어오던 V12. 그중엔 작년부터 몸이 안 좋다며 쉬던 티모도 섞여 있었다.

길우성이 그쪽을 향해 손을 흔들자, 어색한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티모도 길우성을 발견하곤 손을 슥 들어 화답했다. 한율도 그를 향해 가볍게 손을 들었다.

개막식 리허설 전, 마침 가까운 자리에 선 티모를 향해 길우성이 물었다.

“그동안 어떻게 연락 한번을 안 하냐. 잘 지냈냐?”

“그럭저럭. 넌 엄청 바빠 보이더라. 해외 투어도 다녀오고, 1위도 하고, 프로그램도 찍고.”

“건강이 최고야.”

“······?”

동문서답같은 대답에 티모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길우성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건강해야 연습 빡세게 하고, 여기저기 잘 싸돌아다닐 수도 있는 법이야. 그러니까 너도 건강을 우선으로 챙겨.”

작년, 마약 사건이 이 바닥을 한 차례 훑었을 때 사람들은 비슷한 시기에 휴식에 들어간 티모를 의심했다. 그리고 지금도 몇몇 아이돌이 티모를 의심 혹은 경계하는 시선으로 힐끗거리는 중.

길우성 역시 당시에 터진 마약 이슈와 티모가 관련되었다는 걸 눈치챈 듯 보였으나, 아무렇지 않게 그에게 잔소리를 읊었다.

“젊다고 방심하다간 큰일 난다? 스트레칭은 잘하고 있냐? 영양제도 꼬박꼬박 챙겨 먹고. 그렇다고 과잉 섭취하면 간 건강 나빠지니까 조심하고. 간 건강이 나빠지면, 어? 얼굴이 누레져요. 그러니까 적당히···.”

한율은 주위를 크게 둘러보았다.

분명 어제 이해원에게서 MOHE도 아스대에 참석한다고 들었는데, 아직도 안 왔는지 보이질 않았다.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MOHE는 개막식 리허설이 끝나고 나서야 아슬아슬하게 도착했다.

안인섭을 제외하고.

출연 계약금 들어왔대요

“인섭이 형, 몸이 안 좋아서 쉬기로 했어.”

“지난번 일 때문에요?”

오전 경기가 끝나고 점심시간 겸 쉬는 시간. 한율과 이해원은 어스래빗과도, MOHE와도 조금 떨어진 자리에 나란히 앉아 커피를 마셨다.

“아직도 정확히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는데, 그날 이후로 사람이 조금 멍해진 것 같다고 해야 하나···. 밥도 잘 안 먹고, 나한텐 이상한 걸 묻더라.”

“뭐라고요?”

“네가 보기에 나, 가끔 이중인격처럼 보일 때 있냐? 했던 걸 전혀 기억 못 한다거나··· 라고.”

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클라우드 서버에 잘 저장했던 파일이 전부 날아가고, 보낸 기억이 없는 제보 메일로 대기업 쪽 사람까지 찾아왔으니. 본인에게 문제가 있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 법도 했다.

“회사에선 중국에서 일하는 동안 받은 스트레스가 워낙 커서 심리적 불안 증세를 보이는 것 같다고, 형을 병원에 데려가 보려고 했는데 그건 본인이 완강하게 거부하더라.”

“무서워서 그런 게 아닐까요. 정말 본인에게 문제가 있단 말을 듣게 될까 봐.”

“그런 것 같아. 그래도 지금처럼 자기 자신을 의심하면서 계속 불안해하는 것보단 나을 텐데···.”

이해원의 얼굴에서 희미하게 아른거리는 걱정의 빛.

“형도 참 마음이 약해서 큰일이네요.”

이해원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모르겠어. 정말 얄밉고 싫은 사람인데, 막상 하루가 다르게 의기소침해지고 초췌해지는 걸 옆에서 보니까 마음이 좀 그래.”

“둘이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해?”

끙차. 풀썸의 효운이 옆에 앉으며 물었다.

“헤어팩 이야기요. 형은 어떤 제품 써요?”

“나 이탈리아 브랜드. 조금 비싸서 부담스럽기는 한데, 하루만 걸러도 뻣뻣한 개털처럼 변해서 매일 하고 있어.”

“저런.”

한율은 효운의 이마 선을 가만히 보며 덧붙였다.

“탈모 조심하세요.”

“···멱살 잡아도 돼?”

양궁 예선이 시작되기 전, 한율은 길우성, 라이언과 함께 대기실로 들어가서 옷을 갈아입었다.

등에다 날개를 달고 뺨에다 분홍색 볼 터치를 넣는 두 사람과 달리, 한율은 온통 시커먼 정장 차림이었다.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고, 새카만 뿔테안경에다 구두를 신었다. 여기에 나무로 만든 기다란 교편까지.

“써한, 넌 대체 무슨 컨셉이냐···.”

“나도 묻고 싶다.”

한율은 대답하면서 스타일리스트를 바라보았다. 스타일리스트가 뿌듯한 얼굴로 엄지를 척 들었다.

“······.”

“하뉼, 멋있어.”

“형, 나는?”

“우성이 넌 귀여워.”

“흐. 형도 귀여워.”

“아냐. 난 잘생겼어.”

“핑크 볼 터치 하고선 무슨 소리세요.”

이번 아스대부터 한율은 선수가 아닌, 현장 리포터 겸 코치라는 새로운 역할을 맡게 되었다. 특정인이 연속 엑스텐으로 금메달을 쓸어가는 것도 처음에나 통쾌하고 재밌지, 거듭될수록 경기의 긴장감이 떨어지는 것 같다며 MBS 측에서 제안했다.

“그나저나 이번부턴 농구 종목이 없어져서, 섭섭하지 않아?”

“괜찮아.”

지난번 설 특집 아스대 농구 준결승전에서 선수끼리 부딪쳐 다치는 일이 발생했다. 이처럼 부상의 위험도 있고, 예선을 치르는 데에 시간이 오래 걸려 선수들의 피로를 가중한다는 이유로 전부터 농구를 없애라는 항의가 있던 터라, 아스대 측은 그 일을 계기로 농구를 뺐다. 그 대신 신설된 게, e스포츠 종목.

“나중에 시간 되면 농구나 하러 갑시다, 형님.”

“내년에?”

“억. 너무 현실성 있어.”

양궁 출전 선수들은 모두 나와달라는 안내 방송이 울렸다. 세 사람은 밖에서 돌아가고 있는 카메라를 의식하여, 멋있는 척 몰입한 상태로 대기실을 나섰다.

[이번엔 2년 전, 혜성처럼 등장해 매번 양궁에서 금메달을 쓸어가는 어스래빗이 등장합니다.]

커다란 전광판에 고대 로마 복장에다 흰색 날개를 단 길우성과 라이언이 크게 잡혔다. 저 멀리서 이프림이 큰 환호성을 질렀다. 꺄아아!

[이번엔 천사 궁수 컨셉인가요? 귀엽고 사랑스럽네요. 그리고 후배들을 위해, 동료들의 승부 의욕을 꺾지 않기 위해, 기꺼이 이번 아스대부터 현장 리포터 겸 코치를 맡게 된 한율 씨.]

[원래는 스타일리스트가 군대 조교 복장을 입히려고 했대요. 그런데 아직 군대를 다녀오지 않은 사람이 하기엔 쪼오금 그렇지 않나, 이런 생각이 들어서 잘 나가는 학원 선생님 컨셉으로 노선을 바꿨다고 합니다.]

한율은 사방을 향해 웃으며 손을 흔들다가, 돌연 이프림을 향해선 엄한 표정을 지으며 교편으로 주의 주는 시늉을 했다.

꺄아아아악!

[팬들이 아주 좋아하네요.]

[학원에 저런 선생님 있으면 매일 성실히 출석할 것 같아요.]

[수강 등록 경쟁률도 어마어마하지 않을까요?]

한율은 모든 양궁 선수들이 입장을 마치고 자리 잡았을 때 카메라 앞에 섰다.

[이제 모든 선수가 입장을 마쳤습니다. 한율 씨, 처음으로 선수가 아닌 현장 리포터 겸 코치로 서게 된 소감이 어떻습니까?]

점심은 맛있게 드셨어요? 네, 먹었습니다. 경기 진행 요원과 진지하게 논의하는 척 이런 이야기를 나누던 한율은, 마이크를 들었다.

[저 혼자 멋진 차림으로 여기에 서 있으니까, 뭔가 기분이 짜릿해서 좋습니다.]

[쟤도 은근히 관종 끼가 있다니까.]

[어허. 감히 신궁에게 관종이라뇨!]

[죄송합니다, 제가 무례했습니다.]

[괜찮습니다, 일부 사실이니까요. 그래서 정태현 씨.]

MC석의 정태현이 당황한 표정을 과장되게 지었다.

[정태현 ‘씨’···?]

[저랑 이번에 내기 하나 하는 건 어떠세요?]

[무슨 내기요?]

[이번 양궁에서 저처럼 렌즈를 박살 내는 분이 나오면, 제 사비로 오늘 출연한 모든 아이돌에게 도레미 피자 쏘겠습니다.]

한율은 씩 웃으며 선수로 나온 아이돌을 돌아보았다.

[저는 우리 아이돌 동료들을 믿으니까요.]

허억! 아이돌들뿐만이 아니라 관중석에서 지켜보던 팬들도 술렁거렸다. 정태현도 놀란 표정을 짓다가, 눈을 크게 뜨고 테이블을 내리쳤다.

[콜! 그럼 저는 안 나온다에 치킨 쏘겠습니다! 치즈볼이 포함된 비싼 세트로!]

렌즈가 박살이 나든 안 나든 고칼로리 축제다.

아이돌들이 일제히 크게 함성을 질렀다. 와아아!

반면, 관중석에 앉은 어스래빗 멤버들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저 내기 사전에 약속된 거 아니지? 괜찮을까? 최소 몇백만 원은 나올 텐데···.”

“<서울 구미호> 출연 계약금 들어왔대요.”

“아니, 그래도···.”

“회사랑 나누고도 5억 넘게 들어왔다던데요.”

차남석의 대답에, 가만히 눈을 깜빡거리던 유호와 이건우는 다시 한율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러곤 아직 끝나지 않은 함성에 힘을 보탰다.

“와아아···!”

“서한율, 플렉스!”

아스대 예선 녹화 다음 날인 2일 새벽.

유호와 강보배, 라이언을 제외한 어스래빗 멤버들은 인천국제공항으로 향했다. 유호는 <뮤직센터> MC 스케줄로, 트레리안은 곡 작업을 핑계로 유호와 내일 함께 출발한다며 남았다.

공항에는 인파가 어마어마했다. 뉴욕 K-POP 콘서트 출연팀 대부분이 오늘 출국하여, 그들의 사진을 찍거나 가까이에서 보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이었다.

“한율아, 사랑해···!”

“다치지 말고 무사히 잘 다녀와!”

“래빗즈 파이팅!”

개중엔 WB래빗 아이돌 전체를 응원하는 사람도 있었다. 뉴욕 K-POP 콘서트에 크리스탈 래빗, 드림래빗, 어스래빗 세 팀이 모두 나가는데, 탑승할 비행기가 같아 비슷하게 우르르 도착한 까닭이었다.

드림래빗은 해외에서 열리는 큰 규모의 K-POP 콘서트에 참여하는 것도, 이렇게 많은 카메라 세례를 받으며 출국하는 것도 처음이라 상당히 얼떨떨하거나 긴장된 눈치였으나, 크리스탈 래빗 멤버들이 잘 챙겨주어서 별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우리 애기들 많이 놀랐찡?”

출국장 안으로 들어가고 나서야 잦아든 소음과 시선들. 크래의 채아가 드림래빗 멤버를 끌어안으며 토닥토닥 달랬다.

“경보 연습한다 생각하고, 휙휙 빨리 걸으면 됑. 요렇게, 이렇게. 그러면서 카메라에 예쁘게 찍히려면 얼굴 각도는 이 정도.”

“고마워요, 언니.”

그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던 박가람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같은 기획사 선후배 간의 모습이 참 보기 좋구먼. 허허.”

“지금 있는 남자 연습생 후배들은 언제쯤 데뷔할까?”

“원제로에 있는 승준이랑 지욱이가 합류해야 할 테니까··· 빨라도 내년 가을이나 겨울 아닐까?”

“음.”

비즈니스 라운지에는 먼저 도착한 팀들이 있었다. 어제 아스대 예선 녹화가 끝난 게 자정 즈음이라 다들 피곤해 보였다. 숙소에 들어갔다가 두세 시간 겨우 자고 여기로 왔을 테니.

어스래빗 멤버들은 다른 팀에게 가볍게 묵례하곤, 빈자리에 앉아 조금이라도 잘 준비를 했다. 한율도 귀에는 무선 이어폰을, 눈은 수면안대로 가리고 소파에 편히 몸을 묻어 잠을 청했다.

비싼 비즈니스석 항공권까지 끊고 라운지까지 따라 들어온 사생들이, 멀리서 카메라로 찍든 말든 무시하며.

인천에서 10시에 탄 비행기는 14시간을 넘게 날아, 뉴욕 현지 시각으로 아침 11시 20분에 도착했다. 뉴욕 공항에도 K-POP 콘서트 출연팀을 보기 위해 몰려든 팬이 아주 많아, 몇몇 팀은 다른 통로를 이용해 빠져나가기도 했다. 어스래빗도 그중 한 팀이었다.

“어제 방송 반응 좋다.”

“히힛. 그레이트7 팬분들이 잘해줘서 고맙대.”

호텔로 가는 버스 안. 멤버들은 비행기에 있느라 본방 사수를 놓친 5화 반응을 살폈다. 한율은 너튜브에 올라온 [Rediscovery[5화] ‘섬(원곡:그레이트7)’-어스래빗(EarthRabbit)] 영상을 클릭했다.

어둑한 무대 위. 새하얀 블라인드에 부부싸움을 하는 듯한 남녀의 그림자, 신나게 뛰어노는 다른 학생들의 그림자가 지나간다. 그러나 블라인드 앞. 헤드셋을 쓰고 홀로 책상 앞에 앉은 차남석의 얼굴엔 지독한 외로움으로 가득했다.

영상 하단 자막.

[섬(원곡:그레이트7)-어스래빗]

[편곡: 유호, 장재천]

[랩 작사: 강보배, 라이언]

[안무: 이건우, 길우성, 황현정]

-[어스래빗 덕분에 그레이트7이란 새로운 보이그룹을 알게 되었습니다! 원곡도 훌륭하고 어스래빗 버전 편곡도 훌륭하네요! 두 팀 모두 잘 됐으면 좋겠습니다☺]

-분위기 끝판왕

-무슨 뮤지컬 보는 것 같네

-케이팝고인물들 집합해라 어스래빗이 미래다

-[본방송 못 보신 분들은 꼭 VOD로 봐주세요. 이 아이들이 원곡 분위기를 최대한 살리면서 자신들의 스타일로 만들기 위해 직접 편곡하는 모습이나 랩 가사를 쓰는 모습, 퍼포먼스를 고민하고 연습하는 모습을 보면, 이 무대만 봤을 때보다 더 큰 감동을 느낄 수 있을 겁니다! :)]

-너희 팬이 될 수 있게 해줘서 고마워

-미래의 내가 알려주었다. 강의는 빠져도 여기엔 매일 출석할 거라고

ㄴ아니 이분 프사가 스타믹스 지은님이신데..?

ㄴ스타믹스 팬튜브에서 매일 보던 닉이ㅋㅋㅋ 님 여기에서 뭐하세욬ㅋㅋㅋ

ㄴ남 말 할 처지가 아니신데?

방송 리뷰 기사 등을 살펴보니, 한 달 전 녹화 당시 박가람이 ‘하울링’의 진정을 밀어내는 모습은 적절하게 편집된 것 같았다. 차남석이 카메라에 대고 한 고자질만 부각된 걸 보면.

-진정ㅋㅋㅋ 대체 애들한테 무슨 야한 이야기를 얼마나 했기에 애들이 부담스럽다며 피하냐고ㅋㅋㅋㅋ

그러나 웃어넘기는 다수의 네티즌과 달리, 커뮤니티 사이트의 하울링 게시판은 분위기가 썩 좋지 않았다.

[바로 앞에 ㅇㅅㄹㅂ 영상보고 우리 갤주들 영상 봤는데 하..]

[세트 비용 기획사가 다 부담하는 거라던데]

[우리 애들 잘했는데 분위기 왜 이럼?]

[고양고양 일 안 하냐?]

[※쓴소리 주의-진정아 이름값 좀 하자]

[다른 출연자들 SNS 보면 느낌 오지 않냐?]

사소한 계기일 수도 있음

[우리 애들 팔로우가 제일 적은 게 뭘 뜻하는 것 같냐]

[10부작 중 5화까지 보니까 확실해짐]

[들러리인 거 모르는 사람 있었음?]

[에반데]

부정적 감상이 담긴 제목들. 작성된 지 10분도 안 되었으나, 벌써 백여 개 넘는 댓글이 달린 게시글도 있었다.

[제목: 어제 방송 보고 회의감 느껴지더라(장문주의)]

[일단 앨범이랑 굿즈 인증 박고 시작함.

(사진)

어제 방송 보니까 매일 빚에 쪼들린다던 모 기획사도 이번에 아주 이 악물고 편곡이랑 세트에 공들인 거 티 나더라

그런데 우리는 뭐 안 절박함?

아무리 구린 노래라도 돈 더 들여서 전문 편곡가랑 퍼포 디렉터 불러서 애들 능력 잘 보여줄 생각은커녕 거의 방치 수준이더라? 앞의 팀 무대 본 다음에 우리 세트 보니까 하.. 유치원 재롱잔치 세트 수준이었구요

여기에 진정 부담스럽다는 얘기까지 나왔네?

웃으면서 얘기하니까 장난 같음? 야한 얘기 너무 해서 부담스럽다곤 하지만 정말 그것뿐이겠냐?

다 알잖아 왜 모르는 척해

진정 술자리 좋아하고, 전에 여돌이랑도 같이 술 마시다가 걸렸었잖아

다 알잖아 이ㄴ들아

그냥 우리 가수니까 눈 감고 아웅 했었던 이런저런 단서들ㅋ

그러니까 한두 명 빼곤 다른 팀 애들이랑 아직도 서먹한 거고ㅋㅋㅋ 걔네도 아이돌인데, 술이랑 여자에 관심 있는 아이돌이랑 친해지고 싶겠냐 솔직히?

지금 정말 팬들만 간절한 거야?

좀 뜨라고 밀어주고 응원하고 있는데 기획사는 손 놓고 방관 중이고, 성적 낮았던 팀도 어떻게든 이번 기회에 올라가려고 발버둥 치는데 애들은 야한 얘기나 시시덕거리면서 밀려나고???

장난해?

남들이 우리 애들 망돌이라고 개무시할 때도 기회가 안 주어져서 흐름을 잘 못 타서 그런 거라고 실드치던 게 다 허무해지더라

ㅈ나 사소한 계기일 수도 있음

그런데 사소한 계기로 둑이 무너지는 법임

애들도 방송 출연한 거 자체로 안주하는 게 보이는데 팬이라고 뭐 어쩜?

의욕 없는 돌을 멱살 잡고 끌고 가는 게 팬이 할 일임?

이건 뭔가 단단히 잘못됐다고 생각하는데?]

초반에 달린 댓글은 글쓴이의 감상에 반박하는 의견, 팬심이 사라졌으면 조용히 떠나라는 날카로운 반응이나, 조심스럽게 동조하는 의견뿐이었다. 그러나 중간부턴 원제로 팬들이 등판하여 싸움이 벌어졌다. 본문에 있는 ‘구린 노래’란 말 때문이었다.

-우리 애들 노래 거지같이 망쳐도 참고 있었는데 원곡이 구리다고? ㅋㅋㅋㅋ 하울링이 왜 지금도 하꼬인지 잘 알겠다.

한율은 아래로 내릴수록 살벌해지는 댓글을 훑다가 ‘목록’을 눌렀다. 하울링 게시판은 어느새 원제로 팬들의 난입으로 ‘New’ 표식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반면, 서로의 곡을 커버한 어스래빗과 그레이트7 게시판은 하하호호 평화로웠다.

[[그레이트7]에서 왔습니다! 원곡 멋지게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어스래빗]에서 왔습니다! 원석님들 얼른 올라가셔야죠ㅎㅎ]

“그나저나 올해는 소리구름하고 한 주 떨어져서 다행이다. 작년엔 정말 정신없었잖아.”

“올해엔 소리구름에서 상 받을 수 있을까?”

“너무 기대하진 말자.”

“여러분.”

앞자리에 탄 오 팀장이 멤버들을 돌아보았다.

“PD님이 너희도 오늘 잠깐 리허설 하는 게 좋겠다네요.”

“세 사람이나 없는데 괜찮을까요?”

“일요일에도 리허설 하는 거죠?”

“네. 당연히 일요일에도 할 거고, 오늘은 카메라랑 이동 동선만 가볍게 체크하는 거니 괜찮을 겁니다.”

이건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차하면 팀장님이랑 매니저 형들이 올라와서 맞춰주면 되니까 뭐.”

“팀장님이 무대에···?!”

“오, 팀장님이 무대로 올라오시는 건가?”

리허설에서 빠지는 멤버가 있으면, 안무가나 매니저가 해당 멤버의 리허설 조끼를 입고 대신 무대에서 동선을 맞추기도 한다.

앞으로 고개를 돌린 오 팀장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대답했다.

“호텔에서 점심 먹고 가겠습니다.”

“네에.”

한국 날짜로 토요일 아침. 공항에 거의 도착할 때 즈음 일어난 유호는, 단톡방에 올라온 영상을 보곤 웃음을 터뜨렸다.

“이것 봐봐. 팀장님이 우리 대신 리허설 무대 올라가셨나 봐.”

영상 속에선 오 팀장이 아주 진지한 얼굴로 삐걱삐걱, 어스래빗의 안무를 추고 있었다. 정장 위에 [어스래빗/유호] 리허설 조끼를 걸치고.

“중요 포인트랑 시선은 전부 잘 맞추시는데?”

“우리 영상 엄청 많이, 자주 보시잖아.”

라이언이 조수석에 앉은 조유찬에게 물었다.

“형도 출 수 있어?”

“얼추? 옆에서 수십 번을 봤는데 모를까.”

“승우 형도 잘 춘다. 장전이 형은 왜 이렇게 덩실거리지···.”

큭큭. 세 사람은 영상을 보며 웃다가 거울로 얼굴 상태를 점검했다. 점점 가까워지는 공항 로비 출입구 앞, 카메라를 든 사람들이 잔뜩 모여있었다.

“나 협찬받은 옷 입고 공항 사진 찍히는 거 처음인데, 괜찮을까?”

“차에서 내리면, 우리가 짐 챙기는 동안 기자들한테 웃으면서 손 흔들어줘. 그 정도만 해도 괜찮아.”

“네.”

어스래빗! 어스래빗 차! 밖에서 번호판을 보고 알아차린 어스래빗 팬들이 흥분해서 외쳤다. 사람들이 일제히 카메라를 들었다.

드륵. 차 문이 열렸다.

차카차카차칵!

“토끼야악!”

“유 리더! 트레리안! 사랑해엑!”

세 사람은 경호원과 매니저, 스타일리스트에 이어 차에서 내렸다. 스태프들이 차에서 짐을 내리는 동안 언론 매체 로고가 부착된 카메라를 향해 손을 흔들거나 미소 짓다, 본인들의 개인 캐리어를 직접 챙겨서 공항 안으로 들어갔다.

극성맞은 팬들과 카메라 셔터 소리가 그들을 둘러싼 채 우르르 움직였다.

소란은 출국장으로 들어오고 나서야 가라앉았다.

“···애들은 지금쯤 뭐 하고 있을까?”

“저녁 먹고 호텔에서 쉬고 있지 않을까? 나중에 라운지 들어가면 전화···.”

이제야 조용해져 대화를 나누려 할 때였다.

“어이!”

뒤에서 화가 잔뜩 난 목소리가 쩌렁쩌렁 유호 일행의 주의를 끌었다. 놀라 돌아보니, 한 중년 남성이 유호 일행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의 곁에는 부인으로 보이는 중년 여성, 80세 정도 되어 보이는 노부부가 함께 있었다.

“딴따란지 뭔지는 몰라도, 공공장소에 저런 정신 나간 것들 우르르 끌고 와서 민폐나 끼치면 돼?! 어?!”

“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소란을 일으켜서 죄송합니다.”

일행은 멤버나 매니저, 경호원 할 것 없이 남성을 비롯해 다른 이용객들을 향해서도 고개를 숙였다.

“우리 아버지가 그쪽이 몰고 온 사람들 때문에 놀라 심장이 벌렁거리신다는데 어쩔 거요, 어?”

조유찬이 앞으로 나서서 허리를 깊게 숙였다.

“불편을 끼쳐드려 정말 죄송합니다.”

유호와 강보배, 라이언도 재차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거참.”

남성은 뭐라 더 말하려다가 크게 한숨을 쉬곤, 혀를 차며 옆을 지나쳤다.

“사내새끼들이 꼬락서니 하곤. 창피한 줄을 몰라.”

“···죄송합니다.”

이번엔 정도를 벗어난 비난이었으나, 유호 일행은 말이 심한 것 아니냐 따지는 대신 남성의 일행과 다른 이용객들에게 죄송하다고 사과했다. 반박해봤자 일만 커진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었다.

“······.”

차카차카차칵. 이 순간에도 세 사람이 당황해하는 모습 또한 좋다고 찍어대는 사생들과 홈마도 있고.

“조금 전 들은 그 말, 너무 신경 쓰지 마.”

비즈니스 라운지. 다른 이용객들과 떨어진 자리에 앉으며 유호가 두 사람에게 말했다.

“우리, 창피한 꼬락서니 아니야.”

“응, 신경 안 써.”

라이언이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잘못을 넘고, 상대방이 책임··· 안 지는 표현 자유? 그런 비난은 잡소리잖아. 진지하게 들을 필요 없어.”

“······.”

멍하니 눈을 끔뻑거리는 유호를 향해 강보배가 슥 웃었다.

“나도 요즘 라이언이랑 얘기 나누다 보면, 가끔 얘가 미국인이란 사실을 잊어버려.”

“정말 공부 열심히 했다, 라이언.”

라이언이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한국 온 지 4년 됐어. 이 정돈 껌이지.”

그때 비즈니스 라운지로 퍼플아워의 진은수와 매니저가 들어왔다. 함께 <뮤직센터> MC를 맡는 동료인 터라, 유호는 시선이 마주치자 손을 들어 인사했다. 강보배와 라이언도 고개를 돌렸다가 그쪽을 향해 꾸벅거렸다.

진은수도 그들에게 조용히 묵례하곤, 매니저와 빈자리로 가서 앉았다.

“매니저분이랑 둘이서만 따로 가는 건가?”

“다른 퍼플아워 멤버들은 어제 출발했대.”

“심심하겠다.”

라이언이 고개를 갸웃하더니 소파에 바로 앉았다.

“그래도 멤버들이랑 있을 때보단 편해 보여.”

“응?”

“그렇게 보일 수도 있지만···.”

유호는 이틀 전 있었던 아스대 예선 녹화 당시를 떠올렸다. 어스래빗과 퍼플아워는 조금만 고개를 돌리면 서로가 잘 보이는 위치에 앉았었다.

“입 밖으론 쉿.”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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